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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생활 단상
손 중 하
오늘도 일찍 텃밭에 갔다.
아침 다섯 시, 농사일을 하기 보다는 삶을 즐기러 간다. 즐거움만 있는 게 아니라 땅의 가르침을 배우기도 한다. 이 늦은 나이에 나에겐 대단한 축복이다.
때때로 땅이 메마른 듯싶으면 단비가 와주고, 단비가 오지 않는 날엔 호스를 지하수에 이어 가뭄 타는 작물에 물을 줄 때는 내 자신이 하늘이 되어 단비를 내리는 기분이다.
우리 집 유월의 텃밭에는 지금 막 수확을 서둘러야 하는 완두콩이 한 자락을 차지하고 있다. 텃밭의 가장자리에는 해마다 풍성하게 열리는 대추와, 아마도 내년에는 수확을 맛볼 사과나무가 무성히도 자라고 있으며, 곧 꽃대가 올라올 옥수수도 한몫을 하고 있다. 기회만 되면 사람이 있건 없건 호시탐탐 새들이 달콤한 열매를 노리는 블루베리가 익어가고 있으며, 양배추는 그 크는 속도가 나날이 달라지고 있다. 또한, 오이, 토마토, 가지, 상추, 부추 등이 마치 채소시장을 연상케 하고 있다.
마늘을 캤다. 제법 쏠쏠하게 들었지만 그 크기가 고르지 못하다. 크기별로 분류하고 한 접씩 묶음을 묶으니 수물 대여섯 접 정도 되는 듯하다. 대여섯 접은 씨 마늘로 선별하고 나머지는 마늘 농사 짖지 않는 형제들, 자녀들 몫으로 나누어 놓고 또 마늘 심을 때 일손을 도와준 지인들에게 조금씩 나누어주는 일이 해마다 되풀이 된다.
마늘 캔 밭은 참깨를 심기위해 엎드려 고르기 작업을 한다. 이때는 장갑을 벗고 맨손으로 흙을 고른다. 살갗을 통해서 땅과 교감하기 위해서다.
내가 텃밭이 있는 전원생활을 선택한 이유는 꼭 집어 이것이라고 말 할 수 없지만, 향기 스스로 피워낼 줄 아는 삶과 높고 낮은 수많은 산들을 벗 삼아 집을 지어 평생을 그 향내로사는 부(富)를 배우려 찾아들었다면 그 이유는 충분한지 모르겠다.
“우리 평생 그렇게 살자.”
아내의 말이 고맙다. 이곳에 찾아들기까지는 아내의 동의 없이는 선택할 수 없는, 그러면서도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되겠다는 절박함을 읽어준 아내 덕에 오늘도 흙과 같이 할 수 있는 호사를 누린다.
인생에 선택의 기회는 몇 번이나 주어지는가? 최선을 버리고 차선을 선택하여 산다면 늘 인생은 차선으로 밖에 살 수 없다.
인생에 있어서 최선은 무엇인가? 그것은 사랑으로 사는 일이고 성실로 사는 일이다. 성실과 사랑으로 사는 일이야말로 최선의 인생을 사는 것이다. 오늘도 성실과 사랑으로 사는 날이기를 기도한다. 최선으로 사는 삶이기를 기도 한다.
때때로 지인들이 묻는다. “시골생활이 재미있느냐?” 고.
어찌 재미만 있겠는가? 때때로 힘든 일도 있다. 세상에 힘들지 않은 일이 어디 있겠는가?
사람마다 힘든 정도야 다르겠지만 이 세상 어디에도 힘든 일은 없는 것 아니겠는가? 힘든 일, 견디기 어려운 일, 그럴 땐 그저 텃밭으로 간다. 텃밭으로 가서 기도를 한다. 기도로써 모든 일이 이루지는 것은 아니겠지만 위로를 받을 수는 있다.
내 기도는 말로 하는 것도 아니고 마음으로 하는 것도 아니다. 농장의 채소나 과일나무 등을 보살피다 보면 기도가 된다. 힘들 일도 즐길 줄 알게 되고, 즐기다보면 감사한 마음도 생긴다. 이런 삶이 반복되니까 마음의 문이 열리게 되고, 마음의 문이 열리다보니 질병도 원한도 다른 고통까지도 조금씩은 수용되는 이 삶이 참으로 좋다. 화냄도 성냄도 다른 사람의 탓이 아니라 수용할 수 없는 내 마음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오전부터 시작한 비가 오후 내내 내렸다. 언제나 농사에 상관없이 비만 오면 좋은 것은 왠지 나도 모를 일이다. 먼 곳에 있는 것들이 내게 가까이 오는 듯한 기분이다. 비만 오면 모든 것이 손에 잡힐 듯 가까이 와 있는 그 느낌, 그 느낌 때문에 비록 태풍을 동반한 폭우일지라도 그저 비만 오면 기분이 좋은 것은 마치 첫눈을 맞는 소년처럼 빗속을 헤집고 다니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오늘 내리고, 그 비가 내일 또 내린다 할지라도 비로 인한 지루함을 느끼지 못함은 아마 어릴 적부터였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비를 좋아한 뚜렷한 이유는 나도 모르겠다. 하늘과 땅이 하나 된다는 느낌 때문일까?
이제 비가 그치고 어둠이 짙어진다. 어둠 또한 휴식 같은 느낌이라서 참으로 좋다. 도시에서 보는 밤이 아니다. 하늘엔 별이 촘촘히 박혀 있고, 가끔씩 달도 떠서 가로등이 없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어릴 적 마당에 멍석을 깔아놓고 쑥으로 모깃불 피워 모기 쫓아가며 옥수수를 먹던 그 여름밤은 아닐지라도, 보일 듯 말 듯한 은하수의 흔적을 찾아가며 하늘을 보며 뻐꾹새 소리와 함께 생각 또한 짙어진다.
이럴 때는 가끔 촛불하나 밝혀두고 자정을 넘어 동이 틀 때까지 차를 마실 수 있는 이야기 친구를 기다리게 된다. 가까이에 친구가 있어서 좋다. 부르면 10분 이내로 달려올 수 있는 친구, 그 친구도 나와 같이 전원생활을 즐기는 친구다. 그 친구와 같이 있으면 서로 비슷한 점이 많아 말없이도 소통이 된다. 차를 즐긴다든가, 꽃을 좋아한다든가, 때때로 훌쩍 여행을 떠난다든가, 산이든 바다든 더 좋아하고 덜 좋아하는 것 없이 어디든 가면 감탄을 하는, 참 잘 왔다고 소리 내지르는 성품들이 어찌 그리도 비슷한 지. 차를 마시고 서로의 이야기에 취하고 먼동이 트면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 살짝 눈을 붙이고 나면 우리는 각자 또 다시 텃밭으로 가게 될 것이고 여름날 하늘 가생이로 흐르는 뭉게구름을 보면서 대단치 않은 이야기, 즉 얼마 전에 포기 나눔 한 백합이 곧 피게 생겼다든가, 병아리가 잘 크고 있다든가 하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하루해를 보낼 것이다.
텃밭을 가꾼다는 것은 기다림이다. 씨 뿌릴 계절을 기다리고, 씨 뿌린 다음에는 싹이 돋기를 기다리고, 꽃이 피기를 기다리고, 열매 맺기를 기다리고, 나눔을 기다리게 된다. 이렇게 한 계절을 다 보내고 나면 내 이마에 나이테가 하나 생기고, 거기에 짙은 그리움이 싸이게 된다. 나이 들어 텃밭의 기다림은 버리지 못하는 꿈이고 희망이다. 어쩌면 나는 꿈 넘어 꿈을 실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인간의 네 가지 소원이 부귀강령(富貴靈强)이라했던가.
사람이
부(富)하기는 욕심내지 않는 것보다 더 부한 것은 없고
귀(貴)하기는 벼슬하지 않는 것보다 더 귀한 것은 없고
령(靈)스럽기는 알지 못하는 것보다 더 신령스러운 것이 없고
강(强)하기는 다투지 않는 것보다 더 강한 것은 없다는 말
그 말을 텃밭에서 배운다.
이제 상현달이 살이 붙으면 묵밭에 지천으로 피어나는 망초꽃으로 놀러 올 것이고, 그런 날이 되면 나 또한 친구를 불러 차를 나누든 술을 나누든 한여름 밤을 망초꽃과 함께 할 것이다.
* 충남 금산 출생, (전)대문초등학교 교장, 월간 ≪한울문학≫(2005) 등단, ‘한국농촌문학상’(2006) 수상, jhson1971@hanmail.net
소박한 나눔
김 순 길
묵은해를 보내고 밝은 빛을 맞이할 설날이 다가온다. 방앗간에서는 설날 먹을 가래떡 빼기가 한창이다. 설날에는 만나는 이마다 으레 “떡국을 먹었느냐?”고 인사를 건넨다. ‘떡국을 먹어야 한 살 더 먹는다.’는 말이 전통처럼 전해지고 있다. 내 마음 같아서는 떡국 안 먹고 한 살 더 안 먹었으면 좋으련만 가는 세월 붙잡을 수 없으니 어찌 하겠는가!
모임에서 김 여사를 만났다. 그녀는 나에게 슬그머니 종이팩을 건넨다. 받고 보니 종이팩에는 가래떡 몇 개와 KF94 마스크 열 장이 들어 있다. 아마도 명절이 다가오니 설날 떡국이나 끊여 드시라고 자녀들이 보낸 듯싶다. 받는 순간 얻은 기쁨보다 짠한 감동이 가슴속 밑바닥까지 시려진다. 나는 김 여사의 어려운 가정형편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팔십이 넘은 두 노인이 근근이 살아가는 처지이다. 언젠가 “올해는 동사무소에서 쌀 한 가마니를 보내와서 양식걱정은 안 해도 되겠다.”고 행복해 하던 모습이 기억난다. 나에게 준 이 떡으로 끼니를 몇 번 때울 수 있을 텐데…… 더구나, 말끔히 포장된 KF94 마스크는 돈으로 환원하여 어려운 가정 형편에 도움이 될 수 있을 텐데……
김 여사는 비록 가난하고 가진 것은 없어도 마음만은 풍요로운 부자였다. 혼자 배불리 폭식하기보다 이웃과의 나눔을 통해 기쁨과 보람을 느끼고 있었다. 명절을 지나고 2월로 접어들었다. 뜻하지 않던 신종 코로나 19가 걷잡을 수 없이 빠른 속도로 확산된다. 나라 안 밖으로 큰 난리가 났다. 하루가 다르게 감염환자가 증가했다. 덩달아 마스크 파동이 시작 되었다. 코로나 19가 가장 많이 번진 대구에서 비통한 사건이 벌어졌다. 19세 된 고3 소년이 아버지가 대장암으로 편찮으셔서 마스크를 사려고 장시간 기다리다, 춥고 비까지 맞아 병이 났단다. 고열로 병원에 입원했다가 6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 이 소식을 들은 부모는 물론 온 국민이 공포와 불안에 싸였다. 이처럼 마스크는 우리 생활의 소중한 필수품이 되었다. 김 여사가 나에게 마스크를 줄때만 해도 오늘날처럼 긴박한 사정이 아니었다. 김 여사는 마스크가 있어 이웃과 나눔을 갖고 싶었다. 마음을 곱게 쓰다 보니 상황이 맞아들어 지혜로운 자가 된 것이다.
