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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 인간이 초래한 생태 위기의 근원들을 인식하지 않고서 그 증상들을 설명하는 것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인간의 삶과 활동을 이해하는 특정한 방식이 왜곡되어 현실을 파괴하는 지경에 이를 정도로 빗나가게 되었습니다. 이것에 대하여 차근차근 성찰해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강력한 기술 지배 패러다임과 이 세상에서 인간과 인간 행동이 차지하는 자리에 초점을 맞출 것을 제안합니다.
Ⅰ. 기술 : 창의력과 힘
102. 인류는 자신의 기술력 때문에 갈림길을 마주하게 된 새로은 시대에 접어들었습니다. 우리는 두 세기에 걸친 커다란 변화의 물결을 물려받았습니다. 여기에는 증기 기관, 철도, 전신, 전기, 자동차, 비행기, 화학 산업, 현대 의학, 컴퓨터 공학과 더불어 좀 더 최근에는 디지털 혁명, 로봇 공학, 생명 공학, 나노 공학이 있습니다. 이러한 발전을 기뻐하고 우리 앞에 계속 펼쳐지는 엄청난 가능성에 흥분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과학과 기술은 하느님께서 주신 인간 창의력의 놀라운 산물"이기 때문입니다. 유용한 목적을 위하여 자연을 변화시키는 것은 인류가 그 시초부터 지녕 온 특징입니다. 기술 그 자체는 "인간이 점차 물질적 한계를 넘어서도록 촉구하는 내적 긴장을 나타냅니다." 기술은 인간을 위협하고 제한하는 많은 폐단들을 개선해 왔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발전, 특히 의학과 공학과 통신의 발전을 어찌 인정하지 않고 고맙게 여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지속 가능한 발전을 이루는 대안들을 마련해 준 많은 과학자들과 기술자들의 업적을 어찌 인정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103. 기술 과학이 방향을 제대로 잡는다면, 유용한 가전제품부터 대형 운송 수단, 교량, 건물, 공공장소에 이르기까지 인간 삶의 질을 증진하는 데에 매우 소중한 수단을 생산하기만 하지는 않습니다. 기술 과학은 아름다움을 창출해 내어 물질세계에 존재하는 인간이 아름다움의 세계로 '도약'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항공기나 마천루의 아름다움을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새로운 기술을 활요한 훌륭한 미술 작품과 음악 작품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기술적 도구들을 사용한 이들이 의도한 아름다움을 통하여, 그 아름다움에 대한 관상을 통하여, 비약적 도약이 일어나 결국 인간 고유의 충만함에 이르게 됩니다.
104. 우리는 핵에너지, 생명 공학, 컴퓨터 공학, 그리고 우리 자신의 유전 정보에 대한 지식과 더불어 우리가 이룩한 많은 다른 능력들이 우리에게 엄청난 힘을 가져다준 것도 인정해야 합니다. 엄밀히 말해서, 이러한 능력들은 온갖 기술 지식, 특히 그것을 활용할 수 있는 경제적 재원을 확보한 이들이 인류 전체와 온 세상을 강력하게 지배할 수 있게 해 왔습니다. 일찍이 인류가 이 정도의 힘을 지닌 적이 없었습니다. 특히 현재 그러한 힘이 쓰이는 용도를 살펴보면 그 무엇도 그러한 힘이 지혜롭게 사용되리라는 것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20세기 중반에 투하된 핵폭탄과 더불어 나치즘, 공산주의, 여러 전체주의 정권들이 수백만의 사람을 살상하려고 개발한 엄청난 기술의 동원을 생각해 보기만 하면 됩니다. 현대전에 동원되는 더 치명적인 무기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토록 엄청난 힘이 누구의 손에 있고 결국 이 힘이 어떤 결과를 불러오겠습니까? 소수의 사람들이 이 힘을 차지하는 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105. 