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6회 천강문학상 수필부문 대상
항아리
소나기가 그었다. 빗물이 일필휘지한 뒤란 풍경은 동적(動的)이다. 옥수수 잎이, 호박 넝쿨이, 흰 보라 도라지꽃이 빗물체로 살아 꿈틀거린다. 갓 목욕을 마친 장독들의 때깔도 육덕지다. 반지레하지만 두루뭉술한 태가 꼭 촌부의 뒷모습 같아 관능과는 멀면서도 볼수록 정이 간다.
나란히 어깨를 겯고 있는 항아리들을 보니 슬며시 웃음이 난다. 아가리가 좁고 배는 불룩한 데다 굽도 없는 항아리들이 구석기시대의 유물인 빌렌도르프의 비너스를 꼭 닮은 탓이다. 얼굴의 윤곽은 철저하게 무시한 반면 가슴과 배, 엉덩이는 지나칠 정도로 풍만한 조각상은 다산과 풍요의 상징이란다. 크기에 관계없이 펑퍼짐한 복부가 영락없는 여성성의 추상이다. 당시의 크로마뇽인들에게나 현대인들에게나 항아리 형태의 몸매는 다산의 기원을 넘어 어쩌면 신앙 차원인지도 모르겠다.
신혼 적, 시댁을 찾는 일은 어려운 이의 집알이를 하듯 번거롭고 불편했었다. 식구들이 워낙 많기도 하려니와 데면데면한 시어머니 탓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견디기 힘든 게 사람 사이를 가르는 침묵이라는 것을 그때 절감했다. 안절부절 겉도는 나를 마치 오래 써 온 세간처럼 여기는 남편 또한 낯설었다. 그의 말마따나 일 년에 고작 네댓 차례가 아니겠는가. 때마다 스스로를 담금질했지만 하소연할 친정조차 없는 마음은 늘 도린곁을 맴돌았다.
이방인처럼 외도는 내게 그나마 곁을 내 준 건 뒤란이었다. 군데군데 돌을 박은 토담이 둥글게 안고 있는 뒤란은 제법 널찍하고 아늑했다. 툇마루에 앉아 아가리도, 몸뚱이도, 귀때도, 어감까지도 동글동글한 항아리들을 보면 날 서있던 가슴 언저리가 절로 유연해졌다. 야트막한 토담 너머로 보이는 하늘과 모로 누운 능선, 부리부리한 눈망울을 가진 참나무들, 어깨동무를 하고 있는 옹기들, 키 순서대로 늘어선 채송화와 맨드라미, 해바라기가 한 채의 집을 불러왔다. 오래 전 지상을 떠난, 작고 누추했지만 사철 온기가 끊이지 않았던 나의 옛집이 그렇게 되살아왔다.
옹기가 오지그릇과 질그릇을 아울러 일컫는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질흙을 비교적 낮은 온
도에 맨몸뚱이로 구워낸 것이 질그릇이고, 잿물을 입혀 구워낸 쪽이 오지그릇이란 것은 덤으로 얻은 수확이다. 뿐일까. 장독대에 즐비한 옹기 또한 용도와 모양새에 따라 제각각 다른 이름을 갖고 있었다. 아래위가 좁고 배가 불룩해 주로 장류를 저장하거나 곡식을 담는 데 쓰이는 항아리, 시누이들처럼 엇비슷한 외모의 소래기와 버치, 자배기, 궁굴게 생긴 두멍과 방구리, 두루미처럼 길쭉한 아가리를 쭉 빼고 있는 식초 항아리며 이름조차 생소한 중두리랑 바탱이…….
동서들이 곰살궂게 설명을 해 줬지만 옹기 일가와 친해지는 건 서른 명 남짓한 조카들 이름을 외는 것만큼이나 버거운 일이었다. 질박하면서도 소소했으나 거뜬히 식구들의 사철 밥상을 바라지해줬던 옛집의 장독대가 자꾸만 오버랩 되었다.
옛집의 장독대는 볕바른 자리에 있었다. 그곳은 햇살의 놀이터이자 냄새들의 천국이었다. 고춧가루와 엿기름, 찹쌀가루, 메주가 바다에서 시집 온 소금과 합방해 시나브로 익어갔다. 햇볕과 바람, 시간이 숙성시킨 장맛은 재료가 여럿이되 겉돌지 않고 그윽했다.