코로나가 급속히 확산되어 너나할 것 없이 마스크 사기에 온통 난리다. 나도 약간 염려스러워 마스크 보유 상황을 점검해 보았다. 그녀가 준 것 KF94 열 장과 1회용 마스크 열 장, 그 외 소소한 것들 몇 장이 있다. 이렇게 여유 있게 가지고 있으면서 마스크를 사려고 애타는 사람들에 끼어든다면 죄를 짓는 것 같았다. 또한 제2의 대구 소년 사태를 불러일으키는 악인이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욱이 김 여사가 나에게 전한 소박한 정에 위배되는 일이다. 코로나19가 급속도로 2차, 3차 감염되듯이 김 여사가 나에게 준 소박한 정은 마중물이 되어 마음속 깊은 곳에서 품어 나와 3차, 4차 널리 전달되었으면 좋겠다.
그녀는 새 옷은 사 입지 않는다고 한다. 내가 준 대물림 옷으로 늘 예쁘고 곱게 입고 다닌다. 헌 옷을 주었건만 새 옷 못지않게 만족스레 입고 다니니 그 모습이 감사하고 기쁘다. 나는 “김 여사가 그 옷을 입으니 내가 입었을 때보다 더 예쁘고 잘 어울려요”라고 칭찬 겸 격려를 아끼지 않는다. 사실 의복은 몸뚱이만 가리면 되는데 나는 너무 겉치레에 치중했던 지난날은 아니었는지 되짚어본다. 그녀에게서 검소함을 배운다. 박식하면서도 아는 체 안하고 매사에 쉽사리 끼어들지 않음에서 신중함을 배운다. 가진 것이 없어도 이웃과 나눌 줄 아는 부유한 마음에서 배려심을 배운다. 삶이 어렵고 고달파도 티 없는 그의 밝은 미소에서 평안을 느낀다.
사람은 마지막 순간까지 부족한 것을 배우고 채우면서 살아야 하나보다. 그녀의 소박한 나눔을 통해 나는 겉으로 허우대만 멀쩡하고 속은 텅 빈 사람으로 살아오지 않았는지를 자성해 본다. 내가 광야에서 소풍을 즐기는 동안, 연약한 야생화 곁을 무심코 지나치지 않았는지, 내 삶의 종착역에 닿기 전에 곰곰이 되짚어 봐야겠다.
일상의 고마움
봄은 어김없이 찾아와 내 가슴을 파고든다. 산수유는 봄의 전령인 양 뒤질세라 맨 먼저 노란 꽃잎을 오밀조밀 터트린다. 개나리도 성큼 다가와 얼굴을 내밀고 인사를 한다. 들녘에는 하얀 목련이 고운 여인의 살결인 양 보드랍고 곱게 피어 자신의 생각을 더하게 한다.
때는 정녕 봄인가보다. 꽃내음과 밝은 햇살이 콧등에 부딪쳐 눈이 부신다. 예년 같으면 친우들과 꽃놀이 가려고 마음이 설레련만, 올해는 뜻하지 않은 신종 코로나19로 발이 묶였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집에서 콕 쑤셔 박혀 지내란다. 고령자는 면역력이 약하여 더욱 위험하니 꼼짝 말고 정숙히 있으란다. 남은 날이 많지 않아 안타깝다. 외출을 삼간 지도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을 넘겨, 세 달째 접어든다. 처음에는 ‘이달만 넘기면 괜찮겠지?’라는 막연한 희망으로 둘째 달을 맞이했다. 기대와는 정 반대로 코로나19 감염자가 점점 늘어간다. 가파르게 증가되는 확진자와 사망자 수는 공포와 불안감에 젖게 한다.
손자가 다니는 헬스장에 코로나 감염이 의심되는 모녀가 한반원이라 운동을 가르치는 트레이너와 확진자 딸이 검사결과 ‘음성’ 판정이 나와야 자가 격리가 해제된다고 한다. 나는 평소 집에서 매일같이 음식을 해먹기보다 식당에서 새로운 음식을 골라 먹고, 만나고 싶은 친구들을 만나 왁자지껄 수다를 떨면서 스트레스를 해소하곤 했다. 모임이 있는 날엔 가장 예쁜 옷을 입고 주름진 얼굴도 분칠 한 번 더 하고, 거울 한 번 더 보고 외출을 했다. 지금은 화장은 커녕, 세수도 제대로 안하고, 고양이 세수하듯 두 손에 물을 묻혀 눈곱만 닦는다. 밖에도 못 나가고 보고픈 이도 못보고, 먹고 싶은 음식도 못 먹고 참고 견디자니 짜증이 난다. 쓰디쓴 현실 앞에 지난날들이 마냥 그리워진다.
‘푸시킨’의 “생활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 말라 슬픔의 날을 참고 견디면 머지않아 기쁨이 오려니”를 마음속 깊이 읊조리며 스스로를 달래본다. 그렇다. 분명 머지않아 ‘코로나19’ 사태는 사라지고 아름다운 미래가 찾아오리라는 야무진 꿈을 되새겨 본다. 평범하게 생각하고 지냈던 옛날이 이렇게 아쉽고 목마르게 갈증날줄은 미처 몰랐다. ‘This, too, shall pass away’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며 위로를 받는다.
고통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연단을 낳는다. 인간이 끝없는 이기주의와 욕망으로 타락하여 자만하고 교만에 빠져있어, 회개하고 거듭나서 새로운 영으로 돌아가라고 하느님이 재앙을 내린 듯싶다. ‘잘못을 남에게 돌리지 말고, 먼저 나에게서 잘못을 찾아, 낮아지고 겸손해지라’고 하시는 것 같다. ‘내 욕망으로 내 배를 채우기 전에 형제의 배고픔에 마음 아파하라’ 하신다.
우리에게는 미래가 있어 행복하다. 거처할 장막이 있고 일용할 양식이 있어 감사하다. 배불리 먹어도, 배설도 탈 없이 하니 좋다. 눈을 뜨면 찬란한 햇살을 따라 아름다운 꽃을 보고 향기에 취할 수 있어 더욱 좋다. 손과 발을 자유자재로 움직여 땅을 밟고 풀 냄새를 맡으며 산책할 수 있어 좋다. 길 건너 은구비 공원을 세 바퀴 돌고나니 땀이 등에서 송골송골 밴다. 집에만 있다 보니 텔레비전 보는 시간이 많아진다. 요사이 ‘Mr 트롯과 Miss 트롯’ 프로는 적막한 우울증을 달래준다. 사모곡을 들으니 하늘나라로 떠나신 어머니 생각에 애통함이 창자에서 끓어올라 가슴이 절여온다. 끼니도 어려운 가난에 쪼들리며, 막내 딸 대학까지 뒷바라지 하시기에 온갖 고생을 다하신 분이시다. 직장 나가는 딸을 둔 탓에, 손주 넷을 키우시느라 기저귀 빨아대며 젖은 손이 마른날이 없으셨던 어머니셨다. 철부지 막내딸은 가슴속 깊은 따뜻한 말 한마디 못 올리고 온갖 투정과 짜증만 부리던 불효녀였다. 큰 소리로 “어머니”하고 불러 용서를 구하고 최고로 잘 모시고 싶지만 옆에 어머니가 안 계시니 어찌 하겠는가!
요사이 새로 친한 친구 한 명이 생겼다. 바로 핸드폰 ‘카카오 톡’이다. ‘띵동 띵똥’ 새로운 소식이 울린다. 매일 잊지 않고 새로운 소식을 보내주는 친구가 고맙다. 오늘 하루도 무사하기를 빌어준다.
미국에서는 ‘코로나19’ 확진자가 하루에 천 명씩 늘고 있다. 공포의 소굴에서 살고 있는 막내딸이 무사하다니 고맙다. 유럽도 ‘코로나19’ 사태가 만만치 않은데 프랑스에 있는 손녀도 별일 없다니 고맙다. 부모에게는 무엇보다 자녀들의 건강함이 가장 큰 보약인 듯하다.
지금 내가 숨 쉬고 있는 이 순간은 더 없이 중요하다. 이 시간에도 세상 곳곳에서는 많은 사건들이 일어나고 있는데, 나는 오늘 하루를 무사히 보낼 수 있음에 더 없이 고맙다.
여물은 열매
1958년 4월 18일! 목련꽃 향기 짙게 묻어나는 봄날! 올해 대학을 갓 졸업한 애송이가 면 소재지에 있는 작은 중학교에 교사 발령을 받았습니다. 취직했다는 기쁜 마음을 달래며 ‘어떤 차림으로 부임할까?’ 고심했습니다. 시골인지라 부형들이 전통적인 한복차림을 선호할 것 같았습니다. 무릎 밑까지 내려오는 짙은 흑색 한복 치마에, 흰 동정이 달린 하얀 저고리를 맞춰 입었습니다. 기다란 생머리는 고무줄로 질끈 동여매었습니다.
부임하는 중학교는 전교생이 300명가량 되는 소규모 학교였습니다. 학년별로 2학급씩 편성되어 1, 2, 3학년 전체 6학급이었습니다. 여학생 수가 적어 학년마다 홀수 반은 남학생만, 짝수 반은 남·여 혼합으로 편성되었습니다. 교직원은 교장, 교감 선생님을 비롯하여 모두 열 두 분이었습니다. 그 중 여교사는 가정 선생님과 나, 둘 뿐이었습니다. 남자 교사 중 총각 선생님이 두 분 계셨고 나는 유일한 처녀 선생이었습니다. 나 혼자 영어 과목을 전담하여 가르쳐야 했습니다. 약학과에서 영문과로 전과한 나는 영어에 자신이 없었습니다. 서툰 실력으로 공부해서 가르치면서 교단에서 여린 첫 열매를 맺었습니다.
