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보기>의 사설이 발표되는 계기가 된 사건에 대한 설명으로 가장 옳은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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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슬프도다. 저 개돼지만도 못한 이른바 우리 정부의 대신이란 자들은 자기 일신의 영달과 이익이나 바라면서 위협에 겁먹어 머뭇대거나 벌벌 떨며 나라를 팔아먹는 도적이 되기를 감수하였던 것이다. 아, 4,000년의 강토와 500년의 사직을 다른 나라에 갖다 바치고, 2,000만 국민을 타국의 노예가 되게 하였으니, …… 아! 원통한지고, 아! 분한지고. 우리 2,000만 타국인의 노예가 된 동포여! 살았는가, 죽었는가? 단군, 기자 이래 4,000년 국민정신이 하룻밤 사이에 갑자기 망하고 말 것인가. 원통하고 원통하다. 동포여! 동포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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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친러 성향의 내각이 수립되어 러시아의 정치적 간섭이 강화되었고, 열강의 이권 침탈도 심해졌다.
② 러일전쟁 승리 이후 일본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조약을 체결하여 대한제국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만들었다.
③ 일본은 헤이그 특사 파견을 문제 삼아 고종 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고, 대한제국의 군대를 해산하는 조약을 체결했다.
④ 총리 대신 이완용과 조선 통감 데라우치 사이에 조약이 체결되어 국권을 상실하였다.
정답: ②
* 을사조약(1905.11)
일제는 러·일 전쟁(1904.2~1905.9)에서 승리하여 한국의 독점적 지배에 대해 열강의 승인을 얻어낸 후, 덕수궁 중명전에서 고종과 대신들을 위협하여 제 2차 한·일 협약(을사조약)을 강요하여 체결하였다(1905.11).
이에 따라 일제는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고 통감부를 설치하였다(1906.2). 통감은 외교에 관한 사무뿐만 아니라 대한 제국의 중요 법안과 정책을 결정함으로써 내정을 전반적으로 지배하데 되어 대한제국은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하였다.
고종은 대한매일신보에 조약에 서명하지 않았음을 밝히고 조약의 무효를 세계열강에 통고하였다. 장지연은 황성신문에 ‘시일야 방성대곡’이라는 제목으로 논설을 실어 일본의 침략을 비난하며, 조약 체결에 앞장선 친일 대신들을 격렬하게 비판하였고, 민영환 등의 애국지사들은 자결로써 항의하고, 전국 각지에서 의병 항쟁이 일어났다.
①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1896.2~1897.2)으로 친러 성향의 내각이 수립되며 러시아의 정치적 간섭이 강화되었고, 열강의 이권 침탈도 심해졌다.
③ 일본은 헤이그 특사 파견을 문제 삼아 고종 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고, 차관정치를 핵심으로 하고 부속 각서로 대한제국의 군대를 해산하는 한일신협약을 체결했다(1907.7).
④ 조선 통감 데라우치는 친일 단체인 일진회를 앞세워 대한제국을 일본에 합치자는 청원서를 발표하게 하고, 총리 대신 이완용과 한일병합조약을 체결하였다(191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