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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를 아십니까?
우리가 아는 도(道)는 도가 아니다
목차
서론
본론
1. 도의 본질적인 측면
2. 도를 따르는 삶
3. 도를 따르는 사회
결론
1. 2천 년 뒤의 너에게
2. 2천 년 전의 너로부터
서론
흔히들 ‘도(道)’ 라고 하면 ‘도를 닦는다’ 라는 말이 생각나게 마련이다. 국어사전에도 ‘도’ 라는 말의 뜻은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 ‘종교적으로 깨우친 이치, 혹은 그런 경지’ 라고 설명되어 있다. 사람들은 ‘도’ 라는 말에 별 관심을 두지 않는다. ‘하루하루 살아가기도 바쁜데 그런 거 신경쓸 시간이 어딨나’ 싶기도 할 테고, ‘사이비 종교나 할 법한 소리’ 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도’ 는 일반적인 사람들이 아는 것보다 훨씬 심오하고 장대한 개념이다. 도는 이 세상을 구성하며 이 세상의 모든 존재가 존재하게 해주는 거대한 근원이라고 할 수 있다. 도는 세상에서 가장 큰 동시에 가장 작다. 있음을 있게 해주지만 그 자체로는 없음이다. 이런 모순적인 말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며 존재하는, 역설적이고 정의할 수 없는 거대한 도의 세계로 당신을 초대하고자 한다.
본론
1-도의 본질적인 측면
가. 도의 본질
도덕경에서는 ‘도’ 라고 정의될 수 있는 도는 도가 아니라고 말한다. ‘도’는 명명할 수 없는 거대한 무(無)이다. ‘도’ 는 모든 철학책에서 찾고자 하는 개념인 ‘궁극적인 진리’ 라고 할 수 있다.
‘도’ 에는 두 가지 면이 있다. 하나는 정의할 수 없는 궁극적인 무(無), 즉 실상의 측면, 하나는 정의할 수 있고 드러나 있는 현상의 측면이다. 욕심을 가지고 사는 자는 현상의 측면만을 보지만, 욕심을 버리는 자는 그 너머에 있는 실상의 세계를 직관하게 되는 것이다. 노자는 그 두 세계는 모두 근원이 되는 ‘도’ 에서 나온 것이므로, 이 세계의 존재 자체가 신비스럽다고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이 신비로운 ‘도’ 의 본질은 무엇일까? ‘도’ 는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을까? 지금부터 함께 알아보도록 하자. 우선 14장에서 설명하는 도의 ‘실상의 측면’ 을 알아보자. 14장의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 ‘궁극 실재로서의 도는 무한하다. 세상에서 가장 크며 동시에 가장 작다. 크고 작음, 길고 짧음 등의 양극을 동시에 품고 있는 무언가를, 어떻게 정의할 수 있는가.’ 이렇듯 도는 양극을 모두 포괄하고 있는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이다. 왜냐하면 애초에 대소나 장단 또한, 인간이 규정한 이분법적 사고이기 때문이다. 물체의 상태는 계속 변화한다. 애초에 물체를 한 가지 상태로 규정하는 이분법적 사고에 기반한 정의로는, ‘양극의 조화’ 가 성립하는 도를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에 대해서는 2장에서 다시 설명하도록 하겠다. (도는 인간의 언어로는 규정할 수 없다는 서술 추가)
