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박근혜대통령시대의 정치상황
2012년 12월 19일 치러진 제18대 대통령 선거에서 새누리당의 박근혜 대통령후보가 통합민주당의 문재인 대통령후보를 3.6% 약 1백만 표차로 누르고대통령에 당선했다.
현행 헌법에 의한 대통령 직선제 도입 후 처음으로 유효투표 51.6%의 과반수 득표를 한 민주적 정당성이 강한 대통령이 탄생한 셈이다.3)
우리 헌정사상 최초의 여성 대통령인 동시에 최초의 부녀 대통령이라는기록도 세웠다.4)
박근혜 대통령은 이미 새누리당의 전신인 한나라당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선거의 구원투수로 등장해 2010년 6·2전국동시지방선거와5) 2012년 4·11총선 거를 여당 우세로 치르는 등 정치적인 역량을 보여 주었다.
그렇지만 제18대대통령 선거에서는 사실상 범야권 단일 후보자가 된 문재인 통합민주당 후보자와 힘겨운 선거전을 치렀다.
박근혜 대통령은 2013년 2월 25일 '경제부흥, 국민행복', '문화융성'을 통한 새로운 희망의 시대를 열겠다고 약속하며 제18대대통령에 취임했다.
박 대통령은 임기 초 불거진 국정원 대선개입의혹사건으로 국정원장이 물러나 형사재판을 받는 등 순탄치 않게 시작했다.
또 2014년 4월 16일 서해 여객선 '세월호'가 진도 근해에서 침몰해 승객 476명 중 295명이 사망한 대형 참사가 발생한 가운데, 대통령으로서 신속하게 그에 대처하지 않은 일로 그후유족을 비롯한 야당 및 여러 시민단체들의 지속적인 지탄과 의혹제기로 많은어려움을 겪었다.
이 사건은 결국 선주회사 청해진해운의 노후 여객선 불법개조와 과적 및 선장과 승무원의 직무유기로 인한 사고로 밝혀져 관련자들이 모두 중형의 처벌을 받았다.
이 사건의 책임을 지고 정홍원 국무총리가 물러났다. 세월호 사건은 '관피아(해양관련 고위공무원이 퇴직 후 감독기구의 요직을 차지해 선주와 밀착해서 부정을 자행하는 폐단)의 실상을 노출했다.
그래서 국무총리산하에 국민안전처와 인사혁신처를 신설하고 국민안전처에 중앙소방본부와 해양경비안전본부를 두는 대신 소방방제청과 해양경찰청을 해체하고 안전행정부는 행정자치부로 개편하는 등 정부조직법 개정과 세월호 특별법 제정의 계기가되었다.
이 사건은 그 후에도 박 대통령 임기 동안 지속적으로 야당과 시민단체의 의혹제기로 박 대통령에게 큰 부담이 되었다. 정부는 2015년 4월 침몰한세월호를 인양해서 침몰원인과 미수습유해를 찾기로 결정한 후 우여곡절 끝에1,000억원 이상의 비용을 들여 2년 후인 2017년 4월 세월호 인양에 성공해서4인의 미수습 유해를 발견했지만 5인의 유해는 끝내 수습하지 못했다.
세월호사건은 희생자 수색작업에 2명의 잠수부가 사망하는 등 사고보상비까지 국가예산 6,000억원 정도가 들어간 매우 불행한 사건이었다.
박 대통령은 세월호 참사 이후 '국가혁신'과 '관피아' 개혁을 약속했지만야당이 협조하지 않아 지지부진한데다, 경제마저 침체되는 최악의 불경기가 겹쳐 경제살리기에 전념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러나 임기 초부터 나타난 측근중심의 폐쇄적인 이른바 '수첩인사'로 인사실패를 여러 번 겪으면서도 각계각층과 소통하고 널리 인재를 발굴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아 소통과 투명정치의 실종상태가 지속되면서 정치적인 리더십이 활력을 잃고 강력한 추진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런 가운데 2014년 2월에 안철수가 창당한 '새정치연합'은 6·4 지방선거를 앞두고 민주당의 김한길과 합당해 2014년 3월 '새정치민주연합'을 창당했다. '새정치'를 내걸고 지방선거에 임했지만 힘을 얻지 못하고 여야가 광역자치단체장을 기준으로 8:9의 무승부의 선거결과를 낳았다.