3학년 1반 수업시간이었습니다. 뒷좌석에 앉아 수업을 받는 도 군이 정신 집중을 못하고 안절부절 하였습니다. 나는 호통을 되게 치고 나서 수업이 끝나자 그를 교무실로 오라고 했습니다. 풀이 죽어 교무실에 불려온 그는 사연을 실토합니다. 군에 입대 영장이 나와 내일 군에 입대한답니다. 나는 뜻밖의 소리에 어안이 벙벙했습니다. 그 당시 시골 형편이 여의치 않아 부모들은 아이를 적령기에 학교에 보내지 못했습니다. 뒤늦게 학교에 보낸 탓에 실제 나이가 선생인 나보다 한 살 더 많았습니다. 돌이켜 생각하니 도 군이 안쓰럽고 측은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부디 군에 입대하여 군 복무를 무사히 잘 마치고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건아로 다시 만나기를 기원했습니다.
계절이 바뀌어 시골은 한창 추수하기에 바쁩니다. 일손이 모자라 서로 이웃 간에 품앗이로 일을 돕습니다. 3학년 2반 수업시간이었습니다. 출석을 부르다 보니 김 군이 결석입니다. 결석한 사유는 김 군은 고령인 할머니를 모시고 살고 있었습니다. 할머니는 아버지가 독신인지라, 김 군을 빨리 장가보내 죽기 전에 증손자를 기필코 봐야 한다고 완강히 주장하십니다. 어른 말씀이면 무조건 순종해온 아버지는 할머니의 말씀을 따라야 했습니다. 김 군도 아버지의 뜻을 거역할 수 없었습니다. 기어코 할머니의 재촉에 못 이겨 김 군이 오늘 장가가느라 결석했다고 합니다. 아직 결혼도 안한 나는 내일부터 새신랑 김 군을 데리고 가르쳐야 하는 상황이 생겼습니다.
세월은 빠르게 지나갔습니다. 나는 눈에 콩깍지가 쓰여 아무 조건도 따지지 않고 직장에서 처음 만난 동료 교사와 결혼을 했습니다. 결혼 후 남편은 공부를 계속하려고 대학교 3학년에 편입했습니다. 노 학도가 젊은이들 틈에 끼여 어렵게 졸업을 하자 곧 군에 입대 영장이 나왔습니다, 4년간의 군 복무를 마치고 석사, 박사 과정을 끝마치니 12년이란 긴 세월이 걸렸습니다. 슬하에 4남매가 자라고 있었습니다. 아이들에게 분유는 못 사 먹였지만 부족한 모유에 의존하여 키웠습니다. 오로지 직장에 매달린 나는 아이들이 아파도 아이 아빠가 병원에 데리고 가야만 했습니다. 우리 때는 여교사가 분만하면 수업 공백을 내지 않으려고 분만 교사가 자체 강사를 써서 해결했습니다. 본인이 강사 수당도 책임져야 했습니다. 지금은 산후 출산 휴가를 1년씩이나 할 수 있고 모든 것을 정부에서 다 해주니 얼마나 복지제도가 잘 되었습니까? 나의 직장은 어려운 여건에서 아이들을 키워가며 오늘까지 나를 버티게 해준 지팡이가 되었기에 한없이 고마웠습니다.
나는 첫해 가르칠 제자들의 모임에 초대를 받았습니다. 모두 나이가 육십이 넘어 칠십 줄에 접어들어 몰라보게 변했습니다. 학창시절 집이 몹시 가난해서 경제적으로 어렵게 지낸 박 군을 만났습니다. 그는 3학년 1반 반장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병석에 계셨고 끼니가 어려워, 그가 기차 안에서 김밥 장사를 했습니다. 중학생인 어린아이가 김밥 통을 매고 기차 안을 이 칸에서 저 칸으로 누비면서 ‘김밥 사세요, 김밥이요, 김밥!’을 외치는 절규는 처참하고 비통했습니다. 그가 살기 위하여 외치는 소리는 눈물이 되어 교사들의 가슴에 고였습니다. ‘고진감래라’ 고생 끝에 낙이 온다더니 그는 오늘 당당한 유치원 원장이 되어왔습니다. ‘어려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고 합니다. 많은 고난의 경험은 그를 오늘의 큰 인물이 되게 하는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그는 슬하에 두 딸을 유아교육과를 졸업시킨 후 함께 유치원을 경영하고 있습니다. 그가 성공한 모습을 보니 내가 잘된 것보다 더 기쁘고 보람을 느낍니다.
꼬마 대장 노릇 하던 곽 군도 왔습니다. 그는 체구는 작지만, 유난히 빛나는 눈동자와 당찬 행동은 친우들을 무언중에 압도했습니다. 수업시간마다 문제를 주면 왜(why)?, 어떻게(how)? 항상 의문을 가지고 파고들었습니다. ‘푸성귀는 떡잎부터 안다’라고 그는 어려서부터 매사에 열중하며 사고방식이 달랐습니다. 마침내 그는 우리나라의 유명한 과학자가 되었습니다. 명문교인 과기대에서 강의를 하고 있습니다. 모교를 찾아 후배들에게 명강의로 사랑을 베푼다고 합니다. 이런 훌륭한 제자들을 대하니 가르친 보람을 느낍니다.
저편에 앉아 있던 ‘정’군이 내 옆에 와 앉습니다. 그는 키가 크고 헌칠한 미남형입니다. 육사를 졸업하고 육군 중령으로 제대했다고 합니다. 40년 전, 중 3 시절 이야기를 합니다. 내가 영어 시간에 원어로 ‘Red valley’(홍하의 골짜기) 노래를 가르쳐 준 것이 너무 좋아 지금까지 그의 애창곡이 되었답니다. 나와 함께 앞에 나아가 이중창을 하자고 간청합니다. 제자들 앞에 나아가 매무새를 가다듬고 목청을 높여 그와 함께 노래를 불렀습니다.
‘There’s a lamp shining bright in a cabin, in the window it’s shining for me……. It will guide me wherever I rom.’
이 순간 몸은 늙었건만 마음만은 옛날 제자와 스승으로 돌아간 느낌이었습니다. 그는 소리 죽여 말합니다. 그 노래와 더불어 선생님을 많이 흠모했다고 합니다. 선생님이 뵙고 싶으면 이 노래를 부르면서 가슴 깊이 묻었다고 합니다. 40년의 세월이 지난 오늘에야 18세 소년의 옛 순정을 고백합니다. 선생님과 나이 차이가 네 살밖에 안 난다고 억지로 합리화를 시킵니다. 많은 사람이 사랑 중에도 첫사랑을 제일 못 잊은 듯 나도 처음 교단에서 정열을 다 바친 첫 번째 제자들에 대한 정이 큽니다.
평교사로 9개교, 장학사로 1개 군, 교감으로 2개 교, 교장으로 2개 교 근무를 마지막으로 나는 42년간의 교직을 퇴임했습니다. 처음 교단에서 여리게 맺힌 열매는 세월 따라 잘 여물어 튼실하고 풍성한 알찬 열매를 맺었습니다.
* 대전여고 졸업, 수도여자사범대학 영문과 수료, (전)중등학교 교장, 한밭문학회 수필부문 신인상(2012), kimsk3527@hanmail.net
요즘 아이들
김 기 태
나는 좋을 호(好)자에 반해 7년을 사귀다 아내와 결혼하여 딸이 두 명이고 아들 하나를 두었다. 자식들이 모두 적당한 시기에 결혼을 해서 지금은 손자 손녀가 다섯 명이 되었다. 그 중에 손자가 커가는 것을 보면 어릴 적 내 기준으로 키울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 고심에 빠진다. 요즘 아이들은 희망과 꿈이 뚜렷할 뿐만 아니라 구체적이고 체계적으로 덤벼든다. 꿈은 나이 들면서 변하는 것이지만 막연한 꿈이 아니라 목적이 분명한 주관이 있다.
손자가 초등학교 3학년까지는 축구에 빠졌다. 공격과 수비수를 왔다 갔다 하더니 골키퍼를 한다고 한다. 공격수로 뛸 때는 골도 많이 넣었지만, 골키퍼가 못 나와 문지기가 없을 때 대타로 시합에 출전했는데 운동 신경이 좋아 결정적 순간에 골을 많이 막았다고 한다. 체격이 좀 작은 편이지만 드리볼과 스피드는 좋아 잘 뛰었는데 체력이 달려 풀타임을 뛰는데 어려움이 있었나 보다. 이런 과정에서 선배들로부터 시달림을 받았다고 한다. 흔히 운동하는 세계에서 볼 수 있는 그런 현상이었을 것 같다. 그래도 손자가 다니는 초등학교가 성동구 대표로 나가 서울시에서 준우승까지 했다니 손자의 허풍만은 아닌 것 같다.
부모들도 맞벌이를 하니 신경 써서 도와줄 수도 없는 일이고, 어린 나이에 혼자 따돌림을 해결해야 하니 스트레스를 받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손자가 해결책으로 생각한 것이 태권도와 축구를 겸해서 하는 것이었다. 체력이 약한 아이가 두 가지를 겸하니 신체적 부담은 더 왔을 것이지만 선배로부터 오는 눈총을 피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아이들은 태권도를 모두가 하는 필수였기에 별 효과가 없었다고 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운동을 바꾼 것이 주짓수다.
주짓수는 우리가 UFC 격투기에서 보는 운동 기법 중 하나인데, 격렬하기가 아주 심한 극한 운동이다. 브라질에서 발전한 운동인데 관절 꺾기와 조르기가 주짓수의 특징이다. 격투기가 복싱과 레스링, 주짓수가 주종을 이루지만 또 태권도와 킥복싱 그리고 유도도 필요하고 유슬과 러시아의 삼보 등이 사용되는 종합 운동이지만 그라운드에서 결정적으로 마무리 짓는 것은 주짓수다. 그렇게 어렵고 힘든 운동을 스스로 시작한 것이다. 덩치 큰 아이들로부터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 하는 방어 운동이란다. 이제 8개월 정도 했으니 손자의 행동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나를 더욱 어안이 벙벙하게 만든 것은 손자가 4학년인 작년 12월이었다. 내가 전립선 암 수술을 분당 서울대 병원에서 받기 위해 하루 일찍 서울로 올라갔다. 그런데 손자가 밖으로 나갔다 들어오더니 무엇인가 들고 온다.
"그게 뭔데" 하니, "정관장인데요" 한다. 수술 받는 할아버지를 위해 사온 것으로 생각하여 감동을 받았다. "돈은 어디서 나서", "할아버지는 괜찮은데!" 하니까 "할아버지는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밥을 주니 괜찮지만 할머니가 할아버지를 간병하려면 더 힘이 들 것 같아 할머니 드시라고 사 왔어요." 한다. 그동안 모은 돈이 75,000원인데 사려는 정관장은 80,000원이라 가게 주인이 기특하다고 5,000원을 할인해 주었어요." 한다.
