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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7강 요한계시록 1장 9-20절
- 부활하신 영광의 그리스도와 교회 -
요한계시록 1장 9-20절 / 9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10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되어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11이르되 네가 보는 것을 두루마리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등 일곱 교회에 보내라 하시기로 12몸을 돌이켜 나에게 말한 음성을 알아 보려고 돌이킬 때에 일곱 금 촛대를 보았는데 13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14그의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같고 15그의 발은 풀무불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 16그의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의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치는 것 같더라 17내가 볼 때에 그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18곧 살아 있는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19그러므로 네가 본 것과 지금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20네가 본 것은 내 오른손의 일곱 별의 비밀과 또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본문에서 사도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의 서문에 해당하는 인사말을 하는 것에서 자신이 본 환상계시의 주제가 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못 박히는 고난을 통해서 죽었었으나 부활하신 영광의 주가 되셔서 세세토록 살아계시며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신 분이심을 자세히 묘사하며 자신이 받은 일곱 교회에 보내는 예언의 말씀에 대하여 기록한다.
1. 요한은 자신이 예언의 말씀을 받게 된 광경을 말한다(9-11절).
(1) 요한 자신에 대한 설명(9절)
9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첫째,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 된 요한(9a절)
여기서 요한은 자신을“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라고 소개한다. 요한은 자신을 자신이 써서 보내는 편지인 요한계시록을 받는 수신자가 되는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의‘형제’라고 말하면서‘그리고 예수의…에 동참하는 자’라고 말한다. 요한이 동참하게 되는 것은‘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이다. 여기에서의 환난, 나라(왕국), 참음은‘예수 그리스도 안에’와 연결되어 있어서“나 요한은 너희 형제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참음으로 그 환난과 그 나라에 동참하는 자이다.”를 뜻한다. 이는“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께서 참으신 참음으로 너희와 함께 그 환난을 참아 견디고 예수께서 참으신 참음으로 너희와 함께 그분의 나라에 들어갈 것이다.”를 말한다.1) 이 입장을 취한 현대어성경은 다음과 같이 번역하고 있다. "이 편지를 쓰는 나 요한은 여러분과 함께 주님을 위해서 환난을 겪어 온 여러분의 형제입니다. 나 역시 여러분과 마찬가지로 예수께 인내를 배웠으며 그분의 나라에 들어갈 특권을 받았습니다.”2)
요한이 이처럼 자신을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고 소개하는 것은 이어서 말하고 있는“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에서 보는 것인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밧모라고 불리는 섬에 유배된 것에서 이다. 요한은 에베소 교회에서 마지막 사역이 되는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당시 도미티안 황제가 그리스도인에게 가하는 박해로 체포되어서 밧모 섬에 유배되어 갇힌 몸이 되어 있었다.3)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또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했다는 이유로 밧모라는 섬에 갇혀 있는 몸이 된 환난을 겪었다. 요한은 이런 사실을 밝히며 이것이 무엇으로 있는 것인지를 말해주고 있으니, 예수 안에서 같은 형제 된 자들이 겪는 환난을 그들과 함께 주님을 위해서 겪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에 이르는 고난을 당하면서도 하나님의 일을 생각함으로 참음으로 받으신 그 뒤를 따름에 있다는 것이었다. 요한은 믿음의 형제들과 같이 환난 속에 있는 것이었으며, 이 환난에서 인내하며 믿음의 형제들과 같이 들어갈 미래의 영광을 내다보며 기뻐하면서 선취하고 있다. 