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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 근본적인문제는 좀 더 심각한 다른것, 곧 인류가 기술과 그 발전을 획일적이고 일차원적 패러다임에 따라 받아들이는 방식에 있습니다. 이러한 패러다임에서는 외부 대상을 논리 이성적 과정 안에서 점진적으로 인식하여 지배하는 주체라는 개념이 생겨납니다. 그 자체가 이미 소유와 지배와 변형의 기술인 과학적 실험적 방법을 정립하려고 이 주체는 최선의 노력을 다합니다. 이는 마치 이 주체가 완전히 제멋대로 조작할 수 있는 무형의 실재 앞에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인간은 언제나 자연에 개입해 왔습니다. 그러나 오랫동안 이는 사물 자체의 가능성을 존중하며 더불어 존재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자연이 직접 손을 내밀어 주듯 스스로 허락한 것을 받아들인다는 의미였습니다. 반대로 이제는 만물에 손을 대는 것은 인간입니다. 그러면서 인간은 종종 우리 앞에 있는 실재를 무시하거나 망각하면서 만물에서 최대한 모든 것을 뽑아내려고 시도 합니다. 그래서 인간과 사물들은 더 이상 서로 다정한 손길을 건네지 못하고 적대적으로 대립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인간은 무 한 성장 또는 제약 없는 성장이라는 개념을 쉽사리 받아들이게 되었으며. 경제학자, 금융 전문가, 기술자들은 이에 큰 매력을 느꼈습니다. 이는 지구 자원을 무한히 활용할 수 있다는 거짓을 바탕으로 한 것으로, 지구를 그 한계를 넘어서 최대한 '쥐어짜는’ 데에 이르게 됩니다. 이는 “무한한 양의 에너지와 자원을 이용할 수 있고, 그것들을 신속히 재생할 수 있으며, 자연 질서의 착취에서 오는 부정적인 결과는 쉽게 완화될 수 있다”는 그릇된 개념입니다.
107. 그러므로 현대 세계의 많은 어려움은, 사람들이 언제나 의식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무엇보다도 개인의 삶과 사회의 기능을 좌우하는 인식의 패러다임에 따라 과학과 기술의 방법론과 목적을 설정하려는 경향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방식을 인간과 사회의 모든 실재에 적용한 결과는 환경 악화로 드러났습니다. 그러나 이는 인간 생활과 사회생활의 모든 측면에 영향을 미치는 환원주의의 한 지표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기술의 산물이 가치 중립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기술의 산물은 결국 특정 권력 집단의 이해관계에 따라 생활 양식을 좌우하고 사회적 기회들을 조성하는 틀을 만들기 때문입니다. 순전히 도구적인 것으로 보이는 결정도 실제로는 우리가 어떤 사회를 건설하려고 하는지와 관련된 결정입니다.
108. 또 다른 문화적 패러다임을 장려하고 기술을 단지 도구로 만 이용한다는 개념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 기술 지배 패러다임이 매우 강력해져서 이를 수단으로 하지 않고 사는 것이 어려워졌고, 그 논리에 지배되지 않으면서 그것을 활용하는 것은 더욱 어려워졌습니다. 기술과 그에 드는 비용, 세계화하고 획일화하는 그 힘에서 부분적으로나마 벗어나는 것을 목적으로 한 생활양식의 선택은 반문화적인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사실 기술은 모든 것을 그 엄격한 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기술을 지닌 이들은 “기술이 궁극적으로 인간의 이익과 행복을 향하여 나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극단적으로 말하자 면 기술의 동기인 권력이 모든 것에 대한 지배권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 결과 “인간은 자연과 인간 본성의 본래 요소들을 모두 움켜쥡니다.” 그래서 개인의 결단력,온전한 자유,고유한 창조성을 위한 자리가 줄어들게 됩니다.
