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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부처님 오신 날
5/4
부처님을 맞이하려고
절 마당 한편에 불두화가 한창이다.
앞산뒷산에서 싱그러운 바람이
아카시아 향기를 싣고 온다.
까치들이 이쪽저쪽 나무로 날아다니며
골 안이 떠들썩하게 짖어댄다.
크고 작은 등불이
절 마당 그득 줄줄이 매달려 있다.
절 입구부터 불을 밝히고 있다.
목탁 소리, 염불 소리가
사방으로 울려 퍼지고
불제자들이 곳곳에서 모여든다.
저마다 마음속에 부처를 품고.
제 몸 아픈 건 묻어놓고
직장에서 쫓겨난 아들
용기 잃지 말고 새 직장 얻게 해달라고,
발가락에 붓을 끼워 그림을 그려도
이대로만 살 수 있게 해달라고.
나는 셋방살이를 해도
학생들이 마음껏 꿈을 펼 수 있게 해달라고.
마음을 비우고 남을 위해 기도를 한다.
(2) 사량도 가는 배에서
5/12
비 내리는 삼천포 선착장
바다, 배, 등대, 뱃고동 소리
멀리 보이는 크고 작은 섬들
배가 바닷물을 가르며 앞으로 나간다.
버스도 기차도 아닌 배를 탔는데
비 좀 맞으면 어떠랴.
갑판 위에서 비를 맞으며
윗섬 아랫섬 사이 바다를 달린다.
섬이란 건 모두 산이었다.
산은 바위들이 차지하고 있다.
섬 기슭 반반한 터라도 있으면
집을 짓고 곡식을 가꾸었다.
곡식을 가꿀 땅이 모자라는 대신
닳지 않는 바다가 있다.
바다에는 조개. 굴, 물고기 등 참 많다.
흙보다 바닷물이 더 소중하다.
흙에서 쌀이 나고 콩이 나고
채소가 나고 감이 나듯
물에서 물고기가 나고 밥이 난다.
바다를 믿고 바닷물에 기대 산다.
(3) 배고픈 고양이
5/14
할 일을 잃은, 배가 축 찌부러진
버썩 마른 고양이 한 마리
쓰레기통을 뒤지고 있다.
"쓰레기통이 바싹 말랐구나.
먹을 것이 모자랐던 것 같구나.
모자랄수록 나누어 먹어야지."
"집집이 쓰레기통이 말랐으니
내 배는 어디 가서 채우나.
imf라는 게 무섭긴 무섭구나."
쓰레기통만 마른 게 아니라
사람들 마음도 메마르고
온 세상이 다 말랐다.
"사람들이 나누어주지 않으면
이대로 굶어죽을 수는 없지.
훔쳐서라도 먹을 수밖에."
(6) 문 여는 재미
6/17
배움은 닫힌 문을 여는 것
새 세상이 있는 줄 모르고
한 쪽 세상에서만 지냈다.
문을 열려고 생각도 못 했다.
아예 문을 두드리지도 않았다.
문을 열고 보니
신기한 세상이 보인다.
새 세상을 못 볼 번했다.
문 두드릴 마음을 열어 준
하느님이 고맙다.
첫 문을 열고 들어서니
다음 문을 열고 싶고
다음다음 문이 자꾸 열고 싶다.
문 하나씩을 열어 가는 재미로
시간 가는 줄을 모르겠다.
첫 문을 열기 전에는
두드릴 문이 보이지 않았는데
이제는 문 하나를 열 때마다
다음 문이 기다린다.
열어 갈 문이 있어 즐겁다.
(7) 흙
6/19
고추, 호박, 상추, 배추, 강낭콩……
밭뙈기마다 채소들이 자라고 있다.
구김살 없이 싱싱하게 쑥쑥 자라는 것
싱싱하지만 조금 모자라는 듯한 것
빠득빠득 근근히 자라는 것
핏기 없이 겨우 목숨만 붙은 것
얼마나 부지런한가
얼마나 성실한가
얼마나 사랑하는가
흙은 주인을 알뜰히 살펴보고 있다.
하나도 놓지지 않고 성적에 올린다.
언제나 누구나 볼 수 있게
성적을 드러내 보인다.
일한 만큼 곡식들이 자란다.
저마다 제가 한 일을
되돌아보게 한다.
(8) 산길
6/24
나는 분명히 억산엘 다녀왔다.
대구 남부 정류장에서 버스를 탔다.
올 때도 남부 정류장에서 내렸다.
앞선 사람을 따라 다녀왔다.
버스로 가기도 하고
기차로 가기도 했다.
내가 앞장서 억산에 간다.
일행들은 내 뒤만 따라온다.
어디에서 어디 가는 버스로 갈아타야 할지
차시간은 언제인지
몇 번을 다녀와도
남 따라 다녀온 건 헛것이다.
먼저 다녀온 길은
앞장선 사람이 찾아낸 길이지
내가 찾아낸 길은 아니었다.
내 스스로 찾아야 내 길이 된다.
내가 살아가는 길도 그렇다.
산길을 오른다.
갈림길이 나온다.
저마다 제 갈 길로 갔다.
내가 갈 길은 어느 것일까
잘못하면 엉뚱한 데서 헤맨다.
(9) 강둑을 걸으며 1
6/26
강물이 흐른다.
쉬지 않고 흐른다.
시간이 흐른다
강물처럼 흐른다.
강물에서 물고기가 헤엄치듯
나는 세월 속에서 헤엄친다.
때로는 잔잔한 물결이었다가
거센 물결이 일 때도 있다.
얼음장이 덮일 때도 있다
(10) 풀벌레 소리
7/19
푸르름이 겹겹이 쌓인 숲 속
시원하게 흐르는 물소리
그 속에서 들리는 풀벌레 소리
풀벌레가 이만큼 목청을 돋구는 건
요즈음엔 처음 들었다.
풀벌레도 이 세상에서
가장 하고 싶은 게 있겠지.
저만의 남다른 아름다운 목소리로
뛰어난 노래를 부르고 싶을까.
저마다 목소리를 가다듬어
정성을 받쳐 연습을 하고 있을까.
사람의 목소리가 서로 다르듯이
저마다 다른 소리결이 있을 거야.
제 소리결에 맞는 가락을 찾느라
밤낮 쉬지 않고 노래 연습을 하겠지.
찬바람 불기 전에
자신 있는 목소리를 내고 싶어
서둘러 노래 연습을 하나 봐.
(11) 풀벌레 소리(2)
7/22
풀벌레는 태어날 때부터
노래쟁이다.
노래가 서툴 때부터
목소리가 부드럽다.
물소리가 시끄럽지 않듯이
풀벌레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가라앉는다.
물소리와 어울리면
더 조용해진다.
아무도 오지 않는 산골짝
돌팍 사이로 흐르는 맑은 물소리
숲 속에서 들려오는 풀벌레 소리
풀벌레 소리, 물소리처럼
마음이 가라앉는 시를 쓰고 싶다.
풀벌레 소리, 물소리 듣고
내 마음이 맑아지듯
내가 쓴 시를 읽고
풀벌레소리처럼 깨끗해지고
물소리처럼 넉넉한 마음이 된다면…….
(26) 흙
12/16
도움을 주는 흙이 되고 싶다.
없어서는 안 될 흙이 되고 싶다.
잡초를 안고 키워도
텅 빈 가슴보다야 낫지만
같은 값이면 곡식을 안고 싶다.
흙보다는 자갈이 많은 거친 땅
이대로는 곡식이 못 자란다.
굵은 돌은 골라내고
거름 넣고 주물러서
흙 속에 땀 냄새를 묻어야
곡식들이 마음놓고 자란다.
할아버지는 날만 새면
파일구고 뒤집고
엎치락뒤치락
흙과 함께 숨을 쉬며
흙이 되어 살았다.
흙이 바라던
곡식 씨앗을 품은 흙은
지성으로 곡식을 가꿨다.
흙의 품에서 생긴
옥수수, 고추, 고구마, 배추…….
알차고 탐스러운 살찐 열매들
흙과 한뜻으로 만들어 낸
할아버지 솜씨다.
(27)늘 푸른 겨울 나무
12/29
모두가 잎을 떨구고 겨울잠을 자는데
소나무, 대나무, 척백, 향나무는
추위 속에서도 쉼없이 일을 한다.
이 세상에 산소가 모자랄까 봐
더 부지런히 탄소동화작용을 한다.
겨울잠 자는 나무와 풀들의
몫까지 하느라 쉴 새가 없다.
소나무 숲에 다가가면
산소 만드는데 쓰일 햇볕이
소복소복 모여 있다.
솔잎에서 산소가 쏟아진다.
갓 나온 싱싱한 산소가 바글바글
솔숲에서 새물내가 난다.
지나는 사람들 얼굴이 밝아진다.
(28) 섣달 그믐
98/12/31
지난 한 해가 되돌아 보인다.
올챙이 알을 수조에 옮겨 기르다가
까닭도 모르고 죽이고 말았다.
뒷다리도 마저 나서
펄쩍펄쩍 뛰어다닐 날을 기다렸는데
어느날 갑자기 죽고 말았다.
내 잘못으로 아까운 목숨이 사라졌다.
나는 목숨을 함부로 죽인 죄인이다.
특수반에서 공부하는
덩치는 나보다 커도
책도 못 읽고 숫자도 모르는 미숙이
머리에 이가 기어 다니고
침도 흘리고 코를 흘려서
아이들이 모두 미숙이를 피한다.
미숙이 옆에 앉아서 코를 닦아 주고
함께 점심을 잡수시는 선생님
천사처럼 아름답게 보였다.
