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 옵나이다 아멘)(마태복음 6:9~13)
오늘은 13절,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이 말씀을 살필 차례입이다. 미리 양해를 구할 것이 둘 있습니다. 오늘이 주기도문 설교 마지막 순서이기 때문에 이 말씀을 살피고 나서 전체를 한 번 복습하려고 합니다. 또 오늘은 ‘설명’이라고 할 수 있는 말씀들이 들어있습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이거 말을 바꿔야 한다”고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시험을 치면 합격선 안에 들어야 하는데 시험에 들지 말게 해달라는 것은 낙제하게 해 달라는 것으로 들리기 쉽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합니다.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는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과 찬송가 앞에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이 있는데, 최근에 나온 성경과 찬송가는 대부분 밑에 “새번역 주기도문” “새번역 사도신경”이 있습니다. 우리가 쓰고 있는 주기도문을 손질한 것인데요, “새번역”을 보면 “우리를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지금 ‘새번역 주기도문’과 ‘새번역 사도신경’을 사용하고 있는 교회들이 많이 있지요.
개신교와 천주교가 공동으로 번역한 「공동번역 성서」가 있는데, 「공동번역 성서」는 13절을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라고 번역했습니다.
우리는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이 기도를 자주 드려야 합니다. 아니, 늘 드려야합니다. 시험이 자주, 늘 우리를 찾아오기 때문입니다.
시험은 천지창조 때부터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뱀이 여자를 유혹했습니다. 하와와 아담은 그 유혹에 빠져 버렸습니다. 인간의 비극이 거기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렇게 천지창조 때부터 있었던 시험은 그림자처럼 우리를 따라다니고 있습니다. 아마 세상 끝날까지 그럴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이 기도를 방패로 삼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도 시험이 있었습니다. 마귀가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라‘, 예수님을 시험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시험을 어떻게 물리치셨습니까? 말씀으로 물리치셨습니다.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는 시험에 대해서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신명기 8장 3절의 말씀으로 물리치셨습니다.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는 시험에 대해서는 “주 너희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신명기 6장 16절의 말씀으로 물리치셨습니다.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주며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겠다고 한 시험에 대해서는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신명기 6장 13절의 말씀으로 물리치셨습니다.
말씀으로 시험을 물리치려면 말씀을 잘 알아야 합니다. 말씀에 젖어 있어야 합니다. 요즘 프로야구 경기가 한참인데, 투수가 공을 던지면 시속 140km, 150km, 아주 빠른 속도로 공이 날아옵니다. 타자는 빠르게 날아오는 그 공을 보고, ‘아, 이건 볼이다’ 가만히 있거나 ‘아, 이거, 쳐야 하는 공이다’ 판단하고 배트를 휘두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타격감이 몸에 배어 있어야 합니다. 타격감이 몸에 배기 위해서는 쉬지 않고 연습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성경 말씀이 우리의 몸에 배어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늘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그리고 성경 말씀을 생활에 적용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한국의 성도들은 성경을 많이 알기는 하는데 적용에 약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적용 훈련에 힘써 ‘아, 이럴 때는 이렇게 하라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말씀으로 시험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시험이라는 공이 날아올 때, 말씀으로 그것을 물리치는 것, 야구선수가 홈런을 치는 것 이상으로 장한 일이고 통쾌한 일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에 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를 하셨습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사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기도하시고 제자들에게 왔습니다. 제자들은 어떻게 하고 있었습니까? 자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하시고 이어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마 26:41)라고 하셨습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우리가 늘 기억해야 하는 말입니다. 베드로전서 5장 8절과 9절의 말씀,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도 기억해야 할 말씀입니다. 시험이 찾아오면 “주님, 저를 도와주세요”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히브리서 2장 18절의 말씀,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 주님은 우리를 도우실 것입니다. 아주 효과적으로 도우실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 10장 13절에서 하나님은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미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주기도문의 이 말씀을 기억하면서 시험에 빠지지 않기에 힘쓰는 여러분이 되고, 제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13절의 후반부를 봅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잘 알고 계시겠지만, 주기도문은 누가복음 11장에도 있습니다. 누가복음 11장의 주기도문에는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이 말씀이 들어 있지 않습니다.