사람들은 힘이 늘수록 "진보"가 이루어지고, "안전, 유용성, 복지 활력, 가치 충만의 증가"가 이루어진다고 믿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는 마치 실재와 선과 진리가 이러한 기술과 경제의 힘에서 저절로 생겨난다고 여기는 것과 같습니다. "현대인들은 힘이 올바로 사용하는 교육을 받지 못한"것이 사실입니다. 이 엄청난 기술 발전에 인간의 책임과 가치관과 양심의 발전이 함께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모든 시대는 그 시대가 지닌 한계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인류가 자신이 당면한 도전의 심각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자유의 규범이 아니라 이른바 유용성과 안전만이 요청되는 " 경우에는 "인간이 그 힘을 올바르게 사용하지 못할 위험이 지속적으로 증가합니다." 인간은 완전히 자율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인간의 자유는 무의식, 즉각적인 욕구, 이기주의, 잔인한 폭력의 맹목적인 힘 앞에 무너질 때 병들게 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인간은 아무런 통제 수단도 없이 커져만 가는 자기의 힘 앞에 무방비로 노출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형식적인 수단들은 마련해 두었으나, 실제로 한계를 정하고 냉철한 자제력을 가르쳐 줄 수 있는 건전한 윤리와 문화와 영성을 갖추지 못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Ⅱ. 기술 지배 패러다임의 세계화
106. 근본적인 문제는 좀 더 심각한 다른 것, 곧 인류가 기술과 그 발전을 획일적이고 일차원적 패러다임에 따라 받아들이는 방식에 있습니다. 이러한 패러다임에서는 외부 대상을 논리적 이성적 과정 안에서 점진적으로 인식하여 지배하는 주체라는 개념이 생겨납니다. 그 자체가 이미 소유와 지배와 변형의 기술인 과학적 실험적 방법을 정립하려고 이 주체는 최선의 노력을 다합니다. 이는 마치 이 주체가 완전히 제멋대로 조작할 수 있는 무형의 실재 앞에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인간은 언제나 자연에 개입해 왔습니다. 그러나 오랫동안 이는 사물 자체의 가능성을 존중하며 더불어 존재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자연이 직접 손을 내밀어 주듯 스스로 허락한 것을 받아들인다는 의미였습니다. 반대로 이제는 만물에 손을 대는 것은 인간입니다. 그러면서 인간은 종종 우리 앞에 있는 실재를 무시하거나 망각하면서 만물에서 최대한 모든 것을 뽑아내려고 시도합니다. 그래서 인간과 사물들은 더 이상 서로 다정한 손길을 건네지 못하고 적대적으로 대립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인간은 무한 성장 또는 제약 없는 성장이라는 개념을 쉽사리 받아들이게 되었으며, 경제학자, 금융 전문가, 기술자들은 이에 큰 매력을 느꼈습니다. 이는 지구 자원을 무한히 활용할 수 있다는 거짓을 바탕으로 한 것으로, 지구를 그 한계를 넘어서 최대한 '쥐어짜는' 데에 이르게 됩니다. 이는 "무한한 양의 에너지와 자원을 이용할 수 있고, 그것들을 신속히 재생할 수 있으며, 자연 질서의 착취에서 오는 부정적인 결과는 쉽게 완할될 수 있다."는 그릇된 개념입니다.
107. 그러므로 현대 세계의 많은 어려움은, 사람들이 언제나 의식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무엇보다도 개인의 사람과 사회의 기능을 좌우하는 인식의 패러다임에 따라 과학과 기술의 방법론과 목적을 설정하려는 경향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방식을 인간과 사회의 모든 실재에 적용한 결과는 환경 악화로 드러났습니다. 그러나 이는 인간 생활과 사회생활의 모든 측면에 영향을 미치는 환원주의의 한 지표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기술의 산물이 가치 중립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기술의 산물은 결국 특정 권력 집단의 이해관계에 따라 생활 양식을 좌우하고 사회적 기회들을 조성하는 틀을 만들기 때문입니다. 순전히 도구적인 것으로 보이는 결정도 실제로는 우리가 어떤 사회를 건설하려고 하는지와 관련된 결정입니다.