유년의 봄은 장독대로부터 시작되었다. 햇살이 꼼지락꼼지락 돋을 무렵, 이가 빠진 사발에 양껏 모래 밥을 퍼 담고, 진달래꽃잎을 찧어 고추장을 담그고, 연둣빛 머위 잎으론 김치도 담갔다.
“에구 이 방구리들아, 기어이 사달을 낼라.”
할머닌 잔소리가 여간 아니었지만 당신의 발소리가 삽짝을 나서기도 전 장독대로 모여들곤 했다. 토란잎 널따란 우산 아래서, 궂은비에도 젖지 않는 존재가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땐 키가 간장항아리만큼 자라 있었다.
옹기의 값어치는 내용물의 양에 따라 결정되었다. 키가 훤칠한 옹기가 갓 조림(造林)된 나무처럼 즐비한 집들은 한결같이 행세 깨나 하던 집안이었다. 장독대야말로 그 집안의 재력을 증명하는 공간이자 안주인의 자존심이기도 했다.
옛집의 장독대는 단출했다. 묵향을 잊은 벼루가 여럿, 장독대와 마당 어름에 놓여 있는 게 여느 집과 달랐을 뿐. 누대에 걸쳐 훈장으로 업을 삼았던 가계였다. 강미(講米)*로 쌀 한 말을 받든 한 되를 받든, 배우러 온 사람을 내치지 말라는 가훈은 그럴싸했다. 반면 아녀자들에겐 모진 삶의 멍에로 대물림되었다. 가뭇없이 이상만 추구하던 아버지가 질화로 곁을 떠난 후, 어머니의 삶은 더 팍팍해졌다. 가장 먼저 하루를 열고 밤이 이울도록 삶의 물꼬를 트러 바동거렸으나 대물림된 가난을 벗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래도 어머닌 사명처럼 장독간 둘레에 꽃을 심었고 몇 안 되는 항아리를 부지런히 닦았다. 차 있는 날보다 비어있는 날이 더 많았던 곳간에 비하면 장독의 인심은 그나마 푼푼했다. 어쩌면 당신은 헛헛한 속을 그렇게나마 채우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옛집을 떠나오던 날, 장독대부터 오래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러나 그 많은 추억들을 싣기에 일 톤 트럭은 너무 좁았다. 그렁그렁 빗물 담은 항아리의 눈매가 둠벙처럼 깊었다. 허옇게 곰팡이 난을 치는 벼루들의 핼쑥한 낯이 빈집처럼 쓸쓸했다.
나이 한 살씩 생애에 얹으면서 어머니의 장독대엔 빈 독들이 늘어 간다. 당신의 존재를 한층 윤이 나게 지탱하던 옹기들은 빈 하늘을 담고 있거나 물구나무서기를 하고 있다. 시판용 된장에 익숙했던 혀끝이 점차 시댁의 장맛에 길드는 동안 당신의 등도 수북해졌다. 그럼에도 어머닌 매해 본능처럼 장을 담근다. 열한 가족을 먹여 살리는 손맛이 아직도 항아리마다 그득하다. 열다섯 살에 시집와 여든셋에 이르기까지, 어쩌면 뒤란에서 혼자 운 날도 수두룩할 것이다. 모진 불꽃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그렇게, 어머닌 조금씩 단단해졌으리라. 가마 속 같은 반 세기가 어머니로 하여금 맛깔스럽게 말을 빚는 법을 잊게 한 건지도 모른다.
어머니에게도 나는 질그릇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나이 마흔에 얻은 막내가 자기(瓷器)처럼 섬세한 색시를 얻길 바랐으나 우여곡절 끝에 들어온 며느리는 도기(陶器)처럼 투박했다. 동서들 사이에선 홈홈하다가도 당신 앞에선 꼬막처럼 입을 다물었다. 더러 한 줌 햇살이나 바람을 기대했으나 마음 어귀에 비밀번호를 설정해 두고 출입을 제한했다.
