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흐른 다음에 영향이 남아 있을 ‘분단70년’이 되어야 한다.
신임 통일부장관에게-올빼미시라고요?
나라나 어느 부처나 기관, 또는 단체에 새로운 지도자가 등장하면 사람들은 그에 대해 기대를 한다.
그래서 누가 대통령이 되었든지 간에 대통령 취임식은 언제나 ‘기대충만’의 축제가 된다.
그런 기대를 받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참 맥이 빠질 것이다.
미안한 이야기이지만 지난 3월, 통일부의 제38대 수장으로 취임한 홍용표 장관에 대해서는 “기대 별무!”가 일반적인 분위기인 듯하다.
현 정권의 대북정책에 대한 평가는 그리 긍정적이지 못한 것을 부인할 수 없게 되었는데 홍 장관이 대통령비서실 외교안보수석실 통일비서관으로서 현 정권의 대북정책을 입안하고 실행해 온 당사자이기 때문이다.
그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외교국방통일분과 실무위원 출신의 이른바 ‘캠프 인사’이어서 더욱 그런 것 같다.
기대했던 인사가 기대를 채워주지 못하면 실망, 나가서는 배신감을 느낀다.
반대로 기대하지 않았던 인사가 의외로 선전하면 ‘로또!’, 또는 ‘대박 났다!’ 외치게 된다.
홍용표 장관이 제발 후자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대박이라는 말을 쓰고 나니까 한 때 회자되었던 ‘통일은 대박’이란 말도 홍 장관의 손을 거쳐 나온 것이 아닌지 궁금해진다.)
신임 통일부장관은 취임 후 중요종교의 지도자들을 예방했는데, 한국기독교총연합회 이영훈 대표회장을 만난 자리에서는 한기총이 대북지원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일해 온 점을, 한국교회연합 양병희 대표회장에게는 한반도신뢰프로세스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기독교의 역할을 기대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 조계종 자승 총무원장을 예방한 자리에서는 민족 동질성 차원에서 민간 교류를 활성화 하는 문제를 말하고 이어 불교계가 준비하고 있는 공존과 상생, 합심의 틀이 정부가 나가고자하는 방향과 일치가 잘 된다고 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상대방의 입장을 배려하면서 대화를 나눴다는 보도를 보면서 ‘원만하고 치밀한 성품을 지닌 분이로구나’는 인상을 받았다.
홍 장관은 지난 3월 16일 취임식을 직후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대북강경파인 매와 온건파인 비둘기 중 어디에 가깝냐는 질문을 받고 자신은 매나 비둘기가 아닌 올빼미라고 말했다고 한다.
홍 장관은 "매냐 비둘기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균형이 중요하다"며 이같이 말했다고 하는데 어떻게 해서 올빼미를 균형을 갖춘 새라고 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백과사전에서 ‘올빼미’를 찾아보니, 용감하고 기민하며 인내 깊은 야행성 날짐승으로서 두 눈은 밤에 쌍안경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지금 대북관계는 밤과 같이 어두운 형편인데 올빼미를 자처한 신임 통일부장관이 그동안 통일분야에서 쌓아올린 다양한 경험을 바탕으로 앞을 잘 보며 길을 열어나단다면 얼마나 좋으랴.
지난 3월 25일에 있은 통일준비위원회의 한 행사에 참석한 홍 장관은 만찬 인사에서 "고무신은 말 표, 통일은 홍용 표!"라고 해서 좌중을 웃겼다고 한다.
유머 감각도 가지고 있는 분인 듯한데, 그 기사를 읽으면서 ‘홍용 표(標) 통일은 과연 어떤 것일까? 아니, 통일부의 존재가 날로 희미해진다고들 하는데 홍용 표 통일이 과연 나올 수 있는 것일까?’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백과사전에 기록되어 있는 올빼미의 용감성, 기민성, 그리고 인내심을 가질 때 그런 통일정책이 나올 수도 있을 것이다.
신임 통일부 장관님, 부디 그렇게 하기에 힘쓰소서!
한두 가지는 확실하게 하자!
50여 년 전, 군복무를 할 때 오산공군기지에서 미군들과 같이 근무를 했었는데 그때 미군들은 경례를 철저하게 하는 것을 보았다.
한 번은 장교 한 분과 같이 영내를 걸어가고 있는데 한국군 사병들은 이 장교를 못 본 척하거나 보고도 손을 올리지 않았다.
그런데 미군 병사가 절도 있게 경례를 하였다.
장교는 답례를 하고나서 “내가 한국군 장교인지, 미군 장교인지 착각할 때가 있어!”하였다.
“우리는 자질구레한 규정들을 이것저것 많이 만들어놓고 제대로 지키지 않는데 미군은 중요한 것 몇 가지는 엄하게 지키는 것 같습니다.”하였더니 장교는 “동감일세!”고 하였다.
지금 분단70년을 주제로 한 행사들이 많이 진행되고 있다.