"고 오 레"
나에게 사온 것이 아니라 서운한 맛도 있었지만 생각의 발상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수술을 마치고 나와 년 말에 정관장을 구입한 돈은 돌려주었지만 머리가 복잡하다. 어떻게 손자의 진로를 잡아주어야 하나. 우리는 어떻게 손자를 지도해야 하나. 내 머리가 따라가지 못할 것 같아 걱정이다. 본인은 사업가가 되겠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그것도 어려운 직업인데……
사교성도 있고 배려하는 면도 있고 극기력도 보인다. 문제 해결 능력도 보이니 스스로 가는 길도 하나의 방법인데 걱정은 매 한 가지다. 아이답게 큰 아이가 어른 같은 어른이 된다고 믿었는데, 너무 어른스러움이 일찍 다가와 이를 어찌해야 하나 오늘도 생각이 깊어진다.
잘 커야 할 텐데……
요즘 노인들
요즘 사람들은 무병장수를 원한다. 장례식장에 가 보면 90세를 넘기고 돌아가시는 분들이 많아졌다. 그러나 조물주는 생명체에게 나름대로 어느 정도 살라는 유전인자를 부여하였다, 개체 수가 많아지면 재앙을 주어 자율 조절이 되도록 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인명(人命)은 재천(在天)이라고 말했는지 모르겠다. 요즘은 전쟁도 돌림병도 많지 않으니 사람들이 오래 사는 것 같아 조물주가 섭섭해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100년 사이에 인구가 4배로 증가했으니 말이다.
사람들은 괴질이 발생하면 병을 연구하고, 백신과 치료약을 개발하여 이를 극복한다. 시간을 다투며 목숨 걸고 싸우는 반복되는 현상이다. 그래도 사람들은 머리가 좋아 이를 극복하고 용케 살아남아 어떤 음식을 먹으면 몸에 좋은지, 어떻게 하면 깨끗한 물을 마실 수 있는지, 추위와 더위로부터 어떻게 몸을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는지, 영양 공급을 균형 있게 하며, 적당한 운동으로 몸을 잘 관리하고, 정기 건강 검진을 통해 아픈 곳을 미리 발견하여 치료하면서 우린 오래 살고 있는 것이다. 이런 과정을 내 옆에서 잘 챙겨 주는 사람이 아내라고 생각하여 지금은 인명(人命)은 재처(在妻)라고 말하게 된 것 같다.
오늘 날 노인들에게는 통과해야 되는 중요한 과정이 하나 더 있다. 본인이 잘못하여 겪어야 하는 어려움이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나 볼 수 있는 50세가 넘은 자식들이 아버지에게 기대는 못된 의식 때문이다. 그래서 자식이 살아가는데 탈이 없어야 70세가 넘은 부모의 노후가 보장되는 관문을 거친다.
본인은 열심히 살아 직장에서 정년퇴직을 하고 퇴직 후 그동안 모은 재산으로 여유 있게 취미 생활을 하면서 각종 모임에 잘 나오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소식을 끊고 잠적하여 산 속으로 들어가면 그것은 자식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 대부분이었다.
자식이 다니던 직장에서 나와 사업을 한다고 벌인 일이 잘못되어 부도를 맞으면 본인은 물론 부모까지 어렵게 만드는 경우다. 앞으로는 "인명(人命)은 재자(在子)다." 라는 말이 나올 것 같다
그래서 노인은 70세를 잘 넘겨야 행복한 노후를 맞게 되는 것 같다.
관문을 통과하면 첫째로 해야 하는 일이 건강에 힘쓰는 일이다. 너무 과하지 않게 체력에 적합하게 반복되는 운동을 하는 일이다. 전에는 국가대표 선수가 건강하게 오래 사는 줄 알았는데, 선수가 선수촌을 나오면 병원 다니기 바빴던 것이다. 기록을 위해 몸을 혹사 시켰기 때문이다. 여기서 생활 체육이란 것이 생겼다. 전문가의 도움으로 지도를 받을 수도 있고 방송에서도 알려 주고 주민 센터에서 수강 할 수가 있다. 텔레비전을 보며 잠시도 가만 있지 않고 몸을 스트레칭 하는 일도 좋다. 문제는 자기 몸에 적합한 운동을 택해 반복해서 하는 일이다
두 번째 해야 하는 일은 혼자 있는 시간을 지루하지 않게 보내는 일이다. 다시 말해 나만의 취미를 가져야 된다는 말이다. 나이가 들수록 찾는 이도 줄고 전화 걸어오는 이도 줄어든다. 그렇다고 내가 찾아갈 곳도 마땅하지 않다. 준비하지 않고 어영부영 시간을 보내다 보면 허송세월을 보냈다는 것을 알게 된다.
10여 년 전, 유튜브를 달궜던 이야기가 있다.
공직에서 퇴직하였는데 그동안 돈도 조금은 모아 놓고 건강도 좋아서 아내와 시골에서 전원생활을 하면서 여행이나 다니며 노후를 즐겁게 보내자고 약속을 했다. 다행히 자식들도 제 갈 길을 찾아 잘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에 문제없이 노후를 즐길 수가 있었다. 그러다 90세를 맞이하게 되었다. 생각해 보니 자기 인생의 1/3인 30년을 헛되이 보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10년 후 다시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 평소 하고 싶었던 공부를 시작하려고 영어 학원에 원서를 접수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이가 들어도 꿈이 있는 사람은 눈이 살아 있고 눈이 살아 있으면 꿈은 이루어지는 것이다.
다음은 사람들이 해보지도 않고 소질이 없다는 이야기를 먼저 한다는 점이다.
물론 처음 하는 일이 쉬운 것이 어디 있겠는가? 힘든 것은 당연한 일이지. 세상에는 안 되는 이유도 있겠지만 되는 이유도 있는 법이거든. 요즘 시민대학이나 동호회에서 가르쳐 주기도 하고 그 곳에서 가르치는 사람도 학생이 많아야 존속할 수 있으니 쉽게 가르치지 않을 수가 없다. 모임에서는 실력이 좀 쳐져도 밖에 사람들은 경이롭게 생각하게 되는 이유다,
노인이 되어 취미 생활을 하다 보니 조금은 룰이 있었다. 첫째는 내가 좋아 해야 되고. 둘째는 희소성이 있고, 배우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지 않아야 하며, 셋째는 경비가 적게 들어가야 하고, 마지막으로 내가 하는 취미 생활이 하고 나면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면 금상첨화였다.
이런 일화가 있다.
미국 맨해튼 뒷골목에서 조그만 가게를 운영하던 조지 이스트 이버맨이란 78세 된 노인이 있었다. 한가할 때는 노인 센터에서 체스를 두는 것이 취미였는데 그 날은 체스 상대인 할아버지가 감기에 걸려 나오지 못해 멍 때리기를 하고 있었다. 이때 노인 센터 여직원이 심심하시면 그림을 그려보라고 권유했다!
"난 평생 그림을 그려 보지 안 했는데."
"그림이 별 겁니까? 캔버스에 물감을 칠하면 그림이지요?"
그래서 그림을 그리게 됐는데!
"할아버지 그림에 소질이 있네요?"
그림을 지도하는 선생님한테 칭찬을 받았다!
그 후, 할아버지는 12주 유화 지도를 받고 101세에 22번째 개인전을 열었다고 한다.
미국의 샤갈이라고 극찬을 받으면서……
하다 보면 그렇게 되는 건가 보다. 프로의 경지까지 안 가도 된다. 취미 생활로 이어져도 의미가 있는 법이니까. 예술이라는 것이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이니까. 프로의 세계에 뛰어들면 머리가 아프다. 아마추어 세계에 머물며 즐겨도 행복한 거다. 그래서 동적인 것과 정적인 것으로 나누어 취미 생활을 하면 혼자 있는 시간을 잘 관리하게 되는 거라 생각한다. 그 정도 사는 것도 노년에 행복한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 일에 살짝 미치면 더 행복한 것이고……
우리 모두 행복하게 삽시다. 내가 있어 세상이 즐겁도록.
* 충남 서천 판교 출생, 글지이, 부름새, 서각인, (전)계룡건설 토목본부장, 온동마을 촌장, 저서 삶의 시방서, 소똥 위에 홍시, 살아보니 어뗘, 그려, 하고집이 등. blog.daum.net/ondong
천상의 화원, 덕유산
백 경 화
나는 덕유산을 무척 좋아한다. 얼마나 좋아하는지 덕유산이란 말만 들어도 가슴이 뛴다. 그래서 계절이 바뀔 때마다 찾아 간다. 봄이면 향적봉에서 중봉까지의 연분홍 철쭉꽃이 탄성을 자아내게 하고, 여름이면 동엽령에서 중봉까지의 원추리꽃과 야생화로 뒤덮인 산길을 걷는다. 가을이면 남덕유산의 기암괴석과 단풍의 어우러짐을 보며, 겨울이면 향적봉에서 넓게 펼쳐진 산 그리매와 고사목의 설화를 보며 감상에 젖는다.
덕유산은 우리나라에서 네 번째로, 한라산 지리산 설악산 다음으로 높은 해발 1,614m나 되는 육산이다. 높은 산이지만 그 품속에 들어서면 편안함이 고향에 온 듯 마음이 평온하다. 그러나 등산을 하자면 어느 코스를 택하든지 최단 거리가 왕복 7~ 8시간은 걸린다. 지금은 케이블카가 있어 향적봉 정상을 30분 이내로 오를 수 있지만 곤돌라 시설이 없을 당시는 종일 걸어야 했다. 요즘은 하루에 많은 거리를 걸을 때, 남덕유산에서 무룡산과 향적봉으로 여러 봉을 등산할 때는 하산 시 이용하는데 좋은 점이 있다.
몇 년 전의 일이 생각난다.
동엽령에서 중봉 사이의 원추리꽃과 야생화를 보기 위해서 전북 무주군 안성면 칠연폭포 쪽으로 올라가 경남 거창의 송계사로 하산하는 코스를 정하고 우리 산악회 회원들과 일찍 출발했다. 처음부터 숲이 울창한 산길로 들어섰다. 7월의 장마 끝이라서인지 숲속이지만 날씨가 후덥지근하다. 그러나 계곡물은 웅장한 폭포 소리를 내며 가슴속까지 시원하게 적셔주었다. 한동안 그렇게 이어지다가 힘든 오르막길이 시작되고, 두어 시간 오르고 나면 해발 1,320m의 동엽령 삼거리에 올라선다. 지금까지 보이지 않았던 푸른 하늘이 보이고 시원한 바람은 어느새 달려와 온 몸을 감싸 안으며 나를 반겨 주었다. 동엽령의 넓은 초원 위에는 만발한 야생화로 꽃 잔치가 벌어졌다. 노랗게 핀 원추리꽃, 주황색인 산나리꽃, 빨갛게 핀 싸리나무꽃, 하얀 취꽃, 엉겅퀴꽃, 그 밖에 많은 꽃들이 지천으로 깔려 있다. 이런 꽃들이 바람 따라 유연하게 파도를 친다. 거센 파도를 거역하지 않고 주어진 운명을 받아들이기나 하듯 오히려 즐기면서 넘실거렸다. 하늘에 떠 있는 하얀 구름도 오색의 물결 따라 바쁘게 움직였다. 춤추는 물결 위로 새 한 마리 앉으려다 파드득 하늘 높이 솟아오르며 ‘삐리 삐리 삐리리’ 노래하면서 빙빙 하늘을 날고 있다. 나비와 잠자리 떼들도 덩달아 바쁘게 움직였다. 갑작스럽게 펼쳐진 풍경에 이런 곳을 일러 천상의 화원이란 생각이 들었다.
