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이중섭의 팔레트
신준희
알코올이 이끄는 대로 너무 멀리 와버렸다
내려야 할 정거장을 나는 자주 까먹었다
날마다 다닌 이 길은 처음 보는 사막이었다
길도 없는 흰종이 위 맴돌아 나를 누른 깜깜한 압력에 감사
섭씨 1000도가 넘는 불길 속에서 세 시간만 지나면 깨진 백자항아리 같은 흰 뼈로 환원되는 삶. 그토록 고달프고 한시라도 벗어나고 싶던 삶은 눈물겨워 촉촉이 젖어 있는 함초롬한 꽃이었다. 길 끝의 낭떠러지, 나를 짓누르던 두려움, 떨어지거나 날거나 미치거나 아니면 써야 한다는 그 막막하고 깜깜한 압력에 감사한다. 나만의 밀도를 얻고 싶었다. 깡통처럼 짜부라지던 리듬은 괴로웠다. 단어와 문장들이 서로 할퀴고 싸우는 하얀 감옥. 얼어붙은 털신에 달라붙는 눈덩이처럼 아름답고 무서운 눈길에 갇혀 더는 어찌해 볼 수가 없는 그런 때, 푹푹 꺼지는 눈길, 길도 없는 흰 종이 위를 365일 맴돌았다. 조금만 더 걷자. 연필을 새로 깎고 낯선 기차를 타고 사연 많은 사람 속에 섞여 또다시 떠나야겠다. 가끔 언니들이 묻는다. 어디 있어? 밥은? 그 소리가 나를 웃음 짓게 한다. 나의 시조도 누군가에게 그 정도였으면 참 고맙겠다. 거울도 볼 줄 모르고 자기만의 향기에 몰두하는 꽃. 오늘은 장미에게 거울을 보여 주고 싶다.사랑하는 가족들, 오랜 친구들, 늘 응원해 준 박공수 시인, 문우님들께 감사드립니다. 강기옥 선생님, 김대규 시인님, 이지엽 교수님, 윤금초 교수님, 꿈속에서도 감사드립니다. 더 정진하라고 당선작으로 뽑아주신 심사위원님께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민족의 횃불을 지켜온 동아일보에도 감사드립니다. 꾸지람 듣지 않도록 부지런히 뒤따라가겠습니다.
△1955년 전북 고창 출생 △한국방송통신대 국어국문학과
응모작 늘어 심사과정 흐믓 연시조 유행속 단시조 눈길
응모작이 크게 늘었다. 감사한 일이다. 시조에 매력을 느끼는 지망생의 수가 그만큼 늘었다고 보이기 때문이다. 형식을 운용해내는 능력도 대부분 수준 이상이어서 쉽게 제외할 수 있는 작품이 많지 않았다.
몇 번을 거듭 읽은 뒤 ‘구름평전’, ‘블랙커피 자서전’, ‘모감주나무 문법’, ‘봄의 온도’, ‘이중섭의 팔레트’가 남았다. 어느 것을 당선작으로 내세워도 손색이 없을 만큼 좋은 작품이었다. 함께 투고한 작품들을 살피며 개성 있고 참신한 작품을 고르기 위해 고심했다. 그러다 최근 당선작 유형으로 굳어져 버린 안이한 연시조에 대한 경종을 울리고 기본형인 단시조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이중섭의 팔레트’를 뽑기로 했다. 물론 이런 결정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당선자의 다른 작품인 ‘개성댁’, ‘개심사 석탑’ 등 연시조에서 받은 신뢰 때문이기도 했다.
이중섭이란 이름은 낯설지 않다. 오히려 소재로는 식상하다. 그러나 화가의 아내가 서귀포시에 기증한 팔레트에는 아직도 물기가 마르지 않아서 이렇게 섬뜩하고 아름다운 그림을 그려 놓았다. 알코올이 환기하는 정상적이지 않은 삶, 정거장이 은유하는 생의 여러 고비를 어느 날 이중섭은 사막처럼 느꼈을까. 이러한 상상은 화자 한 사람만의 자의적인 해석이 아니라 가파른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체험의 풍경이다. ‘날마다/다닌 이 길은//처음 보는 사막이었다’의 극적인 비약은 얼마간의 난해성이 시의 매력일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절창이 아닐 수 없다.
당선자가 오랜 연마를 통해 얻은 결실을 읽으며 그 이상의 작품으로 시조시단의 내일을 열어갈 것이라 확신하며 축하를 보낸다. 이우걸·이근배 시조시인
조선일보
노량진
조성국
죽음도 물에 빠지면 한번 더 살고 싶다 바닥은 끝이라는데 파면 또 바닥이다 한강을 건너왔는데 부레가 없어졌다
씹다 뱉은 욕들이 밥컵 속에 붙어 있다 눈알이 쓰라린데 소화제를 사먹는다 위장은 자꾸 작아지고 눈꺼풀은 이미 없다
안부를 고르라는 전화를 또 받는다 안쪽을 물었는데 자꾸 밖이 보인다 옆줄을 볼펜으로 찍었다 적절하지 않았다
어머니·아버지 짬뽕에 유산슬 사주세요 책은 늘 새 책이고 누런 콧물 줄줄 매달고 사슴벌레 잡으러 뒷산 떡갈나무만 뒤지던 아이, 고무신 신고 쪽쪽 뻗은 100m 트랙 달립니다. 숨은 늙은 아부지 기침처럼 차오르고 다리는 불어터진 어묵처럼 풀립니다. 빈 깡통 바람에 쓸려다니듯 어질어질 달립니다. 막내 가을운동회라고 포장마차 문 닫고 응원 나온 어무니 아부지, 맨 앞줄에서 국수가락 같은 손가락 정신 사납게 흔드는데 아이는 꼴찌로 달립니다. 누렁이 개는 어린 주인 뭔 큰일 내고 어디 혼자 내빼나 반바지 물고 늘어집니다. 두 눈 껌뻑이며 모든 게 꼴찌여서 너무 속상하다 웁니다. 어무니 아부지, 눈물 콧물 닦아주며 자빠져 무릎 깨지지 않아 괜찮다 괜찮다 합니다. 시험 잘 보면 사준다던 짜장면 탕수육 먹으러 중국집에 갑니다. 훌쩍이는데 자꾸 웃음이 나옵니다. 어무니 아부지, 그 꼴찌가 늘그막에 일냈습니다. 그것도 너무 아득하게 멀어 결승점 구경이나 할 수 있을까 했던 마라톤에서 1등을 했답니다. 어무니 아부지, 오늘도 포장마차 문 닫고 응원 나오셨나 봅니다. 밀가루 같은 눈이 펑펑 내립니다. 어무니 아부지, 조금 더 달리다가 찾아뵙겠습니다. 짬뽕에 유산슬 사주세요.