109. 기술 지배 패러다임은 또한 경제와 정치를 지배하고자 합니다. 경제는 이윤을 목적으로 모든 기술 발전을 받아들이며 인간에게 미치는 잠재적 악영향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금융은 실물 경제를 질식시켜 버립니다. 우리는 세계 금융 위기에서 교훈을 얻지 못 했고. 환경훼손에서는 너무 더디게 교훈을 얻고 있습니다. 일부 집단은 현대 경제와 기술이 모든 환경 문제를 해결할 것 이고,또한 비전문적인 언어를 동원하여 전 세계 기아와 빈곤이 단순히 시장의 성장만으로 해결 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오늘날 그 누구도 감 히 옹호하지 않는 특정 경제 이론들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경제를 가능하게 하는 실제적 운용만을 중시합니다. 그 이론들을 그들이 말로는 지지하지 않을지 몰라도, 더 균형 잡힌 수준의생산, 더 나은 부의 분배, 환경과 미래 세대의 권리에 대한 배 려에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는 행동으로 그 이론들을 지지합니다. 그러한 행동은 그들에게는 이윤 극대화만으로 충분하다는 것을 입증 합니다. 그러나 시장 자체가 온전한 인간 발전과 사회 통합을 보장할 수 없습니다,그런데 우리는 “지속되고 있는 비인간적인 박탈 현상 과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대비되는 낭비적이고 소비 중심적인 일종의 초발전”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 반면에, 가난한 이들이 정기적으로 생필품을 받을 수 있게 해 주는 경제 제도와 사회 계획의 개발은 너무 더딥니다. 우리는 현재 우리가 실패하고 있는 것의 가장 깊은 뿌리를 보지 못합니다. 이는 기술과 경제 성장의 방향, 목적, 의미,사회적 맥락과 관련됩니다.
110. 기술의 전문화는 큰 그림을 보지 못하게 만듭니다. 지식의 세분화는 구체적인 적용에는 도움이 되지만,흔히 전체에 대한 감각, 사물들의 관계에 대한 감각, 넓은 지평에 대한 감각을 잃어버리게 만들어,그 감각이 결국 소용없게 되어 버립니다. 바로 이 때문 에 오늘날 세계의 가장 복잡한 문제들, 특히 환경과 가난한 이들에 관한 문제의 적절한 해결책을 마련하기가 어렵습니다. 이러한 문제 들은 단일한 관점이나 이해 관계로만 다루어질 수 없습니다. 중대한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려는 과학은 철학과 사회 윤리를 포함 한 다른 학문 분야의 지식을 반드시 참고해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 날 이를 실천하는 것은 무척 힘이 듭니다. 참고할 만한 참다운 윤리적 지평도 깨달을 수조차 없습니다. 삶은 점차 기술의 영향을 받 는 상황에 종속됩니다. 기술 자체가 존재의 의미를 해석하는 핵심으로 여겨집니다. 우리가 마주하는 구체적 상황에는 환경 훼손,불안,삶의 의미와 공동생활의 의미 상실과 같은 잘못을 보여 주는 많은 증상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실재가 생각보다 더 중요하다” 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111. 생태 문화는 환경 훼손,천연자원의 고갈,오염과 관련된 문제에 대한 일련의 신속한 부분적 해답들로 축소될 수 없습니다. 기술 지배 패러다임의 공세에 대항하는 다른 시각, 사고방식, 정책, 교육 계획, 생활양식,영성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심지어 최 선의 환경 보호 운동도 동일한 세계화의 논리에 빠져 버리고 말 것 입니다. 개별적으로 나타나는 환경 문제에 대한 기술적 해결 방안만을 찾는 것은,실제로 서로 이어져 있는 것들을 분리하고, 세계 체제가 안고 있는 가장 심각한 진짜 문제들을 숨기는 것입니다.
112. 그러나 우리는 다시 한번 시야를 넓힐 수 있습니다. 인간의 자유는 기술을 제한하고 그 방향을 바꾸어 기술이 다른 형태의 발전, 곧 좀 더 건전하고 인간적이고 사회적이며 통합적인 발전에 이바지하게 할 수 있습니다. 강력한 기술 지배 패러다임에서 벗어나는 일이 실제로 가끔 일어납니다. 예를 들어, 군소 생산자들이 오염을 줄이는 생산 방식을 채택하여 소비 지상주의를 지양하는 삶과 여 유와 공동생활 방식을 선택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는 기술이 다른 사람들의 구체적 문제 해결을 우선 목표로 삼아,그들이 더 존엄하게 덜 고통받으며 살아가도록 돕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한 아 름다운 것을 만들어 이를 바라보려는 의지가 모든 대상을 객관화 하려는 힘을 극복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는 아름다움과 그것을 바라보는 이에게는 일종의 구원이 됩니다. 새로운 종합을 요청하는 참된 인류애는 마치 닫힌 문 아래 틈 사이로 스며들어 오는 안개처럼 알게 모르게 기술 문명 한가운데 자리 잡는 듯 합니다. 참된 인류애의 굳건한 저항으로 싹트는 그 기대는 모든 어려움에도 영원한 것이 될 수 있겠습니까?
