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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107 아딧타나 빠라미 (11) / 멧따 빠라미 (1) (위뿔라냐니 식카와띠님)
붓다왕사 188강 – 아딧타나(결심) 빠라미 (11) / 멧따(자애) 빠라미 (1)
3종류의 아딧타나 빠라미(바라밀)
<붓다왕사>에서 아딧타나 바라밀 하고 있습니다.
아딧타나 바라밀이 3종류가 있다고 했습니다. 여러 가지로 나누는데 ‘미리 징조를 보여라’(pubba-nimitta-adhiṭṭhāna) 이렇게 아딧타나(결심) 하는 게 있고 자기가 ‘원하는 것을 이루는(āsīsa-adhiṭṭhāna) 아딧타나가 있고 와따 아딧타나(vata-adhiṭṭhāna)라고 자기가 ‘지키기로 한 걸 지키는’ 아딧타나, 이렇게 3가지 아딧타나가 있습니다.
3종류가 있는데 첫 번째 했던 게, 이런 징조가 보일 것이다, 이렇게 아딧타나 하는 것과 자기가 원하는 걸 이루는 아딧타나. 이 두 가지 아딧타나가 보살들이 하는 아딧타나인데 이것은 바라밀급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보기에도 이게 바라밀급은 아니지 않습니까. 바라밀라는 게 뭔가 고귀하고 타인을 위한 것이어야 하는데 그런 수준은 아닌 거죠. 근데 와따 아딧타나, 이거는 바라밀입니다. 바라밀 수준이 되는 아딧타나입니다. 앞의 두 가지는 내가 하기로 한 것을 이루는 거죠. ‘이런 니밋따(징조)가 보일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과 내가 원하는 것들을 ‘이렇게 되기를’ 아딧타나 해서 그게 이루어지는 것, 이런 것들은 마음에 힘이 있는 사람들이 이룰수 있습니다. 반면에 이 와따 아딧타나는 노력이 들어가는 거죠. 노력이 들어가므로 칸띠(인내)가 들어갑니다. 힘든 상황에서 어길 수도 있는데, 지키지 않을 수 있는데, 꾹 참고 끝까지 해내는 것. 뭔가를 희생해서 하는 것. 이루는 것. 자기의 바른 결심을 관철시키는 것. 이게 와따 아딧타나입니다.
부리닷따 용왕의 아딧타나
와따 아딧타나에서 부리닷따 용왕 자따까(bhūridatta jātaka. 543번 자따까) 얘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보살이 서원을 잘못 세우는 바람에 용왕으로 태어납니다. 가난한 천민으로 태어난 보살은 용왕의 오욕락이 너무 부러워 보였습니다. 그가 가난한 천민으로 태어났을 때 왕이 용왕제를 지내는데, 강에서 올라온 용왕이 용궁에 사는 천녀들과 화려한 5욕락을 누리는 걸 보고 부러워서 ‘용왕이 되기를’ 이렇게 서원을 세우고 계를 지켰습니다. 가난했기 때문에 보시는 할 수 없었고 계를 열심히 지키고 열심히 살아서 용왕으로 태어납니다. 소원이 이루어졌는데 용왕으로 사는 게 처음에는 재미있다가 나중에 재미없어졌습니다. 그래서 ‘8계를 지켜야 되겠다’, 이렇게 생각하고 인간계로 갑니다. 용궁에서는 8계를 지키기가 너무 어려웠습니다. 인간계로 가서 8계를 지키려고 하는 과정에서 위험이 많지 않겠습니까? 용왕이 그래서 아딧타나 합니다. 8계를 지키기로 하고 왔으니깐 아딧타나(결심) 하기를,
1. 나의 얇은 피부와 두꺼운 피부
2. 살과 피
3. 신경과
4. 뼈.
4가지가 훼손되더라도 내가 이 8계를 지키겠다. 4가지를 잃으면 잃었지 8계를 지키는 것을 그만두지는 않겠다.’ 얇은 피부는 껍질이죠. 양파 껍질 같은. 양파 껍질이 약간 두툼한데 그것을 더 얇게도 벗기지 않습니까? 그렇게 얇게 벗겨지죠. 우리가 살짝 건드리면 벗겨지는 그 얇은 껍질, 그리고 두꺼운 피부. 그리고 살과 피. 그리고 신경과 뼈. 이 4가지가 훼손되더라도 내가 이 8계를 지키겠다. 4가지를 잃으면 잃었지 8계를 지키는 것을 포기하지는 않겠다. 이렇게 아딧타나 하는 거죠. 그러고 이 용왕이 인간계로 와서 8계를 지킵니다.