먼저 질문하실 것입니다. ‘아니 성경을 보니까 이 말씀은 앞뒤에 괄호로 묶여져 있는데, 왜 그렇게 되어 있습니까?’ 그 답은 성경책에 나와 있는 데요, 괄호 앞에 어깨 번호 ‘4’가 있습니다. 제일 밑을 보면 작은 활자로 “4)고대 사본에 이 괄호 내 구절이 없음”,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마태복음은 마태가 직접 쓴 것을 우리말로 번역한 것이 아닙니다. 마태가 직접 쓴 것, 그러니까 원본은 오래 전에 사라졌습니다. 그것을 베낀 사본들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사본이 발견된 장소가 시내산이면 시내산 사본, 사해 부근이면 사해 사본, 이렇게 이름이 붙어 있는 데요, 오래된 사본들에는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라는 구절이 없고, 후대에 발견된 사본들에만 이 구절이 있어서 이렇게 괄호를 해 놓은 것입니다. 여기만 그런 것이 아니고,. 성경 본문 밑에 작은 활자로 “어떤 사본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라고 적혀 있는 것을 종종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뭐라고요, 성경의 원본은 전해지지 않는다고요? 사본들에 의지해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이 만들어졌다고요? 그러면 성경의 권위가 좀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까?’ 하실지 모르겠는데요, 그렇지가 않습니다. 오랜 시간 성경에 대한 깊은 연구를 거치면서 오늘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성경이 이루어졌습니다. 연구를 하면 할수록 성경이 정확하다는 것이 입증되고 있습니다.
세밀한 성격을 가진 분은 또 이런 질문을 하실 것입니다. “전에는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라고 했는데 요즘은 ‘대개’를 왜 하지 않습니까?” 성경과 찬송가 앞에 있는 주기도문에 10여 년 전까지는 ‘대개’라는 말이 들어 있었습니다. 이 가운데 지금도 그런 성경과 찬송가를 가지고 있는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찬송가 635장에는 “대개 주의 나라 주의 권세 주의 영광 영원히”라고 되어 있지요. ‘대개’라는 말도 의미는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왜 빠져 있을까요? 아니 왜 뺐을까요? 이 말은 헬라어의 ‘호티’라는 접속사를 번역한 것으로 보이는데요, 성서를 발행하고 보급하고 있는 대한성서공회에서 ‘구태여 이 말을 넣을 필요가 없겠다’ 판단하고서 뺀 것 같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과 찬송가는 이렇게 끊임없이 다듬어지고 있습니다. 대한성서공회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제일 앞에 동영상이 뜨는데 번역 담당 부총무님이 나와서 “성서학의 발전, 언어의 변화, 그동안 들어온 수천 건의 의견을 반영해서 성서를 다시 손질하는 작업을 시작해서 2035년에 마칠 계획입니다” 이렇게 설명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나라와 권세와 영원히 아버지께 있사옵나이다 아멘” 이 땅 위의 나라들과 권세는 영원하지 못합니다. 한 때 위세를 크게 떨치던 애굽, 바벨론, 로마, 중국의 진시황, 원나라의 칭기츠칸, 독일의 히틀러, 오래 갈 것 같았는데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어느 정당이 정권을 잡으면 처음에는 기세 좋게 권력을 행사합니다. 시간이 흘러 다음 선거가 가까워지면 몸을 낮춥니다. 그리고 표를 얻기 위해 인기중심의 정책을 많이 세우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바로 지금 그런 현상을 많이 보고 있습니다. ‘이것이 나라를 건강하게 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인가?’ 염려가 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권세는 영원합니다. 우리는 그런 하나님나라의 백성입니다. 영원한 나라의 백성으로서 긍지를 가지고 살아야합니다. 영원한 나라의 헌법인 성경을 붙들고 살아야 합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께 있사옵나이다” “영광이”, 종교개혁자 칼빈이 내세운 표어가 있습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칼빈은 이 말씀을 철저하게 지키기 위해서 힘썼습니다. 칼빈뿐만 아니라 모든 기독교인들이 표어로 삼아야 하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무슨 일을 하려 할 때, 어떤 결정을 내리려 할 때, “이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가?” 이것을 기준으로 삼아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0장 31절의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는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시며 가르쳐주신 주기도문은 “아멘”이라는 말로 끝이 납니다. 어멘은 여기에 처음 나오는 말이 아닙니다. 구약에 23번이나 나옵니다. 신구약 전체에는 50번 나옵니다. 뜻은 잘 아실 것입니다.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이런 뜻입니다. 국어사전에서 “아멘”을 찾으면 “기도나 찬송 또는 설교 끝에 자신도 그 내용과 같이 되기를 원한다는 뜻으로 하는 말“ 이렇게 풀이되어 있는 것을 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정확한 풀이입니다.
인터넷에서 ‘아멘’을 찾으니까 이런 설명이 있습니다. “아멘은 히브리 용어로서 그 안에는 확실성과 진실함, 충실과 확고함, 그리고 신뢰성의 의미가 담겨있다. ‘아멘’이라고 말하는 것은 어떤 말을 시인하고 수용하고 보충하는 표현이며 ‘진실로’ 또는 ’그렇게 되어라‘는 뜻이다.” 좋은 설명입니다. 다시 한 번 읽어 드리겠습니다. “아멘은 히브리 용어로서 그 안에는 확실성과 진실함, 충실과 확고함, 그리고 신뢰성의 의미가 담겨있다. ‘아멘’이라고 말하는 것은 어떤 말을 시인하고 수용하고 보충하는 표현이며 ‘진실로’ 또는 ’그렇게 되어라‘는 뜻이다.”