세상의 모든 꽃들은 이울고 나서야 단단해진다. 여자를 벗고 얻은 어머니란 이름은 몸도, 마음까지 둥글게 했다. 당신의 어투는 여전히 테석테석하지만 말씀의 이면에 숨은 참뜻을 마음이 먼저 마중하기에 이르렀다. 고부간에 발효가 진행되는 동안 무수한 날들이 피었다 이울었고, 꽤 여러 번 항아리 속의 주인도 바뀌었다. 애초 마음 어귀에 금줄을 친 장본인이 나였다는 걸 그제야 알았다. 그토록 멀고 컸던 ‘시’ 자와 ‘친정’의 간격으로부터 어머니를 읽었을 땐 당신 또한 장독대와 더불어 쇠락의 길에 접어든 무렵이었다.
한 줌의 흙이 불을 만나 항아리가 되기까지의 과정 또한 산고(産苦)나 매한가지였으리라. 그 오랜 인고의 시간이 여자로서의 숙명이었다면 철철이 장을 담그고 발효시켜 숙성에 이르기까지 겪은 진통은 어머니로서의 삶이었으리라.
손끝이 야물지 못하다 지청구를 하시면서도 넘치도록 장을 담아 주시는 어머니, 쪼그려 앉은 뒷모습에 항아리가 우련하다. 장(醬)이든 사랑이든, 비우기 무섭게 채워지는 점에 있어서 항아리와 어머니의 속성은 유사하다. 여느 때와는 달리 목소리에 잔뜩 힘이 든 당신, 장독대와 함께할 때 어머니의 자존은 빛을 발한다. 한 고비씩, 어머니가 끌어안았던 시간들을 접하며 아직은 설익고 옹색한 나도 조금씩 깊어지리라. 세상의 모든 것들을 둥글게, 둥글게 안아 주는 항아리의 바탕을 조금씩 닮아 가리라. 아주 오래 전, 내 어머니가, 어머니의 어머니들이 그러했듯.
말끔히 목욕을 마친 장독대는 도량처럼 정(靜)하다. 경건한 풍경의 한가운데 빌렌도르프의 비너스가 오밀조밀 사대(四代)를 위시하듯 앉아 있다. 태고부터 대물림된 조각상의 무표정이 그제야 활짝 웃는 듯하다.
수 세기 동안 대가족을 먹여 살렸으니 이만한 보시가 또 있을까. 동글동글 웃고 있는 항아리들이 내 눈엔 다 보살 같다. 덜어도, 덜어도 즉시 채워지는, 어머니들 가슴 안에 화수분 하나 산다.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처소다.
* 지난 날 글방 선생에게 보수로 돈 대신 바치던 곡식
조현미
- 1971년 11월 16일, 충남 청양 출생 2012년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2001년 인천시민문예 신인문학상 수필 부문 대상 2004년 CJ문학상 수필 부문 금상 2007년 경기 사이버 문학상 수필 대상 2008년 경기도시공사 ‘경기사랑愛’ 수필 공모전 대상
제6회 천강문학상 수필부문 우수상
헌책방을 읽다
텅 빈 가게, 빛바랜 간판만이 여기가 한때 버림받은 책들의 처소였음을 알린다. 아무런 안내가 없는 것으로 보아 머지않아 지도에서 사라질 모양이다. 발품을 보태 법서를 사던 시절부터 허기를 채워준 곳인데, 허전한 걸음으로 나는 다른 보물섬을 찾아 떠난다.
헌책방의 질서는 뒤죽박죽이다. 정해진 자리는 형식일 뿐 계급이나 서열이 없다. 펄벅의 대지 위에 한국의 야생화가 피고 백과사전에 눌린 시집이 숨을 못 쉬겠다고 엄살을 떠는가 하면, 돈키호테가 이순신 장군에게 창을 겨누며 어서 칼을 빼라고 으름장을 놓는다. 큰스님의 어깨에 발을 척 걸친 동화를 보며 명랑만화가 깔깔거리고 명심보감이 옆에서 웃음을 꾹 참으며 앉아있다. 법전을 깔고 앉은 사형수의 참회록과 명작 위에 드러누워 낮잠을 즐기는 잡지는 단연 압권이다.
