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니동(雲泥洞)은 1914년 4월, 일제가 행정 구역 개편을 단행하면서 운현궁(雲峴宮)과 니동(泥洞)의 머릿글자를 떼어 만든 땅이름이다. 운니동 99번지에는 왕도를 수비하는 금위영(禁衛營)이 있던 자리. 지금은 도시화에 밀려, 도로가 가로 세로로 새로 뚫리고 고층빌딩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고 있어, 어디가 어딘줄 가늠하기 조차 어렵지만, 정확히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 서쪽 약 30여m지점에 자리하고 있었다.
금위영은 조선조 숙종 8년(1682년) 병조판서 김석주(金錫胄)가 건의하여 설치한 것으로 병조 소속의 갱번군(更番軍)이었던 정초군(精抄軍)과 훈련도감 소속의 갱번군이었던 훈련별대를 통합, 하나의 군영으로 만든 것이다. 1영ㆍ 5부ㆍ20사ㆍ105초(哨)로 조직을 편재하고 다시 이들을 10번으로 나누어 교대로 번상(番上)하게 하되, 그 운영을 위하여 보(保)를 설정하여 ‘금위영’이라 하였다.
금위영은 근위병영, 호위영, 어영청, 총융청 등과 더불어 이른바 5영이라 하여 그 임무가 국왕 호위와 왕도 방어로 병조판서가 그 대장직을 겸하였다. 세월이 흐르면서 금위영은 5부, 25사, 125초에 평안도아병(平安道牙兵)으로 편재된 별좌우사(別左右司) 10초, 별중초(別中哨) 1초 등이 추가돼 135초까지 늘어나기도 했다.
그 군사의 주력은 평안, 함경도를 제외한 6도 향군이었다. 1704년 군제변통(軍制變通) 때 어영청과 그 규모를 같이 하기 위해 1영ㆍ5부ㆍ25사ㆍ125초의 향군 번상 숙위 체제로 정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설치 초기에는 병조 소속의 정초군 등이 주류를 이루었기 때문에 병조판서가 대장직을 그대로 겸직하였으나 1754년(영조 30년)에 처음으로 병조판서가 아닌 단독 대장 체제의 독립군영이 되었다.
이와 같이 설치 초기의 금위영은 국가가 재정을 부담하기 위해, 훈련도감을 설치해 국가재정도 충실하고, 수도방어의 군사력도 확보한다는 뜻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각종 잡다한 병종과 원역 등이 늘어나 재정의 부족은 물론, 보인(保人)에 대한 부담을 가중시키는 결과를 가져와 말기로 내려오면서 각종 이유로 향군을 쉬게하고(停番) 수포(收布)로 대신하여 국가재정을 메우는 추세를 보였다.
이러한 금위영은 흥선대원군이 집권했을 때는 한때 강화되기도 하였으나, 1881년(고종 18년)에는 장어영(壯禦營)으로 통합됐다. 그러나 갑신정변(1884년ㆍ고종 21년)으로 말미암아 전, 후의 두 영으로 나누어, 창덕궁앞의 금위영은 후영(後營)이 되어 구식병(舊式兵) 600명 정도가 있었다. 전영(前營)은 오늘날 필동 2가에 두고 신식 훈련병 500명을 두었다.
후영은 다시 진위연대영(鎭衛聯隊營)이 되었다가 1907년(광무 11년) 8월 우리 나라 군대가 해산되면서 그 자리에 은사수산장(恩賜授産場)이 들어서기도 했다. 1926년에는 창덕궁의 아악부(雅樂部)가, 광복 뒤에는 대한독립촉성회 중앙총본부가 자리하다가 한때는 국립국악원이 들어서기도 했다.
금위영터! 어쩌면 그 자리는 조선조 말의 영욕의 역사를 대변하던 마당인지도 모른다. 옛 금위영에서 행해지던 수문장 교대식이 요즘 재연되고 있으니 역사의 향수일까. 금위영에서 행해지던 수문장 교대식이 요즘 재연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