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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대한예수교장로회 교역자양성원 청주개혁신학연구원 원문보기 글쓴이: 최명식강도사
디도서는 신약성경의 열일곱 번째에 해당하는 서신으로서 바울의 목회서신에 속한다. 시대적으로 볼 때 본 서신의 기록 시기는 디모데전서와 거의 같은 시기로 여겨지며, 디모데전서와 문체, 목적, 그리고 내용에 있어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따라서 디모데전서와 마찬가지로 본 서신은 바울이 로마 감옥에서 풀려난 후에 사도의 대리자로서 교회의 감독관이 된 디도에게 쓴 서신이라고 생각된다. 사실 디도가 맡은 임무는 그레데섬 교회들의 조직을 만들고 감독해야 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본 서신은 교회들이 질서를 찾아야 할 필요가 있고, 거짓 교사들과 적대자들을 논박하고 부도덕한 행위를 선한 행위로 대치해야 할 필요가 있는 상황 속에서 디도로 하여금 한 사도의 대리자로서 그의 권위를 단호하게 발휘하도록 힘을 돋우어 주기 위해 기록되었다. 바울은 디도에게 장로들의 자격과 교회의 여러 집단들에게 기대되는 품행을 세부적인 기준들을 상기시키기 위해 이 서신을 기록하였다. 그런데 본 서신을 통해 본 그레데의 상황은 디모데를 머물게 한 에베소의 상황보다도 더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교회는 조직되지도 않았고 교인들의 생활에는 절제가 없었다. 바울이 디모데전서에서 건전한 교리를 보다 더 강조하였던 반면에 본 서신에서는 행동 지침, 곧 선한 행실을 강조한 것은 그레데의 상황에 따른 것이었다. 하지만 본 서신은 상황에 이끌려서 쓴 단조로운 교훈만은 아니다. 바울은 선한 행위가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은 아니지만 신자가 선한 행실을 견지해야 한다는 관점에서 강조한다. 뿐만 아니라 그는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찬양을 신약성경 중 본서에서 가장 숭고하게 피력하였다(참조, 딛 3:4-7).
제1부 디도서의 역사적 배경
I. 저자 및 수신자
1. 저자
디도서는 목회서신 중에서도 저자 문제에 있어서 비교적 논쟁이 적었다. 고대 문헌들의 외증을 통해서도 바울이 본 서신을 기록하였다는 점은 입증된다(Jerome, Ignatius, Polycarp). 그러나 다른 목회서신들과 마찬가지로 ① 역사적인 이유 ② 교회사적인 이유 ③ 교리적인 이유 ④ 문체적인 이유 등으로 인해 바울 저작권이 의심받는다. 이는 물론 19세기 초부터 대두된 비평주의적 성경 해석에 따른 비판적 견해들이다. 그러나 디모데전서의 저자 문제에서도 다루었듯이 이들의 견해는 바울의 행적을 사도행전에 나타난 것으로만 제한하려는 데서 발생한 문제이며 또한 바울서신을 도식적으로 이해한 나머지 문체, 내용, 교리 등을 고정된 형태로 본 것에서 기인된 문제점들의 지적에 불과하다. 따라서 그들의 견해가 비록 목회서신 연구에 많은 자극을 주었고 연구를 진전시켰다는 점을 인정한다 할지라도 본 서신의 바울 저작에 대한 의심을 받아들일 수 없다. 그만큼 본 서신 내에는 비평학자들이 주장하는 것 이상의 내증이 있으며, 고대 문헌들로부터의 외증 또한 강력하다. 먼저 내증을 살펴보면 ① 저자는 자신을 바울이라고 밝힌다(참조, 딛 1:1). ② 수신자인 디도에 대해 젊고 연약하고 더 자제해야 할 믿음의 아들로 표현하였다(참조, 딛 1:4). 뿐만 아니라 본 서신의 내증은 신약의 다른 바울서신과의 현저한 유사점에서 확인된다. 예를 들어 은혜의 복음에 대한 강조(참조, 롬 1:5, 14-17; 15:5-9 고전 1:17; 15:1-11 고후 4:4-7 갈 1:1-5 딤전 1:11-16; 2:5-7 딤후 1:8-11; 4:7, 8 딛 2:11-13; 3:4-7), 경건한 생활의 기본이 될 교리적인 전제(참조, 엡 4:20-32; 5:1-4 골 3:1-5, 8-17 딤전 3:15, 16 딤후 1:8-12; 2:19 딛 2:11-14; 3:4-8), 그리고 주의 재림에 대한 강조(참조, 고전 1:7 살전 3:13 살후 2:1, 8 빌 3:20 딛 2:13) 등은 바울서신의 공통적인 주제들이다(Hervey). 다음으로 본 서신의 바울 저작권에 대한 외증은 바울의 제2차 로마 투옥설을 위시한 사도행전 이외의 바울 행적에 대한 입증과 함께 고대 문헌들에서 쉽게 발견되는 것들이다. 먼저 로마의 '클레멘트'(Clement)는 고린도에 보낸 편지에서 딛 2:10; 3:1 등을 암시했고, 바나바의 서신도 마찬가지이다. 또한 '무라토리 단편'(Muratorian fragment)에서는 바울서신의 목록에 본 서신을 포함시켰다. 이 외에도 본 서신의 바울 저작권을 입증할 만한 언급들은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터툴리안'(Tertullian), '유세비우스'(Eusebius), '크리소스톰'(Chrysostom) 등에서 광범위하게 발견된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디도서의 바울 저작권은 의심할 수 없다. 물론 디도서가 다른 바울서신에 비해 독특하다는 사실은 인정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인 절대적인 것은 아니며 더욱이 그것이 본 서신의 바울 저작권을 의심할 만한 절대적인 근거는 될 수 없다.
