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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그 이후부터는 노턴 역본이 재 발행되지 않았다. 전 작품을 영어로 번역한 다음 역본은 죤 알렌(John Allen, 1771-1839)의 것이다.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by John Calvin, translated from the Latin and collated with the author's last edition in french. London: J.Walker, 1813.
알렌(Allen)은 핵크니에 있는 반국교의 아카데미의 학장으로 역임한 평신도였다. 그의 다른 저서들 중에는 논란의 여지가 있는 초기 저서로서 "The Fathers, the Reformers, and the Public Formularies of England in Harmony with Calvin…(1811)"이라는 제목의 책이 있고 현대 유대교에 대한 논문(1816)이 있다. 알렌이 번역한 대부분은 라틴어 판을 기초한 것이고 불어 판을 참고하여 개정한 것이다. 그는 두 가지 판을 모두 참고하였다. 비록 그가 노턴의 번역판을 "매우 낡고 거칠고 모호하다"고 일축하였지만, 번역 원칙은 양자 사이에 별로 차이가 없었다. 그는 "직역과 의역의 중간 입장을 고수하였고 라틴어와 영어의 각 관용어구들이 허용하는 한 원본의 문체를 입각하려고 노력하였다"고 말한다. 결과적으로 그의 번역은 탁월하지는 않을지라도 성실한 번역이 되었고, 칼빈의 격렬한 문장들과 생생한 비유들을 그대로 사용하면서 원문의 의미에 영향을 끼칠만한 오역이 거의 없다는 것이 특징이었다. 알렌의 번역은 특히 미국에서 계속 출간되었으니 1936년까지 30회에 걸쳐 재 발행되었다. 칼빈 탄신 400주년을 기념하는 1909년 판에는 "On the Literary History of Calvin's Institutes"라는 워필드(B.B.Warfield)의 귀중한 논문이 첨가되었고(칼빈의 초판이 출판된 후 400년이 된 시기를 맞추어 펴낸), 1936년 판에는 토마스(Thomas C. Pears, Jr.)가 "An account of the American Editions"이라는 논문을 첨가하였다. 알렌의 번역판은 미국 편집자들에 의해 약간씩 몇 차례에 걸쳐 개정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개정은 1841년에 죠셉(Joseph Paterson Engles)이 개정한 것이다.
알렌의 번역판의 독주기간은 길지 않았다. 1845년에 다음 제목의 번역판이 발행되었다.
The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by John Calvin.
A New Translation by Henry Beveridge.
위 제목의 역서는 칼빈 번역회(Calvin Translation Society)의 후원으로 에딘버러(Edinburgh)에서 출판되었다. 비버리지(Beveridge, 1799- 1863)는 목회자가 되려고 하였으나, 후에 그는 법률교육을 받았으며 저술을 본업으로 하였다. 그가 칼빈회에서 번역한 것들 중에는 1844년에 3권 1질로 발행된 칼빈의 "종교개혁에 대한 논문집"이 있다. 후에 그는 다른 학문에 전념하여 "인도 역사의 이해"라는 저서를 출간하기도 하였다. 그가 발행한 강요는 3권으로 되어 있고, 서론부분에는 미국과 영국에서 발간된 후대 인쇄소들에 의해 누락된 항목들이 실려 있다. 그 항목들을 누락시킨 것은 손실임이 분명하다. 그중 하나는 칼빈회의 서기인 알버트 핏캐른(Robert Pitcairn)이 기고한 "Catalogue Raisonn of the Earlier Editions"이다. 이것은 우리가 앞에서 언급한 판본들 대부분을 유용하게 서술한 것으로서, 상당부분은 핏캐른이 상세하게 검토한 것들이다. 그러나 일부분이 누락된 것들도 있고 약간의 결함들도 있어서 그가 만든 목록은 완전한 안내서가 되지는 못한다. 그의 목록에는 강요 요약판 3권이 언급되는데, 그 가운데 하나는 단역으로 잘못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초기 네덜란드어 판들과 독일어 판들에 대한 그의 정보도 결코 포괄적인 것은 아니다. 비버리지가 쓴 서문의 한 특성은 그와 그의 동료들이 이용할 수 있었던 초기 판들의 제목 쪽을 잘 택하여 복사하여 적당하게 수록해놓은 것이다. 이것들은 1536, 1539(Alcuin 변형판), 1545, 1559, 1561년 라틴어 판과 1545년 프랑스어 판, 1557년 이탈리어 판, 그리고 1597년 스페인어 판에서 발췌 수록한 것들이다. 마지막 두 가지 역자의 서문이 처음 인쇄된 대로 다시 복제되었다.