즉 환난 속에서 인내하는 중에 영광의 나라에 동참하고 있다. 이것이‘이기는 모습’이다. 교회가 당하는 환난을 요한은 먼저 미리 겪은 사람이며, 이를 이기고 영광의 나라에 이미 참여한 자이다. 그가 이러한 자신을 설명하는 것은 이를 본 교회는 요한이 겪은 환난이 위로가 되고, 또 자신들에게 주어질 환난에 대비(준비)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예언은 장차 있을 일인 미래를 예고해 주는 특성과 또 현재에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에 대한 가르침이 있다. 이 가르침을 받기에 환난을 통해서 인내를 배운다. 그런 그들은 영광의 나라에 함께 참여할 것으로 연결된다. 해서, 요한은“나는 여러분에게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계시인 예언의 말씀을 전하면서 이로 인해서 겪게 될 일에 여러분 앞에 있습니다. 그러니 나에게 있는 일을 보면서 여러분은 내가 간 그 길을 따라 오십시오.”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자신과 함께 믿음의 형제들인 교회도 그들이 받은 계시인 예언의 말씀을 인하여 인내하여 환난과 나라에 참여할 것을 권면한다. 왜냐하면 요한계시록에서 하나님 나라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인하여 영광을 받을 것이며 또한 고난도 함께 받는 믿음의 형제들인 교회[그리스도인]에 현재 임하여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한 일로 밧모 섬에 유배 된 요한(9b절)
요한은 자신을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고 소개하면서 그 까닭을 설명하기를“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라고 말하였다. 여기서‘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였으므로’는“그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그리고 그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한 때문에”라고 하는 것으로,“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을 증거하였다는 것 때문에”4) 라고 하는 말이다.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한 일로 밧모라고 불리는 섬에 유배되는 환난을 겪었다. 밧모 섬은 소아시아의 남서 해안에서 멀리 떨어진 도데카네스 군도에 있는 작은 섬이다. 사도 요한의 동시대인인 플리니(Pliny) 장로는 밧모 섬이 로마인들이 범죄자들의 유배지로 삼았던 여러 섬 가운데 하나였다고 말한다. 초대 교회의 믿을 만한 전승에 의하면 사도 요한은 로마 황제의 영에 따라 밧모 섬에서 유배 생활을 하였다.5) 사도 요한이 어떤 이유로 밧모 섬에 유배되는 환난을 겪었는지는‘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였으므로’라고 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하나님의 복음인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한 일로 인하여 요한은 밧모 섬에 유배되었었다. 요한이 이처럼 하나님의 복음과 예수의 증언을 인하여 밧모 섬에 유배되어 갇힌 자가 된 것은 자신을 다른 그리스도인과 함께 환난에 참여한 자라고 소개한 것의 정당한 근거가 된다. 그리고 이것은 주께서 야고보와 요한에게 주께서 마실 잔에 의하여 그들도 마시고 주께서 받을 세례에 의하여 그들도 세례를 받을 것이라고 한 고난의 잔, 곧 고난의 세례에 속하는 것이었다(막 10:39).6) 이러한 요한은 후에 밧모 섬에서의 유배에서 풀려나 본토로 귀환된 후에 요한계시록의 서론 부분 또는 요한계시록 전체를 썼을 것으로 보인다.7) 요한이 이처럼 밧모 섬에서 풀려난 그 시점은 도미티안 황제의 통치 말기에서 아마도 도미티안 황제가 죽음으로써 유배 생활에서 풀려났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그 직후인 주후 96년경으로 본다. 혹 요한계시록의 기록 연대를 도미티안 황제가 사망하기 이전인 유배된 상태에서 기록했을 것이라고 보았을 때는 그 직전 해인 주후 95년경이었을 것으로 보인다.8)
(2) 주의 날에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주의 계시를 받는 요한 (10-11절)
10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되어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11이르되 네가 보는 것을 두루마리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등 일곱 교회에 보내라 하시기로
앞서 9절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 요한은 밧모 섬에서 유배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어느‘주의 날’9)에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어10) 주의 음성을 듣고 환상을 보며 계시를 받아 책에 기록하게 하여 일곱 교회에 보내게 하는 일이 주어졌다. 여기서 일곱 교회를 구체적으로 열거하고 있는데, 이는 이것을 통해서 다음에 나오는 일곱 메시지의 윤곽을 예고하고 있는 것이다.11) 비록 열거되는 일곱 교회에게‘책을 써서…보내라’고 했을 때 이것이 2-3장의 내용이 아닌, 요한계시록 전체를 의미한다는 것을 유념할 필요12)가 있을지라도 2-3장에 한해서는 그렇다.