냄새가 난다고, 더럽다고
미숙이를 피해 다닌 내가 부끄럽다.
지하철 계단에 엎드려서
새까만 손을 내밀고 한 푼 달라고
애걸하는 할머니
책값이 모자랄까 봐
그냥 지나친 게
사뭇 마음에 걸린다.
이런 생각들이 떠오를 때마다
얼굴이 화끈거린다.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다.
(29) 토끼해의 꿈
98.1/2
새해 달력을 들여다본다.
착하고 영리한 토끼가 귀엽다.
올해는 내가 토끼가 된 기분이다.
함정에 빠진 호랑이를 살려 주었는데
살려 준 사람을 잡아먹겠다고 한다.
"어떻게 되었는지 처음부터
사실대로 해 보라"
토끼 말대로 호랑이가
함정에 다시 들어갔을 때
토끼는 사람 보고 그냥 가라고 했다.
토끼처럼 착하고 영리해지고 싶다.
토끼처럼 귀를 쫑긋 세우고
더 많은 정보를 받아들여야지.
세계의 정보를 내 것으로 녹여서
내 작품을 생산해야지.
컴퓨터의 파도를 타는
영리한 토끼가 되어야지.
(상주문학)
(30) 할머니께
1/4
산에서 땅에 쓰러진
고목을 보았습니다.
해가 바뀐 뒤에 보는 고목은
내가 정신을 차리게 했습니다.
나이가 차면 다른 나무들도
저 고목과 같이 될 것입니다.
짐승도 사람도 마찬가지겠지요.
하루가 모여서 한 달이 되고
한 달이 모여서 한 해가 됩니다.
쓰러진 고목도 하루에 조금씩
고목이 되어 간 것입니다.
하루하루 마음 상하지 않게
할머니께 귀여운 토끼가 되겠습니다.
(상주문학)
(31) 까치 집
1/20
만약에, 정말로 만약에
까치집이 없다면
까작 까작까작
정다운 소리도 못 듣겠지.
마음이 갑갑할 때도
까작까작 까작까작
까치 소리를 들으면
저절로 마음이 풀리지.
아침에 일어나 까작까작 까작까작
까치 소리를 들으면
저절로 마음이 밝아진다.
좋은 일이 일어날 것 같다
반가운 소식이 기다려진다.
만약에, 정말로 만약에
까치집이 없다면
오늘의 밝은 꿈도 사라지겠지.
우리 동네엔
까치 집 지을 미루나무가 있어 좋다.
까치집을 받치고 있는 미루나무
둥지 무게를 받아 안은 보람으로 산다.
폭풍이 몰아쳐도
눈비가 내려도
언제나 무던하다.
까작까작 까치 소리만큼이나
아름다운 까치 둥지.
(상주문학)
(34)드러난 강바닥
2/26
산에는 숲이 우거져야 하고
강에는 물이 흘러야
제격입니다.
금호강엔 물이 떨어져서
바닥이 드러났습니다.
껄끄러운 바위 바닥
가려졌던 못 볼 데를 본 듯
보기가 민망스럽습니다.
헤엄쳐 다니던 물고기들은
물을 따라 사라지고
황새 한두 마리 기웃대다
제 갈 길을 찾아 날아갔습니다.
낚시군이 붐비던 때는
지난 날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물이 흐르지 않는 강은
죽은 강입니다.
강물이 흐를 때는
헤엄치는 물고기,
찾아오는 오리, 황새
붐비는 낚시군들이
꼭 있어야 하는지
미처 몰랐습니다.
(35) 삼일절
3/1
팔십 년 전 오늘
평양에도 서울에도 부산에도
도시에도 농촌에도 어촌에도
어른, 아이, 여자, 남자
손에 손에 태극기 물결
서슬 푸른 왜놈의 총칼 앞에서
목숨도 바치겠다는
하나로 뭉친 굳은 마음
대한 독립 만세!
외치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립니다.
왜놈의 말발굽에 쓰러진
피로 물든 조상들
안타까운 모습이 선합니다.
용기 있는 우리 조상들
거룩한 조상들이 자랑스럽습니다.
오늘 아침 우리 집 대문의
태극기가 자랑스럽습니다
(36) 파라다이스 비단나비
땅 바닥이나 겨우 기어다니던
징그러운 벌레
못 생긴 벌레라고 흉볼 때도
속으로는 큰 꿈을 꾸었구나
남들이 별 생각 없이
되는 대로 살아갈 때도
변신을 꿈꾸고 있었구나.
말 없이 변해가고 있었구나.
나뭇잎을 갉아먹으면서도
하늘을 날 꿈을 꾸었구나
날개 모양을 생각하고
날개 색깔을 생각하고
꿀을 빨 입 모양을 생각했겠구나
번데기 속에서도
그냥 있은 게 아니었구나
하늘을 마음대로 날 수 있는,
저리 아름다운 무늬가 있는 날개를
네가 홀로 생각했느냐?
한 쌍의 보기 좋은 더듬이,
꽃봉오리에 사뿐 내려 앉을 다리
어느 것 하나
어울리지 않는 데가 없구나
(이후 문학)
(37) 동강의 비오리
3/7
동강 절벽에 아기 비오리,
먹이를 가져 올 엄마를
기다리고 있다.
둥지 밖으로 고개를 내민
보송보송 아기 비오리
배가 고파도
엄마가 먹이를 가져올 걸
믿고 있다.
오로지 엄마만 믿는다.
엄마만 곁에 있으면
두려울 게 없다.
아쉬운 것도 없다.
엄마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된다.
엄마가 둥지 안에 있으면
엄마 따라 둥지 안에 머물고
엄마가 밖에 나가면
엄마 따라 밖에 나간다.
어느 날 갑자기 엄마가
"얘들아,
겁내지 말고 날 따라 해라."
엄마가 낭떠러지로 떨어진다.
눈 딱 감고 엄마 뒤를 따랐다.
첫째, 둘째, 셋째 …….
50m 낭떠러지 강물에 떨어졌다.
엄마를 쫓아 강물을 헤엄쳤다.
좁은 둥지에서 나와
너른 세상에 첫발을 내딛었다.
엄마가 가는 길을 따라간다.
엄마의 길을 가는 아기 비오리
(38) 봄맞이
3/11
봄님이
겨울 삼동 긴 잠을 자고
기지개 뿌둑뿌둑 켜고
하품 크게 하고 일어난다.
몸이 개운하다.
목련이 맑은 얼굴을 내민다.
무엇이든지 뜻대로 될 것 같다.
눈 딱 감고
입 굳게 다물고
아예 말도 말자던 나무들이
부드러운 몸짓을 한다.
말이 하고 싶은 얼굴들이다.
겨울 탱자나무는 가시를
빳빳하게 세우고
누구든 덤비면
찌를 듯 날카롭더니
봄을 맞은 탱자나무는
손발이 나긋나긋해졌다.
바위도 말이 하고 싶은 얼굴이다.
(41) 나무를 심으며
4/1
느티나무를 심는다
아직은 어려도
내가 자라 어른이 되면
나무도 자라 어른이 되지.
싱싱하고 푸른 잎으로
두터운 그늘도 만들고
새들도 품안에 안겠지.
푸르름을 심자
새들의 보금자리를 심자.
감나무를 심는다.
내가 자라 대학교에 갈 땐
우리 집 지붕보다 더 커겠지.
가지마다 주렁주렁 감이 열리면
입학금도 되고 책값도 되지.
내 꿈을 심자
장래를 심자.
백일홍을 심는다.
꽃을 좋아하시던
할아버지 무덤 가에 심는다
꽃 보고 얼굴 활짝 펴시라고.
꽃 향기 맡으시고
꽃과 같이 고운 마음
자손 대대로 이어 주소서.
마음을 심자
사랑을 심자.
(이후 문학)
(46) 진달래꽃
4/17
우리 나라
산 어디에나
봄 되면
진달래 핀다.
진달래 붉게 물들면
산새들도 저마다
제 짝을 찾는다.
진달래 필 때쯤
보리가 패고
보리가 익기도 전에
양식이 떨어졌지.
굶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진달래꽃잎을 따먹었지.
산에만 가면
언제나 만날 수 있고
덥석 손을 잡아 주었지.
가난한 사람도
못 배운 사람도
아무나 정답게 맞아 주었지.
진달래꽃을 만나면
부황이 나 돌아가신
할머니 생각이 난다.
긴 긴 해에
보리 고개 넘던 때가 생각난다
(47) 오월
5/17
오월 바람에
색깔이 있다면
갓 피어난
나뭇잎 색깔일 거야.
푸른 들판을
달리고 싶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 보고 싶은
우리들 마음처럼
싱싱하게 자라는
푸른 색일 거야.
(48) 어버이날
5/18
지난 어린이날엔
공연히 마음이 설레었다.
마음을 가라앉힐 수가 없었다.
부모님이 나에게
무엇을 해주리라
욕심도 생겼다.
부모님은 용하게도
내 마음 알아 차리고
내가 읽고 싶던
새책도 사주시고
산 놀이, 들놀이
함께 가 주셨다.
잘못도 용서해 주시고
칭찬만 해 주셨다.
오늘 어버이날엔
부모님 마음도 설레일 거야.
어린이날 나처럼.
부모님이 나한테
바라는 건 무얼까?
기뻐하실 일은 무얼까?
착한 일만 찾아서 하고
용기 있는 사람 되는 것
날마다 나한테 당부하는 말을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
부모님이 바라는 대로
내 마음이 여물어 가고 있다는 걸
편지에 담아 드리련다.
(대구아동문학 99년 연간집)
(49) 스승의 날
5/19
오늘은 선생님이
더 거룩하게 보인다.
