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운여정(4)
草秋의 영원한 우정과 예술을 따라서(2)
-<초.추의 제자 허소치 편>
최근*에 들어서서 우리에게는 두 가지의 큰 사건이 있었다. 하나는 경제를 외면하는 정부 잘못으로 야기된 극심한 경제 불황이고 또 하나는 자유 민주주의 질서를 무시한 공격적인 여당의 한풀이로 이 나라를 혼란에 빠트리고 있는 것이다.*(1997년 12월) 이로 인하여 많은 친구들이 회사나 공직에서 물러나기도 하였고 사업을 하는 몇몇은 부도를 내는 어려운 상황에 처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어느덧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들어 이제 후배에게 자리를 물려주어야 할 때가 되어 정년퇴직이나 명예퇴직으로 사회생활을 마감한 친구들도 많이 생겼다. 인생의 흐름은 어느 누구도 막을 수 없는 현실이다. 자의든 타의든 은퇴를 하는 사람들이 제일 먼저 하고 싶은 소망이 하나 있다. 여행이다.
인간의 마지막 자기 실현의 승화는 자기를 뒤돌아 볼 수 있는 보람 있는 여행을 통하여 완성될 수 있지 않은가 한다. 금년 들어 유난히도 많은 친구들로부터 여행을 함께 가자는 제안을 받았고, 어떤 친구는 가장 멋있는 여행 스케줄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을 해 오기도 한다. 나는 이들과 함께 추사와 초의, 소치와 다산의 옛 향기가 머물러 있는 해남, 진도, 강진을 다녀오기도 하고 내가 가지 못할 때는 이곳을 제일 먼저 추천한다.
나는 지금까지 이곳을 열 번도 더 다녀왔다.
세상일이 답답할 때에는 꿋꿋한 기상으로 시대의 어둠을 헤쳐간 옛 어른들이 그리워진다. 이 들의 세계에는 비록 서로 반대 당파에 있었다 하더라도 茶道가 있었고 차의 정신이 있었으며 아름다운 정이 있었다. 특히 이 곳의 여정은 매화꽃 향기가 풍기는 3월부터 동백 숲의 핏빛 꽃잎이 낙화되어 처연히 뒹굴러 땅을 덮고 있는 4월말까지가 계절적으로 가장 좋은 때라고 할 수 있다.
진도군은 잔잔하고 아름다운 바다 위에 그림처럼 펼쳐있는 크고 작은 섬들로 이루어져 있다. 2백 31개의 섬으로 구성된 진도는 빼어난 자연 경관과 민속문화의 진수를 맛 볼 수 있어 섬 자체가 커다란 관광지라고 할 수 있다. 그 중에서 해마다 봄철에 모세의 기적과 같이 갈라지는 회동마을 바닷가, 평화로운 분위기를 느끼는 운림산방, 삼별초의 발자취가 서린 용장산성, 관매8경, 수려한 다도해 해상을 바라보는 해변산길의 드라이브, 이 모든 것들이 진도 여정의 백미를 이룬다. 여기에 더하여 씻김굿, 강강술래, 닻배노래, 진도 아리랑 등을 통해 진도 문화를 엿볼 수 있으며 구기자, 미역, 홍주와 진돗개, 진도 춘란들의 지역 특산물은 우리에게 너무나 잘 알려진 것들이다. 복잡한 도시를 빠져나가 이 곳을 다녀오면 모처럼 가슴 트이는 脫俗의 기분을 맛볼 수 있다. 진도를 섬이라고는 하지만 해남면 문내면 학동리(전라 우수영)의 끝과 진도군 군내면 녹전리의 끝사이에 가로놓인 연육교로 이제는 교통이 불편한 섬은 아니다. 그러나 해남을 거쳐서 가게 되므로 아마도 서울에서는 제일 먼 곳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연육교 밑의 좁은 해협은 폭이 300여미터 밖에 되지 않아 마치 한 걸음에 건너 뛸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러나 우레같은 소리를 내며 이 해협을 훑어 내리는 물살로 정유재란 때 충무공이 왜적을 크게 무찌른 모습이 나그네의 눈에 선하게 느껴진다. 이 바다가 바로 울돌목이며 이순신 장군이 승리한 이 전투를 명량대첩이라고 불린다.
