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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문화의 이해 1차 중간보고서 - 철원
문화인류학과 202011167 최상원
철원의 인문환경과 자연환경
- 철원의 인문환경
- 교통
철원은 한반도의 중앙에 위치하여 예로부터 관북 지방과 기호 지방, 관서 지방과 강원도 영서 지방을 잇는 교통의 요지이다. 일제강점기에 서울 용산역에서 강원도 철원역을 거쳐 원산에 이르는 경원선 철도가 개통되었고, 철원과 금강산의 내금강역을 연결하던 금강산선도 운행되었으나 남북 분단으로 단절되었다. 이로써 경원선은 신서면의 신탄리역을 종점으로 하여 운행되었으며, 1963년 신서면이 연천군에 편입되면서 철원 지역에는 50여 년간 철도가 운행되지 않게 되었다.
이후 2000년대에 들어서서 경원선 복원이 추진되면서 철원읍 대마리에 옛 철원역을 대체하는 백마고지역이 신설되어 2012년 11월에 개통되었다. 현재의 경원선은 서울 용산역에서 경기도 의정부시·양주시·동두천시·연천군 지역을 거쳐 철원읍의 백마고지역까지 운행된다. 도로교통은 일반국도 3·5·43·47·56·87호선이 지나가며, 모두 북한 지역까지 이어지도록 지정되었으나 남북 분단에 막혀 철원군을 실질적 종점으로 한다.
- 관광
최전방 지역이다 보니 안보관광의 명소이며, 안보관광이 아니어도 자연 경관이 아름답기 때문에 꽤 많은 사람들이 관광을 온다. 한탄강 유원지, 한탄강 은하수교, 한탄강 물윗길, DMZ 생태평화공원, DMZ 두루미 평화 타운, DMZ 평화의 길, 매월 대폭포, 고석정, 삼부연 폭포, 직탕 폭포, 순담, 송대소 주상절리, 학저수지, 용양늪, 도피안사, 철원향교, 철원 수도국 터 급수탑, 철원 노동당사, 철원평화전망대, 소이산, 제2땅굴, 백마고지 전적지, 구철원 시가지, 백마고지역, 철원역, 월정리역 태봉국 유적 등의 관광지가 있다.
- 철원의 특산품
철원 오대 쌀
철원 오대 쌀은 휴전 이후 인적이 끊긴 비무장지대(DMZ)에서 흘러드는 청정한 물과 해발 250m 고지대의 신선한 바람, 기름진 황토와 흙, 깨끗한 자연환경이 그대로 보존된 천혜의 무공해 청정지역에서 재배, 생산되고 있다.
현무암 공예품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 유일의 현무암 지대인 철원의 현무암은 제주도 돌보다 무겁고 단단하며, 다공질 현무암을 자연색 무늬 색상을 그대로 현대감각에 맞게 관상용 또는 식생활에 사용 할 수 있도록 제작 판매하고 있다.
맷돌, 철원토마토, 그 외 특산품
철원의 깨끗한 산과들에는 철원 오대 쌀 외에도 오이, 토마토, 느타리버섯, 오리 등을 이용한 친환경 농법 쌀, 잡곡류 등의 농산물과 강원도 최고의 사육규모를 자랑하는 돼지를 필두로 한 청정 돈육, 한우 등의 축산물과 맷돌 등의 현무암공예품, 삼지구엽초 등의 특산물이 생산되고 있다.
철원 쿨 포크
두루두루 몸에 좋은 위생적인 돼지고기라는 의미이며, 연교차가 66도까지 차이가 나는 청정철원지역에서 생산된다는 뜻이다.
- 철원의 자연환경
철원군은 강원도 영서 최북단 평야지대에 위치해 있으며, 군 전역이 수복지역으로 군사분계선과 접하고 있다. 철원의 동쪽은 양구군과 접하고 있으며, 남쪽은 화천군과 경기도 포천군에 접하고 있고, 북쪽으로는 휴전선이 지나가고 있다. 동경 127* 07‘ ~ 128* 53’, 북위 38* 06‘ ~ 38* 18’에 위치하며 면적은 823.91km
에 달한다.