우리 선생님은
뭐든지 다 잘 아신다.
방학 때 내가
선생님 보고 싶었던 것도
미리 다 아셨다.
글씨도 제일 잘 쓰고
노래도 참 잘 부르신다.
국민체조도 잘 하고
구구법도 참 잘 외운다.
나도 선생님처럼 되고 싶다.
글씨도 선생님처럼 쓰고 싶고
걸음걸이도 닮고 싶다.
목소리도 닮도 싶다.
나를 칭찬할 때
웃으시는 눈 모습도 닮고 싶다.
어린이날엔
내가 선물을 받았는데
스승의 날엔
선생님이 선물 받는 날이다
뭐든지 드리고 싶다.
뭐를 드려도 아깝지 않은
내 마음속의 선물
선생님은 벌써 다 아실 거야.
(대구아동문학 99년 연간집)
(50) 작은 꽃
5/22
산에 오르다가
우연히 만난 꽃
집에 와서도
자꾸 생각이 난다.
하도 작아서 놓칠 뻔했던 꽃
키가 1Cm쯤 될까
꼬부리고 앉아서
한참을 데려다 봤다.
줄기, 잎, 꽃을 갖추고
땅에 뿌리를 박고 섰다.
암술과 수술이 있을 테고
꽃이 지면 열매를 맺을 테지.
아들, 손자 대를 이어 살아갈 테지
내 눈높이로는 작지만
불개미가 바라보면
몇십 길이나 높은 나무
우람한 나무에 핀
엄청나게 큰 꽃으로 뵈겠지.
코끼리가 나를 바라보면
갓 낳은 아기코끼리를 보듯
귀엽다고 여길까?
(대구아동문학 99년 연간집)
(51) 고엽제 후유증
6/6
미군이 뿌린 고엽제에
베트남 숲이 말라 죽었다.
사람은 맞아도 괜찮을 줄 알았다.
시원한 맛에
거리낌없이 맞았다.
사람도 풀처럼 나무처럼
말라 죽는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고엽제 후유증엔 약도 없다.
팔다리가 틀어지고
살이 썩어 들어간다.
온몸에 힘이 빠진다.
꼼짝도 하기 싫다.
풀잎처럼 나뭇잎처럼
천천히 말라 들어가겠지.
병원에서도 어쩔 수가 없단다.
고엽제를 뿌린 미군이 밉고
나라가 원망스럽다는 할아버지.
두 번 다시
전쟁은 안 일어나야 한다면서
우리들을 바라보신다.
(대구아동문학 99년 연간집)
(52) 흙
6/5
목이 말라 고개 떨구고
풀이 죽어 있던
고추, 파, 들깨, 참깨들.
바라던 비가 내리자
좋아서, 반가워서
방글방글 웃으며
살래살래 어깨 춤을 춘다.
눈만 뜨면 밭에 나와
흙과 한몸이 돼서
곡식을 내 몸처럼 아끼고
함께 숨을 쉬던 할아버지.
곡식이 가물 들면
할아버지도 목이 마르다.
지금 곡식이 웃는 걸 보고
할아버지 얼굴도 활짝 펴졌다.
역시 하느님 덕이라고
고마워하시는 할아버지.
사람이 아무리 애써 물을 줘도
턱도 없이 모자란다.
사람이 아무리 안달이 나도
하느님은 미리 다 아시고
때 맞춰 비를 내려 주신다.
(구미문학 99년 연간집)
(55) 불에 탄 새싹들
- 화성 씨랜드 수련원 화재
7/1
창문도 방문도 사방이 꽉 막힌 방
뜨거운 불길이 덮쳐 오고 있다.
방에는 어머니도 선생님도 없다.
유치원 아이들 20명이 갇혀 있다.
자다가 뜨거워서 깬 아이들
“아야, 앗, 뜨거워.”
“엄마, 엄마,”
“선생님, 살려 주세요.”
“선생님, 구해 주세요.”
뜨거운 불길을 피해
이 구석 저 구석으로 몰리다가
불길이 몸에 덮쳤을 테지.
어머니를, 선생님을 원망하며
숨을 거두었겠지.
재혁, 형민, 성옥, 세라, 가현, 나현,
소희, 찬영, 혜지, 연수, 수나, 재우,
형수, 도현, 송이, 한슬, 영종, 선교
수영……
이들은 천당이나 극락세계에서
인간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겠지.
믿지 못할 선생님들
믿지 못할 사람들
믿지 못할 세상을 믿은 걸
후회하고 있겠지.
(시와 동화 99년 가을호, 구미문학)
(58) 저마다 다른 나무와 꽃들
(제 할 일을 찾아 하는 것들)
7/25
나무들이 팔을 펼치고
구김살 없이 자라고 있다.
참나무, 오리나무, 물푸레나무…
싱싱한 푸른 잎을 흔들고 있다.
더없이 행복하다는 몸짓이다.
나무 그늘 짙은 숲 속을 걷다 보면
바보여뀌, 큰까치수염, 달개비, 질경이
구슬봉이, 짚신나물, 패랭이꽃,
개쑥부쟁이, 바위채송아, 꽃며느리밥풀…….
저마다 다른 모습으로
제가 할 일을 찾아서 하고 있다.
작은 꽃은 작아서 곱고
큰 꽃은 커서 아름답다.
색깔이 진한 것은 진한 대로
연한 것은 연한 대로 아릅답다.
제나름의 향기가 있어 좋다.
제가 피운 꽃을 자랑으로 여긴다.
한 자리에 섞여서 살아도
다른 꽃을 닮으려 하지 않는다.
조상 대대로 이어진 꽃이다.
이 세상에 있는 나무가
한 가지뿐이라면,
꽃이 한 가지뿐이라면
이 세상이 얼마나 멋이 없을까
저마다 달라서 귀하고 아릅답다.
(노인문학회,한국아동문학인 협회),
(81)수리부엉이의 울음
경기도 안성시 안성면 덕봉리 뒷산 고성산
수리붕엉이의 두 마리 구슬픈 울음 소리
조상 대대로 살아온 암벽 틈새
둥지에 아기수리부엉이 세 마리
우지끈 나무가 쓰러지는 소리에
놀란 아기수리부엉이 왕방울 눈
살려 주세요. 우리 귀여운 아기들
한 달만 참아 달라
애원하는 어미수리부엉이
둥지를 가려 주었던 숲이 없어지면
아기 새는 몸 숨길 데가 없단다.
산불에 그을린 나무라도
아기수리부엉이에겐 큰 힘이 된단다.
(이후문학 00)
(82)기다리고 있는 벚꽃 나무
벚꽃나무가 충정로 한길 가에
한 줄로 나란히 서 있다.
꽃필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수학여행 갈 차비를 갖추고
때만 기다리고 있는 초등학생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눈앞에 펼쳐질 새로운 세계
처음 만나는 산과 들, 낯선 사람들
들뜬 마음으로 가슴이 부풀어 있다.
다가올 새로운 세상을 상상하며
그날이 오기를 기다리는 벚꽃나무
그 얼굴이 더 없이 아름답다.
(이후문학 00)
(83)까치가 아침을 연다
내가 지나가는 길섶
향나무 바로 위에서
까치가 까작까작 신호를 보낸다.
까치 소리 듣고
덜 깬 새날이 환하게 밝아온다.
곁에 선 나무들이 옷매무새를 고친다.
까치가 보내는 신호를
저 멀리 동산 너머서도 들었는지
당장 무슨 일이 일어날 것같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다.
동글동글 곱게 다듬어진
붉은 불덩이가 솟아오른다.
솟는 해를 바라보면
내 팔다리에 힘이 솟는다.
(이후문학 00)
(84)낙엽을 비집고 솟는 봄
- 흙 (61)
최춘해
우리 할머니는
숱하게 많은 제삿날,
손자손녀 가족들 생일
적어 놓지 않아도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다.
아무 생각 않을 것 같은 흙도
할머니처럼 한 번도
때를 놓친 적이 없다.
품속에 품고 있는 수많은 씨앗들
저마다 싹틀 날을 챙기고 있다.
품고 있던 개구리와 뱀도
제때가 되면 어김없이 내보낸다.
곤히 잠자던 풀잎들도
제때에 깨워서 밖으로 내보낸다.
낙엽을 비집고 새싹 하나 솟아오른다.
(대구아동문학 42호)
(85)조개가 사는 법
딱딱한 껍질 속에 들어있는
산보다 더 큰 비밀
손도 없고 발도 없고
눈도 없고 코도 없다
돌멩이나 흙덩이처럼
목숨 없는 덩어리인 척한다.
딱딱한 껍질 속에
땅을 파헤치는 무서운
도끼 발이 숨어 있을 줄이야.
바다 물을 힘차게 밀고 나아가는
용한 재주가 숨어 있을 줄이야.
물건을 붙잡고 끌어당기는
힘있는 끈이 들어 있을 줄이야.
누구나 저마다 가슴속에는
산보다 큰 재주를 담고 있다.
흙에서 태어날 때
사는 재주 하나씩 타고났다.
(이후문학 00)
(86)정숙
선열공원 여기저기
<정숙>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다.
공원 안에 있는 나무들이
<정숙>이란 글자를 읽었는지
대나무, 소나무, 무궁화 모두가
말없이 옷매무새를 고치고 있다.
삼일운동을 하다가 돌아가신
선열들이 근엄하게 앉아 계신다.
수다쟁이 참새들도 이 공원에서는
목소리를 낮추고 조심을 한다.
나무는 나무끼리, 꽃은 꽃끼리
조용히 하라고 입에 손가락을 댄다.
나라 되찾기 위해
목숨 바쳐 애쓰는 모습
가슴속에 그리며 공원을 걷는다.