왼쪽은 덕유산 주봉인 향적봉으로 가는 길이고 오른쪽은 남덕유산으로 가는 길이며 경상남도와 전라북도의 경계선이다. 또한 지리산 천왕봉에서 시작하여 이곳 덕유산을 지나는 백두대간 길이다. 오늘 정해진 산행 코스는 여기서 잠시 덕유산의 백두대간을 밟다가 경남 거창의 송계사로 하산한다.
능선 길로 들어섰다. 길가에 채송화꽃처럼 작은 빨간 꽃이 삐쭉 고개를 쳐들고 나와 저도 한 몫 하겠다며 애교를 떤다. 보라색 옥잠화 꽃봉오리는 몽글몽글 금방 터트릴 기세로 준비되어 있다. 송계 삼거리 봉을 못 미쳐 오름 길에는 또다시 원추리꽃으로 노란 물결을 이루었다. 정성 들여 가꾸어 놓은 정원의 소담스러운 장미꽃이나 국화꽃이 이보다 더 아름답겠는가? 모진 세파를 잘 견디는 강인한 내면과 겉으론 한없이 순수하고 연약해 보이는 야생화의 그 자태는 이 세상 어머니들처럼 위대하고 아름답게 보였다.
야생화에 반해 멀리로는 눈 돌릴 겨를도 없이 어느덧 해발 1,500m가 넘는 송계 삼거리에 올라섰다. 바로 위로는 중봉, 그 옆으로는 정상이 가깝게 올려다보였다. 여기까지 와서 정상을 못 가는 게 아쉬워 자꾸 그쪽을 쳐다본다. 그러나 오늘 계획한 코스는 향적봉을 뒤로하는 반대 방향이다. 내가 밟고 온 길과 남덕유산으로 뻗은 짙푸른 능선이 선명하게 보였다. 울툭불툭 구불구불 마치 꿈틀거리는 용의 형상처럼 위용스럽게 다가왔다. 무룡산과 삿갓봉, 남덕유산의 산봉들이 키를 재고 있듯 뾰쪽뾰쪽 다투어 서 있는 모습이 장관이다. 남쪽으론 하늘과 맞닿은 지리산이 장쾌하게 병풍처럼 펼쳐져 있고, 천왕봉에서 노고단까지의 장대한 능선 100리 길은 보기만 해도 가슴을 울렁이게 했다. 바로 옆으로는 내가 하산할 송계리 능선도 길게 펼쳐있다. 나는 이곳 송계봉에서 느긋하게 앉아 경치를 감상하며 도시락을 먹는다. 적어도 이 시간만은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 자처하며 요리조리 세상을 굽어 살펴보며 행복감에 젖어본다.
송계봉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중봉과 향적봉을 뒤로한 채 계속 백두대간 길을 겯는다. 능선이지만 여기도 하늘 한 점 보이지 않는 울창한 숲 속이 이어진다. 한참을 내려가다 보면 삼거리에 닿는다. 여기서 백두대간 길을 벗어나 송계사로 향한다. 갑자기 마사가 깔린 험한 내리막길이 시작된다. 미끄러질까 봐 긴장을 해서인지 천천히 내려왔지만, 겉옷까지 땀으로 흥건히 적시며 3시간을 내려왔다. 거의 다 내려와서는 같이 간 회원들 여러 명이 땅벌에게 쏘였다.
산길을 걷다 보면 종종 흙이 부스스하게 소복이 쌓이고 쥐구멍만 하게 뚫린 것을 볼 수 있다. 그런 것이 벌집이다. 그런 것이 발견되면 밟지 말고 살짝 피해가야 한다. 모르고 밟았다 하면 그야말로 벌집을 쑤셔놓는 격이 된다. 벌은 나무나 숲 속에 집을 짓고 사는 줄 알았는데 산에 다니다 보니 쥐구멍 같은 곳에서도 벌이 산다는 걸 알았다. 오늘도 앞서가는 회원이 부스스한 땅을 벌집인 줄 모르고 밟고 지나갔다. 밟고 지나간 후 벌떼들이 모두 나와 공격을 했다. 산길이라서 좁고 험해서 피할 수도 없이 당했다. 어떤 회원은 아프다는 다리에 벌에 쏘여 벌침 맞아 약이 되겠다면서 웃으며 내려오기도 했다. 등산을 하다 보면 벌에 쏘이는 일은 가끔 있는 일이라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런데 오늘은 여러 명 중의 한 명이 심각한 상태여서 병원까지 들렀다 왔다.
언젠가도 빈계산 등산 중에 회원 중 하나가 갑자기 벌떼를 만나 피하느라 발을 헛디뎌 넘어졌다. 손을 땅에 짚는 순간 유감스럽게도 손가락이 뒤로 꺾이어 119를 불러 병원에 가 수술을 받은 적도 있었다. 산에서 벌을 만나면 가만히 쥐 죽은 듯이 엎드려 있으면 공격하지 않고 가버린다.
산에 오래 다니다 보면 이런저런 갑작스러운 일이 일어날 때가 종종 있다. 그런데 그때가 거의 하산 종료 직전에 생긴다. 등산은 완전히 산행이 끝날 때까지 긴장을 멈춰서는 안 되며 기쁜 일이 있으면 더 긴장을 멈춰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남긴 날, 꿈만 같은 하루였다.
잊을 수 없는 그날, 조령산
어느 해였던가? 3월이다. 내가 대전 YWCA 산악회의 회장직을 맡고 백두대간 종주 산행을 할 때, 눈이 많이 내린 날이다.
등산하는 사람들은 눈이 오면 좋아한다. 그날도 3월인데도 뜻밖에 내륙지방에 눈이 많이 왔다는 뉴스를 접하고 ‘하얀 눈을 밟으며 산행할 수 있겠구나’ 하며 설레는 가슴으로 출발했다. 종주할 코스는 충북 연풍면에 있는 이화령 고개에서 시작하여 경북에 있는 문경새재 제3 관문으로 하산할 예정이다. 우리 25명의 회원은 이화령 고개에서 내려 하얀 눈이 쌓인 산길로 들어서 해발 1,125m의 조령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완만한 길로 시작해서 별 어려움 없이 40여 분 만에 헬기장에 도착했고, 다시 20분 올라가서 조령 샘에 닿았다. 거기서 정상까지는 왼쪽으로는 아스라한 낭떠러지고, 오른쪽으론 쭉쭉 뻗은 잣나무 숲이 이어지고, 30여 분 지나서 조령산 주봉인 정상에 도착했다. 삥 둘러 온 천지가 산으로 둘러싸인 우뚝 솟은 산정에서 내가 가장 높은 곳에 올라섰다는 기쁨을 시원하게 맛본다. 뒤돌아 10시 방향으로 백화산 줄기의 대간 길이 한 눈으로 보이고, 오늘 우리가 가야 할 대간 길은 울퉁불퉁 시커멓게 조금은 사나운 느낌으로 다가왔다.
다시 등산화 끈을 조이며 길고 험한 길을 가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을 때, 서울에서 왔다는 한 산악회원 30여 명이 올라오고 있었다. 험한 산을 앞에 두고 또 다른 팀이 옆에 있으니 마음이 한결 든든했다.
정상에서 조금 내려가다가 급경사 내리막길에서부터 문제가 생겼다. 눈 속의 빙판길에서 아이젠 없는 회원이 있어 내려가지를 못하고 있었다. 내 아이젠을 한 짝 벗어 주며 둘이 한 쪽씩 끼고 걸으려니 경사가 심한 내리막길이 꽁꽁 얼어 한 발짝도 옮기기 어려웠다. 다행히 서울에서 온 남자 등반대장이 붙잡아 주어서 안전하게 안부에 내려섰지만, 더 이상은 아이젠 없이 갈 수가 없었다. 이제 겨우 한 고개 넘었는데 앞으로도 이런 길이 계속된다면 안 되지 싶어 아이젠 없는 회원은 신풍리라는 마을로 하산시켰다.
같이 가지 못한 아쉬움을 안고 나는 앞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십여 년 전에 한 번 왔던 기억이 있어 우리쯤은 무사히 갈만한 코스로 생각하며 앞서간 회원들을 따라갔다. 뾰족한 암봉에 올라서니 회원들이 모여 서있다. 웬일인가? 했더니 밧줄을 잡고 내려가는 난코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것이 오늘 생사를 넘나드는 시발점이라는 것을 누가 짐작이나 했을까. 어젯밤에 내린 눈이 녹다가 새벽 찬 기온에 꽁꽁 얼어서 완전히 얼음 계곡에 빙벽이 되어 있었다. 가까스로 가느다란 밧줄을 잡고 내려가니 다시 오름길, 한 봉을 지나고 나면 또 위험한 길이 도사리고 몇 번을 반복하게 되었다. 이젠 전진하기도 어렵고 후퇴하기도 어려운 그야말로 진퇴양난이다. 위험지대인 신선봉을 지나칠 때는 바위에 오르지를 못해 아래의 위험지대 <등산로 아님>으로 돌아왔다. 바위를 오르는 길이 눈이 쌓이고 얼어서 도저히 시도도 못 하고 위험지대로 온 것이다. 미끄러운 바윗길인데다 아래는 수백 리 낭떠러지, 몸을 안으로 기대며 죽을 힘을 다해 기어올랐다. 이곳에서 엉엉 우는 회원이 몇이나 있어 겁이 덜컥 나기도 했다.
간신히 올라가면 가느다란 줄 하나에 생명을 걸고 내려가야 하는 가냘픈 목숨이 되었다. 줄을 놓치면 수백 리 낭떠러지, 떨어지면 누가 내려가서 끌어올 수도 없는 수백 미터 직벽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런가하면 갈라진 바위를 건너뛰는 아찔한 곳도 있었다. 그러나 회원들은 각자가 죽기 살기로 힘내며 안전하게 잘 이동을 했다.
어떻게 하든 빨리 이곳을 벗어나야 했지만 가면 갈수록 끝나지 않는 험로가 이어지니 진력이 났다.