113. 다른 한편으로 사람들이 더 이상 행복한 미래를 믿지 않는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들은 더 이상 현재의 세계 정세와 기술력을 근거로 하는 더 나은 미래를 맹목으로 신뢰하지 않는 것입니다. 과학과 기술 발전이 인류와 역사의 발전과 동일시될 수 없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더 나은 미래를 향한 길은 근본적으로 다른 데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기술이 마련해 주는 기회들을 거부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그렇지만 인류는 커다란 변화를 거쳤고, 계속 나타나는 새로운 것들은 우리를 지나치게 피상 적으로 한 방향으로만 이끄는 찰나적인 것을 신성하게 여기게 합니다. 잠시 멈추어 삶의 깊이를 되찾는 일이 힘들어졌습니다. 건축물 이 시대정신을 반영한다면, 초대형 건축물과 획일적으로 지어진 주택 단지는 세계화된 기술 정신을 표현하는 첫입니다. 여기에서는 끊임없이 넘쳐나는 새로운 상품과 엄청난 단조로움이 공존합니다. 이에 굴복하지 말고 모든 것의 목적과 의미에 대한 질문을 멈추지 맙시다. 그러지 않으면. 우리는 단지 현재 상황을 합리화하여 우리의 공허함을 달래 줄 대체재가 점차 더 많이 필요하게 될 것입니다.
114.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일들은 우리가 대담한 문화적 혁명을 통하여 앞으로 나아가야 할 절박한 필요성을 알려 줍니다. 과학과 기술은 가치 중립적이지 않아서 한 과정의 처음부터 끝까지 여러 의도와 가능성들이 개입되어 다양한 방식으로 구체화될 수 있습니다. 석기 시대로 돌아가자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속도를 줄여서 다른 방식으로 현실을 바라보며 긍정적이고 지속 가능한 발전을 받아들이는 것과 더불어,지나친 과대망상으로 잃어버린 가치와 중요한 목표들을 되찾아야 합니다.
Ⅲ. 현대 인간 중심주의의 위기와 영향
115. 역설적으로 현대 인간 중심주의는 실재보다는 기술적 사고의 손을 들어 주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인간은 더 이상 자연을 타당한 규범이나 살아가는 거처로 여기지 않습니다. 인간은 자연을 아무런 전제 없이 있는 그대로 물건을 만들려는 자리와 재료로 여기며, 그 결과로 어떤 일이 발생하든 관심이 없습니다.”그래서 세상의 고유한 가치가 떨어지게 됩니다. 인간은 이 세상에서 제자리를 되찾지 못하면 자기 자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결국 스스로 모순된 행동을 하고 맙니다. “인간이 그 본래의 선한 목적을 따라 사용하도록 땅이 하느님에 의하여 그에게 주어졌을 뿐 아니라,인간도 인간 자신에게 하느님에 의하여 주어졌으며,이러한 이유로 인간은 자신이 타고나는 자연적이고 윤리적인 구조를 존중해야 합니다.”