(이후문학 00)
(87)야무진 돌 하나
최춘해
문복산 높은 봉에서
흘러내린 물줄기에
씻기고 닦이고 깎인 돌.
모나고 덜 된 건
세월 속에 사라졌다.
있어야 할 알맹이만 남아
동글동글 아름답다.
높은 봉을 타고 내린
높고 귀하고 맑은 물.
수많은 세월
쉴새 없이 한결같이
갈고 닦은 보람있어
바라는 모양으로 돼 간다.
동글동글 야무진 돌 하나.
* 문복산: 경북 청도에 있는 산 이름
(대구아동문학 42호)
(89)엄마와 아가
최춘해
엄마 품안에 안긴 아가
마음놓고 잠을 잔다.
아기를 가슴에 안은 엄마
행복이 가득한 얼굴.
차야 달리든 말든
아가는 엄마만 있으면
마음이 놓인다.
엄마는
아가 코, 아가 입
발가락, 손가락
안 귀여운 데가 없다.
(대구아동문학 42호)
(90)동촌 강변의 식구들
-흙 62
최춘해
몇 아름도 넘을 고목들이
제 마음대로 자리를 잡아
마음껏 길길이 자라고 있다.
밤낮 쉼 없이 흐르는 강물은
제 마음대로 갈 길을 정해서
흐르고 싶은 대로 흐른다.
큰 나무를 좋아하는 새들은
큰 나무에 집을 짓고
물가를 좋아하는 새들은
물가에 집을 짓고 산다.
나무와 나무, 나무와 새
서로 우연한 인연이 아니다.
흙의 품에 안겨 사는 한 집안 식구다.
(대구아동문학 42호)
(91)하지
해가 뜨고 지는 것도
작년과 똑같은 시각
햇살의 두께도
바람의 향내도
용하게도 똑같다.
소나무 새순도
아기 감, 아기 모과도
작년 만났을 때 크기만큼 귀엽다.
아기 새 목청도
풀벌레 노래 소리도
작년 이맘때만큼만 다듬어졌다.
흙은 참 용하다.
품안에 든 것은 어느 것이나
모자라지도 않고
넘치지도 않게
때맞춰 키운다.
(2000년도 노인문학)
(92)사물놀이
농사 짓는 일이 하늘 아래 으뜸이다.
農事天下之大本也(농사천하지대본예)
꽹과리, 징, 북, 장고들이
어울리면 흙의 소리를 낸다.
흙을 파 먹고
흙과 더불어 사는 농촌에는
일년 내 풍물 소리
농사철이 시작되는 정 이월에는
논밭마다 소복소복
풍년이 들 꿈을 안고
얼씨구 좋다 얼쑤
어깨가 들썩들썩
저절로 등실등실 춤이 나온다.
모심고 논매기하느라
고달프고 지쳤어도
꽹과리 장고 징 북 소리 어울리면
팔다리에 절로 힘이 솟는다.
얼씨구 좋다 얼쑤
논배미에 벼들이 우쭉우쭉
논배미마다 그득그득
잘 익은 황금 들판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르다.
하느님 고맙습니다.
이 많은 곡식을 주신
흙의 은혜에 깊이 감사
얼씨구 좋다 얼쑤
낟알 하나 하나가 사랑스럽다.
(2000년도 노인문학)
(97) 매미 소리
매미 소리가 자지러지다
뙤약볕이 이글거린다
강가 미루나무 숲에서
소나기 쏟아지는 소리
수많은 잎사귀들이
빠질세라 저마다 팔랑팔랑
후끈 달아오른 남새밭에서
옥수수가 익어간다.
오이가 주렁주렁 열린다.
대추, 감, 밤, 배 과일나무들이
삼복 더위를 잘도 참아낸다.
모두가 매미 소리 덕이다.
강물이 흐르듯 매미 소리 흐르면
오곡백과 저마다 열매를 익힌다.
소리가 강물을 이루듯
풍성한 가을이 온다..
(이후문학 01)
(104) 몸살 앓는 지구
9/20
추분에는 약속이 많다.
낮과 밤이 서로 욕심 부리지 말고
똑같이 12시간씩 갖기로 했다.
여름과 겨울이 서로 욕심부리지 말고
더위 반, 추위 반 나누기로 했다.
감나무는 감 맛을,
배나무는 배 맛을,
사과나무는 사과 맛을,
대추는 대추 맛을,
다래는 다래 맛을 들이기로 했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겨울을 여름같이 살고
여름을 겨울같이 산다.
수박이 겨울에도 나오고
딸기가 아무 때나 나온다.
지구는 몸살을 앓는다.
겨울에 개나리가 피어도
한 곳에, 한 시간에
300mm 폭우가 쏟아져도,
남극의 얼음이 녹아서
육지가 물에 잠겨도
사람들은 할 말이 없다.
(105) 감나무는 언제나
9/27
감나무는
삼동 겨울잠을 자면서
주렁주렁 감을 익힐 생각을 한다.
감 맛들이기에 알맞는 잎을 만든다
색깔을 생각하며 햇볕을 받고
바람에 흔들리면서
감 모양을 생각한다.
비를 맞으면서
감 맛을 생각한다.
너무 가물까 봐 걱정
장마로 햇볕이 모자랄까 걱정
태풍이 닥칠까 걱정
감 맛이 들 때까지는
마음이 안 놓인다.
(128) 저마다 꿈이 다른
9/27
대추나무는 언제나
대추 꿈을 꾸기 때문에
대추 닮은 잎을 피운다.
고구마 줄기가 땅을 기며
고구마 꿈을 꿀 때
대추나무는 대추 꿈을 꾼다.
대추나무 옆에
사과나무가 있어도,
서로 다투지 않고 사이가 좋아도
저마다 다른 꿈을 꾼다.
남다른 것을 자랑으로 여긴다.
저마다 꿈이 달라서
가지가지 모양이 다르다.
그래서 세상이 아름답다.
내가 못 하는 일은
남에게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그래서 세상은 살맛이 난다.
(106) 떡잎부터 다르다
9/27
해바라기 키가
저렇게 큰 것은
어릴 때부터 생각이 컸기 때문이다.
채송아 키가
저렇게 작은 것은
어릴 때부터 생각이 작았기 때문이다.
해바라기는 언제나
큰 생각을 하며 자라서
꽃도 저렇게 크다.
채송아는 언제나
자잘한 생각을 하며 자라서
꽃도 저렇게 자잘하다.
(108) 뱃속 아가
9/30
아가야, 엄마가 불러주는
고운 노래 들리니?
엄마가 들려주는
이야기 듣고 있니?
엄마 목소리
익혀 두었니?
엄마 냄새, 아빠 생각
알아 맞추겠니?
아가는
엄마도 닮고 싶고
아빠도 닮고 싶다.
얼굴도 닮고 싶고
생각도 닮고 싶다.
아가는 목소리가 닮고 싶어
엄마, 아빠 정답게 나누는
목소리를 귀기울여 듣는다.
아가는 더 큰 일이 하고 싶어
날마다 조금씩
생각을 쌓아간다.
몸무게가 불어간다.
(109) 그믐날
9/30
그믐날 달력은
그냥은 못 있다.
지나온 발자국이 저절로
되돌아 보인다.
자국자국 잘한 일,
자랑스런 일로 이어졌으면
마음이 홀가분하다.
즐겁게 다음 달로 넘어간다.
못 다한 일, 못 갚은 일
부끄러운 일로 이어졌으면
발걸음이 무겁다.
다음 달 맞기가 겁난다.
(110) 상달
10/1
옛날부터 시월을 상달이라 했다.
날씨가 환하게 웃어 주니
코스모스도 환하게 웃는다.
오래 참고 있던 국화도
얼굴을 활짝 펴고 웃는다.
감나무는 숨겨 두었던 감을
푸른 하늘에 드러내놓았다.
사과나무, 배나무, 밤나무도
익힌 열매를 드러내놓았다.
고운 색깔로 마무리하고 있다.
태풍에 시달리던 벼들이
마음놓고 이삭을 살찌운다.
따가운 햇살 속에서
맛을 받아 채운다.
끝마무리 손길이 바쁘다.
풀벌레들도 여름내 익힌
다듬어진 목소리로
아름다운 노래 잔치를 벌였다.
단군 할아버지 하늘 여신 달엔
온 세상 잔치다. 즐겁다.
(111) 자리를 비켜주고
비탈에 선 코스모스
10/6
해마다 자리를 지키고 있더니
올해는 채소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코스모스는 자리를 비켜주고
비탈에 서서 활짝 웃는다.
낭떠러지에 매달린 들국화도
웃음이 찰랑찰랑 넘친다.
양로원에서 노인을 돌보고 돌아온
어머니처럼 얼굴이 환하다.
(113) 화분이 생글생글
10/14
우리 엄마는
내 동생 울음소리만 듣고도
기저귀가 축축한 지
배가 고픈지 다 안다.
우리 엄마는
화분의 난초 모양만 보고도
화를 내고 있는지
웃고 있는지 다 안다.
난초가 상을 찡그렸을 때도
목이 말라 보채는지
배가 고파 그러는지
말 안 해도 다 안다.
‘목이 많이 탔겠구나.’
엄마가 혼자 하는 말
난초는 용하게 알아듣는다.
물을 마시고 생글생글.
(114) 할아버지와 떡버들
- 흙 (63)
10/16
할아버지가 나만했을 때
배가 고팠을 때
맛있게 따먹었단다.
옛날이 떠오른다며
할아버지는 어린이가 되어
떡버들을 따먹는다.