여러분, 설교를 들을 때 “아멘”하는 마음으로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것을 입밖으로 내시는 것이 좋습니다. 어느 신학교에 연세가 많은 여자분, 그러니까 할머니 학생이 있었습니다. 이 할머니 학생은 늘 생글생글 웃었어요. 그리고 수업시간에 “아멘” 소리를 크게, 자주 했습니다. 그 학교가 학문적으로 깊이 있게 가르치는 신학교는 아니었습니다. 졸업할 때가 되어 졸업사정회를 하게 되었습니다. 저도 그 자리에 있었는데요, 총장상은 누구에게 주고, 공로상은 누구에게 주고, 사정을 해 나가는데 교수 한 분이 “‘아멘상’을 만들어 그 할머니에게 줍시다. 나는 그 ‘아멘’ 소리 들을 때마다 힘이 나서 강의를 더 열심히 했습니다. 다른 교수님들도 같을 것입니다.” 했습니다. 그대로 결정되지는 않았어요. 그래도 졸업식에서 그 할머니 졸업생에게 고맙다고 하는 교수들이 여럿 있었습니다. 여러분도 “아멘”, 열심히 하시기 바랍니다.
60여 년 전에 제가 이 교회 학생부 회원일 때 친구 한 사람은 “노멘” 소리를 자주했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소리가 나오면 “노멘”, 회의할 때 “나는 반대요” 하고 싶으면 “나는 노멘이요”라고 했습니다. “노멘” 보다는 “아멘”이 좋습니다.
이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시며 가르쳐 주신 말씀이 끝났습니다. 이런 질문을 하시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목사님, 우리가 기도를 끝낼 때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라는 말로 끝내지 않습니까? 그런데 여기에 그런 말은 없네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이 말은 교회의 전통 속에서 들어간 말인데요, 언제부터 이 말을 사용했는지 알기 위해 애를 많이 썼는데 제가 부족해서 찾지 못했습니다, 담임목사님, 늘 정확하고 정밀한 말씀으로 많은 것을 가르쳐주셔서 제가 많이 배우고 있는데 확인이 되면 알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이 말의 성경적 근거는 요한복음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4장 14절에서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라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5장 16절 끝부분에도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목사님들이 설교 중에 “이렇게, 이렇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는 경우가 많이 있는데, 이것도 이 말씀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이제 주기도문을 주제로 한 설교가 끝났습니다. 이제부터는 지난 1월부터 오늘까지 여섯 번 한 설교를 복습합니다.. ‘설교는 한 번 하면 그만이지 복습이 어디 있어?’ 하실지 모르겠는데요, 전에 한 번 말씀드렸는데, 저희 교회의 설교를 식사에 비유하면 담임목사님 설교는 정식이고, 한 닿에 한 번씩 하는 제 설교는 간식이고, 좋게 말해서 별식이니까 이렇게 원칙에서 조금 벗어나는 일도 양해하여 줗시기 바랍니다.
기독교가 보배처럼 귀중하게 여기고 있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무엇, 무엇, 무엇일까요? 주기도문과 사도신경과 십계명입니다. 성경과 찬송가 앞과 뒤에 이 셋이 자리잡고 있는 것은 그 때문일 것입니다. 제가 올해 상반기에는 주기도문을 가지고 설교했고, 다음 달부터 12월까지는 십계명을 가지고 설교를 할 것입니다. 내년에는 1년 동안 사도신경을 가지고 설교할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그러니까 2023년부터는 어떻게 하겠다는 계획도 세워 놓았습니다.
주기도문은 기도의 영원한 모범답안입니다.
주기도문에는 무엇을 달라는 기도는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단 한 줄만 들어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한 내용이 훨씬 많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위한 기도를 거의 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런 기도가 성숙한 기도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가르침, 그리고 주님이 보여주신 모범을 본받아 나 중심의 기도에서 벗어나 이웃을 생각하고 하나님을 생각하는 성숙한 기도를 하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주기도문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로 시작됩니다. 우리는 기도를 시작할 때 먼저 하나님을 불러야 하는데 찬양하며 불러야 합니다. 마지못해, 형식적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담아, 진정으로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생각하면, 그렇게 찬양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주기도문에는 “우리”라는 말이 여섯 번 나오고. “나”라는 말은 한 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우리는 나 중심으로 생각하고, 나의 이익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이렇게 이기주의적으로 행동할 때가 많은 데요, 이기주의의 끝은 파멸입니다.
