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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시사뉴스에서는 늘 독도문제를 다뤄왔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중점으로 알찬 내용을 독자여러분께 바르게 알리기 위해서 노력 하던 중 이번에 전 국민에게 애국심을 심기위해 새롭게 말하고자 합니다. 앞으로 ‘이런사람’을 통해서 애국자(독립운동가)를 소개해 나갈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큰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특별기획 독립운동가 일곱 번째 이야기
독립운동가 안중근 의사
출생 - 사망
1879. 9. 2. ~ 1910. 3. 26.
안중근(安重根)은 1879년 9월 2일 황해도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순흥이고, 아명은 응칠(應七)이며, 천주교 세례명은 토마스(도마)이다.
안중근의 집안은 전형적인 향반(鄕班) 지주였다. 즉, 고려말 대유학자 안향(安珦)의 후예로 조부 안인수(安仁壽)는 진해현감, 부친 안태훈(安泰勳)은 소과에 합격한 진사로 수천석 지기의 대지주였던 것이다.
안중근은 8세 때인 1886년부터 약 8~9년 동안 조부의 훈도로 유교경전 등 한학과 조선역사를 배우며 민족의식을 키웠다. 또한 부친의 영향으로 개화적 사고를 지니게 되었다. 그리고 말타기와 활쏘기 등 무예를 연마하며 호연지기를 길렀고, 숙부와 포수꾼들로부터 사격술을 익혀 명사수로 이름을 날렸다. 그리하여 안중근은 근대적 사고와 숭무적 기상을 지닌 민족 청년으로 성장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역사의 현장에 뛰어들었던 것이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이 발생하자 안중근의 부친은 군대를 조직하여 반동학군 투쟁에 나섰다. 그것은 오래 전부터 개화파와 연계를 맺고 있던 안중근의 부친이 개화정책을 펴던 갑오내각을 지키기 위한 것으로 생각된다. 안중근도 16세의 나이로 부친이 조직한 군대에 참여하여 선봉장으로 활약하면서 처음으로 역사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1904년 2월 러일전쟁 발발과 함께 민족적 위기감을 느낀 안중근은 각국의 역사에도 관심을 가지며, 신문 잡지 등의 탐독을 통하여 국제 정세에 대한 안목을 넓혀 갔다. 그리고 1905년 11월 [을사늑약] 체결로 망국의 상황이 도래하자 구국의 방책을 도모하기 위해 중국 상해로 건너갔다. 상해에서 안중근은 산동(山東) 지방의 한인들을 모아 구국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천주교 관계자들을 통해 일제의 침략 실상을 널리 알리는 외교 방책으로 국권회복을 도모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상해 지역의 한인 유력자들과 외국인 신부들의 비협조, 그리고 1906년 1월 부친의 별세로 말미암아 뜻을 펴지 못한 채 귀국하고 말았다.
안중근은 1907년 북간도를 거쳐 러시아 연해주로 망명하였다. 이는 국외에서 의병부대를 조직하여 독립전쟁전략을 구사하기 위한 것이었다.
1908년 6월 안중근은 의병부대를 이끌고 제1차 국내진공작전을 펼쳤다. 함경북도 경흥군 노면 상리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수비대를 급습한 것이다.
안중근은 1909년 2월 의병 재기를 도모하면서 동지 11명과 함께 동의단지회를 조직하는 한편 단지를 하고 구국에 헌신할 것을 맹세하였다.
1909년 9월 안중근은 대동공보사에 들렀다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만주를 시찰하러 온다는 소식을 들었다. 안중근은 한국 침략의 원흉이며 동양평화의 파괴자인 이토가 이제 만주 침략의 첫 발을 내딛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를 묵과할 수는 없었다. 국권회복을 위해서도, 동양평화를 위해서도 그냥 보아 넘길 수는 없었던 것이다.
"여러 해 소원한 목적을 이루게 되다니. 늙은 도둑이 내 손에서 끝나는구나"하며 남몰래 기뻐하였다. 그리고 지체 없이 이토를 포살하기 위한 구체적인 준비 작업을 진행시켰다.
이때 큰 도움을 준 인물들은 대동공보사의 인사들이었다. 최재형, 유진률(兪鎭律), 이강(李剛), 우덕순(禹德淳) 등이 그들이다. 그중 대동공보사 집금회계원인 우덕순은 안중근과 뜻을 같이하기로 자원하였다. 이들의 지원 아래 안중근은 이토를 포살할 목적으로 10월 21일 우덕순과 함께 블라디보스톡을 출발하여 하얼빈으로 향하였다.