―1958년 서울 출생 ―前 국민일보 기자
핍진하게 그린 '노량진'… 독특한 對句 구사
안정감은 진부함을 낳기 쉽다. 형식에 능해도 엇비슷한 낯익음을 내려놓고 새로움을 집어드는 이유다. 젊은 응모자가 늘고 있어 고무적이지만, 그럴수록 새로운 길 앞의 고심도 크다. 지금 이곳과 괴리되지 않은 인식 위에서 기존의 세계를 타 넘으며 언어의 밀도와 온도를 높이는 날 선 감각부터 가려냈다. 마지막까지 번갈아 되읽게 한 응모자는 이경선·이소현·조성국·조우리·최윤씨였다. 조우리씨는 역동적이고 서사적인 상상력을 펼쳤으나 음보에 녹여 담기 어려운 율격의 편차가 걸렸다. 이경선씨와 최윤씨도 현실을 읽는 시선과 새로운 형상력이 돋보였지만 정형의 미적 구조화에는 미흡했다. 이소현씨는 참신함과 가능성이 높지만 아직 열정이 앞서는 편이다. 당선작으로 조성국씨의 ‘노량진’을 올린다. 정형의 타성을 넘어서는 인식과 언어의 이질적 조합이 탁월하다. 현실에서 잡아내는 갈등의 골도 각이 높고 깊다. ‘죽음도 물에 빠지면 한번 더 살고 싶다’는 직입의 역설이나 ‘파면 또 바닥’이라는 노량진 묘사에는 그 깊이를 만져본 감각이 핍진하게 담겨 있다. 대구(對句)의 독특한 구사도 주목되는데, 고답적 경계를 훌쩍 벗어나 현대의 아이러니를 촉발하기 때문이다. 포장된 희망보다 바닥을 파는 치열함과 동봉한 응모작의 균질성이 즐거운 안부를 고르게 했다. 당선을 축하하며, 더 차고 뜨거운 창신을 기대한다. 정수자 한라일보
망초꽃 사설
박미소
모내기 끝난 논 갈아엎는 개구리처럼 울 엄마 서러움이 서성거린 강둑에서 남몰래 그러안은 밤, 물소리에 잠기고
오늘도 밝은 달이 세상을 비추었지만 혼자서 못 건너갈 넓은 강 바라보며 하얗게 쪼그려 앉아 울먹이는 그림자
다 식은 그리움이 내다버린 마음같이 버리고 싶은 기억 한 잎씩 뜯어내며 점자로 떠오른 엄마, 다시 읽는 8월에
"즐거움보다는 더 큰 두려움이" 그동안 시를 쓰기 위해 삶을 절제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애달도록 시간을 쪼개고 태도와 습관을 바꾸는 일은 저에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음을 솔직히 고백합니다. 하지만 부박한 일상생활을 추슬러가며 시에 집중할 수 있었던 기억은 제 생에서 무엇보다도 가장 아름다운 사랑의 몸짓으로 오롯이 남아 있습니다. 어려움도 많았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시를 습작하는 그 시간과 고통은 식어버린 열정을 되살리는 일이었으므로, 저는 지금 그 누구보다도 아주 행복한 사람이라고 자위하고 싶습니다. 당선 소식을 최광모 회원의 '중앙신인문학상' 시상식장에서 들었습니다. 저는 그 순간 강력한 자기력에 한동안 움직일 수가 없었습니다. 즐거움보다는 너무 큰 두려움이 부메랑처럼 날아와 오랫동안 가슴을 따끔거리게 했습니다. 막연했던 것이 현실로 다가왔으므로 혼자 감당키 힘든 현기증이 제 몸을 비틀거리게 했습니다. 당선의 기회를 주신 한라일보 관계자 분들과 큰 힘을 얻게 해주신 심사위원님들께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 이 지면을 통해 그동안 함께 시심을 주고받으며 공부한 '교상학당' 시조아카데미 회원들께 미안함과 더불어 고마움을 전합니다. 그리고 "열정은 누구나 가질 수 있으나, 그렇다고 또 아무나 쉽게 가질 수 없는 재능"이라고 늘 강조하신 이교상 선생님의 애정에 거듭 감사를 드립니다. 당선을 진심으로 축하해 주시면서도, 그 사실을 무겁게 받아들여 앞으로 더욱 겸손하게 좋은 작품으로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라는 선생님의 따끔한 충고 오늘 온몸에 깊이 새겨 그 염려가 기쁨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언제나 곁에서 지켜봐주며 응원해준 가족과 세월을 홀로 삼키시며 언제나 격려를 아끼지 않은 어머니께 이 영광을 돌립니다. 아름다운 시인으로 살기 위해서 더욱 노력하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약력 ▷본명 박경희 ▷1966년 경북 상주 출생 ▷'창작21작가회' 회원 ▷'교상학당' 시조 아카데미 회원
나열 수준 뛰어넘는 고차원적 전개 기법
모름지기 예술작품이란 제목을 설명하는 주관식 모범답안지가 아니라는 전제로, 시조 초중종장의 유기적 관계, 내용의 접근방법 등에 초점을 두고 심사에 임하였다. 최종심에 올라온 작품 중, 박혜순의 '날고 싶은 잠자리'는 일종의 간병일지로, 병실에 날아 들어온 잠자리의 거동의 기록이다. 작은 생명에 대한 연민이 돋보였으나, 전체적인 산만함과 내용의 나열수준에 머물렀다. 김순국의 '해녀콩꽃'은 참신한 소제와 시어선택이 남달랐지만, 약간의 작위적이라는 측면에서, 김월수의 '백탄의 시간'은 한 편의 작품에 땔감의 생성과 소멸의 과정을 담아내려는 했다. 그러나 제목에 대한 관념적 설명과 요란한 낱말들이 되레 감점요인으로 작용했다. 이처럼 응모작품 대부분이 시조가 기본적으로 갖춰야 할 서정성과 미학적형상화가 미약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그런 와중에 박미소의 '망초꽃 사설'이 차분한 목소리로 심사위원 눈길을 멈춰 세운다. 초여름부터 가을에 이르기까지 거의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피는 망초꽃이 오늘은 시인의 모습으로 심사위원 책상 위에 올라와 하얗게 웃고 있지 않는가. 시력, 어휘력은 물론, 나열 수준을 훌쩍 뛰어넘는 고차원적 전개 기법을 펼쳐 보이는 점으로 미루어, 오랜 발효와 조탁의 과정을 거쳤음을 엿볼 수 있다. 더구나 끝수 종장에 망초꽃을 점자(點字)로 환치시키면서 엄마와 관련된 슬픔을 시조로 승화시키고 있다. 이 작품에서 참으로 오랜만에 시조만이 지니는 '결'과 음악성을 접할 수 있었던 점도 덧붙인다. 결국 심사위원 두 사람은 박미소의 '망초꽃 사설'에 당선의 꽃다발을 안겨드리기로 했다. 이참에 수상자는 물론 응모자 모든 분께 시조의 근육질 갖추기와 과감한 '밖으로의 눈뜸'을 주문하고 싶다. 시조를 마치 언어의 구슬치기로 착각하면서, 작품의 질적 하향평준화에 안주하려는 시조문단 일부의 이완된 모습들이 감지되기 때문이다. 분발을 바란다. 고정국, 권혁모 국제신문
푸른, 고서를 읽다
박경희
소나무 그리움은 기린처럼 목이 길다 쓰린 몸 향기롭게 그늘도 감아올려 하늘에 얼굴을 묻고 늦가을 헤아린다
화첩의 여백으로 허공 깊이 살피면서 삼릉*에 얹혀사는 풀잎들 가슴 속에 바스락, 속지인 듯이 흰 구름 들앉히고
더러는 메마른 몸 바람에게 내어준 뒤 조릿대 쑥부쟁이 그 앞섶 쓰다듬어 잘 익은 풍경 하나를 남산에다 잇댄다
한 세월 갈고닦은 갑골문의 필법같이 어디선가 날아온 한 마리 딱따구리 오늘도 화엄의 세상 푸르게 음각하는
*신라시대 아달라왕, 신덕왕, 경명왕의 무덤.