요한이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고 주의 계시를 받아 그가 보는 것을 책에 써서 일곱 교회에 보내는 모습은 선지자적 소명을 받는 모습이다. 요한이 일곱 교회에 편지를 보낸 지역은 그 당시에는 유대인들이 많이 살았었다. 당시 3대 도시로 불려지는 알렉산드리아, 에베소, 고린도는 동양과 서양이 만나는 지점으로 유대인만이 아니라 이방인들도 함께 거주하고 있어서 이들 지역에 요한계시록을 보내는 소명을 받은 것은 동서에 복음을 전파하는 역할이 되었다.
그런데 요한이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고 주의 날에 계시를 받은 것은 인상적이다. 여기서 요한은 왜‘주의 날’이란 표현을 썼는가? 이 날에 대한 특별한 개념이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주의 날’은 문자적으로는‘주님에게 속한 날’이다. 그런데 이 용어가 사용된 원래의 용도인 '주'가 요한 당시에 로마인들에게서는 로마의‘황제’에게 쓰여지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그래서 로마인들에게서‘주의 날’은‘황제의 날’, 곧‘황제를 기념하는 날’이다. 당시 로마의 통치에 있는 지역에 사는 로마인들과 로마에 속한 이방인들은 로마 황제의 명을 따라 황제를 섬기는 날로서‘주의 날’을 가졌었다. 그러나 구약의 전통 속에는 주의 날이‘여호와의 날’이다. 그래서 이방인들은 황제를 기념하는 날이 있었고, 그리스도인은 자신들이 지켜온 날의 개념에 따라서‘여호와의 날’을‘주의 날’로 가졌다. 이 모두가 다 각각‘주의 날’이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들이 지키는 주의 날을 초대교회에서 이미 가져왔다. 그 개념이‘(이스라엘의 왕<신>이신)여호와를 기념하는 날’을 갖는 것으로, 이를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이 갖는 영원한 종말적 개념의 통치를 받는 날로 가졌다. 예루살렘교회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은 이 주의 날을 안식일에 국한하지 않고 날마다 지켜왔던 것으로 여겨지며(행 2:42, 46), 그리스도의 교회가 이방지역으로 확장되면서 점차 이방인들이 지켜온‘주의 날’에 대한 상대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이‘주의 날’을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
요한은 주의 날에 갑자가 그의 등 뒤에서 큰 음성이 들려오는 것을 들었다. 그 음성은 마치 나팔소리와도 같이 울리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너 보는 것을 책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일곱 교회에 보내라 하시기로”(11절). 요한은 이제부터 그가 보는 것을 기록하여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전하라는 명령을 받은 것이다. 그 내용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2-3장에 기록된다.
2. 요한에게 예언의 말씀인 계시를 주시는 주님의 모습(12-16절)
12몸을 돌이켜 나에게 말한 음성을 알아보려고 돌이킬 때에 일곱 금 촛대를 보았는데 13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14그의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같고 15그의 발은 풀무불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 16그의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의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치는 것 같더라.
(1) 구약계시의 인용에 의한 묘사
요한은 주의 날에 갑자기 자기 등 뒤에서 나팔소리 같은 큰 음성이 들려오므로 자신과 함께 하는 음성을 보려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때 그는 일곱 금 촛대를 먼저 보았다. 요한의 이러한 행동은 선지자적 부름을 받는 행동이다. 선지자는 (1) 듣는다 (2) 그리고, 본다. 이 둘은 구약에서 선지자의 소명을 받는 양식이다.
1장 12-20절에 묘사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은 전부 구약계시에서 따온 것들이다. 구체적으로 보면, 나팔소리는 출 19:19; 민 10:1-10, 큰 음성은 겔 3:12, 일곱 금 촛대는 출 25:32; 슥 4:12, 인자는 단 7:13,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띤 금띠는 출 25:7, 28:3, 흰 양털 같은 머리와 눈 같은 털은 단 7:9, 불꽃같은 눈은 단 10:6,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은 발은 겔 1:7, 많은 물소리 같은 음성은 겔 43:2, 오른 손의 일곱 별은 사 62:3; 단 12:3,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는 입은 사 11:4; 히 4:12, 해가 힘 있게 비취는 것 같은 얼굴은 마 17:2, 그 발 앞에 죽은 자 같이 된 모습은 출 33:20, 단 8:27을 주님의 모습에 인용하여 묘사한 것이다.