비버리지가 노턴의 번역판을 낮게 평가하였다는 것은 이미 이야기한 바 있다. 아주 특이하지만, 그는 알렌에 대해서는 조금도 언급 않는다. 그 자신의 번역판은 질이 균일치 못하다. 몇몇 부분에서는 그가 사용한 초기 번역서보다도 현재의 용법이 상당한 거리가 있다고 생각된다. 또 그 자신이 노턴에 대해 "라틴어식 영어"라고 비판했던 바로 그 비판을 야기시키는 당연한 구절들도 있다. 어느 면에서 그는 먼저 번역한 두 번역자들보다도 정확하지 못한 면도 있고, 약간씩 빠뜨린 부분들도 많고 분명히 잘못 번역된 부분도 약간 있다는 것에 대해 비난을 받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많은 부분들의 번역은 대체적으로 훌륭한 것이며, 비버리지는 칼빈의 수사학적 능력을 의식하고 독자들에게 세련된 문장표현으로 그것을 그대로 전달하는데 성공하였다.
7.
강요의 분량이 너무 많아 부담스러워, 수많은 요약 판들이 일찍부터 출간되었다. 강요와 똑같이 이 요약 판들도 처음에는 라틴어로 발행되었고 그 후에는 여러 나라 언어로 출판되었다. 최초의 요약 판중의 하나는 영국의 칼빈주의 교리 순회 설교자로 인기가 대단한 버니(Edmund Bunney/Bunnie, 1540-1619)가 편찬한 것으로서 그 제목은 [Institutionis Christianae Religionis…Compendium(London, 1576)이다. 그것은 [The Institutions of Christian Religion…compendiously abridged by Edmund Bunnie, bachelor of divinity…(London, 1580)]이라는 제목으로 메이(Edward May)가 번역하였다. 이 책은 발췌집이 아니라 주로 버니 자신의 말로 축소 요약한 것이다. 그러나 그 책은 곧 들론(William Delaune, Laneus/Launeus/Lawne)이 각고의 노력 끝에 만들어낸 [Institutionis Christianae Religionis…Epitome(London, 1583)]으로 대체되었다. 들론(d.1610)은 위그노파 망명자였고, 그의 책을 인쇄한 사람은 그의 친구이며 종교가인 보트롤리어(Thomas Vautrollier, d.1587)였다. 그는 1576년에 영국 유일의 라틴어 판 강요를 발행하였다. [The Epitome]은 저자의 언어를 많이 포함하고 있는 요약의 대표적 모범이다. 이 요약판에는 8절판 크기로 371쪽에 달하는 강요의 자료들이 1559년 판의 번역을 제일 근접하고 균형 있게 따르면서 수록되어 있다. 칼빈이 그의 반대자들의 견해를 서술, 반박하는 곳에서 요약 판의 본문은 반대와 답변을 대화 형식으로 배열하였다. 처음에는 쪽이 매겨지지 않은 21쪽에는 강요의 논증 과정에 관한 "총목록"이 실려 있는데, 그것들은 괄호로 묶은 절과 소절의 구조로 세밀하게 나타난다. 들론은 그의 Epistola Nuncupatoria 또는 조폐국 국장인 마틴(Richard Martin)에게 드리는 헌사에서 그의 책을 가리켜 "신의 마음에 드는 정원에서 가져온 꽃다발"이라고 한다. 난외의 여백들은 세심하게 준비된 분석적인 주(註)를 하는데 이용된다. 이 책은 25쪽의 색인이 실려 있다. 이 책은 페더스톤(Christopher Fetherstone, Edinburgh, 1585)의 완역으로 출판되었는데, 이 사람이 훌륭하게 번역한 칼빈의 사도행전 주석도 똑같은 해에 나왔다. 강요 요약 판의 발행은 궁핍한 학생이나 또는 읽고는 싶지만 시간이 부족한 독자들에게는 뜻하지 않는 행운이었던 것이 틀림없다. 1650년에는 들론의 요약 판이 네덜란드어로 번역되었고 1837년에는 영어판이 재 인쇄되었다.
