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이진엽 비오
욱수 성당
현대사회에서 고도로 발전된 인쇄술은 양질의 도서를 대량으로 쏟아내고 있다. 정량화, 표준화된 글자체를 바탕으로 미학적인 기술까지 가미된 인쇄기술은 독서 인구의 저변 확대라는 순기능을 하고 있다. 특히 최근 AI의 열풍이 불면서 인공지능이 단순한 알고리즘의 도구로서가 아니라 다양한 예술 분야의 창작 주체자로 등장하게 되었다.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이란 용어가 처음 등장한 것은 1956년 미국 뉴햄프셔주의 다트머스 대학교에서 열린 ‘다트머스 회의’ 때부터로 알려져 있다. 여기서 존 매카시가 이 용어를 학술적 입장에서 공개적으로 사용했고, 미래에는 기계도 인간처럼 학습․창작할 수 있다고 주창主唱하면서 AI의 탄생이 시작되었다고 전해진다. 그 후 2010~2020년대부터 인공신경망(RNN)과 초거대 언어모델(LLM)이 등장하면서 현대적인 생성형 AI가 본격적으로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2017년 마이크로소프트가 중국에서 발표한 AI ‘샤오빙小氷’은 중국 시인 500여 명이 쓴 수천 편의 시를 학습한 후 세계 최초로 AI 시집 햇살은 유리창을 뚫고(阳光失了玻璃窗)를 펴내어 세간에 놀라움을 주었다. 또한 우리나라에서도 ‘아트랩 Art Lab(2018, 포스텍)’, ‘시아 Sia(2022, 시아 파트너스)’ 등 시 창작 전문 인공지능이 등장함으로써 문학이 수공적 예술이 아니라 최첨단화된 테크놀로지에 의해 실현되는 현실에 이르렀다. ‘시아’는 시집 시를 쓰는 이유(2022)와 시극 파포스 2.0(2023)의 대본을 선보여 신선한 충격을 주기까지 했다.
최근 서울의 한 대학은 2026년 2학기부터 ‘시 창작 및 AI 생성문학 학과’를 개설할 예정이라고 하니 이제 AI는 자연스럽게 창작의 한 동반자로 자리 잡게까지 되었다. 딥 러닝Deep Learning을 통해 구현되는 인공지능의 이러한 시 창작 기술은 앞으로 더욱 눈부시게 발전하여 ‘AI 포이츠(인공지능 시인)’가 기존의 시단을 압도하는 시대가 곧 도래할지도 모른다.
이런 시대적 정황 속에 육필시의 위상과 가치를 어떻게 정립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새로운 화두로 떠오르게 되었다. 이 화두를 풀어내기 위해 먼저 인류의 육필사肉筆史에 대해 잠깐 들여다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로 여겨진다. 문자 이전의 선사시대에는 원시인들이 절벽이나 동굴 벽면 등에 벽화를 그리거나 암각화를 새겨 자신들의 의사를 표현하고자 했다. 프랑스 남서부 지역에서 1940년에 발견된 라스코 동굴 벽화와 1879년 발견된 스페인의 알타미라 동굴 벽화에는 들소, 말, 사슴 등 동물들의 생동감 넘치는 모습이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다. 이 벽화는 문자 이전의 후기 구석기시대 사람들(크로마뇽인)이 자신들이 사냥한 것에 대해 그림일기로 표현한 것이거나 혹은 사냥을 잘 할 수 있도록 주술적인 염원을 나타낸 것으로 전해진다.
또한 우리나라의 경우 울산 태화강 지류인 대곡천 암벽에서 1971년 발견된 반구대 암각화도 선사시대(신석기~청동기 시대)의 소중한 기록물로 주목된다. 이곳에는 특히 그물과 작살, 여러 종류의 고래에 대한 그림을 세밀하게 음각해 놓았는데, 이를 통해 당시 선사시대 사람들이 해양 동물 사냥법에 대해 표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말과 문자가 협의俠義의 언어라면 그림이나 도형, 기호나 손짓 등은 광의廣義의 언어에 해당한다. 따라서 문자가 없던 선사시대에는 이런 그림이나 문양을 통해서 그 당시 사람들이 자신들의 생각과 의사를 표현하면서 기록하고자 했다.