8계가 대단한 계인가 봅니다. 그러니깐 용왕이 이 지계로 선업을 지으려고 온 거죠. 다른 걸로도 지을 수 있을까요? 하여튼 용왕이 이걸로 선업을 짓겠다고 와서 합니다. 용왕이 앞서 4가지가 없어지더라도 내가 이 8계를 꼭 지키겠다, 이렇게 결심하고 정말로 이 4가지가 없어지는 상황에서도 8계를 지킵니다.
이때 그 용궁을 떠나오면서 자기 왕비에게 “나한테 위험이 있으면 망갈라(축복. 길상) 호수의 물이 더러워지고 그다음에 부글부글 끓고 그보다 더 안 좋아지면 핏빛이 될 것이다” 이렇게 아딧타나 한 게 ‘뿝바니밋따 아딧타나(pubba-nimitta-adhiṭṭhāna. 미리 징조를 보이는 결심)’였죠. 이때 스스로는 ‘8계를 지키면서 이 4가지를 잃으면 잃었지, 8계는 잃지 않겠다’ 이렇게 아딧타나 합니다. 이게 진짜 바라밀이 되는 수준의 아딧타나라는 거죠. 이게 바라밀라고 할 수 있는 아딧타나이다, 이렇게 책에 나옵니다. 제가 보기에도 그렇습니다. 여러분이 보기에도 그렇지 않습니까? 앞에 했던 결심들은 이게 아딧타나 바라밀이 되나 의심이 되는데 이런 아딧타나들은 아 진짜 바라밀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런 생각이 들죠. 이 아딧타나를 할 때 아딧타나 하는 그 목적, 핵심이 계를 지키는 거였습니다. 8계를 지키는 게 우선 목적이었습니다. 8계를 위해서 아딧타나를 하는 거죠. ‘이 4가지를 버려도 좋다. 8계를 지키겠다.’ 이렇게 아딧타나 했습니다.
그다음에 시위왕이 아딧타나 할 때(시위 자따까sivi Jātaka. 499번 자따까), 시위 왕은 누군가 하면 보살이 왕으로 태어나서 나라의 곳간을 열어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다가 나중에는 자기 눈을 보시하고 싶어집니다. 줘도 줘도 계속 뭔가 허전한 거죠. 그래서 마지막에 눈까지 주면 참 좋겠다, 그런 마음이 드는 거죠. 이 왕이 그래서 눈을 주려고 아딧타나 합니다. 자기 눈을 주겠다고. 이 눈을 주려고 아딧타나 할 때, 이 시위 왕의 눈을 주는 보시. 이 아딧타나는 보시를 우선하는 아딧타나입니다. 눈을 필요로 하는 누군가가 오면 내 이눈을 망설임 없이 주겠다, 이러는 거죠. 망설이지 않고 즉시 주겠다. 이런 아딧타나를 하는 것, 이게 보시가 우선되는 아딧타나이고 용왕의 아딧타나는 지계가 우선하는 아딧타나였습니다. 그렇다고 이 시위 왕이 계를 안 지킨 건 아니죠. 계도 지키고 그리고 특별한 보시를 하기 위한 아딧타나를 한 거죠. 용왕은 계를 지키기 위한 아딧타나였습니다.
떼미야 왕자의 아딧타나
그리고 또 다른 아딧타나. 보살의 아딧타나 중에 특별한 게 까시 왕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무가빡카 자따까mūga-pakkha jātaka. 538번 자따까). 보살이 까시 왕의 아들로 태어나서 이름이 떼미야(Temiya)였습니다. ‘떼미야’라고 이름을 붙인 이유가, 이 떼미야 왕자가 태어난 그날 생일에 ‘까시’라는 나라 전체가 비가 왔습니다. 비가 아주 많이 충분히 왔습니다. 그래서 나라의 땅이 다 젖은 거죠. 충분히 젖었습니다. 비가 오는 것을 길조로 봅니다. 경전에 보면 비 오는 것을 좋게 생각합니다. 부처님이 보살일 때 주로 더운 지방에서 태어났지 않습니까? 바라나시, 이런 데 태어나서 비가 안 오는 게 문제지, 비가 와서 문제가 되는 경우는 별로 없었습니다. 왕자가 태어나는 날도 비가 많이 와서 사람들이 좋아했습니다. 떼미야의 뜻이 ‘충분히 젖은’ 이런 뜻입니다. 비가 아주 많이 와서 온 국토의 가뭄이 해결이 됩니다. ‘떼미야’라는 이름이 그런 뜻입니다.