널리 반포된 또 다른 라틴어 요약 판은 특출한 개신교 신학자이며 낫소(Nassau)의 헤르본 아카데미(Academy of Herborn)의 성경학자인 피스카토르(John Piscator/Fischer1546-1625)가 요약한 것이다. 피스카토르는 올레비아누스(Caspar Olevianus)의 조교이며 계승자였고, 올레비아누스가 정리한 "요약판"을 수업에 활용하였다. 그의 [Aphorismi doctrine Christianae maximam partem ex Institutione Calvini excerpti sive loci communes theologici,(Herborn, 1589)는 학생들의 연구 토론을 위해 편집된 것이며, 그러한 요구에 의해서 1615년까지 무려 8판을 거듭하였다. 그것의 3판을 홀랜드(Henry Holland)가 [Aphorismes of Christian Religion in a verie compendious abridgment of M. J.Calvin's Institutions]라는 제목으로 영역하였고 리차드 필드(Richard Field)가 1596년에 런던에서 발행하였다. 피스카토르의 부제를 따라 본문은 28개의 장으로 분류되었다. 각 장에는 번호가 매겨진 일련의 "격언(aphorisms)"들이 포함되어 있는데, 최소가 8개, 최대가 34개에 이르는 등 다양하다. 격언의 길이는 한 문장에서부터 길면 몇 쪽에 이르기도 한다. 피스카토르는 논제라는 말보다 불확실성을 시사하는데 본문에 제시된 진술들은 의심이나 논란의 여지가 전혀 없기 때문에 그 말보다는 aphorismi라는 단어를 선택하였다고 설명한다.
다른 강요 요약 판이 그 후 곧 출간되었는데, 이것은 라이덴 월룬 대학(The Walloon College at Leiden)의 평의원인 콜로니우스(Daniel Colonius)가 펴낸 [Analysis paraphrastica Institutionum theologicarum Johannis Calvini](Leiden, 1628)이다. 콜로니우스는 엘제비르(Elzevir) 인쇄소장의 사위였고, 편집자가 죽은지 1년이 되었을 때 엘제비르는 작은 활자로 아주 산뜻하게 인쇄된 12절판 크기의 책을 발간하였다(Leiden, 1636). 콜로니우스는 그의 책을 41개의 "논쟁"으로 분류하였지만, 원래 강요의 장점을 밝히고 주로 칼빈의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Analysis paraphrastica]에 대해 워필드(Warfield) 박사는 학생들의 참고서로 높이 평가하였으나 들론의 책과는 다르게 거기에는 난외 표제와 색인이 없다. 적은 950쪽에는 대략 강요의 삼분의 일을 포함하며, 이것은 간단한 요약 판보다는 조금 많은 분량이다.
8.
칼빈의 걸작 기독교 강요는 개신교 신학의 정통적 진술로 매우 중요시된다. 그 저술은 주제의 범위가 기독교 신학의 전 분야를 망라하게 되기까지는 끊임없는 노력과 심혈을 기울였다. 그 저술의 포괄성이라는 면에서 당대의 여러 다른 신학 논문들을 능가한다면, 그것은 구성 순서와 균형 그리고 판단의 실질적인 일관성에 있어서 매우 탁월하기 때문이다. 완성된 저작에는 수없이 확대되고 내용들이 재배열된 사실을 보여주는 흔적들이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책의 질서정연함은 설득력과 힘으로 얻어진 것은 아니다. 그것은 활력 있고 도전적인 책으로서 독자에게 인격을 요구한다. 이것은 강요가 저자 자신을 사로잡고 있는 내용을 설득력 있고 끈질기게 나타났기 때문이다. 회심하던 때를 생각하면서 칼빈은 "하나님께서 내 마음을 복종시켜 가르침을 잘 듣도록 온순하게 하셨다."라고 썼다. 그 깊고 끊임없는 내적 변화의 결과로서 그는 항상 하나님을 의식하는 사람으로 살고 저작활동을 하였다. 강요의 첫 장에서 그는 '하나님은 어떻게 알려지는가?' 라는 주제를 감동 깊게 표현했다. 그의 저서 기독교 강요 전체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위엄, 주권적 권능, 그리고 우리 인간들과 현재 함께 하시는 것에 대한 경외심으로 가득 차 있다.
하나님에 대한 이러한 경외심은 그에게 있어 사변적인 사유의 결과도 아니며 사변적으로 생각하게 하는 동기도 아니다. 그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사변하는 지적 방종을 거절하였다. 만일 그에게 이러한 능력이 있었다 해도 의식적으로 억제하였다. 그는 자신과는 관련 없는 탐구자의 입장을 결코 취하지 않았다. 그의 마음을 사로잡은 문제는 하나님 스스로 어떤 분이시냐 하는 것그의 견해로는 인간의 능력을 초월한 주제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으신 세계 및 우리들과 관련하여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냐는 문제였다. 하나님은 인간이 자랑스럽게 이성으로 하나님을 찾아내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너무 미약하기 때문에 알려지지 않으신다. 오히려 하나님은 예배와 사랑과 순종으로 그분의 뜻을 거룩한 말씀에서 배우겠다고 의지하는 사람들에게만 자신을 알려주신다.