도중에 안중근 일행은 중국과 러시아의 국경지대인 포그라니치나야(수분하)에서 유동하(劉東夏)를 가담시키고 하얼빈에 도착한 뒤, 대동공보사 하얼빈 지국장 김형재(金衡在)의 소개로 조도선(曺道先)을 거사 준비에 합류시켰다. 그리하여 안중근을 중심으로 이토 포살 계획은 주도면밀하게 추진되었다. 거사 지역 사이의 연락과 통역은 유동하가 담당하게 하였다. 그러던 중 유동하로부터 10월 25일이나 26일 아침에 이토가 하얼빈에 도착할 것이라는 연락이 왔다. 이에 안중근은 10월 24일 우덕순과 조도선을 채가구에 배치한 뒤 하얼빈으로 돌아와 이토를 기다렸다. 그런데 채가구에서 우덕순과 조도선이 이토를 포살하려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그것은 이들이 투숙한 역구내의 여인숙을 밖에서 러시아 경비병들이 잠가 버렸기 때문이다. 이제 남은 것은 안중근의 거사 계획뿐이었다.
안중근은 10월 26일 새벽 하얼빈역으로 나가 러시아 병사들의 경비망을 교묘히 뚫고 역구내 찻집에서 이토의 도착을 기다렸다. 드디어 오전 9시 이토가 탄 특별열차가 하얼빈역에 도착하였다. 이토는 환영나온 러시아의 재무대신 코코프초프와 열차 안에서 약 30분간 회담를 갖고, 9시 30분 경 코코프초프의 인도로 역구내에 도열한 러시아 의장대를 사열하였다. 그리고 다시 귀빈 열차 쪽으로 향하여 가기 시작하였다.
바로 이때 의장대의 후방에서 은인자중하고 있던 안중근은 앞으로 뛰어나가며 브라우닝 권총으로 이토에게 3발의 총탄을 명중시키자 이토는 쓰러졌다. 이어서 안중근은 가장 의젓해 보이는 일본인들을 향하여 3발의 총탄을 더 발사하였다. 이는 혹시 자신이 이토를 오인했을 경우를 예상한 행동이었지, 그 수행원들을 처단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이 총격으로 이토를 수행하던 비서관과 하얼빈 총영사, 만주철도 이사 등 일본인 관리들이 총탄을 맞아 중경상을 입었다. 당시 러시아군에 의해 체포될 때 안중근은 러시아말로 "코레아 우라(대한 만세)"를 연호하였다고 한다.
안중근의 총탄 세례를 받은 이토는 열차로 옮겨져 응급처치를 받았으나 결국 절명하였다. 그리하여 한국 침략의 원흉이자 동양평화의 파괴자인 이토는 안중근에 의해 단죄되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고 말았다.
안중근은 하얼빈의 일본영사관을 거쳐 여순에 있던 일본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에 송치되었다. 그리고 여기에서 1910년 2월 7일부터 14일에 이르기까지 6회에 걸쳐 재판을 받았다. 그러나 이 재판은 죽기를 각오한 안중근조차도 "판사도 일본인, 검사도 일본인, 변호사도 일본인, 통역관도 일본인, 방청인도 일본인. 이야말로 벙어리 연설회냐 귀머거리 방청이냐. 이러한 때에 설명해서 무엇하랴"고 불만을 토로할 정도로 일본인들만에 의해 형식적으로 진행되었고, 그 결과는 뻔한 것이었다. 2월 14일 공판에서 안중근은 일제의 각본대로 사형을 언도 받았다.
"사형이 되거든 당당하게 죽음을 택해서 속히 하느님 앞으로 가라"는 모친의 말에 따라 안중근은 이후 공소도 포기한 채, 여순감옥에서 『안응칠역사』와 『동양평화론』의 저술에만 심혈을 쏟았다. 안중근은 1910년 3월 26일 여순감옥에서 순국하고 말았다.
안중근 의사의 애국정신은 너무나 멋지고 고귀하다. 어떻게 사람이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않겠는가. 그러나 사람으로 태어나 조국을 잃은 이 나라에서 내가 무엇을 할까 생각하고서 독립운동을 하였고 세계가 놀랄 수 밖에 없는 한국 침략의 원흉이며 동양평화의 파괴자인 이토를 단죄하였다.
이제 21세기에 사는 우리 후손들은 안중근 의사의 애국정신을 본 받아 이 대한민국을 귀히 여기며 우리손으로 평화통일을 이룩해야 할 것이다.
자료발췌
[네이버 지식백과] 안중근 [安重根] - 제국주의 심장을 쏘다 (독립운동가, 이달의 독립운동가)
제공처 국가보훈처 http://www.mpva.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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