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한 두 페이지를 읽거나 소재를 보고 선택 한 건데 이유를 모르겠다며 출판사 편집자에게 질문했습니다.
편집자: 최근에 읽은 작가가 누구신가요?
질문자: 네, 윤성희 작가, 최은미 작가, 최진영 작가, 김금희 작가의 책을 재밌게 읽고 있어요.
편집자: 이름만 듣자면 그 분들이 지금 가장 소설을 잘 쓰세요. 물론 주관적 선호입니다.
이분들은 다 10년 이상 20년 이하 소설을 쓰신 분들인데다 지금 선택된 작가들은 오랜 시간 점점 더 잘 쓰게 된 작가들이예요.
먼저 사회적 이유를 찾아보면, 보편적인 시장의 선택에 의해 남겨진 작가들 중 여성 작가의
수가 물리적으로 많이 배출된 페미니즘 리부트 시기와 독자들의 필요가 맞물렸어요.
두 번째는 활동 연차를 보면 시간이 걸러준 측면이 있습니다. 당시 작품을 평가할 때, 문단 평론가들과 독자들의 평가가 맞아떨어져서 출판시장 매대 배치상 독자들의 눈에 잘 띄는 위치에 여성작가들의 책이 많아진 것도 하나의 이유입니다.
질문자의 질문을 들으며 제일 먼저 든 생각은 왜 저런 걸 질문할까? 작품이 좋으니까, 자신의 마음을 움직였으니까 선택한 게 아닌가?
저걸 남에게 그것도 편집자에게 묻는 이유가 원가요? 따지고 싶었습니다. 자신이 선택해놓고 내가 왜 이걸 선택했나요? 이유를 묻는 게 이상했습니다.
이렇게 질문하는 건 가능하겠지요.
저는 이런 저런 이유나 장점 때문에 요즘 여성 작가 소설을 많이 접했는데, 소설 편집자의 입장에서 사회적 요인을 찾을 수 있을까요? 라든지 제가 곰곰히 생각해도 이유를 못 찾아 답답한데, 왜 저는 여성작가의 소설에 자꾸 손이 갈까요? 라는 질문은 이해합니다.
그런데 이 분은 자신의 선택이유도 밝히지 않은 채 질문했습니다. 주위에 물어볼 사람이 없다면서요. 불편한 마음이 훅 치고 올라왔습니다. 편집자는 아무렇지 않게 말을 받았고, 납득할 만한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다음에 제게 든 생각은 "왜 제 손에 드는 책마다 남성작가 작품일까요?" 를 제대로 질문해보지 못한 것이 부끄러웠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질문할 생각조차 하지 않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아니 질문의 중요성을 배우지 못하고 제 자신도 질문의 가치를 몰랐던 탓입니다.즉 질문두뇌가 작동할 여지가 전혀 없었습니다.
학교에서 가르쳐주는 대로 순응하고, 출판시장이 형성된 대로 만족하고, 도서관에 비치된 책과 비치되지 못하는 책에 의문 하나 없이 살았습니다. 뭔가 비틀어 생각하거나 거꾸로 보고 다르게 볼 자유, 질문할 자유가 없는, 아니 할 생각조차 못하게 구조화된 시스템 속에 자랐습니다. 순간 알 수 없는 슬픔이 가슴에 차올랐습니다.
학교 교과서에서, 서점의 책을 사는 순간에, 도서관의 책을 빌리면서 이상하지 않았습니다.
한 번도 교과서가 불균형하다는 생각, 출판 시장이 불평등하다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페미니즘을 접하기 전에는. 중년 남성의 질문을 듣고서야 새롭게 의문이 들었고, 오랜만에 의문을 가졌습니다.
생각을 더 진행해보니, 저는 정말 순응하는 데 최적화된 사람이었습니다.
수없이 불편하고 부당한 구조나 현실과
마주했을 텐데도 전혀 불편하거나 부당하다고 못 느꼈습니다. 몸이 바쁘다는 핑계로, 시간이 없다는 변명으로, 생각하면 골치 아프다는 이유로 아니 생각 자체를 못하고 넘어갔습니다. 알면서 지나치거나 몰라서 넘어가다 그렇게 생을 끝내면 안 되는데 말입니다.
오늘 길을 걸으면서 노란색 점자보도블럭을 밟으며 깜짝 놀라 비켜 걸었습니다.
또 길을 걷다보니 노란색 보도블럭이 없는 곳도 꽤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시각장애인들이 혼자 다니기에는 굉장히 불편하고 위험한 현실이었습니다. 지하철을 타고 오면서는 점자가 표시된 곳이 있나 살펴보았는데,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전에는 눈여겨보지 않았거나 몰라서 지나쳤던 일입니다.
비장애에 최적화되어 살아온 삶에는 장애의 불편과 위험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최근에 우연히 알게 된 시각 장애인 유튜버 우령님과 원샷한솔님이 아니었다면, 여전히 비장애의 시선과 행동반경 안에 갇혀 질문하지 않고 순응하며 살았을 겁니다.
중년남성의 질문 덕분에 이런 저런 질문과 생각이 많아진 새벽입니다.
이제 몇 시간이라도 자야겠습니다.
다들 편안히 주무시고 계시겠지요.
순응하기보다 질문하는 삶이 조금 고달프긴 해도 이상하게 기분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