다음으로는 도의 ‘현상의 측면’ 에 대해 알아보자. 도는 그 자체로는 비존재이지만, 그 안에 무수한 존재의 근원들을 품고 있다. 그렇다면 도 안에는 무엇이 있을까? 첫째로, 만물에 각자 고유의 모습을 주는 형상(象)이 있다. 사람의 얼굴, 의자의 모양, 사과의 색 같은, 만물의 외형적 특징이 모두 이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또, 세상 만물의 물질적인 바탕이 되는 질료(物) 가 있다. 과학적인 설명을 곁들이자면, 이 글을 읽는 여러분들이 달달 외웠을 주기율표에 있는, 물질을 구성하는 최소 단위인 원소들의 근원이 이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우주의 주기성과 법칙성을 뜻하는 참된 무언가, 즉 본질이 있다. 이 세 가지가 서로 뒤얽히고 조화를 이루며 만물을 구성한다. 이것이 도의 존재적 측면이다. (세 가지의 관계 정리하기, ‘본질’의 의미 구성)
그렇다면 이 형상과 질료, 그리고 본질이 어떻게 뒤얽혀 만물을 구성하는가? 이 문단에서는 그것에 대해 알아보려 한다. 도덕경에는 이런 문장이 나온다. ‘도가 하나를 낳고 하나가 둘을 낳고 둘이 셋을 낳고 셋이 만물을 낳는다.’ 여기서 ‘하나’ 는 본질이라 볼 수 있다. 이 ‘하나’ 에서 파생된 ‘둘’ 이 바로 형상과 질료다. 그렇다면 셋은 이 형상과 질료가 결합해 만들어진 껍데기라 볼 수 있고, 그것들에게 각자의 본질이 부여되며 만물이 탄생한다고 나는 해석했다.
이렇듯 도는 비존재로서의 실상의 측면과 존재로서의 현상의 측면이 동시에 존재하며, 아무것도 없지만 그 안에 만물을 품고 있는 모순적이고 역설적인 것이다. 도를 알면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알 수 있으며, 자신의 근원이 어디인지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도를 아는 것은, 진리를 안다는 것이다.
나. 도의 특성
모든 것은 자기만의 고유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 사람이나 새 같은 생명체, 책이나 의자 같은 물건부터, 보고 만질 수 없는 공기마저도 그것만의 특성이 있다. 그것은 ‘도’ 도 마찬가지다. 정의할 수 없고 표현할 수 없지만, 그 나름대로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부터는, 도의 두 가지 특징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
도덕경 8장에서는 도를 물에 빗대어 설명한다.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 ‘도’ 또한 모두가 꺼리는 낮은 곳을 향해 흐른다. 모든 생명이 물로 이루어져 있고, 물로 삶을 지탱하지만, 물은 자신이 있기에 생명이 존재할 수 있다고 생색내지 않는다. 물은 그저 흘러가듯 자신의 할 일을 할 뿐이다. 도 또한 마찬가지다. 모든 생명의 근원이 되지만, 그것들을 지배하려고 하지 않는다. 자신을 드러내려고 하지도 않는다. 도는 그저 흘러갈 뿐이다. 이것이 바로 도덕경에서 말하는 ‘무위의 위’, ‘함이 없는 함’ 이다. 이 개념에 대해서는 2장에서 다시 설명하도록 하겠다.
도의 또 다른 특징이자 도덕경의 기본 가르침 중 하나는 ‘되돌아옴’ 의 원리다. 도는 무한히 뻗어나간다. 하지만 어느 정도에 이르면 다시 원래 방향으로 되돌아온다. 도가 곧 우주이므로 아무리 뻗어나가도 결국 자기 안에서 움직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 만사도 마찬가지다. 쭉 뻗어가다가도 어느 정도에 이르면 반대 방향으로 뻗어갔다 다시 그 방향으로 되돌아온다. 부귀영화도, 희로애락도, 달도, 생명도 모두 마찬가지다. 이것이 무한히 반복되며 돌아가는 원이 도는 것이 도의 움직임이라 할 수 있다. 부자는 언제든지 돈을 잃을 수 있고, 화는 언제든지 풀릴 수 있다. 삶 또한 언제든지 끝날 수 있다. 결국 모든 것의 상태는, 하나로 고정된 것이 아니라 시시때때로 변하며, 결국에는 원래대로 되돌아온다는 것이다.