설욕을 벼르는가, 예리한 지혜에 탄탄한 논리를 입고도 무명 한 조각만 걸친 화보에 패한 철학이 침묵하고 있다. 처세술만 찾는 세상에게 단단히 삐쳤는지, 인문학은 구석에서 등을 돌리고 있다. 바깥에는 저고리에 지문조차 찍히지 못하고 소박맞은 시집과 나이조차 까맣게 잊은 수필집이 단체로 결박당한 채 마지막 봄 햇살을 쐬고 있다. 자릿값도 못한 죄, 저들은 곧 저울대에 올라 영혼이 가난한 세상에게 동전 몇 닢 건네고 떠날 것이다.
한물간 몸이지만 세상에게 할 말은 있다. 책장에 빳빳이 서서 지적 허영의 배경이 되는 건 싫다. 방구석에서 뒹굴다가 냄비 밑에 깔려 뜨거운 맛을 보느니 싸늘한 아랫목을 데우는 불쏘시개가 낫다. 가난한 고시생의 법서처럼 몸이 닳도록 읽히고 싶다. 서점 창고에서도 밀려나 산골로 전학 온 소녀처럼 옷자락에 먼지가 묻을까 새침을 떨고 있는 새 책은 아직 모른다, 벌 나비에게 탐닉 당하지 못하고 스러지는 꽃의 슬픔을.
앞만 보고 달리는 세상에 지나간 시간을 잡아두는 곳이 있다는 건 그나마 다행이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것들이 과거로 유폐幽閉되었을까. 성벽 같은 책장과 지층처럼 쌓여있는 책 속에 묻히면 나는 잃어버린 과거를 찾아 떠난 방랑자다. 역사의 강물에서 노를 젓다가 티벳에서 불어오는 명상의 바람에 마음을 실어도 본다. 눈에 띄는 책장을 훑다가 잘 우려낸 문향文香에 취해 언어의 소우주를 유영하기도 한다. 이곳저곳 뒤지다가 반짝이는 무엇을 발견했을 때, 그 기쁨은 방금 제본을 마친 신간보다 새것이다.
활자로 낸 길을 가다보면 누군가의 흔적을 만난다. 의미를 알 수 없는 낙서가 있는가 하면 잠시 멈추었다가 가라는 신호도 있다. 앞서 간 사람은 어째서 밑줄을 주욱 긋고 그 위에다 빨간 별을 켜놓았을까. 마음의 풍경風磬이 울리는 바람의 길목이거나, 반짝이는 깨달음 한 조각 주운 곳이거나, 아니면 문장 너머에 있는 함수를 풀지 못해 건너뛴 자리일 것이다. 나보다 먼저 떠난 사람이 몇 번이고 되돌아와 서성거린 자리에서 나는 이 땅에 온 영혼들의 지적방랑을 읽는다.
존재의 의미를 찾아 형이상을 헤매는 철학자. 태초에 생성된 미립자를 찾아 까마득한 밤하늘을 떠도는 천체물리학자, 진화의 고리를 찾아 황량한 사막을 헤치는 생물학자. 문명의 사금파리를 찾아 굳은 땅을 파는 고고학자, 혼돈에서 진리의 조각을 찾는 방랑자는 외롭다. 아니, 깨달음을 찾아 홀연히 떠난 붓다만큼 고독해야 한다. 과거로 떠난 것들이 퇴적된 세계는 두꺼운 침묵으로 말을 하기에.
배낭을 메고 홀로 변산반도로 떠난 적이 있다. 이 땅의 숨은 연대기가 차곡차곡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채석강彩石江, 지층을 몇 장 넘기면 백제의 병졸이 벌떡 일어나 함성을 지르고, 몇 권 넘기면 털북숭이 조상이 사전에 없는 말을 걸어오고, 계속 넘기면 거대한 공룡이 달려들 것 같은 풍경은 말 그대로 압권이었다. 발아래에서 파도가 뭐라고 철썩거리는데, 두꺼운 시간의 지층 앞에서 나는 한없이 납작해지고 말았으니, 반세기 동안 써내려온 내 일기는 낱장에 지나지 않음을 그날에야 알았다.
