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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새날입니다.
1주차는 책 소개와 ‘서론: 대학 입시와 능력주의’, ‘1. 능력주의의 승자와 패자’
2주차 ‘2. 능력주의의 명암’, ‘3. 사회적 상승을 어떻게 말로 포장하는가’, ‘4. 최후의 면책적 편견, 학력주의’를 같이 읽어 보았습니다.
이번 주는 ‘5. 성공의 윤리’, ‘6. 인재 선별기로서의 대학’을 살펴보겠습니다.
〈 읽고, 정리하고, 생각 나누기 〉
CHAPTER 5. 성공의 윤리
민주국가에서 정치인들은 자신들의 정책에 대해, ‘모든 시민이 그 인종, 성별, 계층 등에 상관없이 공평하게 경쟁할 수 있도록 하며 그 노력과 재능이 허용하는 한 상승할 수 있도록 한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능력주의에 대해 불평하는 건 보통 그 ‘이상’에 대한 게 아닙니다. 그것이 현실적으로 실현되지 않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능력주의에 대한 대부분의 논쟁은 기회 평등이라는 원칙에서 출발하여 일자리, 교육, 공직 등에 대한 접근 기회가 어떤가를 놓고 벌어집니다. 우리가 의견 일치를 보지 못하는 건 대부분 그 원칙 자체에 대한 것보다 원칙의 실현을 위한 방법에 있습니다. 예를 들어 고용이나 대학 입학에 있어서 소수집단 우대정책의 비판자들은 그런 정책이 기회의 평등과 어긋난다고 주장합니다. 능력 이외의 것으로 지원자들을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소수집단 우대정책의 옹호자들은 그런 정책이야말로 차별이나 불이익을 겪고 있는 집단 구성원에 실질적인 기회 평등을 보장하는 것이라고 반박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점은 능력주의의 이상이 이동성에 있지 평등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 누구도 편견이나 특권에 따라 억지로 아래로 떨어지거나 위로 올려질 수 없어야 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모두가 성공의 사다리를 오를 평등한 기회를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사다리의 단과 단이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는 문제가 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능력주의의 이상은 불평등을 치유하려 하지 않습니다. 불평등을 정당화하려 합니다. 모두가 공평한 조건에서 경쟁한다면 그 결과는 정당하다는 것입니다.
공정한 경쟁에서도 승자와 패자는 나오기 마련입니다. 문제는 모두가 같은 지점에서 경주를 시작하느냐 그리고 훈련, 교육, 영양 등등에 똑같이 접할 수 있느냐 입니다. 그렇다면 경쟁의 승자는 보상받을 만합니다. 누군가가 다른 이보다 빨리 달렸다고 부정의하다고 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능력주의 신념의 대부분은 ‘나의 성공은 나의 몫’이라는 생각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경제판이 평평한 운동장이며 특권이나 편견에 영향 받지 않는 한, 우리는 우리 운명에 전적으로 책임져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능력에 따라 성공하거나 실패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받아 마땅한 것을 받습니다.
이 가정에 의문을 제기할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내가 이런 저런 재능을 갖게 된 것은 내 노력이 아니라 행운의 결과입니다. 그리고 행운에 따른 혜택(또는 부담)은 내게 당연히 보장된다고 할 수 없습니다. 두 번째로, 내가 재능을 후하게 보상하는 사회에 산다면 그것 역시 우연이며, 내 능력에 따른 당연한 결과라고 주장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또한 행운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능력주의의 옹호자들은 노력과 수고에서 정당성을 찾을 수 있다고 답할 것입니다. 그들은 고된 일을 해서 성공한 사람은 그 성공의 대가를 누릴 자격이 있고, 그 성실함에 대한 찬사를 누려 마땅하다고 주장합니다. 그것은 어느 정도까지는 진실입니다. 노력은 중요합니다. 그리고 아무리 재능이 뛰어난 사람일지라도 자신의 재능을 갈고 닦지 않고 성공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비록 노력이 그만큼 중요하더라도, 노력만 가지고 성공하기란 드문 일입니다. 다른 선수들을 제치고 올림픽 메달리스트가 되거나 NBA 농구 스타가 되려면 고된 훈련만으로는 불충분합니다. 열심히 연습하는 농구선수는 많습니다. 그러나 코트에서 그와 같은 기량을 보이는 선수는 많지 않습니다. 내가 밤낮으로 수영 연습을 한들 마이클 펠프스보다 빨리 헤엄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빠른 주자로 여겨지는 육상 금메달리스트 우사인 볼트는 훈련 파트너인 요한 블레이크(역시 천부적인 육상선수)가 자신보다 훨씬 열심히 훈련한다고 밝혔습니다. 노력은 다가 아닙니다.
