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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랑길 해남 4코스 제2부 역방향
목냉기고개-외입리들녘-초월마을-호동배수장-산소마을
20220706
제1부에서 이어짐
1.큰 소인 두륜산과 작은 거인 옥매산의 위용
목냉기고개에서 서해랑길 4코스를 이어간다. 드넓은 간척농토가 펼쳐져 있다. 간척되기 이전 서해 바닷물이 목냉기고개 아래에서 출렁거리며 부곡리 부곡마을 앞까지 들어갔다고 한다. 마을 앞까지 바닷물이 드는 형세를 동남쪽 언덕 위에서 내려다보면, 마을은 물 위에 떠 있는 연꽃처럼 보인다는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이었다고 한다. 목냉기고개를 내려가 시멘트농로를 따라간다. 길가에서 은은한 향기가 풍긴다. 자귀나무가 부챗살 진분홍 꽃을 피워 향기를 날리고 있다. 자귀꽃은 낮에는 실바늘 꽃술 같은 꽃잎을 부챗살처럼 펼치지만 밤이 되면 오므린다. 그래서일까? 금슬이 좋지 않은 부부가 자귀꽃을 따서 베개에 넣어 베고 자면 부부의 금슬이 좋아진다는 이야기가 있다.
외입리 남쪽 송청방조제에 의해 드넓은 평야가 형성되었다. 이 평야는 외입리, 연당리, 남리리가 나누어가지고 있는데, 서해랑길은 이 세 법정리 구역을 가로지르며 외입리 초월마을 고개를 넘어 초월마을로 들어간다. 간척농지는 푸른 빛으로 반짝인다. 7월의 뜨거운 햇볕 속에서도 싱싱하게 빛나며 길손의 어둑해진 마음을 푸르게 색칠해 준다. 그것만이 아니다. 활짝 열린 간척농지 푸른 빛에 물드는 가슴을 뛰게 하는 것은 동남쪽의 두륜산과 서북쪽의 옥매산이다.
해남의 두륜산은 최고봉인 해발 700m 가련봉을 포함하여 8개의 봉우리를 품고 있는 명품으로 그 명성이 자자하다. 그에 비하면 옥매산은 광산 개발 때문에 몸에 큰 상처를 입은 해발 173.9m의 산이었지만, 채굴이 진행되면서 정상이 깎여 나가 현재는 168m의 다른 봉우리가 정상 역할을 하고 있는 산이다. 이 낮은 옥매산이 거인 두륜산과 마주 보는 형국을 바라보는 길손은 두륜산의 위용보다도 옥매산의 단단함에 더 감동한다. 두륜산은 흰구름 속에서 비밀을 풀어내려고 애쓰는 모습이지만 옥매산은 감춰진 옥을 모두 내보이듯 깊은 상처와 옥빛을 햇빛에 반짝이며 보여준다. 작은 거인이란 이런 것이다. 두륜산은 옥매산 앞에서 큰 소인이 되는 격이다.
간척농지를 가로질러 초월마을 고개로 올라 고갯마루에 섰다. 그곳에서는 이번에 걸어온 모든 길이 한눈에 가늠된다. 그 풍경이 지금까지 걸어온 속속들이를 다 들추어 보여준다. 옥매산 북쪽 해남군 문내면 원문마을, 옥매산을 돌아나오면 삼호마을과 옥동마을, 대산 자락 임도에서 바라본 진도의 벽파진과 해남의 삼지원, 옥매산에서 낙조 풍경을 감상한 '옥산낙조(玉山落照)', 대산 자락을 넘어오면 옥동방조제와 노루목산의 은산금광, 간척 이전에 벽파진에서 부곡리 해안을 통하여 옥동포구로 들어오는 풍경을 노래한 '옥포귀범(玉浦歸帆)', 옥동들녘에 맑게 솟아오른 연꽃, 외입리 외입마을의 연꽃 같은 인물 이훈동 선생, 목냉기고개의 해송, 그리고 드넓은 간척농지 송청들녘을 가로질러 초월고갯마루에 오르기까지, 이 모든 길과 탐방과 풍경이 한 번의 조망에 다 들어오는 곳이 초월마을 고갯마루이다.