이러한 묘사에 의해서 주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그 하나하나가 지니고 있는 의미가 있지만 본문에서의 주안점은 부활 승천하신 영광에서 뿜어져 나오는 무한한 거룩한 능력이다. 그 앞에서 사도 요한은 죽은 자처럼 되었다. 주님이 내뿜는 무한한 거룩한 능력 앞에서 인간은 더 이상 산 사람이라고 할 수가 없다. 그런 죽은 사람을 주께서는 자신의 부활의 영광에 참여케 하는 것이다.
(2) 일곱 금 촛대 사이에 계시는 인자 같은 이
요한은 주의 날에 일곱 교회에 편지로 보내게 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서는 자기에게 말씀하시는 분을 보려고 뒤돌아섰다. 그런 그의 눈에 제일 먼저 들어온 것은 일곱 금 촛대와 그 촛대 한 가운데에 서 계신‘인자 같은 분’이었다.
여기의 일곱 금 촛대는 구약성전의 성소에 있었던 기물인데, 일곱 교회를 상징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20절에“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라고 설명이 되고 있기 때문에 알 수가 있었다. 설령 20절을 근거하지 않더라도 일곱 금 촛대가 교회를 의미한다는 사실은 빌립보서 2장 15-16절13)에서 충분히 밝혀져 있기도 하다. 즉 거기에서 바울이‘빛을 나타내는 자’로 묘사한 사람은 다름 아닌 생명의 말씀을 붙잡고 있는 교회와 그리스도인을 가리킨다. 한편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친히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으며(요 8:12) 이 칭호를 자신의 제자들에게 똑같이 부여해 주셨다(마 5:14).14)
그리고 요한이 본 것은 그 일곱 금 촛대 사이에 서 계신‘인자 같은 이’였다. 요한은 그 분을 볼 때‘인자라고 불리는 예수’라고 생각하였음이 틀림없다. 그러므로 현대인의 성경은“그 촛대 사이에는 예수님 같은 분이…”라고 번역하고 있으며, 현대어 성경도“나는 그분이 인자라고 불리는 예수라고 생각되었습니다.”라고 번역하였다. 무엇보다도 요한이 주님을‘인자 같은 이’라고 부르고 있는 이유는 예수님의 모습이 다니엘 7장 13절 이하의 광경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거기에 보면‘인자와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보좌에 앉으신 이에게 이끌려 가서 영광을 받으셨고, 왕권을 받으신 분으로 묘사되었는데,15)‘인자’란 용어는 예수께서 자신에 대한 가르침을 주실 때 자주 사용하셨던 것으로 요한은 지금 자신의 눈에 들어온 환상에서의 주님의 모습에서 그‘인자 같은 이’를 보고 있는 것으로 생각을 한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우리 또한‘인자 같은 이’가 구약에서 장차 오실 메시야에 대한 환상을 다니엘 7장에서‘인자’즉,‘사람의 아들’로 보여주었기 때문에 이 메시야 사상에 입각하여 온 것임을 잘 알고 있다. 바로 다니엘 7장에서 영원한 나라를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메시야가 우리 주님 자신임을 강조하신 것이 주님의‘인자’칭호로서 구약에서 예언한 그 메시야 나라의 왕이 자신임을 이‘인자’ 칭호를 통하여 말씀하셨던 것이다.16)
그러면‘인자 같은 이’가 일곱 금 촛대 사이에 서 계신 모습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때 그분의 오른 손에는 일곱 별이 들려져 있었다. 이 일곱 별은 20절에서 설명하고 있는 대로 일곱 교회의 사자이다. 그러니까 일곱 각 교회를 섬기는 사역자인 것이다. 그러나 일곱 교회의 사자를 주님께서 교회를 위해 부리시는 영들로 보기도 한다.17) 그러나 필자는 교회를 섬기는 사역자들로 본다. 이 별이 인자의 손에 들려 있다는 사실은 주께서 교회의 사자들을 든든히 붙잡고 계신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서 일곱 금 촛대 사이에 인자가 서 계신 것이니 이는 주께서 그 교회들과 더불어 함께 하신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심판인 일곱 재앙의 반복 속에서도 교회의 구원을 붙들고 계신 것이 요한계시록의 전체적인 사상인 것에서 볼 때 분명히 그렇다.
