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에는 카메라를 샀다. 사진에 관심이 생겼기 때문이다. 공원에 나가 들판이나 나무, 날아오르는 새들 따위를 찍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게 내 앞날에 도움이 되는 일일까? 이걸 할 시간에 영어 공부나 독서를 하는 게 더 효율적이지 않을까? 그날 이후 좀처럼 카메라에 관심이 가지 않았다. 질린 것은 아니었다. 다만 의구심이 들었던 것이다. 내가 지금 하는 일이 과연, 가치가 있는 일일까?
나는 관심사가 많다. 좋아하는 게 많고 하고 싶은 건 더 많다. 하지만 시간은 남들과 똑같이 하루 24시간을 허락 받는다. 나는 올해로 서른이 되었고, 무엇이든 시작하기에 그리 이른 나이가 아니게 되었다. 나는 이 점이 뼈아프다. 내게 허락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듯이 초조하고, 시간계획표는 더 촘촘해져 간다. 시간을 허투로 쓰면 안된다. 무슨 일이든 알차게, 효율적이게, 실리적으로 해야한다! 그런 생각이 끝나고 나면 계획표에 몇 가지 항목이 지워져 있다. 사진, 그림, 제 2외국어… 정말로 하고 싶지만 실리적이지 않은 일들은 늘 뒤로 뒤로 미뤄진다. 내가 사진을 찍어서 무엇을 하겠는가. 사진가가 될 것도 아닌데. 그림을 그려서 뭣하겠는가. 십대때 이미 궤도에 오른 자들이 태반인데. 스페인어를 배워서 어디다 쓴다는 말인가. 언제 해외에 나갈지도 모르는데.
그리고 한 편의 영상을 봤다. 영상을 끝까지 본 후, 나는 계획표를 다시 짰다. 늘 투두리스트의 맨 아랫줄에 소심하게 적혀 있던 항목들을 굵고 진하게 적었다. 그 영상의 제목은 ‘connecting the dots’이다. 스티븐 잡스의 대학 졸업 연설을 녹화한 것으로, 그는 자신이 해온 숱한 일들이 후에 어떻게 애플 제품 개발에 기여했는지를 말해준다. 당시에는 큰 뜻 없이 행한 일들이, 결정적 순간에 도움이 됐다고 말이다. 사람은 일을 하는 그 순간에는 그 일이 어떻게 쓰일지 알 수 없다. 다만 훗날에 뒤돌아봤을 때, 과거의 일들을 하나하나 연결할 수 있다. ‘점들을 잇는’ 것이다.
다시 카메라를 꺼냈다. 매주 일요일 마다 사진을 찍으러 갈 생각이다. 그림은 매일 30분 정도를 모작하기로 했다. 일시정지를 신청해둔 스페인어 강의를 다시 시작했다. 이 일들이 실리적이지 않다는 생각에는 여전히 변함이 없다. 어쩌면 나는 이것들을 할 시간에 독서나 글쓰기를 더 하는 게 옳은 일일지도 모른다. 사진을 찍어서 뭐하겠는가. 그림을 그려서 뭘한단 말인가. 스페인어는 또 언제 쓸 것인가. 하지만 혹시 모른다. 내가 훗날 스페인에서 꽃이 만발한 5월의 거리를 사진으로 담고, 또 그걸 그림으로 옮기는 작업을 할지도. 그러니 내가 해야할 일은 그저 하루하루 충실하게 점을 찍는 것이다. 먼 미래의 내가 이을 수 있게 말이다.
첫댓글 유이 님이 쓰신 글을 보면서 수학 공식이 생각났어요. 공부할 당시에는 무슨 말인지도 모르겠고, 그래서 이게 왜 이렇게 된단 말인지 영 어렵기만 한데, 그때마다 선생님들 말씀하시기를 '일단 외워라. 외우고 보면 나중에 이해 된다'고 하셨거든요. 당시에는 정말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당장 활용하지 못해도 일단 외우면 고등학교 가서 이해된다니? 그게 아니더라도 살면서 사용하게 될 거라니? 그러나 정말 그렇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제게 삶이란 수학공식처럼 돌아가는 것으로 인식되어 있는데, 유이 님 글을 읽으며 '아~ 쉽게 말해서 그게 connecting the dots 같은 거구나!' 하고 깨달았어요. 항상 다양하고도 많은 지식을 배웁니다. 덕분입니다. ㅎㅎ 뭐든 배워두면 쓸모있다는 조상님 때부터 내려온 말을 지반 삼아, 실리만 추구하는 태도를 좀 내려놓는 2023년을 꾸려야겠어요.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