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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의(롬 3: 19~22)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오늘 본문에는 아주 중요한 단어가 하나 나옵니다.
무엇이겠습니까?
22절에 나옵니다.
21절에도 거의 같은 말이 나오는 데요, 먼저 22절을 봅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이어서 21절을 봅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의”라는 말입니다.
로마서에는 이 말이 여러 군데에 나옵니다.
3장 5절을 봅니다.
그러나 우리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무슨 말 하리요 [내가 사람의 말하는 대로 말하노니]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냐
10장 3절에는 이 말이 한 절에 두 번 나옵니다.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다시 말씀드릴 필요가 없는 말이지만 신구약성경 66권은 다 중요합니다.
그래도 그 가운데에서 더욱 중요한 성경을 한 권 꼽으라고 하면 로마서입니다.
‘하나님의 의’라는 말이 어떤 뜻을 가지고 있기에 중요한 성경인 로마서에 이렇게 여러 번 나오는 것일까?‘
궁금해집니다.
로마서에 “하나님의 의”라는 말이 나오는 곳이 한 군데 더 있습니다.
어디일까요?
로마서 1장 17절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여러 번 말씀드린 것으로 기억되는데 로마서 1장 17절은 ‘개신교 신학의 등뼈’라는 말을 듣고 있는 말씀입니다.
성경에서 한 절만 남겨야 한다면 로마서 1장 17절을 남겨야 한다고 말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하나님의 의”라는 말이 나옵니다.
로마서 1장 17절을 네 글자로 줄일 수 있는데 ‘이신득의(以信得義)’입니다.
’이(以)‘는 ’무엇을 가지고,
‘신(信)’은 믿음‘,
’득(得)‘은 ’얻는다‘,
’의(義)‘는 ’의롭다 함‘이라는 뜻입니다.
모으면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는다“가 됩니다.
라틴말로는 “솔라 휘데 (Sola Fide)”라고 하지요.
거기에도 ‘의’가 들어 있는데 이 역시 ‘하나님의 의’입니다.
오늘의 본문이 들어있는 로마서 3장의 후반부에 붙여진 소제목도 “하나님의 의”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의”라는 말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말의 뜻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저는 “하나님의 의”라는 말을 대할 때 먼저 두려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의’가 무엇입니까?
사전에서 ‘의’라는 말을 찾아보니까 “①.사회적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올바른 도리 ②.사회적 자아로서 스스로를 자각하는 존재가 자신의 양심에 비추어 판단하는 도덕적 원칙 ③.실정법 또는 자연법과 부합하는 도덕적 원칙”라고 풀이 되어 있습니다.
사전의 이 풀이를 가지고는 ‘하나님의 의’라는 말이 잘 이해되지 않습니다.
‘의’는 ‘공의’의 줄임말이기도 합니다.
공의는 하나님의 중요한 모습 가운데 하나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면서 동시에 공의의 하나님이시다’, 우리가 자주 듣는 말입니다.
다시 사전을 찾아보았더니 “공의 ①.공평한 도리 ②선악의 제재를 공평하고 의롭게 하는, 하느님의 적극적인 품성”라고 풀이 되어 있습니다.
일반 국어사전에도 공의는 ‘하나님의 품성’이라고, ‘적극적인 품성’이라고 올라와 있습니다.
사전의 풀이만을 가지고는 ‘하나님의 의’라는 말이 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두 죄인입니다.
저도 죄인입니다.
저부터 죄인입니다.
원죄를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많은 죄를 지으며, 알고 짓는 죄, 알지 못하고 짓는 죄를 지으며 살고 잇습니다.
사전에 나오는 ‘의’라는 말의 풀이대로 하면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의’라는 말 앞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이 내리시는 벌을 누구도 피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의’라는 말의 뜻을 더 정확하게 알고 싶어서 원어 성경을 찾아보았습니다.
신약성서의 원어는 헬라어인데 헬라어 성경에는 “하나님의 의”가 ‘디아키이오수네 데 데우(δικαιοσύνη δέ θεοῦ)’라고 되어 있습니다.
헬라어 사전에는 ‘디아키이오수네’라는 말이 ‘정당하고 공평한 관계’라고 풀이 되어 있습니다.
‘아, 하나님의 의라는 말은 하나님과 정당하고 공평한 관계를 말하는구나!’ 깨달았습니다.
한글번역 성경들 가운데 『공동번역 성서』가 있습니다.
