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명주(溟州) 郡王 김주원(金周元)
新羅 太宗武烈王의 5代孫이며 강릉(江陵) 金씨의 始祖인 金周元의 집안은 여러 차레 上大等과 侍中을 지낸바 있으며, 그의 부친인 유정(惟正)은 명주에 벼슬을 받아와서 이 지방 토호(土豪)의 딸 박연화(朴連花)와 결혼하여 주원(周元)을 낳았다.
선덕왕(37대)이 후계자 없이 죽자 그는 왕위 계승자로 유력하였으나 상대등(上大等)인 김경신(金敬信)이 왕위에 오르자, 周元은 자진해서 그가 연고권을 가지고 있던 江陵으로 물러났다.
傳하는 바에 의하면 金周元을 택하여 왕위에 오르게 하려 했으나 金周元이 마침 내린 큰 비로 강을 건너지 못하여 會議에 참석하지 못하였으므로, 이에 신하들이 이는 하늘의 뜻이라 하여 원성왕(38대)이 즉위하게 되었다고 한다.
789년 원성왕은 주원을 명주군왕에 봉하고, 명주, 양양, 삼척, 울진, 평해를 식읍(食邑)으로 주었다.
그 후 周元의 아들 헌창(憲昌), 손자 범문(梵文)이 중앙 정계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으나 모두 실패하였다.
역사 문헌에 보면 김헌창은 822년3월 (41대 헌덕왕14년) 에 국호를 장안. 연호를 경운이라 정하고 무진, 완산, 청주, 사벌의 4주 도독과 중원경 서원경 금관경의 장관인 사신등을 규합하여 중앙군과 싸우다 웅진성에서 대패했다고 역사에 기록하고 있다.
나. 溟州 郡王 金周元 墓
1. 위치 : 강릉시 성산면 보광동
옛부터 강릉(江陵 )지방에서는 생거모학산(生居母鶴山)이요 사거성산(死居城山)이라고 했다.
즉 살아서는 母山이나 鶴山지역이 좋고 죽어서는 城山이 유택 장소라는 것이다.
강릉 서쪽 대관령 아래 성산땅에 명주성을 쌓고 살다가 삼원동에 유택을 남기고 살아지시니 오늘날 강릉 김씨의 始祖가 되셨다.
대관령 구도로(舊道路)를 이용하여 江陵으로 내려 가면 아흔아홉 구비가 끝나는 지점에 "溟州郡王陵所入口"라는 푯말이 있다. 여기서 좌측으로 15리쯤 가노라면 三王洞이라는 普光洞이 나온다.
2. 형기론
墓所 입구에는 溟州郡王의 향사를 지내는 숭의전과 武烈王의 위패를 모신 숭렬전, 생육신 매월당 金時習의 영전을 안치한 청간사가 있다.
이곳 에서 우측 산허리에 군왕의 陵이있다. 석축으로 사면을 둘러싼 능은 慶州일대에서 볼수 있는 王陵과는 규모가 다르다.
慶州 일대 왕릉은 평지에 만든데 반해 명주(溟州)군왕의 墓는 자연적인 구릉을 이용했다.
여기서 우리는 中國式 風水가 들어 오기 전에 이곳에 幽宅을 잡았다는 점에 韓國的 風水理論을 짐작해본다.
三國時代의 個人 墓가 현존하는 경우가 극히 드문데 백두대간의 큰줄기에 위치한 郡王陵이 1천년을 계승하는 것은 우리의 전통 한국풍수 사상에 숨어있는 비밀이 있지 안을까?.......
大關嶺에서 東海쪽으로 달려온 龍이 江陵 근처에서 머리를 돌려 손좌건향(巽坐 乾向)으로 局을 만들고 陵자리는 갑좌경향(甲坐 庚向)으로 놓았다.
전,후에 2개의 봉분으로 墓가 만들어져 있고, 墓碑를 비롯한 石物이 있으며, 墓 아래쪽에 神道碑가 있다
이곳에 자리 잡은지 거의 800年間 後孫에게 알려지지 못하다가 조선 명종때 강릉부사로 부임한 후손 김첨경(1525ㅡ1583.예조판서. 肅簡公)에 의해 幽宅을 찾을수 있게 되었다.
郡王의 후손으로 고려조의 김인존, 조선조 매월당 김시습, 그뒤 조선조 중기에 8판서를 배출해 "팔판동"이라는 서울의 洞名을 만들기도 했다.
우연일가 팔판서는 김첨경의 직계 후손이라 始祖에 대한 지극한 孝가 地氣와 관련이 있을가?
동진칠봉(東進七峰) 저 탐랑은 태백산맥과 더불어 朝山이 되어 달러오니 어찌 아니 좋으리오.
甲坐庚向으로 穴을 잡으니 물도 역시 法道에 따라 서북쪽에서 나와 南쪽으로 빠지는 乾亥得水 丙午破요, 白頭大幹 大關嶺바라보는 회룡고조혈(回龍顧祖穴)이라 文人材士 속출하고, 大小官爵 열였구나............ , 孝道와 積德만이 얻을 수있는 同氣感應의 힘이 아닐까?.