드디어 전망이 좋은 작은 산봉에 섰다. 여기가 어디쯤인지, 얼마나 더 가야 하는지 궁금했다. 깊은 산중의 능선에서 여태껏 이정표 하나 못 보았으니 어디쯤인지 알 수가 없었다. 평상시에는 4~5시간 걸리는 코스인데 여기까지도 6시간 반이 걸렸다. 거의 다 온 듯싶어 두리번거리며 무엇이든 찾았다. 그런데 119 표지판이 보였다.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신선암이라니? 그러면 아직도 갈 길이 멀었다는 것 아닌가? 하는 수 없었다. 전진하는 방법 이외는 아무런 묘책이 없었다. 다시 힘을 내어 줄도 없고 잡을 곳도 없는 높은 바윗길로 서로 밀어주고 당겨주며 기어올랐다. 그런 길로 1시간 30여 분을 가고 나서야 우리가 하산할 지점, 깃대봉 갈림길인 삼거리가 나왔다. 여기서 모두 모여 인원을 파악하고는 잠시 쉬었다가 하산하기 시작했다. 조금 전과는 전혀 다른 길로 경사가 심하지만, 나무가 많아 붙잡을 곳이 있어 빨리 내려올 수가 있었다. 나무 사이로 넓은 신작로가 보이고 기와지붕이 보이는데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이젠 살았구나. 기어코 살아왔구나. 조령 3관문이 보이자 발이 더욱더 빨라졌다. 드디어 악마의 소굴에서 벗어났다. 내려오니 조용하고 한적한 조령3 관문이 우릴 따뜻하게 맞아 주었다. 약수터의 얼음물을 한 바가지 씩 떠서 단숨에 마시고는 아이젠을 벗고 그곳을 빠져나왔다. 아직도 버스 주차장까지 2km라고 써놓은 이정표를 보고 우린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때서야 우리는 서로 마주 보고 웃으며 얘기도 나누면서 40분을 와서야 우리 버스가 있는 주차장에 도착했다.
그동안 산행 경험으로 보아 고생은 각오했지만 웬만한 산은 자신했었다. 그러나 3월인데도 땅이 그렇게 꽁꽁 얼었을 줄 누가 알겠는가. 그런 일은 산행 경력 20여 년이 다 되었지만 처음 있는 일로 좋기만 하던 산이 이렇게 무서울 때도 있다는 것을 느끼며 반성했다.
나는 이번 등반 경험을 통해 우리 인간에게 분명히 초능력이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어떻게 9시간 동안 위험한 산행을 하면서 지치지 않고 힘이 솟아났는지, 그리고 그 많은 위험 코스에서 아무 사고 없이 무사했는지, ‘산신이 있긴 하구나. 누가 도와주지 않고서야 이렇게 모두 무사할 수가 있겠는가.’ 생각되었다. 무엇보다 회원들한테 미안했다. 산이 나에게 앞으로 조심하라고 경각심을 준 것 같았다.
아무튼 고생은 했지만 큰 사고 없이 무사히 내려와서 다행으로 생각하며, 원망스러운 눈빛 하나 없는 회원들한테 감사하고 미안한 마음으로 영원히 잊을 수 없는 날이었다.
※충남 부여 출생, ≪문학세계≫(2001) 시 등단, 수필집 산의 향기를 찾아서, 시집 술래잡기, 울림으로 다가온 자연의 노래 등,
대전문인협회 회원, 대전국제펜문학 회원, ≪꿈과 두레박≫ 회원, (사)한국사진작가협회 회원, bak0799@hanmail.net
매봉산 임도 걷기
조 영 숙
매봉산은 노은 3지구 군수사령부에 인접한 산이다.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 후문에서 불과 2백 미터 정도 걸으면 산으로 올라갈 수 있다. 집 주변에는 지족산도 있어 때로 이 산을 오르기도 한다. 집 근처에 부담 없이 오를 수 있는 산이 있어 좋다. 10여 분 언덕을 오르고 잠시 내리막길을 가면 매봉산 임도를 만난다. 임도의 시작과 끝은 양쪽에 문을 닫고 출입통제 표지가 적혀 있는 편도 약 1킬로미터의 길이다. 임도의 막힌 지점은 신선봉으로 오르는 길로 연결된다. 나의 산책은 집으로부터 임도 끝자락까지 왕복하는 것이다. 천천히 걸으면 1시간 남짓 되는 거리다. 언덕과 내리막이 반복되면서 산책을 마치고 나면 약간의 땀이 나는 정도로 운동과 사색에 도움이 된다. 아내와 동행하기도 하고 혼자 걷기도 한다. 아마 3월과 4월 초순 동안은 일주일에 5번 정도는 임도를 걷는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준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한 시간적 여유가 새로운 일상의 루틴이 된 것이다.
새해를 맞으며 올해는 무엇을 할 것인가? 정말 행복하게 사는 길은 무엇일까? 새롭게 관심을 가진 것이 ‘일상의 삶에 변화를 주면 삶이 훨씬 생기 있어진다’는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그리고 꼭 해야 할 일은 ‘그냥 하라. 아무 생각 없이.’ 또 다른 조언은 ‘햇빛 속을 걸으라. 좋은 기운이 차오른다.’ 이는 숙면을 취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한다. 그런데 외부적 활동이 중단되니 그 어느 때보다 시간의 부자가 되었다. 이렇게 하여 매봉산 임도를 걷는 것이 올 봄 내 일상의 루틴이 되었다. 일상의 루틴이 되면 아무 생각 없이 그 일을 쉽게 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그렇게 좋은 습관을 늘리고 나쁜 습관을 줄여 나가면 삶의 질이 좋아질 것이다. 습관들이기는 21일을 계속하면 더 쉬워진다고 한다. 또 다른 주장은 66일이 지나면 아무 생각 없이 행할 수 있다고 말한다. 자꾸 하다 보면 쉬워지는 것은 자명하다. 실수를 고치는 것이나 목표를 위해 노력하는 것 모두 ‘지금부터 시작이야’ 하는 마음으로 포기하지 않고 도전하고 시도하면 나중에는 쉬워질 것이다. 브로니 웨어(Bronnie Ware)는 죽기 전에 후회하는 다섯 가지 중 하나로 ‘좀 더 모험적이고 변화 있는 삶을 살지 못한 것’을 들었다. 올해 내 삶의 변화 중 하나가 매봉산 임도 걷기다. 다른 변화로는 영화보기, 유튜브로 강의 듣기 등이다. 코로나 바이러스 덕분에 매봉산 임도 걷기, 유튜브로 영화보기와 강의 듣기를 쉽게 습관으로 만들 수 있었다. 지금까지 익숙하지 않던 일들을 일상의 루틴으로 만들면서 외부 활동이 제한되지만 삶이 활력을 잃지 않고 재미있다. 매봉산 임도를 3월 처음 걸을 때는 마른 나뭇가지 사이로 숲이 훤히 보이더니 어느 순간에는 산수유와 개나리가 노란 꽃을 피우고, 목련 나무가 탐스러운 하얀 꽃봉오리를 드러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진달래꽃과 벚꽃이. 여기 피고 저기 피더니 날이 갈수록 꽃무리가 늘어났다. 이렇게 꽃 피는 모습을 보니 조동화 님의 시「나 하나 꽃 피어」의 시구가 떠오른다.
나 하나 꽃 피어/풀밭이 달라지겠느냐고/말하지 말아라//네가 꽃 피고 나도 꽃 피면/결국 풀밭이 온통/꽃밭이 되는 것 아니겠느냐
매봉산 임도는 진입하기가 집에서 가까워서 좋다. 길은 오르막이 있고 내리막이 있어 체력이 다소 부족해도 부담이 없다. 아무리 좋아도 산 입구까지 가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면 아무래도 일상의 루틴으로 만들기는 쉽지 않다. 먼저 만나는 언덕 산길은 바닥이 흙길이고, 돌들도 길에 섞여 있고, 주변에는 베어낸 나무나 죽은 나무의 잔해가 곳곳에 보인다. 그래도 그렇게 흉하게 보이지 않는다. 산 속이나 임도를 걸으면 때로는 정말 고요하고, 때로는 새들의 지저귐이 활력을 준다. 어느 때는 바람이 불고, 어느 곳은 바람이 쉰다.
햇빛이 비치는가 하면 잠시 후 그늘이 기다린다. 시멘트 바닥이 있고, 잔디가 있고, 잔돌이 있어 바닥의 조건이 바뀐다. 마른 나무들이 있고 소나무 같은 상록수도 있다. 임도는 한쪽은 높지 않은 비탈진 산이 있고 다른 한쪽은 낮은 비탈진 산이 있다. 걷기를 할 때 좋은 환경은 한쪽은 산이고 다른 한쪽은 물이 있는 곳이다. 물은 때로 호수가 되기도 하고, 강이 되기도 하고, 바다가 되기도 한다. 무엇보다 아름다운 것은 산이 아름답고 물이 아름다운 걷기 길이다. 괴산 산막이 옛길이나 금오도 비렁길이 기억에 남는다.
매봉산 임도를 걸으며 하늘을 보면 어떤 날은 눈이 부시도록 푸르기도 하고, 다른 날은 비를 품은 구름이 드리워 어둡기도 하다. 4월도 초순이 끝나갈 무렵 길에 꽃잎이 떨어지면, 길은 꽃잎으로 물든다. 산자락을 오를 때 벚꽃을 보면서 벚꽃 잎을 지르밟는 호사를 누린다. 아마 하루 이틀 후엔 눈처럼 날리는 벚꽃 속을 거닐 것이다. 메말랐던 산하는 꽃잎이 피었듯이 잎이 나기 시작하여 연두색 옷을 입는다.
천양희 시인의 시 「너에게 쓴다」를 생각해 본다.
꽃이 피었다고 너에게 쓰고/꽃이 졌다고 너에게 쓴다//너에게 쓴 마음이/벌써 길이 되었다/길 위에서 신발 하나 먼저 다 닳았다
나의 봄철 매봉산 임도를 걷는 모습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보내는 엽서에 이 시를 사용해도 좋을 듯하다. 이 길을 힘이 다할 때까지 걸을 수 있다면 신발이 닳고, 내 생이 될 것이다. 임도를 걸으며 시야가 트여 높은 봉우리가 눈에 들어온다. 산 중간에 멀리 꽃길이 보인다. 바닥으로는 민들레가 피고, 잔디가 푸릇푸릇 올라오고 쑥들이 얼굴을 내민다. 어느 날 아내와 함께 쑥을 캐어 쑥국을 먹으며 봄의 향기를 몸으로 느낀다. 같은 길을 걷지만 날마다 풍경이 달라진다. 새로운 건물이 지어지는 모습을 볼 수 있듯이 봄이 오는 모습을 직접 볼 수 있다. 오늘 한 나무의 잎이 피어 신기했는데 다음 날은 다른 나무들이 잎을 피우고, 그 다음 날에는 더 많은 나무들이 잎을 피워 메마른 산이 연두색 옷으로 갈아입는데 며칠이 걸리지 않는다. 마치 밀물이 밀려오듯 산은 연두로 덮인다. 메마른 우리들의 마음도 봄처럼 싱그러움으로 차오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가을이 되면 아름다운 단풍으로 물들고, 마침내는 벌거벗은 몸이 되겠지.
