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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10:46-52(73) 비올 때 우산을 빼앗지 말라 2022. 2. 13.
예전에 읽었던 글이 하나 생각나서 소개합니다. 어떤 여성분이 대형마트에 컴퓨터 소모품을 사러 나갈 일이 있었습니다. 물건을 구입하고 밖으로 나와 보니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습니다. 차를 두고 걸어온지라 비를 맞고 집에 돌아 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다시 매장 안으로 들어가서 우산 파는 곳으로 갑니다. 우산 가판대 앞에는 자신의 처지와 같은 사람 여럿이 다들 자신에게 잘 어울리고 예쁜 우산을 고른다고 여념이 없는 모습이었습니다.
이렇게 시간을 내어 예쁜 우산을 비싼 돈을 주고 구입하고 거리로 나섭니다. 비는 점점 더 많이 쏟아지기 시작합니다. 그래도 자신은 구입한 우산이 있으니 큰 걱정을 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산 우산을 자랑스럽게 쳐다보면서 우산을 펼쳐 드는 데, 그때 어떤 사람이 말합니다.
“당신이 쓰고 있는 우산을 내게 줘!”이렇게 말하고, 다른 행동을 취하기도 전에 다짜고짜 우격다짐으로 우산을 빼앗아 가지고는 비속으로 사라져 버립니다. 너무나 순식간에 발생한 일이라서 어안이 벙벙하였고, 자신에게 발생한 일에 대해 황당한 그 자체였습니다.
결국 이 여성은 매장 안으로 다시 들어가서 우산을 구입하였고, 이번에는 우산을 다시 빼앗기지 않으려고 꼭 쥐고선 집으로 귀가하였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비올 때 다른 사람이 사용하고 있는 우산을 빼앗는 사람은 나쁜 사람입니다. 비올 때는 다른 사람이 사용하는 우산을 빼앗지 말아야 합니다. 비가 올 때에 우산 여러 개를 들고 가면서 번갈아 사용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크기와 모양은 다를지언정 자신이 사용하는 하나의 우산만으로 비를 피합니다. 유일한 하나의 우산입니다. 하나밖에 남지 않은 유일한 것을 빼앗아 가는 사람은, 바로 비 올 때에 우산을 빼앗아 가는 사람과 똑같습니다.
저는 체질적으로 은행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은행이라는 기관이 돈 있는 사람에게는 쉽게 돈을 빌려 주지만, 정작 돈이 필요한 서민들에게는 문을 걸어 닫고 돈을 잘 빌려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정작 돈이 필요한 서민에게는 문턱이 매우 높은 은행입니다.
잘 나가는 회사에게는 담보가 좀 부실하여도 까탈스럽지 않게 돈을 잘 대출해 줍니다. 그러나 회사 경영이 어렵다는 소문이 나고, 공장이 잘 돌아가지 않는다는 풍문이 돌면, 빌려준 돈을 서둘러 받으려고 안절부절한 은행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은행의 생리입니다.
예전에 기업은행장을 지냈던 어떤 분이 중소기업을 하는 사람들을 모아 놓고 “우리 기업은행은 기업하는 여러분과 같이 가겠습니다. 어려울 때 돈을 회수하지 않고, 여러분들이 어려울 때일수록 더 도와 드리고 싶습니다. 비올 때 우산을 빼았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하엿습니다. 기타 시중에 있는 수십 개 일반 은행과 다른 모습을 보여주자, 참석한 중소기업사장들이 일제히 일어서서 기립박수를 보냈다고 합니다.
여러분들 또한 비올 때에 비로부터 그 사람을 보호하는 우산을 빼앗지 마십시오. 어떤 사람이 어려워 할 때에 그 사람을 막아주는 유일한 겉옷을 빼앗아서는 안 됩니다. 이런 무자비하고 매몰찬 모습은 하나님이 싫어하는 모습입니다. 내 겉옷을 벗어서 그 사람에게 입혀 주지는 못할망정,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유일한 희망을 빼앗는 자는 성도의 본문을 다하지 못하는 자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이 바로 “비 올 때에 우산을 뺏지 말라”는 말씀의 원조입니다.