교육감 선거에서는 여권의후보난립으로 후보 단일화를 이룬 야권의 교육감후보가 압도적으로 많이 당선되는 사태가 생겨 여권에 경종을 울렸다.
반면 2014년 7월 30일 실시된 15개선거구 국회의원 재보궐선거에서는 집권여당인 새누리당이 서울, 경기, 충청권및 영남권 등에서 압승하고 심지어 호남에서도 18년 만에 처음으로 당선자를내는 등 11석을 확보한 반면 야당인 새정치민주연합은 경기 한 곳과 호남권세 곳을 합해 4명의 당선자를 내는 데 그쳐 참패했다.
이 선거결과로 새누리당이 158석으로 과반수 확보에 성공해 정치지형이 여당 주도로 바뀌고 야당은 당 공동대표가 사퇴하고 비상체제로 전환했다.
노무현 정부시절 두 번이나 특별사면을 받은 기업인 성완종이 2015년 또다시 부정부패 척결 수사선상에 오르자 이완구 국무총리를 비롯한 박 대통령의전현직 비서실장 등 친박 유력정치인들과 홍준표 경남지사에 거액의 뇌물을 전달한 사실을 적은 메모지를 남긴 채 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특별수사팀의수사결과 이완구 국무총리와 홍준표 지사가 불구속 기소되고 이완구 총리는 사퇴하고 황교안 법무부장관이 58세의 최연소 국무총리로 임명되었다.
이런 가운데 실시된 2015년 4월 29일 국회의원 4명의 재보궐선거에서 성완종 리스트 파문에도 불구하고 새누리당이 서울과 인천의 세 선거구에서 모두 승리하고 야당텃밭인 광주에서는 새정치민주연합을 탈당한 무소속후보가 당선되어 새정치민주연합은 또 한 번 참패를 당했다.
새정치민주연합은 재보궐선거 패배의 수습책으로 문재인 대표가 외부인사로 당 혁신위원회를 구성했지만 친노와 비노 측의 갈등으로 탈당자가 증가하는 등 당 내홍을 겪었다.
새누리당도 행정입법권을 제한하려는 국회법 개정을 둘러싼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를 계기로 당청갈등이 증폭되어 유승민 원내대표가 사퇴하는 등 당청관계가 냉전기류에 휩싸이기도 했지만 새 원내지도부의 구성으로 가까스로 수습했다.
2015년 5월부터 7월까지 이어진 중동호흡기증후군(mers) 전염병 확산사태로보건당국이 큰 비난과 불신을 받기도 했다.
메르스사태가 진정되자 2015년 8월박 대통령은 하반기 국정운영 목표로 노동·공공·금융·교육의 4대 개혁과제를설정하고 그 중에서도 노동개혁을 통해 10%를 넘긴 청년 일자리 창출의 시급성을 강조하면서 임금피크제 도입과 해고유연성 및 정규직의 양보를 요구하며 노사 간의 대타협을 촉구했다.
그렇지만 노조의 강력한 반발로 진통 끝에 공무원연금제도를 개혁하고, 근로자 성과급제도 및 미성취자 해고제도를 도입했다.
그리고 균형감각을 잃고 좌편향적으로 서술된 중고등학교 국사교과서를 새로 만들어 국정화 하기도 했지만 좌파세력의 반발로 널리 보급하는 데는 실패했다.
2015년 8월 북한이 비무장지대 우리 철책선 근처에 목함지뢰를 매설해 우리 군인 2명이 부상을 당하자 휴전선 전역의 대북 확성기 방송을 재개한 후북한이 포격도발을 해 위기를 조성하자 우리가 수십 발의 대응사격을 하면서야기된 일촉즉발의 남북군사대치상황이 발생했다.
북한의 갑작스런 대화제의로판문점 우리 측 평화의 집에서 열린 2:2 남북 고위급 당국자(우리 측 김관진 안보실장, 홍응표 통일부장관과 북한군 총정치국장 황병서와 노동당 대남비서 김양건)의43시간 무박 4일간의 마라톤 협상 끝에 북한의 유감표명 등 6개 항에 합의했다.