코로나 바이러스로 거리의 풍경이 적막하다, 사회적 거리두기 해제의 소식이 오면 잎이 피어나듯, 그렇게 우리의 일상이 회복되리라 기대해 본다. 매봉산 임도걷기는 코로나 바이러스로 움츠린 내 삶의 한 줄기 기쁨이다.
부족의 은혜
‘부족의 은혜’라니 의아해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부족은 하나의 현상이다. 부족은 그 자체로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니다. 부족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관점에 따라 긍정적일 수도 있고 부정적일 수도 있다. 과유불급이란 말이 있다. 지나치면 부족함만 못하다는 말이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부족을 부정적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사람들은 다다익선. 많을수록 좋다는 생각을 한다. 정말 그런 것일까? 우리 삶에서 중요한 요소인 돈과 시간을 생각해보자. 돈을 선한 도구로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람에게는 돈은 많을수록 유익하다. 돈이 부족해서 어려움을 겪는 사람이 있지만 돈이 많아서 어려움을 겪는 사람도 적지 않다. 돈이 많은 사람은 처음에는 그것이 기쁨을 주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돈 많음은 일상이 되어 더 이상 그에게 기쁨을 주지 못한다. 돈이 부족한 사람에게 돈이 생기면 그것은 일상에 새로운 기쁨을 준다. 고난 가운데 기쁨을 맛보는 것이다. 시간도 일을 하기 위해서, 공부를 하기 위해서 부족한 가운데 우리는 열심히, 의미 있게 시간을 사용한다. 하지만 시간이 너무 많아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되면 무료해지고 게을러진다. 이렇듯 현상에는 양면성이 있다. 현상을 보이는 것만 보지 않고 조금 더 깊이 생각하면,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 있다면 부족의 은혜를 누릴 수 있다. 현재 꽃을 보면서 즐거움을 누리지만 장차 소멸되어 흙이 되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작은 씨앗을 보면서 푸른 산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지금은 어렵고 미약해도 장차 풍요롭고 강한 모습을 볼 수 있어야 한다. 눈 앞에 벌어지는 현상에 일희일비하지 않으며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지금의 부족이 영원한 부족이 아니다. 부족 덕분에 채우려는 열망이 생긴다. 그것이 삶의 긍정적인 에너지로 작용할 수 있다. 모든 것이 주어진 사람에게 감사와 간절함을 찾기는 쉽지 않다. 필자는 부족의 장점, 부족이 주는 유익, 즉 부족의 은혜를 생각하며 부족하기 때문에 실패감을 맛보는 것이 아니라 부족 덕분에 감사하고 행복할 수 있다고 말하고 싶다.
'경영의 신'으로 불린 일본의 전설적인 기업인 마쓰시타 고노스케(松下幸之助는 숱한 역경을 극복하고 94세까지 살면서 수많은 성공 신화를 이루었다. 그는 자신의 인생승리 비결을 한마디로 '덕분에' 라고 고백했다
"저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덕분에 어릴 때부터 갖가지 힘든 일을 하며 세상살이에 필요한 경험을 쌓았습니다. 저는 허약한 아이였던 덕분에 운동을 시작해 건강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학교를 제대로 마치지 못했던 덕분에 만나는 모든 사람이 제 선생이어서 모르면 묻고 배우면서 익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실패를 부족 때문이라고 변명하고 원망하고 있지만 그는 오히려 부족이 자신의 성공을 이끈 비결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부족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부족 ‘덕분에’라고 분명하게 말했다. 여러 가지 면에서 부족한 나에게 위로가 되고 용기를 준다.
심리학자 아들러(Alfred Adler)는 사람은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한 열망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열등감의 감옥에 갇혀 살면 삶이 힘들지만 그것을 극복해 갈 수 있다면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 우리가 품는 비전은 현재의 부족을 받아들이는 데서 시작된다. 샬롬 김은 그의 저서 『비전의 서: 비전 있어?』에서 비전은 ‘존재의 목적지이며, 미래에 완성될 이상적 모습이고, 사명은 존재의 목적이며 비전을 완성하기 위하여 해야 할 행동’이라고 정의했다. 성경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자 않는 것들의 증거니(히브리서 11장 1절)라고 말한다. 즉 부족을 채운 이상적인 모습, 목적지가 비전이요, 사명은 그것을 이루기 위한, 목적지에 가는 행동이라는 말이다.
니체(Friedrich Nietzsche)는 “고난이 너를 죽이지 못하면 너는 더 강해진다.”고 말했다. 부족에 주저앉아 일어서지 못하면 실패한 인생이지만 부족을 인정하고 채워 나가려 노력한다면 얼마든지 우리는 성공적인 인생,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다. 부족한 사람은 교만하지 않고 겸손해질 수밖에 없다.
돈이 부족한가? 돈을 벌기 위해 시간과 에너지를 사용하며 자신의 잠재력을 사용할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 사람들은 3D업종을 외면하는데 가난한 외국인들은 그런 일을 감당한다. 우리도 부족하고 가난할 때는 그렇게 억척스럽게 일했다. 그러나 우리나라 많은 사람들은 부족이 주는 힘을 이미 잃었다. 배움이 부족한가? 덕분에 시간을 아껴 배움의 열망을 가질 수 있다. 건강이 부족한가? 건강을 위해 먹는 것을 골고루 챙겨 먹고, 운동하고, 휴식을 취하게 될 것이다. 시간이 부족한가? 정말 중요하고 해야 할 일을 우선순위를 정하여 하게 될 것이다. 이렇듯 부족을 남 탓이나 원망하지 말고 부족이 주는 유익을 생각할 수 있다면 행복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부족에서 행복을 누릴 수 있다면 풍족함에서는 더욱 즐거움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지난 날 자신의 부족과 약함을 기억할 수 있다면. 지금의 풍족함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 빈손으로 이 땅에 왔다. 성경 빌립보서에서 바울은 이렇게 고백한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애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립보서 4장 11∼12절)” 일체의 비결은 부족을 견딜 수 있는 힘이 있고, 풍부함에서 교만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이 있다는 말이다.
에릭슨(Erik Homburger Erikson)은 노년기의 심리발달 과제로 ‘통합’을 말한다. 노년기에 접어들면 부족이나 풍부를 경험하고, 자신의 약함과 강함을 모두 수용하고 조화를 시킬 수 있어야 한다. 공자는 “나이 70을 무슨 일을 해도 법규에 구애됨이 없다”고 했다. 지난 날 부족이나 풍부나, 모두 내 삶인 것을 받아들이고 황혼기에 부족이 주는 은혜를 누리고 싶다. 바다가 깨끗한 물이나 더러운 물을 가리지 않고 받아들이면서 스스로 정화하는 것처럼, 나도 모든 것을 수용하며 스스로를 정화하며 마지막을 맞이하고 싶다. 부족이나 풍부나 실패나 성공 모두 하나님의 은혜다. 아무 것도 아닌 것이 이 땅에 생명으로 존재하다 아무 것도 아니게 사라지는 것도 감사하지 않은가. 믿음으로 천국에 대한 소망을 품는 것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다.
* 강원도 강릉 출생, 경희대 신문방송학과 대학원 수료, 대전시민대학 ‘웰다잉’ 강사, ysc1951@naver.com
추억을 주문했습니다!
이 경 숙
무료한 오후 습관적으로 리모컨을 누르다 홈쇼핑 채널에서 수리취떡을 팔고 있는 것을 보았다. 요즘에도 취떡을 파는 곳이 있구나 하고 한참 들여다보고 있자니 참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맛이 어제 먹은 듯 되살아났다. 쑥떡보다 색이 더 검고 짙은 녹색이지만 향은 쑥보다 강하지 않고 씹을수록 고소한 맛이 나던 수리취떡, 내게 그 떡은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어릴 적 수리취떡은 나의 생일 떡이었다. 단오 다음날에 태어 난 나를 어머니는 생일을 잘 타고 태어나서 해마다 떡을 얻어먹는다고 하시며 단옷날을 핑계로 풍족하지 못한 살림에도 늘 수리취떡을 해주시던 어머니의 사랑이 담긴 떡이었다.
어린 시절 고향에서는 단옷날이 설날이나 추석 못지않게 큰 명절이었다. 모내기나 밭작물 등을 어느 정도 심어놓고 더위가 오기 전 잠시 짬을 내어 즐기던 시간이었겠지만 어린 우리들에게는 제일 재미있는 그네를 매어주시는 날이었기 때문에 더 없이 즐거운 날이었다. 마을 언덕위에 커다란 소나무 두 그루 사이에 새끼를 겹겹이 꼬아서 긴 그네를 매어주시면 우리들은 종일 밥도 먹지 않고 그네를 탔다. 친구랑 쌍그네를 타면서 지르던 환호가 어둠을 타고 저 아랫마을로 번질 때까지 타곤 했다. 간혹 어른들도 한복을 곱게 입고 그네를 타시곤 했는데 커다란 어른 한복을 어설프게 몰래 입고 그네를 타다가 치마가 저 멀리 날아가 버리는 웃지 못 할 일도 있었다.
수리취는 나물취에 비해 잎이 크고 넓적하며 두껍다. 잎의 뒷면에 솜처럼 하얀 막 같은 것이 있는 것이 나물취와 달랐다. 집 가까운 곳 보다는 깊은 산 속에서 주로 나서 할머니가 한 망태기를 뜯어 오시면 줄기를 잘라내고 잎을 가마솥에서 데쳐내어 물기를 꼭 짠다. 그리고 찹쌀을 시루에 찐 다음 절구에 데친 수리취와 함께 넣고 떡을 쳤다. 힘들게 물을 묻혀 뒤집어가며 고루 친 다음 들기름을 발라 주면 초록색의 아주 곱고 맛난 고소한 떡이 함지박 한가득 만들어졌다. 가끔은 콩고물에 묻혀서 먹곤 했지만 내가 제일 좋아하는 맛은 들기름을 두른 프라이팬에 노릇하게 구운 맛을 제일 좋아했다. 짙은 녹색의 떡이 겉은 바삭하게 구워지고 속은 쫄깃한 것이 참 고소해서 화로불 앞에서 구워지길 기다리며 침을 삼키곤 했다. 먹을 것이 귀하던 시절에 떡은 사치스러운 음식이었다. 끼니도 잇기 어려운 친구들도 많았던 시절에 떡은 일 년에 몇 번 큰마음을 먹어야하는 특별식이었다. 그러나 할머니와 어머니는 단오를 핑계삼이 매년 생일 떡을 정성스레 해주시곤 했다. 그 때는 당연한 것처럼 의례 때 되면 먹는 음식이려니 했는데 집을 떠나 객지생활하면서 어느 순간 잊힌 음식이 되었다.