기원 전후의 상고시대에 이르러 세계의 각 나라에서는 그 민족의 정서가 담긴 예술 활동이 태동하기 시작했다. 이때의 예술은 각각 독립적인 장르로 실현되지 못했고 원시종합예술의 형태로 입에서 입으로 구연되었는데 문학도 여기에 포함된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농사의 풍작과 다산, 자국민의 단결을 기원하는 디오니소스 축제가 며칠 동안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이 축제 때 ‘노래-무용-연극’ 등이 서로 어우러져 원시종합예술의 형태로 표현되었다.
이 집단적 예술은 우리나라에서는 중국인 진수陳壽가 편찬한 삼국지 ‘위지魏志 동이전東夷傳’에 그 기록이 보인다. 부여의 영고迎鼓, 고구려의 동맹東盟, 동예의 무천舞天과 같은 축제가 이 책에 소개되고 있는데, 이들은 모두 ‘시․가․무詩歌舞’가 미분화된 형태로 연출되는 원시종합예술의 특징
▼점토판에 새겨진 「길가메쉬」 서사시
을 지닌다. 이 집단적 예술 행위는 농사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으며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제천의식도 함께 나타내고 있다.
이 원시종합예술에서 떨어져 나온 구비문학은 훗날 설화(신화·전설·민담), 민요, 무가巫歌, 판소리, 민속극, 속담, 수수께끼 등으로 전개되면서 민중들 사이에서 면면히 구연되어 왔다. 문자가 발명된 다음부터는 구비문학은 기록문학으로 정착하게 되었다. 예컨대 서사 갈래인 「단군신화」, 서정 갈래인 「황조가」, 「공무도하가」, 신군神君의 강림을 맞이하는 집단 노동요인 「구지가」 등이 중국에서 한자가 유입된 이후 한역漢譯되어 기록되면서 문자로 정착된 바 있다.
외국의 경우는 아리비안 나이트로 잘 알려진 「천일야화」, 호머의 영웅 서사시 「일리아드」와 「오디세이」, 게르만족의 영웅서사시 「니벨룽겐의 노래」, 프랑코 왕국의 무훈武勳 서사시 「롤랑의 노래」, 기원전 2800년경부터 지어지기 시작했다고 전해지는 고대 메소포타미아 왕국의 서사시 「길마메쉬」 등이 모두 구전설화에서 기록문학으로 정착된 사례이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인류는 까마득한 선사시대부터 기록을 매우 중시했다. 모세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십계명은 돌판에 새겨져 있었는데, 비록 이 돌판은 오늘날 전해지지 않지만 그 대신 십계명이 파피루스(‘나쉬 파피루스’ : 1902년 이집트에서 발견)에도 기록되어 후대에까지 전해진다. 또한 현전하는 구약 사본 중 역사가 가장 오래된 것은 기원 전 2세기경에 기록된 ‘쿰란 문서(사해死海 두루마리)’로 알려져 있다. 이 문서는 1947년부터 1956년경까지 사해 북서쪽 해변 주변과 열한 개의 동굴에서 발견되었다. 이들 문서에서 확인되듯 인류는 역사시대 이전부터 당대의 종교적, 역사적 사료들을 돌판이나 파피루스, 양피지 등에 기록하기 시작했다. 이는 구전口傳의 불확실성에서 탈피하여 오감으로 체험한 사실이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며 유동하는 신화들을 직접 기록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깨닫게 해 준다.
그래서 동아시아의 여러 나라들도 일찍부터 궁중의 온갖 비화秘話를 채록하는 사관들이 역대 군주들의 치세를 기록하는 것을 중시하고 실록을 편찬했다. 중국 전한前漢 시대의 역사가 사마천, 그는 궁형宮刑의 쓰라린 고통 속에서도 사필소세史筆昭世 즉 ‘역사가의 붓이 세상을 밝힌다.’라고 하며 글로써 세상의 진실을 드러내고자 했다.