(이 순신 장군이 배 12척으로 왜군을 전멸시킨 울둘목 해협(해남과 진도를 연결하는 연육교
밑의 물쌀은 포효하듯이 빠르게 흐른다.)
진도는 서울에서 아득히 멀리 떨어져 있어서 유배지로는 제일 좋은 곳이었다. 고려나 조선조 때 왕실을 둘러싸고 일어난 반란이나 음모, 당파싸움이 피바람을 몰고 올적마다 반대파인 왕족이나 벼슬아치들은 이곳 진도 땅으로 귀양 보내졌다. 조선시대 영조 때에 한 전라도 감사가 조정에 「진도에는 유배자가 너무 많아 이들을 먹여 살리느라 죄없는 섬사람들까지 굶어 죽을 판이니 유배지를 다른 곳으로 옮겨달라」고 건의까지 하였을 정도로 유배자가 많았다.
그 중에는 대부분이 풍류나 예술을 아는 왕족이나 양반들로서 그들은 지난날의 영화를 잊으려고 제 처지를 노래에 담거나 글로 쓰거나 그림을 그렸다. 이 곳에 살던 본토박이들은 이들을 위로하고 시름을 달래주기도 하였고, 이들로부터 학문과 예술을 배우기도 하였다. 그런 역사적 배경을 지녔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진도의 문화와 예술은 우리나라의 서남쪽에 치우쳐 있는 섬답지 않게 그 수준이 매우 높다고 할 수 있다. 특히 국전 초대작가만 해도 남농 허 건씨를 비롯하여 다섯 명이나 되었고, 특선과 같은 높은 상을 탔던 서·화가만 하더라도 팔십 여명이 넘는다. 그래서 우리는 진도를 예향(藝鄕)의 으뜸이라고 한다.
그러나 진도군의 자랑거리로는 무엇보다도 "압록강 동쪽에 그를 따를 자가 없다"는 평을 들었던 남종화의 대가 소치 허 유이다. 그로부터 아들 미산 허 영씨, 손자인 남농 허 건씨로 이어지는 허씨 집안은 지난 1980년부터 집안의 유품전시관을 곁들여서 화실을 복원하였다. 일컬어 雲林山房이라고 한다. 이 운림산방은 허 소치가 말년에 기거하던 그림 방의 당호이다.
1809년 진도읍 당정리의 한 궁벽한 해변가에서 태어난 허 유는 어렸을 때부터 천부적으로 그림에 소질과 취미를 갖고 있었다. 진도라는 섬에서 화법을 배울 수 없어 그는 1836년 28살의 만학으로 청운의 뜻을 안고 대둔산방의 초의선사를 찾았다. 초의를 우리는 湖南入高의 한 분으로 詩·書·畵·茶의 四節이라고 부를 만큼 당대에 그 이름이 널리 알려진 스님이다. 특히 그의 畵力은 탱화와 四君子에 능하여서 해남 대둔사에 남아있는 10여점의 탱화 등 전국의 걸려있는 佛畵가 많이 현존하고 있다. 그러므로 섬 개구리 허 유는 초의를 스승으로 모시면서 본격적인 공부를 할 수 있었다. 특히 초의는 해남 연동의 녹우당(고산 윤선도 고택)과도 깊은 인연을 맺고 있었다. 초의는 일찍이 茶山 정약용(1762∼1836)이 강진에 유배와 있을 때 그에게 나아가 유교 경전과 詩·書 및 茶道를 익힌다. 그래서 초의는 다산의 제자가 된다.