칼빈의 정신세계는 굳건하게 결합된 교리적 논리 체계를 여러 부분으로 만들어내고 조립하는 효율적인 공장처럼 생각하는 선입관을 가지고 칼빈의 대표작인 강요를 대한다면, 이러한 억측이 허무맹랑하다는 것을 독자들은 즉시 깨달을 것이다. 사려 깊은 독자는 저자의 지성과 그의 모든 영적 및 감정적 존재까지도 그의 저작에 수록되어 있음을 알고 있다. 칼빈은 그 후에 시드니 경(Sir Philip Sidney)의 "네 마음을 보라, 그리고 써라"라는 아름다운 표현을 훌륭하게 구사하였다. 또한 그가 "마음이 신학자를 만든다"는 고대 격언의 좋은 예증을 든다. 그는 직업적인 신학자가 아니며 정연하게 사고하는 천부적 재능을 가진 그의 믿음이 함축된 글로 표현하고자 하는 충동에 사로잡힌 독실한 신앙인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는 그의 책을 가리켜 "Summa Theologiae"(신학 대전)이라 하지 않고 "Summa Pietatis"(경건 대전)이라고 하였다. 그의 정신력의 신비는 바로 경건에 있으며, 그 경건의 산물이 바로 그의 신학이다. 즉, 그의 신학은 마침내 경건을 표현한 것이다. 그의 과제는(그의 원래 제목을 언어로 표현한다면) "경건의 총체와 구원 교리에서 알아야 하는 제반 사항"을 설명하는 것이었다. 아주 자연스럽게, 그의 본서를 준비하면서 유일한 목적이 "순수한 경건론을 유지함으로써 교회를 유익하게 하는 것"이라고 그의 라틴어 최종판 서문에서 주장하였다.
칼빈의 입장에서는, 경건은 교리와 불가분의 관계이며, 모든 경험은 사색에 대한 도전과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그는 사유 능력 이면에 있는 경험들을 알고 있으며, 때로는 우리들을 최전선으로 이끌고 가는데, 그곳은 사고의 능력이 미치지 않으며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신비가 있는 곳이다. 이 지점에서 그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은 경건한 마음을 가지고 계속 전진하라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그는 최고의 신비인 성만찬의 신비를 그의 부족함"나의 어린애 같은 작은 자"로 측량하지 않을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그러나 그는 독자들에게 성만찬에 대한 그들의 이해를 자신의 한계들로 인해 억제하지 말고 그들을 인도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높은 이해의 경지에 이르도록 노력하라고 권면한다. 그러나 그와 같이 인식된 최전선 안에서 그는 아주 명확한 확신을 가지고 저술하고 있다.
현대인들에게 있어서 "경건"이란 말은 역사적 함축성과 지위를 모두 상실하고 말았다. 이 말은 이제 비효과적이며 종교적인 감상적 태도나 위선적인 겉치레를 연상케 하는 것이 되었다. 칼빈과 그의 동시대인에게 경건이란 말은 고대의 이방 저술가들이나 기독교 저술가들에게 불쾌한 함축이 전혀 없는 진실한 단어였다. 경건이란 가족이나 국가 또는 하나님께 신실하게 헌신하는 것, 즉, 칭찬할만한 정도를 지키는 것이다. 칼빈은 한결같이 주장하기를, 경건은 하나님에 관한 건전한 지식을 얻기 위한 제일 먼저 행할 요건이라고 하였다. 처음으로 이 원칙을 말할 때, 그는 경건을 "하나님께서 주신 유익들을 앎으로써 생겨나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결합된 경외심"이라고 간단하게 정의하였다. 경건이란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돌리고 자신을 양육하는 것은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의 돌보심이며 하나님은 우리들이 누리는 모든 선한 것을 지으신 분임을 인정하는" 것으로 표현된다. 경건(pietas)이란 말은 칼빈의 저작에서 매우 자주 사용되며, 강요에서는 세속적인 지성주의의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우리를 일깨워주기 위해 경종을 울리는 것처럼 되풀이해서 나오고 있다. "칼빈에게 있어 종교와 경건은 하나이고 동일한 것"이라고 에밀 도머그(emile Doumergue)는 말한다. 미첼 헌터(Mitchell Hunter)는 말하기를, "경건은 그의 기본적 인격이다. 그는 하나님께 사로잡힌 사람이었다. 학문 자체로서의 신학이란 전혀 그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의 종교적 의미는 모든 것을 옹호하는 골격으로서 신학에 전념하였다."고 한다. 감사와 사랑과 순종은 건전한 신학의 필요 불가결한 조건으로 종교적 태도에 포함된다. 우리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덕택이며", 칼빈의 저서 여러 곳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대면하게 되며, 하나님에 관한 관념들, 즉, 균형 잡힌 견해들을 가지고 장난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독자는 세밀한 면에서 저자에게 동의함으로 그가 그 자신의 종교적 투쟁의 상대였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하여 생각을 정리하려고 할 때마다 애매모호하게 의식하게 되는 종교적 통찰과 영적인 것들을 특별히 명석하게 지적으로 표현한 보고자였다.