나를 읽으면, 목마른 세상을 적시는 물 한 잔이나 될까. 영혼의 때를 닦는 한 소절 시도 아니고 내면의 풍경소리를 깨우는 한줄기 법문法文은 더욱 아니다. 사람의 향기가 그리운 가슴에게 잔잔한 감동을 주는 산문이라면 자릿값이라도 하겠으나 통속소설처럼 자기도취에 빠져 나열한 활자, 내 전기傳記도 먼지를 뒤집어쓴 채 구석에서 웅크리다가 폐기될지 모른다. 미리 알았다면 기승전결이라도 갖추었을 것을, 더 성찰하고 교정했다면 문장이 얄팍하지는 않았을 것을, 헌책방에는 지난 삶을 뒤져 나를 재발견하는 내가 있다.
내 삶도 반 이상이 과거로 퇴적되었다. 인생 이모작을 꿈꾸며 몸값을 한껏 낮추어도 불러주는 곳이 없어 이제는 정착할 기슭을 찾고 있다. 세상의 중심에서 밀려 시인지 소설인지 정체성을 찾는 잡지처럼 표류하다가 외딴 헌책방에 닿았을 때 산란한 마음이 정돈되는 까닭은 왜일까. 내일을 위해 오늘을 알뜰하게 살지만 내일은 오늘에게 아무 것도 주지 않는다. 낡고 닳아 쓸모없이 보여도 어제는 오늘에게 추억과 지혜 그리고 마음의 휴식을 준다. 어제의 모든 것이 한 자로 정돈되는 헌책방에서 헌, 그것은 온고지신溫故知新의 미학을 품은 단음절 언어이기 때문이리라.
고독한 방랑자들이 찾아낸 지식과 사상의 채석강, 헌책방에서 알았다, 반짝이는 것은 현란한 조명 아래 나 보란 듯 서있는 게 아니라 삶의 뒷면에 안 보일 듯 숨어있음을. 세상의 중심에서 밀려나 그동안 못다 읽은 책장을 넘기다가 찾았다, 뒤죽박죽 내 안의 우주에 질서를 잡는 것은 두껍고 근엄한 법전이나 얇고 약삭빠른 처세술이 아니라 허름하고 컴컴한 구석에서 스스로 캐낸 별임을.
책은 해져도 활자에 담긴 의미는 낡지 않는다. 시대의 조류에 쓸려 헌책방이 사라져도 어느 날 문득 우리는 길을 떠날 것이다, 지금은 금맥을 찾아 도시라는 이름의 정글을 뒤지지만, 멍석자리에 누워 별을 헤던 우리는 누구나 별똥별 주우러 산 너머로 떠난 지적 방랑자이므로.
김이랑 (본명 : 김동수)
- 1960년 12월 16일 태백에서 출생해 정선에서 성장 영남대 법대 중퇴 제1회 대한민국 독도문예대전 대상 제1회, 4회 경북문화체험 수필대전 은상 2012 낙동강전투 스토리텔링 우수상 2013 전국유배문학 스토리텔링 동상 인터넷 한겨레 논객
제6회 천강문학상 수필부문 우수상
무종[霧鐘]
새벽이면 세상의 아버지들은 바다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간다.
짭조름한 바람에 아침 햇살이 반짝이면 부두에 매여 있던 배들도 뚜우뚜우 뱃고동 소리를 내며 출항을 서두른다. 세상물살에 등 떠밀리듯 떠내려가던 아버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던 기억이 갯벌처럼 질척인다. 언 손을 비비며 고향 하늘을 바라보시던 아버지의 향수를 헤아려 주듯 바다 갈매기가 끼룩끼룩 가슴을 후린다.
장지문으로 새어나오던 아버지의 한숨이 자식들의 귓전을 맴돌다 스러졌다.
마당에서 두엄더미를 해작거리던 수탉 한 마리를 본 기억이 있다. 갑자기 몰려온 검은 구름이 비를 퍼붓자 날개 젖은 수탉은 횃대에 오르지 못하고 담 밑에 웅크리고 있었다. 그 수탉은 마치 싸움에서 패배한 패잔병 같았다. 축 처져서 푸드득거리던 아버지의 어깨도 그랬다.