3. 일곱 교회에 편지를 써서 보내게 하신 이유(17-20절)
17내가 볼 때에 그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18곧 살아 있는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19그러므로 네가 본 것과 지금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20네가 본 것은 내 오른손의 일곱 별의 비밀과 또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1) 일곱 교회에 편지를 써서 보내게 하신 것은 그 교회에 알려 주어야 할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 있기 때문이다.
요한이‘인자 같은 이’인 주님을 뵙자 그분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사람처럼 되었다. 그러자 그분이 요한에게 오른손을 얹고 말씀하셨다.“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그러므로 네 본 것과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네 본 것은 내 오른손에 일곱 별의 비밀과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17-20절).
요한은 11절에서“너 보는 것을 책에 써서 일곱 교회에 보내라.”는 말을 들었었다. 그리고 요한이 듣고 책에 써서 일곱 교회에 보낸 내용은 요한이 이미 본 것과 함께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과 또 앞으로 일어날 일에 관한 것이며, 주님의 손에 들려져 있는 일곱 별과 일곱 금 촛대의 비밀에 관한 것이다.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사역자/지도자>요 일곱 금 촛대는 일곱 교회를 말하는 상징적 묘사이다. 요한은 이 일곱 별과 일곱 금 촛대에 알려주시는 요한이 듣고 본 모든 것, 곧 요한이 이미 본 것과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 그리고 장차 일어날 일 그 모두를 하나도 남김없이 다 기록하였다고 이미 말한 바 있다(2, 8절).
그렇다면 주께서 요한에게 계시의 말씀을 주셔서 책으로 기록하게 하여 일곱 교회에 보내게 한 이유는 그 계시가 요한이 이미 본 것과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과 또 앞으로 일어날 일에 관한 것이며, 이는 곧 일곱 교회와 그 교회를 섬기는 사역자들과 함께 하시는 주님에 관한 것이기에 이를 교회에 알게 해 주어서 이를 통해서 주시는 주님의 위로 속에 있게 하시고자 하는 데 있다고 할 것이다.
(2) 하나님께서 일곱 교회에 편지를 써서 보내게 하신 것은 그 교회가 주님 자신의 교회이기 때문이다.
주님이 그와 같이 하시는 까닭은 교회는 주님 자신의 교회, 곧 그리스도의 교회이기 때문이다.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를 반석 위에 세우셨으며, 음부의 권세18)가 이기지 못할 것을 약속하셨다. 주님은 그 교회를‘내 교회’라고 불렀다.19)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시며 교회의 생명이 되는 원천이시다. 그러므로 주님은 일곱 교회에 써 보내는 편지마다“내가 알고 있다.”는 말로 시작한다.
(3) 일곱 교회에 편지를 써서 보내게 하신 이유는 하나님께서 하실 일 그 모두를 알려 주시므로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이미 알고 있는 교회는 자신들에게 일어나 겪게 될 모든 일 속에서 위로를 받으며 든든함으로 견고히 주께 붙어 있게 하시는 것이다.
이런 주님이 가지신 자신의 교회관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교회의 현재 상태와 마땅히 되어야 할 상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를 말해 주는 것이다.20) 그래서 교회가 장차 될 일 속에서도 위로를 받게 하시는 바, 요한이 일곱 교회의 형제들과 함께 겪었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게 하시는 것이다.
4. 본문의 해석적 의미 설명
요한계시록은 사도 요한이 기록했다. 그는 자신이 요한계시록을 썼음을 밝히며, 이 편지를 받아 읽게 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주님을 위해서 고난을 겪어 온 그들의 형제임과 그 역시 믿음의 형제들과 마찬가지로 예수께 인내를 배웠으며 그분의 나라에 들어갈 자라고 말함으로써 친밀감을 나타냈다.