능력주의 옹호자들도 물론 이를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열심히 훈련하는 운동선수가 누구나 금메달을 딸 자격이 있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가장 성실한 과학자가 노벨상을 받아야 한다고도, 가장 많이 노력한 노동자가 가장 많은 임금을 받아야 한다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대신 그들은 성공이란 재능과 노력의 혼합물이라고 합니다. 이 두 가지는 쉽게 분리될 수 없음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성공이 스스로의 힘으로 얻은 것이라 믿고 싶으며, 물려받은 것이라고는 생각하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나의 성공은 내가 잘해서가 아니라 운이 좋았기 때문이라고 진정으로 믿는다면, 그런 행운을 남들과 나누어야 한다는 마음이 들게 됩니다. 하지만 요즘은 이러한 마음을 갖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성공한 사람들의 겸손은 오늘날 사회경제적 삶에서 도통 드러나지 않습니다.
사회적 명망은 경제적, 교육적 우위에 있는 사람에게 거의 필연적으로 따라붙기 마련입니다. 더구나 공정한 사회적 협력 체제에서 그런 우위를 차지했다면 더더욱 그렇게 됩니다. 어떤 능력과 업적이 찬양받을 만한가를 정하는 건 사회적 규범과 개인의 가치관이며, 그것은 ‘좋음’의 영역이지 ‘옳음’의 영역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좋음보다 옳음이 먼저라는 주장은 사회적 명망을 개인 도덕의 문제로 돌립니다. 명예와 인정의 문제는 분배적 정의와 결코 깔끔하게 분리될 수 없습니다. 오늘날 학력에 대해 널리 퍼진 의식, 전문직업인들이 블루컬러 노동자들에게 보이는 태도 등을 사회규범과 정치의 문제가 아니라고 보는 것은 잘못입니다. 특히 불우한 사람들에 대해 보상할 때 ‘내가 너희를 후원해 준다’는 식의 자세가 은연중에 깔려 있을 경우 더욱 그렇습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능력주의의 언어는 공적 담론을 지배했지만 그 악영향에 대해서는 거의 인식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불평등의 심화를 눈앞에 보면서도 말입니다. 사회적 상승의 담론은 이제 중도좌파와 중도우파 정당이 도덕적 진보와 정치 개혁을 말할 때 즐겨 써먹는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능력주의 엘리트는 그것이 효력 없는 주문임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세계화의 전리품을 나눠 갖지 못한 사람들의 높아져 가는 분노에 귀를 막은 채, 그들은 불만이 꽉 찬 공기 속을 아무렇지도 않게 다녔습니다. 포퓰리즘의 반격은 그들에게 너무도 뜻밖의 상황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내놓은 능력주의 사회 시스템에 내재된 대중을 향한 모욕을 도무지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럼 능력주의에 문제가 있다면 해답은 뭘까요? 그것은 성공에 대한 우리의 시각을 바꾸고, ‘정상에 오르는 사람은 스스로 잘나서 그런 것’이라는 능력주의적 오만에 의문을 제기함을 뜻합니다. 그리고 능력이라는 말로 옹호되어 온, 그러나 분노를 퍼뜨리고 정치에 해를 끼치며 사회를 갈라놓는 부와 명망의 불평등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도 포함됩니다. 이러한 생각 바꾸기는 능력주의적 성공 개념의 핵심인 두 가지 인생 영역, 즉 교육과 일에 대한 집중을 필요로 합니다.