茶山은 공재 윤 두서의 외증손이 되므로 강진 귤동의 茶山草堂(다산초당)에서 연동의 녹우당까지의 30리길을 자주 왕래하였다. 이 때 초의는 다산과 함께 녹우당을 찾기도 하였다. 이 곳에는 공재와 그의 아들 낙서 윤 덕희, 또 낙서의 아들 청고 윤 용의 3대에 걸쳐 그린 수많은 그림들이 가전 서화첩으로 고이 간직되고 있다. 초의는 허 유를 이 곳으로 데리고 가 이 그림을 감상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였다. 초의의 올바른 인도와 가르침이 허 유의 타고난 재주와 굳은 의지로 스승의 기예를 터득하였으며, 그의 그림 그리는 실력은 일취월장하였다. 초의는 차차 성숙해 가는 제자의 모습을 보면서 이제는 더 이상 자기가 가르칠 수 없게 됨을 걱정하게 되었다. 더 훌륭한 스승 밑에서 배우면 대성할 것으로 생각한 초의는 허 유를 한양의 秋史公에게 보내기로 작정하였다. 초의는 허 유가 그린 그림과 공재를 모사한 그림 몇 점을 月城宮의 추사에게 보냈다.
추사의 회신은 "…… 허군의 畵格은 거듭 볼수록 더욱 묘하니 이미 품격은 이루었으나 다만 견문이 아직 좁아 그 좋은 솜씨를 마음대로 구사하지 못하니, 잘 다듬는다면 좋은 재목이 될 듯하오니 주저말고 보내소서……" 이리하여 1838년 추사가 53살, 허 유가 30살 때 이 두사람의 만남이 이루어진다. 허 유는 月城宮의 바깥 사랑에 거쳐하면서 수많은 서화묵객들과 교유하였으며 매일 아침마다 큰사랑에 나가 추사공께 인사드리고 그로부터 古名畵(고명화)들을 감상하면서 에 대한 논평을 경청하고 아울러 공의 필법의 묘경을 터득하였다. 고기가 물을 만난 격이다. 허 유는 그림을 그리는 법을 깨달음으로 아(雅)하게 되었고, 雅하게 됨으로써 묘(妙)하게 되었고 묘하게 됨으로써 신(神)하게 됨을 깨닫게 된다. 허 유는 추사의 가르침을 받들어 그대로 그리고 추사에게 바쳤다. 추사는 손님이나 제자들 중에 그림을 아는 사람이 오면 허 유의 그림을 칭찬함에 따라 허 유의 이름이 한양 장안에 퍼지게 된다. 추사는 그의 호를 「小癡」라고 지어 준다. 중국의 유명한 화가 黃 大癡(황 대치)와 견주어 소치라고 지어 준 것은 추사가 그에 대한 기대가 매우 컸음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그의 기량이 차츰 빛을 보이자 추사는 친구이자 서화감식의 대가인 병조판서 권 돈인과 전라 우수영수사를 지낸 명필가 신 관호 대장에게 그를 소개하였다.
허 소치 자화상
1840년 열심히 공부하던 허 소치는 제 2의 스승이자 후원자인 추사의 불행한 사태를 겪는다. 서슬이 시퍼런 안동 김씨의 권력 하에 그는 윤 상도 사건으로 제주도로 유배를 당한 것이다. 소치는 한편으로 추사의 유배지를 찾으면서 스승을 보살피기도 하였고 권 돈인과 신 관호의 주선으로 헌종 앞에서 임금이 하사한 붓으로 그림을 그려 헌종으로부터 재주를 인정받은 영광을 갖게 된다. 서화감식의 안목이 높은 헌종은 초의와 추사에 의해 길들여진 허 소치의 고담한 화격을 극찬하였다. 임금과도 자주 만나 스승인 추사의 제주도 귀양살이의 실태와 초의의 산중생활 얘기도 임금에게 들려줌으로써 스승 추사에 대한 구명운동도 하였다. 그러나 서슬이 시퍼런 안동 김씨의 권력에 임금도 어찌할 수 없었다. 소치는 다산의 아들 유산(酉山), 홍성군 이하응 등 당대의 이름 난 명사들을 골고루 만나 그림과 시를 교류하며 남종화의 기틀을 잡아갔다. 1856년 추사가 71세를 일기로 이 세상을 떠나자 소치도 인간 생활의 허무함을 느끼고 한양을 떠나 고향에 돌아와 자연과 어울리며 점찰산 서쪽 기슭에 도선국사가 창건한 쌍계사 옆에 화실과 거처를 지어 여생을 이 곳에서 보냈다.