사도 요한이 모든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주님을 위해서 밧모 섬에 유배되는 고난을 겪은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알고 있는 일을 증거한 때문이었다. 그런 그는 주의 날에 성령에 감동되어 그에게 하시는 큰 음성을 들었다. 그 음성은 마치 나팔 소리와 같았는데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네가 보는 것을 두루마리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등 일곱 교회에 보내라.”
요한은 이 큰 음성을 들으며 자기에게 말씀하시는 분이 누구인지를 보려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런 그에게 눈에 들어온 것은 일곱 개의 금 촛대와 그 촛대 한가운데에 인자 같은 이, 곧 인자라고 불리는 예수께서 서 계신 것이었다. 그분은 발까지 내려오는 긴 옷을 입고 있었으며, 가슴에는 금띠를 두르고 계셨다. 그리고 머리카락은 흰 양털과 눈과 같이 희었으며, 눈은 불꽃과 같았고, 발은 화덕에 달구어 낸 놋쇠와 같고, 음성은 큰 물소리와 같았다. 또 오른손에는 일곱 개의 별을 쥐고, 입에서는 날카로운 양날의 칼이 뻗어 나오고, 얼굴은 해가 힘 있게 비치는 것과 같았다.
요한은 이렇게 예수님을 뵐 때 마치 죽은 사람과 같이 되어 예수님의 발 앞에 바짝 엎드러졌다. 부활 승천하신 영광에서 뿜어져 나오는 위엄 있는 무한한 거룩한 능력 앞에서 요한은 죽은 자처럼 되었다. 주님이 내뿜는 무한한 거룩한 능력 앞에서 인간은 결코 산 사람이라고 할 수가 없다. 그런 죽은 사람을 주께서는 자신의 부활의 영광에 참여케 하는 것이다. 이때 예수께서는 그에게 오른손을 얹고는 말씀하셨다.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며 마지막이니, 곧 살아 있는 자다. 나는 전에 죽었으나, 그러나 보아라! 나는 영원무궁 하도록 살아 있는 자이니 사망과 지옥의 열쇠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너는, 네가 본 것과 지금의 일들과 장차 일어날 일들을 기록하여라. 네가 본 내 오른손의 일곱 개의 별과 일곱 개의 금 촛대의 비밀을 말해주겠다. 일곱 개의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개의 금 촛대는 일곱 교회다.”
요한은 11절에서“너 보는 것을 책에 써서 일곱 교회에 보내라.”는 말을 들었었다. 그가 주님에게서 들은 말은 일곱 교회에 보낼 내용이다. 그것은 요한이 이미 본 것과 함께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과 또 앞으로 일어날 일에 관한 것이니, 주님의 손에 들려져 있는 일곱 별과 일곱 금 촛대에 있는 비밀에 관한 것이다. 요한은 2절에서 자신이 듣고 본 이 모든 것을 하나도 남김없이 다 기록하였다고 이미 말한 바 있다.
그렇다면 주께서 요한에게 계시의 말씀을 주셔서 책으로 기록하게 하여 일곱 교회에 보내게 한 이유인 일곱 별과 일곱 금 촛대에 있는 비밀에 관하여 말씀해 주신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일곱 별과 일곱 금 촛대가 무엇인지는 설명하여 알려 주시고 있다.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금 촛대는 일곱 교회이다. 그렇다면 일곱 교회에 그리고 그 교회를 섬기고 있는 사자들에게 있는 비밀을 말씀해 주시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요한계시록 2-21장의 내용 전개이다. 그 내용은 일곱 교회와 그 사자에게 약속된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요한이 겪었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함께 동참함에 있을 때 주께 가진 믿음에 신실하게 하시는 것이다. 주님이 그와 같이 하시는 까닭은 교회는 주님 자신의 몸이기 때문이다. 모든 믿는 자들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를 자신에게 굳은 신앙고백에 있는 반석 위에 세우셨으며, 그 교회를 결코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할 것이며 천국의 열쇠를 약속하셨다. 주님은 그 교회를‘내 교회’라고 불렀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시며 교회의 생명이 되는 원천이시다. 그 주님은 일곱 개의 편지마다 자신의 교회를“내가 알고 있다.”는 말로 시작한다.