아무튼 이 기록문학은 우리나라의 경우 조선시대에 이르러 한글이 창제되고 보급되자 특히 부녀자들에 의해 활발하게 실현되기 시작했다. 여항閭巷의 부녀자들이나 궁중 여인들에 의해 규방가사, 일기, 편지, 수필, 소설 등 내간체의 창작과 기록, 필사가 지속적으로 이뤄졌다. 또한 구연되어 오던 판소리도 조선 후기(19세기 말~20세기 초)에 이르러 필사본, 판각본, 활자본 등의 판소리계 소설로 정착, 유통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런 구비문학이 문자로 정착되는 과정에서 문제점도 드러났다. 구비문학은 오랜 세월에 걸쳐 민중들의 입을 통해 전승되어 온 적층문학이자 민초들의 공동작이다. 그 까닭에 전승 과정의 불확실성으로 정착 과정에서 다양하게 윤색되어 이본異本이 많이 파생하게 되었다. 춘향전의 경우 만화본춘향가, 열녀춘향수절가, 소춘향가. 옥중화, 광한루기 등의 이본이, 흥부전의 경우도 흥보전, 박흥보전, 연의 각 등 다양한 이본이 출현했다. 특히 춘향전의 이본 중에는 이몽룡이 ‘성몽룡’으로, 남원고사南原古詞에는 성춘향이 ‘김춘향’으로 등장하기도 하고, 흥부전의 이본에도 흥부가 ‘박춘봉’, ‘박연홍’ 등으로 나타나는 혼란을 보여 주기도 한다. 이 같은 구비문학의 불확실성이 후대에 이르러 특정 개인들에 의해 문자로 기록되고 정착됨으로써 그 불안정성이 해소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전승 과정에서 불거지는 구비문학의 불확실성, 그리고 현대사회에 이르러 첨단 테크놀로지에 접목된 인쇄술과 AI의 열풍 등을 고려해 볼 때 육필문학 혹은 육필시의 가치와 이에 대한 관심은 이즈음 우리 문화계의 아주 중요한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유네스코에서는 2001년부터 ‘세계 책의 수도’를 각국의 도시마다 매년 선정하여 독서 문화를 확산시키려 했다. 첫 해는 스페인의 마드리드에서 시작되었고 2015년에는 우리나라의 인천이 세계 책의 수도로 선정되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당시 한국근대문학관(인천)에서 ‘한국문학의 큰 별들, 육필로 만나다’라는 표제로 전시회를 개최하여 큰 주목을 이끌었다. 이 전시회에는 주요한, 서정주, 김춘수, 박두진, 김동리, 박경리, 박완서, 백철, 김현 등 우리나라의 대표적 문인 육필 원고 60점이 공개되어 이목을 집중시켰다.
2021년 고려대 박물관에서는 조지훈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특별전이 개최된 바 있다. 이 전시회에서는 조지훈 시인의 최초 육필 시집인 지훈시초芝薰詩鈔 원본이 전시되어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2025년 봄에는 사설문학관인 ‘육필문학관∙제주’에서 개관 1주년 기념으로 110인의 ‘문인 육필선’을 개최했는데 많은 문학 애호가들이나 독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이 전시회에서는 김춘수 시인의 첫 시집 구름과 장미(1947년) 친필 원고와 박종화, 서정주, 신경림, 이원수, 이은상, 홍명희 등 한국근대문학사를 대표하는 문인들의 육필 원고가 선보여져 뜻 깊은 장場을 마련해 주었다.
또한 여러 시인들의 육필시 모음집이나 개인 육필시집 출간도 그동안 많이 활성화되었다. 2012년에 출간된 시 모음집 시인이 시를 쓰다에는 김춘수, 정현종, 천양희 등 국내 40여 명의 저명 시인들의 육필시가 담겨져 있다. 그리고 지훈 육필시집(2001)과 2012년에 출간된 신경림의 목계장터, 이태수의 유등연지, 나태주의 오늘도 그대는 멀리 있다, 이동순의 쇠기러기의 깃털, 이기철의 별까지는 가야 한다, 그리고 2015년에 출간된 이하석의 부서진 활주로, 고운기의 반쯤 등도 모두 개인 육필시집이다.
▼김남조, 신달자, 이승훈 시인의 육필시
계간 시전문지 시와시학에서는 2015년 봄호 특집으로 ‘여성 시단’ 란에 김남조, 김후란, 신달자, 강은교 시인 등 10명의 육필시를 소개하고 있고, ‘초대 시단’ 란에는 이근배, 문병란, 이승훈, 강인한, 고재종, 안윤하 시인 등 18명의 육필시를 선보이고 있어 가멸찬 몸시의 맛을 더해 주었다. 시인의 숨결이 손끝까지 내려가서 몸의 생기生氣로 쓰인 이런 시들을 접할 때면 기계적 작동으로 빚어낸 차가운 인쇄본보다 더욱 생생한 피의 온기를 느끼는 것만 같다.
한편 이 지역에서는 대구문학관의 기획 전시인 ‘육肉필筆-손끝에서 손끝으로’(2021. 5.4~8.29) 전展이 육필시의 가치를 한껏 고양시켜 준 바 있다. 이 전시회에서는 구상, 김동리, 김춘수, 박목월, 신동집, 유치환, 이상화, 이육사 등 이 지역에서 활동했거나 스쳐간 15인의 중요 작고 시인들의 육필시와 편지 등을 공개하여 지역 문인들의 많은 관심을 이끌었다.