남북관계 개선을 위한 당국자회담개최, 비정상적인 사태가 발생하지 않는한 대북확성기방송 중단,북의 준전시상태해제, 2015년 추석절의 이산가족 상봉 및 향후 지속, 다양한 분야의 민간교류 활성화 등이 그 합의 내용이었다.
2015년 9월 중국 전승 70주년 기념행사에 박 대통령은 서방진영에서는 유일하게 참석해 시진핑 주석과 한중동맹관계를 더욱 굳건히 하고 한·중·일정상회담 서울개최 합의 등의 성과도 있었다.
그렇지만 전통적인 한미관계와 한일관계에는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박 대통령은 2015년 10월 미국을 방문해한미동맹을 재확인하는 외교적 행보를 이어갔고 곧이어 11월에는 한·중·일정상회담을 서울에서 개최하였다.
일본 아베 총리와는 위안부문제를 조기에 해결하기로 합의하고, 중국 리커창 총리와는 여러 가지 경제현안에 관한 발전적인방안에 합의했다.
2015년 12월에는 한·일간에 위안부문제 협상을 타결했지만당사자인 위안부 측은 물론이고 야당과 시민단체 등이 협상내용에 강력히 항의하며 협상무효를 지속적으로 주장했다.
박 대통령은 외국과의 자유무역협정(FTA)에 주력해 캐나다, 중국, 뉴질랜드, 베트남 등과 무역협정을 맺었다.
박대통령은 여러 번의 순방외교도 펼쳐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일본 아베정부의극우적인 정치행태와 독도영유권 도발 및 식민통치시대의 정당화 내지 인권탄압은폐노력 등 한일관계가 급속도로 악화되기도 했다.
특히 미국이 일본의 재무장정책을 찬성하면서 빚어지는 극동지역의 정치정세와 한·중·일의 대미관계가 미묘하게 변했다.
일본을 앞세워 커져가는 중국을 견제하려는 미국과, 한국을 중국 쪽으로 끌어 들이려는 중국 시진핑 주석의 신팽창주의 외교정책의 중간에 선 한국으로서는 중국과의 협력을 강화하여 일본에 대처하면서도 동시에미국과의 전통적인 동맹관계를 더욱 굳게 해 한·미·일 동맹도 강화해야 하는어려운 과제를 안게 되었다.
국내정치적으로도 여야의 정치적인 대립상태가 더욱 심해져 박 대통령의정책추진은 국회의 입법절차에 막혀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야당인 새정치민주연합은 문재인 당대표 퇴진을 요구하는 내분사태로 안철수를 비롯한 광주 호남권 출신의원이 대거 탈당해 안철수와 천정배가 주도하는 '국민의 당을 창당하는 사태가 생겨 새정치민주연합은 당명을 '더불어민주당으로 바꿨다.
제19대 국회는 '사상최악의 국회'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른바 국회선진화법'의 적용으로 국회 내의 폭력은 사라졌지만, 정부와 여당이 강력하게 추진하는 민생법안 처리에는 실패해 식물국회라는 오명을 남겼다.
4년 임기동안 법안처리도 8,000여 건을 처리하는 아주 부진한 실적을 남겼다. 대의민주정치의 근간을 이루는 다수결원리를 왜곡해 식물국회를 만든 국회선진화법은 2016년 5 월 26일 현법재판소의 권한쟁의심판 각하결정으로 제0대 국회에서도 그대로효력을 유지하게 되었다.
2016년 4월 13일 제20대 국회의원 총선거를 앞두고 중앙선거관리위원회소속 국회의원선거구획정위원회가 여야의 대리전 양상으로 대립하면서 본연의선거구획정을 포기하고 국회로 떠넘기는 어처구니없는 직무유기사태가 생겼다.
헌정사상 처음으로 국회의원 기존선거구가 효력을 잃어 선거구가 없는 입법비상사태가 생겼다.
그래서 위법적인 선거운동이 행해져도 단속기관인 중앙선거관리위원회와 수사기관은 이를 공공연히 방관·묵인하는 일이 벌어졌다.
선거구획정위원의 선출방법과 의결정족수의 개정 등 선거구획정위원회의 개혁이 불가피한데도 국회는 총선 직전인 2016년 3월 공직선거법을 개정했다.
선거구획정위원회의 개혁은 하지 않고 국회의원 지역구의 획정기준만을 구체적으로 정하는 데 그쳐 국회의 의원정수를 지역구국회의원과 비례대표국회의원을 합하여300명으로 정했다.