2. 수신자
본 서신의 수신자는 그레데섬에 남겨진 디도이다. 디도는 바울의 이방인 동역자로서 디모데와는 달리 할례를 받지 않았으며(참조, 갈 2:3), 노후에는 본 서신이 보내진 그레데섬에서 생애를 마쳤다. 한편 디도에 관한 대부분의 지식은 본 서신 외에 갈라디아서와 고린도전?후서, 그리고 디모데후서에서 찾아볼 수 있다.
1) 사도행전에 나타난 디도
사도행전에 디도 유스도라는 사람이 나오는데 그는 고린도에 거했던 로마 시민으로서 이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본 서신의 수신자와는 다른 인물임에 틀림없다. 한때 디도 유스도를 본 서신의 수신자인 디도와 동일 인물로 보려는 시도가 있었다. 왜냐하면 시내 사본과 다른 고대의 매우 권위 있는 사본들이 디도와 디도 유스도를 구분하지 않고 사용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본들이 정확한 것들이라 하더라도 두 사람을 동일 인물로 보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왜냐하면 알렉산드리아 사본과 베자 사본 같은 몇몇 사본들은 첫 이름인 '디도'를 생략하고 유스도라고만 표기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시 일반적으로 사용되던 '디도'라는 이름을 지닌 한 미지의 고린도인을 같은 이름을 가진 바울의 동역자와 연관시킬 만한 근거는 없다 하겠다.
2) 갈라디아서에 나타난 디도
바울이 개종한 후 두 번째로 예루살렘을 방문하였을 때 디도는 바울의 동역자인 바나바와 함께 예루살렘으로 갔다(참조, 갈 2:1-10). 이때 디도에게는 큰 시험이 닥쳤는데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이 이방인인 디도에게 할례를 받아야 된다고 주장한 것에서 비롯된 문제였다. 하지만 바울은 디도의 경우를 시범적인 사례로 삼기 위하여 유대인들의 요구를 묵살하였다. 따라서 디도는 할례를 받지 않은 채 기독교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졌다. 그 후 바울은 디도의 경우를 이방인들도 할례를 받아야 된다는 대적자들의 주장에 대한 논박의 주요 근거로 삼았다.
3) 고린도전?후서에 나타난 디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내에서 자신의 사도권을 거부하고 그의 가르침을 거부한다는 소식을 듣고 진상을 파악하기 위하여 디도를 그곳에 보냈다. 그리고 바울 자신은 디도로부터 소식을 듣지 못하여 답답했지만 마게도냐로 향하였다(참조, 고후 2:13). 마게도냐에서 디도를 만난 바울은 매우 기뻐했으며(참조, 고후 7:6), 디도의 역할로 고린도 교회와 바울은 다시 화해했다. 물론 바울의 사도권도 다시 인정받게 되었으며 바울의 가르침도 받아들여졌다(참조, 고후 7:9). 한편 바울은 디도의 보고에 힘입어 그를 다시 고린도로 돌려보내어 디도가 전에 효과적으로 사역하였던 일을 성취하게 하였다(참조, 고후 8:6). 이때 바울은 디도가 자신의 동역자요 교회의 사자요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는 자라는 사실을 고린도 교인들에게 상기시키고 또한 그가 사리사욕이 없는, 오직 고린도 교인들만을 생각하는 성령의 사람임을 강조한다(참조, 고후 8:23; 12:18).
4) 목회서신에 나타난 디도
목회서신에 나타난 디도의 모습은 다른 바울서신에서 언급한 디도의 모습과 다소 상이하다. 목회서신에서 디도는 교회 문제, 교리 문제, 도덕 문제에 있어서 권위를 행사하도록 권고 받을 필요가 있는 사람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점은 앞서 살펴본 갈라디아서나 고린도후서에 나타난 디도의 활동과, 재치가 넘치는 바울의 오른팔 디도의 모습과는 현저하게 다르다. 바로 이러한 상이점 때문에 대부분의 비평학자들은 디도서와 다른 목회서신들을 익명의 저자에 의해 기록된 서신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디도에 관한 권면은 단순하게 여러 교회들이 교회적 권위에 복종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방법적인 면에서의 권면으로 생각된다. 한편 디도서에서 디도는 '같은 믿음을 따라 나의 참아들 디도'(딛 1:4)로 언급되었는데, 이는 디도가 바울에 의해 개종했다는 점을 나타내기 위함인 듯하다. 이 구절에서도 암시되었듯이 바울과 디도는 부자 관계처럼 친밀하고 유대가 강한 관계임을 보여주는데, 이는 갈라디아서나 고린도후서에서 보여준 바울과 디도 사이의 신뢰성과 어울린다. 또한 바울은 디도를 그레데에 보내어 그곳 교회들의 조직을 정비하고 감독하게 하였다. 아마도 본 서신은 이 시기에 디도에게 보내진 듯하며 본 서신의 묘사로 보아 그레데의 교회들은 매우 혼란스러운 상태였던 것 같다. 그레데에 남은 디도는 그곳 교회의 감독이 되어 바울이 명한 대로 장로를 세우고, 교회를 조직하였고, 달마디아로 파송되기도 했다(참조, 딤후 4:10). 디도의 최후에 관해서는 '유세비우스'(Eusebius)의 보고를 통해 알게 되는데, 그에 따르면 디도는 그레데 교회의 감독으로 목회를 하다가 94세의 일기로 그곳에서 죽었다고 한다.