CHAPTER 6. ‘인재 선별기’로서의 대학
대학들은 현대사회의 기회 배분 시스템을 주도하고 있습니다. 고소득 직업과 명예로운 지위로의 여정에 있어 관문 역할을 하는 ‘학위’를 발급하기 때문입니다. 고등교육에서 이런 역할은 양날의 검이 됩니다. 이제 대학은 능력주의적 열망에 피를 돌게 하는 심장이 되었고, 이로써 대학의 문화적 권위와 영예는 엄청나게 높아졌습니다. 명문대 입시는 과열되었고 다수의 미국 대학들은 수십억 달러의 기부금을 거둬들이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대학입시 경쟁을 치르는 학생들도, 그리고 대학 스스로도 큰 피해를 입을 수 있습니다.
능력주의와 인재 선별기의 등장
미국 고등교육의 능력주의화는 1950~1960년대에 시작되었습니다. 20세기가 시작되고 처음 몇 십 년 동안은 하버드, 예일, 프린스턴 등 이른바 아이비리그 ‘빅3’로 불리는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개신교를 믿는 상류층 출신들이 다니는 사립 기숙학교를 졸업해야 했습니다. 학습 능력은 ‘어느 고등학교를 나왔느냐’와 ‘학비를 낼 재력이 되느냐’보다 덜 중요했습니다. 대학마다 각기 다른 입학시험을 보았기 때문에 과락임에도 어찌어찌 입학하는 학생이 많았습니다. 여성은 배제되었으며, 흑인의 경우 프린스턴에서는 아예 입학 불가, 하버드와 예일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았습니다. 유대인 학생 역시 공식적 또는 비공식적인 쿼터에 따라 제한된 숫자만 입학이 가능했습니다.
그 당시 하버드대 총장인 제임스 브라이언트 코넌트는 하버드와 미국 사회 전체적으로 세습 상류층이 득세하는 현상을 못마땅해 하며 능력주의적 체제로 대체하려고 했습니다. 이를 위해 중서부 공립학교를 대상으로 하버드 장학금을 마련했고 그 장학금은 오직 지적 능력만을 근거로 주어졌으며 그 집안이 어떤지는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천부적 지능만을 테스트했고 교과 성적은 보지 않았습니다. 그 테스트가 지금의 수학능력 평가시험SAT이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코넌트의 장학 프로그램은 미국 전역을 포괄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을 뽑는 시험인 SAT는 마침내 전국 대학의 입학을 좌우하는 시험이 되었습니다. 이제 SAT는 하버드에 몇 명의 장학생을 보내는 방법 차원이 아니라 미국 국민을 유능자와 무능자로 판별하는 인재 선별기가 된 것입니다.
코넌트는 사회적 이동성을 무계급 사회의 이상을 정의내리는 데 ‘교육’을 도구로 사용했습니다. 젊은이들을 시민으로 육성하는 일보다 중요한 일은 “그들에게 가장 적당하다고 여겨지는 기회의 사다리, 그 첫 단에 발을 디딜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이었습니다. 물론 이것이 소득과 부의 불평등을 낳는 부정적 측면도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더 유동적인 사회를 원하지, 보다 평평한 사회를 원하지는 않았습니다. 문제는 부자와 빈자 사이의 격차를 줄이는 게 아니라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넘어가며 경제 위계질서에서 각자의 위치가 바뀔 수 있다고, 자기 부모보다 높은 수준으로 올라설 수 있다고 확신을 심어주는 것이었습니다.
코넌트의 이러한 능력주의 비전은 그가 하버드와 다른 명문대들을 이 나라에서 가장 재능 있는 학생들에게 열고 싶어 했다는 점에서 평등주의적이었습니다. 능력만 있으면 아무리 그 사회경제적 배경이 형편없어도 상관하지 않았으니까요. 하지만 그는 고등교육의 기회를 넓힐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의 생각에 미국은 더 많은 대학생을 필요로 하지 않았고, 단지 더 나은 대학생이 필요할 뿐이었습니다.