<奇人생육신 梅月堂 김시습(金時習)>
강릉 김씨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물을 살펴보면, 9세손 상기(上琦)가 고려 예종(睿宗) 때 평장사(平章事)를 지냈다. 그의 아들 인존(仁存)은 문하평장사상주국(門下平章事上柱國)으로 인종(仁宗) 때 익성동덕공신(翊聖同德功臣)에 책록되었다.
특히 학문과 문장에 뛰어나, 나라에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왕이 몸소 그에게 자문을 받았다고 한다
조선조에 들어와서 명문의 전통을 이은 인물로는,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인 매월당(梅月堂) 시습(時習)이 대표로 꼽힌다. 서기 1435(세종 17)년 성균관 부근에서 일성(日省)의 아들로 출생한 그는 어려서부터 신동(神童)·신재(神才)로 불렸다.
세살 때에는 맷돌로 보리를 가는 것을 보고 그는 다음과 같은 시를 읊어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비도 오지 않는데 천둥소리 어디서 나나? 누런 구름이 조각조각 사방으로 흩어지네.
無雨雷聲何處動(무우뇌성하처동)
黃雲片片四方分(황운편편사방분)
그의 나이가 다섯 살이 되던 때에는 `시습`이란 이름 대신에 `오세(五歲)`로 불렸다. 이름을 부르기도 아까운 신동이란 의미에서 그냥 다섯 살짜리라고 부른 것이다.
그 나이에 벌써 『중용(中庸)』과 『대학(大學)』에 통달하여 소문을 접한 세종대왕이 그를 불러 시험을 한 뒤, 총애했다고 한다.
그리고 나서 그는 대사성 김반(金泮)의 문하(門下)에서 글을 읽고, 사범지종(師範之宗)으로 일컬어진 윤상(尹祥)에게 『예서(禮書)』와 제자백가서(諸子百家書)를 배웠다. 21세 때인 1455(단종 3)년의 일이다. 삼각산 중흥사(重興寺)에서 공부하던 그는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조카 단종(端宗)을 내몰고 왕위를 찬탈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에 통분한 그는 읽던 책을 모두 불에 태워 버리고, 스스로 중이 되었다. 이름을 설잠(雪岑)으로 고친 그는 전국을 방랑하며, 울분을 시에 토로하였다.
비분강개한 심정에서 지어진 이 시기의 시는 대부분 나뭇잎에 쓰여 물살에 흘러갔다.
북으로는 안시향령(安市香嶺), 동으로는 금강산과 오대산, 남으로는 다도해(多島海)에 이르기까지 9년 간을 방랑하면서 「탕유관서록」·「탕유관동록」·「탕유호남록」등을 남겼다.
서기 1463(세조 9)년에는 책을 구하러 잠시 한양(漢陽)에 들렀다가 효령대군(孝寧大君)의 권유로 잠시 세조의 불경언해(佛經諺解) 사업을 도와 내불당(內佛堂)에서 교정 일을 보았다.
이 시기에 그는 세도가들의 강권에 의해 그들의 자제를 잠시 떠맡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학문을 가르치지 않았다. 오히려 농사를 가르쳤다.
무의도식하는 특권계층의 양반 자제들에게 진정한 땀의 의미와 피지배계층인 농민들의 어려운 현실을 체험토록 한 것이다.
지금도 그가 남긴 시를 훑어보면, 고통받는 당대 농민들의 서러운 삶을 애처로운 눈길로 바라본 작품들이 수두룩하다. 또한 이 때에 당대의 권세가인 서거정(徐居正)의 출근길을 막고 행패를 부리는 등 기이한 언행을 수다하게 남기기도 하였다.
1465(세조 11)년 그는 경주(慶州) 남산에 금오산실(金鰲山室)을 짓고 다시 입산하였다. 그 후 누차에 걸쳐 세조의 부름을 받았으나 거절하고, 한문소설 『금오신화(金鰲新話)』와 한시 「산거백영(山居百詠)」을 남겼다. 서기 1481(성종 12)년에 환속(還俗)한 그는 안씨(安氏)를 아내로 맞이했으나, 후사를 두지 못했다.
2년 뒤 다시 한양을 등지고 방랑의 길에 나선 그는 충청도 홍산(鴻山)의 무량사(無量寺)에서 생애를 끝마쳤다. 무량사에는 그의 부도탑과 초상이 남아있다.
전설에 따르면, 임종 후에 그의 육신은 모두 나비가 되어 날아갔다고 한다. 이른바 시해(尸解)를 통해 신선이 되었다는 내용이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도교사(道敎史)에서는 그를 아주 중요한 인물로 여긴다. 그는 세조(世祖)의 패륜에 저항하여 매서운 절개를 지킨 고고한 지성이었다. 불교와 유교·도교를 두루 포섭한 사상(思想)을 바탕으로 한 탁월한 문장가였다.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이상 세계를 문학에서 찾으며 외롭게 살다간 불행한 천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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