II. 기록 연대
1. 목회서신의 기록 순서
목회서신은 디모데전?후서, 디도서의 순서로 정경에 편집되었다. 하지만 신약성경에 나타난 순서가 목회서신의 기록 순서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왜냐하면 신약성경의 정경화 과정에서 기록 연대보다는 오히려 각책의 분령과 교리의 중요성이 우선시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학자들은 비록 목회서신의 바울 저작권을 인정한다 할지라도 그 순서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견해를 내세운다. 그중에서도 비교적 온건한 비평학자인 '다이스만'(Deissmann)은 목회서신 중에서 디모데후서가 가장 먼저 기록되었고 그 다음은 디도서, 그리고 맨 나중에 디모데전서가 기록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는 자신의 가설을 입증시키기 위해 여러 가지 부가적인 근거들을 제시하였다. 먼저 디모데후서, 디도서, 디모데전서의 순서가 목회서신에 반영된 교회 제도의 발전 과정과 잘 어울린다는 주장이다. 즉 디모데후서에서는 수신자인 디모데에게 '신실한 사람들'을 세워서 복음을 전파하라고 명령하는 데 반해서 디도서에서는 이미 장로들이 임명된 것으로 나타나며, 더 나아가 디모데전서에서는 장로들의 존재가 당연히 전제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임명에 대한 상세한 규정들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또한 디모데후서에서는 사도들만이 안수했는데 디모데전서에서는 장로들도 안수하였다고 하고, 이는 유대교적 안수 제도를 보편적으로 부활시킨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다음으로 '다이스만'은 목회서신 내에서 이단들에 대한 언급이 달라지는 것에 주목하여 그 순서를 가정하였다. 즉 디모데후서에서는 이단자들인 후매네오와 빌레도가 아직 교회 내에 머물러 있는 데 반해서(참조, 딤후 2:17, 20), 디도서에서는 이단자들이 고집을 부릴 경우 출교시키라는 명령을 한다(참조, 딛 3:10). 더 나아가 디모데전서에서는 후매네오가 사탄에게 넘겨진 것으로 언급되었다(참조, 딤전 1:20). 이렇게 본다면 디모데후서, 디도서, 디모데전서의 순서로 기록되었다고 보는 것이 역사적인 상황에 잘 어울리는 듯하다. 마지막으로 '다이스만'은 바울의 개인적인 언급이 점차 줄어들고 있다는 점을 하나의 근거로 제시한다. 즉 그는 디모데후서에서 바울의 개인적인 언급이 가장 많이 발견되고 디도서에서는 보다 적게 나타나며 디모데전서에서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을 근거로 하여 목회서신의 기록 순서를 재조정하려 하였다. 그에 따르면 바울의 개인적인 언급이 점차 줄어들다가 디모데전서에서 거의 나타나지 않는 것은 교회의 발전이 이미 무르익었기 때문에 바울의 언급 없이도 스스로 설 수 있게 되었음을 뜻한다고 주장한다. 그의 견해는 매우 예리하고 흥미를 끌기에 충분하지만 전적으로 동의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목회서신은 역사서가 아니므로 그 배경을 반영한다 할지라도 정확하지 않으며, 교회의 발전 정도를 눈으로 알아 볼 수 있을 만큼 많은 시간을 두고 기록된 서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더욱이 목회서신 내에 나타나는 교회 제도에 대한 언급은 단순히 목회서신에서만 발견되는 고유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목회서신에서 교회 제도의 발전 정도를 파악할 수는 없으며, 그것을 근거로 순서를 재조정하는 것은 더욱 불가능하다. 뿐만 아니라 바울 자신에 대한 언급을 역사적인 문제로 파악할 수는 없다. 또한 자신에 대한 언급이 디모데후서에서 많이 발견되는 것이 당연할 뿐 그것이 제일 먼저 기록되었다고 주장하게 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바울은 자신의 마지막 편지인 디모데후서에서 자신에 대해 할 말이 더 많았을 것은 당연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이스만'의 견해는 매우 흥미롭지만 인정하기 어려운 점이 많다 하겠다. 하지만 비평학자들 중에는 디모데후서가 가장 마지막에 기록된 것을 인정하면서도 디도서를 디모데전서보다 앞서 기록된 서신으로 간주하는 학자들이 있다(Marxsen, Gnilka, Hervey). 이들 학자들에 따르면 디도서가 보다 포괄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데 반해서 디모데전서는 디도서와 사건과 용어가 유사하지만 내용과 교리적인 부분에서 디도서에 미치지 못한다고 한다. 따라서 그들은 두 서신 모두 거의 같은 시기에 기록되었지만 디도서가 보다 앞서 기록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그러나 전통적인 입장은 이들의 견해를 모두 거부하며 그 순서를 디모데전서, 디도서, 디모데후서로 간주한다(Polycarp, Irenaeus, Ignatius, Origen 등).