본문의 내용으로 들어가 봅시다. 여러분이 익히 잘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여리고에 디매오의 아들 바디매오가 살고 있었습니다. <디매오>란 “소경”이라는 뜻이고, <바>는 “아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바디매오>는 “소경의 아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아들 바디매오도 소경이요, 그의 아버지도 소경이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 모두 소경으로 참 모진 인생을 살아가는 부자지간이었습니다. 게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돈이 없어서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구하고 빌어먹고 살아야 하는 거지신분이었습니다.
하루는 자신이 구걸하고 있는 지역으로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말을 사람들을 통해 듣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자신의 주변으로 오기를 기다렸다가 큰 소리로 외칩니다.
47절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목청을 드높여서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쪽을 향하여 고함을 칩니다. 그러자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시끄럽다”면서 꾸짖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바디매오는 포기하지 않고, 더 큰 목소리로 고함을 지르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은 바디매오가 소리 지르는 것을 들으셨습니다. 49절,“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저를 부르라 하시니 저희가 그 소경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너를 부르신다”
그러자 바디메오는 너무나 좋아서 겉옷을 내어 버리고 예수님의 목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이때에 예수님께서 다시 묻습니다.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너가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 하는 말이에요. 이에 바디메오가 대답하기를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그러자 예수님이 무엇이라 말씀하십니까? 52절 함께 보십시다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저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좇으니라” 할렐루야~
방금 제가 예수님과 바디메오의 만남과 대화를 풀어 설명해 드렸습니다. 여기에서 오늘 설교의 주제인 “비올 때에 우산을 빼앗으면 안 된다”는 의미를 찾아 보고 말씀으로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1. 비올 때 우산을 빼앗지 말아야 합니다.
거리에 비가 내립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은 비를 맞고 가는 사람이 안스러워 자신의 우산 한 모퉁이를 내어 주는 분이 있습니다. 당연히 우산을 샅이 쓰고 가면 나의 한쪽은 비를 더 맞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우산을 건네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우산을 건네주지는 못할 망정, 도리어 타인의 우산을 뺏는 사악한 사람이 있습니다.
본문에서 바디메오는 인생에 내리는 모든 비를 속절없이 맞아야 하는 사람입니다. 바디매오가 겪고 있는 절망적인 상황을 몇 가지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①대를 이은 소경, ②대를 이은 가난, ③대를 이은 가난과 불행, ④대를 이은 구걸과 거지, ⑤하지만 언제나 돌아오는 멸시와 냉대.
어느 면으로 보나, 바디메오는 자신의 인생에 내리고 있는 비를 속절없이 맞고 있는 인생입니다. 예수님이 지나간다는 소문을 듣고 유일하게 자신이 할 수 있는 목청을 높여서 “자신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외쳤지만, 돌아오는 것은 “잠잠하라, 시끄럽다. 입 다물어라”고 하는 사람들의 냉대와 외면뿐이었습니다. 피할 곳도 없고 방법도 없는 바디메오 였습니다.
미국에 있는 동생 집에 초청을 받아 미국을 방문하였다가 갑자기 중병에 걸려 대수술을 받아야 하는 한국인이 있었습니다. 미국에 잠시 여행하는 여행자이고, 나이도 이미 60을 넘긴 여성입니다. 그런데도 병원에서는 “병든 사람은 일단 살려야 합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수술하여 완치시킵니다. 두 달을 병원에 있다가 퇴원하니 병원비가 5만불(5천만원)이 나온 거에요. 미국 병원비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고액입니다. 그러니 다들 보험에 가입하여 그것으로 사용하는 것이지요. 병원에서 말하기를 “일단 위기상황은 벗어났고 치료를 했으니 5만불을 갚기 바랍니다. 지금 지불할 돈이 모자라면, 한국에 귀국한 뒤에 돈을 송금해 주십시오. 안 보내셔도 됩니다. 그러나 안 갚으면 다시는 미국에 들어 올 수 없습니다”
그리고는 “병원비 보증 서라”는 말도 없고, 누구를 옭아매는 서류도 내밀지 않고 그냥 퇴원수속을 해 줍니다. 이 분이 한국에 귀국하여서 모든 병원비를 송금하고 난 뒤에 이 사실을 재미교포 사회신문에다가 알린 것입니다. 돈에 대하여 철저하다는 평가가 있는 미국병원이지만, 이런 면에서 신사적이지요. 일단 비가 오면 우산을 먼저 건네 주는 나라입니다.