힘든 습작의 연속 … 초연히 내 길 걸어갈 것
그동안 너무 힘든 습작의 연속이었다. 당선 전화를 받고 저녁이 붉어지도록 나는 하염없이 걸었다. 내 삶은 생존의 질곡 속에 다양한 시상의 형태로 존재한다. 때로는 모순되고 난해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쓰고, 방황하고, 견디었다. 시 앞에 서면 늘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내 민낯에 이제는 애써 화장하지 않으리. 부끄러워하지도 않으리. 날마다 가슴에 날아와 박히는 날카로운 세상의 말들을 벼리면서 나는 나의 길을 초연히 걸어가리라. 당선의 기회를 주신 국제신문사와 관계자분들께 고마움을 전한다. 그리고 부족한 글을 어여삐 봐주신 이우걸, 박권숙 심사위원님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올린다. 그동안 시를 공부하는 동안 그 누구보다도 시조의 의미와 가치를 강조하신 이교상 선생님의 그 열정에 오늘 경의를 표하면서, 단순히 좋아하는 것을 넘어 시조를 삶으로 받아들인 ‘교상학당’ 회원들께 이 영광을 돌린다. 늘 진심을 담아 응원을 아끼지 않은 가족들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전한다.
▶약력=1966년 경북 상주 출생. ‘창작21작가회’ 회원. ‘교상학당’ 시조 아카데미 회원.
비범한 상상력 밀도 높은 서정으로 풀어내 한국정형시의 눈부신 미래를 견인할 최고의 등용문인 신춘문예에 쏠리는 뜨거운 기대와 열망을 담보하듯, 수백 편의 적지 않은 역작 중에서도 당선의 영예를 안은 ‘푸른, 고서를 읽다’는 단연 선자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늦가을 경주 남산, 삼릉의 소나무에서 ‘화엄의 세상 푸르게 음각’한 ‘고서’를 읽어내는 비범한 상상력의 천부적 재기를 오히려 깊은 숙고로 다스려낸 결 고운 서정의 녹록지 않는 깊이와 밀도가 믿음을 더해주었다. 특히 700년을 지켜온 시조장르 특유의 절제된 기본미학에 완벽하리만치 충실하려고 애쓴 가락 부림의 묘미가 근래 기성 시인들조차 간과하기 쉬운 소중한 미덕으로 큰 호평을 받았다. 또한 당선작과 함께 보내온 4편의 동봉작 역시 흠결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고른 수준의 안정감과 완성도를 갖추고 있어서 역량 있는 새 시인의 탄생을 선자 일심으로 확신하였다. 이외 당선작과 함께 결심에 오른 작품으로는 조선 말기 천재화가 오원 장승업의 그림을 통해 그의 거침없이 호방했던 예술혼과 생애를 활달하고 패기넘치는 남성적 톤으로 조명해낸 ‘군마도’, 홍시에 연관된 유년의 기억으로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따뜻하게 형상화한 ‘홍시유감’, 도시고층 건물의 유리창을 밧줄에 매달려 닦는 한 가장의 비애를 절체절명의 빙벽이미지로 육화한 ‘담쟁이를 읽다’이다. 나름의 개성이 뚜렷이 부각되는 수작들이었지만, 각각 숲은 보지 못하고 나무에만 집착하거나, 숲만 보려다가 자칫 나무를 잃어버리는 아쉬움이 지적되었고 대표작을 받쳐줄 동봉작의 힘도 미흡했음을 밝힌다. 올해 국제신문 신춘문예는 지역과 나이를 넘어 응모작 전반에 걸쳐 무게감이 느껴지는 고른 수준에 올라 있었고, 특히 해외응모작들의 쇄도로 가히 국제신문과 시조의 위상이 범세계적으로 높아지고 있음에 참으로 고무되었다. 당선자에게 아낌없는 축하와 박수를 보낸다.
이우걸·박권숙 시조시인
경남신문
유축을 하다
박선영
그것도 담뱃구멍 낭자한 레자쇼파 김대리가 숨 낮추고 모유를 짜내는 곳 간접적 유륜을 밀봉해 가방에다 부치는
유축기 전원 켜면 몸의 고요 들끓고 맥박 뛰는 오후가 희뿌옇게 농축된다 섣불리 치환될 리 없을, 작은 사람 체온이
아이가 게워낸 하루치의 완급으로 김대리는 식탁에서 더운 김을 맡는다 내일도 출근해서 쓸 젖병들을 헹구며
시조 탐구는 현실 지탱하는 힘 시대는 밝아져 가겠지만, 우는 아기들을 달래기 위해서는 당장의 삶을 건강히 푸는 처방도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딸들에게 사자와 기린을 보여주러 다녀왔습니다. 카시트를 장착한 자동차를 타고 동물원에 가기 위해 축적해온 노력과 일상에 대한 애정을 곱씹었습니다. 근래에 유치원 재롱잔치가 있었는지, 사탕꽃다발을 들고 신난 아이와 잘 차려입은 부부가 함께 걷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보통 모습으로 살아감’에 필요한 연료의 양을 가늠하며, 기꺼이 아름답게 소비하고 싶어졌습니다.
중학교 국사 담당이시던 이우걸 선생님께 인사드립니다. 소풍날 영주 부석사 산길을 학생들과 함께 오르며 시조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듬해 봄 용지공원에서 백일장이 열렸고, 수업에 빠져도 된다는 즐거운 명분으로 참여했던 기억이 납니다. 시상이 잘 떠오르지 않아 시선을 멀리 두면 경남신문사가 보였습니다. 이렇듯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기에 오늘 이 순간도 소중히 저장합니다. 십년 전쯤 은사님께서 연락주셨습니다. 취직은 했냐, 결혼은 했냐 물으셨지만 시조를 꾸준히 쓰고 있느냐는 질문 같아서 답하지 못했습니다. 네 선생님, 열심히 살아내서 그것으로 이제야 썼어요. 늦었지만 기쁘게 대답하겠습니다. 마침 수유를 마무리하고 사회 복귀를 준비하려는 제게, 당선소식은 큰 격려였습니다. 한양대 시패 선배들과 박상천 선생님, 김용범 선생님, 이재복 선생님 감사합니다. 현실을 지탱하는 힘, 시조로 탐구해 나가겠습니다.
★ 박선영 씨 약력 △1984년생 △한양대 국문과 졸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재직 중
직장맘의 고달픈 삶 시조에 잘 녹여내
시조 700년 위의를 기리고 내일의 한국문학을 이끌어 갈 신인들의 장을 펼치면서 심사위원의 마음은 두근거렸다. 언제나 그렇듯 기성의 문법에 함몰되지 않고 자신만의 독특한 빛깔을 가진 시인을 기대하는 마음 때문이다. 신춘문예의 목적은 무난히 질그릇을 빚는 장인을 뽑는 것이 아니라 우리 시대에 시조가 어떻게 기능하고 새로운 물음을 제시하는 시인을 가려 뽑는 것이다. 오늘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내일을 기약하며 함께 걷고 싶은 동반자에게 악수를 청하는 것이다.