또한 지난 해 팔공산 ‘초이문학관’ 2층 ‘다연 산방’에서 개최된 육필시전(2025. 12. 10)도 이채로웠다. 대구 시인 20인이 참가한 이 육필 시전은 삼화사 회주 원학 스님의 인사 말씀도 곁들여져 행사가 더욱 빛났다. 이날 행사에는 정하해, 장하빈, 김욱진, 김건희 시인 등의 육필시 전시 및 낭송이 있었다. 그리고 ‘초이初荑 김양식의 시와 타고르’에 대한 주제 발표(김상환), ‘왜 육필 시인가?’라는 논제에 대한 주제 발표(이진엽)도 곁들여져 다채로운 프로그램으로 진행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금년에 대구시인협회(회장 김동원)가 주최한 ‘달성 토성마을 다락방’에서의 제1차 육필시 전시회(2026. 3.28~4.11)도 성황을 이루었다. 이 육필시전에서는 대구시협 고문인 이기철, 이진흥, 이태수, 이하석 시인 등과 자문위원인 하청호, 정훈, 공영구 시인 등, 그리고 이사인 이유환, 박지영, 이정화, 정숙, 김석, 이해리 시인 등을 포함한 50인의 육필시가 출품되었는데 모처럼 생생한 시의 향기를 느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뒤를 이어 제2차 육필시 전시회(개회/ 2026. 5.24)와 제3차 전시회(개회/ 2026. 9.2)도 시인들의 많은 관심 속에 알찬 결실을 맺었다. 이밖에 대구시 동구 도학동에 위치한 ‘시인의 길-한국 현대시 육필공원’에서도 「봄」(윤동주), 「하늘수박」(김춘수), 「이슬방울」(이태수), 「얼음」(이동순) 등 한국 현대시 30여 편이 돌에 새겨져 있어 눈길을 끈다. 아무튼 대구 시단
▼ 달성토성마을 다락방 육필시전(2026)
은 올 한 해 동안 시인의 손끝에서 석간수처럼 스며 나오는 육필의 깊은 맛과 감촉으로 충만해진 것 같다.
그렇다면 육필시는 이 시대에 어떤 의미와 가치로 다가오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선 육필시는 기록문학으로서의 보존성과 의미의 개방성을 잘 보여 주고 있다. 19세기 영국의 여류작가 버지니아 울프가 그의 제자 니콜슨에게 “기록되기 전에는 아무 일도 진짜로 일어난 게 아니다.”라고 했듯이, 육필의 필사를 통해 원본의 정확한 고증과 보존성을 공고히 할 수 있다. 개인적인 말로써 전해지는 파롤Parole은 입에서 발화되는 순간 허공에 사라지는 데 비해, 판화를 새기듯 수공手工의 새김질 행위인 육필은 반드시 그 흔적을 남긴다. 그래서 포스트구조주의자인 J. 데리다도 ‘에크리튀르(서기 언어書記言語)’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것이다.
일단 기록되고 나면 그 텍스트에 나타난 의미는 고정되지 않고 차연差延되면서 시대에 따라 다양하게 읽혀지고 해석될 수 있다. 이를테면 “새벽, 아버지는 악어를 찾아 떠나고/ 나는 악어가 되어 헤맨다”(이승훈, 「피에타 1」)에서 ‘악어’라는 한 시어는 시인이 의도하는 의미와 상관없이 독자들마다 자의적으로 그 악어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그 악어를 읽을 때마다 독자들은 자신의 가슴을 찌르는 듯한 ‘무엇(새로운 의미)’을 느낄 수 있다. 그러므로 이때의 악어는 하나의 의미로 고착화되지 않고 푼크툼의 성격으로 독자에게 수용되어 그 의미가 주관적으로 끝없이 열려 간다. 그러므로 문자로 기록된다는 것은 곧 의미의 개방성과 열림을 지향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역사적으로 볼 때 육필시는 구비문학에서 본격적 기록문학으로 넘어가는 중간 과정으로서의 교량적 역할을 잘 해왔다고 여겨진다. 고정된 실체가 없이 유동하는 구전문학은 문자의 발명 이후 필사를 통해 그나마 보전되어 왔고, 그 후 기계의 발명에 힘입은 본격적인 근․현대 인쇄술이 등장하기까지 일차적 기록문학으로서의 역할을 훌륭히 수행해 온 것으로 보인다.