배고팠을 때가 생각나서
그때 더 따먹고 싶었던
욕심을 채우려는 듯
떡버들을 떠나지 못한다.
흙과 더불어 사시는 할아버지는
흙이 주는 건 다 좋단다.
흙내 나는 건 다 좋단다.
베풀어주는 흙이 고맙단다.
(할아버지는
닭 겨릅 보듯 바라보는 우리가
이상하다는 눈짓이고
동생과 나는
할아버지가 이상하다.)
(117) 입동
11/7
햇볕이 엷다
햇볕이 엷어진 두께만큼
더 두터운 옷을 입어야 한다.
우리 나라에 발붙이고 사는
대추나무, 밤나무, 배나무, 감나무
햇볕 두께를 용하게 안다.
햇볕이 두터울 때를 놓치지 않고
부지런히 열매를 키웠다가
햇볕 엷기 전에 맛을 다 들인다.
과일 나무만 그런 건 아니다
뱀, 개구리, 풀… 저마다
햇볕 엷기 전에 겨울 준비를 한다.
(118) 남성현의 겨울 감
11/17
잎 진 나무들만 남아
입 다물고 무뚝뚝하게 서 있다.
곱게 웃어 주던 꽃도
울긋불긋 단풍도 다 사라졌다.
내가 익힌 열매만이라도 남겨
덜 쓸쓸하게 해야지.
손이 시려도 꼭꼭 붙들고 있다.
감나무들의 따뜻한 마음으로
남성현 골짜기가 환하다.
따슨 정이 골짜기를 흐른다.
버스 차창 밖으로 내다보는
나그네 얼굴에 웃음이 가득.
동서남북 곳곳으로
따슨 정이 실려 간다.
(119) 낙엽 깔린 길을 걸으며
4/15
온 산에 흔한 낙엽
땔나무가 귀할 때였다면
눈이 번쩍 띄게 탐 날 갈비
손도 안 댄 체 그대로 쌓여 있다.
흔한 낙엽을 밟으면
마음이 넉넉해진다.
탐나는 것도 없어지고
조바심도 사라진다.
우거진 숲 속 오솔길
한 발자국씩 발자국을 옮기면
보리 고개 넘던 길로 빨려든다.
풀뿌리, 나무 껍질로
입에 풀칠을 하다가
부황이 나 쓰러졌던 할배, 할매들
시대를 잘못 타고난 탓으로
헐벗고 배를 곯았던 조상들
아무 죄 없이 벌을 받았었다.
(120) 내 그림자
12/1
내 그림자는
언제나 나를 따라 다닌다.
말없이 나를 지켜보기만 한다.
아침 일찍
아무도 없는 사이에
굴러간 공을 주우러
잔디밭에 들어갔었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해가 지고 잠자리에 들었을 때
내 그림자가 나를 시달린다.
사람은 안 봐도
나무가 보고 새도 본단다.
들어가서는 안 될
잔디밭에 왜 들어갔느냐?
(121) 내 그림자 (2)
12/1
내 그림자는
햇빛, 달빛, 불빛이 없어도
몰래 내 뒤를 쫓아다닌다.
깜깜한 밤에
길거리 담벼락에
오줌을 누었다고
그래도 되느냐고 따진다.
지켜보기만 하다가
잠자리에 들기만 하면
내 그림자는 잊지도 않고
달라붙어 따진다.
(1/9 시와 동화 제출)
(122) 내 그림자(3)
12/1
오늘 밤 잠자리에도
내 그림자는 어김없이 찾아오겠지.
마음 편한 잠자리가 될까?
오늘 아침 혼자 학교 갈 때
떨어진 휴지를 줍는 걸 보고
네 그림자가 된 것이
나는 무척 자랑스러웠단다.
내일의 착한 일 한 가지
'외톨이 한갑이와 친구해 주기'
미리부터 즐겁구나
마음 편한 잠자리가 되겠다.
(대구불교문학 발표)
(123) 썰렁한 바람
12/3
엄마와 함께 시장에 갔다
책방 문을 열었다
썰렁한 바람뿐
손님은 아무도 없다.
책 한 권을 사 들고 나오는데
바람 한 자락이 따라왔다.
슈퍼에 가서 이것저것 살피다가
돈이 모자라 그냥 나왔다.
주인 혼자 썰렁하게 앉아 있다.
그냥 나오기가 안쓰러웠다.
바람 한 자락이 따라왔다.
나선 길에 백화점에 갔다.
북적대리란 짐작과는 딴판이다.
점원들만 자리를 지킨다.
어쩌다가 구경나온 사람만
나처럼 서성거린다.
썰렁한 바람이 인다.
아빠 공장이 문을 닫고
온 집안이 웃음을 잃었다.
밖에서 돌아오는 식구들마다
썰렁한 바람이 따라온다.
온 집안 구석구석
썰렁한 바람이 일고 있다.
(124) 내 신이 다 잘 있다
12/8
오늘의 공부를 다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신장에 있어야 할 신이 없다.
복도, 화장실, 운동장, 화단
구석구석 다 찾아도 없다.
아직도 새 신인데,
내가 가장 아끼고 자랑하던
내 발에 딱 맞는 운동화인데,
달리기도 잘 되고
공도 잘 차졌는데…….
운동장엔 땅거미가 낀다.
운동장에 놀던 아이들도
선생님들도 다 돌아갔다.
어머니께 꾸중들을
걱정이 태산이다.
무거운 한 짐 걱정을 하다가
오줌이 마려워 깨었다.
웅크리고 앉아 걱정하던
철봉대 밑이 아니다.
신장에 내 신이 얌전히 있다.
(125) 쏜살같이 달려오는 뱀
12/10-1/3
산 고개 오솔길을 걷다가
차마 눈뜨고 못 볼
엄청나게 놀라운 걸 봤다.
둥지 안에서 엄마를 기다리는
부리 노란 귀여운 아기 새를
징그러운 뱀이 덮치고 있다.
'저런 저런! 저놈의 뱀…….'
발을 동동 구르며
조바심하는 사이 갑자기,
뱀은 나를 보고
쏜살같이 내리꽂는다.
새파랗게 질렸다.
‘억!’하고 놀라서 깨었다.
온 몸에 땀이다.
살을 꼬집어보았다.
살아 있다.
(126) 물 맑은 울릉도
1/3
저마다 다른 모습과 색깔의 바위
푸른빛이 묻어날 듯 맑은 물
바위가 있어 물이 더 아름답고
맑은 물이 있어 바위가 더 아름다운
하느님께서 태초에 점지해 주신대로
긴 세월에도 바래지 않았다.
바람 소리, 파도 소리
산새들도 태초의 노래를 부르고
호박나무, 굴거리나무, 마가목
취나물, 흑비둘기
태어난 자리에서 태어난 대로
살아가는 걸 자랑으로 여긴다.
맑은 물이 있어
마음도 맑아져야 한다.
빛바래지 않는 산이 있어
전설이 살아 숨쉰다.
산으로 들어오는 거북 덕에
재산이 불어 간다.
(127) 나를 위한 세상
1/9
어제까지 흐리던 날이
오늘 아침 맑게 개었다.
걱정하는 내 마음을
용하게 미리 안다.
즐거운 소풍이 되라고
나를 위해 웃어 주었다.
나뭇가지 참새들도
노래를 불러 준다.
나뭇잎도 팔랑팔랑
손을 들어 배웅한다.
오늘은 나를 위한 세상
하느님이 고맙다.
(128) 내 뿌리 찾기
4/14
내 뿌리를 찾으러 갔다.
이천오십팔 년 전 진한 땅
알천 언덕에서 회의를 하고 있었다.
새 임금을 뽑고 있었다.
“알천양산촌장이 적당합니다.”
“아니오, 취산진지촌장이 좋습니다.”
“아니오, 무산대수촌장이 좋습니다.”
“아니오, 금산가리촌장이 좋습니다.”
“아니오, 명활산고야촌장이 좋습니다.”
저마다 자기네 촌장을 추대했습니다.
고허촌장 소벌도리공은
“하느님이 내려 주신 불구내를
우리들의 새 임금으로 추천합니다.
내가 높은 곳에 올라 남쪽을 바라보니,
양산 밑 우물가에서 환한 빛이 번쩍였습니다.
그곳에 가보니 말이 알을 품고 있다가
하늘로 날아가고,
그 알에서 아기가 태어났소.
사람들은 불구내라고 불렀습니다.
이웃 사람들은
‘하느님이 내려 주신 임금님’이라 했소.
불구내를 새 임금으로 추천합니다.
짝짝짝짝짝
모두가 크게 박수를 쳤다.
박혁거세가 신라의 첫 임금이 되었다.
소벌도리공은 임금님으로부터
최씨란 성을 처음으로 받았다.
최씨의 시조, 우리의 뿌리가 되었다.
양산촌은 이씨
대수촌은 손씨
진지촌은 정씨
가리촌은 배씨
고아촌은 설씨
이때 여섯 성씨 시조가 처음 생겼다.
뿌리 깊은 나무는 꽃도 좋고
열매도 튼실해야 한다.
(129) 진달래
4/14
산등성이에도 산골짜기에도
우리 나라 산 어디를 가도
진달래꽃이 번지고 있다.
웃음꽃이 찰랑찰랑 넘치고 있다.
환하게 웃어 주는 고모를 만난 듯
떨어져 있던 엄마를 만난 듯
진달래 환한 얼굴을 만나면
내 마음도 환하게 밝아진다.
진달래 환한 얼굴
활짝 웃는 웃음소리
새들도 즐거워 노래를 부른다.
꽃노래, 새 노래 합창을 한다.
산에 산에 진달래
아리랑아리랑 아라리요
할아버지 할머니 노래 소리
북으로 북으로 울려 퍼진다.