마지막까지 선자의 손을 떠나지 않은 작품은 ‘획을 긋다’, ‘사이’, ‘유축(乳蓄)을 하다’ 등 3편이었다. ‘획을 긋다’는 밤하늘의 별을 보면서 자신의 존재를 찾고자 하는 간절한 시선이 눈길을 끌었다. 그 지난함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과 선을 긋고 운명하는 별똥별과의 상관관계를 그려내었다. ‘사이’는 지금 현재, 극복되지 않는 사람과 사람과의 간극이 높은 벽이 되는 현실을 표현하고 있다. 4수로 엮어가는 힘이 좋았으며 자유로운 변주도 상당한 습작의 흔적을 엿볼 수 있었다.
그러나 ‘획을 긋다’는 마지막 3수에 와서 다소 힘에 부치는 느낌을 주었다. 첫 수 종장의 “무얼까 별똥별이다 운명했군. 별 하나”에서 폭이 큰 음률의 변화를 주었고, 기대감을 갖게 했지만 끝까지 긴장감을 견지하지 못한 아쉬움이 있었다. ‘사이’는 활달한 보폭, 시원한 전개 등 많은 장점에도 불구하고 시조 본연의 축약, 탄력적 음보처리 등에서 미숙함을 드러내었다. 특히 한 작품 속에서 ‘사이’란 단어가 여섯 번이나 반복적으로 사용된 것이 결정적인 흠결로 지적되었다. 당선의 영예는 ‘유축(乳蓄)을 하다’에 돌아갔다. 한 맞벌이 부부의 일상을 통해 떠안을 수밖에 없는 현대인의 고통을 담담히 적고 있다. ‘일과 육아’라는 부담을 안고 일상의 쳇바퀴를 돌아야 하는 커리어우먼의 삶을 시조로 잘 녹여내고 있다. 아쉬운 부분이 없지 않으나 미래를 기약하는 의미에서 올해의 당선작으로 민다. 정진을 빈다. (심사위원 이달균·장성진)
경상일보
옥봉동 세한도
김수환
동네 점집 댓잎 끝에 새초롬한 간밤 눈 먼발치 새발자국 저 혼자 샛길 가고 귀 닳은 화판 펼치고 바람이 먹을 간다
전봇대 현수막보다 더 휘는 고갯길을 리어카 끌고 가는 백발의 노송 한 그루 수묵의 흐린 아침을 갈필로 감고 간다
맨발의 운필로는 못 다 그릴 겨운 노역 하얀 눈 위에서도 목이 마른 저 여백 누대를 헐고 기워도 앉은뱅이꽃 옥봉동
부끄럽고 아프지만 즐겁고 행복한 글쓰기
글쓰기가 위로가 됐다는 말을 한동안 믿지 않았습니다. 저 치열하고 힘든 작업이 어떻게 즐거울 수가 있겠나 싶었습니다. 그러나 글쓰기는 위로가 될 뿐 아니라, 힘들고 부끄럽고 아프기도 하지만 즐겁고 행복한 일임을 압니다.
시 쓰기도 어렵고, 시조 쓰기는 더 어렵습니다. 시도 돼야 하고 시조도 돼야하기 때문입니다. 온전한 시의 사지를 자르고 변형 시켜서 시조라는 틀 안에 맞춰 넣어야 하고, 그래도 시가 멀쩡하게 살아 있어야 하고, 오히려 더 좋아져야하는 것이 시조입니다. 짧게는 석 줄, 대체로 열두 줄을 넘지 않는 짧은 글 속에 고통과 소외와 결핍을 우리 고유의 리듬으로 직조해내는 시조가 저는 참 좋습니다.
“‘이 세상에서...’라고 말하기 시작하면 가슴이 뜨거워집니다. 그 뒤를 ‘제일 그리운 것은’이라고 해도, ‘제일 외로운 일은’이라고 해도 눈물이 날 것 같습니다. 그 중에서 제일 서러운 것은 ‘이 세상에서 네가 제일 좋다’라고 말할 때입니다. 제일 좋은 것은 언젠가는, 틀림도 없이, 이 세상에서 제일 아픈 일이 될 것 같아서 여태 말하지 않고 소중하게 숨겨왔습니다.” 2011년 3월에, 언젠가 제가 당선소감을 쓰게 되면 아내에게 하리라고 적어두었던 말입니다.
지금 이 글을 쓰게 해주신 경상일보와 심사위원님, 부모님, 저보다 저를 더 걱정해주시는 최영효 선생님, 제가 깊이 아껴둔 이름 유홍준 시인께 큰절을 올립니다. 항상 제게 곁을 내주시는 김성영 시인, 김남호 시인과 푸른 시교실 도반님들께도 깊이 감사를 드립니다.
약력 -1963 경남 함안 출생 -중앙시조백일장 장원, 차상 -MBC 아름다운가사공모전 대상
녹록지 않은 삶의 현장 시적정황으로 환기
첨단정보화 시대에도 글은 여전히 생산되고 있다. 글 없이는 우리 사회가 정상적으로 돌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많은 문학 갈래 중에 ‘왜 하필이면 시조인가?’라는 문제를 제기 하는 이들이 지금도 적지 않다. 이는 시조가 우리의 유전자와도 같은 것임을 모르고 하는 말이다. 우리의 호흡과 정서와 사상과 감정이 오롯이 실린 4음보 가락은 핏속을 면면히 흐르고 있어서 부정하고자 하여도 부정할 수가 없다.
시조를 통해 새로운 시대적 요청에 답해야 한다. 우리가 처한 환경 즉 당대 역사와 현실을 적극적으로 노래해야 한다. 그렇기에 각고의 노력과 치열한 천착이 필요하다. 전통적 형식과 현대적 감각이 만나 독보적인 시조 세계를 여는 일에 힘써야 한다.
응모작 중에 ‘과일나무는 제 그늘이 지면 안 돼요’와 ‘사람이 비만해지는 것처럼 농사도’라는 장은 구 개념을 인지하지 못하고 쓴 경우다. 전구 뒤 마디와 후구 앞마디가 엮여 의미를 형성하고 있다. 이 구절들은 소리 내어 읽어보면 자연스럽지가 못하다는 사실을 금방 알아차릴 수가 있다. 기초부터 다져야 할 것이다.
최종심에 오른 13인의 작품을 긴 시간 동안 살폈다. 그 결과 끝까지 남은 ‘꼬투리’와 ‘욱’ ‘노크’ ‘옥봉동 세한도’ ‘마가렛, 마리안느’를 두고 검토를 거듭했다. ‘꼬투리’와 ‘욱’은 같은 이의 작품인데 참신한 점에서는 가장 돋보이지만, 제목이 된 시어가 작품 속에 지나치게 많이 등장하고 있는 점이 흠결로 보였다. 앞으로 좋은 작품을 쓸 소양이 엿보인다.