2. 연대와 배경
지중해의 그레데섬은 길이가 250km, 폭이 48km였으며, 1세기경 그곳 주민들은 거짓과 부도덕으로 악명 높았다(참조, 딛 1:12, 13). 그레데섬의 전도는 바울이 로마로 가는 도중에 잠시 머무는 동안에는 이루어지지 않았다(참조, 행 27:7-13). 그 후 바울은 64년 경 로마 감옥에서 풀려난 후 그레데를 방문하여 복음을 전하고 디도를 그곳에 남겨 두어 교회를 조직하고 감독하는 일을 맡겼다(참조, 딛 1:5). 그리고 자신은 니고볼리에서 겨울을 지내기로 결심하고 그동안에 디도와 만나기를 바랐다(참조, 딛 3:12). 따라서 바울은 니고볼리에 도착하기 전인 마게도냐에서 디모데전서를 기록할 때 거의 동시에 디도서를 기록하였다. 그리고 그 시기는 로마 감옥에서 풀려난 후 그레데에 디도를, 에베소에 디모데를 남겨 두고 마게도냐에 도착할 정도의 시간이 지난 64년 가을 경이 된다. 하지만 목회서신 전반의 연대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본 서신의 연대 결정도 잠정적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인지 학자들은 본 서신을 비롯한 목회서신의 연대 문제에 있어서 무리한 견해를 주장하지 않으며, 뚜렷하고 결정적인 근거가 없는 한 전통적인 입장이 보다 확실하다.
III. 기록 목적
목회서신의 일차적인 목적은 어려운 시기에 교회의 감독이 된 두 제자에게 대사도인 바울이 보장하는 권위가 있음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즉 디모데나 디도가 에베소와 그레데에 처음 도착하여 감독이 되었을 때 그들의 권위를 의심하는 자들이 나타났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더욱이 디도가 머물렀던 그레데는 그 정도가 심하였다. 하지만 그곳 주민들은 바울의 사도적 권위에 대해서는 의심하지 않았으므로 바울의 서신을 통한 사도의 후원은 교인들로 하여금 디도가 아주 고귀한 사도의 제자라는 사실을 일깨워 주기에 충분했다. 목회서신은 주로 이러한 목적으로 기록되었으며, 디도서의 기록 목적도 이에 벗어나지 않는다.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디도서는 교회의 직분 맡은 자들이 꼭 갖추어야 할 자질들을 다루었으며, 교회 내의 여러 집단들이 마땅히 취해야 할 태도에 대한 훈계가 언급되었다. 특히 바울은 디도에게 어려운 지역에서 이단들과 싸움에 있어서 권위로 책망하여 누구에게든지 업신여김을 받지 말라고 권면한다. 물론 디도는 바울과 헤어지기 전에 이미 교회 치리나 운영에 관하여 직접 대면하여 교훈을 주고받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본 서신이 디도에게 세부적인 교훈을 주려고 기록된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다만 본서신의 목적은 전반적으로 행실이 나쁘기로 소문난 그레데인들을 상대하던 디도를 격려하고 도와주기 위함이었다.
IV. 특징 및 구조
1. 특징
디도서는 디모데전서와 역사적인 배경, 내용 등에서 그 축소판이라는 인상을 준다. 또한 짧은 서신이면서 초두의 문안 인사가 매우 길다는 점도 특징 중 하나가 될 것이다. 하지만 본 서신의 뚜렷한 특징은 교리적인 특징으로서 그동안 목회서신이 비신학적이란 비난에 대한 좋은 방파제 역할을 하였다. 즉 디도서에는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가장 숭고한 표현이 나타나는데, 그 안에는 재림 사상 및 구원론이 훌륭하게 요약되어 있다. 그 외에 본 서신의 특징은 목회 신학으로서 갖는 특징들이다. 예를 들면 도덕적이고 실천적인 문제와 교회의 실제 생활에 대한 교훈을 다룬 내용이라든가, 혹은 개인에게 보내는 서신이자 사적인 편지 형식을 빌린 공한(epistles)의 성격을 지닌 점 등이다. 목회서신 내에서 본 서신만이 갖는 특징이라면 디도를 추천하는 추천장의 성격을 지녔다는 점이다.