(130) 복숭아꽃
4/18
복숭아꽃 앞에 서면
그리운 얼굴이 떠오른다.
내가 해 달라면 무엇이나
마다 않고 들어주시던 할머니
복숭아꽃 고운 얼굴만큼
마음이 곱던 우리 누나
복숭아꽃 그늘 아래서
얼굴 마주 보고 버들피리 불었지.
그때 쳐다보던 그 얼굴
그때 듣던 그 피리 소리.
나처럼 할머니도 저 하늘 어디서
내 얼굴 그리며 나를 생각하고 있을까?
누나도 나처럼 저 산너머 어디서
버들피리 불며 나를 생각하고 있을까?
(131) 사랑스런 손녀, 예지야!
-두었다가 나중에 보아라.
이 사진은 2001년 3월 31일(토)에
대구시 동구 신암5동 134의 10번지
너의 할아버지, 할머니가 사는
집에서 할아버지가 찍었다.
네가 2월 21일 오전 8시40분에 태어났으니까
39일째 되는 날이다.
내일(4월 1일)은
강원도 강릉시 입암동
입암 현대아파트 105동 1405호
너의 집으로 가야 한다.
소백산이 있는 죽령을 넘어서
치악산이 있는 원주를 지나
대관령 고개를 넘어야 한다.
승용차를 타고 줄곧 달려도
6시간도 더 걸리는 머나먼 길이다.
날씨가 풀렸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바깥바람이 찬데
천리 타향 먼길을 떠나보내려니
마음이 안 놓인다.
지금 네가 떠나면
사랑스런 너의 모습을
아무리 보고 싶어도
참고 견뎌야 한다.
네가 보고 싶을 때
이 사진으로 마음을 달래련다.
숨소리, 목소리를 들으련다.
사랑스런 몸 냄새를 맡으련다.
백 날이 하루같이
지금처럼 젖줄을 힘차게 빨아라
잠도 늘어지게 자거라
무럭무럭 자라는 푸른 꿈도 꾸어라
목청 높여 힘차게 소리도 질러라.
사랑스런 예지야,
너의 할아버지 할머니도
이것과 똑같은 사진을 갖고 있단다.
사진을 자주 본단다.
할머니는 네가 자꾸 보고 싶단다.
이 사진과 글은
네가 1학년이 되었을 때 보아라
초등학교 졸업할 때 다시 보아라
중학교 졸업할 때 다시 보아라
대학교 졸업할 때 다시 보아라
시집갈 때도 다시 보아라.
할아버지 할머니는
때가 되면 다른 세상 사람이 될 것이다.
그때도 사랑스런 예지를 생각할 것이다.
푸른 앞날이 열리기를 빌 것이다.
(2001. 4. 22)
너의 할아버지가 씀
(132) 흙 (62)
- 5월
5/10
팔공산 봉우리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본다.
갓 태어난 어린잎들
재잘재잘 즐거운 소리
귀엽다 쓰다듬어주는
해님의 다사로운 손길.
호호호 깔깔깔깔
연두 빛 웃음소리
어린 잇몸 사이에서
새어 나오는 연둣빛 바람
싱싱한 싱그러운 향기
휘파람을 불고 싶다.
(133) 두견새
5/4
구욱국 구욱국 소쩍새 소리 듣고
높은 산 진달래 소스라쳐 깨어나고
늦을라 서둘러 피어나는
아카시아 꽃송이.
보리 고개 긴긴해에
굶주리던 할아버지들
아카시아 진달래꽃은
더 없이 반가운 손님
그때의 할아버지들 생각나
때맞춰 피는 꽃들.
구욱국 구욱국 두견새 울면
돌아가신 할머니 얼굴이 보고 싶다.
못 먹어 부황이 나서
한을 품고 돌아가셨다.
(136) 망초꽃
6/24
초대를 받지 않아도
미리 찾아간다.
채워지길 바라는
빈자리의 개망초.
품삯을 바라지 않는
고향의 천씨 같다.
아무 데나 흔하게
나타나는 개망초
겉보다 마음이
진실해서 좋은 꽃
궂은 일 가리지 않는
착한 맘 본받자.
우리 나라 어디서나
지천으로 핀 꽃
누구나 부담 없이
만나 주는 개망초
나라꽃 만들었으면
백성 편에 설 텐데.
(140) 산새 알
7/9
귀여운 산새 알 두 개
내 새끼손가락 손톱보다 작다.
맥문동보다 가는 풀잎 사이
한껏 공이 든 둥지
하늘보다 더 큰사랑
더 없이 편한 보금자리
키 큰 나무가 그늘을 만들어 주고
풀잎이 감싸주고 있다.
바람이 그냥은 지나칠 수가 없어
어루만지며 머물다 간다.
한밤중 별들이 내려와
속삭이다 갈 테지.
팔공산을 오르다가
산 중턱에서 만난 산새 알
깨어서 둥지를 떠날 때까지
아무 일이 없어야 할 텐데.
집에 돌아와서도 걱정이 된다.
(141) 흙 (63)
- 신령재를 넘으며
좋아하면 반갑다
소리도 정답다
둥굴둥굴 바위들이
정답게 맞이한다.
반가운 팔공폭포 물소리
들을수록 듣고 싶다.
앞서 간 고마운 분을
산길에서 만난다.
길 따라 가다보면
산나리 산수국
모두가 반가운 얼굴들
볼 때마다 반갑다.
한 포기 다래 덩굴
한 포기 무명의 풀
이름 모를 산새 소리
쓰러진 죽은 나무
모두가 없어서는 안 될
팔공산의 식구들.
(7/20)
(142) 여름
7/21
더워서 짜증 난다.
선풍기를 돌렸다.
에어콘도 켜 놓으니
가을보다 서늘하다.
하루를 지났을 즈음
감기에다 두통이다.
여름이 더운 것은
여름이기 때문이다.
뜨거운 햇볕으로
곡식들이 여문다
내 몸도 더위를 이겨내야
곡식처럼 여문다.
아무리 더운 날도
골짝 물은 시원하다
깊은 산 숲 속은
더운 사람 부른다.
자연을 따르는 사람은
한여름도 즐겁다.
(143) 동틀 무렵
7/24
어제 저녁 잠자리에 들 때까지도
좀처럼 풀리지 않던 문제
동틀 무렵 잠이 깨었을 때
실마리가 보였다.
내가 가진 어려운 숙제도
친구를 위해 풀어야 할 문제도
언제나 새벽녘에 실마리가 보였다.
(166) 소나기
7/25
(144) 상사화
7/27
훤칠한 몸매에 아름다운 꽃송이
누구를 그리는 듯 생각에 잠겨 있다
짝 잃은 원앙새처럼
수심에 찬 얼굴 모습
그리운 얼굴을 못 만나는 괴로움
그 동안 쌓인 말은 얼마나 많을까
고통을 견디며 일어서는
아름다운 얼굴 모습.
(145) 한더위
7/30
한더위 찜통 더위
불볕 더위 삼복 더위
닭들이 돼지들이
잇달아 죽어 간다.
죄 없는 짐승들인데,
하느님은 무심하다.
사람들은 땀구멍으로
더위를 이겨낸다.
조물주는 어떻게
땀구멍을 생각했을까
짐승도 땀구멍을 주었으면
죽지는 않을 텐데.
(146) 가을 문턱
닭들이 돼지들이
더위를 못 참아
숨을 할딱이다
쓰러졌다.
언제까지나
푸른 기세를 휘두를 듯
힘이 넘치던 더위
어느 날 갑자기
풀이 죽었다.
나뭇잎도 풀잎도
여전히 싱싱한데
지는 해의 햇살이
스산하다
어제가 입추.
간간이 들리던
가을 벌레 소리가
오늘 새벽엔 합창을 한다
어김없이 찾아 온 가을.
11/2 탈고
(148) 새해
(02.1.14)
나무에 나이테가 생기듯이
나한테도 나이가 새겨진다.
나이테가 하나 더 생긴 만큼
나이 값을 해야 한다.
우리 집 앞 골목길에
아버지, 어머니가 줍던 휴지를
이제는 내가 먼저 줍고 싶다
나이테가 하나 더 생겼기 때문일까?
이른봄부터
목이 말라도 참고
세찬 바람도 참으며
애써 가꾼 열매를
아낌없이 나누어 준 감나무
감나무를 닮고 싶다.
(149) 무를 먹으며
1/15
흙의 사랑을 먹고
흙의 품에서
흙 냄새를 맡으며
흙의 마음으로 자란 것
거짓이 없다
아무 것도 섞인 것이 없다.
오로지 흙의 마음으로
하얀 살이 되었다.
무를 먹으면
내 몸도 무처럼 깨끗하고
내 마음도 무처럼 맑아진다.
나는 무를 즐겨 먹는다.
(152) 입춘
2/2
햇살이 뭔가 수상하다
몰래 무얼 감춘 것 같아
색깔이 아무래도 달라졌어
아무도 못 알아듣게
복숭아나무와 속삭이고 있어.
바람도 아무 일 없는 듯
겨울 바람 시늉을 해도
어쩐지 전과는 달라.
몰래 벚나무와 속삭이고도
안 그런 척 시치미뗀다.
(154) 일요일
2/17
전동차 안에도
사람들이 넉넉하고
길거리에도 산에도
사람들이 북적댄다.
사람마다 넉넉함이 보인다.
줄을 서서 기다려도
서둘지 않는다.
바쁘게 동동거리지 않는다.
새 학기에 쓸 공책도 넉넉하게
화단에 뿌릴 꽃씨도
이웃집에 나누어 줄 만큼 넉넉하게
일요일은 모두가 넉넉하다.