육필문학에 배어 있는 선조들의 얼과 정신은 현재는 물론이고 미래 세대에게까지 그것을 잇게 하는 가교架橋의 기능을 한다. 특히 선조들이 전해 준 이 육필의 소중한 사료들이나 동시대 문인들의 작품을 디지털 아카이브에 보존하게 될 때, 먼 후대에까지 우리의 소중한 필사본이 더욱 정확하게 전달될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이 육필시를 통해 과거와 현재, 현재와 미래의 시인 혹은 독자들이 서로의 마음과 정신을 교류할 수 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느끼게 한다.
다음은 육필시가 진정성과 신뢰성, 친화감을 준다는 점이다. 기계에서 생성되는 인쇄본은 대중성과 대량보급성이란 장점도 있지만, 표준화되고 정량화된 글자체에 의해 작가의 정성이나 개성이 보이지 않고 획일성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 이에 비해 시인이 시를 쓰면서 원고에 직접 남긴 퇴고 자국이나 수공업적인 창작 과정의 흔적은 독자들에게 신뢰감은 물론 따스한 정감과 친화감을 준다.
이 육필에는 시인의 숨결이 배어 있고 창작을 위한 고뇌와 시혼詩魂이 실려 있다. 그래서 독자들은 육필시를 통해 시인과 내적 대화를 하면서 무언의 교감交感을 한다. 이 육필시를 대하는 순간 시인의 심장에서부터 손끝으로 내려오는 식지 않은 피의 온기를, 그리고 육肉과 언어가 혼융일체가 된 몸시의 촉감을 가슴 뭉클하게 느낄 수 있다. 비록 시만이 아니라 시인이 자필로 직접 쓴 편지나 일기, 기행문 등에도 차가운 잉크 냄새가 아니라 사람의 훈향薰香이 은은히 풍겨 나온다. 그래서 육필시는 “시의 본성과 그 정신을 지키는 소중한 보주寶珠”(정진규)로도 인식된다.
끝으로 육필시는 시인의 독창성을 잘 보여 준다. 시인이 자신의 생각을 한 편의 시로 써갈 때 거기에는 시인의 독특한 문채文彩가 드러난다. 육필의 필사에서 나타난 개성적 글자체는 다채로운 회화성으로 변주됨으로써 시의 의미 전달에서 인쇄본이 주지 못하는 심미적 여운을 전해 준다. 일찍이 북송의 소동파가 ‘시 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시가 있다/ 詩中有畵 畵中有詩’ 라고 하여 시화일률詩畵一律을 강조했듯이 시인이 언표한 시의 내용과 그의 회화적 필사체는 하나로 융합되어 독특한 개성을 배가시켜 준다. 그러므로 이 필사본에는 인쇄본으로 결코 대신할 수 없는, 집필자의 필체 혹은 서체에서 풍기는 아우라가 그윽한 묵향처럼 묻어나온다. 말 그대로 육필시에는 ‘문자향 서권기文字香 書卷氣’의 향기와 기운이 은은히 풍겨 나오는 것이다.
이상에서 볼 때 자동화된 시스템으로 작동되는 인쇄술과 최첨단 AI가 위력을 발휘하고 있는 이 시대에 손끝의 힘과 정성으로 구현되는 육필시는 시인과 독자의 거리를 더욱 가깝게 해 준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독자로 하여금 시인의 숨결과 동일성을 강하게 느끼게 하며, 시인의 개성적 글쓰기가 가장 잘 드러나는 창작의 결실로 자리매김한다고 볼 수 있다. 비록 이즈음의 문화예술계는 원본보다 더 정교한 시뮬라크르가 현실을 대체하거나 지배하고 있고, 생성형 인공지능이 원작자를 밀어내고 창작의 주체로 등장하고 있는 추세이지만 미래가 꼭 어둡지만은 않다고 여겨진다. 그 첨단 테크놀로지가 사람의 뇌를 압도할 수 있을지언정 따뜻한 피가 펌프질되는 인간의 심장을 결코 복사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시! 그것은 바로 시인의 고동치는 뜨거운 심장에서 잉태된다.
- 약력
1992년 ≪시와시학≫ 신인상 시 등단
199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문학평론 당선
시집 그 강변의 발자국 등 5권. 평론집 존재의 놀라움.
시학 에세이집 은유의 깊은 숲.
금복문화상, 대구시인협회상, 대구문협 올해의 작품상,
시와시학 우수작품상 수상. 현 대구시인협회 이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