이제는 나를 위해 수리취를 뜯어다 떡을 해 주실 할머니도 어머니도 안계시니 스스로 나에게 선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먹을 것이 풍요로워진 요즘에는 떡보다 빵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한 동안 좋아하지도 않았던 떡이지만 추억의 맛이 그리워 인터넷으로 찾아 주문을 하였다. 난데없는 떡을 보고 남편은 쑥떡이냐고 하고, 아들은 모시 떡이냐고 묻는다. 평소 떡을 좋아하지도 않고 먹어 본 적도 없는 색깔만 비슷한 이름들의 떡들이 이제 더 친근한 것이 되었으니 당연하다. 고급스럽게 빚어진 정사각형의 떡은 하나하나 비닐로 낱개 포장 되어서 예쁜 상자에 담겨왔다. 참 오랜만에 수리취떡을 하나 먹어 본다. 방앗간에서 기계로 만든 수리취 인절미는 쫀득하면서도 부드럽다. 엄마가 해주시던 가끔은 밥알이 씹히는 덜 찧어진 절구의 맛이 아니고 취 잎도 덜 섞여 희끗희끗한 투박한 떡이 주는 정겨운 맛은 없었지만 오랜만에 옛 추억을 먹어본다. 손녀 사랑이 유별났던 할머니의 망태기도 생각나고 쇠 절구통에 힘들게 떡을 만드시던 어머니와의 추억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지며 목이 메었다.
결혼하고 아이를 키우면서 난 명절 음식이나 절기 음식을 가능하면 꼬박꼬박 만들어 식탁에 올리곤 했다. 정월대보름날 오곡밥에 갖가지 나물을 만들기 위해 봄이면 나물을 뜯어 묵나물을 말리고, 가을볕에 갈무리도 해가며 여러 가지 나물을 준비했다. 추석이면 삼색 송편을 한 말씩 빚어 형제들과 나누기도 했다. 아이가 좋아하지 않는데도 동짓날은 새알심을 만들어 나이 숫자대로 먹으라고 성화를 부리기도 했다. 누가 시키지도 않는데 기꺼이 그렇게 힘들게 하는 것은 가족들에게 맛난 것을 만들어 먹게 하기보다는 아마 내 마음속에 추억의 음식들을 만들면서 어릴 적 내 그리움을 달래고 싶어서였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오랜만에 수리취떡을 먹으면서 들었다. 그러나 내가 만든 모든 추억의 음식들에서는 옛날 맛이 나질 않는다. 그것은 이제 그 보다 더 맛나고 고급스런 음식들에게 길들여진 입맛 탓도 있겠지만 나를 위한 할머니의 사랑도 어머니의 정성도 들어있질 않아서일 것이다. 먼 훗날 내 아이는 엄마가 해주던 음식보다도 어느 고급스러운 식당에서 먹었던 한 끼의 외식을 더 기억할지도 모른다. 나의 노력으로 한 가지라도 추억의 음식이 남아 나처럼 추억해준다면 그것으로 족할 일이겠지만....... 나이가 들어가면서 입맛도 바뀌어 새로운 음식보다는 어릴 적 물리도록 먹던 음식들이 더 좋아진다. 입맛도 부모님을 닮아 가는가 보다. 오늘따라 손녀 사랑 유난했던 할머니도 그립고 어머니의 음식들도 참 그리운 날이다. 추억의 맛을 주문하듯 그분들의 사랑도 배달 받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가슴속 사무치는 그리움으로 애써 달래보는 날이다.
※ 충북 보은 출생, 계간 ≪수필춘추≫ 등단, 한국문인협회 회원, ≪상상의 힘≫ 작품상(2009), 한국농촌문학상(2014) 수상, asysook@hanmail.net
외할머니가 들려준 사주팔자 이야기
진 재 훈
어느 날 꿈속에서 돌아가신 외할머니를 만났다. 내가 당신에게는 첫 외손주라서 그랬는지 한 살 아래인 친 손주보다 더 예뻐해 주신 것 같다. 외할머니께서는 어디서 들으셨는지 사주팔자에 ‘너는 여복이 많다’고 얘기하시던 기억이 난다. 어렸을 때는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잘 몰랐는데 지나온 삶을 되돌아보니 조금은 맞는 것 같기도 하다.
명리학(命理學)에서는 태어날 때 이미 자기 사주팔자에 인생의 길흉화복이 들어 있다고 얘기한다. 그래서인지 외할머니 말씀대로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항상 어려운 고비 때마다 나를 도와준 귀인(貴人)이 있었던 것 같다.
신자(信子)는 사춘기라는 질풍노도의 시기에 서로 우정을 쌓은 이웃집 친구다. 고등학교 때 우연히 뚝방 길에서 만난 뒤 하얀 교복 칼라에 단정히 걸어오는 그녀 모습에 반해 혼자 가슴 설레며 끙끙 앓기도 했던 기억이 있다.
나는 대학 진학 때문에 서울로 떠났고, 그녀는 졸업 후 은행에 취직해 직장생활을 하게 되었다. 한번은 겨울방학 때 단둘이 야간 기차여행을 떠난 적이 있다. 차창 밖으로 휘날리는 눈꽃 송이를 바라보며 마주 앉아 도란도란 정담을 나누던 장면이 눈에 선하다. 서울 가는 기차시간이 맞지 않아 역 대합실에서 환승 열차를 기다려야 했는데 너무 추워 인근 여관으로 자리를 옮겨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운 기억도 난다.
몇 년 뒤, 나는 휴학을 하고 군대를 가게 되었고 그녀가 조금씩 내 기억 속에서 사라져 갔다. 제대 후 그녀가 성직에 몸을 담게 됐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청소년기에 방황하던 영혼을 잘 다독거려 주고 잊지 못할 아름다운 추억도 선물해 준 고마운 인연이었던 것 같다.
의정(義貞)이라는 친구는 군에 입대하기 위해 휴학하고 입영날짜를 기다리던 중 우연히 시내버스에서 만났다. 그녀는 군대생활 내내 나에게 위문편지를 보내줬고, 특히 힘들었던 하사관학교 훈련병 시절 꽃 편지로 인해 동기들에게 부러움도 많이 받게 해주었다. 훈련 중 휴식시간에는 그날 배달된 편지를 나눠주는데 훈련병들에게는 그 시간이 제일 기다려진다. 항상 편지가 왔을까 하는 기대감 속에서 하루하루 고된 훈련을 버텼던 것 같다. 6개월 동안의 힘든 훈련은 물론 군복무까지도 잘 끝낼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보내준 위문편지 덕이 아닌가 한다. 제대 후까지 고무신 거꾸로 신지 않고 기다려 줬으니 그녀는 의리 있는 귀인이다. 지금도 군복 입은 군인들을 보면 그 때 그 시절, 그녀의 꽃 편지가 문뜩 생각이 난다.
인애(仁愛)는 군대 제대 후 복학한 뒤 치열하게 내 진로를 고민하던 4학년 여름방학 때 만났다. 고시공부를 한다고 독한 마음을 먹고 대전인근 시골 외삼촌댁에서 두문불출 공부에 전념하고 있었는데, 하루는 외할머니께서 한걸음에 달려오셔서 대학 친구들이 대전역에서 나를 기다린다는 소식을 전해 주셨다. 대학 동기들은 서울 모 대학병원 산악부 여직원들과 계룡산을 등반하기로 하고 내려왔다고 했다. 그 중 한명이 계룡산에서 1박 야영을 하고 난 다음날 더럽혀진 내 셔츠를 빨아준 인연으로 가까워졌다.
나는 고시 공부에 매달렸으나 계속 낙방을 하게 되었고, 결국 아버지와 진로문제로 이견이 생겨 집을 나오는 상황까지 오게 되었다. 갈 곳 없어 막막하던 차에 그녀와 야간열차를 타고 무작정 길을 떠나 산사에서 잠시 머리를 식히려 했는데, 다음날 아침부터 내린 장대비로 인해 여관에 꼼짝 없이 발이 묶이는 처지가 되었다. 여관주인이 심심하면 보라고 가지고 온 신문에 공사 직원 채용 공고를 보고 별 생각 없이 응시했는데 최종합격이 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평생직장이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내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된 사건이 바로 그 곳에서 일어났던 것이다.
그녀는 내 삶의 진로를 찾기 위해 암울했던 시기에 기꺼이 동행을 해주었고, 지금도 내 인생 반려자로 살아가고 있으니 이 보다 더한 귀인이 어디 있을까. 지금 생각 해 보니 외할머니께서 평생 배필을 맺어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예지(禮)芝)는 직장에서 승진문제로 고민하던 시기에 만났다. 입사 동기들은 과장 승진을 해서 나가고, 후배들은 밑에서 치고 올라오니 해가 갈수록 신경이 날카로워지고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하루는 숙직 근무 중 초등학교 동창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그녀는 내가 군대 갈 때 동생과 함께 우리 집에 와서 송별파티에 참석했기에 우리 시골집에 대해서도 잘 안다며 친구들에게 수소문해서 나를 찾았다 했다. 그 뒤로 이야기를 주고받다 보니 대화가 통하고 진지하며 사려 깊은 점이 마음에 들었다. 그 당시 나는 승진을 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영업실적이 있어야 했는데 쉬운 일이 아니었기에 그런 사정을 얘기하니 두말 않고 발 벗고 나서 즉시 내 고민을 해결해 주었다. 그 덕인지 몰라도 이듬해 나는 원하던 대로 승진을 하게 되었고, 큰 고민거리를 해결하게 되었으니 나로서는 행운을 가져다 준 고마운 친구로 기억되지 않을 수 없다.
이렇듯 어려울 때마다 내 주변에는 늘 도움을 주는 손길이 있었기에 외할머니께서 하신 말씀대로 살아온 것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앞으로 인생 후반부에는 또 어떤 인연이 내게 다가와 삶에 영향을 주게 될지 궁금해지기도 한다. 하지만 사주팔자대로 정해진 운명을 따라가기 보다는, 내 운명을 내 스스로 개척해 나가는 사람이 되고 싶다.
‘좋은 사람을 만나려 거든, 내가 먼저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처럼.
※ 충북 청주 출생 , 금강불교대 수료, jhj43211@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