2. 구조
디도서의 구조는 크게 세 단락으로 나뉜다. 첫 단락(참조, 딛 1:1-16)은 건전한 교리의 보호를 가르치고, 두 번째 단락(참조, 딛 2:1-15)은 올바른 교리를 전파할 것을, 그리고 세 번째 단락(참조, 딛 3:1-15)은 올바른 교리의 실천을 권면한다 (참조, 디도서 도표1)
제2부 디도서의 특별 주제들
I. 목회서신의 구원론적 언어
목회서신에는 구원론에 관련된 언어들이 총망라되어 있는데, 이들 용어들은 구원론에 관한 포괄적인 이해를 제시해 준다. 특히 목회서신에서는 구원 사건의 현재화를 추구하여 말씀의 본질이 실제화 된 개념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목회서신에 나타난 구원론적 언급들이 헬라적인 구원론과 어느 정도 연관되었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따라서 그리스도교의 제의 언어가 된 구원의 개념을 헬라 및 당시의 역사적 상황과 연관시켜 연구하는 것은 그 독특성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1. 헬레니즘 세계의 구원
헬레니즘 세계에서 구원은 황제 숭배 때문에 새로운 의미와 중요성을 갖게 되었다. 즉 황제숭배의 종교 가운데서 '구원'은 자신들을 통해 나타나는 신들의 은혜를 뜻하였다. 때문에 통치자 숭배 의식은 카리스마적인 분위기와 메시지를 담은 제사 형식을 띠었으며, 신들에게 행하는 찬양은 곧 통치자를 향한 찬양이 되었다. 헬레니즘 세계에서 이 같은 황제 숭배 의식이 성행하게 된 때는 1세기 후반으로서 황제는 신들과 더불어 행정에 참여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따라서 황제의 권위는 신적 권위를 지니게 되었다. 이러한 구원관은 정치적인 권력을 통하여 구원을 받으려는 인간 환상의 표현인데 그 유래는 동방이다. 즉 묵시문학의 메시아 사상을 도입하여 황제가 곧 신들의 사자요 인류의 구원자인 메시아라고 자처하고 자신을 신격화시키는 한편 헬레니즘 세계에 퍼져 있던 신화를 황제와 결부시켰다. 대표적인 황제로는 '시저'로서 그는 사후에 신으로 추대되었다. 더욱이 그는 생전에 자신의 신전을 소아시아 지역에 이미 세우기도 하였다. 황제 숭배의 전통은 '아우구스투스' 황제와 '티베리우스' 황제에 의해 합리적인 범위 내에서 고수되었고,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자신의 신성에 대해 회의적인 태도를 보임으로써 황제 숭배 전통을 부정하였다. 그러나 '네로' 황제는 자기중심적인 생각을 하였기 때문에 자신의 신적 지위를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그리고 1세기 말의 '도미티아누스' 황제 역시 황제 숭배를 강화시키고 강요하였다. 특히 소아시아에서는 신인 황제들이 신전은 물론 로마 제국의 경기에서 숭배되었다. 그리고 흥분한 군중들의 찬양은 구원과 영예와 영광과 예배를 자신들의 신이요 구원자인 황제에게 돌렸다. 이처럼 정치를 통하여 구원받으려는 시도는 결국 그리스도교와의 출동을 야기했으며, 엄청난 종교적 박해를 초래하였다.
2. 성직 언어의 특징
디도서에 나오는 성직 언어의 특성은 황제 숭배와 관련되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황제 숭배에서 사용된 용어들이 그리스도교 구원론에서 그대로 사용되었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즉 황제 숭배의 만연으로 헬레니즘 세계는 매우 많은 제의적인 언어들이 있었다. 그 중에는 고대 헬라 사상에 기원은 둔 것들도 있지만 대부분 동방에서 유래한 용어들이었다. 다시 말해서 초대 그리스도교 교회가 채택한 그리스도교의 구원론적 언어들은 그 유래가 동방임에도 불구하고 헬레니즘 세계에서 한 번 변형된 언어를 사용해야 했다는 것이다. 때문에 그리스도교의 독특성과 구원 사상의 고유성을 견지하기 위하여 황제 숭배와 결부된 용어들은 가급적 사용하지 않았다. 그리고 황제 숭배 제의적 용어들을 사용할 때에는 그 의미를 제한하거나, 혹은 재해석하여 사용하였다. 예를 들어 황제 숭배에서도 사용된 바 있는 '구원하시는 은혜'라는 표현이 바울에게 있어서는 인간을 구원하는 유일한 것, 곧 하나님께 대한 지식을 가리키는 것으로 사용되었다(Dittenberger). 황제 숭배에서는 이 말이 신들의 은혜들을 뜻하였다. 따라서 목회서신에서 사용된 성직 언어들의 특징은 당시 유행했던 황제 숭배와의 대립 관계에서 비롯된 특징으로서 황제 숭배와 구별시키기 위해 하나님의 유일성과 인류에 대한 사랑을 강조하는 경향이 뚜렷하다(Wendland).