칼빈의 명석한 표현들은 처음에는 독자들에게 그의 사상은 이해하기가 쉽다고 생각하게 하였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는 그는 독자들에게 무거운 부담을 요구하고 있으며, 그의 저술에 정통한 사람들도 일부는 그의 사상에 대하여 해명하기가 어려운 요소들이 있다고 고백하였다. 그의 신학에 대한 해명들은 때때로 서로 상충되며, 강요에 나타나는 그의 가르침들 가운데 중요한 몇몇 견해들에 대한 끊임없는 논쟁은 현대 개신교 신학 논쟁의 한 특징이었다. 이것은 고전 논문들의 공통된 운명이다. [강요]는 후대 사상가들의 사유 창고이며, 그것이 그들에게 이제 바르게 생각해낸 것들을 표현하는 수단이 되며, [강요]로 하여금 새로운 사상을 만들어내게 하지 않고 그것을 미성숙한 표현들의 출처로 간주하는 경향이 강하다. 자연을 그의 은혜론과 관련하여 칼빈이 다룬 것은 특히 많은 논란의 대상이 되어 왔다. 분명히 칼빈은 신에 대한 분별력에 있어서 인간의 마음에 도저히 씻을 수 없게 새겨져 있음을 한편으로는 적극 주장하였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세상의 아름다움과 질서를 통해 그리고 인간의 놀라운 생각과 솜씨를 통해 우리의 감각기관과 함께하는 하나님의 창조물이라는 증거를 강조하였다. 그는 객관적인 세계가 하나님의 존재를 충분히 암시한다는 것과 하나님은 전능하시며 공의로우시고 지혜로우시며 그의 피조물들에 대하여 "아버지로서의 자비"를 베풀어주신다는 것을 믿는다. 그러나 사람들은 아담의 타락과 함께 죄의 유산 때문에 매우 위태롭게 되어 그들은 그의 피조물이 창조주에 대해 이렇게 증거하는 것을 보지 못하며,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에 대한 잘못되고 보잘 것 없는 생각들을 가지고 이 광명한 우주의 극장을 눈 가리고 더듬으며 돌아다닌다.
9.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런 곤경에 있는 인간을 저버리지 않으신다. 우리는 하나님의 피조물들에게서 그분을 찾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말씀을 통하여 당신을 계시하셨다. 일반적으로 칼빈이 하나님의 말씀을 말할 때, 그는 정경과 구별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정의할 때, 오직 성경에 쓰인 말씀에만 제한시키려고 하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영원한 지혜로서 모든 선택과 모든 예언들로부터 기인한다."는 이 문맥에서 그가 말하는 영원한 지혜란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말이며 고대의 예언자들은 그리스도를 성령으로 말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만물을 지으신(요 1:1)말씀 곧 그리스도는 영원한 말씀을 알게 하는 매개체로서의 기록된 말씀이 조물주이시다. 이렇게 이해할 때 칼빈에게 있어서 성경은 확실하고 정확 무오한 권위를 갖게 되며 그가 항상 의존하고 의지하는 것이 된다. 여러 논쟁들을 성경의 구절들과 관련시키는 것은 매우 놀라우며 이런 면에서 그를 능가할 사람이 없다. 그러나 그의 경우에, 그가 성경 본문을 익숙하게 인용한다고 해서 무절제하고 지나치게 인용구만으로 끝나는 그러한 일은 거의 없다. 그가 지나치게 인용을 많이 하였다고 하는 곳에서는 대체로 절대자가 사용하는 것과 똑같은 성경본문을 그도 역시 사용한다는 사실이 밝혀질 것이다. 그가 성경구절에 실제로 포함된 교리보다 더 많은 분량의 교리를 만들어내기 위해 그 구절을 지나치게 사용하려고 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그 당시의 성경학적 관점에서 볼 때 그의 논증에 맞지 않는 성경본문을 인용하여(다른 사람들처럼) 자의적인 영해를 함으로써 사용을 정당화하려고 억지로 꾸미지 않는다. 그는 "성경으로 장난질하는 것"을 폭로하는데 항상 빈틈이 없었다. 일반적으로 그는 단순하고 축자적으로 해석한다는 원칙을 충실히 고수하였다. 그는 교조적 해석을 확증하기 위하여 알레고리를 이용하는 것을 경멸하였고, 성경이 직접 말하는 것을 입증할 때만 성경을 인용하였다. 하나님의 말씀과 논란의 여지가 없는 명백한 진리의 근원으로서의 성경의 권위를 칼빈은 결코 의심한 적이 없으며, 그는 독자들도 이와 같은 확신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는 훗날의 논쟁에서 "축자적 무오설"이라고 주장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의 모든 강조점은 성경의 문자적 단어들보다는 성경의 메시지 그리고 내용에 있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족장들에게 알려준 신탁과 환상들에서 기원하며, 그들은 그 속에 담긴 진리로부터 깊은 감동을 받고 그것들을 이야기로 후손들에게 전하여 주었으며, 이러한 구전은 하나님께서 마침내 후세대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계시를 기록하게 하실 때까지만 계속하였다.
