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침
아침 일찍 교민들이 마련해준 찰밥과 인절미로 호텔방안에서 간단히 아침을 때우고 휘마동의 유니폼을 입으니 과연 잘 뛸수 있을까 걱정이 앞선다.
빡빡한 일정에 피곤하기도 하지만 어제 저녁 참아야 했는데 참이슬 한팩 마신것이 두고 두고 후회가 된다.
호텔앞 버스에 오르니 자칭 한국을 대표한다는 선수들의 표정이 사뭇 긴장되어 보인다.
저 많은 사람들중에 소위 sub 3의 고수도 많을테고 기골은 당당하지만 허풍인 사람도 많을것이며 모든것은 경기가 끝나고 결과가 말해줄 것이다.
고속도로로 가면 10분도 안걸릴 경기장을 일부러 코스를 파악하며 간다고 했다가 밀려오는 사람들과 차량들로 그만 버스를 중간에서 내려야 한다.
출발지점까지 3km를 급하게 뛰어가는 사람들도 있지만 주위의 아름다운 주택들을 보며 천천히 걸어가니 hopkinton의 출발선은 수많은 사람들과 방송차량들로 혼잡의 극치를 이룬다.
짐을 맡기고 소변을 보러 주택가의 숲으로 들아가니 남자들은 숲가에서 여자들은 숲속에서 아주 자연스럽게 볼일들을 본다.
- 5km
자기 번호에 맞춰 3시간 20분대 기록인 9000번 줄로 들어가니 많은 여자들이 있어서 순간 의아해지지만 팔목에 찬 페이스챠트를 보니 목표가 3시간 10분이나 15분대이니 모두 잘뛰는 여자들이 틀림없다.
대포소리는 듣지도 못하고 인파에 밀려서 출발하니 선두보다 6분 30여초 늦은 시간이다.
보스톤코스는 시작부터 10km 까지는 완만한 내리막 길이고 overpace를 조심해야 한다고 누누이 들어온터라 일부러 속도를 천천히 줄인다.
조금 뛰어가니 연두의 수많은 사람들이 질러대는 고함소리가 귓전을 울려대는데 뒤에 들으니 보스톤시민 120만중에서 50만명이 나왔다고 한다.
마을을 지나면 주민들이 만든 밴드가 연주를 하는데 바이올린은 아줌마가 첼로는 아이들이 하고 전기기타는 남자들이 맡고 있으며 스피커를 지나면 첼로의 툭툭 치는 소리가 감미롭게 들린다.
5km는 23분에 지나고 웬지 허기가 드는것 같지만 대체적인 컨디션은 좋고 출발은 괜찮은 편이다.
- 10km
가죽잠바를 입은 폭주족들이 모여서 크랙션을 울리며 함성을 지르고 3층 지붕에서는 웬 남자가 혼자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른다.
음악에 맞춰 덤블링에서 나란히 펄쩍 펄쩍 뛰며 엉덩이를 흔드는 아주머니들과 아이들을 보면서 차츰 속도를 올린다.
아침기온은 15도라고 했는데 햇볕은 따갑고 여름처럼 뜨거우며 응원하는 목소리는 지축을 울리고 달리는 사람들의 열기는 도로를 달군다.
간염에 걸린 한국선수를 지나치며 천천히 뛰시라고 했더니 슬쩍 웃으며 고개를 숙이는 모습에 가슴이 저며온다.
웬만하면 쉬시라고 했는데 아무래도 보스톤까지 와서 포기하기가 아쉬웠던 모양이다.
10km통과는 46분정도로 평소보다 2분정도 약간 느린 속도로 달리고 있지만 여기에서 너무 욕심을 내면 혹시라도 경기를 망칠까 조심한다.
- 20km
출발부터 웬지 오른쪽 발바닥이 미끄러지며 신발과 마찰을 해서 혹시 신발끈이 느슨한가 다시 매보아도 마찬가지이다.
신발이 다소 큰것 같았고 동아마라톤까지는 괜찮았는데 결국은 보스톤에 와서야 말썽을 부리는가 보다.
길가에 크레용으로 그린 태극기를 걸어놓고 앉아있는 어린 딸에게 젋은 엄마는 나를 가리키고 나는 번쩍 손을 들어 반가움을 표한다.
천천히 속도를 올리며 나아가고 연이어 나타나는 언덕을 오르락 내리락 하며 15km를 비슷한 시간에 통과한다.
기록를 단축하려면 지금부터는 페이스를 올려야 하는데 과연 올려야 하고 또 올릴수 있겠는가?
여느때처럼 쪼꼬렛 하나를 입에 넣고 젋은 여학생이 들고있는 물컵을 뺏어 마시니 물이 아니라 시원한 흑맥주를 한모금 마시고 말았다.
웨슬리 여자대학을 통과하면 수많은 여학생들이 길가에 나와서 광적으로 소리를 지르며 몸둥이를 흔들어댄다.