능력주의적 인재 선별기의 폐해
코넌트가 밀었던 능력주의적 입시제도는 그의 희망처럼 무계급 사회를 만들어내지는 못했습니다. 소득과 부의 불평등은 1940~1950년대 이후 커져왔고, 코넌트가 계층화된 사회를 치유할 수 있다고 여긴 사회적 이동성은 도출되지 않았습니다.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바뀔 때 가진 자와 못 가진 자가 입장을 바꾸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소수의 가난한 집 자식들만이 부를 얻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소수의 부잣집 자식들만 상위 중산층 이하로 떨어졌습니다. 누구나 밑바닥에서 꼭대기까지 오를 수 있다는 아메리칸 드림이 무색하게, 미국에서 사회적 상승이란 드문 일이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은 지난 수십 년간 나아지는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과거 미국의 유수 대학들은 코넌트가 나쁘게 본 ‘거들먹거리는 기득권 세습 엘리트’를 구축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세습 특권 귀족제는 능력주의 엘리트층에게 자리를 내주었으며, 그들은 지금 그들이 내몬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특권을 갖고, 이를 확고부동하게 하려 못질을 해댑니다. 여기에 대학들 또한 그 특권을 공고히 하는 데 많은 기여를 하고 있습니다.
현재 SAT는 수학능력이나 사회경제적 배경과 무관하게 타고난 지능을 측정하는 시험이 아닌 것으로 밝혀지고 있습니다. 반대로 SAT 점수는 응시자 집안의 부와 매우 연관도가 높습니다. 소득 사다리의 단이 하나씩 높아질수록, SAT 평균점수는 올라갑니다. 가장 경쟁이 치열한 대학을 노리는 학생들의 점수를 보면 이 격차가 특히 큽니다. 부잣집(연소득 20만 달러 이상) 출신으로 1,600점 만점에 1,400점 이상 기록할 가능성은 다섯에 하나입니다. 가난한 집(연소득 2만 달러 이하) 출신은 그 가능성이 오십에 하나입니다. 또한 고득점자들은 그 부모가 대학 학위 소지자인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부자 부모가 자식에게 줄 수 있는 일반적인 교육상의 유리함을 넘어, 특권층 자녀의 SAT 점수는 사설 모의시험 코스나 가정교사 등에 의해 쑥쑥 올라갑니다. 일부 맨해튼 같은 곳에서는 일대일 과외비가 시간당 1,000달러나 듭니다. 대학 입시의 능력주의적 경쟁이 최근 수십 년 동안 격화되면서 가정교사와 모의고사 학원 등의 사교육은 매우 고소득의 사업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대학에 들어가는 것은 세상의 시각으로 높은 위치에 오르기 위한 필수 코스처럼 되었습니다. 특히 경쟁률 높은 인기 대학들은 떠오르는 능력 위계질서의 정점에 있으므로 저항할 수 없는 매력을 갖게 되었습니다. 부모의 등쌀에 따라 야심적이고 유복한 학생들은 소수 명문대로 물밀 듯 몰려갔습니다. 그런 대학 간판이 최고의 능력주의적 영예를 주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무나 들어가기 힘든 대학에 들어갔다는 사실은 단지 뽐낼 수 있는 근거가 될 뿐이 아니며, 졸업 후 좋은 직업을 얻을 근거도 되었습니다. 이는 고용주들이 명문대 졸업생을 비명문대 졸업생들보다 더 많이 배운 인재로 판단해서라기보다는, 대학들의 인재 선별 역할을 믿고 그들이 부여하는 능력주의적 영예를 높이 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유한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명문대 입학을 위한 강력한 뒷받침을 해줍니다. 그들 대부분은 고등학교 생활 내내 엄청난 스트레스, 고민, 불면과 싸우며 모의고사는 물론 공부, 체육, 예체능 실기 과외, 그 밖의 온갖 잡다한 특별활동을 견뎌야 하는 고난의 시간을 겪습니다.
‘뭘 해내라’, ‘뭘 이뤄라’, ‘뭘 성공해라’ 하며 끊임없이 떨어지는 능력주의 사명. 부모와 자식 모두 언제 어디서나 들려오는 이들 메시지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생애 초기부터 들려오던 것이며 행복으로 가는 길은 오직 하나밖에 없다고 가르치는 목소리입니다. “돈을 많이 벌어라. 그러기 위해 명문대에 들어가라.”
이 같은 능력의 전장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승리자입니다. 그러나 상처 입은 승리자입니다. ‘생각하고, 탐구하고, 나는 누구이며 나는 무엇을 해야 가치 있게 살아갈 것인가’를 숙고하면서 대학 생활을 보내지 못하고, 싸우고 또 싸웁니다.