116. 근대에는 지나친 인간 중심주의가 있어 왔고, 이는 오늘날 에도 여전히 또 다른 모습으로 위장하여 공동의 이해와 사회적 결속 강화를 위한 모든 노력을 저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현실과 인간 중심주의가 불러온 한계에 새롭게 주의를 기울일 때가 되었습니 다. 이는 개인과 사회가 더욱 건전하고 풍요롭게 발전하기 위한 조건이 됩니다. 그리스도교 인간학이 적절하게 제시되지 못한 것이 인간과 세상의 관계에 대한 오해를 낳았습니다. 프로메테우스처럼 세상을 지배하려는 꿈이 퍼져 나가면서, 자연 보호는 나약한 사람들이나 하는 일이라는 인식이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세상에 대한 우리의 '지배’는 책임 있는 관리라는 의미로 올바르게 이해되어야 합니다
117. 인간이 자연에 끼친 해악과 인간의 결정이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평가하는 데에 태만한 것은 자연의 구조 안에 새겨진 메시지에 대한 무관심을 뚜렷하게 보여 줄 뿐입니다. 예를 들어,현실에서 가난한이,인간배아,장애인이 지닌 가치를 인식하지 못할 때 자연의 울부짖음 자체에도 귀를 기울이기가 어려워집니다.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인간이 현실에서 독립된 존재임을 선언 하고 절대적 지배자를 자처하면,인간 삶의 기초 자체가 붕괴됨니다. “인간은 세계에서 하느님의 협조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 대신,부당하게 하느님의 자리에 자신을 올려 놓으며,이렇게 인간은 자연의 반항을 자극”하기 때문입니다
118. 이러한 상황은 우리를 끊임없이 정신 분열로 이끌어 왔습 니다. 여기에는 다른 존재들의 고유한 가치를 부인하는 기술 지배에 대한 찬양부터 인간의 그 어떠한 특별한 가치도 인정하지 않는 반응까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성을 간과할 수 없습니다. 인간이 새로워지지 않으면 자연과 새로운 관계를 맺을 수 없습니다. 올바른 인간학 없이는 생태론도 있을 수 없습니다. 인간이 단지 여러 존재들 가운데 하나로,우연이나 물리적인 결정론의 산물로 여겨질 때, “우리의 전반적 책임 의식은 약화될 것”입니다. 그릇된 인간 중심주의가 반드시 ‘생물 중심주의’에 자리를 내어 줄 필요는 없습니다. 이러한 생물 중심주의는 오늘날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하며,문제들을 가중시키는 또 다른 불균형을 일으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인간만이 지닌 고유한 지성,의지, 자유,책임의 능력을 인정하지 않고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면,인간이 이 세상을 책임 있게 대할 것을 바랄 수 없습니다.
119. 그릇된 인간 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이 인간관계의 가치를 떨어뜨리도록 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날 생태적 위기가 근대성의 윤리적, 문화적, 영적 위기의 발발이나 발현을 의미한다면, 모든 근 본적인 인간관계를 치유하지 않고는 우리가 자연과 환경과 맺은 관계를 감히 치유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다른 모든 피조물에 견주어 인간이 특별한 가치를 지녔다고 주장하는 그리스도교 사상은 우리가 모든 인간의 가치를 인정하고 다른 이들을 존중하게 합니다. 알고 사랑하며 대화할 수 있는 ‘너’에게 마음을 여는 것은 언제나 인간을 고귀한 존재로 만들어 줍니다. 따라서 피조물과 올바른 관계를 맺기 위해서 인간이 다른 사람들에게 마음을 여는 사회적 측면은 물론,하느님이신 ‘당신’께 마음을 여는 초월적 측면을 약화시켜서는 안 됩니다. 사실 인간과 환경의 관계는 인간들 사이의 관계와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와 결코 분리될 수 없습니다. 그러한 관계가 분리 된다면,이는 생태적 아름다움으로 위장된 낭만적 개인주의로 내재성 안의 숨 막히는 단절이 될 것입니다.
120. 모든 것이 서로 관계를 맺고 있기에 자연 보호와 낙태의 정당화도 양립할 수는 없습니다. 비록 임신으로 불편과 어려움이 생긴다고 해도 인간 배아를 보호하지 않는다면, 우리 주변에 존재 하면서 때로는 성가시거나 귀찮게 하는 약한 존재를 받아들이라고 가르치는 것은 불가능해 보입니다. “새 생명을 받아들이려는 개인 적 사회적 정서가 사라지면 사회에 소중한 또 다른 것들도 받아들이지 않게 됩니다.