인간 저자들은 기계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들이 기록하고 있는 진리를 그들의 마음과 정신으로 기꺼이 받아들인 사람들이다. 그가 성문서의 권위 문제를 강조할 때에도 그는 항상 저자의 마음으로 표현하며, 그가 설명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단순히 메시지를 전달하는 단어들이 아니라 메시지 그 자체이다. 그러므로 사도이자 저자들인 그들을 가리켜 성령의 "확실하고 진정한 기록자들"(프랑스어 판에서는 "선서한 공증인들")이라고 한 그의 말이 가끔 인용되는데, 이때에도 문맥은 성경의 단어들 자체와 관련된 것이 아니라 그 단어들이 표현하는 영감으로 된 교훈을 말한다. 그는 실로 영감을 받는 방법에 대해서는 체계적으로 말한 적이 없다. 그가 영감을 단어 자체와 관련시키는 것 같은 구절이 글 가운데 있을지라도, 그의 주된 관심은 단어의 정도를 넘어서 그 메시지로 독자들을 인도하는 것이다. 영감의 방법에 대한 그의 입장을 표명하기 위해서는 [강요]뿐만 아니라 그의 주석들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칼빈보다는 오히려 현대인들에게 대한 관심 문제였다. 그도 성경이 완전 무오함을 아무 조건 없이 주장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구절들에 있어서는 단어의 입장에서 무오함을 주장할 수 없다는 사실을 그는 솔직히 인정하였다. 그는 바울이 로마서 3장 4절에서 시편 51편 4절을 인용할 때 부정확하게 옮겼다는 점을 논하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사도들이 성경의 말씀을 인용할 때, 내용이 일치되게 인용한다면 만족하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상당히 자유스럽게[liberiores] 인용하고 있음을 본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들은 단어를 양심의 문제로 삼지 않았다 [quare non tantum illis fuit verborum religio]" 여기에 사용된 verborum religio라는 표현은 해석중인 구절의 몇 개 단어에 대해 억지로 주도면밀한 것처럼 주장을 하여 논전을 벌이는 논적들을 경멸스럽게 묘사하는 말로 [강요]에서는 나타난다. 칼빈의 예리한 문체 감각은 성경 기자들에 대해서도 유감없이 적용된다. "높은 곳에서 천둥을 치는 듯한 요한"은 "변변치 않은 천한 문체"를 사용하는 다른 복음서 기자들과 대조된다. 그러나 이러한 비교가 메시지에도 차이가 있다는 말은 아니다. 이사야의 "우아한 문체"와 아모스의 "거친 문체"가 모두 성령의 "위엄"으로 묘사되어 사용되고 있다.