그 결과 놀랄 만큼 많은 아이들이 정신 건강에 이상을 겪고 있습니다. 최근 100개 이상 미국 대학의 학부생 6만 7,000명을 대상으로 이루어진 조사에서는 대학생들이 전례 없는 정신적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우울증과 불안증이 치솟고 있습니다. 대학생 다섯 명 가운데 한 명이 설문 이전 1년 이내에 자살을 고려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넷은 정신질환자로 진단을 받거나 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젊은이(20~24세)의 자살률은 2000~2017년 사이 36퍼센트 늘었습니다. 지금 그들은 살인보다 자살로 더 많이 죽어갑니다.
인재 선별기 부숴버리기
매년 4만 명 이상의 학생들이 하버드와 스탠포드가 제시하는 신입생 정원 약 2,000명 안에 들기 위해 몰려듭니다. 그 지원자들 상당수는 하버드나 스탠포드에서 충분히 수학할 만한 역량의 소유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일대에서 오래 근무해온 한 입학사정관은 이런 말을 합니다. “때때로 수천 명의 지원자들을 모두 합격시켜 주고 싶다는 충동이 든다. 나는 그들의 지원서를 계단 아래로 집어던져 버리고, 아무나 골라 1,000명을 뽑을 수도 있다. 그래도 여전히 훌륭한 학생들을 보유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이 이야기를 진지하게 검토해 보자고 제안합니다. 4만 명의 지원자들 가운데 하버드나 스탠포드에 다니기 힘들어 보이는 학생 등 일부를 솎아냅니다. 그러면 아마 2만 명의 지원자가 남으며 이들은 누가 합격하더라도 충분히 잘 해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을 두고 극도로 어렵고 불확실한 선별 작업을 다시 할 것이 아니라 제비뽑기 식으로 최종 합격자를 뽑습니다. 달리 말해 그들의 지원 서류를 집어던져 버리고 아무나 2,000명을 골라잡는 것입니다.
이 제안은 능력주의를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능력을 극대화되어야 할 이상으로 보기보다 일정 관문을 넘을 수 있는 조건으로만 보고 나머지는 운이 결정토록 하는 것입니다. 이 제비뽑기 방식은 적어도 어느 정도는 영혼까지 끌어 모아 스펙을 채우고 강박적으로 완벽을 추구하는 경험에서 해방시켜줄 것입니다. 또한 능력주의적 오만에서 바람을 뺄 것입니다. 정상에 오른 사람은 오직 자신의 힘만으로가 아니라 운이 좋았던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능력주의의 폭정이 승자에게 미친 악영향을 줄여줄 것입니다. 따라서 이제 능력주의적 인재 선별기의 전원을 뽑아버려야 합니다. 보다 넓게는 4년제 대학 학위가 없어도 인생에서 성공할 수 있는 길을 찾아내야 합니다.
일에 영예를 부여하려면 그런 일을 맡을 사람들에게 필요한 여러 가지 학습과 훈련 프로그램에 대해 진지하게 검토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그것은 공립 고등교육의 퇴조 현상을 역전시키고, 기술 및 직업 교육에 대한 무시 경향을 극복하며, 4년제 대학과 그 밖의 중등 이후 교육기관 간 심한 격차를 없애는 것 등을 포함합니다.
인재 선별기가 끼친 폐해를 바로잡으려면 직업 훈련에 예산을 더 많이 투입하는 것 이상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여러 다른 일들 사이에서 무엇을 더 높이 평가하는지에 대한 제고가 있어야 합니다. 이를 시작하는 한 가지 방법은 명품 브랜드 대학에 등록한 학생들의 명예를 드높이고 지역사회 대학이나 기술 및 직업훈련학교 등록자들의 명예는 별로 쳐주지 않는 명망의 위계질서를 뒤엎어 버리는 것입니다. 배관공이나 전기 기술자, 치과위생사 등이 되는 법을 배우는 일은 공동선에 기여하는 훌륭한 과정으로 존중받아 마땅합니다. SAT 점수가 낮은 사람이나 아이비리그 대학에 갈 만한 재력이 없는 사람이 울며 겨자 먹기로 선택하는 과정으로 여길 게 아닙니다.