‘노크’는 중년을 보내는 이의 건망증을 실감실정으로 보여주고 있으나, 이미 이러한 소재는 비근하고 많이 낯익다는 점에서 새로움이 덜한 작품이다. 끝으로 같은 이의 작품인‘옥봉동 새한도’와 ‘마가렛, 마리안느’에 대해 고심하다가 상대적으로 밀도 높게 직조된 ‘옥봉동 새한도’에 손을 들어주었다. 이 작품은 삶의 현장이 결코 녹록지 않다는 것을 여러 소도구가 배치된 시적 정황을 통해 환기한다. 또한 서예 용어인 ‘갈필과 운필’이라는 시어가 적재적소에 놓여 시의 분위기에 미묘한 긴장감을 더하고 있고, 정치한 미학적 구조로 형상화된 과정이 흠잡을 데가 없다. 앞으로 이 영광에 값하는 진경의 세계를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전반적으로 아쉬운 면은 도발적인 작품이 눈에 띄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모름지기 신인이라면 실패 여부를 떠나 도전적인 시 세계를 보여줄 만도 한데 시각이 대체로 주변 일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새로운 목소리의 출현’만이 개인의 문학적 성취와 더불어 시조문학을 보다 융성케 하는 일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 이정환
농민신문
호랑거미
성정현
내 집은 공중그네 어둠에 주추를 놓고 아무도 깃들지 않은 바람으로 엮은 처마 벼랑을 짚고 짚어도 하루살이만 숨죽이고
언제쯤 우리도 남루한 저녁 한때 끼니 걱정 하나 없이 마음의 빚도 없이 단 한 번 사랑을 위해 날아오를 수 있을까
바지랑대 선회하던 그림자 길어지면 너를 포획하기 위해 중심에 붙박인 몸 열두 번 허물을 벗어 허공으로 길을 낸다
“독자 가슴에 남는 올곧은 작품 쓸 것”
성장통으로 나를 지탱해준 시조에 사람과 자연·기쁨과 슬픔 담을 터 아파트 베란다 유리창 너머로 성근 눈발이 날리는 아침, 당선이라는 뜻밖의 전화가 왔습니다. 돌아보면 작은 여행에서 출발한 시조에 대한 열망이 열병으로 바뀌어 늘 제 곁에 남아 있었습니다. 꿈 많은 중학교 시절, 너는 훌륭한 작가가 될 거라며 제 글을 칭찬해주셨던 국어 선생님이 생각납니다. 불혹이 넘었지만 여전히 성장통으로 나를 지탱해준 시조. 언제부턴가 가슴에 품고 살았던 시어들을 꺼내어 다듬다보니 늘 조바심이 앞서곤 합니다. 그럴 때마다 제 스승들께서는 하루에 3시간, 10년을 밀고 천천히 가다보면 그때는 눈이 조금 뜨이게 될 거라고. 그리고 등단이라는 관문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임을 늘 잊지 말라고 일깨워주셨습니다. 걸음걸음 길목마다 사람과 자연, 우리 주변의 기쁨과 슬픔의 일상들을 외면하지 않고, 누군가에게는 작은 위안이 되는, 결 고운 나무에 새겨진 판화 같은, 독자의 가슴에 남는 올곧은 시조를 쓰고 싶습니다. 부족한 글을 뽑아주신 심사위원님, 감사합니다. 초심 잃지 않고 정진하겠습니다. 수많은 고비마다 길잡이 되어주신 여러 선생님들, 특히 노중석·김경호 선생님 감사합니다. 항상 즐겁게 공부하는 김천 백수문학관 시조아카데미 문우 여러분과 내 시조의 고향인 가슴 속에 영원히 늙지 않는 마흔살로 남은 아버님과 언제나 버팀목이 되어 응원해준 사랑하는 가족들과 작은 기쁨을 함께하겠습니다.
성정현 ▲1972년 경북 상주 출생 ▲한국 MHS 심리상담사 재직 ▲백수문학관 시조 아카데미 회원
호랑거미, 악조건의 치열한 삶 밀도 있게 형상화 ‘어둠에 주추를 놓고’ 등 표현서 산고의 노력 읽혀
우리 심사위원 각자는 신문사에서 따로 제본한 자료를 통해 응모된 작품 전체를 정독했다. 물론 이름까지 지워진 작품만을 대상으로 세밀하게 살필 수 있도록 충분한 시간을 가졌다. 혹독한 추위 속에서도 신춘문예에 대한 뜨거운 열의를 확인할 수 있어 좋았다. 토의에 올릴 각자 추천한 작품을 다시 축조 검토해 최종적으로 서너명의 작품으로 압축했다. 하나씩 대표작을 가려 뽑고보니 어느 것을 당선시켜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뜻 와불’은 ‘고사목 쓰러진’ 몸피의 애잔함이 관심을 끌었고, ‘꼭두서니 바다’는 사설시조로서 가락을 잘 타면서도 잊히지 않는 기억의 절창이 마음에 와닿았다. 오랜 숙의 끝에 당선작으로 올린 ‘호랑거미’는 시적 대상인 ‘호랑거미’를 통해 아무리 악조건이라도 치열하게 살아가는 삶의 단면을 밀도 있게 형상화한 작품이다. 흠이라면 너무 무난하게 시상을 전개하면서 정직하게 마무리를 하고 있어 개성적인 면을 찾기 힘들다는 점이었다.
그럼에도 이 작품은 시조의 율격을 잘 지키면서도 욕심내지 않고 단아하게 상을 이끌고 있는 장점이 돋보였다. ‘어둠에 주추를 놓고’라든지 ‘바람으로 엮은 처마’ 등은 그냥 쉽게 얻어진 표현들이 아니며, ‘중심에 붙박인 몸’은 마지막 상승 이미지를 확보하기 위한 산고의 노력으로 읽힌다. 투고한 다른 작품들이 모두 일정 수준을 유지하고 있어 안정적이라는 점이 큰 신뢰를 갖게 했다. 굵은 선의 미학에 보다 관심을 가지고 꾸준히 정진하시기 바란다. 이지엽 시조시인, 김일연 시조시인
매일신문
밑줄 사용처
김제숙
한 자락 달빛 당겨 머리맡에 걸어 두고
읽던 책 펼쳐서 떠듬떠듬 길을 가다
내 삶의 빈 행간 채울 밑줄을 긋는다
한눈팔다 깨진 무릎 상처가 저문 저녁
난독의 삶 어디쯤에 밑줄을 그었던가
헛꽃만 피었다 스러진 내 사유의 빈 집
기울은 어깨 위에 허기 한 채 얹고서
다 닳은 더듬이로 하나씩 되짚어가며
접어둔 밑줄을 꺼내 내 미망을 꿰맨다
"당선 결실 가슴에 품고 시조처럼 살겠다"
시간은 빠르게 우리를 스쳐갑니다. 이 물리적인 법칙에 그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다만 어떤 방식으로 무엇을 추구하며 살아왔는지는 모두 다 다를 것입니다. 저도 어느덧 한 갑자(甲子)의 시간을 돌아 이제 처음 출발했던 자리에 다시 섭니다. 그동안의 삶을 하나의 매듭으로 여며 두고 새롭게 시작하라는, 신이 저에게 주시는 메시지인 듯합니다. 언제부턴가, 아마 저의 생이 반환점을 돌았다고 느꼈을 때부터인 것 같습니다. 말을 하는 것보다 말을 들여다보는 시간이 많아졌습니다. 말이 하는 말을 듣고 있으면 마음이 따뜻한 기운으로 채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또 하나의 결실을 오랫동안 가슴에 품고 있던 문학이라는 나무에 달아둡니다. 살아가면서 삶이 메마르고 곤고할 때면 한 번씩 바라보면서 다시 옷깃을 매만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시조는 참으로 매력적인 분야입니다. 무한정 늘어놓을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라 비우고 버림으로써 비로소 완성되는 문학의 한 갈래입니다. 정해진 율격으로 정해진 그릇 안에 오롯이 담아내야 합니다.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아야 합니다. 그러면서도 세상을 품어야 합니다. 지극히 개별적인 작업이지만 보편성을 안고 있어야 합니다. 시조가 갖고 있는 이런 형식미가 남은 저의 삶의 지표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지금껏 내게 머물고 있는 말들을 보듬으며, 여전히 오고 있을 말들을 조용히 기다려야겠습니다. 말은 제자리에 있을 때 가장 아름답습니다. 사람 또한 그러하리라 생각합니다. 있어야 할 자리가 어디인지 분명히 알아서 그 자리를 지키는 것, 그것이 마지막까지 제가 해야 할 일이라고 믿고 싶습니다. 돌아보면 고마운 분들이 참 많습니다. 우선 자리를 마련해주신 매일신문과 길을 열어주신 심사위원님과 더딘 걸음을 믿고 기다려주신 서숙희 선생님께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함께 길을 가고 있는 포항시조사랑회 ‘더율’ 문우님들도 고맙습니다. 혼자였으면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겁니다. 언제나 격려를 아끼지 않는 가족과 친구들에게도 사랑한다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한결 같이 저를 지켜보고 계실 저 위에 계신 분께 경배를 드립니다.