도는 모든 것이 돌아가게 하는 근원이지만 동시에 스스로 모든 것을 찾아가기도 한다. 모든 것을 찾아감으로 모든 것이 각자의 특성을 가지고 존재하게 한다. 그러나 그런 도의 창조력은 일방적으로 적용되지만은 않는다. 도에서 만물로 나아가는 과정이 있다면, 만물이 도로 돌아가는 과정 또한 존재한다. 이 두 가지의 큰 주기적 움직임 속에서 여러 가지 작은 움직임들이 크고 작은 원들을 그리며 부드럽고 자연스럽게 순환한다. 삶과 죽음, 사계절, 24절기에, 모두 이 ‘도’ 의 순환 속에서 움직이는 작은 원인 것이다.
2-도를 따르는 삶
가. 욕망의 극복
도덕경의 말들 중에는 우리들의 뼈를 때리고, 사회의 문제를 비판하며 더 나은 해결책을 제시하는 말들이 많다. 일단 사회적인 문제를 비판하는 말들은 뒤로 제쳐두고, 개개인의 문제점을 짚어주는 말들을 먼저 보도록 하자.
먼저 노자는 감각적 쾌락에 대해 경고하고 있다. 신나는 삶이란 우리가 느끼는 감각적 즐거움을 아름다운 것으로 받아들이고 감사하는 삶이다. 우리는 그것들을 행복한 삶에 필요한 수단으로 여겨야 한다. 문제는 이런 감각적 즐거움에 지나치게 빠져 그것들을 삶의 절대적인 가치와 목표로 삼는 것이다. 그런 감각적 쾌락에만 몰두하게 되면, 결국 그것들이 자신을 지배하게 된다. 여기서 말하는 감각적 쾌락은, 단순한 감각적 쾌락만을 뜻하는 건 아닐 것이다. 물질적인 것에만 매달려 진정한 삶의 가치를 추구하지 않는 현대인들에게 이 말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이 이야기는 3장에서 다시 다루도록 하겠다.
또한 가졌다고 해서 그것에 집착하고 거만해하지 말고, 가지지 못했다고 해서 상심하고 포기하면 안 된다. 좋다가도 나빠질 수 있고, 나쁘다가도 좋아질 수 있다는 것을, 그 상태가 영원한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상술했듯 도의 기본 원리는 순환의 원리다. 순환은 선순환을 뜻하기도 하지만 악순환을 뜻하기도 한다. 욕망을 해소하고 나면 잠깐 동안은 행복하겠지만, 그 후에는 다시 허무해지며 새로운 욕망과 쾌락을 찾게 된다. 악순환의 고리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욕망을 해소하고 쾌락을 느끼는 순간엔 행복하겠지만, 다시 허무해지고 공허해지게 된다. 삶의 진정한 의미가 사라지는 것이다.
나. 관점의 변화
도덕경에서는 항상 관점을 바꾸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도’ 는 서로 상반되는 두 개념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 즉, 일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사고방식인 물체의 상태를 하나로 고정하는 이분법적 사고방식으로는 ‘도’ 에 다가갈 수 없다는 이야기이다. 노자는 이분법적, 상식적 사고방식을 벗어나라고 말하고 있다. 하나만 보지 말고 전체를 보라고 하고 있다. 지금부터 그런 관점의 변화를 이루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아보도록 하자.
우선 도덕경의 2장에서는 모든 것이 상대적임을 말하고 있다. 길고 짧음, 크고 작음, 행복과 불행, 선과 악 등등 모든 것은 상대적인 것이다. 길다는 것은 그것보다 짧은 게 있기에 길다고 불리는 것이고, 크다는 것은 그것보다 작은 게 있기에 크다고 불린다는 말이다. ‘길다’,’크다’ 는 개념을 물질의 원래 성질로 보는 것이 ‘절대론적 사고’ 이며, 사물의 상태는 서로의 관계로 결정된다고 보는 것이 ‘상대론적 사고’ 이다. 우리는 물질의 상태를 그 물질의 고유한 것으로 생각하지만, 도의 입장에서는 모든 것이 상대적이므로 상반되는 개념들이 서로 다른 게 없다는 것이다.