3. 제의적 표현
목회서신의 구원론적 표현들은 바울이 이전에 제시했던 것과 다른 새로운 것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바울이 전해 받은 것을 다시 전해주는 듯한 인상을 준다. 특히 후기 유대교의 제의적인 표현들과 유사한 형태가 목회서신 가운데 나타나기 때문에(참조, 딤전 1:17; 2:10) 목회서신의 구원론적 표현들이 '디아스포라' 유대인들로부터 물려받은 것으로 여겨진다(Meyer, Wendland). 따라서 어려운 문제가 제기된다. 즉 연관된 표현들이 서로 다른 인격들, 곧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관련해서 많이 사용되고 있는 점을 설명해야만 한다. 예를 들어 딛 2:11의 '은혜'는 하나님의 능력을 뜻하지만 딛 3:7의 '은혜'는 일반적인 의미로 사용된 경우이다. 또한 딛 2:11의 '구원을 주시는'이란 말은 하나님의 유일하신 은혜의 능력을 가리키는 반면에 딛 3:5의 '구원하시되'란 표현은 중생과 성령의 능력을 통한 구원을 가리킨다. 특히 주목할 것은 이들 용어들이 이미 초대교회 내에서 공식적인 언어에 속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이 용어들은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향한 제의적인 표현으로서 그리스도교 내에서 특별하게 제정된 것이 아니라 유대적인 제의 관념에서 유래된 표현으로서 그리스도교 내에서 특별하게 제정된 것이 아니라 유대적인 제의 관념에서 유래된 표현들이다. 하지만 비록 이 용어들이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의 제의적 표현 양식에 뿌리를 두었다 할지라도 그리스도교의 전통에서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된 것은 이 용어들이 단순히 전승된 것이 아니라 성도 개개인의 구속사적 경험에서 신앙고백적으로 사용되었다는 점이다.
4. 구속사적 경험의 반영
바울의 구원론적 언어는 비록 유대적인 전승과 바울 이전의 그리스도교 전승에 의존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주 독창적이다. 아마도 그 이유는 바울의 선교적 상황이 준 영향과 자신이 경험한 구원사건 등의 영향 때문인 듯하다. 먼저 바울 선교의 사회적 상황은 앞에서도 살펴보았듯이 황제 숭배가 만연된 사회였으며, 그것도 이방신들이 이방인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던 상황이었다. 따라서 바울은 그들의 언어를 사용하되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분명하게 드러낼 수 있는 언어로 재해석하여 사용해야 했다. 뿐만 아니라 바울 스스로가 경험한 구원사건 또한 구원론의 문체를 독특하게 한 요인이 될 수 있다. 즉 바울은 자신의 구원 사건을 상기하여 그리스도께서 오신 임무를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것이었다고 고백하고 스스로 죄인의 괴수라고 증언하였다. 그만큼 그의 구원론적 표현은 개인적 간증으로 강조된다. 이 외에도 구원에 대한 현재적 경험은 수많은 구절에서 증명된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구원하시고 거룩한 부르심으로 부르셨다(참조, 딤후 1:9). 곧 성도가 구원을 받을 만하다고 할 수 있는 근거는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역사하시는 부르심에 있다(참조, 딛 3:5). 특히 딛 3:5에서 구원은 세례와 성령을 통한 삶의 갱신과 연결된다. 이 모든 예들을 통해서 볼 때 목회서신의 구원론적 언어들은 실제 구원사건의 경험을 필수적으로 동반하여, 일반적으로 경험적인 문체를 사용함으로써 초대교회 내에서 설득력을 지니게 되었다 하겠다(Kaesemann).
5. 구세주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언급
목회서신에서 구세주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언급들은 하나님께서 구원을 주심이 보편적임을 나타낸다. 이것은 유대주의자들과 영지주의자들의 배타적인 구속사적 태도와 대조된다. 유대주의자들은 새로운 사람만이, 그리고 영지주의자들은 영적 지식을 소유한 자들만이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가르쳤다. 그러나 참되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는 만민의 구주이시며(참조, 딤전 4:10),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도록 명령하신 분이시다(참조, 딛 1:3).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특별히 그리스도인의 구주이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은 구주를 영접하고 믿음에 거하기 때문이다(참조, 딤전 4:10 딛 1:3).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교훈을 돋보이게 하는 생활을 영위해야 한다(참조, 딛 2:10). 하지만 바울은 다음 구절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보다도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그 능력에서 계시되었고, 교회 구성원들, 곧 종들의 새 생활로 나타내어진다고 선언하였다. 따라서 목회서신의 구원론의 특징은 모든 사람을 포용하며, 또한 하나님께서는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그 계획들을 실현시킨다는 점이다. 한편 목회서신의 구원론적 언급에서 중요한 핵심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오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다. 하나님께서는 영원 전에 세우신 사람들을 구원하실 목적을 예수 그리스도의 첫 번 나타나심으로 세상에 선보이셨다(참조, 딤후 1:10). 구주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나타났으며(참조, 딛 3:4), 생명의 역사를 통하여 구원을 이룩하셨다. 그러므로 영원 전에 정해진 하나님의 자유로운 목적과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은총을 통해서 그리스도인은 이미 구원받았다. 즉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공적을 기초로 하지 않고 오직 정화와 중생을 통하여, 그리고 자신의 긍휼하심에 따라 신자들을 구원하신다. 그리고 성령은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풍성하게 임하게 되었다(참조, 딛 3:5 이하).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목회서신의 구원론적 언급은 비록 그것이 헬레니즘 세계, 혹은 '디아스포라' 유대교와 연결된다 할지라도 독특하며, 이방 세계의 배타적인 신앙과 대조된다 하겠다. 그리고 목회서신 내에서 구원론을 추출해 낼 수 있다는 사실은 목회서신의 진정성 문제를 결정하는 데 중요하며, 목회서신 내에 신학이 결여되었다는 비난을 무색케 한다.