세상이라는 거대한 함대에 승선했던 항해의 수고가 암초에 걸려 부서지는 이변은 한 가닥 심지까지 꺼버린 듯 지독한 안개로 돌변했다. 아버지의 갯바위 같은 의자가 치워진 자리에서 허공으로 치솟은 크레인 탑에 좌절과 고통이 매달려 있었고 겁에 질린 자식들은 짐승처럼 떨었다. 가족을 거느린 가장은 신음소리 조차 내지 않았지만, 모로 누운 아버지 옆으로 다가가면 파리한 몸에서 쩌 정 쩡 얼음 갈라지는 겨울강소리가 들렸다. 다시 봄을 맞기까지 성난 파도는 숱한 시행착오를 밀어다 놓고 저만치 도망갔다. 노을에 물들기까지 죽으면 죽으리라는 심줄 같은 각오로 다시 걸어 나왔을 때야 잿빛안개는 조금씩 걷히기 시작했다.
세상의 아침은 모든 아버지의 피곤한 눈을 비비며 군중 속으로 걸어가게 한다. 육지 한 모퉁이에 저마다 이루어 놓은 가족을 위해 힘차게 솟아오르는 태양을 마중 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태양을 마중 나가는 길은 소소리바람 불어와 어지럽고 춥다. 하지만 아버지들은 무거운 짐을 검불처럼 지고 걸어간다. 그러했던 내 아버지의 모습이 떠오른다. 식솔을 거느린 아버지의 등으로 안개비가 자욱하게 내리고 또 내렸다.
안개가 자주 출몰 했던 아버지의 바다를 벗어나고 싶었지만 직면했다. 푸른 깃발을 내걸고 망망대해서 살아남기 위해 사투를 버릴 아버지, 앞을 가늠 할 수 없는 해무로 표류중일 때 포구로 인도하는 무종[霧鐘]이라도 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아련한 종소리가 가까이 들리도록 아버지의 귀를 재촉 하면 아버지의 가슴에 달린 자식들의 이름표가 반짝였다. 어떤 처지에서도 포대기의 끈을 목숨처럼 쥐고 놓지 않았던 가장의 손, 가족이라는 인연이 해조음과 어우러진 비바체로 외로움을 달래주는 노래가 되었다면 얼마나 다행인가, 힘든 상황을 내색하지 않았던 아버지가 그리운 날이면 흩뿌려진 흔적이라도 찾을까 싶어 바다로 나간다.
배한척이 들어온다. 어부의 고독을 어느 부두에 내려놓고 오는지, 담보로 잡혔던 자식들이 만선滿船의 뒤를 힘껏 밀었는지, 뱃머리가 씩씩하다. 바다는 시간의 간극에 대해 의태구연하다. 폭풍이 무색하리만치 평온하다, 그렇다 해도 함부로 다가가지 못한다. 세상 물을 다 받아드린 위대함을 보여주면서도 냉정하기가 엄청나니 말이다. 기로에 선 사람들이 곧잘 바다를 찾아온다, 아름아름 터득한 이야기가 해변에 누워 있다는 평범한 아포리즘들, 바다는 식상한 잠언을 왜 싫어하는지 조금은 알 것 같다. 삶에 지친 저마다의 발길을 비장의 지주대로 잡아 주는 스승 같은 물두멍으로서, 각자 처한 위치에서 준비한 제 그릇에 소화할 만큼 담아가기를 원하기 때문일 게다,
아버지의 두 발을 거두어들이는 해상의 달밤은 처연토록 교교했다. 나무처럼 직립한 부성이 아름다워서일까,
프랑스 철학자 ‘엘베시우스’의 내리사랑이라는 명언을 떠올려 본다.
‘부모의 사랑은 내려갈 뿐 올라가는 법이 없다. 사랑이란 내리사랑이므로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은, 자식의 부모의 대한 사랑을 능가 한다’ 어련한 말씀 아니겠는가, 폭풍이 잦은 바다에서 홀로 겪어야 했던 아버지의 고통에 대하여 자식들은 얼마나 괴로워했는가, 칠흑漆黑같은 밤바다의 고독을 조금이라도 느껴 보았는가, 검푸른 물이랑에 숙연한 자세로 다가서면 아버지의 바다는 숨기고 싶은 치부를 툭 건드려 준다. 스멀스멀 기어 나온 회한이 아버지를 찾는다. 뚜 우 뚜우 떠나는 뱃고동 소리에 눈시울이 젖노라면 바다는 실 컨 울어도 좋다는 손짓을 한다. 바다의 비릿한 냄새가 식솔의 젖줄이었다고 고백하면 초심을 잃지 말라는 당부도 잊지 않는다. 밤하늘의 별들을 품고 자식들의 꿈을 희망의 등대로 안내하는 아버지의 바다, 하여 엄위하고도 위대함에 정비례 되는 바다의 감성지수는 적잖이 높다. 삶의 여정이 고해苦海라는 관념을 깨고 긍정적인 가치관을 갖는다면 누구나 힘차게 저어 가볼만한 매력 있는 바다다.
