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창기의 뉴스는 적시성이라는 것이 그다지 중요성을 갖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초창기에는 운송이나 통신 수단이 배나 마차, 혹은 직접 사람이 운반하는 것에 한정되었기 때문이다.
초창기의 뉴스에도 적시성이라는 기준이 있기는 했으나 오늘날처럼 초를 다투는 것이 아니라 한 달, 혹은 한 계절을 뉴스 작성 기간으로 정하여 그 기간에 일어난 일이나 앞으로 일어날 일을 다루었다.
예를 들어 미국 펜실베니아 주 최초의 신문이었던, 1719년에 창간된 <아메리칸 워클리 머큐리(The American Weekly Mercury)>는 유럽에서 발생한 사건에 대한 뉴스가 석달 후에야 가시화되었다. 또한 이 신문에서 다루어졌던 뉴스는 미국 내의 다른 군소신문들에게 전달되는 데 무려 10일에서 8주가 걸렸다.
따라서 유럽에서 벌어진 일을 다른 대륙인 미국의 지역독자들이 알게 되는 데는 최대 다섯 달이 걸린 셈이다. 오늘날의 기준으로는 믿기 어려운 사실이지만 그 당시에는 그것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한편 적시성에는 최근성(recency), 즉시성(immediacy), 통용성(currency)의 세 가지 요소가 있다. 즉시성이라는 기준을 상업적 목적으로 최초로 사용한 사람은 벤저민 데이라고 할 수 있다. 데이는 이미 1830년경부터 지속적으로 최신 뉴스를 공급받기 원하는 독자들을 위해 하루에도 몇 번씩 새로운 헤드라인과 기사, 그림 등을 추가한 신문들을 발행했는데, 이는 말하자면 오늘날 온라인저널리즘에서 수시로 새로운 뉴스를 올리는 것과 같은 발상이었다.
초창기에는 또한 인편이나 선편에서 오는 수송의 지연을 탈피하기 위해 동물을 이용했는데 말이나 전송용 비둘기의 사용이 대표적인 예이다. 오늘날 보면 우스운 일이지만, 그 당시 동물을 이용한 신문사들의 속보경쟁은 마치 경마 레이스와 같아서 심지어는 어느 말이 어느 신문사에 먼저 도착하는지를 보기 위한 관람객까지 등장했었다.
사건의 발생과 뉴스 보도 시간의 간격을 줄이는 데 가장 큰 기여를 한 것은 물론 통신기술의 발달이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1861년에 개통된 미국 대륙횡단 전보망인데 이로 인해 이전에 며칠 혹은 몇 주일이 걸리던 전송시간이 불과 몇 분 내로 가능하게 되었다.
이는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사건이었다. 이후에 등장했던 적시성에 도움을 준 발명들로는 전화와 타자기, 자동차 등을 들 수 있다.
20세기에 등장한 전파미디어들은 인쇄미디어의 독점을 꺠기도 했지만 또한 상호보완적인 기능도 수행했다.
라디오가 적시성의 향상에 극적인 기여를 했지만, 그래도 신문이나 잡지는 보다 심층적인 기사를 원하는 수용자들을 주요 목표대상으로 삼아 오늘날까지도 살아남았다.
텔레비전은 라디오의 적시성에 현장성과 동시성을 동시에 갖춘 미디어로서 20세기 후반에 들어와 대부분의 수용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뉴스 제공자가 되었다.
또한 케이블 텔레비전과 위성방송의 발달로 채널의 유한성이 제거되면서 뉴스만을 전문적으로 방송하는 CNN이나 YTN 같은 방송사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오늘날에는 전 세계적으로 정보통신혁명이 일어나면서 모든 수용자들이 자신이 원하는 정보를 수시로 얻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취재하거나 촬영한 기사나 사진, 동영상을 매우 쉽게 인터넷에 올릴 수 있다.
실제로 인기 동영상사이트인 유튜브(Youtube)에는 1초에 수백 건의 동영상이 올라오고 있다. 따라서 전 세계적으로 적시성이 보장받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