간척농지는 이곳만이 아니다. 외입리 초월마을을 내려가면 맞은편에 호동리 한아마을이 가늠된다. 초월마을과 한아마을 사이에 드넓은 농지가 펼쳐져 있다. 이 푸른 농지 또한 호동방조제가 건설되면서 간척된 농지이다. 바닷물이 초월마을까지 찰랑거리는 모습을 상상하며 간척농지 북서쪽 끝자락을 따라 해안으로 내려가면 호동배수장과 배수갑문 그리고 수로가 나타난다. 배수갑문교를 건너 서해랑길을 따라가지 않고 잠깐 방조제로 나가 보았다. 호동방조제로 나가서 방금 걸어온 길들을 가늠해야 구체적 위치감각이 생길 것이다. 역시 그랬다. 미지의 길을 탐방하는 길손은 걸어갈 길과 걸어온 길을 모두 가늠해야 분명한 위치 감각이 생기게 된다. 방조제에서는 옥매산이 조망되고 부아산 아래 외입마을, 방금 송청들녘을 걸으며 가늠했던 송청방조제, 송청마을 위쪽으로 부곡리 해안, 그 왼쪽에 육지와 이어지는 입도 섬 등이 모두 분명히 확인된다. 이것만일까?
삼호마을에서부터 분명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 첨찰산을 가늠만 하였는데, 호동방조제에서는 하얀 빛의 진도기상대 건물이 보이는 진도의 최고봉 첨찰산이 확인된다. 바다에는 죽도 섬이 떠 있고, 그 왼쪽에 황산면 한자리 산소항이, 죽도 뒤쪽으로 화산면의 상마도, 중마도, 하마도의 삼형제 섬이 가늠되었다. 그리고 남동쪽에서 해남을 수호하는 듯 흰구름을 머리에 인 두륜산이 송신탑을 살짝 내보여 준다. 이 조망이 벅차다. 해남의 최고봉 두륜산과 진도의 최고봉 첨찰산이 동남과 서북에서 서해 바다를 내려보고 있으며 작은 거인 옥매산은 북쪽에서 꼰지발을 딛고 서서 이 거인들과 마주하려고 애쓰고 있다. 아름다운 풍경이다. 방조제로 나온 것이 얼마나 잘한 일인가? 감격하였다.
호동방조제 둑방에 조성한 해바라기밭에 노란 해바라기 꽃들이 피어나 있다. 소피아 로렌 주연의 영화 '해바라기'에서 우크라이나 평원에 펼쳐진 해바라기꽃 영상이 떠오른다. 그 해바라기꽃 영상은 감동적이어서 결코 잊히지 않는 명장면이다. 2차대전에 참전한 남편 안토니오가 전쟁이 끝났는데도 돌아오지 않는다. 남편 안토니오를 찾아 아내 지오반나는 우크라이나로 떠났다. 그녀가 평원에 끝없이 펼쳐진 노란 해바라기꽃에 감동하지만, 그녀를 안내한 사람은 그 해바라기꽃들은 전사한 이탈리아 병사들이 새 생명으로 탄생한 것이라고 말한다. 해바라기는 태양을 향하는 꽃, 생명의 열정을 불태우는 꽃이라고 생각한다. 요절한 함형수(1916~1946) 시인은 자신이 죽은 뒤에 무덤 앞에 비석을 세우지 말고 무덤 주위에 노란 해바라기를 심어달라고 했다. "나의 무덤 앞에는 그 차가운 빗(碑)돌을 세우지 말라./ 나의 무덤 주위에는 그 노오란 해바라기를 심어 달라./ 그리고 해바라기의 긴 줄거리 사이로 끝없는 보리밭을 보여 달라./ 노오란 해바라기는 늘 태양같이 태양같이 하던 화려한 나의 사랑이라고 생각하라./ 푸른 보리밭 사이로 하늘을 쏘는 노고지리가 있거든 아직도 날아오르는 나의 꿈이라고 생각하라."(함형수의 '해바라기의 비명(碑銘)' 전문) 해바라기 같은 열정의 삶을 살다가 죽으면, 그 죽음 뒤에도 자신을 해바라기 열정으로 기억하기를 바라는 생명의 강열한 열정이 사무치는 시 작품이다.