떼미야 왕자가 태어나서 한 달 됐을 때 한 달짜리 아기를 안고 까시 왕, 떼미야 왕자의 아버지 왕이 아기를 품에 안고 재판을 했습니다. 죄인들에게 형벌을 줬습니다. 나쁜 짓을 했으니깐 벌을 준 거죠. 그 도둑들을 잡아와서 도둑 한 명 한 명에게 벌을 주는 것을 보고 이 한 달 된 갓난아이인 떼미야 왕자가 매우 매우 놀랐습니다. 매우 놀라서 ‘아, 내가 이 왕궁에서 나가야 되겠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한 달 된 아기가 ‘이 왕궁에서 나가야 되겠다. 여기 살아서 왕이 되면 매우 많은 불선을 내가 지어냐 하는구나.’ 이렇게 생각합니다. 자기 아버지 왕이 재판하는 것을 보고 그런 생각을 합니다. ‘내가 왕이 되어야 되는데 왕이 되면 이 왕궁에서 험한 일들을 내가 많이 해야만 하는구나.’ 이렇게 생각하는 거죠. 한 달 된 아기가. 그래서 이때부터 해서 이 아기가 들리지 않는 척하고 말하지 않습니다. 안 들리고 말하지 못하는 척 이렇게 하는 거죠. 아기가 그렇게 흉내 냅니다. 이렇게 아기 왕자가 말을 하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이러면 나라의 법이 이 아기를 버리게 되어 있었습니다. 갖다 버려야 되는 거지요. 안 좋은 애를 낳은 거니깐 버려야 됩니다.
버려야 되는데 아기를 버리지 못하도록. 전생에 이 아이를 낳았던 어머니(떼미야 왕자의 생이 아니라 그 전생에 보살을 낳은 적이 있던 전생의 어머니)가 지켜줍니다. 그 왕궁의 흰 양산 있죠. 왕들이 쓰는 흰 양산. 이전 생의 어머니가 이 양산을 지키는 천녀로 태어났습니다. 왕궁에 사는 신인 거죠. 왕궁을 지키는 신인데, 그 흰색 양산을 지키는 천녀 입니다. 태어나서 자기 아이, 전생의 자기 아들이었는데 지금 떼미야 왕자로 태어난 이 아들에게 이야기합니다. “걱정하지 마라. 아기야, 걱정하지 마라. 네가 이 왕궁에서 나가기를 원하면 말할 수 없는 척 그리고 안 들리는 척 이렇게 흉내를 내면 내가 잘 지켜서 나갈 수 있게, 너의 소원이 이루어지게 해줄게.” 이렇게 가르쳐 줍니다. 전생의 어머니였던 천녀가 그런 흉내를 내라, 그러면 내가 나갈 수 있게 해줄게. 이렇게 그 결심을 하고 그렇게 지내면 나갈 수 있게 해줄게. 그렇게 약속을 한 거죠. 그때부터 아기가 그렇게 삽니다.