주기도문에는 “나라”라는 말이 10절에 한 번, 오늘 살펴본 13절에 한 번, 두 번 나오는 데요, 이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구약성경에서 제일 중요한 사건은 출애굽사건이고, 신약성경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는 것으로 전도활동, 공생애를 시작하셨습니다. 마가복음 1장 14절과 15절,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라고 기록되어 있지요. 출애굽 사건과 하나님 나라의 공통점이 있는데 해방입니다. 출애굽 사건은 노예상태에서 해방된 것이고, 하나님의 나라는 죄에서 해방되어야 들어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죽은 다음에 가는 나라로만 알아서는 안됩니다. 그런 것을 타계주의, 불교의 말로는 피안주의라고 하는데, 그런 생각에 사로잡혀 있으면 부작용이 많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가 이 땅에 건설해야 하는 나라입니다. 우리는 이 땅의 국민으로 살고 있지만 동시에 하나님 나리의 백성으로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공간적 의미보다 상태의 의미가 더 중요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사랑, 공의, 화평이 넘치는 상태입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모델 하우스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어떤 곳인지 보여주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대사관 역할도 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여기에서 양식은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오늘에는 내일이라는 뜻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내일 걱정을 미리 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는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들을 용서하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그리고 사죄의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자수간첩 이야기를 예화로 들었지요. 간첩은 좋은 옷을 입고 점잖은 척 하면서 살아도, 잡히면 무거운 벌을 받습니다. 우리가 “나는 죄인입니다”하는 죄의 고백을 통한 사죄의 확신이 없으면 죽음을 이고 사는 것이나 마찬가지의 존재들입니다. 간첩은 자수를 하면 용서를 받고 이 나라의 국민이 되어 좋은 대접을 받으며 삽니다.
감리교 창설자 요한 웨슬리 선생님은 1738년 5월 24일 밤에 올더스게잇의 작은 집회에서 사죄의 확신과 마음이 뜨거워지는 체험, 회심의 체험을 했습니다. 웨슬리의 후예인 감리교인들에게는 이런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또 매일의 잘못을 회개하며 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오늘의 말씀,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해 달라고 늘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다”라는 소속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나라의 권세에 순종해야 합니다.
마치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 주기도문을 습관적으로 외우지 마세요. 형식적으로 외우지도 마세요 뜻을 생각하며 이 기도문을 사용하셔야 합니다. 주기도문을 가지고 기도를 할 때 짧은 시간에 한 번에 그 뜻을 다, 또는 많이 생각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 번에 하나의 뜻만이라도 생각하세요.
주기도문은 예수님께서 2000년 전에 산에서 가르쳐주신 보배와 같은 교훈, 산상보훈 가운데 들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오늘 나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 말씀이 나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이지?’ 생각하세요. “나에게 주는 교훈”, 그것이 정말 값어치 있는 교훈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오늘의 이 형편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이 무엇이지?’ 생각하세요. “오늘의 이 형편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 그것이 정말 살아있는 교훈입니다.
목사님 한 분은 성경을 읽을 때마다 심호흡을 하고나서 “이 말씀은 오늘 나에게 주는 말씀이다” 하고서 읽기 시작한답니다. 그 목사님의 말씀, “그렇게 하니까 성경의 활자들이 내 앞에서 펄쩍 펄쩍 뒤며 춤을 추는 것 같습니다.” 주기도문이 여러분과 저에게 그렇게 되기 바랍니다.
저는 부족하여 주기도문의 교훈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했지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께서는 스스로 나에게 주는 교훈, 오늘의 형편 가운데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을 찾아내시며 큰 은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주기도문은 정말 보배와 같은 말씀, 보배 가운데에서 보배와 같은 말씀이 될 것입니다.
주기도문 앞에는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짧고, 강하고, 단정적인 명령입니다. ‘생각해 보고 하겠습니다’ ‘조금 있다가 하겠습니다’ 이런 말들은 용납되지 않습니다. ‘다른 것은 없나요?’ 이런 질문도 용납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시며 주신 주기도문의 뜻을 깊이 생각하며 기도하기에 힘써, 성숙한 기도,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칭찬하시는 기도, 그리고 응답 받는 기도의 생활을 하는 여러분이 되고 제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주님, 저희들에게 모범적인 기도를 가르쳐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성경을 통해 주님께서 이와 같은 기도를 스스로 힘써 드린 것을 발견하며 머리를 숙입니다. 오 주님, 저희들의 기도생활을 도와주옵소서. 더 많이 기도하게 하옵소서. 더 깊이 기도하게 하여 주옵소서. 늘 새롭게 깨달을 수 있게 하여 주옵소서. 기도가 부담이 아니라 기쁨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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