철원군의 지형은 크게 동부지역 고지대, 중부지역 평야, 서부지역 구릉지로 나누어진다. 고지대인 동부에는 태백산맥과 광주산맥의 영향으로 흰바우산, 적근산, 대성산, 복주산, 금학산, 명성산 등의 고산들이 솟아있다. 중부지역에는 여러 번의 화산 활동으로 용암이 분출해 거대한 용암지대가 형성되어 지금의 넓은 평야를 이루었다. 서부지역은 북동에서 남서방향으로 발달한 추가령구조곡이 있다.
철원군의 중앙부 용암대지에는 한탄강이 북동에서 남서방향으로 흐르면서 그 지류인 남대천을 합류하고 임진강으로 흘러들어간다. 한탄강은 하방침식이 왕성하며, 곳곳에 화강암과 주상절리와 수직단애가 발달하였다.
강원도 중부 내륙에 위치한 철원군의 기후는 한서 차가 심한 대륙성 기후로, 연평균 기온은 10*C 내외이고, 1월 평균기온은 -3.4*C, 8월 평균기온은 24.4*C 내외이다. 철원군은 바람받이 지형으로 지형성 강우가 야기되어 우리나라 3대 다우지역에 속하며, 특히 여름철에 강우량이 가장 많은 지역이다.
- 철원의 역사
철원의 지명 유래
- 철원이라는 이름은 쇠두레라는 말을 한자로 표기한 지명으로서 쇠가 많이 나는 고장이라는 뜻이다.
선사시대
선사시대 때부터 이 지역을 중심으로 사람이 거주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유적은 비교적 많은 편이다. 1978년에 이웃 지역인 경기도 연천군 전곡면 전곡리에서 구석기 유적이 발굴, 조사되어 수십만 년 전에 한탄강을 끼고 인류가 거주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고, 최근에는 철원군 내의 한탄강변에서 구석기시대 유적이 발견되었다.
신석기 시대
신석기시대에도 사람이 거주했음은 당시의 빗살무늬토기가 출토되고 있음을 보아 짐작할 수 있으며, 청동기시대에는 토성리의 토성(土城)과 여러 곳에 산재해 있는 고인돌을 통해 이 지역에 성읍국가(城邑國家)가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이 때의 유물로 민무늬토기·간돌도끼·간돌칼·돌화살촉·별도끼·돌창 등이 철원읍·동송읍·원남면 등에서 출토되었다. 철기문화가 싹트기 시작한 초기철기시대에는 연맹왕국을 이루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당시 이 곳에는 진국(辰國)이 형성되어 그 속에 편입되었을 가능성이 많다.
삼국시대
삼국시대에는 고구려의 영토로 둥글 ‘원(圓)’ 자를 써서철원(鐵圓) 또는 모을동비(毛乙冬非)라 칭하다가, 통일신라에 흡수된 뒤 경덕왕 때에는 철성군(鐵城郡)으로 개칭되었다.
후삼국시대
이후 901년(효공왕 5년)송악(松嶽)에서 후고구려를 세운 궁예(弓裔)가 905년에 이 곳으로 도읍을 옮겨 풍천원(楓川原)에서 13년간 통치를 하였다. 상술했듯이 후삼국시대에는 궁예가 태봉의 수도로 삼았으나 이 시기의 유적지들은 대부분 현재 비무장지대에 위치해 있어서 쉽게 갈 수 없는 상황이다. 특히 태봉국 철원성은 성 가운데에 군사분계선이 지나가기 때문에 조사도 이뤄지지 못하는 상황이다. 정확한 위치는 경원선 월정리역 정면으로 안보관광으로 갈 수 있는 월정리전망대에서 원래 보이는 위치지만 2022년 기준으로 69년 간 자란 무성한 숲에 가려져 못 보는 상황이다.
고려시대
그리고 918년에는 왕건(王建)이 이 곳에서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건국하였다. 고려 태조 때 동주(東州)라고 하였고 1254년(고종 41년)에 이르러 철원현으로 개편되었다. 후에 철원목으로 되었다가, 1310년(충선왕 2년)에 철원부로 되었고, 1390년(공양왕 2년)에 경기좌도에 속하였다.
조선시대
1413년(태종 13)에 도호부로 승격되었으며, 1434년(세종 16)에 강원도에 편입되었다. 봉수로(烽燧路)는 김화의 소이산(所伊山)에서 봉수를 올리면 철원의 적골산(適骨山)에서 받아 경기도 영평의 미로곡(未老谷)을 거쳐 서울남산으로 전했다. 임진왜란 때에는 서울을 점령한 왜군의 제4진이 동두천을 거쳐 철원·평강·김화를 점령한 뒤 함경남도 안변으로 들어갔기 때문에 피해가 극심했으나 곧 관군과 의병들의 활약으로 수복되었다.