그래서 16살 되던 때까지 그동안에 이 아기가 정말 말을 할 수 없는지 정말 들을 수 없는지 이걸 시험하기 위해서 왕궁의 사람들이, 아버지가, 자기를 낳아준 어머니가 계속 시험합니다. 아주 아기를 죽기 직전까지 온갖 고문을 합니다. 어떻게든 말을 하게 하려고, 입이 터지게 하려고, 들린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정말 온갖 고문을 합니다. 끝까지 말하지 않습니다. 끝까지 말하지 않고 끝까지 안 들리는 척합니다. 왜냐 왕궁에서 나갈려고. 왕궁에서 나가야겠다고 생각했으니깐 왕이 안 되겠다고 결심했기에, 왕위를 얻기 위해서 서로 죽이기도 하는데 이 보살은 왕이 안 되려고 죽을 고비를 계속 넘깁니다. 근데 자기 어머니, 그 흰색 양산을 지키는 천녀로 태어난 이 전생의 어머니가 지켜주는 거죠. 그래서 16살 되던 때에 ‘내 아들이 진짜 들을 수 없고 진짜 말할 수 없구나’, 이렇게 생각해서 아버지 왕이 저 왕궁 밖에 땅을 파고 무덤을 파고 묻어라. 명을 내립니다. 아들을 그냥 내보내지 않고 묻어버려라, 이렇게 얘기합니다. 무덤에 묻어라, 하는 거죠. 아들을. 그래서 왕궁 밖으로 데리고 가서 땅을 파고 묻으려는데 도망쳐 나옵니다. 그래서 삽니다. 왕이 되지 않습니다. 보살이 살아나옵니다. 탈출했습니다. 왕궁에서 왕이 되지 않고. 이게 아딧타나 바라밀입니다. 보살들은 보통 사람들과 정반대로 오욕락 버림을 아딧타나 해서 목숨 걸고 이루었습니다. 이게 와따 아딧타나입니다.
멧따(자애) 바라밀
그다음, 멧따 바라밀입니다. 9번째 바라밀이죠. 9번째 바라밀, 멧따 바라밀.
멧따(mettā), 라고 하는데 멧따는 뻬마(pema)라는 단어에서 나왔습니다. 뻬마는 ‘사랑한다’ 이런 뜻입니다. ‘애정을 가지는’, 이런 뜻인데 여기 3가지의 뻬마가 있습니다. 3가지의 애정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것이 3종류가 있다. 보통은 부처님이 모든 근심이, 모든 불행이 뻬마에서 온다, 이럽니다. 사랑함에서 시작이 되지요. 맞습니다. 근데 멧따는 강조하지요. 멧따는 있어야 됩니다. 멧따가 뻬마라는 단어에서 나왔는데 뻬마가 3가지가 있다.
1, 딴하 뻬마(taṇhā-pema).
2, 게하시따 뻬마(gehasita-pema).
3, 멧따 뻬마(mettā-pema), 이렇게 3가지가 있습니다. 3가지 뻬마(애정)가 있습니다.
첫 번째, 딴하 뻬마. 집착과 함께하는 사랑, 애정입니다. 이건 뭐냐 하면 ‘딴하’는 집착이죠 ‘뻬마’는 애정, 사랑함이고. ‘딴하 뻬마’는 남녀가 서로 좋아하는 것. 딴하, 로바, 탐욕의 힘으로 좋아하는 것. 이것이 딴하 뻬마입니다. 이성이 서로 좋아하는 것. 로바의 힘, 집착의 힘으로 좋아하는 것. 이것이 딴하 뻬마입니다. 이것을 또 다른 말로는 ‘싱가라(siṅgāra)’라고도 합니다.
두 번째, 게하시따 뻬마입니다. ‘게하(geha)’는 집이란 뜻입니다. 집(가족)에서 생겨나는 뻬마, 사랑(애정)인 거죠. 뭐냐 하면, 부모와 자식 그리고 형제지간, 남매지간, 자매지간. 이렇게 집에서 가족의 애정으로 서로 서로 아끼고 챙겨주고 사랑하고 이런 것, 이게 게하시따 뻬마입니다. 가정에서, 가족 안에서 일어나는 애정. 집에서 같이 지냄으로써 서로 애정을 갖게 되는 것. 사랑하게 되는 것. 이걸 또 다른 말로는 ‘왓찰라(vacchala)’라고도 합니다. ‘왓찰라’나 ‘게하시따 뻬마’나 같은 말입니다.