108. 또 다른 문화적 패러다임을 장려하고 기술을 단지 도구로만 이용한다는 개념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 기술 지배 패러다임이 매우 강력해져서 이를 수단으로 하지 않고 사는 것이 어려워졌고, 그 논리에 지배되지 않은면서 그것을 활용하는 것은 더욱 어려워졌습니다. 기술과 그에 드는 비용, 세계화하고 획일화하는 그 힘에서 부분적으로나마 벗어나는 것을 목적으로 한 생활 양식의 선택은 반문화적인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사실 기술은 모든 것을 그 엄격한 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기술을 지닌 이들은 "기술이 궁극적으로 인간의 이익과 행복을 향하여 나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기술의 동기인 권력이 모든 것에 대한 지배권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 그 결과 "인간은 자연과 인간 본성의 본래 요소들을 모두 움켜쥡니다." 그래서 개인의 결단력, 온전한 자유, 고유한 창조성을 위한 자리가 줄어들게 됩니다.
109. 기술 지배 패러다임은 또한 경제와 정치를 지배하고자 합니다. 경제는 이윤을 목적으로 모든 기술 발전을 받아들이며 인간에게 미치는 잠재적 악영향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금융은 실물 경제를 질식시켜 버립니다. 우리는 세계 금융 위기에서 교훈을 얻지 못했고, 환경 훼손에서는 너무 더디게 교훈을 얻고 있습니다. 일부 집단은 현대 경제와 기술이 모든 환경 문제를 해결할 것이고, 또한 비전문적인 언어를 동원하여 전 세계 기아와 빈곤이 단순히 시장의 성장만으로 해결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오늘날 그 누구도 감히 옹호하지 않은 특정 경제 이론들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경제를 기능하게 하는 실제적 운용만을 중시합니다. 그 이론들을 그들이 말로는 지지하지 않을지 몰라도, 더 균형 잡힌 수준의 생산, 더 나은 부의 분배, 환경과 미래 세대의 권리에 대한 배려에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는 행동으로 그 이론들을 지지합니다. 그러한 행동은 그들에게는 이윤 극대화만으로 충분하다는 것을 입증합니다. 그러나 시장 자체가 온전한 인간 발전과 사회 통합을 보장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시장 자체가 온전한 인간 발전과 사회 통합을 보장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속되고 있는 비인간적인 박탈 현상과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대비되는 낭비적이고 소비 중심적인 일종의 '초발전'"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 반면에, 가난한 이들이 정기적으로 생필품을 받을 수 있게 해 주는 경제 제도와 사회 계획의 개발은 너무 더딥니다. 우리는 현재 우리가 실패하고 있는 것의 가장 깊은 뿌리를 보지 못합니다. 이는 기술과 경제 성장의 방향, 목적, 의미, 사회적 맥략과 관련됩니다.
110. 기술의 전문화는 큰 그림을 보지 못하게 만듭니다. 지식의 세분화는 구체적인 적용에는 도움이 되지만, 흔히 전체에 대한 감각, 사물들의 관계에 대한 감각, 넓은 지평에 대한 감각을 잃어버리게 만들어, 그 감각이 결국 소용없게 되어 버립니다. 바로 이 때문에 오늘날 세계의 가장 복잡한 문제들, 특히 환경과 가난한 이들에 관한 문제의 적절한 해결책을 마련하기가 어렵습니다. 이러한 문제들은 단일한 관점이나 이해관계로만 다루어질 수 없습니다. 중대한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려는 과학은 철학과 사회 윤리를 포함한 다른 학문 분야의 지식을 반드시 참고해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이를 실천하는 것은 무척 힘이 듭니다. 참고할 만한 참다운 윤리적 지평도 깨달을 수조차 없습니다. 삶은 점차 기술의 영향을 받는 상황에 종속됩니다. 기술 자체가 존재의 의미를 해석하는 핵심으로 여겨집니다. 우리가 마주하는 구체적 상황에는 환경 훼손, 불안, 삶의 의미와 공동생활의 의미 상실과 같은 잘못을 보여 주는 많은 증상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실재가 생각보다 더 중요하다."라는 것ㄷ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111. 생태 문화는 환경 훼손, 천연자원의 고갈, 오염과 관련된 문제에 대한 일련의 신속한 부분적 해답들로 축소될 수 없습니다. 기술 지배 패러다임의 공세에 대항하는 다른 시각, 사고방식, 정책, 교육 계획, 생활 양식, 영성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심지어 최선의 환경 보호 운동도 동일한 세계화의 논리에 빠져 버리고 말 것입니다. 개별적으로 나타나는 환경 문제에 대한 기술적 해결 방안만을 찾는 것은, 실제로 서로 이어져 있는 것들을 분리하고, 세계 체제가 안고 있는 가장 심각한 진짜 문제들을 숨기는 것입니다.