성경의 신적 권위는 교회가 선언하는 것으로부터 기인 된 것이 아니며 교회의 기초가 되는 성경 그 자체에 있다. 하나님이 성경의 저자라는 사실은 합리적인 증명이 가능하지만, 그렇더라도 건전한 신앙 형성에는 전혀 효과가 없을 것이다. 성경의 권위는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순종하는 자들에게서는 분명하고 확실하다. 성령의 증거는 모든 이성적 사고보다도 훨씬 탁월하다. 경건에 필요한 것은 그 증거가 하나님의 진리라고 하는 확실성은 예언자를 통해 말씀하시는 성령께서 우리 마음속에 들어올 때 바로 우리의 것이 된다. 그때 우리는 성경이 "인간의 사역을 통해 말씀하시는 것도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우리에게 주어졌음을 깨닫는다. 성령은 역시 성경의 해석자이며 우리들의 마음에 성경의 가르치심을 주신다. 그러므로 칼빈에게는 성경을 성령의 지시에 따라 읽을 때 그것은 절대적으로 성도의 확실한 진리의 책이 된다. 더 나아가 성경은 그리스도의 계시에서 그 조직 원리로 삼으며, 생명을 주시는 그리스도의 은총을 우리들이 소유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성경의 주요 임무이다. 칼빈의 요한복음 주석에서 "성경은 그곳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할 목적으로 읽어야 한다"고 말한다. [강요]의 초점은 기록된 말씀을 알려주는 분 곧 예수 그리스도와의 영구적인 관련성을 떠난 하나님의 주권이나 예정 또는 하나님의 말씀 자체에 대한 순종 등을 주장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교회의 조직과 훈련의 지침이 되고 교회의 공중 예배를 주관할 원칙들을 당연히 성경에서 확인한다. 이것은 사도들 이후에 발생한 이러한 문제들의 혁신은 모두 성경의 판단에 따르는 것을 의미한다. 종교개혁 이전에 교회가 타락했을 때 널리 만연하였던 미신에 대한 공격 무기를 성경은 충분히 공급해 주었다. 또한 그는 보기에 성급하고 무책임하며 왜곡된 성구 해석을 제시하는 동시대인들을 혹평하였다. 이것과 관련하여, 그가 주의 만찬을 논하면서("이것이 내 몸이니라")는 마태복음 26장 26절을 말할 때, 그는 자신의 방법을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설명하였다.
"그러나 우리들에게 있어서는, 이 구절에 대한 건전한 이해를 얻는 것 못지않게 복종하며 연구하고, 성경 전체에 대하여 이러한 태도를 지켜야한다. 그리고 우리들의 생각에 처음으로 떠오른 것을 비뚤어진 열심을 갖고 아무 구별 없이 성급하게 고수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에 대해 끊임없이 깊이 생각한 후에, 하나님의 성령께서 주시는 의미를 받아들인다. 이 의미에 의지하여, 우리는 세상의 지혜가 그것에 반대하여 펼치는 견해들을 높은 곳에서 내려다본다. 진실로 우리는 마음을 포로로 사로잡아서 우리의 마음이 단 한 마디의 저항이라도 하지 못하게 하며, 우리의 마음을 겸손하게 하여 그 의미에 대하여 절대로 반역하지 못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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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요 전체에서 칼빈 자신이 고백하는 것은 어거스틴에게서 도움을 받았다고 하는 사실이 계속해서 분명하게 표현된다. 인간의 능력에 관한 반(半) 펠레기우스적 견해를 당시 스콜라 철학자들이 일반적으로 수용하고 있었음에도 칼빈 이전의 인간 자신은 도덕적으로 완전히 무기력하므로 하나님의 은총에 전적으로 의존한다는 어거스틴의 교훈을 새롭게 증명되기 시작하는 것을 목격하였다. 오르바이스의 고트샬크(Gottschalk of Orbais)가 849년에 이단으로 징계 당한 후, 철저한 어거스틴주의의 대표자로 유명한 첫 번째 사람은 신학자이며 성직자였던 토마스 브래드워딘(Thomas Bradwardine)으로서, 그는 '심오한 박사'(Doctor Profundus)라고 불리었으며, 1349년에 캔터베리 대주교로 임직된 직후에 사망하였다. 그는 De causa Dei contra Pelagium이라는 긴 논문에서 자신은 일찍이 어리석고 허무하게도 그의 주변에서 널리 유행하던 펠라기우스의 사상들을 받아들였으나 은총의 빛이 비추는 것처럼 하나님의 주도권에 대한 확신이 임하였다고 말한다. 그는 어거스틴의 말과 성경을 항상 인용하면서, "은총은 과거의 공적에 의해서가 아니라 은혜로 말미암아 주어지며" 예정은 공적과는 전혀 무관하게 하나님의 자유로우신[gratuitam:무상] 뜻에 따른다"고 주장한다. 리미니의 그레고리(Gregory of Rimini)도 비슷한 견해를 주장하였다. 그는 1358년에 어거스틴 수도회(Augustinian Hermits) 총회장으로 사망하였다. 이러한 교리적면에서 보면, 위클리프(Wycliffe)는 어거스틴의 제자였고, 죤 후즈(John Hus)는 그를 고발한 사람들이 생각했던 것보다는 조금 못한 위클리프적이었지만 거의 위클리프 못지않은 어거스틴계 인물이었다.