II. '중생'에 관한 연구
신약성경에서 '중생'이란 용어가 후기에 등장하고, 또 드문 이유는 그에 상당하는 용어가 히브리어나 아람어, 70인역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기에 그 사상이 신약성경에 도입되었을 때 드러난 술어의 의미는 퍽 다양했다. 이는 당시 헬레니즘 세계에서 이 단어가 다양한 표현으로 사용되었음을 물론 초기 기독교 내에서 동시에, 그리고 독립적으로 사용될 수 있을 만한 발전 단계를 보여준다 하겠다. 따라서 이 용어를 헬레니즘 세계에서의 사용 범위와 초기 기독교 사상 체계에 도입된 배경 등을 추적해 볼 만한 가치는 충분하다 하겠다.
1. 우주론적 의미
스토아 학파는 '중생'이란 말을 세계적 대재난 이후의 우주적 회복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하였다(Philo). 물론 이러한 시각은 홍수 이후의 회복 및 포로 이후의 회복 등을 가리키는 것으로 구약성경의 관점에서도 발견된다. 하지만 헬레니즘 세계에서는 '중생'의 우주적 개념이 보다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 그리고 신화에 적용된 이 용어는 '디오니소스'나 '오시리스'의 신화에서 손과 발이 다 잘린 후에 신의 생명이 회복되는 것을 가리켰다. 또한 '요세푸스'(Josephus)는 이 말을 민족적인 의미로 해석하였다. 곧 역사가인 그는 민족의 흥망성쇠를 '중생'의 '다시 남' 개념에 적용시켰다. 한편 딛 3:5에서는 '중생의 씻음'이나 '성령의 새롭게 하심'이란 표현을 통하여 이 용어를 통해 기대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밝혀 준다. 즉 딛 3:5에서는 엡 5:26에서와 마찬가지로 '중생'이 세례를 가리킨다. 이처럼 세례를 '중생'으로 이해하는 생각은 요 3:3과 롬 6:4, 그리고 벧전 1:3, 23에서도 나타난다. 즉 이 말의 의미는 세례를 죽음, 혹은 매장으로 이해하는 생각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세례를 죽음의 상징으로까지 발전시키지는 않았다. 다만 '중생의 씻음'이란 말이 바울과 그의 교회들 사이에서는 세례를 가리키는 말로 이미 널리 알려졌던 것 같은 인상을 준다. 그런데 비평학자들은 디도서에 나타난 '중생'이라는 용어를 근거로 목회서신 전반을 의심한다(Schmithals). 왜냐하면 중생이라는 용어는 바울이 즐겨 사용하는 용어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슈바이처'(Schweitzer)는 디도서에 나타난 '중생'을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 용어로 주목한다. 즉 그는 바울에게 있어서 새로운 생명이 오직 그리스도와 더불어 실제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날 때 가능한 것이지 결코 어떤 다른 것을 통해서 혹은 상징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 다만 문제는 그리스도인들이 그 같은 일반적인 단어들로부터 일정한 사건이나 경험에 대한 언급을 찾아낼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하르낙'(Harnack)은 2, 3세기의 그리스도인들이 이 용어를 폭 넓게 사용한 점을 근거로 하여 그리스도인들은 당시 헬레니즘 세계에서 통용되는 개념으로 '중생'을 이해하였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이는 바울의 언급이 무엇을 의도했는지에 대한 고려 없이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중생을 단순히 세례를 가리키는 말로 이해했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헬레니즘 세계의 통념적인 의미를 벗어나서 중생을 우주적인 의미로 사용하였다. 특히 헬레니즘 세계에서 중생을 기술적인 용어로 사용한 것에 반해서 바울은 중생을 우주의 질적 변화와 연관시켰다. 즉 바울은 딛 3:5에서 사람의 행위와 하나님의 은혜를 대조하면서 중생의 배경을 설명하는데, 그는 하나님의 임재를 통한 중생의 보증과 중생의 우주적인 의미를 제시하였다.