112. 그러나 우리는 다시 한번 시야를 넓힐 수 있습니다. 인간의 자유는 기술을 제한하고 그 방향을 바꾸어 기술이 다른 형태의 발전, 곧 좀 더 건전하고 인간적이고 사회적이며 통합적인 발전에 이바지하게 할 수 있습니다. 강력한 기술 지배 패러다임에서 벗어나는 일이 실제로 가끔 일어납니다. 예를 들어, 군소 생산자들이 오염을 줄이는 생산 방식을 채택하여 소비 지상주의를 지양하는 삶과 여유와 공동생활 방식을 선택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는 기술이 다른 사람들의 구체적 문제 해결을 우선 목표로 삼아, 그들이 더 존엄하게 덜 고통받으며 살아가도록 돕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한 아름다운 것을 만들어 이를 바라보려는 의지가 모든 대상을 객관화하려는 힘을 극복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는 아름다움과 그것을 바라보는 이에게는 일종의 구원이 됩니다. 새로운 종합을 요청하는 참된 인류에는 마치 닫힌 문 아래 틈 사이로 스며들어 오는 안개처럼 알게 모르게 기술 문명 한가운데 자리 잡는 듯합니다. 참된 인류애의 굳건한 저항으로 싹트는 그 기대는 모든 어려움에도 영원한 것이 될 수 있겠습니까?
113. 다른 한편으로 사람들이 더 이상 행복한 미래를 믿ㄹ지 않는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들은 더 이상 현재의 세계 정세와 기술력을 근거로 하는 더 나은 미래를 맹목으로 신뢰하지 않는 것입니다. 과학과 기술 발전이 인류와 역사의 발전과 동일시될 수 없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더 나은 미래를 향한 길은 근본적으로 다른 데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기술이 마련해 주는 기회들을 거부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그렇지만 인류는 커다란 변화를 거쳤고, 계속 나타나는 새로운 것들은 우리를 지나치게 피상적으로 한 방향으로만 이끄는 찰나적인 것을 신성하게 여기게 합니다. 잠시 멈추어 삶의 깊이를 되찾는 일이 힘들어졌습니다. 건축물이 시대정신을 반영한다면, 초대형 건축물과 획일적으로 지어진 주택 단지는 세계화된 기술 정신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는 끊임없이 넘쳐나는 새로운 상품과 엄청난 단조로움이 공존합니다. 이에 굴복하지 말고 모든 것의 목적과 의미에 대한 질문을 멈추지 맙시다. 그러지 않으면, 우리는 단지 현재 상황을 합리화하여 우리의 공허함을 달래 줄 대체재가 점차 더 많이 필요하게 될 것입니다.
114.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일들은 우리가 대담한 문화적 혁명을 통하여 앞으로 나아가야 할 절박한 필요성을 알려 줍니다. 과학과 기술은 가치 중립적이지 않아서 한 과정의 처음부터 끝까지 여러 의도와 가능성들이 개입되어 다양한 방식으로 구체화될 수 있습니다. 석기 시대로 돌아가자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속도를 줄여서 다른 방식으로 현실을 바라며며 긍정적이고 지속 가능한 발전을 받아들이는 것과 더불어, 지나친 과대망상으로 잃어버린 가치와 중요한 목표들을 되찾아야 합니다.