(허소치 생가) 소치는 이곳에서 그동안의 일을 회상하면 자서전을 썼다. ……이곳에 다시 돌아오니 실로 전생의 인연을 알겠고, 지난날 지내던 님을 회상해 보니 모두 아득한 꿈이었더라… 파란 시냇물, 푸른 산 속에서 나 자신 마음대로 생활하며, 따뜻한 산 기운과 아지랑이 아른거리는 가운데에 항상 뜻과 마음이 돋아온다. 열 번이나 궁궐에 드나들었건만 성취된 것은 무엇이며, 세 번이나 제주에 갔건만(귀양간 추사를 보살피려) 왕래한 것은 부질없는 일이었다. 고향으로 돌아오니 옛날 그대로 살게 된 것이 오히려 다행이었다…… 소치는 그를 찾아온 손님과 며칠 간 보내면서 그의 생애에 대한 대화식 자서전 몽연록(夢緣錄)을 엮었다.
인간의 욕심은 끊임이 없다. 돈에 대한 욕심, 권력에 대한 욕심, 명예에 대한 욕심, 친구에 대한 욕심 등 이 모든 것은 언젠가는 나를 떠나는 것이다. 이러한 욕심들을 이생에서 버리면 영원히 사는 것이다. 내가 여러 번 많은 친구들과 함께 이 곳을 방문하는 것은 이러한 욕심을 버리고 은퇴를 하면 고향이나 고향 같은 곳에서 소치가 운림산방에서 지냄과 같이 생을 정리하고 싶은 마음 때문일 것이다.
소치의 유명한 부채 산수화에 그의 이 곳 삶을 운림산방과 함께 그렸다. 그 내용이 너무나 소박하고 감격스러워 우리 독자와 함께 음미해 보고자 한다. 「내 집은 봄이 가고 여름이 다가올 무렵이면 이곳은 푸른 이끼가 뜰에 깔리고 낙화는 가득하게 길바닥에 떨어진다. 사립문에는 찾아오는 발자국 소리 없으나, 솔 그림자는 길고 짧게 드리우고 새 소리 높았다 낮았다 하는데 낮잠을 즐긴다. 이윽고 나는 샘물을 긷고 솔가지를 주워 다 茶를 달여 마시고는, 생각나는 대로 주역(周易), 좌씨전 太史公의 그림, 도연명과 두보의 詩 등을 읽는다. 그리고 조용히 산길을 거닐며 松竹을 어루만지기도 하고, 사슴이나 송아지와 더불어 長林豊草(장림풍초) 사이에 함께 뒹굴기도 하고, 앉아서 시냇물을 구경하기도 하며 또 냇물로 양치질하거나 발을 씻는다. 그리고 돌아와 竹窓에 앉으면 아내와 자식들이 죽순나물, 고비나물을 만들고 보리밥을 지어 준다. 나는 이를 포식한다. 이윽고 나는 그림과 글을 그리며 시를 써 본다. 그리고 집을 나가 溪山으로가 園翁(원옹), 溪友들과 함께 한참 동안 이야기한다. 다시 돌아와 지팡이에 기대어 사립문 아래에 섰노라면 지는 해는 서산 마루에 걸려 斜陽이 붉고 푸른 색깔이 수만 가지로 변하며 소 타고 돌아오는 목동들의 피리 소리에 맞춰 달이 앞시내에 돋아 오른다…….」 당대의 명화가 허 소치는 은퇴 후에는 비록 가난하지만 풍부한 삶을 살아간 모습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귀감이 된다.