※약력
1958년 부산 출생 계명대 여성학대학원 졸업 2012년 <신라문학대상> 수필대상, 등단 2016년 대구시조 전국공모전 차하 수상 2014년 수필집 『여기까지』 출간 포항시조사랑회 <더율> 회원
성찰하는 사유의 깊이가 감각적 언어와 조화
정병욱의 ‘시조문학사전’을 기준으로 하더라도 시조의 역사는 천년이 넘는다. 오랜 기간 민족의 독자적인 문학양식으로 갈물어온 탓에 자칫 식상해보이고 자극적이지 못하다는 편견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뒤집어 생각해보면 그만큼 오랜 기간 검정된 민족정신의 가치질서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시조장르에 도전하는 사람들이라면 민족문학사의 이 도도한 흐름 안에서의 창조적 계승을 목표로 삼아야 마땅하다. 예년에 비해 응모 편수가 늘어나고 연령도 초등학생부터 70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해서 기대를 부풀게 했으나 참신하고 개성적인 작품보다 불필요한 행갈이나 시류에 편승한다거나 감각적 언어유희의 작품이 여전하다는 점은 아쉬움이었다. 마지막까지 선자의 관심을 끈 작품은 권선애의 ‘기와 꽃’, 정경화의 ‘간 고등어’, 윤애라의 ‘삼애원 편지’, 김제숙의 ‘밑줄 사용처’ 등 네 편이었다. 그 가운데 ‘기와 꽃’과 ‘간 고등어’는 관찰력의 깊이나 언어의 감각적 조탁능력이 돋보였으나 메시지의 모호성과 종장처리의 미숙 등으로 후순위로 밀려났다. 마지막까지 남은 ‘삼애원 편지’와 ‘밑줄 사용처’를 두고서는 서로의 장단점 때문에 고심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삼애원 편지’는 어느 한센마을의 고발성 짙은 현장이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으나 ‘편지’라는 제목과의 서술적 불일치로 밀려나고 ‘밑줄 사용처’를 당선작으로 결정하였다. 당선작은 오랜 습작의 흔적이 역력하고 시적 은유의 폭과 깊이가 적절한 긴장미를 잘 살려 낸 가작이다. 제목부터 주목을 이끌어 자신을 반성하고 성찰하는 사유의 깊이가 감각적 언어와 조화를 이루었다. 아무쪼록 이번 당선을 계기로 시조단의 참신한 바람을 일으켜 주기를 기대한다. 민병도(시조시인)
부산일보
무사의 노래
김현주
갑옷도 투구도 없이 전장으로 오는 장수 식당 문 왈칵 열며 "칼 좀 가소, 칼 갈아요" 허리춤 걷어 올린 채 이미 반쯤 점령했다
무딘 삶도 갈아준다, 너스레를 떨면서 은근슬쩍 걸터앉아 서걱서걱 칼을 민다 삼엄한 적군을 겨누듯 눈은 더욱 빛나고
칼끝을 가늠하는 거친 손이 뭉텅해도 날마다 무림고원 시장골목 전쟁터에서 비릿한 오늘 하루를 토막 내는 시늉이다
적군이 퇴각하듯 자꾸만 허방 짚는 가장의 두 어깨가 칼집처럼 어둑해도 생의 끈 날을 세우며 바투 겨눈 하늘 한 쪽
겨울 한파에 봄바람처럼 날아든 기쁨과 환희
마지막 순간까지 보고 또 보며 손에서 놓지 못하다가 마감 하루 전날에서야 원고를 그렇게 떠나보냈습니다. 그리고 밤마다 신열을 앓듯 뒤척이며 간절함만이 남아 까맣게 지새우기를 며칠 …. 꿈결인 듯 날아든 당선 소식은 겨울 한파가 봄바람처럼 따스하게 느껴질 만큼 기쁨과 환희였음을 누가 알까요? 수년 전 문화예술인들의 쉼터였던 <날마다 소풍>이라는 한식집을 운영할 때 깊은 주름살에 형형한 눈빛의 칼을 가는 할아버지를 만났습니다. 무사도 정신과도 닮았던 그분의 흐트러짐 없는 칼끝 같은 꼿꼿한 모습에서 저는 '무사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분의 안녕과 녹록지 않은 생의 길에 희망을 전합니다. 시조라는 식탁 위에 정갈한 상차림을 준비하는 마음, 신선한 재료들로 맛깔스러운 음식을 만드는 일, 그런 정신으로 시조의 길을 걸어갈 것을 다짐해 봅니다. 진부한 글쓰기에서 벗어나 늘 새로운 시선을 가지라고 가르쳐주시는 울산 동구청 복지관 <시조교실> 이서원 선생님과 함께하는 우리 문우님들, 화가로 늘 바쁜 가운데서도 응원해 주는 남편, 사랑하는 가족과 포항의 어머니, 동생 그리고 나의 여고 친구들 고맙습니다.
이 시대에 올곧은 직필, 부산일보사에 깊이 감사드리며 부족한 저의 작품을 끝까지 손에서 놓지 않으시고 생명을 불어 넣어주신 심사위원 선생님께도 진심으로 고마운 마음 가득 담아 인사 올립니다. 감사합니다.