121. 지난 수 세기 동안 전개된 그릇된 주장을 극복할 새로운 종합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리스도교는 그 고유한 정체성과 예수 그리스도께 받은 진리의 보화에 충실 하면서,언제나 자신을 돌아보고 새로운 역사적 상황들과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여 그리스도교는 그 영원한 새로움을 꽃피우는 것 입니다,
실천적 상대주의
122. 그릇된 인간 중심주의는 그릇된 생활양식을 낳습니다. 교황 권고「복음의 기쁨」에서 저는 우리 시대의 전형적인 실천적 상대주의가 “교리적 상대주의보다 훨씬 위험”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인간이 자신을 중심으로 삼으면 당장의 유익을 가장 우선으로 여기게 되어 나머지 모든 것은 상대적인 것이 됩니다. 따라서 만연한 기술 지배 패러다임과 인간의 무한한 힘의 숭배와 더불어,즉각적인 이득을 주지 않는다면 무엇이든 의미가 없다고 여기는 상대주의가 자라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이 모든 것에는 다양한 태도들이 서로를 희생시키며 살아가고,환경 훼손 과 사회의 부패를 낳는 논리가 담겨 있습니다.
123. 상대주의 문화는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이용하고 단순한 대상으로만 취급하여 강제 노동을 시키거나 빚을 명분으로 노예로 부리는 것과 다름없는 질병입니다. 이와 같은 논리로 아동을 성적으로 착취하고 이익에 보탬이 안 되는 노인을 유기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또한 시장의 보이지 않는 힘이 경제를 지배하도록 내버려 두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의 내적 논리이기도 합니다. 이들 은 그러한 힘이 사회와 자연에 해로운 영향을 미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합니다. 우리 저마다의 욕망과 즉각적 욕구를 충족하는 것 외에 객관적 진리나 확고한 원칙이 없다면,인신매매, 조직 범죄, 마약 매매, 피의 다이아몬드 매매, 멸종위기동물 가죽의 매매를 어떻게 제한하겠습니까? 가난한 이들의 장기를 팔거나 실험에 이용하려고 구매하고, 부모의 바람에 어긋난다고 해서 아이를 버리는 것도 이러한 상대적 논리와 같지 않겠습니까? 이와 같은 ‘쓰고 버리는’ 논리가 실제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이 소비하려는 무절제한 욕망 때문에 쓰레기를 양산합니다. 그러므로 환경에 해로운 행 위를 방지하는 데에 정치적인 조치나 법의 힘만으로 충분하다고 여겨서는 안 됩니다. 문화가 부패하고 객관적 진리와 보편타당한 원칙들이 더 이상 인정되지 않을 때,법은 자의적으로 부과되는 것이 거나 피해야 할 장애물로만 여겨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용 보호의 필요성
124. 인류를 배제하지 말아야 하는 통합 생태론에 대한 모든 접근에서 노동의 가치를 포함시키는 것은 필수입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 회칙「노동하는 인간」에서 이를 잘 설명하셨습니다. 창조에 관한 성경 이야기에 따르면,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 만드신 에덴동산에 사람을 두시어, 그곳을 보존하게(돌보게) 하셨을 뿐 아니라 열매를 맺도록(일구도록)하셨습니다(창세 2,15 참조). 그래서 노동자와 장인이 “한 세대의 골격을 유지합니다”(집회 38,34). 현실에서, 피조물의 현명한 발전을 촉진하는 인간의 개입은 세상을 돕보는 최선의 방법입니다. 이는 우리 자신이 하느님의 도구가 되어 하느님께서 사물에 심어 넣으신 가능성이 전개되도록 돕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땅에 약초를 마련해 놓으셨으니,현명한 사람은 그것을 소홀히 하지 않으리라”(집회 38,4).