(꽃 핀 때의 운림산방) 그의 아들 미산은 이 운림산방을 팔고 목포에 정착하였다. 가난 때문이다. 그리고 남농은 이 운림산방을 다시 매입하여 새로운 모습으로 단장하였다. 이 산방 뒤에는 해발 485m의 점찰산이 병풍처럼 두르고 있고 집 앞에는 4백80여평의 연못이 있어 운치를 더 해준다. 이와 같은 포근한 운림산방을 나의 여정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한 번은 이 곳 까지 달려오는 동안 친구 부인이 긴 여행에 지쳐 있었다. 힘들게 운림산방을 찾은 그녀는 운림산방의 운치와 내가 얘기 해준 소치의 운림산방의 생활에 감동하여 피로를 거뜬히 풀고 그날밤 노래방에서 신나게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그 날을 잊을 수 없어 지금도 그녀는 남편에게 다시 한번 운림산방을 찾자고 재촉한다고 한다.
추사가문은 왕실과의 겹사돈 관계를 맺음에 따라 경주 김씨의 권세가 당세를 관절(冠絶)하였다. 영조 38년(1762년) 사도세자가 처가인 풍산 홍씨와 영조 처가인 경주 김씨의 세도 다툼의 틈바구니에서 사도세자가 뒤주 속에 갇혀 죽음을 당하는 참변이 일어난다. 이 때의 전쟁은 사도세자를 죽이자고 하는 정순 왕후의 오라비인 김 귀주와 노론이 중심이 된 僻派와 이를 반대하던 안동 김씨와 南人이 중심이 된 時派와의 싸움이었다. 당쟁과 척족세도의 피해가 왕실의 존립을 위협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위협 속에서 성장한 정조는 척족세도를 뿌리뽑기 위해서 자신의 外家와 陣外家(정순 왕후 친정)를 모두 역적으로 몰아 제거하였다. 외척을 제거할 때 정조는 추사의 조부 김 이주를 대사헌으로 삼아 이용하고 그것이 끝나자 추사가에도 철퇴를 내리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정조는 이러한 근척 제거책으로 그의 생명이 단축되어 49세의 젊은 나이로 재위 24년 만에 급서하게 되고 순조(1801∼1834)가 불과 11세의 어린 나이로 등극한다. 수렴청청에 나선 영조계비 정순 왕후인 경주 김씨는 세도를 꿈꾸다 역적으로 몰려 죽은 친정 오라버니 김 귀주에 대한 복수라도 하려는 듯이 세도를 6촌 오라버니 김 관주에 맡기어 본격적인 경주 김씨의 척족세도 정치를 실행하게 된다. 이 때 시파인 정 다산은 강진으로 유배된다.
그러나 경주 김씨의 세도는 정순 대비의 사망으로 6년 만에 막을 내리고 뒤를 이어서 순조의 장인인 김 조순(1764∼1831)이 세도를 잡으며 안동 김씨 60년 세도가 시작되었다. 김 조순은 세도를 누리던 경주 김씨를 제거하기 위해 왕실 내척들의 환심을 사둘 필요가 있었던지 그리고 월성위家 가 그 일족인 경주 김씨 세도가와 거의 연결되어 있지 않은 사실에 안심하였던지 추사가문에 대하여 매우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정순 왕후의 친정집안인 경주 김씨를 일망타진하여 모두 멀리 귀양 보내는데 추사의 생부 김 노경을 사헌부에 있게 하여 그들의 죄를 성토하게 한다. 김 노경은 계속 승진하였고 추사도 24세인 1809년에 생원시에 합격한다. 이 때 추사의 학문에 일대 전기를 맞이한다. 초조참판겸 동지부사인 생부 김 노경을 수행하여 청나라 서울 연경에 가게된다. 그의 스승인 실학자 초정 박 제가를 통해 말로만 듣던 청나라 학문을 직접 접할 기회를 갖게 되었을 뿐 아니라 청나라 석학인 완원, 옹방강 등과 사제지간을 맺어 그들의 학문을 전수 받고, 당시 연경학계의 이름난 학자들과도 교류하고 5개월만에 돌아온다. 