(155) 우수
2/18
날카롭던 서릿발이
사그라진다.
까칠까칠하던 바람이
눅눅하게 부드러워졌다.
잘난 것도 못난 것도
품안에 감싸안고 싶다.
남의 실수도 덮어 주고 싶고
잘못도 용서해 주고 싶다.
아름다운 꽃도 안고
가시 돋힌 아카시아도 안고
구린내도 감싸 안아 주는
흙이 닮고 싶다.
(156) 귀
2/24
사과나무도 귀가 있어
노래 소리를 듣는다.
노래를 듣고 즐거워서
우쭐우쭐 춤을 춘다.
어린 사과 눈빛이 맑다
속으로 노래를 흥얼거릴 테지
사과가 쑥쑥 자란다
나날이 단맛이 채워진다.
소리를 들을 수 없다면
얼마나 갑갑할까?
궁금한 것만 쌓이겠지.
자꾸만 짜증이 나겠지.
(157) 보름달
2/26
더 크고 살찐 달
복이 가득 든 달
밝고 맑고 건강한 달
올해는 보름달 같은
싱그러운 일이 있을 것 같다.
달을 향해 두 손을 모은다.
(158) 정월 대보름
3/2
흙이 기지개를 켠다
잠에서 깬 흙은
눈을 지그시 감고
올해에 할 일을 생각하고 있다.
이제 곧 잠에서 깨어날
살구나무, 복숭아나무
배나무, 감나무, 사과나무
입맛에 맞는 먹이를
넉넉히 마련해야 한다.
목이 말라도,
비바람이 몰아쳐도
참고 견디는
끈기를 길러 주어야 한다.
때맞춰 꽃을 피우고
넉넉한 열매를 익히는 것은
나누어주는 데
보람이 있음을 가르쳐야 한다.
(159) 경칩
3/3
흙이 부드러워진다
문을 꼭꼭 잠그고
마음도 꼭꼭 잠그고
틈이 없던 흙이
조금씩 가슴을 연다.
따스한 공기가
가슴을 데운다.
뱀도 개구리도
잠에서 깨어난다.
풀들이 눈을 뜬다
씨앗도 벌레 알도
나무들도 눈을 뜬다.
장님도 눈을 뜨고 싶다.
가만히 앉아 있던 앞산이
움찔움찔 몸을 흔든다
꿈적 않고 앉았던 바위도
자리를 뜨고 싶다.
(160) 겨울과 봄
3/4
겨울과 봄은
이어달리기할 때처럼
배턴을 주고받는 게 아니다.
겨울 속에 봄이 들어와 있다
겨울 속 한 귀퉁이에서
조금씩 봄이 자란다
겨울이 밀려날 준비를 하면서
조금씩 자리를 내어준다.
미리 잘 차려진 봄은
때맞춰 탐스런 꽃을 피운다.
물러서는 겨울이 샘을 해도
더욱 더 빛나는 꽃 잔치.
풀꽃
6/3
내가 전학 오기 전에
골목에만 나가면 만났던
연이, 기핵이, 진용이, 소열이……
뜻밖에 길거리에서 만나면
왜 그리 반가운지
딱지 치다가 싸웠던 일
우리 아버지가 더 세다 고
서로 다툰 일들은 다 묻히고
심심할 때 동무가 돼 주었던
반가운 얼굴만 남아 있다.
어릴 때 할머니 따라
산으로 들로 다니며
정들었던 얼굴들
강아지풀, 개비름, 꼴, 꽈리, 냉이, 망초, 무릇, 바랭이, 방동사니, 봉선화, 부추, 비름, 쇠비름, 상치, 수세미, 시금치, 씀바귀, 아욱, 아주까리, 오랑캐꽃, 잔디, 조롱박, 질경이, 찔레나무, 피마자, 고사리, 담쟁이, 더덕, 도깨비바늘, 도꼬마리, 도라지, 억새, 칡…….
도시에 와서 한참 잊고 살다가
그때 그 얼굴 다시 만났다.
흐르는 냇물도 방향이 바뀌고
집도 길도 사람도 모두가 바뀌었는데
너희들 얼굴은 예대로 이구나
소꿉동무 얼굴을 본 듯 반갑다.
강아지풀, 개비름, 고사리, 꼴, 꽈리, 냉이, 담쟁이, 더덕, 도깨비바늘, 도꼬마리, 도라지, 망초, 무릇, 바랭이, 방동사니, 봉선화, 부추, 비름, 쇠비름, 상치, 수세미, 시금치, 씀바귀, 아욱, 아주까리, 억새, 오랑캐꽃, 잔디, 조롱박, 질경이, 찔레나무, 칡, 탱자나무, 파초, 피마자, 향나무, 후박나무
풀꽃들
6/16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 데
나도 한 몫 보태 주고 싶다.
이 빈자리를 채울 꽃은 나뿐
이름 없는 꽃이지만 정성을 다했다.
후미진 데일수록
버려져서는 안 된다
외로운 산짐승도 찾아오고
나비와 벌들도 찾아온다.
저마다 최선을 다해 피운 꽃들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려는
하나된 마음들
이름 없는 작은 꽃들의 어울림
얼굴보다
마음이 아름다운 사람이 있듯이
겉모양보다
향기가 아름다울 수도 있다.
(노인문학)
하나된 마음
- 월드컵 경기
6/16
세계 배 축구 경기로 온 겨레가
한마음으로 뭉쳤다.
세계 16강으로 가기 위해
'대-한민국'을 외쳤다.
월드컵 경기장에서
서울 광화문에서,
부산에서 대구에서
광주에서 제주도에서
우리 나라 구석구석 어디서든지
전광판을 바라보며
텔레비전을 지켜보며
부글부글 가슴이 달아올랐다.
붉은 색깔로 달궈진 배달 겨레
온 나라가 들썩들썩
온 세계가 들썩들썩
다른 나라 사람들도
다 함께 '대-한민국'
굵어진 목소리가
우리 나라 선수들의 힘이 된다.
선수들 누구나 신바람이 난다
손발이 척척 맞는다.
하나로 뭉쳐진 소원이
골로 터졌다.
대한민국이 드디어 해냈다.
16강을 넘어서 8강이 되었다.
좋아서 가슴 벅차서
서로서로 얼싸안고
눈물을 흘린다.
처음 만난 옆 사람을 껴안고
덩실덩실 춤을 춘다.
밤이 깊어 가는 줄 모르고
널 뛰듯 땅을 구른다.
보현산을 오르며
6/18
푸름으로 뭉쳐진 산 등
편안하게 엎드려 있는
살아 있는 커다란 등줄기
금방이라도 일어나
구물구물 걸어갈 듯
굽이굽이 돌아 오르는 길
힘들고 숨이 차도
발 밑에서 푸른 소리로 응원하는
든든한 푸른 등을 바라보면
저절로 힘이 솟는다.
하나된 마음2
6/25
선수가 숨이 차서 흑흑거릴 때
온 겨레도 함께 숨이 차다.
선수가 힘이 빠졌을 때는
내 힘을 보태 주고 싶어
'대-한민국'을 외치기도 하고
파도타기로 힘을 불어넣는다.
선수가 피를 흘릴 때는
온 겨레가 함께 아프다
피 흘리며 찡그린 황선홍과
응원하며 찡그린 얼굴이 똑같다.
실추로 안타까워하는 안정환과
응원석에서 아쉬워하는 얼굴도 똑같다.
우리 나라가 세계 4강이 되는 순간
우리 나라가 자랑스럽다.
우리는 할 수 있다는 자신이 생긴다.
우리의 태극기가 더 소중하다
애국가을 부르고 싶다
1절 2절 3절 4절,
5절이 있다면 끝까지 부르고 싶다.
(노인문학)
하나된 마음 (3)
준결승전에서 독일과 대결이다.
잠시도 공에서 눈을 못 뗀다
공을 차지하려는 몸싸움
불꽃이 튄다.
독일이 골문을 향해 슛팅을 할 땐
조마조마 가슴이 조인다.
우리 선수를 믿으면서도
미리부터 겁이 난다.
준결승에 들기까지
죽을힘을 다해 싸운 선수들
마지막 남은 힘을 쏟아
대한민국을 지킨다.
전반전을 잘 지킨 우리 선수들
악착같은 마음과 남은 뚝심으로
독일을 꺾으리라 믿었다.
잠깐 실수로 한 골을 당하는 순간
손에 땀을 쥐고 ‘대-한민국’ 을 외치던
붉은 악마들 뺨으로
주르르 흐르는 눈물
온 국민이 하나되어 눈물을 흘렸다.
6․25 전쟁 52주년
6/25
어른들은 언제나 우리보고
‘사이좋게 지내라.’ 타이르면서
같은 배달 겨레끼리
왜 싸움을 일으켰을까?
어른들은 언제나 우리보고
‘화해하라. 손잡고’ 타이르면서
52년이나 지나도록
왜 가슴을 열지 못할까?
어른들은 언제나 우리보고
‘양보할 줄 알아라.’ 타이르면서
52년이나 지나도록
그때의 욕심을 왜 못 버릴까?
(노인문학)
비탈에 선 코스모스
6/28
길을 내느라 깎아낸 산비탈에
굶주린 야윈 코스모스가
목이 말라 입술이 타들어 가고 있다.
코스모스야,
너는 왜
메마른 비탈에다 자리를 잡았니?
조그만 것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다.
모두들 싫다고 비켜 가는 데
내가 있어 도움이 된다면
얼마나 큰 보람이냐?
팔다리를 못 쓰는 장애인에게
짝이 되어 준 우리 옆집 아저씨 같다.