125. 우리가 인간과 그 주변 세계의 올바른 관계를 성찰하려면 노동의 개념을 바르게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인간과 사물의 관계를 말할 때, 현실에 대한 인간 활동의 의미와 목적을 묻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는 육체노동이나 농업뿐 아니라 사회 연구 개발부터 기술 개발 계획에 이르기까지 모든 기존 현실의 변화를 포함하는 활동을 말하는 것입니다. 온갖 형태의 노동은 우리가 다른 존재와 맺을 수 있고 또 맺어야 하는 관계의 개념을 전제로 합니다.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의 피조물에 대한 관상적 찬미와 더불어 그리스도교 영성도 노동에 대한 부요하고 건전한 이해를 발전시켜 왔습니다. 예를 들면, 샤를 드 푸코 복자와 그 제자들의 삶에서 이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126. 우리는 수도 생활의 위대한 전통도 참고할 수 있습니다. 본디 수도 생활은 도시의 타락을 피하고자 세속을 벗어나는 것을 선호하였습니다. 그래서 수도승들은 사막을 찾아간 것입니다. 그들은 사막이 하느님의 현존을 깨닫는 데에 가장 적합한 곳이라고 확신하였습니다. 나중에 누르시아의 베네딕토 성인은 그의 수도승들에게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기도와 영적 독서와 더불어 육체노동도 할 것을 제안하였습니다(ora et labora). 영적 의미를 담은 육체노동의 도입은 획기적인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묵상과 노동의 상호 작용으로 인간의 성숙과 성화를 추구하는 방법을 익혔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방식으로 노동을 실천하면 환경을 더욱 잘 돌보고 존중하게 되어, 세상을 건전한 냉철함으로 대할 수 있게 됩니다.
127. 우리는 “인간이 모든 경제 사회 생활의 주체이며 중심이고 목적”임을 확신합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이 관상하고 존중하는 능력을 잃으면 노동의 의미를 왜곡하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인간은 “물질적 복지를 도모하고 윤리적 향상을 추구하며 영신 기능을 계발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음을 언제나 명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노동은 이렇게 개인의 다양한 성장을 위한 자리가 되어야 합니다. 여기에서 창의력, 미래설계, 재능 계발, 가치 실현, 타인과의 대화,경배와 같은 삶의 여러 측면이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세상의 사회 현실은, 편협한 기업 이윤과 모호한 경제적 합리성을 뛰어넘어, “계속하여 모든 사람의 안정된 고용 보장을 최우선 과제”로 삼을 것을 요구합니다.
128. 창조 때부터 우리는 노동하라는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인간의 노동을 점진적인 기술 발전으로 대체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이는 인류에게 해악을 끼칠 것입니다. 노동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노동은 이 땅에서 살아가는 의미에 속하며,성장과 인간 발전과 개인적 성취의 길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가난한 사람에게 금전적 도움을 주는 것은 언제나 위급 상황에서 이루어지는 임시방편이 될 뿐입니다. 가난한 이들이 노동을 통하여 존엄한 삶을 누리게 하는 것이 언제나 커다란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경제는 일종의 기술 발전을 촉진하여 노동자들을 해고하고 일자리를 기계로 대체한 결과, 생산 비용을 절감하는 방향으로 나아갔습니다. 이는 결국 인간이 자기 자신을 거슬러 행동하는 또 다른 길이 될 뿐입니다. 또한 일자리의 감소는 “모든 사회적 공존에 필수적인 신뢰,의존,법규 존중 의 관계를 연결해 주는 '사회자본’의 점진적인 손실”로 경제에 부정적 영향을 미칩니다. 다시 말해서, “인적 손실에는 늘 경제적 손실이 따르며 경제적 역기능에도 늘 인적 손실이 따릅니다.”단기 간에 더 큰 금전적 이익을 얻고자 인적 투자를 중단하는 것은 사회에 악영향을 미치는 기업 행위입니다.