당시 47세인 완원은 그의 경학관·예술관·금석고증방법을 전수하였고, 그의 저서 245권을 추사에게 기증하였다. 78세의 옹방강으로부터는 서화감식·서법원류·금석고증에 관한 가르침을 받는다. 이들로부터 전수 받은 학문과 예술은 추사가 조선시대 가장 훌륭한 학자로 추앙을 받는 기틀이 되었다. 송방강은 추사가 해동에도 이런 영재가 있었던 가라고 감탄하며 "經術文章 海東第一"이라고 하였다. 또한 추사는 이들과 승설차를 들면서 해박한 대화를 나누었다. 이때 추사는 새로운 茶道를 배우게 되었다. 추사가 가지고 있는 수많은 別號 가운데 阮堂을 즐겨 쓰는 것도 완원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고 勝雪學人이란 호도 여기서 맛본 승설차에서 따온 것이 유명한 얘기다. 추사는 학문과 예술에 정진하면서 1819년(순조 19년) 34세에 문과에 급제하고 암행어사 예조참의 등에 보직된다. 그러나 권력의 비정함과 무상함은 추사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1827년 순조27년에 왕세자(익종)가 대리청청을 시작한다. 세자는 추사의 각별한 사이인 조인영의 조카사위일 뿐 아니라 세도가인 안동 김씨 김 유근의 생질이기도 하다. 권력의 흐름은 예나 지금이나 같다고 할 수 있다. 젊은 왕세자는 추사가문을 각별히 생각하여 김 노경과 추사를 중용한다. 새로 권력을 잡은 젊은 왕세자 주위에 새로운 권력세력이 모이게 된다. 왕세자는 그 주위에 처가 쪽의 조 인영, 김 노, 흥 기섭과 추사가문의 김 노경을 주축으로 권력을 행사하게 된다. 안동 김씨들은 이들 세도에 위협을 느끼고 매우 긴장하였는데 왕세자는 대리한 지 3년만인 순조 30년 5월에 22세의 젊은 나이로 급서를 한다.
왕세자의 절대적 신임을 받던 反안동김씨 4인 방은 벼슬자리를 떨쳐나 귀양길에 오르니 추사집안은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1826년 추사가 41세 때 충청우도 암행어사에 제수 받아 암행도중 비인 현감 김 우명을 봉고 파직한 적이 있다. 59세에 당시의 세도가에게 뇌물을 주고 겨우 자리를 얻은 지 얼마 되지 않은 그를 탐관오리로 추사는 응징한다. 세속사와 타협할 줄 모르는 추사의 강직한 성품이 후일 커다란 후환을 남기게 된다. 추사에게 봉고 파직된 김 우명이 김 노경과 추사 일문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리고 처벌을 주장한다. 경주 김씨,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의 세도 그늘을 옮겨가면서 오랫동안 권좌를 누려오던 김 노경과 청나라 학예계의 문물을 전승받고 고도의 예술감각을 키우고 있는 추사에게는 모든 이에게 질시와 선망이 될 수 있었다. 추사의 생부는 1830년 박 종훈, 신 위 등을 무고한 윤 상도 옥사의 배후인물이라는 모함을 받고 거제도로 유배된다. 이때 안동 김씨의 세도가 김 유근도 병에서 회복되어 정계에 복귀한다. 김 유근은 추사를 끔찍이 사랑하고 신뢰하고 있었다. 추사의 대쪽같은 성품과 고금을 관통하는 학식, 그리고 인생에 대한 확고한 신념 등 그의 탈속한 생활자세를 자세히 알고 있는 김 유근으로서는 추사에 대한 애증(愛憎)이 교차하였을 것이다. 세도가 김 유근은 곧바로 김 노경을 방면한 후 추사와의 우정을 더욱 다졌다. 