그 결과 지역구의원과 비례대표의원의 수는 총선거를 할 때마다 달라질 수 있게 되었다.
제20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새누리당이 참패하여 국회 제1당의 지위마저 잃은 채 16년 만에 여소야대 국회가 탄생했다.
20년 만에 국회 3당구도가형성되었다. 더불어민주당은 호남권에서 거의 전패하여 창당 3개월도 안 된국민의 당에게 거의 전 의석을 내줌으로써 호남의 전통적인 지지기반을 잃었다.
나아가 정당투표에서는 국민의 당이 서울과 인천, 경기 등 수도권과 대구 등전국적으로 더불어민주당을 앞서는 득표를 했다.
반면 더불어민주당은 의원수가 제일 많은 수도권의 지역구에서 거의 전승의 성과를 거두고 전통적인 여당지지기반인 서울 강남권과 대구 및 낙동강 벨트에서도 당선자를 내어 원내제1당이 되었다."
제20대 국회는 2016년 5월 30일 임기를 시작했지만 부진한개원협상으로 개원이 늦어지다 원내 제1당인 더불어민주당에게 국회의장직을양보하고 법정개원일보다 일주일 늦게 6월 13일 개원했다.
새누리당의 참패는 선거를 앞둔 원칙 없는 낙하산 공천파동으로 지지층까지 분노하여 등을 돌리게 만든 결과였다.
야권 분열로 국회 절대다수 의석을얻을 수 있는 결코 질 수 없는 선거에서 참패한 것은 박 대통령의 오만과 독선 및 편협함에 대한 국민의 준엄한 심판이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선거결과박 대통령은 임기 1년 10개월을 남긴 상태에서 조기 레임덕에 빠져 국정운영이 더욱 어렵게 되었다.
2016일 6월 23일 영국이 유럽연합(EU)에서 탈퇴하는 이른바 Brexit 결정을해 세계경제와 금융시장에 대혼란이 생기고 우리 경제상황에도 영향을 미쳤다.
북한은 중장거리 미사일 발사에 성공해 국방전선에도 적신호가 켜졌다. 정부는 북한 미사일공격에 대비해서 경북 성주에 미군의 고고도미사일 방어체계사드(Thaad)배치를 결정 발표하자 야당을 비롯한 종북좌파세력은 물론 일부 시민단체, 그리고 과학적 근거도 없는 전자파 피해 등의 유언비어에 현혹된 일부현지 주민이 강력하게 반대하는 집회와 시위가 이어졌다.
중국은 우리 국방주권을 무시하는 사드배치반대를 내세우며 대대적인 무역보복에 나서 우리 경제에 악영향을 미쳤다.
그런 가운데 북한은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완성에도 진력하는 등 미사일과 핵개발에 속도를 냈다.
박 대통령은 유엔공조를 통한국제적인 대북제재를 강화하는 데 노력하는 한편 대북 강경정책을 펴 남북경제협력사업의 상징인 개성공단을 폐쇄하는 조치를 했다.
또 북한에 동조하는 좌파혁명전선을 구축하려는 통합진보당에 대한 해산신청을 통해 헌법재판소가2014년 12월 19일 헌정사상 처음으로 통합진보당 해산결정을 했다.
정당의 지도부 개편도 이어져 더불어민주당은 추미애가, 새누리당은 이정현이 각각 당 대표로 선출되었다.
박 대통령은 공기업 등 임명직에 비전문가를 낙하산으로 임명하는 등 독선적인 정치행태를 이어가는 중에 불거진 청와대 우병우 민정수석의 비리의혹이 검찰 수사를 받게 되고, 청와대 특별감찰관 이석수가 사직하는 등 정권의힘을 빼는 사건들이 연이어 불거졌다.
2016년 7월 JTBC가 이른바 '최순실 태블릿PC'와 그에 담긴 file내용을 보도한 것을 기점으로 박 대통령의 사적인 집사역할을 하던 최순실(최서연으로 개명)이 여러 가지 국정에 개입하고 이권을 챙기며 심지어 정부 고위급 인사에까지 영향을 미친 내용이 각종 언론매체에 연이어 보도되었다. 국민은 박 대통령의 정치행태에 배신감을 느끼고 분노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