개신교와 천주교가 공동으로 번역해서 1977년에 발간한 성경입니다.
처음에는 개신교와 천주교가 공동으로 사용하려고 애써 발간했는데 몇 가지 어려움이 있어서 그렇게 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도 지금도 설교자들이 설교를 준비할 때 이 『공동번역 성서』를 많이 참고하고 있습니다.
『공동번역 성서』를 보니까 “하나님의 의”라는 말을 아예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라고 번역했습니다.
로마서 3장 21절과 22절을 『공동벙역 성서』로 읽어 드립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당신과 올바른 관계에 놓아주시는 길이 드러났습니다. 그것은 율법과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율법서와 예언서가 바로 이 사실을 증명해 줍니다. 하느님께서는 믿는 사람이면 누구나 아무런 차별도 없이
당신과 올바른 관계에 놓아주십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갖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저 중요한 정도가 아니고 그것이 성도의 기본이고, 신앙의 출발점입니다.
성도는 어떤 사람입니까?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과 올바른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한 가지 길밖에 없습니다.
‘믿음!’입니다.
22절에 분명하게 나와 있지요.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외에, 믿음 외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그것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에 로마서가 중요한 것입니다.
강북에서 강남으로 가려면 한강을 건너야 합니다.
1965년에 제2한강교, 지금 양화대교가 건설되기까지는 제1한강교, 지금 한강대교가 한강을 건널 수 있는 하나뿐인 다리였습니다.
저 밑의 큰길이 한강대교로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습니다.
그래서 여기가 아주 중요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갖도록 연결해 주는 것이 믿음이라는 다리입니다.
지금은 한강다리가 스물한 개가 있다고 합니다.
교회는 믿음의 공동체인데요, 감리교, 장로교, 성결교, 침례교, 구세군, 순복음, 여러 교파가 있지요.
다리는 철근으로 만듭니다.
다리는 늘어났지만 믿음이라는 철근으로 만들어졌다는 점은 같습니다.
로마서를 기록한 사도 바울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갖기 위해 누구보다도 애를 쓴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무엇을 가지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지려고 했습니까?
두 글자로 된 말인데요, 본문에 여러 번 나옵니다.
여섯 번이나 나오네요.
그렇습니다, ‘율법’입니다.
바울은 율법을 잘 지키려고 누구보다도 애를 많이 쓴 사람이었습니다.
바울 스스로 ‘나는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다’라고 말했지요.
빌립보서 3장 5절과 6절의 말씀입니다.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했는데 팔일 만에 할례를 받는 것도 율법에 따라서였습니다.
바울은 ‘나는 교회를 열심히 박해했다’라고 말했습니다..
실제로 열심히 박해했지요.
사람들이 돌로 스데반을 칠 때도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사도행전 9장 1절을 보면, 주의 제자들에 대해 위협과 살기가 등등했다고 했습니다.
예루살렘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멀리 다메섹까지 가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오려고 했습니다.
바울이 왜 그렇게 교회를 열심히 박해했지요?
‘이 놈들, 왜 율법 제대로 지키지 않아?’ 이것이 중요한 이유였습니다.
‘이 놈들, 예수가 누구이기에 예수가 율법보다 더 중요하다고 하는거야?’
이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서도 ‘내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졌다’하는 확신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갈등이 생기고 그 갈등이 점점 더 더 커진 것 같습니다.
성경학자들 가운데는 스데반의 순교가 바울의 회심에 많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스데반은 순교할 때 돌을 맞으면서도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소서” 부르짖었습니다.
그리고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기도했습니다.
사도행전 7장 10절에는 “이 말을 하고 자니라”라고 기록되어 있지요.
‘자는 듯이 평안하게 숨을 거두었다’라고 해석되기도 합니다.
공회에서 재판을 받을 때도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았다고 사도행전 6장 15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느 교회에서 중국 비전트립을 떠나면서 ‘목사님, 오셔서 중국선교에 대해서 말씀해 주세요’ 했습니다.
요즘 중국 정부가 기독교를 심하게 박해하고 있습니다.
선교사들이 대부분 추방을 당했습니다.
앞으로 더 그럴 것으로 보입니다.
저는 “여러분, 중국에 가시면 얼굴로 전도하세요”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구원의 확신과 평안이 넘치는 얼굴을 중국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 그것도 전도, 훌륭한 전도입니다.