게하시따 뻬마나 딴하 뻬마(첫 번째 말한 남녀간의 애정). “로바와 딴하(탐욕. 집착)로 하는, 딴하에서 일어나는 그 힘으로 하는 이 두 가지 뻬마는 선업이 아니다.”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이 두 가지 다 꾸살라가 아니다. 게하시따 뻬마도 딴하 뻬마도 선업이 아니다. 딴하 뻬마는 딴하 라가(taṇhā-rāga)죠. 딴하 라가, 집착이라는 갈애. 게하시따 뻬마, 집에서 같이 삶으로 인해서 생겨나는 애정. 게하시따 뻬마. 이것도 로바(lobha. 탐욕)이다. 집착이죠. 이것도 탐심이죠. 탐심 이 두 가지다. 선업이 아니다. 불선업이다. 가령, 단풍 구경을 가면 형색이라는 대상을 좋아해서 가는 거죠. 제가 강원에서 아비담마를 처음 배울 때, 부모가 자식을 보고 흐뭇해하죠. 텔레비전 앞에서 앉아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것, 이것도 로바이고. 이것도 불선업이고. 자기 자식을 보면서 흐뭇해하는 것, 이것 뭡니까. 게하시따 뻬마죠. 자식을 보고 흐뭇해하고 기쁜 것. 이것도 불선업이다. 이렇게 배웠습니다. 너무 놀랬습니다. 그러면 뭐가 선업이냐고. 부모가 자식을 흐뭇함 부모가 자식이 먹는 것을 보고 행복함, 이것도 불선이면 뭐가 선업이 되나요? 제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어쨌든 집착 없이 자애를 쓰는 게 선업입니다. 그러니깐 이 두 가지 뻬마 모두 불선업이라는 거죠. ‘딴하 뻬마’도 집착, 라가이고 ‘게하시따 뻬마’도 로바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멧따 뻬마입니다. 자애죠. 다른 사람들의 이익, 발전을 원해서 하는 것. 이게 멧따 뻬마입니다. 타인 앞에서 말한 두 가지 대상을 제외한 나머지 타인의 이익을 위해서, 발전을 위해서 멧따가 있는 것. 이것이 멧따 뻬마입니다. 멧따는 다른 이들과 항상 같이 있으려는, 항상 붙어있으려는 이런 원하는 게 없습니다. 서로 짝까왈라(cakkavāḷa) 하나씩의 간격을 두고(‘짝까왈라’라는 것은 뭐냐면은 은하계를 말합니다). 우주만큼의 간격을 두고 지내도, 멀리 있어도, 그 멀리 있는 존재가 발전하고 행복하고 편안하기를 하는 마음으로 지내고, 그들이 편안하다는 것을 알면 만족합니다. 편합니다. 함께 있지 않아서 어렵고 슬프고 이렇지 않습니다. 멧따라는 것은 깨끗하고 고귀한 특성이 있습니다. 브라흐마 위하라(brahma-vihāra). 범천들이 사는 방법인 거죠. 범천들이 지내는 방법. 거기에 멧따가 들어가지요 자애. 자비희사(자애, 연민, 함께 기뻐함, 평정), 이렇게 4가지 무량한 마음에 들어가지요. 이게 브라흐마 위하라 담마입니다.
멧따는 멀리 있어도 잘 지내면 됐다. 이 마음을 많이 만들어내는 것, 이걸 말합니다. 멧따뿐만 아니라 까루나(karuṇā). 자비(慈悲)할 때 ‘비(悲)’입니다. 연민히 여기는 마음. 그리고 무디따(muditā), 기뻐하는 마음. 타인이 잘 돼서 기쁜 것. 그리고 우뻭카(upekkhā), 평정. 이것들도 다 브라흐마 위하라, 범천들이 사는 방법입니다. 범천들이 이렇게 산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4가지를 다 합쳐서 브라흐마 위하라 담마라고 합니다.
이 마음으로 살면 인간으로 살아도 범천이다, 부모들은 자식들에게 이런 마음을 가지지 않는가요, 이렇게 마음 가지지 않습니까? 저의 부모는 이런 마음이 있는 것 같은데. 부모가 다 자란 자식에게 이런 마음이 있겠죠. 어릴 때는 옆에 두고 있어야 되지만 다 크고 나면 멀리 있으면 더 편하지 않을까요? 그렇습니다.
여기까지 하고 오늘 마치겠습니다. 내일 멧따 바라밀 이어서 하겠습니다. 회향하겠습니다.
이러한 우리의 공덕이 우리를 번뇌의 소멸로 이끌기를.
이러한 우리의 공덕을 모든 존재들에게 회향합니다.
모든 존재들이 행복하기를!
사-두 사-두 사-두
필사자: 익명
편집자: 담마삐야
* 2022-11-07 인터넷
(https://us05web.zoom.us/j/4694074327?pwd=b2pNRUk4VzExbWFMSitFa1Jkc0wyUT09)으로 하신 법문을 필사하였습니다. 필사 후 위뿔라냐니 식카와띠님께 보여드리고 요약, 수정, 추가한 부분이 있습니다.
https://cafe.naver.com/dhammadipakorea/72
일부용어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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