하지만, 한국 병원은 어떠한가요? 돈이 없으면 거리로 바로 쫓겨납니다. 친구 목사님 교회 학생 한 명이 오토바이 배달을 하다가 사고가 난 거에요. 오토바이에서 땅에 떨어 질 때에, 그만 혀가 물려 버렸고, 이로 인해 혀의 일부가 잘려 버린 상황입니다. 한밤중에 병원 응급실에서 담당의사가 목사님에게 전화가 온 거에요.
목사님이 부랴부랴 달려가 보니, 당직 의사는 “100만원을 내야만 응급처치가 치료가 들어간다”고 말한 거에요. 그런데 갑자기 100만원을 어디서 구합니까? 보통 서민 집에 현금 100만원 정도를 늘 장롱 속에 넣고 사는 사람이 흔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카드를 급하게 내밀었는데, 카드는 밤이라 안 받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님에게 연락하였고, 목사님은 회계 장로에게 또 전화해서 현금 100만원을 가지고 오라고 부탁하고, 그리고 돈이 병원 원무과에 입금되자, 혀를 꼬매기 시작하였다는 말을 들어 보았습니다.
현재 한국의 모습입니다. 저도 10년전에 큰 수술로 백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겪었던 놀라운 것이 사흘에 한 번씩 중간 정산한다고 병원비를 요구합니다. 그 중간정산 병원비가 입금이 되지 않으면 다음 치료나 수술은 연기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느낀 것이 참 지독한 것이 병원이구나. 행여 병원비 갚지 못할까 싶어서 안달이 나더라구요. 담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금입금이 안되면 연장치료거부라는 말에 절대로 아프면 안 되겠구나 생각했습니다.
단돈 100만원 때문에, 젊은 청년의 인생이 달려 있는 일에 주저합니다. 비가 내리고 있는데, 우산을 받쳐 줄 생각은 아니하고, 도리어 우산 값을 내라고 말하고, 어떤 경우에는 있는 우산마저 빼앗는 경우가 있습니다. 비가 올 때에 타인이 쓰고 있는 우산을 빼앗으면 안 됩니다. 내가 그 우산을 가져갈 정당한 당위성이 있어도 비를 피한 뒤에 우산을 거두어야 합니다.
왜 예수님께서 “5리를 가자고 하면 10리를 가고,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까지 주라”고 말했을까요? 이 또한 다른 사람의 우산을 빼앗지 말라는 뜻이고, 상대방이 비를 맞고 있다면 은총과 자비를 베풀어 주라는 말씀입니다.
내가 가진 우산을 건네주는 여러분들이 되기 바랍니다. 사랑을 베풀어 주십시오. 내가 가지고 있는 우산이 하나라서, 절대 줄 수 없는 것이라 생각된다면, 우산의 공간을 조금 비워 다른 사람을 그 공간 안에 들이도록 하십시오. 이것이 바로 사랑의 표현이요, 타인의 배려하는 관용의 모습임을 깨닫기 바랍니다.
2. 비올 때에는 우산을 주시기 바랍니다.
52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
사람들은 바디메오가 가진 희망의 우산을 빼앗고 꺽어 버렸습니다. 바디메오가 예수님에게 나아가는 발걸음을 막았습니다. 예수님을 향하여 외치는 바디메오의 입을 틀어 막고 시끄러우니 조용히 하라고 윽박질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세상 사람들처럼 행동하지 않았습니다. 아무에게도 관심을 받지 못하고 철저하게 소외되고 외롭게 방치되었던 바디메오에게 부르십니다. 그리고는 바디메오가 온전하게 남은 평생을 살아가도록 그의 눈을 띄게 해 줍니다. 단순하게 눈만 고쳐 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향하여 부르짖는 믿음을 보시고,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는 놀라운 말씀을 하면서 바디메오를 거두어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예수님만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에게만 팔을 내미시기 바랍니다. 예수님만이 나의 문제를 풀어 주시는 분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향해 도와달라는, 그리고 살려 달라는 단발마적인 외침이 바디매오가 가지고 있었던 유일한 희망의 우산이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말도 못 하게 가로막고 억눌러 버렸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다가 오셔서 바디메오의 말을 다 들어 줍니다. 그리고 바디메오의 눈을 뜨게 하심으로, 바디메오 인생에 다가오는 풍파를 막을 수 있는 우산을 주셨습니다.