화라고 생각되는 데서 복이 나오고, 복이라 생각되는 데서 화가 나온다. ‘새옹지마’ 이야기는 한 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새옹지마 이야기처럼, 행복에서 불행이 찾아오고, 불행에서 행복이 찾아오는, 전문용어로 변증법적으로 흘러가는 것이 인생이다. 따라서 앞에서 계속 언급했듯, 어느 한 가지 상태를 절대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올바르다고 여기던 것이 틀린 것일 수도 있고, 선이라 믿었던 것이 사실 악일 수도 있다. 이런 역설의 진리를 모르고 어떤 것을 한 가지 상태로만 규정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우리는 어떤 물체의 상태를 파악했을 때 ‘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물체의 상태는 상대적인 것이며 수시로 변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앎’ 은 곧 지식이다. 그러나 이런 이분법적,상식적 사고의 틀에서 만들어진 ‘지식’ 이 과연 진정한 ‘앎’ 이라고 할 수 있을까? 편향적이지 않은 생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아니다. 진정한 ‘앎’ 은 내가 틀에 갇힌 사고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비로소 시작된다.
진리는 단순한 것이다. 오랜 수련 끝에 진리를 깨우친 사람은 ‘이렇게 간단한 걸 왜 진작에 알지 못했을까’ 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왜 그런 간단한 것을 진작에 알지 못할까? ‘본질’ 을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있다고 할 때, 원래 의미하는 바인 달이 아니라 그것을 가리키는 손가락에만 집중하기 때문이다. 현상 자체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보아야 한다. 상식적, 이분법적 사고세계에서 벗어나 본질을 꿰뚫어 볼 눈을 떠야 한다.
다. 도를 따르는 사람들의 삶
도덕경에서 거듭 강조하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함이 없는 함’ 이고, 나머지 하나는 ‘강함을 이기는 부드러움’ 이다. 여기서 말하는 ‘무위’ 는 말 그대로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린다는 뜻이 아니다. 모든 행동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자신이 행동하고 있다는 것도 의식하지 않는 것이 도덕경에서 말하는 무위이다. 그리고 강함을 이기는 부드러움은 말 안 해도 알 거라고 생각한다.
먼저 ‘무위의 위’ 를 알아보자. 훌륭한 덕의 사람은 자기 행동을 의식하지 않으며, 행동이 거침없고 힘차다. 굳이 억지로 행동할 이유도 없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사람은 억지로 일을 꾸미고 벌인다. 자신의 행동을 항상 의식하며 조바심 속에 산다. 전자는 무위의 사람이고, 후자는 유위의 사람이다. 후자, 즉 우리가 사는 세상은 겉치레로서의 예가 강조되는 사회이다. 스스로 삶의 깊이를 추구하는 문제는 뒷전으로 물러나고, 드러나는 행위만 꾸미려는 처신의 문제가 주 관심사가 된 사회이다. 이런 사회에서는 개인의 자발성은 사라지고, 남 하는 대로만 따라가려는 획일성만이 판치게 된다.
다음으로는 ‘강함을 이기는 부드러움’ 을 알아보자. ‘세상에서 가장 부드러운 것’ 은 물이다. 그런데 이런 물이 단단한 바위를 부순다. 어떤 일도 꾸미지 않고, 어떤 폭력도 사용하지 않고 묵묵히 자신만의 방식대로 살아갈 뿐인데도, 바위 같이 단단한 것들을 녹이고 부수는 것이다. 역사적으로도 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긴다는 것이 사실임을 알 수 있다. 강력한 권력을 휘두른 정권이 연약한 백성들에 의해 멸망한 적은 많다. 일상 속에서 예를 들자면, 버럭 화를 내는 선생님과 차분하게 잘못을 짚어주는 선생님 중 학생들이 어느 선생님을 잘 따를까? 당연히 후자다. 힘과 폭력을 사용해 상대방을 이기는 것이 아닌, 도의 힘, 자애의 힘으로 상대방을 이기는 것이 진정한 승리다.