병자호란 때에는 적이 서울을 침입하는 통로가 되었는데, 당시 철원지역 옆의 김화 자모산성(慈母山城)에서 적과 대치하던 관찰사 홍명구(洪命耉)가 순절했으며, 철원의 정방산성(正方山城)에서는 성이 함락되자 김응해(金應海)가 분을 못 이겨 자결했다가 부하들의 응급구호로 소생했으니, 모두 이 지방과 관계있는 충신들이다.
4. 근대
1895년(고종 32)에 지방제도를 개편하면서 철원군으로 고쳐 춘천부에 속했다가 다음 해 강원도에 소속되었다. 1907년 군대해산과 함께 전국에서 의병봉기가 일어나자 철원에서는 김규식(金奎植)·안상근(安尙根)·유학근(兪學根) 등이 활약하였다. 이들은 다른 의병군과 협조해 1907년 9월 20일 의병 100여 명이 갈말면 지포리에서, 3월 16일 철원 서북 10리 지점에서, 4월 1일 의병 50여 명이 지포리에서, 1910년 8월 10일 의병 13명이 토성리에서 각각 일본군을 상대로 전투를 벌였다.
1907년 11월 14일에 일본군은 철원군 지방에서 의병들과 관계된 마을의 집 22채를 소각시키기도 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이 군에서는 강원도에서 가장 먼저 3월 10일부터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 날 철원읍에서 박연서(朴淵瑞)·박용철(朴容喆) 등을 중심으로 2,000여 명이 만세운동을 했으며, 3월 11일에는 갈말면 토성리와 문혜리에서 1,000명이, 4월 8일에는 내문면 독검리에서 최재명(崔在明)·최재청(崔在淸) 등이 주동이 되어 700여 명이 시위를 벌였다. 이러한 시위에 대해 일본헌병과 보조원들의 발포로 많은 주민이 죽임을 당하거나 체포되어 고초를 겪었다. 1931년 4월 철원면이 읍으로 승격되었고, 1941년 10월에는 경기도 삭녕군 내문면·인목면·마장면이 철원군으로 편입되었다.
4-1. 여담
앞서 설명했듯이 철원은 한반도의 중앙에 위치하여 예로부터 관북 지방과 기호 지방, 관서 지방과 강원도 영서 지방을 잇는 교통의 요지이다.일제강점기 시절에는 원래의 지역 특성에다가 경원선과 금강산선이 분기되는 교통이 요지라 엄청나게 발전했으며, 특히 철원 평강 평야의 젖줄로 불린 봉래호저수지가 1923년 완공되면서 강원도를 대표하는 곡창지대이자 경원선 연선의 주요 대도시로 거듭났다.
물론 철원평야와 봉래호저수지가 건설된 가장 큰 이유는 일제가 본국으로 쌀을 수탈하기 위한 이유가 컸다. 그래서 본국으로 빠르게 수송하기 위한 것과 대륙으로 나아가기 쉽도록 철원을 대도시로 만들었다. 이러한 과정으로 인해 실제로 1935년까지는 도내 최대의 도시였고, 해방 직전인 1944년 당시까지만 해도 당시 철원읍은 춘천읍에 이어 강원도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였다. 만약에 분단과 전쟁이 없었으면 1950~1960년대에 군에서 시로 승격하거나 강릉시, 원주시, 춘천시와 함께 강원도 4대 도시로 발전하거나 강원도 북부권(이천군, 평강군, 회양군, 김화군 등)의 중추도시 역할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잠재력이 높은 곳이다.
5. 현대
광복과 함께 38선 이북지역으로 들어갔다가북한이 남침을 준비하는 지역인 철의 삼각지대에 속했으며, 북한 강원도의 도청 소재지이기도 했으나, 1946년 함경남도 원산시, 문천군, 안변군을 강원도로 편입하면서 원산시로 도청이 옮겨가고 북한 입장에서 최전방 지역에 해당되어 몰락하기 시작했다.
1950년 끝내 6.25 전쟁이 터지면서 폭격을 받게 되었고, 전쟁이 중반을 넘어가자 북한군과 국군은 철원·김화·평강 일대 이른바 '철의 삼각지대'를 차지하기 위해 수많은 전투를 벌였다. 이로 인해 철원역과 당시의 시가지는 흔적만 남기고 모두 파괴되었으며, 지금은 폐허가 된 철원 노동당사만이 지키고 있다.