고등교육은 학생들이 직업 세계에서 필요한 역량을 갖추게만 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들이 도덕적인 인간이자 민주적인 시민으로서 공동선에 대해 숙고할 수 있는 사람이게끔 준비시키는 것도 필요합니다.
새날의 생각 나누기
이번주는 우리나라의 대학 입시와 그로 인한 영향에 대한 주제로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이 주제에 대해 좀 더 실질적인 이해에 도움을 얻고자 두 권의 책을 살펴보았습니다. 이들 책은 『공부하는 인간』과 『대치동, 학벌주의와 부동산 신화가 만나는 곳』입니다.
먼저 세계 각국의 공부를 주제로 하는 『공부하는 인간』에 대한 내용입니다. 2013년 KBS가 《공부하는 인간》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방영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내용을 책으로 엮어 출판했는데, 그중 일부 내용을 바탕으로 우리의 생각거리를 정리해 보았습니다(이하 출처1 참조).
제작진과 4명의 하버드 대학생으로 구성된 진행자들이 대치동 학원가를 방문하였습니다. 처음 방문한 수학 학원의 강의실은 토요일인데도 학생들로 가득 차 있었고, 이를 본 진행자들은 매우 놀라워했습니다. 주말이면 미국의 많은 학생들이 집에 있는 모습과는 사뭇 달랐기 때문입니다.
수업이 끝난 뒤, 이곳 학생들의 수학 실력이 궁금했던 진행자들은 몇몇 학생들과 함께 수학 문제 풀기 시합을 해보았습니다. 그 결과 학원생들의 승! 대치동 학원에 다니는 고등학생들이 평균 3분 이내에 푸는 수학 문제를 하버드생들이 10분이나 씨름하고도 풀지 못한 것입니다. 다소 충격적이었습니다. 모두가 한국의 교육열과 교육 수준이 높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는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짐작하지 못한 듯했습니다.
밤 10시. 학원 수업이 끝나고 건물에서 우르르 쏟아져 나오는 수백 명의 학생들의 물결을 보고 그들은 또다시 충격에 빠졌습니다. 이들은 한 학원 버스에 올라탔는데 그 차에는 주로 초등학교 5, 6학년인 앳된 얼굴의 어린 학생들이 타고 있었습니다. 이 아이들은 학원 수업을 마치고 집에 가서 또 학교 숙제를 1시간 이상씩 해야 한다고 합니다. 어린 나이부터 치열하게 공부하는 대한민국의 교육 현실은 이들에게 놀라움 그 자체였습니다.
“부모님이 강요해서 학원에 다니나요?” 진행자 중 한명이 아이들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그러자 상당수의 학생들이 자신이 필요해서라고 대답했습니다. 한창 놀고 싶은 나이의 어린 학생들이 자발적인 의지로 늦은 밤까지 공부를 한다니, 진행자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모두 학원에 다니면서까지 치열하게 공부하는 이유가 좋은 대학에 가서 돈 많이 버는 직업을 갖고 좋은 배우자를 만나기 위함이라는 아이들의 말에 이들은 또다시 충격에 빠졌습니다.
도대체 이 어린 아이들이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나 미래에 대한 기대감 없이 이토록 현실적인 꿈을 꾸며 공부에만 몰두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좋은 대학을 나와야만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다고 세뇌시킨 어른들, 이 사회 때문이 아닐까? 이러한 물음을 통해 어른들과 이 사회가 그들이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든 것은 아닌가 싶어 제작진 모두 씁쓸해 합니다.
우리나라의 학원들은 입시정책에 발맞춰 변신에 변신을 거듭해 왔습니다. 대치동 학원가의 경우만 보더라도 예전에 본 적 없는 ‘진학 컨설팅 전문 학원’이 심심치 않게 눈에 띄었습니다. 쉽게 말해 이곳은 ‘맞춤식 입시전략 학원’으로, 학생의 성적, 수상 경력, 봉사활동, 특기 등을 정리·분석해서 희망하는 대학의 합격 가능성을 높일 수 있도록 포트폴리오를 설계해줍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고, 그 바탕에는 소위 사회가 원하는 ‘표준’에 자녀들이 뒤쳐지지 않도록 하는 데 집착하는 한국의 엄마들이 있습니다. 남들보다 뒤쳐지면 안 된다는 생각, 그래서 잘하는 것보다는 부족한 것이 먼저 보이고 이것을 채워줘야 한다는 생각, 이렇게 평균에 속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엄마들을 사교육에 의존하게 만듭니다.