주께서는 교회와 그 사자에게 있는 일을 다 말씀해 주셨기 때문에 교회와 그 사자는 자신들에게 어떤 일이 있을 것인지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교회와 그 사자는 자신들에게 일어날 일을 알지 못하는 가운데서 불확실함에도 불구하고 믿음을 가져나가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섬기는 믿음에 있는 것은 이 믿음을 가지고서 힘써 사용하여서 우리가 필요로 하는 무엇인가가 있어지도록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되면 믿음은 마치 연마하는 성격에 있는 것이 되어서 숙련된 믿음에 있는 것의 성격에서 말하는 오류를 범할 것이다. 믿음은 주께서 교회와 그 사자에게 알려 주신 일을 잘 알고서 그것을 바라보며 그 일을 이루신 주께 우리 마음이 공고히 있는 것이다. 그러한 교회와 그 사자는 어느덧 주께서 약속하신 생명에 있게 될 것이다. 이렇게 교회와 그 사자는 자신들에게 어떤 일이 있을 것인지를 잘 알고 있기에 교회와 그 사자가 요한이 겪었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함께 동참함에 있을 때에도 위로를 받음에 있으면서 주께 가진 믿음에 신실히 있어갈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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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참조.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하느니라.”(행 14:22) “참으면 또한 그와 함께 왕노릇 할 것이요.”(딤후 2:12).
2) 개역성경과 개역개정성경의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는 번역은 예수가 당하신 환난, 예수의 나라, 예수의 참음에 그를 따르는 자들도 동참할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반면에 표준새번역은 “예수 안에서 환난과 그 나라와 인내에 여러분과 더불어 참여한 사람”, 우리말성경은 “예수 안에서 환난과 나라와 인내를 함께 나누는 사람”이라는 번역의 입장을 취한다. 그리고 공동번역은 “함께 예수를 믿는 사람으로서 환난을 같이 겪고 한 나라의 백성으로서 같이 견디어온 나 요한”이라고 번역하였으며, 한글킹제임스 및 킹제임스흠정역(개정판)은 “환난과 예수 그리스도의 왕국과 인내에 동참하는 자라” 라고 번역하였다.
3) 필자는 요한계시록의 기록 연대를 도미티안 황제의 통치(A.D. 81-96) 말기인 95-96년경으로 보는 견해에 있음을 2강 요한계시록이 기록된 기록 목적 이해에서 밝힌 바 있다.
4) 현대어성경
5) Philip Edgcumbe Hughes, The Book Of The Revelation, 오광만 역,『요한계시록』(서울: 여수룬, 1994), 33.
6) 위의 책.
7) 위의 책.
8)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 유배된 시기는 기독교의 전승에 의하면 도미티안(Domitian) 황제 때이다. 이 점에 대하여서는 초대교회의 전승이 일치한다. 터툴리안은“사도 요한은 섬에 유배되었다.”고 말하였고, 오리겐은“로마 황제는 요한이 진리의 말씀을 증거하였기 때문에 밧모 섬에 유배 보냈다.”고 했으며,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는“압정자가 죽은 후에 요한은 밧모 섬에서 에베소로 돌아왔다.”고 했다. 그리고 제롬도 말하기를“요한은 도미티안 황제 때인 주후 94년에 밧모섬에 유배되었다가 도미티안 황제가 죽은 후인 96년에 석방되었다.”라고 말하였다. William Barclay, The Revelation of John Vol. Ⅰ, 고영춘 역,『성서주석 시리즈 계시록(상)』(서울: 기독교문사, 1973), 75. 또한 오리겐의 헬라어 저서들에 의존하여 라틴어로 저술한 페타우의 빅토리누스는“요한이 로마 황제 도미티안에 의해 정죄를 받고 밧모 섬에 있다가 그곳에서 묵시를 보았고, 그 황제가 죽고 석방된 후에 그 묵시를 출판했다.”하였으며, 유세비우스도 요한이 트라야누스 황제의 통치 때(A.D. 98-117)에 살아 있었다는 취지의 이레네우스의 말을 인용하며“도미티안 황제의 사망 후에 요한이 유형에서 돌아왔다.”고 말하였다. David E. Aune, 김철 역, 앞의 책, 434. ; 이상에 의하면 사도 요한은 도미티안 황제가 통치하던 때인 주후 94년경에 유배되고 그가 사망한 해인 주후 96년경에 유배에서 풀려나 돌아온 직후 그가 밧모 섬에서 본 계시인 요한계시록을 바로 기록하였을 가능성이 가장 유력하며, 그 이전의 시기로 볼지라도 도미티안 황제의 통치 말기에서 사망하기 직전에 해당하는 주후 95년경일 것이라고 본다.