순조34년(1834)에 왕이 세상을 떠나자 왕세손(헌종)이 불과 8세의 나이로 즉위하고 김 유근의 누이동생인 순조 왕비 순원 왕후가 대왕대비로 수렴청정을 시작한다. 김 유근은 역시 통이 큰 인물이었다. 헌종의 외증조부인 조 인영을 이조판서, 왕세자(익종) 대리시 안동 김씨의 세도를 박탈하려고 했던 김 노를 재 등용하였을 뿐 아니라 김 노경도 판의금부사의 요직에 복귀시킨다. 안동 김씨의 세도는 다시 반석 위에 올라앉게 되고 추사는 51세 되는 헌종2년(1836) 4월 대사성으로 다시 관직에 나간다. 그 해 7월 추사는 병조참판의 요직으로 옮기는데 이때에도 김 유근과의 관계는 원만한 것 같았다. 동지선사 취미(翠微) 신 재익이 연경으로 떠날 때의 전별연을 베푼 자리에서 김 유근, 조 인영, 조 만영, 권 돈인 등과 함께 전별시를 짓고 추사가 이 시들을 모두 자필로 써서 남겼다. 이는 「신취미태사 잠유시첩(申翠微太史 暫遊詩帖)」이란 이름으로 간송미술관에 전시되고 있다. 권력의 단맛과 쓰라림을 느낀 추사의 생부 김 노경은 헌종4년(1838) 3월 73세로 서거한다. 추사가 3년상을 지내는 동안 김 유근은 병세가 심하여 폐인이 되자 안동 김씨의 세도는 몹시 흔들리게 되었다. 부친 탈상 후에 추사는 형조참판으로 복귀하자 우려한 일이 벌어진다. 추사는 조 인영(우의정), 권 돈인(이조판서)과 삼위일체가 되어 요로의 자리를 장악하게 되었고 헌종은 친정정치를 도모하려 하였다. 바로 안동 김씨가 가장 두려워하던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헌종6년(1840) 6월에 추사는 동지부사로 임명된 것이다. 淸나라 通으로 추사는 청에 사신으로 가면 무궁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저지하기 위한 권력투쟁이 시작되었다. 김 유근을 대신 할 수 있는 안동 김씨의 인재로 그의 6촌 金 弘根을 바로 대사헌에 임명하였으며 그 해 7월 김 홍근은 엉뚱하게 10년 전에 일어난 윤 상도 옥사를 재론하는 사직소를 올렸다. 대사간 자리에는 추사가 봉고 파직한 김 우명을 앉혀 대기 시켰다. 그 해 7월 11일 추사 형제들의 연행 길을 막아놓고 이 사건을 재조사하게 된다. 그러나 추사의 무관함이 드러나게 되자 안동 김씨 세력은 추사를 제거하겠다는 의지로 그를 무고하였다. 일이 확대됨에 따라 8월초 추사는 예산 향저로 일단 낙향한다. 8월 20일에 예산 향저에서 체포되어 금부로 압송된다. 이 어처구니없는 사태에서 풍양 조씨 세력의 대표이자 추사의 친구인 조 인영이 추사를 사지에서 구하는 청을 올린다.
이 결과 9월 4일 추사는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減死一等으로 杖 1백대, 流 一千里 제주도 大靜현에 위리 안치한다는 교서를 받는다. 추사는 그 다음해 3월 제주도로 유배를 떠난다. 일지암에 있던 초의가 추사가 머물고 있는 花山의 관머리(關頭浦) 객사에 달려왔다. 추사와 초의, 깊은 우정을 쌓아온 이들의 학문과 예술은 추사의 유배로 더욱 꽃을 핀다. 죽음을 초월한 추사는 畏友(외우) 초의를 다시 만나 다시금 학문과 예술의 꿈을 불태우게 된다. 추사는 해남 관머리에서 초의와 함께 사흘을 머문 후 제주도로 향하는 배에 올라탔다. 초의와 추사의 두 제자 이 상적과 허 소치의 배웅을 받으면서…….(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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