마음이 아름다운 코스모스.
목마르고 배고픈 나날을
어떻게 견뎌낼까?
(노인문학)
울타리로 서 있는 옥수수나무
7/2
배추 밭 둘레에
옥수수나무가 울타리로 서 있다.
밤낮 없이 꼿꼿이 서서
배추를 지키고 있다.
가운데 좋은 자리에서
사랑 받고 자라는 배추.
옥수수는 즐거운 마음으로
배추를 지키고 있다.
언제나 뒷자리에서
눈에 띄지 않게 도와주시는 어머니. (열린아동문학 2002 가을호)
(노인문학)
(우리 엄마는
내가 공부를 잘하면 웃음이 난다.
우리 엄마는 내가 상을 타면
좋아서 못 견딘다.
우리 엄마는
내가 운동회 때 1등을 하면
자기가 1등 한 것처럼 좋아한다.
우리 엄마는 내가 선생님께 칭찬을 받으면
무척 좋아한다.
늘 내 둘레에 있으면서
잠시도 눈길을 떼지 않고 보살펴 주신다.
울타리가 된 것을 보람으로 여기기다.)
내 마음속의 날씨
7/3
내 마음속 날씨가 맑은 날엔
모두가 아름다워 보인다.
아무 데나 흔하게 핀
망초꽃도 아름답다.
꽃이 진 지 오래된
목단 잎에도 향기가 난다.
꽃사슴은 꽃무늬가 있어 아름답고
꽃말은 목덜미 털이 길어 아름답다.
코끼리는 몸이 커서 아름답고
생쥐는 몸이 작아서 아름답다.
아름다운 세상은
내 마음속 날씨가 맑은 날.
(이후문학)
내 마음속 날씨가 흐린 날엔
7/6
참새 소리가 즐겁지 않은 것은
내 마음속에 그늘이 져 있음을
알려 주는 것.
패랭이꽃이 말을 걸어 와도
알아듣지 못하는 것은
내 마음속에 먹구름이 일기 때문이다.
짖어대는 개를 탓하기 전에
내 얼굴에 구름이 낀 탓이라고
먼저 나를 꾸짖어야지.
내 마음속 날씨가 흐린 날엔
흐르는 물소리도 내 흉을 본다
따르던 강아지도 나를 피한다.
문주란 꽃과 나비
7/6
대문도 잠기고
아무한테도 소문내지 않았는데
나비가 어떻게 알고 찾아왔을까?
문주란이 꽃을 피울 때부터
눈독을 들이던 것은
키다리 해바라기다.
저렇게 높은 데서
문주란이 꽃을 피웠다고
소문을 냈을 게다.
바람에 실려서 사방 팔방으로
퍼져나갔겠지.
저녁 어스름에
먼 데 살던 나비가
남몰래 혼자 찾아왔다.
몸을 맞대고 속삭였다. (열린아동문학 2002 가을호)
(이후문학)
수선화과의 상록 다년생 풀. 뿌리줄기는 극히 짧고 밑으로 수많은 가는 털. 줄기는 굵고 곧음, 키는 50cm 내외. 잎은 줄기 끝에 사방으로 많이 뻗어나고 광택이 있음. 6-7월에 잎 사이에서 높이 70cm 가량의 꽃대를 생성, 그 끝에 10 수 개의 백색 꽃이 산형(繖形)으로 핌. 열매는 산과. 관상용으로 재배, 한국에서는 제주도에 많음.
정성이 모이면 힘이 된다
7/7
사자
7/10
사자야, 사자야.
우리에 갇힌 사자야.
사냥을 하지 않아도
먹이가 있어 좋겠다.
사자야, 사자야.
힘은 뒀다 뭐 할래?
우리 아빠 벽돌 나르는 데
보태 주지 않을래?
(이후문학) (시와 동화 2002년 가을호)
달성공원 코끼리
7/12
하루종일 할 일이 없어
왔다갔다 서성이는 코끼리
남는 시간은
고등학교 3학년 우리 누나한테
보태주지 않을래?
남는 힘은
손수레 끌고 가는 할머니께
보태주지 않을래?
(대구아동문학) (시와 동화 2002년 가을호)
노래하는 도자기
7/14
부산광역시 장기군 장기읍 대변리
노래하는 도자기들이 모여 있는 산기슭
도자기들의 노래 소리가 울려 퍼진다.
노래하는 입에서 고운 소리를 듣는다.
2002 도자기들의 아름다운 합창 소리
둘레의 나무도 풀도 즐거운 마음이다.
노래하는 도자기를 보고 있으면
아픈 것도 없어지고 욕심이 사라진다.
(대구아동문학) (시와 동화 2002년 가을호)
물새알
7/19
달걀보다는 작고
메추라기 알보다는 큰
한쪽이 더 뾰족하게 둥근 (동글갸름한)
알맞게 점이 찍힌 물새알 여섯
금호강 둑 길섶에
보기 좋게 포개 놓았다.
품고 있던 알을 잃고
애타게 찾고 있을 어느 물새
길섶에라도 고이 둔 것은
물새가 다시 알을 찾으란 뜻일까?
자식을 잃고 찾아다닐
어미의 마음을 떠올렸나 보다.
사람이 잇따라 다니는데
어떻게 알을 품고 있으란 말인가.
소낙비는 쏟아지고 있는데
알속에 든 아기 새는 탈이 없을까?
(대구아동문학) (시와 동화 2002년 가을호)
물새알 (2)
7/22
흐르는 물에 다듬어진 돌처럼
만져 보고 싶은 물새알 여섯
노란 부리에 보송보송한 털
어미를 부르는 귀여운 소리
아기 새는 어미 새의 전부요,
어미 새만 믿고 사는 아기 새.
어미 새와 아기 새가 바라보는
눈동자 속에 들어 있는 사랑
물새알 속에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우주가 들어 있다.
대곡 수목원
7/20
대곡 수목원에 오면
고향 친구들을 만날 수 있어 좋다.
오랫동안 못 만났던 다래 덩굴이
얼른 얼굴을 내밀고 반갑게 맞이한다.
박하가 불쑥 나타나서
옛 맛 그대로라며 씹어 보라 한다.
머리 곱게 빗고 각시가 되었던 무릇
수줍은 듯 살짝 나타나서 방긋 웃는다.
얼굴은 익었는데
이름이 떠오르지 않았던 노랑제비꽃.
고향이 그립고 동무가 보고 싶을 땐
대곡 수목원을 찾을 것이다.
(대구아동문학) (시와 동화 2002년 가을호)
흙
- 품에 안기면
7/30
할머니 품에 안겨 조르면
갖고 싶은 것도
먹고 싶은 것도
다 들어주듯이
흙의 품에 안기면
싹이 트고 싶은 씨앗은
싹을 틔워 주고
꽃이 피고 싶은 무궁화는
때를 맞춰 꽃을 피워준다.
열매를 달고 싶은 나무한테는
달고 싶은 열매를 달아준다.
살구, 복숭아, 자두, 사과, 감…….
갖가지 과일을 단 나무들이
흙의 품에 안겨 콧노래를 부른다.
(대구아동문학)
해질 무렵
7/31
빗긴 햇살은
농부가 하루의 일을 마치고
흐뭇한 보람에 젖어 있는 색깔이다.
빗긴 햇살 속에는
욕심을 버린 색깔이 들어 있다.
햇살이 기울면
탄소동화작용을 하던 나뭇잎도
하던 일을 멈추고
하루의 일을 가다듬고 있다.
새들도 집을 찾아 돌아간다.
빗긴 햇살을 보고 있으면
송사리 떼 몰려다니는 냇가에서
발가벗고 물장구치며 놀던
고향 마을이 생각난다.
그때 놀던 동무가 그립다.
(이후문학)
그리운 할아버지
8/16
산비탈 뙈기밭에
고개를 떨구고 서 있는 고춧대
종일 할아버지 생각에 잠겨 있다.
날마다 찾아와서
목마를 때 물 주고
김매고 다독여 주시던 할아버지
한 달 두 달 기다려도
할아버지는 오시지 않고
풀만 무성하다.
"자식보다 더 아끼던
이 고추는 누가 돌보라고
홀로 저 세상에 갔는고."
할아버지 살았을 적
가깝게 지내던 노인이
고추를 보며 중얼거린다.
(이후문학)
밟혀 죽은 개구리
8/19
금호강둑 길 위에
개구리 한 마리
창자가 배 밖에 나온 채
네 발 뻗고 엎드려 죽었다.
장마가 그치고 햇볕 쬐러 나왔다가
운 나쁘게 누구의 발에 밟혔을까?
발을 옮겨 놓는 순간
개구리가 뛰어들었을 게다.
실수를 한 어린이는
개구리를 피하지 못한 발을
아니, 목숨을 빼앗은 자신을
두고두고 후회할 테지.
비사성에서
9/23
탄금대
- 신립 장군-신숭겸 19대손
고구려비
중원탑
홀소리로 부르는 벌레 노래
9/14
벌레는
홀소리로 노래를 부른다.
귀뚜라미는
‘귀뚤-귀뚤-귀뚤’이 아니고
‘위을 위을 위을’하고
땅강아지는
‘삐이익-----’이 아니고
‘이이익-----’한다.
다른 벌레 소리가
들어앉을 틈을 주기 위해
일부러 홀소리로만 노래한다.
줄베짱이, 실베짱이, 철써기, 베짱이, 긴꼬리쌕새기, 여치, 알락방울벌레, 알락방울벌레,
흰수염방울벌레, 풀종다리, 어리귀뚜라미
저마다 닿소리로 노래를 부른다면
이렇게 부드러운 소리
아름다운 소리가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