그것을 저는 ‘안면전도’, 줄여서 ‘안도(顔道)’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스데반은 안면전도를 훌륭하게 했습니다.
율법을 잘 지키는 것은 쉽지가 않습니다.
바울은 ‘나는 율법을 잘 지키기 위해 이렇게 애를 쓰는데도 평안과 확신이 없는데 저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저렇게 평안한 얼굴을 할 수 있게 하는 예수는 도대체 누구일까?’ 너무나 궁금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다메섹 가는 도중에 예수님을 만나고 회심을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회심을 한 바울은 ‘율법이 아니고 예수다!’ 열심히 외칩니다.
그 외침이 가장 강하게 담겨 있는 성경이 바로 로마서입니다.
바울은 율법의 유익함도 말합니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해준다고 알려줍니다.
본문 가운데 20절을 다시 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해 줍니다.
재판으로 말하면 검사입니다.
믿음은 죄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도 알려줍니다.
그러니까 율법은 문제만 제시하는데 믿음은 해답까지 알려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믿음은 율법을 굳게 세워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3장 31절의 말씀입니다.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기하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의”라는 말은 어거스틴에서 시작해서 마르틴 루터에 이르러 그 개념이 바르게 형성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거스틴, 마르틴 루터 기독교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인물들로 꼽히고 있습니다.
어거스틴은 매우 방탕한 생활을 했습니다.
어거스틴을 변화시키는데, 탕자 어거스틴을 성 어거스틴으로 만드는데 로마서가 큰 역할을
했습니다.
어거스틴은 어느 날, 자기의 모습을 보며 괴로운 마음으로 친구의 정원 나무 밑에 앉아있는데 밖에서 아이들이 떠들며 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하는 소리가 “텔레 레게, 텔레 레게(Tolle lege, Tolle lege)” “들고 읽어 봐 들고 읽어 봐“였습니다.
얼른 성경을 폈는데 로마서 13장 뒷부분의 말씀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 13:12~14)
바로 자기에게 하는 말씀이었습니다.
이것이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천주교 신부 생활을 하면서 자신의 죄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해 여러 가지로 애썼습니다.
“내 죄! 내 죄” 부르짖으며 뒹군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애쓰다가 로마서 1장 17절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의’가 무엇인지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일으킨 것이 종교개혁이고, 종교개혁을 통해 개신교가 탄생했습니다.
루터의 로마서 강해는 감리교 창시자 요한 웨슬리 목사님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의’라는 거울 앞에 서 보시기 바랍니다.
‘내 믿음은 바른 모습인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집을 짓는 사람들이 ‘기둥이 바로 섰나?’ ‘벽이 수직으로 잘 세워졌나?’ 확인하려고 할 때 어떻게 합니까?
줄에 추를 달아 늘어뜨려 봅니다.
그 줄을 ‘다림줄’이라고 하지요.
‘하나님의 의’라는 다림줄을 내 믿음에 늘어뜨려서 ‘내 믿음이 바로 서 있나?’, 나는 하니님과 바른 관계를 가지고 살고 있나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니, 확인해 보셔야 합니다.
저도 “하나님의 의”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준비하면서 그렇게 하기 위해 힘썼습니다.
올해 감리교에서 유난히 강조하고 있는 선교사가 있습니다.
지난 두 주간은 부산, 강릉, 대전, 그리고 수도권인 성남에서 이 선교사를 기념하는 대회를 했습니다.
누구일까요?
캐나디 출신의 의료선교사 하디(Robert A. Hardie 1865-1949)목사입니다.
1890년에 한국에 와서 45년간 일한 분입니다.
초기에 강원도 지역에서 선교하면서 김화, 간성, 양양, 강릉, 여러 곳에 처음으로 교회를 세웠습니다.
‘강원도 교회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분입니다.
서울의 광희문교회, 감신대 앞에 있는 석교교회, 강남에 있는 수표교교회를 담임했고, 정부종합청사 부근에 있는 종교교회와도 관계가 깊은 분입니다.
처음에는 의료선교사로 일했고, 시간이 흐르면서 목회, 부흥회 인도, 감리교신학대학 학장, 문서선교, 아주 폭 넓은 활동을 했습니다.
이 분이 초기에 퍽 교만하게 처신했습니다.
‘나는 백인이야, 나는 문명이 발달한 나라에서 왔어. 나는 일류 의과대학을 나왔어, 그런데 너희는 뭐야?’ 했습니다.