호동방조제 유수지의 수로를 따라 이어가면 이 유수지 옆 간척지에 대규모 태양광발전시설이 설치되어 있다. 3만평이 넘는 부지에 태양광발전소 집광판과 발전실이 세워져 있다. 발전시설 옆길 입구에서 황산면 호동리에서 한자리로 넘어가게 된다. 태양광발전시설을 통과하여 산소마을 방향으로 길을 잡아 들어가면 태극기가 휘날린다. 산소마을은 태극기마을인가? 산소길을 걸어 산소마을을 통과하면 안산길과 만난다. 안산길의 산소마을 입구 전봇대에 서해랑길 4코스 시작점 표지물이 붙어 있고, 서해랑길 3·4코스 안내도가 설치되어 있다. 걸어온 방향으로 눈을 돌리면 여전히 옥매산은 옥빛을 뿜어내고 바다 건너 진도 첨찰산에서는 진도기상대 건물이 흰빛을 쏘아내고 있다.
제1부에서 이어짐
2.탐방 과정
황산면 연당리로 넘어간다. 왼쪽은 황산면 연당리, 그 오른쪽에서 정면 중앙은 남리리, 중앙 오른쪽 뒤는 외입리 초월마을이다. 이 드넓은 농토는 연당리, 외입리, 남리리가 서로 복잡하게 얽혀 있다.
길가에 자귀나무 꽃들이 향기를 날리고 있다.
부부 사이의 금슬을 좋게 한다는 전설의 꽃이다. 향기를 은은하게 날린다.
오른쪽은 황산면 부곡리 신곡마을과 부곡마을, 중앙의 옥매산을 중심으로 왼쪽에 대산, 오른쪽에 모이산이 보인다.
부곡(富谷)이란 명칭은 마을의 형국과 관련이 있다. 간척공사 전, 마을 앞까지 바닷물이 드는 형세를 동남쪽 언덕 위에서 내려다보면, 마을은 물 위에 떠 있는 연꽃처럼 보인다는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이었다고 한다. 여기에서 부수(浮水), 부실, 부옥촌, 부뜰이라 불렀는데, 후에 부곡이라 개칭되었다고 한다. 한편으로는 부자 양반만이 살았다고 하여 부곡(富谷)이라 하였다고도 한다.
부곡마을은 1600년 경 밀양 박씨가 최초 입향하였고, 조선 후기 전주 이씨 영양군파의 후손 이갑운이 영암에서 입거하였다고 한다. 신곡마을은 본래 부곡마을과 한 마을로 신곡마을을 상마을, 부곡마을을 하마을로 불렀다. 신곡마을 입향조는 문화 유씨와 서흥 김씨로 250년 전에 정착하였다고 전한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왼쪽은 황산면 연당리, 그 오른쪽에서 정면 중앙은 남리리, 중앙 오른쪽 뒤는 외입리 초월마을이다. 서해랑길은 연당리에서 오른쪽 드넓은 간척농토로 나아간 뒤 농지를 가로질러 중앙 오른쪽 뒤 고개를 넘어 외입리 초월마을로 들어간다.
중앙의 전봇대 사이로 해남의 명산 두륜산이 가늠된다.
이 앞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간척농토 사이 농로를 따라 이어간다.
시멘트농로를 따라 앞쪽 낮은 구릉 앞까지 간 뒤 왼쪽으로 꺾어 이어간다. 중앙 맨 뒤에 두륜산 정상이 구름에 가려 있다.
오른쪽에 황산면 부곡리 신곡마을과 부곡마을, 그 뒤에 왼쪽부터 대산, 옥매산, 모이산이 보인다. 서헤랑길 4코스 시작점까지 6.1km가 남았다.
서해랑길은 농로를 따라가다가 앞에 보이는 낮은 구릉 앞에서 왼쪽으로 꺾어 송청양수장 앞으로 이어진다. 중앙 뒤에 해남의 명산 두륜산이 구름 속에서 손짓한다.
목냉기고개에서 내려와 간척농토 사이 농로로 들어왔다.
무냉기고개에서 태양광발전소 집광판이 대규모로 설치되어 있는데, 이 벽은 이 시설물을 보호하기 위한 방호벽인가?
서해랑길은 이 농로를 따라 오른쪽으로 돌아나가서 앞의 낮은 구릉을 지나서 왼쪽으로 꺾어 나간다. 두륜산이 중앙 맨 뒤에서 이정표가 되어 준다.
서해랑길은 이곳에서 왼쪽으로 꺾어 이어진다.
농로 끝 송청양수장 앞에서 왼쪽으로 꺾어 진행한다. 왼쪽 뒤 고개를 넘어 외입리 초월마을로 들어갈 것이다.
왼쪽에 외입리 송청방조제와 배수갑문이 있을 것이며, 오른쪽에 송청마을이 있을 것이다. 왼쪽 뒤에 두륜산이 늠름하다.