예전에는 인쇄를 할 때 활자들을 찾아내서(이걸 ‘文選’ 또는 ‘採字’라고 했다) 판을 짠 다음, 지형을 뜨고 연판을 만들어 인쇄기에 걸었는데 특별한 행사가 있을 때는 그와 관련된 글자의 활자들을 미리 많이 주조(鑄造)해서 활자상자에 넣어두었다.
지금도 그런 시스템이라면 올해는 틀림없이 활자주조공들이 ‘분’ ‘단’ ‘7’ ‘0’ ‘년’ 활자들을 주조하느라고 바쁘게 움직이고 있을 것이다.
분단 70년의 해인 올해, 중요한 것 한 두 가지는 집중적으로 확실하게 하자.
다림줄자는 두 가지를 그렇게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회개운동이다.
70년의 의미를 깨달은 다니엘이 처절한 회개의 기도를 한 것을(단 9:1~19) 본받아서 말이다.
한국교회는 8년 전에 1907년 대부흥 100년을 기념하는 행사들을 참 요란하게 했다.
그 열매가 무엇인가?
기억나는 것은 무엇인가? 다림줄자가
우둔한 탓이겠지만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옥한흠 목사님이 기념집회에서 “거룩하신 주여, 이놈이 죄인입니다. 이놈이 입만 회개한 한국 교회의 종입니다. 겉모양은 돌아가지만, 내면은 죄악이 쌓여 있는 한국 교회를 깨끗하게 하옵소서.” 절규한 회개의 설교 하나뿐이다.
인터넷에 들어가보면 다림줄자만 그런 것이 아니고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분들이 참 많은 것을 발견하게 된다.
하나는 억류자 귀환운동이다.
우리는 중국에서 선교활동을 하다가 1995년에 납북된 안승운 목사를 얼마나 기억하고 있는가?
안 목사에 대해서는 5년 전에 자살설이 전해진 것을 끝으로 더 이상 관련소식이 들리지 않고 있다.
우리는 역시 중국에서 선교활동을 하다가 2000년에 납북된 김동식 목사를 얼마나 기억하고 있는가?
김동식 목사는 북한에서 사망한 것이 확실시 되고 있다.
미 연방항소법원은 작년 12월 23일, 미 영주권자인 김 목사가 북한에 납치돼 고문을 받은 끝에 사망한 것으로 결론짓고 가족이 북한에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고 판결했다고 한다.
한 때 유해송환 운동이 벌어졌는데 그의 유해는 빨리 국내로 돌아와야 한다.
우리는 2013년 10월 북한에 들어갔다가 억류되어 작년 5월 북한최고재판소로부터 국가전복음모죄와 간첩죄 등의 혐의로 무기노동교화형을 선고 받은 김정욱 선교사에게 얼마나 관심을 갖고 있는가?
최근에 김 선교사의 최근 자살기도설이 전해지기도 했었고 아니라는 보도가 뒤이어지기도 했다.
우리는 1월에 북한에 들어갔다가 여러 달째 소식이 끊어진 상태에 있는 캐니다 큰빛교회 임현수 목사를 위해 얼마나 기도하고 있는가?.
임 목사를 두고 ‘대북협력 분야의 큰 손’이라는 말을 많이 하는데 ‘큰손’이라기보다는 그가 담임하고 있는 교회의 이름을 따서 ‘대북협력의 큰빛’이라고 하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최근에 새롭게 불거진 김국기 선교사를 문제에 대해 더 적극적인 자세를 가져야 한다.
최근 몇 해, 중국지역에서 사역하던 선교사들 가운데 의심스러운 죽음을 당한 분들이 몇 있다.
한국교회는 이 문제를 묻어두어서는 안 된다.
예전에 있었던 일들에 대해서는 순교, 순직, 수난, 핍박…. 이런 단어들을 나열해가며 감동적으로 기억하고, 말하고, 기록을 남기려고 하면서 최근에 있었던 같은 성격의 일들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은 모순이다.
최근 생명과인권디아코니아 등 25개 교계 및 시민단체들을 중심으로 ‘북한 억류자 석방 촉구 기독교 시민단체협의회’라는 단체가 결성되었다.
이들은 지난 3월 31일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 삼일문 앞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북한 당국이 억류하고 있는 김국기 선교사와 최춘길씨, 임현수 목사, 김정욱 선교사의 조속한 석방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가졌다.
지난 4월 4일에 열린 기독교통일포럼 월례발표회에서는 “김정욱 선교사 석방을 위한 실태 조사 및 대책”이라는 주제의 발표와 토의가 있었다.
기독교통일포럼은 전문가들의 모임인데 오프더레코드를 전제로 하고 그 이면에 있는 문제들까지 진지하게 검토하였다.
올해는 분단 70년이 되는 해인데 ‘70’이 자꾸 강조되는 것은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이 70년만에 해방되어 귀환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올해가 북에 억류되어 있는 ‘가까운 포로’들이 귀환하는 해가 되도록 우리 모두 힘써야하겠다.
세월이 흐른 다음에도 기억에 남아있고 영향력이 살아있는 그런 일을 하는 분단 70년이 되었으면 좋겠다.
아니 그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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