저는 요즈음 들어와서 세상이 참으로 각박하다는 생각을 많이 하였습니다. 특히 작년 12월 중순 이후로 1월을 보내고 2월 중순을 맞이한 이 시점에서 ‘무엇이 진리이고, 무엇이 참된 것일까?’라는 문제를 절실하게 생각해 보았습니다.
왜 하나님을 믿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이리도 모질고, 이리도 거칠게 함부로 행동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정도를 걸어가는 것이 이리도 힘든 것인가? 그리고 과연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정의와 올바름은 무엇인가?’ 이 문제를 날마다 생각하고, 또한 강대상에 무릎을 꿇고 늘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뜻을 외면합니다. 자신의 생각과 판단만으로 하나님의 뜻을 덮어 버립니다. 교회에서도 온전한 믿음의 모습이 사라져 버렸고, 국가적으로도 온전한 의로움의 정의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을 힘들게 하고 대적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같이 싸우지 마시기 바랍니다. 같이 비난의 화살을 날리고, 같이 목청을 높이면서 싸우고, 상대방이 주먹질하였다고,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방식으로 똑같이 되갚아 주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제가 믿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흔드는 사람,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을 악랄하게 괴롭히는 자들은 하나님이 심판하신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기독교역사 2천년에서 나타난 증거이고, 또한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의로움의 모습입니다.
중요한 것은 상대방이 나의 우산을 빼앗는다고 해서 그들의 우산을 빼앗고자 같이 싸우지 마십시오. 교회를 흔들고 있는 그들 모두가 하나님의 우산이 필요한 불쌍한 사람들이라 생각하십시오. 그들은 성령의 단비를 맞아 은혜의 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더럽고 냄새나는 불신의 비를 맞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사탄에게 조정되어 사탄이 이끄는 대로 움직이고 있는 불쌍한 영혼, 상처받은 영혼의 소유자들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먼저 믿은 우리들이 우산을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사랑을 베풀어 주고, 비난 할 때에 묵묵히 감싸주어야 합니다. 내 오른 뺨을 치거든 내 왼쪽 편 뺨도 돌려 내세우는 관용을 보여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그들에게 우산을 씌여 주고 베풀어주는 방법입니다.
인도네시아 정글 속에서 토인들에게 전도하던 선교사의 고백입니다. 깊은 밀림 속에 잇는 토인 마을에 전도하러 들어갔습니다. 마을을 영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무당(셔먼)이 다가 왔습니다. 무당의 모습을 본 선교사는 기겁을 합니다. 왜냐하면, 몸은 골리앗같이 크고, 얼굴과 몸에는 피와 같은 붉은 액체로 칠갑을 한 흉측한 모습이었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무서운 나머지 선교사는 마을을 도망쳐 나옵니다. 도심지에 있는 선교본부로 돌아와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면서 선교사는 눈물을 흘리기 시작합니다. 악한 영의 무리와 당당하게 맞서 싸울 수 있는 영적 권세와 힘이 없는 자신이 밉고 보기 싫은 거에요.
한참이나 울면서 기도하다가 깜박 잠이 들었는데, 어떤 소리가 들리는 거에요. “내가 힘이 없어서 비참하게 십자가를 지었고, 내가 능력이 없어서 사람들에게 조롱을 당했다고 생각하느냐?”라는 음성을 들은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상대방을 배려하고, 상대방이 가지고 잇는 우산을 빼앗지 마십시오. 그리고 내 우산을 먼저 꺼내어 상대방에게 씌워 주는 관용과, 아량, 그리고 사랑과 희생이 모습이 절실한 때입니다. 이런 아름다운 행동을 우리 덕민교회 성도님들이 먼저 행동으로 실천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자비와 아량을 베풀지 못하면 하나님 또한 나에게 자비와 아량을 베풀지 않습니다. 우산의 작은 공간이지만 내어 주는 성도에게 하나님이 더 큰 은혜를 베푼다는 점 잊지 맙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