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판리(六判里), 언듯 이름만 들어도 범상치 않은 마을임이 느껴진다.
광주시 동구 지원동에서 화순방향으로 가다보면 오른편에‘육판리(六判里)’라는 표지석이 눈에 들어온다. 표지석을 보듬고 오른쪽 샛길을 따라 5~6분 들어가면 분적산 기슭에 자리한 고즈넉한 자연마을을 만날수 있다.
행정구역상 광주시 동구 내남동 내지리(육판리) 자연마을로 풍수지리적으로 보면 ‘3정승 6판서’가 배출 될 지세(地勢)를 타고났다 하여 언제부터인가 이 마을을‘육판리’라 불러오고 있다.
‘육판리’형성의 시기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이 곳 주민들은 지금도 ‘3정승 6판서’가 배출 되리라는 사실을 굳게 믿으며 살아가고 있다.
특히 이 마을에는 여느 곳과는 달리 우리 전통문화의 맥을 잇는 특색 몇가지가 눈길을 끌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로 전통 상례(喪禮)가 지금까지 전해내려 오고 있는 것.
광주도심 금남로와 불과 10여분 거리인데도 마을에 상(喪)을 입었을땐 꽃상여를 이용해 장례를 치르고 있다.
꽃상여의 장례행렬은 고전영화 속에서나 볼수 있는 광경이지만 육판리에서는 요즘도 이러한 모습들을 종종 볼수 있다.
마을의 터줏대감격인 신광식통장(53)은 “상례(喪禮)는 민족의 전통이 살아있는 충효정신의 근본이며 인간의 기본정신 입니다.
현대는 정보화시대라고 하지만 시대가 발달할수록 우리의 전통문화는 더욱 소중히 가꿔져야 하고 보존돼야 한다”며“육판리의 관혼상제는 앞으로도 선조들의 충효정신을 이어 지속적으로 보존·계승, 후손들에게 민족의 전통유산으로 물려줄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이 마을엔 자손 대대로 내려오는 3개의 위친계가 있다.
촌장격으로 구성된 원로계와 장년계, 그리고 청년계 등이 그 것이다.
이들 계는 육판리의 크고작은 모든 행사를 주관하고 마을의 화합과 안녕 위해 노력·봉사하고 있다.
때론 이들은 민주적 운영으로 마을의 중대한 사안에 대해서는 계원들의 중지를 모아 결정하는 등 ‘현대판 향약’으로 자리매김 하고 있다.
뿐만이 아니다. 무등산 왼쪽자락에 포근히 안긴 육판리는 산세가 수려해 ‘육판 팔경’으로도 유명, 예로부터 시인묵객들이 이 곳을 찾아 풍광을 읊었던 곳이기도 하다.
팔경을 간단하게 소개하면 이렇다.
국수한설(菊秀漢雪), 용암귀운(龍岩歸雲), 계봉명월(桂峰明月), 금정폭포(金亭瀑布), 한등낙조, 구산모우(鷗山暮雨), 연지어화(硯池漁火)가 그 것.
이처럼 ‘육판팔경’에 소개되는 겨울국화의 아름다움과 상서로운 구름이 용암바위를 휘돌아 오는 비경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짐작 할 만 하다.
또 계수나무 봉우리의 밝은 달과 금정폭포가 어우러져 한폭의 산수화를 연상시키는 것도 이 곳만의 자랑거리.
수려한 풍광 속에서 언젠가는 3정승·6판서가 배출 되리라는 희망을 안고 순박하게 살아가는 육판리 사람들.
육판리는 분적산 기슭의 삶터에서 광산 김씨를 비롯 김해 김씨, 나주 나씨, 밀양 박씨, 수원 백씨. 평산 신씨 등 10여개의 성씨가 어우러진 80여가구 500여명이 등을 맞대고 정겹게 살아가고 있다.
오늘은 유난히 바람이 차다.
화롯불처럼 다독여진 육판리 사람들의 다수운 정이 새롭게 느껴진다.
흙을 지키며 남아있는 고향의 어머니 품처럼….
“육판리 사람들은 이웃간의 정이 유별 납니다. 마을의 크고 작은 행사들이 있으면 모두가 합심해 자기일처럼 나서지요.
특히 애사(哀事)를 당했을때는 마을민 뿐만아니라 출향인들까지 참여해 슬픔을 같이 나누며 상주를 위로하는 등 훈훈한 인심이 살아있는 곳입니다.”
육판마을 입구에서 만난 신광식 통장(53).
신통장은 이 마을에서 태어나 한번도 고향을 벗어나 살아본적이 없는 토박이다.
그는 육판마을에서 나고 자람을 자랑으로 여기는 사람으로, 마을민들의 신망을 한몸에 받고 있는 애향운동가이기도 하다.
“‘육판리는 풍수지리상 ‘3정승 6판서’가 나올 형세’라고 어렸을때 어른들로부터 많이 들어왔습니다.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이곳 출신들이 법조계나 학계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인물이 많이 배출된 것은 사실입니다.
최근에도 부친의 대를 이어 사법시험에 합격한 젊은이가 있었지요. 아뭏든 육판마을의 내력은 광주 토박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은근히 마을 자랑을 늘어 놓았다.
신통장은 또 “이 마을에는 3개의 위친계가 전해내려 오고 있다”고 귀띔했다
육판마을 초입엔 500여년 남짓한 수령을 자랑하는 당산나무가 수호신처럼 버티고 서있다. 펑퍼짐한 나무의 자태는 마치 할머니의 치마폭처럼 쫙 퍼져있어 범상의 나무와는 사뭇 다른 인상을 준다.
구체적인 기록은 없으나 설화를 정리해보면 1950년 한국전쟁 당시 빨치산들이 내려와 주민들을 위협하기 위해 당산나무에 총을 쏘아댔다.
그후 한달여 가까이 당산나무에서 붉은 피를 흘렸고, 주민들은 치맛자락으로 상처를 감싸주며 지극정성으로 보호했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그 시절, 이상하리 만큼 육판마을에서는 토끼 한마리 다치지 않고 무사히 난을 피했다.
그후 마을사람들은 당산나무가 돌봐서 ‘난리에도 피해가 없었다’며 이 나무를 신령스러운‘당산 할머니’로 모셨다.
주민들은 당산할머니의 은혜에 보답키 위해 매년 정월대보름 당산제를 지내며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