그렇게 공부한 20대들은 좋은 학점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수많은 스펙을 쌓아도, 소수를 제외한 나머지는 아르바이트나 비정규직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해야 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런 우리의 암울한 현실이 부모들과 학생들을 더욱 불안하게 만들고, 이 불안감이 교육열을 심화시키고 장기화시키는 작용을 해 왔습니다.
이번에는 조장훈 지음의 『대치동, 학벌주의와 부동산 신화가 만나는 곳』을 살펴보겠습니다. 우리나라의 사교육 1번지는 대치동입니다. 이 곳에서 20년 동안 논술과 입시컨설팅을 가르친 선생님이 그만두면서 이 책을 썼습니다. 이 책에서 저자는 한국의 대학 입시가 아주 이른 시기부터 개인의 삶을 통제하고, 나아가 사회를 자격이 있는 자와 없는 자, 승자와 패자로 경계 지어 불평등과 차별을 만들어내는 거대한 카지노라고 혹평합니다. 그 실상을 들여다 보면 이렇습니다(이하 출처2 참조).
수능 점수와 출신 대학이 평생을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며 취업과 승진, 소득은 물론 한 사람의 모든 가능성을 한정 짓는 사회에서 사람들은 대학 입시에 경쟁적으로 매달립니다. 최고의 강사진과 수준별 입시 전략을 갖춘 사교육 시장에 비싼 값을 치르고, 불법과 탈법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오가며 스펙을 쌓습니다. 동료를 밟고 올라서는 것을 자연스럽게 여기고, 수능 문제 하나에 온 사회가 달려들어 말을 보탭니다. 이 뜨거운 열기가 모이는 곳의 집값은 천정부지로 치솟고, 자녀의 입시를 위해 이주를 감행한 사람들은 막대한 시세차익을 얻습니다. 대학 입시와 부동산이 긴밀하게 결합해 전국의 가정, 학교와 학원, 부동산 시장을 요동치게 하는 이곳이 바로 대치동입니다. 그 복판에 이 거대한 구조를 움직이는 동력인 학원가가 있습니다.
대치동이 지금의 대치동이 된 데에는 대학 입시 제도의 거듭된 변화, 그중에서도 한국 대학 입시의 역사상 가장 오래된 시험인 대학수학능력시험(약칭 수능)의 퇴행이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수능은 본래 학력고사가 초래한 암기 위주의 교육과 획일적 서열화를 해결하기 위해 대학별 본고사의 부활을 전제로 도입된 자격고사였습니다. 그러나 대중의 반감으로 본고사는 실시 3년 만에 폐지되었고, 수능은 애초의 취지와 달리 변별력을 확보하기 위해 지식 확인형 시험으로 변해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학부모의 요구, 대학의 입장, 사교육 업체의 영향력 속에서 조금씩 수선되어온 수능은 이제 더 이상 새로운 유형의 문제를 내놓지 못하고, 사교육 접근성에 좌지우지되는 시험이 된 것입니다.
본고사가 폐지된 상황에서 대학별 고사의 역할을 하며 급부상한 논술전형은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사교육 확대의 주범이라는 오명을 얻고 폐지 및 축소의 수순을 밟습니다. 이명박 정부는 논술을 축소하고 입학사정관제를 도입하는 대학들에 거액의 지원금을 주며 2008학년도에 입학사정관제를 본격 도입합니다. 입학사정관제는 수능 점수로만 줄 세우지 않고 다양한 재능과 적성을 가진 학생을 선발하겠다는 좋은 취지로 도입되었으나 학생부를 채울 ‘스펙’을 만드는 일에 학교와 학원, 학부모들이 전부 달려들면서 경제 및 문화 자본을 가진 학생과 그렇지 못한 학생 간의 간격을 크게 벌렸습니다. 이 전형은 정부의 지지층인 유산 계급과 엘리트 계층에게 유리한 제도였던 것입니다.