약력: 1968년생. 유치원 교사 역임. 아동 미술 및 독서지도
적절한 긴장과 이완, 미소를 자아낼 만큼 신선
400여 편 면면히 살펴 읽었다. 얼마나 신선한 작품을 만날 수 있을까 심사하는 내내 설레었다. 정형성과 시적 승화의 절묘한 조화를 요구하는 시조이다. 정형의 바다에 풋풋한 언어로 출렁이는 싱그러운 작품을 기대하는 마음이 신춘시조 응모 작품에 더욱 뜨거운 열망으로 솟는다. 모호한 비유, 묵은 고정관념으로 그린 작품들을 우선 내려놓았다. 이미 많이 다루어진 흔한 소재와 주제들은 비록 현실에 기초를 두어도 더 이상 시선을 끌지 못했다. 제목의 평이함으로 내용을 살리지 못한 작품이 더러 있어 아쉬웠다. 한 문장을 삼행으로 나누어 놓은 듯한 작품도 의외로 많았다. 시조에 있어 장의 독립성과 유기적 구성을 알고 시조창작에 임해야 할 것이다. 최종적으로 남은 작품은 '낡은 하루' '종마, 아버지란 말' '곡선의 힘' '무사의 노래' 네 편이었다. '낡은 하루' '종마, 아버지란 말'은 치열하게 삶을 그리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발목을 붙든다. 직설적인 데다 어깨에 힘이 너무 들어가 무겁다. 마지막까지 '곡선의 힘' '무사의 노래'를 두고 고심했다. '곡선의 힘'은 네 수가 적절한 비유와 유기적인 구성으로 주제를 선명히 이미지화하고 있다. 한 마디로 노련하다. '무사의 노래'는 칼 가는 사람을 갑옷도 투구도 없는 장수로 환치해 오늘의 우리 가장을 표현한 작품이다. 작품 전체에 긴장과 이완이 적절히 배치되어 시선을 붙드는 데 성공한다. 미소를 자아낼 만큼 긍정적이다. 그러면서도 신선하다.
노련함보다 패기와 발전 가능성에 방점을 두었다. '무사의 노래'를 당선작으로 민다. 시조단의 새 힘이 되길 바라며 축하한다. 심사위원 전연희
서울신문
다시 와온
장은해
1. 물과 뭍 진한 포옹 순천만에 와서 본다 잗주름 굽이굽이 하루해를 업은 바다 붉지도 희지도 않은 갯내 살큼 풀고 있다
우련해진 개펄 끝을 찰방대는 파도소리 오뉴월 함초 같은 슬픔의 싹 돋아나도 갈마든 밀물과 썰물 그 아래 잠이 든다
2. 말뚝망둥어 뒤를 좇던 달랑게 한 마리가 붉덩물 둘러쓴 채 물고 오는 해거름 빛 저들도 가슴 뜨거운 사랑이 있나 보다
손에 손 마주잡은 연인들의 달뜬 눈빛 밤바다에 등을 달 듯 별 하나씩 켜질 때 따뜻한 남녘 바람이 내 어깨를 쓸고 간다
장은해꿈이라면, 제발 깨지 말기를 기도합니다. 시조라는 글 감옥에 갇혀 신춘문예의 늪을 헤쳐 나오기까지의 시간은 참으로 멀고도 멀었습니다. 함께 공부하던 사람들이 더러는 당선의 영예를 안고, 더러는 자신의 모자람을 안고 하나둘 떠나갈 때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제 자신이 부끄러웠습니다. ▲ 장은해 2018 서울신문 신춘문에 시조 당선자문우들은 나의 모자람을 나이 탓으로 돌렸고, 가족들은 다른 것에서 즐거움을 찾으라며 그쯤에서 멈출 것을 권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 또한 내 속의 오기를 부추기는 격려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지금까지 포기하지 않았음을 진정으로 자랑스럽게 여기렵니다. 거세게 퍼붓던 눈발이 그치고 차갑지만 밝은 햇살이 온 누리를 비추는 날, 당선 통보를 받았습니다. 제 속에 쌓여 있던 어둠의 빛깔이 일시에 밀려나는 기분입니다. 열정을 이기는 나이는 없다고들 합니다. 그 교과서적인 금언을 제 스스로 증명한 것 같아 뿌듯합니다. 창작의 길 위에서 모자람은 있었지만 게으름을 피우진 않았습니다. 열심히만 한다고 다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겠지만 부족한 재능을 그렇게라도 충원하고 싶었습니다. 이 열정만은 앞으로도 굳건할 것입니다. 부족한 작품을 선뜻 뽑아 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고개 숙여 감사를 드립니다. 누군가의 자리를 대신한다는 책임감을 가지겠습니다. ‘이제 그만!’을 외치면서도 뒤에서 지켜봐 준 남편께도 고마움을 전합니다. 민족시사관학교 윤금초 교수님, 그리고 임채성 시인께 이 영광을 돌리고 싶습니다. 열심히, 더 열심히 쓰겠다는 다짐을 여러 지인과 주님 앞에 올립니다. ■장은해▲1946년 서울 출생 ▲총신신학대 졸업 2018-01-01 32면
진부한 소재에 나름의 빛깔 그려내
시인은 감성의 거친 빵을 먹고, 사유의 길섶에서 노숙을 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들은 곧잘 당대 삶의 정서에 밀착한다. 그런 정황은 올해 신춘문예 응모작들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한동안 역사인식이나 자연친화 쪽에 쏠렸던 시각이 생존현실의 언어로 옮겨온 것이다. 이는 ‘시절가조’인 시조의 속성을 보여 주는 일이기도 하다. 최종심에 오른 작품은 ‘시 뜨는 날´(이예연), ‘오후의 주방´(김주연), ‘칼 맑스의 국수´(서경), ‘식구, 아랫목 서사´(조성국), ‘기러기 아빠´(나영순), ‘바랭이밭 도라지꽃´(최평균), ‘빙벽´(이동명), ‘다시, 와온´(장은해) 등이다. 긴 논의 끝에 장은해의 ‘다시, 와온´을 당선작으로 낙점한다. ‘와온’은 이미 한국시사에서 빼려야 뺄 수 없는 지명이다. 그만큼 많은 시인들이 와온을 노래해 온 터다. 이 경우 남다른 관점과 해석이 필요한데, 장은해는 그 나름의 빛깔과 무늬로 와온을 그려낸다. ‘다시, 와온´은 풍경의 전경화를 통해 생태환경과 생명의 전언을 결속한 작품이다. 전편에서 활유의 수사가 돋보이며, 신선한 발상과 유연한 어조로 문면의 긴장을 놓치지 않는다. 그러면서 일상의 풍경 속에 생존의 표정을 담는 심상의 중층구조를 형성하고 있다. ‘잗주름’, ‘갯내 살큼’, ‘갈마든’, ‘붉덩물’처럼 맨우리말의 말맛을 살리거나, ‘함초’, ‘말뚝망둥어’, ‘달랑게’ 같은 수생생물로 현장감을 더한 것도 눈여겨볼 대목이다.먼 길의 동행이 된 당선자에게 축하의 박수를 보낸다. 더 갈고 다듬어 자신만의 문체와 시품을 이루어 가길 바란다. 낙선자들도 절망하기엔 아직 이르다. “고지가 바로 저긴데 예서 말 수는 없다.”(이은상) 절망의 겉창이 곧 희망이거늘. 분발을 빈다. 이근배·박기섭
영주일보
자전거 소개서
이예연
빗방울은 등에 지고 땀방울은 지르밟아 가락시장 삼십여 년 공손히 함께해온 온몸에 보푸라기가 훈장으로 매달린 너
골 깊은 허기에도 비상구 없던 외길 숱하게 부대낀 날 짐받이에 걸어두고 힘차게 달리고 와서 숨 고르는 발동무
쭈글해진 두 바퀴에 기운을 넣어주고 다른 데는 괜찮냐고, 아픈 데는 없느냐고 페달과 늑골사이에 더운 손길 얹는다
청지기 받침대가 남은 하루 받쳐 들면 윤나는 안장위에 걸터앉은 가을 햇살 소담한 너울가지를 체인 위에 감는다
<껍질을 깨며> 그리움에 닿는 것은 모서리가 다 닳고 나서야 가늠해볼 수 있는 시간인가 봅니다. 긴 날이었습니다. 먼 길이었습니다. 맹목이었습니다. 형식을 갖춘 절제의 가락 속에 버젓하게 지존하는 언어의 숨결은, 저에게 있어서는 격조 높은 울림이었습니다. 그 울림을 따라 달려오는 길이 즐거웠습니다. 행간의 여백을 추스르는 일은 행복했습니다. 외로이 홀로서서 바람에 흔들리는, 가녀린 들꽃을 위하여 시조를 쓰겠습니다.늦은 만큼 보폭을 늘려 달려가겠습니다. 줄탁을 도와주신 심사위원님과 당선의 영예를 안겨주신 영주일보에 감사드립니다. 오는 길을 잃지 않게 이끌어주신 마음의 스승님과 숭의여대 문창과 교수님들 고맙습니다. 하늘에 계신 오빠께 소식 올립니다. 끝으로, 숲속동화마을 가족들, 그리고 저를 응원해주신 모든 분들과, 만학의 길에서부터 오늘까지 든든한 버팀목으로 늘 힘이 돼준 가족들에게 감사하며, 한층 거듭난 좋은 모습으로 다시 설 것을 감히 약속합니다. 고맙습니다.