구릉 오른쪽의 저 벽의 정체가 궁금하다. 맨 오른쪽 뒤에 옥매산이 보인다.
앞에는 분명히 송청방조제가 있을 것이다. 중앙 맨 뒤에 두륜산이 분명히 보인다.
분명히 가늠된다. 옥동리의 대산과 옥매산, 부곡리의 모이산, 그 앞의 부곡마을. 정체불명의 방호벽 앞을 거쳐 왔다.
십자로에서 꺾어 들어왔다.
앞의 송청양수장 앞에서 왼쪽으로 꺾어 나가다 수로를 건너 중앙 뒤 고개를 넘어 외입리 초월마을로 들어간다.
바로 앞 수로 위 다리를 건너 오른쪽으로 진행한다.
건너편 농지는 황산면 남리리에 속하는 듯. 공룡로 뒤에 보이는 마을은 황산면 남리리 남리마을일 것이라 추정.
농로를 따라 계속 직진하다가 왼쪽으로 살짝 꼬부라졌다가 정면의 고개를 넘어간다.
오른쪽 뒤 초월마을 고개를 넘어 초월마을로 내려간다.
무냉기고개에서 내려와 농지 사이 농로로 들어와 방호벽 앞을 통과하였다. 옥매산은 기준점이 되어 준다.
방호벽 앞을 통과하여 낮은 구릉 앞 십자로에서 왼쪽으로 꺾어 송청양수장 앞으로 와서 수로를 건너 이곳으로 왔다.
국도18번 공룡대로 도로표지판이 보인다. 서해랑길은 공룡대로 방향이 아니라 오른쪽 초월마을 방향으로 올라간다.
왼쪽으로 꺾어 초월마을로 내려간다.
오른쪽의 늠름한 옥매산 뒤 해남군 문내면 원문마을 버스정류소에서 출발, 옥매산 자락을 걸어 삼호마을과 옥동마을을 거쳐 대산 자락길을 따라 옥동방조제로 나왔다. 중앙 뒤에 보이는 노루목산 은산금광 앞을 거쳐 부곡리 춘정마을 갈림길에서 외입리 외입마을로 들어와 무냉기고개를 넘어 농로를 따라오다가 농지 사이로 들어와 방호벽 앞을 통과하여 이곳에 왔다. 초월마을 고갯마루에서는 이 모든 것이 가늠된다. 공룡대로 건너 오른쪽 끝은 남리리 남리마을, 왼편은 연당리 연당마을일 것이다.
공룡대로 갈림길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초월마을 고개로 올라왔다. 공룡대로 건너편 오른쪽은 남리리 남리마을, 왼쪽 끝은 연당리 연당마을일 것이라 추정한다.
남리리(南利里)는 고려 때부터 남리(南里)로 칭하고, 압리(鴨里)[‘앞리’에서 파생된 말]라고도 불렀다. 남(南)은 따뜻하고 풍요로움을 일컬으며, 리(利)는 하늘이 지니고 있는 4가지 덕인 원형이정(元亨利貞)에서 의로움의 조화나 만물이 이루어지는 가을을 뜻한다. 그러므로 남리는 따뜻하고 풍요로움이 조화롭게 이루어진다는 의미이다.
남리마을은 고려 때 승라주 역승(驛丞)에 속한 것으로 보아 마을 형성 시기는 600여 년 전으로 볼 수 있다. 또 남리역은 『동국여지승람』에 해남 3역의 하나로 나타나고 있고,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1432] 전라도 나주목 영암군 편에는 “옛날 남리역이 있었는데 왜구로 인해 없어졌다.”라는 기록이 있다. 입향조는 조선 중종 때 청주 한씨 형제가 내려와서 한 사람은 진도로 가고, ‘방(方)’은 정착하였다고 전한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서해랑길 4코스 끝지점에서 이곳까지 10km, 시작점까지 4.1km가 남았다. 전체 거리가 14.4km인데 잘못 적혀 있다.
초월길을 따라 초월마을로 내려간다.
서해랑길은 초월마을로 진입하지 않고 오른쪽 길로 빠져 나간다.
서해랑길은 초월길을 따라 이어진다.
서해랑길은 앞에 보이는 비닐하우스 앞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뒤쪽의 축사 앞을 통과하여 진행한다.