"종교개혁을 내적으로 생각할 때, 그것은 어거스틴의 교회론에 대해 어거스틴의 은총론이 궁극적으로 승리한 것이나 똑같다"라고 한다. 루터와 칼빈이 어거스틴에게 어느 정도 의존하였는가에 대해서는 섣불리 말할 수 없지만, 적어도 성경을 통해 자신의 의견을 검토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어거스틴에게서 자신들은 영향을 받은 것이 크다는 것을 두 종교개혁자들은 솔직히 인정한다. 칼빈은 후기 어거스틴주의 최대 거봉이라고 말할 수 있다. 실제로 그는 인간과 구원을 취급하면서 어거스틴의 대표적인 표현들을 대폭 인용하였기 때문에 이 항목들에 있어서 그의 교리는 아프리카인이었던 그의 대선배의 교리와 전적으로 연속선상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몇 가지 점에서 그의 견해가 어거스틴의 견해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가 무비판적인 제자가 아니었음을 증거하는 것이라 하겠다. 칼빈은 선택되지 않은 사람들에 대한 영벌은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뜻에 따른 특별한 결정이라고 하는 "이중 예정"을 명백히 주장한다는 점에서 어거스틴을 초월한다. 명백히 이러한 진술은 그가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대한 확신을 성경독해와 자신의 경험에 대한 성찰을 통해 입증하고 그 확신을 조금도 누그러뜨리지 않는 칼빈 신학의 한 구성요소가 되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의 지배를 받지 아니하고 다른 방식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생각을 근본적으로 막아야 할 의무가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자신의 구원에 기여할 수 있는 능력이 전혀 없다. 뿐만 아니라 선택이란 어떤 사람이 신앙을 가진 것이라든가 아니면 선할 것이라든가 하는 것을 미리 아시는 하나님의 예지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영원히 정죄 받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옛날부터 정통적이며 논의의 여지가 없는 신앙이다. 보다 앞선 몇몇 어거스틴 주의자들과 같지만 칼빈이 일부 사람들에 대한 이러한 정죄를 하나님의 주권적인 의지와 결부시킨 것이다. 그러나 주장의 강도와 엄밀성은 그가 훨씬 큰 것은 저 세상에서 모든 사람들이 어떻게 될 것인가는 하나님의 영원한 선고에 의해서 결정되며, 어떤 사람들은 영원한 화를 당하는 것이 그 운명으로 결정된다. 이것은 그는 신학의 두 가지 상식들을 하나로 결합시켰다는 말을 들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결과는 칼빈 자신에게도 충격적인 것이었으며, 그의 많은 독자들이 용납할 수 없거나 그들을 괴롭히는 것이었다. 정죄 받은 자에 대한 이 선고를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놀랍고 공포스러운 일이지만, 그것은 부정하거나 피할 수 없다. 칼빈은 영벌론을 대단히 엄밀하게 진술하고 재차 강조한다. 칼빈은 하나님의 의지의 기능을 하나님께서 구원의 은총을 베풀어주실 때 선택받지 못한 자를 "모른 체하고 지나가게"하는 것에 제한을 두지 않는다. 즉, 하나님의 의지의 작용은 "누락"이 아니라 "영벌"이다. 바울이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롬 9:18)고 말한다면, 칼빈은 "하나님께서는 그분이 모르는 체하고 지나쳐 버리는 자를 영벌에 처하신다"고 마찬가지로 간단한 주장을 한다.
칼빈은 이러한 결론을 해명하고 수호할 때에도 그것을 생각하고 몸서리 쳤으며, 거기에 내포된 도덕적 난점을 잘 알았다. 그는 죄의 주권자가 하나님 자신이라는 주장을 펴기 위해 그 결론을 이용하는 사람들을 조금도 용납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항상 사랑이 많으시며 공의로우시다. 비록 우리의 연약한 이해력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방법으로 그 사랑과 공의가 이 땅에서 항상 표현된다. 칼빈이 예정에 그토록 깊은 관심을 쏟은 것은 그 자신이 예정의 신비 앞에서 너무나 크나큰 충격을 받고 경악을 금할 수 없었던 사실에 의해서 설명된 것이다. 따라서 이 주제의 언급에 큰 관심을 가지는 것, 즉, 그것이 어떻게 선택되었을까 하고 근심하는 것은 "사단의 유혹"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그러나 그는 성숙한 신도들에게 "정신을 바짝 차리고 겸손한 자세로" "이 높고 불가해한 신비"에 대해 숙고하라고 촉구한다. 선택의 열매들은 이 세상에서 누리는 외적인 유익이나 번영 등과 같은 것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이 세상에서는 불경건한 자들이 세력을 떨치고 번성하며 경건한 자들은 십자가의 고난을 질 수밖에 없다. 선택받은 자의 축복은 그들이 고난을 당하는 중에서도 하나님의 충만하심과 확고한 보호를 확신하는 것과 앞으로 다가올 세상을 기뻐하며 행복한 기대를 가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