*약력 1950년 충남 홍성출신 2015년 숭의여대 미디어문예창작과 졸업 2016년 샘터시조상 대상외 다수 서울시 송파구중대로24 훼미리타운225동1104호
“선명한 이미지를 전달하고 있는 ‘자전거 소개서’ 최종 낙점”
인터넷신문에서 신춘문예를 공모하는 곳은 영주신춘문예가 유일하다. 올해로 11회째를 맞고 있는데 해가 갈수록 관심과 열기가 더해져 시조 부문에만 120명이 응모를 해 작품 수만도 445여 편이 되었다. 작품수의 양적 팽창이 시조의 내적 발전과 비례한다고는 할 수 없으나 시조 창작자의 외연이 넓어지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어서 마땅히 반갑고 기쁜 일이다. 흰 편지봉투에서부터 규격도 색깔도 각각인 서류봉투를 하나하나 뜯으며, 보낸 사람만큼이나 기대감에 설렜고 떨렸다. 허나 시조의 정형에 대한 이해가 없는 시편들이 꽤나 있어서 안타까웠던 것도 사실이다. 당선권의 반열에 1차로 오른 작품은 이상구의 ‘달맞이꽃 보법’ 이예연의 ‘자전거 소개서’ 문혜영의 ‘감나무 편지’ 고윤석의 ‘24시 포구’ 강예담의 ‘봄’ 이었다. 이 다섯 편 중 한 편만을 골라내기란 여간 고심이 되는 게 아니었다. 어느 한 작품이 특별히 뛰어나서 확 끌어당기는 게 없었기 때문이다. 작년에도 시조부문은 ‘당선작 없음’으로 결론이 났음을 알기에 더 고심이 되었다. 신춘문예 이름값의 상징처럼 신선함이 돋보이거나 균일한 수준의 작품으로 안정감과 신뢰감을 주는 쪽에 가점을 주고 이상구의 ‘달맞이꽃 보법’ 이예연의 ‘자전거 소개서’ 두 편을 최종심에 올렸다. 두 작품의 우열을 가르기가 너무나 힘들었음을 고백한다. 주제의 범위도 구체적이고 표현하고자 하는 내용을 집약함으로써 감동을 더함과 동시에 선명한 이미지를 전달하고 있는 ‘자전거 소개서’로 최종 낙점을 했다. ‘자전거 소개서’는 화자와 오랜 세월을 함께 한 자전거와의 교감이 애잔하게 묻어나는 작품이다. 네 수까지 자연스러운 호흡으로 끌어가면서 정형의 그릇 안에 다소곳이 앉힌 품이 편안하고 안정적이다. 아쉬운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나 측은지심으로 상대를 대하는 따스한 마음이 힘든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위로를 줄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당선자에게는 축하를 보내고, 이번에 기회를 얻지 못한 분들에게는 건필과 문운을 바란다. <심사위원 김영란>
중앙일보
도배를 하다
최광모
벽속에 숨어버린 얼룩진 독거의 세상
행복했던 기억들은 미라가 되었지만
남겨진 꽃의 흔적이 허공을 물고 있다
그 불면 증명하듯 누렇게 부푼 벽지
말할 수 없는 침묵 목숨처럼 그러안고
어제 또 장편소설을 어둠에 새겼을까
화석 같은 외로움 안 아프게 매만져서
눌어붙은 한숨을 긁어내고 닦아내면
하얗게 피어난 벽이 햇살처럼 웃겠지
시조 공부하며 세상의 편견 지우게 돼
당선되었다는 소식에, 유난히 날카로운 12월 칼바람처럼 갑자기 위통이 몰려왔습니다. 기쁨과 동시에 찾아온 그 당선의 부담감에 오랫동안 허둥거렸습니다. 삶의 무게로 인해 글을 쓰지 못한 시기가 있었습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것은 부끄러운 변명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동안 남몰래 세상의 벽에 시를 쓰고 지운 흔적들이 오늘 새삼 선명히 다가와, 서둘러 그곳에 볼을 대고 따뜻한 온기를 전했습니다. 시조의 형식은 우리의 삶과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가족이라는 틀, 사회라는 틀, 틀이 존재하므로 그 행복도 자유의 가치도 더욱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 시조를 공부하면서 무엇보다도 삶과 세상의 편견을 지우게 된 것은 저의 복록이라 생각합니다. 시조의 그 정형 속에서 무한한 자유를 느끼게 해주신 이교상 선생님께 머리 숙여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부끄러운 제 작품을 뽑아주신 심사위원님들과 중앙일보 관계자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교상학당 시조아카데미 회원분들과 기쁨을 함께하겠습니다. 1970년 경북 김천 출생. 멘토스학원장. 김천고, 김천대 강사. 교상학당 시조아카데미 회원. .
심사위원 일동은 예년과는 달리 응모자의 이름이 완전히 지워진 원고뭉치들을 하나씩 받았다. 순도 100%의 객관성이 담보된 이와 같은 심사방식은 아주 신선하고 뒷맛도 흔쾌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응모작 가운데서는 신인이 갖추어야 할 최고의 미덕인 바로 그 신선함을 확실하게 보여준 작품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한 가운데 ‘도배를 하다’, ‘냉장고 파먹기’, ‘뿔’, ‘마릴린 목련’ 등이 마지막까지 각축을 벌였다. 결국 투고 작품 전체가 고른 수준을 유지하고 있는 ‘도배를 하다’의 작가에게 장원의 방점을 찍기로 했다. ‘도배를 하다’는 도배를 하면서 방안에서 일어났던 개인사의 갖가지 곡절과 애환들을 참 애틋하고도 따뜻하게 직조한 가품(佳品)이다. 눈에 번쩍 띄는 경구는 없지만, 전체적으로 작품이 안정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시상의 전개에도 무리가 없다. 수상을 뜨겁게 축하하며, 좀 더 거칠고 담대한 도전을 통해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기를 기대하는 마음 간절하다. 심사위원=박권숙·박명숙·염창권·이종문(대표집필 이종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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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권혁모의 문학여행 원문보기 글쓴이: poem2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