아버지의 바다를 찬양한다. 해초의 냄새가 아버지의 냄새처럼 든든하고 미역이 풀풀 살아 펄럭이는 삶의 현장이 우리들의 가정이기 때문이다. 쪽빛으로 넘실대는 파도의 춤 그 유연한 자세로 세상을 바라본다면 나름 잔잔한 여백을 즐길 수도 있으리라.
아버지의 정신은 바다를 닮아 건강했지만 곧았던 등은 휘어졌다. 그 등을 펴 들릴 수 있는 세월이 다시 돌아온다면 이보다 더한 영광이 어디 있을까 싶다, 바다 속을 들여다본다. 다시마와 청각 바다가 내는 것을 먹고 마시며 자식들의 근육을 키우신 아버지의 유전자가 보인다. 바다 속으로 들어가 그 뼈를 집으려 하면 곧 사라진다. 아무리 손을 뻗어도 허사다. 회한의 안개 속을 허우적거리자 안전한 포구로 돌아가라는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다. 몽환에서 깨어나자 살구 빛 낙조가 분분한 넋두리를 갈마 안는다. 아버지의 바다는 격랑도 일지만 어둠을 밝히는 횃불 같은 은유로 영원히 철썩일 것이다.
소박한 마당에 꽃들이 피어난다. 얼굴을 비비며 웃는다. 검은 이끼에 발목을 접질리며 바다로 나간 아버지의 수고가 올망졸망한 짐을 싣고 육지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이제 자식들은 그 품에 안겨 인내로 다져진 아버지의 가슴을 따습게 데워드릴 차례를 기뻐하리라.
태초부터 바다는 해를 낳고도 생색내지 않는다. 어둔 밤이 지나면 반듯이 해가 떠오른다는 그 자명한 사실 때문인지도 모른다. 인간에게 내어주는 자연의 섭리 그런 배려가 있기에 자식들은 거친 바다로 아버지를 내몰고도 감사한 마음으로 견디는 것이다.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재기의 힘을 키웠던 원동력이라면 범선을 가득채운 아버지의 사랑은 가없이 높고 위대하다.
무종[霧鐘]이 울린다. 그 종소리 따라 세상 아버지들이 자욱한 안개를 헤치며 각 가정으로 돌아오고 있다. 아버지의 바다는 역동적이다.
조옥상
- 1949년 충북 청주 출생 2013년 평사리 문학상 수필 대상 건안대학교 수필공모전수필 대상 동서커피 수필 맥심상 보훈 문예 수필공모 장려상 여성조선문학상 수필 가작 한춘문학상 수필 가작 우암수필 문학상 수상 2014년1월 수필과 비평 신인상
<심사평> 제6회 천강문학상 수필부문
수필은 구체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삶에 대한 사유를 길어올리는 글쓰기 장르이다. 구체적 현실을 재료로 한 사유의 기록, 그러한 점에서 수필은 많은 종류의 글쓰기를 포함한다. 수필을 무형식의 글쓰기라고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시를 비롯한 특정 형식의 문학적 글쓰기와 달리 수필은 생활에서 얻은 생각을 ‘비교적 자유롭게’ 기록하는 글쓰기이다. 시나 소설은 자신 없어도 수필은 해볼 만하다고 여기는 것도 이와 같은 이유에서일 것이다. ‘비교적’ 자유롭다는 것은 모든 글이 그렇듯이 수필 역시 처음과 중간과 끝이 있어야 하고, 말하고자 하는 바를 잘 담아내기 위한 구성을 필요로 한다는 뜻일 것이다. 정해놓은 형식적 규율이 없다고 해서 수필을 생각나는 대로 쓰는 글로 생각하는 것은 큰 오산이다. 어떠한 소재나 내용도 가능하지만 그것을 효과적으로 드러내기 위해서는 마땅히 적절한 얼개와 형식을 갖추어야 하고, 자신의 경험을 보편적인 삶의 내용으로 펼쳐내는 성찰의 능력이 마련되어야 한다. 하나 더, 수필이 ‘자유로운’ 글쓰기 장르라는 것은 역설적으로 수필의 성취를 좌우하는 것이 개성(個性)임을 웅변해 준다. 최대한의 자유를 통해 가장 넓은 음역(音域)의 소리를 수용하고자 하는 속내가 장르의 속성에 반영되어 있는 셈이다. 하여 좋은 수필에는 추상이나 관념적 상투(常套)가 아닌 구체적인 사람이 돌올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문체의 매력과 참신한 발상, 그리고 구체적 사유에 대한 요청은, 결국 수필이 의미 있는 개성의 거소(居所)임을 뜻하는 것이다.