그러니 선교가 제대로 될 리가 없었지요.
1903년 8월, 그러니까 120년 전 바로 이 무렵에 선교사들이 원산에서 사경회를 열면서 하디를 강사로 청했습니다.
그때 성령께서 하디 선교사에게 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너의 잘못, 너의 교만을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고백해!’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하디는 순종했습니다.
먼저 선교사들 앞에서 고백하며 회개했고, 주일예배에서는 한국교인들 앞에서 그렇게 했습니다.
이것을 감리교회에서는 ‘하디의 영적 각성’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하디의 영적 각성을 계기로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이것을 ‘원산 부흥’이라고 부릅니다.
이 원산 부흥이 한국교회에 미친 영향이 아주 큽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1907년의 평양 부흥도 원산 부흥의 연장선상에서 일어났습니다.
올해는 이 원산 부흥 120년이 되는 해입니다.
그것을 기념하는 운동을 하면서 감리교회 지도자들은 지금 영적 탈진에 빠져 있는 한국교회는, 하디의 영적 각성을 바탕으로 이 위기를 극복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저는 로마서를 읽으면서 영적 각성은 하나님의 의를 깨닫는 것에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갖는 것에서 출발할 수 있다는 것을 깊이 마음에 새기게 되었습니다.
설교를 준비할 때 여러 번역을 참고하게 됩니다.
담임목사님께서 특별히 힘써 그렇게 하시는 것을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한글 여러 번역으로 읽었는데 오늘 본문을 기독교의 근본 진리를 강조하는 것으로 의역한 성경이 여럿 있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생명의말씀사에서 나온 『현대인의 성경』을 보니까 21절을
그러나 지금은 하나님에게 의롭다는 인정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그것은 율법과 예언자들에 의해서 증거된
것입니다
라고 번역하고 “하나님에게 의롭다는 인정을 받을 수 있는 길”에 각주를 달았는데 각주를 보니까 “원문에는 하나님의 의”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의는 곧 하나님에게 의롭다는 인정을 받는 것이라는 점을 강조한 것입니다.
아까 이신득의,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라는 말을 했는데 ‘이신득의’를 줄여서 ‘의인(義認)’이라고도 합니다.
의인, ‘의롭다고 인정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의, 이신득의, 의인, 그리고 오늘 본문에도 20절과 28절과 30절에, “의롭다” 25절에 “의로우심” 26절에 “의로우심”, “의로우시며” ‘의’자 풍년인데요, 전에 말씀드렸습니다만 이상하게 한자에 성경적인 의미를 가진 글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내 남(男)’자는 ‘밭 전(田)’자와 힘 력(力)자가 합해 만들어졌는데, 남자는 힘들여 밭을 갈아야 한다, 창세기 3장 19절의 “네가 흙으로 돌알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라는 말씀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닌가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옳을 의(義)자도 그렇습니다.
양(羊)자 밑에 나 아(我)자가 있습니다.
義=羊+我, 어린 양이신 예수님 밑에 내가 서야 된다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습니다.
그 글자가 왜 이렇게 만들어졌는지 명확한 근거는 찾지 못하고 있지만 흥미 있는 일입니다.
성서교재간행사라는 출판사에서 젊은이들을 위해서 성경을 쉽게 풀어서 내 놓은 『현대어성경』이 있습니다.
이 성경은 22절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그 길은 만일 우리가 죄를 벗어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받아들여 무죄 선고를 해주시
겠다고 하신 바로 그 말씀입니다. 누구를 막론하고 그의 과거가 어떻든지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가기만 하면 우리는 모두
구원을 받습니다.
이같은 번역들을 보면서 ‘아, 하나님의 의라는 말에는 복음의 핵심이 담겨 있구나!’하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의’라는 말에 담겨 있는 깊은 뜻을 잘 알기 위해 힘쓰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갖기 위해, 그 관계를 잘 유지하기 위해 더욱 힘쓰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 자신의 믿음을 늘 점검하며 바른 믿음, 순수한 믿음을 갖기 위해 노력하고, 믿음만을 가지고 늘 걸어가는 여러분이 되고 제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우리는 하나님의 의 앞에 바로 설 수 없는 죄인들입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질 수 없는 부족하고 부정한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런 저희들에게 믿음을 주셔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 해 주심을 감사합니다.
믿음 위에 서서 흔들리지 않고 걸어나가도록 저희를 붙잡아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