이렇듯 도를 따르는 사람은 하는 행동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다. 다른 사람을 의식하지 않으며 오로지 자연의 흐름에 몸을 맡긴다. 그렇기에 상처받지 않으며 남에게 상처를 주지도 않는다. 가졌다고 거만해하지 않으며 가지지 못했다고 억울해하지 않는다. 도의 사람은 다른 사람을 포용한다. 다른 사람을 배척하지 않고, 폄하하지 않는다.
도를 따르는 삶을 요약하자면, ‘알아서, 잘, 딱, 깔끔하고, 센스있게’ 사는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의 행동을 의식하지 않고 ‘알아서’ 하며, 그럼에도 ‘딱’ ‘잘’하고, 오점 없이 ‘깔끔하게’ 행동한다. 그렇기에 타인이 보기에 ‘센스있게’ 보인다. 타인의 반응이나 평가를 의식하지 않고 자신을 낮추지만, 그로 인해 자연스럽게 높은 위치에 서게 되는 것이다.
3-도를 따르는 사회
가. 노자의 이상사회
철학자들이 출몰하고 철학이 탄생한 이유는 사회가 불안정했기 때문이다. 노자가 살던 당시인 춘추전국시대는 이른바 대혼돈의 시대였다. 주변에서 끊임없이 전쟁이 일어났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갔다. 몇몇 사람들은 그런 사회를 보며 ‘왜 이렇게 되었는가’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각자의 해답을 내놓았다. 그리고 그 ‘해답’ 에 입각해 살아가는 ‘이상사회’ 를 꿈꾸게 되었다. 노자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도에 입각해 나라는 다스리는 지도자에 대해 굉장히 많이 강조했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노자의 이상사회를 알아보고, 현 사회와 비교해보며 현 사회의 문제점들을 파악해보도록 하자.
노자가 그린 이상사회는 사람들이 살아 있음에 감사하며 하루하루를 소중히 여기는 사회이다. 배나 수레가 있지만, 사람들이 떠나지 않기에 쓸 일이 없고, 방어전을 대비한 무기가 있으나 쓸 일이 없는 조용하고 평화로운 사회이다. 주어진 것에 만족하고 더 가지려 하지 않고, 사람들이 다툼 없이 서로를 존중하며 어울려 지내고, 통치자가 있는지 없는지도 상관없을 정도로 정치와 무관한 사회. 이것이 도에 따라 살아가는 사회이다.
유교의 최고 덕목은 (어질)인,(옳을)의,(예절)예,(알)지,(믿을)신 의 5가지이다. 그러나 도덕경에서는 이것들이 강조되는 사회는 미완성된 사회라고 한다. 애초에 사람들이 착하고, 옳은 일만을 행하고, 예절을 지키고, 스스로 깨닫고, 서로를 믿는다면 그것들을 강조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예수의 가장 유명한 말인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는 말이 나온 이유도, 사람들이 자신의 이웃을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노자의 이상사회는 그러한 윤리적 덕목이 규칙과 제약에 머무르지 않고 자연적으로 이루어지는 사회이다.
나. 현 사회의 문제점들
2장 초반에서 서술했듯, 대부분의 사람들은 맛있는 음식이나 흥겨운 노래 등의 감각적 쾌락, 혹은 ‘돈 잘 버는 방법’ 같은 것에만 눈길을 돌린다. 반면에 ‘도’ 나 ‘진리’ 에 관한 것에는 별 관심을 두지 않는다. 상식적인 세계를 살아가는 우리의 입장에서 ‘도’ 는 쓸모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노자는 바로 이 점을 공박하고 있다. 진정한 것을 추구하지 않고 눈에 보이는 것만 중요시하는 사회, 과연 이것이 건강한 사회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하늘의 도는 ‘조화’ 를 이루는 것이다. 공평,평등,조화,공생,균형 등으로 정의할 수 있겠다. 새 생명이 태어나면 오래된 생명은 죽으며 생명의 균형이 유지된다. 도의 순환 속에서 모든 것이 서로 어울려 조화를 이루며 자연스럽게 돌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하늘의 도’ 가 만들어내는 선순환이다.