2. 밀의(密儀) 종교와의 관계
'중생'이 죽음 이후의 생명을 가리킬 수도 있다는 생각은 이 용어가 밀의 종교의 사상과 관련되었음을 보여준다. 헬라 시대에 많은 추종자들이 따랐던 밀의 종교는 인간에게 닥친 고통이나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인간에게 그것들을 물리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하여 구원할 수 있다고 약속하였다. 그들은 예배 행위를 위해 몰려든 사람들끼리 그 종교의 내용과 의미와 형식을 누설하지 않도록 엄격하게 침묵을 지켰으며, 당시 헬라 사회에서 널리 숭배되던 여러 신들을 숭배하였다. 따라서 그들은 다신 숭배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개인으로 보면 다신 숭배는 아니었던 듯하다. '오시리스'(Osiris)나 '이시스'(Isis), 그리고 '아도니스'(Adonis) 등을 숭배하던 그들은 서로 충돌하기도 하였으나 때때로 숭배하는 신들을 동일시하여 상대방의 신을 배제하지 않았다. 즉 그들은 최고의 신이 어떻게 불리든지 세상의 유일한 주는 여러 이름으로 불려져서 그의 추종자들을 통하여 다른 나라로 전해진 종교들이 서로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고 관용적인 태도를 보인다고 생각하였다. 특히 이들은 한 사람이 여러 종교의 신의 능력을 받는 것을 허용함은 물론 그렇기 되기 위하여 다른 종교 단체에 가입하는 것을 허용하였다. 따라서 밀의 종교 단체들은 그 회원들의 자유로운 결정에 따라 조직되었다. 이처럼 그 출처가 다르고 예배 형식이 여러 가지인 밀의 종교 단체들은 그러한 다양성 속에서도 일정한 특징들을 해치지 않으려는 공동 인식이 있었다. 특히 그들은 신들도 고통을 받고 죽음을 맞는다고 생각하고 의식을 통하여 그들의 죽음에 동참하고 또한 신들의 삶에 동참하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때문에 그들은 생명 안에 중생의 가능성이 포함되어 있다고 믿었다. 즉 모든 사람들은 저주하거나 구원하는 일이 신의 능력 안에 있다는 것과 그러한 명령을 받아들이는 것이 자발적인 죽음과 건강의 회복 같은 것이라는 점을 인식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죽음의 시점에서 새로 탄생된 자로 만들며 건강을 회복시켜 주는 것도 신의 능력 안에 있다고 믿었다. 즉 그들은 중생이란 개념을 제의에 의해서 생명의 능력들이 옮겨 심어지는 것으로 이해하였다(Prisendanz). 이렇게 볼 때 중생의 개념이 밀의 종교 내에서도 발견된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하지만 바울의 적용과 비교해 볼 때 밀의 종교의 중생 개념은 바울의 중생 개념과 엄격하게 구분된다. 즉 바울은 성령의 새롭게 하심이란 표현을 통하여 중생의 과정을 보여주었는데 이는 밀의 종교에서 제의를 통하여 중생을 얻는 개념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뿐만 아니라 바울의 중생 개념은 질적 변화를 내포하기 때문에 단순하게 새롭게 된다는 관념만을 가진 밀의 종교 중생관과는 분명코 다르다.
3. 결론에 대신하여
'터툴리안'(Tertullian)이 인정했던 바와 같이 헬라적인 중생과 그리스도교적인 중생 사이에는 어느 정도 연관성을 지니지만 그 차이점들도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다. 밀의 종교를 숭배하는 자들은 인간 존재를 두 부분으로 나누어 생각하는데 하나는 멸망당할 본성이요, 다른 하나는 영적 본성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들 두 본성들은 한 인간 안에 내재하면서 어떤 때는 멸망당할 본성이, 어떤 때는 영적 본성이 발현된다고 생각하였다. 더욱이 그들은 황홀경을 통하여 자신 안에 내재된 영적 본성을 불러내고 그것을 통하여 중생한 영이 발현되는 것을 경험하곤 하였다. 하지만 그들의 비밀 제의에서 황홀경만이 중생을 나타내는 의식은 아니었다. 오히려 황홀경을 통한 중생의 경험은 부차적인 의식이었고 주요 의식은 지속되어지는 영 안에서의 새로운 생명을 갈구하는 의식이었다. 이 의식은 황홀경을 통한 중생의 경험을 한 사람이 거치는 의식으로서 또 다른 중생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경험한 중생을 지속적으로 간직하기 위한 의식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 특별한 종류의 의식을 신비적 그리스도교의 일파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종교 의식에서의 중생 개념과 딛 3:5의 중생 개념 사이에는 분명히 다른 차이점이 두 가지 있다. 첫째, 그리스도교의 중생에는 황홀경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오직 새 생명의 지속적인 활동만이 나타날 뿐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의 중생은 중생의 경험이 오직 어떤 개별적인 신비가들에게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경험하는 근본적인 사건이다. 둘째, 그리스도교의 중생 개념에는 창조 개념이 포함되어 새로운 창조라는 의가 내포되어 있다. 즉 새로운 창조로서의 중생은 중생의 새로움이 지속되도록 계속해서 비밀스런 제의를 바쳐야 하는 밀의 종교와 전혀 다르다. 새로운 창조로서의 중생은 철저히 종말론적인 개념으로서 일회적인 사건이자 질적 변화의 사건을 가리킨다. 이처럼 바울은 중생의 범주 안에서 기본적으로 종말론적인 기독교인들의 존재에 관한 이해를 명확하게 제시하였다. 즉 바울의 이해에 따르면 중생의 생활은 미래적으로 사는 것이고, 그 특성은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지위를 보전하기 위하여 윤리적인 실행을 해나가는 것이다.
출 처 : 헤세드와 레마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