예심을 거쳐 본선에 올라온 삼십여 분의 작품들은 대체로 자신의 경험을 안정적인 문장으로 담아낸 것들이었다. 관심을 불러일으킬 만한 소재와 그것을 바탕으로 한 생각들을 적당하게 버무려서 마무리한 고만고만한 글들이 많았다. 익숙한 소재들과 다듬어진 문장들이 눈에 띄었고, 지극히 사적(私的)인 생활 감정을 토로한 글들도 일부 있었다. 전체적으로 일정한 수준을 보여준 글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지만, 자신의 생활 감정을 그윽한 감동이나 깊이 있는 차원의 성찰로서 길어 올린 글은 많지 않았다. 하여 수상작을 결정하는 일은 크게 어렵지 않았다.
「항아리」는 심사 대상 글들 가운데 발군(拔群)의 수준을 보여주었는데, 잘 쓴 수필의 한 모범이라고 할 만큼 소재와 생활감정, 그리고 생각들을 엮어가는 능력이 뛰어났다. 특히 소재인 항아리와 잘 어울리는 음악적 문체는 글 읽는 맛을 더해주는데, 수수한 듯하면서도 소재와 감정들을 이리저리 휘돌아 감아내는 능력은 단연 압권이다. 이러한 경이로운 절제력은 필자의 내공(內工)을 입증해주는 것으로서, 얼개와 문체에서 두루 확인할 수 있는 구심력과 원심력을 조화시키는 능력은 이 글을 하나의 아름다운 음악(音樂)으로 경험하게 한다. 일상의 경험을 바탕으로 항아리와 여성성, 시간과 인간관계에 관한 다기한 생각들을 펼쳐내고 그러모으는 능력은 대상에 값한 만큼 충분히 신뢰할 만하다.
「헌책방을 읽다」는 사람살이의 다양한 모습과 오늘의 현실을 두루 생각하게 하는, 인문적 성찰 능력이 돋보이는 글이다. ‘헌책방’을 통해 주변으로 밀려난 것들을 따라가는 이 글의 시선은 자본-현실의 지리(地理)뿐만 아니라 생의 보편적 내력까지 생각하게 한다. 헌책에서 먼저 읽은 이의 흔적과 마음을 헤아리는 섬세함, 헌책방의 풍경을 유머러스하게 형상화하는 능력은 서로 겯고 트면서 이 글을 맛과 영양을 두루 갖춘 것으로 만들어놓았다. 돌올한 개성과 구체적 실감을 모두 갖춘, 좋은 글이다. 반면 「무종(霧鐘)」은 서사적 구성과 문체가 매력적인 글이다. 서사성은 이 글에 신비로운 기운을 감돌게 하여 호기심을 갖고 글을 읽게 하는 핵심 요인이다. 안개 사이로 드러났다 사라지는 바다의 풍경처럼, 부성(父性)의 삶과 부성에 대한 그리움이 넘실거리는 이 글은 서사적 수필의 한 가능성을 생각하게 한다. 서사성을 근간으로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구체적 실감이 부족한 점은 아쉬운 대목이다.
심사위원 : 정목일(수필가), 김문주(문학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