반면 인위의 도는 이와 반대이다. 불평등,부조화,불균형,부익부 빈익빈 등으로 정의할 수 있다. 자본주의의 모든 것은 가진 자들의 중심으로 돌아간다. 그렇기에 가진 자는 더 가지고, 못 가진 자는 그 상태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게 계급이 만들어지고 차별이 생긴다. 도태되지 않기 위해, 혹은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경쟁이 생겨나고, 그 경쟁 속에서 사람들은 불안해진다. 불안은 곧 더 높은 위치에 대한 갈망으로 바뀌고, 다시 무한의 경쟁 속으로 빠지게 된다. 이것이 ‘인간의 도’ 가 만들어내는 악순환이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도와 진리를 추구할 수 있겠는가. 이제 우리의 삶을 돌아보자. 우리는 하늘의 도를 따르는가? 아니면 사람의 도를 따르는가?
결론
드디어 이 긴 글의 최종장에 도달했다. 여기까지 왔다면, 여러분들은 이제 ‘도’ 에 대해 어느 정도는 이해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먼저 도덕경의 작가인 노자 본인이 내린 결론을 알아보고, 내 나름대로의 해석 또한 같이 보도록 하자.
1. 2천 년 뒤의 너에게
가. ‘도’에 대한 결론
‘진리는 역설’ 이라는 말이 있다. 상반되는 듯한 두 명제를 동시에 포괄하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는 이 ‘반대의 일치’ 가 성립하지만, 상식적인 이분법적 사고로는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고 오히려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이상하게 생각되지 않으면 도가 아니다. 이상하지 않다는 것은 역설적이지 않다는 것이고, 역설적이지 않다는 것은 궁극 진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도는 역설적임에도 ‘불구하고’ 위대한 것이 아니라 역설적이기 ‘때문에’ 위대한 것이다. 이런 역설적 특성에 마음을 열고 받아들이느냐, 말도 안된다고 비웃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수준을 볼 수 있다. 진리는 단순하고 평범함 속에 있다. 단순하고 평범한 것들 속에 있는 진리의 참뜻은, 상식의 세계에 사는 우리에게는 별거 아닌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별거 아닌 것들에 관심을 기울이고 꿰뚫어 보면, 그것이 우리에게 삶의 깊이와 의미를 가져다 줄 것이다.
나. ‘덕’에 대한 결론
도덕경에서 중시하는 3가지 가치는 ‘자애’, ’검약’, ’세상에 앞서려 하지 않음’ 이다. ‘자애’ 는 어머니 같은 마음이다. 어머니의 마음으로 남을 대하면 남을 위해 헌신할 용기가 생긴다. ‘검약’ 은 아끼는 마음이다. 낭비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남에게 널리 이익을 베풀기 때문이다. ‘세상에 앞서려 하지 않음’ 은 자신을 낮추는 마음이다. 자신을 낮추고 타인을 배려하면 자연스럽게 자신의 위치가 올라가게 될 것이다.
다. 최종 결론
진리의 말은 아름답지 못하다고 한다. 미사여구를 붙이는 순간, 본질적인 면이 아닌 단순히 말을 꾸미는 데에만 집중하게 되기 때문이다.
진리의 말은 변론이 아니라고 한다. 진리는 ‘반대의 일치’ 와 같은 역설적인 개념이므로, ‘이것이냐 저것이냐’ 를 분명히 하는 이분법적, 상식적 논리의 변론이 아니라는 것이다.