초월마을의 입향조는 황산면 호동리에서 들어온 통천 최씨라고 전하며, 제주 고씨가 600년 전에 현재의 자리 너머 터에 살았다고 전하기도 한다. 초월마을은 남리마을 앞산을 주산으로 하고 산악보다는 넓은 평야와 구릉지대로 이루어져 있다. 간척사업 전에는 마을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맞은편에 보이는 마을은 황산면 호동리 한아마을이라고 추정한다.
중앙 왼쪽 초월마을 고갯마루를 거쳐 초월마을로 내려와 초월길을 따라 이곳으로 왔다.
서해랑길은 전봇대 앞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빙 돌아 축사 앞을 통과한다.
서해랑길은 전봇대 앞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진행한다.
서해랑길은 오른쪽으로 꺾어 빙 돌아서 축사 앞으로 이어진다.
맞은편 왼쪽은 호동리 한아리마을일 것이다. 서해랑길은 오른쪽 축사 앞을 통과하여 농로를 따라 해안으로 나간다.
비닐하우스 앞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빙 돌아왔다.
축사를 빙 돌아서 축사 입구 앞을 통과한다. 앞에 보이는 마을은 호동리 한아마을이라고 추정. "한아마을은 조선 숙종 때 서촉 명씨 명자필(明自弼)이 부인 초계 최씨와 해변가인 모룡지에 도착하여 지금의 당재 아래에 터를 마련하였다고 전한다. '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서해랑길은 왼쪽 농로로 이어진다.
초월길에서 신흥리길로 명칭이 바뀐다. 초월리에서 호동리로 넘어와 호동배수장과 배수갑문 방향으로 진행한다.
왼쪽 신흥리길을 따라 내려왔다. 오른쪽 마을은 호동리 한아마을이라고 추정한다.
중앙에서 살짝 왼쪽 뒤에 두륜산 정상이 구름에 가려 보인다.
왼쪽 신흥리길을 따라 내려왔다. 오른쪽에 호동리 한아마을, 그리고 맨 뒤쪽은 우항리 일대일 것이라 추정한다.
우항리공룡박물관과 황산면사무소는 서해랑길 4코스에서 들러오기가 어렵다.
서해랑길 4코스 탐방을 끝내기 위해 2.1km를 더 걸어야 한다.
뒤쪽의 섬은 상마도, 중마도, 하마도라고 추정한다. 서해랑길을 벗어나 호동방조제로 나가 위치를 확인한다.
건너편 마을은 외입리 송청마을, 왼쪽 산은 큰산인 듯, 중앙 왼쪽의 산은 부아산, 그 아래 외입마을이 있다. 그리고 뒤쪽에 옥매산이 서해랑길 4코스의 기준이 된다.
작은 섬은 간조 때 육지와 이어지는 입도인 듯. 입도 뒤 건너편에 진도의 최고봉 진도군 의신면 사천리의 첨찰산이 보인다. 첨찰산의 징표는 하얀 색의 진도 기상대 건물이다.
방조제 끝 뒤는 황산면 한자리 산소항, 바다의 섬은 죽도, 맨 뒤의 섬은 상마도, 중마도, 하마도 삼형제섬인 듯.
유수지에 갈대습지가 형성되어 있고, 거대한 태양광발전소 집광판들이 설치되어 있다. 중앙 뒤쪽에 두륜산이 보인다.
방조제로 나갔다가 되돌아와 오른쪽으로 꺾어 서해랑길을 따라 진행한다.
방조제 유수지 둑방에 해바라기밭을 조성하였는데 노란 해바라기 꽃들이 피었다. 광대한 태양광발전시설이 펼쳐져 있고, 맨 뒤 중앙에 구름에 덮인 두륜산이 보인다.
뒤쪽 중앙에 두륜산이 보인다. 두륜산 증표가 되는 송신탑이 구름 속에 숨어있다가 살짝 모습을 보인다.
신흥리길을 따라 내려오다가 동북쪽으로 바라보면 염수들과 호동리의 신흥마을이 보인다. "신흥마을은 한아마을에 속하였으나 한자리 간척사업으로 많은 농토가 생기고 염전이 활발해지면서 1950년대 중반 한아마을에서 분리되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유수지 수로 왼쪽에 거대한 규모의 태양광발전소 시설이 설치되어 있고 건너편 중앙에 진도의 최고봉 첨찰산이 있다.
신흥들을 왼쪽에 두고 신흥리길이라 명명된 염수들길을 따라 계속 내려간다.
3만7백66평에 걸쳐 있는 태양광발전소, 건설공사 기간은 2013.6~11월.