Ⅲ. 현대 인간 중심주의의 위기와 영향
115. 역설적으로 현대 인간 중심주의는 실재보다는 기술적 사고의 손을 들어 주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인간은 더 이상 자연을 타당한 규범이나 살아가는 거처로 여기지 않습니다. 인간은 자연을 아무런 전제 없이 있는 그대로 물건을 만들려는 자리와 재료로 여기며, 그 결과로 어떤 일이 발생하든 관심이 없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고유한 가치가 떨어지게 됩니다. 인간은 이 세상에서 제자리를 되찾지 못하면 자기 자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결국 스스로 모순된 행동을 하고 맙니다. "인간이 그 본래의 선한 목적을 따라 사용하도록 하느님에 의하여 그에게 주어졌을뿐 아니라, 인간도 인간 자신에게 하느님에 의하여 주어졌으며, 이러한 이유로 인간은 자신이 타고나는 자연적이고 윤리적인 구조를 존중해야 합니다."
116. 근대에는 지나친 인간 중심주의가 있어 왔고, 이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또 다른 모습으로 위장하여 공동의 이해와 사회적 결속 강화를 위한 모든 노력을 저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현실과 인간 중심주의가 불러온 한계에 새롭게 주의를 기울일 때가 되었습니다. 이는 개인과 사회가 더욱 건전하고 풍요롭게 발전하기 위한 조건이 됩니다. 그리스도교 인간학이 적절하게 제시되지 못한 것이 인간과 세상의 관계에 대한 오해를 낳았습니다. 프로메테우스처럼 세상을 지배하려는 꿈이 퍼져 나가면서, 자연 보호는 나약한 사람들이나 하는 일이라는 인식이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세상에 대한 우리의 '지배'는 책임 있는 관리라는 의미로 올바르게 이해되어야 합니다.
117. 인간이 자연에 끼친 해악과 인간의 결정이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평가하는 데에 태만한 것은 자연의 구조 안에 새겨진 메시지에 대한 무관심을 뚜렷하게 보여 줄 뿐입니다. 예를 들어, 현실에서 가난한 이, 인간 배아, 장애인이 지닌 가치를 인식하지 못할 때 자연의 울부짖음 자체에도 귀를 기울이기가 어려워집니다.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인간이 현실에서 독립된 존재임을 선언하고 절대적 지배자를 자처하면, 인간 삶의 기초 자체가 붕괴됩니다. "인간은 세계에서 하느님의 협조자로서 역할을 수행하는 대신, 부당하게 하느님의 자리에 자신을 올려놓으며, 이렇게 인간은 자연의 반항을 자극" 하기 때문입니다.
118. 이러한 상황은 우리를 끊임없이 정신 분열로 이끌어 왔습니다. 여기에는 다른 존재들의 고유한 가치를 부인하는 기술 지배에 대한 찬양부터 인간의 그 어떠한 특별한 가치도 인정하지 않는 반응까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성을 간과할 수 없습니다. 인간이 새로워지지 않으면 자연과 새로운 관계를 맺을 수 없습니다. 올바른 인간학 없이는 생태론도 있을 수 없습니다. 인간이 단지 여러 존재들 가운데 하나로, 우연이나 물리적인 결정론의 산물로 여겨질 때, "우리의 전반적 책임 의식은 약화될 것"입니다. 그릇된 인간 중심주의가 반드시 '생물 중심주의'에 자리를 내어 줄 필요는 없습니다. 이러한 생물 중심주의는 오늘날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하며, 문제들을 가중시키는 또 다른 불균형을 일으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인간만이 지닌 고유한 지성, 의지, 자유, 책임의 능력을 인정하지 않고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면, 인간이 이 세상을 책임있게 대할 것을 바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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