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7. 밑줄 친 ‘왕’의 업적으로 옳은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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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돈은 왕에게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할 것을 청원하고, “…(중략)… 근래에 기강이 파괴되어 …(중략)… 공전과 사전을 권세가들이 강탈하였다. …(중략)… 스스로 토지를 반환하는 자는 과거를 묻지 않는다.”라고 공포하였다. 권세가들이 강점했던 전민(田民)을 그 주인에게 반환하였으므로 온 나라가 모두 기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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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규장각을 설치하였다.
② 대동법을 실시하였다.
③ 독서삼품과를 시행하였다.
④ 쌍성총관부를 공격하였다.
정답: ④
* 전민변정도감을 설치케 한 공민왕의 업적
공민왕(1351~1374)은 원·명 교체기를 이용하여 개혁을 추진하였다. 공민왕 때의 개혁은 대외적으로 반원 자주를 실현하고, 대내적으로 왕권을 강화하려는 것이었다.
공민왕의 반원 자주 정책은 기철로 대표되던 친원 세력을 숙청하는 데서부터 시작하였다(1356). 이어, 고려의 내정을 간섭하던 정동행성 이문소를 폐지하고, 원의 간섭으로 바뀌었던 관제를 복구하였으며, 이연종의 건의를 받아들여 변발, 호복의 몽골 풍속을 금지하였다(1352). 또, 무력으로 쌍성총관부를 공격하여 철령 이북의 땅을 수복하였으며(1356),더 나아가 고구려의 옛 땅을 되찾기 위하여 지용수와 이성계를 시켜 요동 지방을 공략하였다(1370).
공민왕은 왕권을 제약하고 신진 사대부의 등장을 억제하고 있던 인사권 기구인 정방을 폐지하였다(1352). 또한 국자감을 계승한 성균관을 순수한 유교 교육 기관으로 개편 하고(1362) 유교 교육을 강화하여 이색, 정몽주, 정도전 등의 신진사대부들이 대거 등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부인인 노국공주가 죽은(1365) 뒤로 지나친 슬픔으로 정사에 흥미를 잃고 이를 승려 출신 신돈에게 맡기었다. 신돈은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하고(1366), 권문세족이 부당하게 빼앗은 토지와 노비를 본래의 소유주에게 돌려주거나 양민으로 해방시켰다. 이를 통하여 권문세족의 경제 기반을 약화시키고 국가 재정 수입의 기반을 확대하였다.
그러나 공민왕 때의 개혁은 권문세족의 강력한 반발로 신돈이 제거되고(1371), 개혁 추진의 핵심인 공민왕까지 시해되면서 중단되고 말았다.
① 정조(1776~1800)는 일종의 왕립 도서관인 규장각(1776)을 설치하여 자신의 권력과 정책을 뒷받침할 수 있는 정치기구로 삼았다
② 공납(방납)의 폐단을 개선하고 부족한 국가 재정을 보완하며 농민의 부담을 경감시키기 위한 대동법(공납의 전세화)이 광해군 때에 경기도에 시험적으로 시행되되었다(1608).
③ 신라 원성왕(785~798) 때에 국학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유교 경전의 이해 수준을 시험하여 관리를 채용하는 독서 삼품과(788)를 마련하기도 하였으나 결국 실패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