깊게 패인 가슴선이 훤하게 드러나고 육감적인 가슴을 흔들어대며 런너들과 하이파이브를 연호하지만 짐짓 못본척 내리막 길을 빠르게 내려간다.
20km를 평균적인 시간으로 통과하지만 점차 힘이 빠지는 것을 느끼며 불안한 마음이 든다.
- 30km
하프지점을 1시간 37분정도로 지나고 뜨거운 햇볕을 맞으며 점점 기운이 없어진다.
아침을 너무 일찍 먹어서인가 아니면 시차적응이 안되어서인가 여러 생각들이 떠오르고 어제 마신 소주가 다시 후회가 된다.
연도에는 어린애들이 오렌지 한조각이나 물 한컵 또는 얼린 아이스바등을 손바닥에 올리고 어서 자기것을 먹어주기를 간절히 기다린다.
어릴때부터 행사에 참여하고 또 봉사하는것이 몸에 배인 생활을 일찍부터 배우는 것이다.
간혹 들리는 교민들의 환호를 들으며 어린애의 물한컵 뺏어 마시고 아이스바 한조각 입에 문다.
바로 옆에는 젋은 여자애들이 지나가는데 조금도 지친 기색이 없고 발걸음은 힘차며 스쳐가는 팔에서 끈적끈적한 땀방울이 느껴진다.
솜털이 보송보송하고 주근깨가 잔뜩 있는 저 학생은 아마 20살이 조금 넘었을 것이지만 평상시에 조깅으로 단련된 체력은 단단할 것이다.
이제 으례이 다른 경기에서 처럼 시간은 신경쓰지 않고 오로지 완주하는 것만이 최대의 유일한 목표가 되었다.
- 40km
시민들의 환호를 들으며 긴 오르막 길을 힘들게 통과하고 코리아를 외치는 소리에 손을 번쩍 들어본다.
다시 서서히 오르막 길이 시작되고 시민들이 손에 들고 흔드는 종소리가 귀청을 때리며 그 악명 높은 heartbreak hill이 시작된다.
완만하면서도 긴 오르막 길은 지금까지 수없이 나타나는 언덕에 지친 육신을 괴롭히고 많은 사람들은 그냥 서서 터벅터벅 걸어간다.
이를 악물고 가슴이 터질듯한 괴로움을 참으며 한걸음 한걸음 올라가면 드디어 언덕은 끝나고 한숨을 돌릴무렵 또 다른 언덕이 시험대인양 앞에 기다린다.
35km를 지나서 파워겔을 한개 먹고 지열이 올라오는 아스팔트를 지나면 정신도 가물가물해져서 고개를 흔들며 정신을 차린다.
이제 다운타운이 시작되며 수많은 화이트칼라들이 연도에서 응원을 보낸다.
한동안 달리니 표지판은 40km를 가리키고 이제 다 왔다는 생각에 없는 기운으로 스퍼트를 해본다.
빌딩들을 통과하고 피니쉬라인을 고대하며 한동안 달리다 보니 40km 이정표가 또 보이는데 아까는 잘못 본것이라고 느끼는 순간 전신의 힘이 빠져 온다.
- 경기를 끝내고
후둘후둘 떨리는 다리를 끌고 마지막 힘을 다하여 달리면 옆에서 달리는 런너들의 고통에 찬 비명이 들려온다.
얼마나 힘들면 저런 단발마적인 비명이 나오는지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나는 아직 더 힘껏 달릴수 있고 또 더 참을수 있으니 그깟 속도가 조금 느려진들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이제 푸르덴샬보험의 높은 빌딩이 눈에 들어오고 빽빽히 늘어선 사람들의 실루엣이 도로에 비추며 함성소리는 귀를 울린다.
철제바에 올라가서 골인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찍는 사진사가 보이고 손을 번쩍 들며 피니쉬라인을 힘차게 통과하니 시계는 3시간 27분을 가리킨다.
도로에 앉아서 잠시 거친 숨을 고르고 칩을 반납하니 자원봉사자가 보온용으로 비닐을 덮어주고 따뜻한 인사말을 건넨다.
이대회에 참가한 선수들이나 자원봉사자들이나 시민들이나 오늘은 모두가 선수이고 모두가 승자인 것이다.
인파에 휩쓸려 도로를 빠져나오면 관심있게 보아주신 모든 분들이 생각나고 또 완주를 한 자신이 정말 자랑스러워 진다.
그러나 走路의 끝은 또 다른 도전의 시작임을 우리 모두는 잘 알고있다.
첫댓글 킬문님! 보스톤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일생에 하기 드문 여행길에 킬문 님을 만났던 것을 귀한 추억으로 간직하려 합니다.
자유로님! 어제 철 지난(?) 곳까지 왔다 가셨군요...^^ 언제 보스톤모임에서라도 뵙으면 좋겠습니다. 올 한해도 즐겁게 뛰시고 좋은 기록 유지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