진리의 말은 박학이나 박식의 결과가 아니라고 한다. 도의 길은 하루하루 비워 가는 것이므로, 채워야 얻을 수 있는 박식함에서 오는 말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노자는 자신이 말한 것은, 아름답지 않고, 변론도 아니며, 박식함에 근거한 말이 아니라는 것, 그렇기에 진정으로 ‘앎’ 에 입각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도에 입각한 길은 우리가 건강하고 조화롭고 참된 삶을 살아가게 해 준다.
2. 2천 년 전의 너로부터
도덕경은 쓰여진 지 3천년 가까이 된 책이다. 그럼에도 도덕경의 가르침은 아직까지 우리 마음속 깊은 곳에 와닿으며 우리의 뼈를 때리고, 이 사회의 문제점과 폐단을 정확히 지적하고 있다. 어쩌면 도덕경이 우리 마음에 와닿는 것은, 인간 사회가 3천 년 전과 비교해서 나아진 게 없다는 이야기가 아닐까. 22년 에세이에도 언급했듯, 우리는 가장 진보한 기술의 시대에 살고 있지만 동시에 가장 퇴보한 사상의 시대에 살고 있다.
도덕경을 읽으며 많은 것을 돌아보게 되었다. 그동안에 내가 사람들을 대하던 방식이나, 다른 사람의 반응을 지나치게 신경쓰고 툭하면 화를 내던 내 과거를 되돌아보게 되었다. 책숲의 학생들을 통솔해야 하는 학생대표라는 자리에 올라 막막해하고 있을 때, 도덕경의 가르침 중 지도자에 관한 부분이 많은 도움이 되기도 했다. 이처럼 도덕경은 단순한 철학서가 아니다. 해석하기 나름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이 책이 삶의 지혜를 알려주는 책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내 부족한 소견으로 도덕경의 가르침을 요약하자면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겠다. 첫 번째는 내 나름대로 정의해본 ‘도’ 에 관한 것이고, 두 번째는 마음에 관한 것이다. 먼저 첫 번째부터 이야기하자면, 나는 도가 만물을 움직이는 거대한 흐름이라고 생각한다. 도는 세상 만물에게 각자의 모습을 주고 생명을 주어 살아가게 하고, 때가 되면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게 한다. 나는 이런 크고 작은 주기와 순환의 톱니바퀴들이 맞물려 돌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바로 도라고 생각한다. 도가 세상을 움직이게 하므로 도를 알게 되면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알게 되니, 도는 궁극 진리의 역할도 겸하고 있는 셈이다.
두 번째는 마음에 관한 것이다. 현대인들에게 필요한 것들만 골라 요약하자면, ‘다른 사람을 지나치게 의식하지 말라. 그들이 당신에게 하는 말에 상처받지 말라. 어차피 그들도 사람이기 때문에 그들의 판단은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또한 자신을 너무 어필하지 말라. 자신을 어필하는 과정에서 남들을 깎아내리며 상처를 입힐 수도 있고, 그들이 당신을 안 좋게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자신을 드러내지 말고 낮춰라. 그러면 오히려 당신의 평판은 높아질 것이다.’ 정도로 요약할 수 있겠다. 이렇듯 도덕경의 가르침 중에는 일상에 도움이 되는 것들이 많다.
한 권의 철학책을 읽었을 때, 열 살의 감상과 스무 살의 감상과 마흔 살의 감상이 모두 다르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철학책은 그만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 하나는 확신할 수 있다. 도덕경은 절대로 지루한 책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현대인들에게 가장 부족한 정신적 행복을 찾는 과정에서 이 책이 큰 도움이 될 거라는 것.
도덕경은 나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었고, 앞으로의 방향성을 제시해 줬다. 도덕경에서 말한 것처럼 단단함으로 모든 것을 굴복시키는 사람이 아닌, 부드러움으로 모든 것을 감싸안는 사람이 되자고, 조금이라도 유한 사람이 되자고 다짐하며 이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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