1953년 7월 27일 휴전이 성립되면서 이전의 1읍 9면 중 지금의 철원읍·동송읍·갈말읍·신서면(연천군)은 수복되었으나 어운면의 일부는 비무장지대로 들어갔고, 북면·묘장면은 일부가 북한으로, 내문면·인목면·마장면은 일부가 비무장지대로 있고, 대부분은 북한지역으로 되었다.
- 철원과 분단
1945년 8월 15일 광복 이후 한반도가 북위 38°선을 기준으로 남한과 북한으로 분할됨에 따라 철원은 누구보다 큰 아픔을 겪게 된다. 북한 공산치하에 들어서게 되었고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강원도 최대의 곡창지대를 놓고 남한과 북한이 치열한 격전을 벌임에 따라 번성했던 철원은 완전히 파괴되어 버린 것이다.
특히 6.25 전쟁 때 보급물자를 모아놓은 장소에서 유래한 철의 삼각지대(철원, 평강, 김화)에서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하면 철의 삼각지대란 철원·김화를 저변으로, 평강을 정점으로 한 삼각지대의 군사적인 호칭이며, 신고산∼평강으로 이어진 추가령지구대를 통과하는 경원선과 5번국도가 이 지대에서 철원-연천-의정부-서울, 김화-포천-의정부-서울과 그 밖의 여러 곳으로 연결되는 교통의 중심지이다.
6·25전쟁 당시에는 북한군과 중공군이 나진·성진·원산항에 양륙된 군수물자와 각지에서 동원한 병력을 이 지대에 집결시킨 뒤 전선에 투입한 공산군 최대의 중간 책원지였다. 이러한 이유로 ‘철의 삼각(Iron Triangle)’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전략적 중요성 때문에 수없이 많은 크고 작은 작전이 이 지대 일대에서 펼쳐졌다.
1953년 7월 27일 휴전 이후 전쟁의 상흔이 가라앉고 체제가 안정되면서 주민들의 고향 입주에 대한 열망이 표출되기 시작했다. 이에 정부에서는 휴전선 인근 수많은 황무지와 유휴지를 개척해 농지확장은 물론 식량증산이라는 과업을 완수하고, 첨예한 남북 대치상황에서 국가안보체제도 강화하고 대북심리전 우위를 확보할 요량으로 민북마을(선전마을)을 건설하게 된다.
철원군에서는 1959년 철원읍 월하리 72세대를 필두로, 1960년 관전리 32세대, 근남면 마현1리 66세대, 1968년 철원읍 대마1리 150세대, 대마2리 97세대, 근남면 마현2리 60세대,1970년 김화읍 생창리 100세대. 1973년 김화읍 유곡리 60세대, 1974년 갈말읍 동막리 50세대, 정연리 120세대, 1979년 동송읍 이길리 68세대, 양지리 100세대 등 총 14개 민북마을을 조성하여 975세대를 입주시켰다.
1960~1970년대 입주 초기 아무도 찾지 않던 황무지를 지뢰를 헤치며 목숨 걸고 개간해 문전옥답으로 만들어 놓았더니 수십 년이 지나서 어느 날 불쑥 땅임자라며 나타낸 불청객으로 인해 마을엔 편지풍파가 일었다. 정부에서는 사유재산권 문제라며 적극 개입하지 않았다. 그 사이에 땅을 빼앗기는 일이 속출했고, 2004년 전방을 휩쓴 부동산 광풍이 사태 해결을 더욱 꼬이게 만들었다.
최근 민북마을 근처에는 통일 대비 평화신도시 기반 조성 움직임이 분주하다. 비록 일부구간이긴 하지만 일제강점기 철원의 번영을 이끈 경원선 철도 연장 복원사업도 한창이다. 지난 2008년 9월, 양지리 평화전망대에서는 환경부와 강원도가 ‘DMZ 생태평화비전’을 선포하며 DMZ 생태평화공원 조성계획을 구체화했다. 2009년부터 공사가 시작된 철원평화문화광장도 완공을 눈앞에 두고 있다. 6·25전쟁의 산물이자 냉전의 상징인 DMZ를 남북이 어떻게 활용할지는 향후 초미의 관심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