입학사정관제는 대중의 분노를 샀고, 2015학년도에 그 문제점을 보완한 학생부종합전형(약칭 학종)이 도입되었으나 결과는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학교는 일종의 ‘브로커’가 되어 전문직에 종사하는 학부모들을 통해 학생들의 비교과 활동을 주선했고, 사교육 업체들은 학생부에 기록 가능한 활동을 찾아 제안하는 입시 컨설팅 시장을 열었습니다. 이 구조에 들어갈 수 없는 학생들은 상위권 학생의 들러리 역할을 하며 차별과 불평등의 시간을 묵묵히 견뎌야 했습니다. 저자는 학종은 그 도입 취지와 달리 계급 격차와 불평등을 학교 안으로 들여왔다며 입시에서 일정 비율 이상 증가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합니다. 나아가 어떤 제도를 도입하더라도 한국 사회의 학벌주의가 수그러들지 않는 한 계급 간 힘겨루기 속에서 제도는 모순을 드러내고 수선을 거치다 파행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최근의 능력주의 비판 논의가 우리 사회에 중요한 성찰적 시각을 제공하고 있으나, 이런 현실을 정면으로 겨냥하지는 못하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공정하다는 착각』에서 말하는 능력주의 비판 담론으로 우리나라의 학벌주의를 비판하고자 할 때는 현실적 간극이 발생합니다. 우리 사회는 신입생과 신입사원을 선발하는 과정에서 능력주의를 제대로 실현한 적이 없고, 전근대적이고 연고주의적인 편견을 넘어서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반수를 하고, 재수를 하고, 삼수를 해서라도 다시 명문대에 도전하려는 이유는 아무리 노력해도 학벌만 한 영향력을 가진 스펙을 만들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사회가 이를 바로잡으려면 학벌 주의를 줄여나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능력주의를 바라보는 관점의 전환이 일어나야 합니다. 그것은 샌델 교수가 말한 성공에 대한 우리의 시각을 바꾸는 것이 필요합니다. 여기에는 능력주의의 오만과 불평등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도 포함됩니다. 이러한 생각 바꾸기는 능력주의의 핵심인 두 가지 인생 영역, 즉 교육과 일에 대한 관점의 전환이 요구됩니다. 이번 주에는 성공과, 교육에 관해 알아보았습니다. 다음 주에는 ‘7. 일의 존엄성’, ‘결론: 능력, 그리고 공동선’을 같이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 참고 도서 〉
O 출처1: 『공부하는 인간』, KBS공부하는인간제작팀 지음, 예담 출판, 2013.02.18 출간, 360 쪽, 공부하는 인간 - kyobobook.co.kr
O 출처2: 『대치동, 학벌주의와 부동산 신화가 만나는 곳』, 조장훈 지음, 사계절 출판, 2021.11.24 출간, 416 쪽, 대치동 - kyobobook.co.kr
O 『한국의 능력주의』, 박권일 지음, 이데아 출판, 2021.09.13 출간, 344쪽, 한국의 능력주의 - kyoboboo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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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통과 성장의 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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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매일 해가 뜨고 지는 일이 늘 반복되지만
그래도, 어제보다 좀 더 나은 내일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더불어 함께, 새로운 오늘을 충실히 잘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또한 남과의 비교가 아닌,
어제 나와의 비교를 통해 하루하루 성장하는 나를 만나고 싶습니다.
-새날 드림/Dream
첫댓글 〈 이야기 자리 주제 〉
성공에 대해 능력주의에 근거하여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보면 좋겠습니다.
저는 능력주의에 따른 성공에 대한 정의를 아래와 같이 정리해 보았습니다.
성공 = 타고난 재능 + 노력 + 운
성공이란 것은 타고난 재능에 자신의 노력을 더하고 운도 따라야 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타고난 재능이 있더라도 노력이 없으면 소용이 없고 이 둘을 다 함으로써 일어난 결과의 좋고 나쁨은 운이 크게 작용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결과가 좋지 않다고해서 크케 낙담하지 말아야겠습니다. 반대로 결과가 좋아 성공하게 되면 그 또한 운이 좋았다고 생각하며 겸손한 마음으로 함께한 주변의 사람들에게 감사를 표하고 그 과실을 함께 나누어야겠습니다. 운이 칠 할이고 재주나 노력이 삼 할이라는 뜻의 사자성어 ‘운칠기삼’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