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가) 인물의 집권 기간에 일어난 사실로 옳은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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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이/가 집권한 후 어느 공회 석상에서 음성을 높여 여러 대신을 향해 말하기를 “나는 천리를 끌어다 지척(咫尺)을 삼겠으며 태산을 깎아내려 평지를 만들고 또한 남대문을 3층으로 높이려 하는데 여러 공들은 어떠시오?”라고 하였다. -황현, ..매천야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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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신유박해가 일어났다.
② 대전통편이 편찬되었다.
③ 강화도 조약이 체결되었다.
④ 임술 농민 봉기가 일어났다.
⑤ 일본이 요청한 서계 수리를 거부하였다.
정답: ⑤
* 흥선 대원군 집권시기(1863~1873)의 역사적 사실
- 보기의 자료는 흥선 대원군이 세도정치기에 소외되었던, 왕실(천리지척), 남인(남대문)을 중용하고 장기집권 세력인 노론(태산)을 억압하겠다는 비유이다,
일본은 메이지유신(1868) 직후 그들의 왕정복고를 조선정부에 통고하고 양국의 국교회복을 청하는 사신을 보내 왔으나, 척왜정책으로 기운 대원군 집정의 조선정부는 서계(외교문서)의 격식이 종전과 같지 않고 인장도 조선정부가 인각한 것이 아니라는 이유를 들어 사신의 접견조차 거부하였다. 이로부터 양국은 외교문서의 수리를 놓고 1년을 논박으로 보내다가 일본은 대조선 외교를 전담하여 온 대마도주로부터 그 직임을 회수하고 1869년과 1870년 외무성 관리를 파견하였으나, 조선측의 완강한 거부에 부닥쳐 타결을 보지 못하였다. 1872년에는 외무대승 하나부사 요시모토가 군함을 이끌고 부산에 내도하였으나, 조선측은 '왜사(倭使)가 군함을 타고 오다니 상대해 줄 수 없다'고 냉대하여 수개월 동안 체류하다가 돌아갔다. 이와 같은 과정 속에서 일본의 조야에서는 정한론이 세차게 일어나고, 대원군 하야(1873) 후 운요호 사건(1875)과 강화도약(1876)으로 이어졌다.
① 순조가 즉위 직후 신유박해(1801)가 일어나 이승훈, 정약종, 주문모(중국인 신부) 등 300여 명의 천주교 신도가 처형당하고, 정약전, 정약용 등이 유배를 당하였다.
② 흥선 대원군의 개혁(1863~1873) 때에 정조 때 편찬된 대전통편(1785) 이후의 법령을 추가하여 조선왕조 최후의 법전인 대전회통(1865)을 편찬하였다.
④ 철종(1849~1863) 때에 세도정치의 배경 속에서 세금행정인 삼정의 문란이 전국적인 임술농민봉기(1862)의 원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