129. 지속적인 고용 보장을 위해서는 생산의 다각화와 기업의 창의력을 고무하는 경제의 증진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이 세상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식량을 마련해 주는 다양한 소규모 식량 생산 체제가 있습니다. 이러한 체제에서는 땅과 물을 적게 사용하고 쓰레기도 적게 배출합니다. 이는 소규모 경작지, 과수원, 농원, 사냥, 야생 작물 채취, 지역적 어업을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규모의 경제는, 특히 농업 분야에서 영세농들이 결국 자기 땅을 팔거나 전통적 생산 방식을 포기할 수밖에 없도록 만듭니다. 영세농 들이 다른 다양한 생산 방식을 개발하고자 하는 시도는 결실을 얻지 못합니다. 지역 시장과 세계 시장의 접근이 어렵고 판매와 운송의 기반 시설이 대기업에 유리하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행정 당 국은 군소 생산업자들과 그들이 생산하는 품종의 다양성을 투명하고 확실하게 지원하는 조치를 취할 권리와 의무가 있습니다. 실제로 모든 이가 경제적 자유의 혜택을 누리게 하려면, 경우에 따라서는 더 많은 자원과 경제력을 가진 이들에게 제한이 가해져야 합니다. 현실은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경제적 자유를 얻지 못하게 가로 막고 있으며 고용 기회가 계속 축소되고 있는데, 단지 경제적 자유만을 요구하는 것은 정치에 명예롭지 못한 모순된 주장입니다. 기업 활동은 부를 창출하고 모든 이를 위하여 더 좋은 세상을 만들어 나가야 할 고귀한 소명입니다. 기업이 특히 일자리 창출을 공동선에 이바지하는 필수 요소로 여긴다면 그 활동 지역의 풍요로운 번영의 원천이 될 수 있습니다.
연구에서 비롯한 생물학적 혁신
130. 제가 말씀드린 인간과 피조물에 대한 철학적 신학적 전망에서는 이성과 지성을 부여받은 인간이 완전히 배제되어야 하는 외적 요인이 아님이 분명합니다. 인간 생활에 필요한 경우, 인간이 동 식물계에 개입할 수 있고 동식물을 이용할 수 있지만,「가톨릭 교회 교리서」는 동물에 대한 실험이 “합당한 한계를 지키고,인간 생명의 치유와 보호에 이바지할” 때에만 정당하다고 가르칩니다. 교리서는 인간의 힘에는 한계가 있고 “동물을 불필요하게 괴롭히며 마구 죽이는 것은 인간의 존엄성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단언합니다. 모든 동식물의 이용과 실험은 “피조물 전체에 대한 세심한 배려를 요구”합니다.
131. 여기에서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균형 잡힌 입장을 되새겨 보고자 합니다. 교황께서는 과학과 기술 발전의 혜택이 “하느님의 창조 활동에 책임 있게 참여해야 할 인간 소명의 숭고함”에 대 한 증거라고 강조하시면서도 “우리는 생태계의 한 영역에 개입할 때 에 그러한 개입이 다른 영역에 미치는 결과와 미래 세대의 행복에 대하여 모두 마땅한 관심을 기울여야”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교황께서는 “유전학과 같은 다른 학문의 도움을 받아 분자 생물학을 연구하고 응용하고 그 기술을 농업과 산업에 적용하여” 얻은 혜택을 교회가 높이 평가한다는 점을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혜택이 그와 같은 개입의 부정적 영향을 간과하는 “무분별 한 유전자 조작”으로 이어져서는 안된다는 점도 지적하셨습니다. 인간의 창의력을 제지할 수는 없습니다. 예술가에게 그 창의력 을 발휘하지 말라고 할 수 없듯이, 과학과 기술의 발전을 위한 특별한 은사를 받은 이들이 다른 이들에게 봉사하도록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능력을 이용하지 못하게 막을 수는 없습니다. 또한 우리는 커다란 위험을 지닌 형태의 힘을 보여 주는 인간 활동의 목적과 효과와 맥락과 윤리적 한계에 대하여 끊임없이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132. 바로 이러한 틀 안에서 동식물계에 인간이 개입하는 것에 관한 모든 성찰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여기에는 오늘날 물질세계의 잠재력을 착취하려는 생명 공학을 통한 유전자 조작이 포함됩니다. 신앙이 지닌 이성에 대한 존중은, 생명 과학이 경제적 이익에 좌우 되지 않는 연구를 통하여 생물의 구조와 그 가능성과 변형에 관하여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줄 수 있는지에 대한 깊은 주의를 촉구 합니다. 어찌 되었든 “하느님께서 의도하신 피조물의 본질에 따라 자연이 발전하도록”자연에 영향을 주는 개입은 정당합니다.