중앙 뒤에서 두륜산이 손짓한다.
도로명이 신흥리길에서 고천암로로 바뀌는 지점에서 호동리에서 한자리로 넘어간다. 서해랑길은 오른쪽 태양광발전시설물 옆길로 나간다.
중앙 뒤에서 옥매산이 반짝인다. 옥매산은 서해랑길 4코스의 중심점이 되어 준다.
태양광발전시설 옆길을 빠져 나가면 한자리 한자길이다. 왼쪽은 한자보건진료소와 한자마을 가는 길이며, 서해랑길은 오른쪽 산소마을 방향으로 이어진다.
한자리(閑子里) 명칭이 유래한 한자마을은 자라 형태의 다섯 개 섬 가운데 가장 큰 자라섬이라 하여 ‘한자라’라 불렸다. 이것을 한자로 바꾸면서 한자라에서 크다는 뜻을 가진 ‘한’을 대(大)가 아니라 음차만 하여 한(閑)으로 쓰고, 여기에 ‘라’가 탈락되어 한자(閑子)가 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으로는 조선시대 말엽 광동 진씨가 귀향 차 내려와 한가로이 거주하였다 하여 한자(閑子)라 불렀다고도 한다. 『호구총수(戶口總數)』[1789]에 한자내리(閑子乃里)라는 지명이 보인다.
본래 해남군 산일면 지역이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신정리, 산소리, 징의도와 호동리, 신흥리 각 일부를 병합하여 해남군 황산면 한자리로 개설되었다. 현재 한자마을, 산소마을, 신정마을, 징의마을 등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한자마을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창녕 조씨와 김해 김씨가 난을 피하여 입향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한편에서는 1650년 이후 도강 김씨가 먼저 입향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광동 진씨와 다른 성씨가 들어오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현재는 도강 김씨와 경주 정씨가 많이 거주하고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수로 다리를 건너 오른쪽 위 산소마을 방향으로 진행한다.
한자리(閑子里) 한자마을 방향으로 찍었다. 서해랑길 시작점까지는 반대 방향으로 500m를 더 가야 한다.
직진하면 산소항으로 이어질 듯. 서해랑길은 왼쪽으로 꺾어 산소마을로 진입한다.
태양광발전시설이 펼쳐져 있고, 맨 뒤쪽에 옥매산이 보인다.
산소(山所)마을은 원래는 산일면(山一面)에 속하였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이후 한자리, 중의도, 호동리, 신흥리와 함께 한자리라 해서 황산면에 편입되었다. 마을 형성 시기가 한자마을과 비슷하다고 한 것으로 보아 17세기 중반에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산소마을의 입향 유래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있다. 다만 파평 윤씨와 남평 문씨, 도강 김씨가 거의 같은 대에 입향하였고, 이후 광산 김씨, 전주 이씨 등이 입거하였다고 한다. 예전에는 포구였던 곳으로 만호바다에서 고기잡이하던 어부들의 은신처이기도 했다. 산소마을은 일제강점기부터 김 양식으로 이름난 곳이었으며,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친환경 김을 생산하는 곳으로 이름이 높았다.
산소마을은 바다로 둘러싸인 섬이었으나 간척공사가 이루어지면서 육지가 되었다. 간척 전 주 생업은 어업이었으나, 간척 후에는 농사도 하고 있다. 농업은 주로 쌀농사를 지으며, 배추와 고추, 울금 농사를 하고 있다. 어업으로는 갯벌에서 꼬막, 굴, 조개 등을 채취하고 김과 굴 양식을 하고 있다. 또 어선이 약 40여 척 있으며, 만호염전, 영일염전에서는 소금을 생산하고 있다. 산소항에는 물김 위판장이 만들어져, 겨울철 산소마을 부근에서 생산된 친환경 김의 위판이 이루어지고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왼쪽에 산소항이 있을 것이다. 중앙 맨 뒤에 옥매산이 반짝인다.
서해랑길 4코스 시작점 표지물이 전봇대에 붙어 있다. 앞쪽은 산소항, 맞은편에 하얀 진도기상대 건물이 있는 쳠찰산이 분명히 확인된다.
왼쪽 전봇대에 서해랑길 4코스 시작점 표지물이 붙어 있다.
앞쪽은 산소항, 맞은편에 진도의 첨찰산이 보인다. 서해랑길 4코스 시작점 표지물과 3·4코스 안내도가 설치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