133. 의학이나 농업 분야의 식물과 동물유전자변형에 대하여 일괄적 판단을 내리기가 어렵습니다. 그 종류가 매우 다양하여 개별적인 판단이 필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와 관련된 위험은 그 기술 자체 때문이 아니라 부적절하거나 지나친 기술 적용 때문에 발생합니다. 사실 유전자 변형은 자연에서 자주 발생되어 왔고 계속 발생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개입으로 비롯된 변형도 현대적 현상이 아닙니다. 예를 들면,동물 길들이기와 교잡 육종과 더불어 오래된 여러 일반적 관행들이 있습니다. 유전자 변형 곡물의 과학적 개발은, 식물 게놈 변형을 자연스럽게 일으키는 박테리아의 관찰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상기해야 합니다. 그러나 자연 에서는 이러한 과정이 천천히 진행되어 현재의 기술적 진보가 이룩한 빠른 속도와는 비교될 수 없습니다. 비록 그러한 속도가 수 세기에 걸친 과학적 발전을 바탕으로 한 것이라고 하여도 비교되지 않는 것입니다.
134. 비록 유전자 변형 곡물이 인간에게 미칠 수 있는 악영향에 대한 결정적 증거가 없고,일부 지역에서는 그러한 곡물의 이용이 경제 성장을 가져와 문제 해결에 도움을 주었지만, 여전히 결코 가볍게 여길 수 없는 중대한 문제들이 남아 있습니다. 많은 지역에서 이러한 곡물이 도입되어 비옥한 농토가 소수의 손에 집중 되었습니다. 이는 “개간 농지 부족으로 직접적인 생산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는 군소 생산자들이 점차 사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 가운 데 가장 취약한 이들은 비정규직 노동자가 되고,많은 농촌 일꾼들은 결국 도시의 빈민가로 이주하게 됩니다. 유전자 변형 작물의 증산은 복잡한 생태계망을 파괴시키며 생산 작물의 다양성을 감소시키고 현재와 미래의 지역 경제에 영향을 끼칩니다. 여러 나라에서 곡 물 생산과 그 재배에 필요한 여러 상품들의 생산을 독과점하는 경향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번식력이 없는 종자가 생산되고 있는 것을 볼 때 이러한 의존성은 더욱 심각해질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농민들은 대규모 생산자에게서 그 종자를 구매할 수밖에 없게 될 것입니다.
135. 분명 이러한 문제들에 지속적인 관심을 갖고 그에 관련된 모든 윤리적 측면을 고려해야 합니다. 이를 위하여 광범위하고 책임 있는 과학적 사회적 토론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모든 가능한 정보를 고려하고 솔직하게 대화할 수 있어야 합니다. 때로는 정보가 모두 제공되지 않고 정치적,경제적, 이념적인 특정 이해관계를 바탕으로 선별됩니다. 이는 다양한 문제들에 관하여 모든 변수를 고려하는 균형 잡힌 신중한 판단을 내리기 어렵게 만듭니다. 직간접 적으로 어느 모로 관련된 모든 이(농민,소비자,행정 당국,과학자,종자 생산자,농약 살포 농지 근처 주민 등)가 자신들의 문제를 알리고, 현재와 미래의 공동선을 위한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믿을 만한 충분한 정보를 얻는 논의의 장이 반드시 마련되어야 합니다. 이는 복합적인 환경 문제이기에 포괄적인 접근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적어도 그 문제를 새롭게 조명하는 독립적이고 학제적인 연구를 위한 자금 지원 노력이 필요합니다.
136. 다른 한편으로, 일부 생태 운동에서는 환경의 온전함을 수호하고 과학 연구의 제한을 정당하게 요구하면서도, 때로는 동일한 원칙을 인간 생활에 적용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살아 있는 인간 배아를 연구할 때 모든 제한을 넘어서는 것을 정당화하는 것 입니다. 우리는 양도할 수 없는 인간 가치가 인간의 발전 수준보다 훨씬 중요하다는 사실을 잊어버립니다. 이처럼 기술이 위대한 윤리 원칙들을 경시하면 결국 모든 행위를 정당화하게 됩니다. 우리가 이 장에서 살펴본 대로, 윤리를 배제한 기술은 자기 힘을 스스로 통제 하기가 무척 어려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