9) 역사적으로 요한계시록 1장 10절의‘주의 날’의 언급은 매우 흥미롭고도 중요하다. 그것은‘주의 날’에 관한 증거로 문헌에 처음 나오는 곳이기 때문이다. 즉 문헌에 나오는 최초의‘주의 날’에 관한 언급이다. William Barclay, 앞의 책, 77. 그러면 이‘주의 날’은 오늘날의 교회가 지키는‘주의 날’과 같은 것인가? 하는 것에는 의견을 달리한다. 우선 요한이‘주의 날’에 주의 계시를 받은 그 날은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인 안식 후 첫날일 것이라는 것에는 그렇게 받아들일 수도 있는가 하면, 의견을 달리하여서 당시 교회가 지켜온 어느 한 날의‘주의 날’일 수도 있다. 따라서 요한이 밧모 섬에서 주의 계시를 받은‘주의 날’이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인 안식 후 첫날이라는 데에는 동일한 의견과 이견일 가능성이 다 있다. 우선 그리스도의 교회가‘주의 날’을 가지는 초기의 모습은 예루살렘교회에서 볼 수 있듯이‘날마다’였다. 즉, 날마다 곧 모든 날이 그들에게서는‘주의 날’이었다. 그들이 주의 이름으로 모여서 사도의 가르침을 받으며 기도하고 떡을 떼는 날은 그 날이 어떤 날이든지 간에‘주의 날’이었다(행 2:42, 46). 그러다가‘주의 날’이 한 주간[일주일]의 어느 하루의 날을 지칭하는 것이 된 것은 이방 지역에 교회가 세워지면서부터 이다. 먼저 사도행전 20장 7절의“안식 후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저희에게 강론할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와 고린도전서 16장 2절의“매주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이를 얻은 대로 저축하여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에서‘안식 후 첫날’과‘매주일 첫날’에 공적 예배의 모임을 가진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방 교회에서 안식 후 첫날은 공중 예배일이었다. 그러나 사도행전 20장 7절과 달리 고린도전서 16장 2절은 안식 후 첫날이라는 설명이 없이‘매주일 첫날’로만 언급되고 있어서 이 날이 매 안식 후 첫날로서의 매주일 첫날인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다. 따라서‘매주일’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안식일인 제 칠일 후 첫날에 부활하신‘그 날’이라는데 대한 확증을 갖지 못한다. 매주간에 어느 한 날을‘주의 날’로 가졌다고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매주일 첫날’이 안식 후 첫날이라고 분명하게 여긴다고 해서 문제될 것은 없다. 우선 예수님의 사도들은 안식 후 첫날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뵙게 되었으며(요 20:19), 그 기억에서 어느 시점에서부터는 안식 후 첫날을‘주의 날’로 삼고 공중 예배로 모여 하나님을 예배하며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신앙적인 모습을 가져 나갔다고 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런 그들에게서 안식 후 첫날은 이제 유대인들이 지키고 있는 안식일과는 전혀 다른 날의 의미를 갖는다. 즉, 유대인이 지키는 안식일 개념으로서의 주일이 아닌 것이다. 이제 그리스도인에게서 안식일 다음 날은 전혀 새로운 개념으로서의 날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기에‘매주일 첫날’이란 의식을 가졌다. 그리스도인은 그 매주일 첫날에 규칙적인 공중예배를 드렸다. 그런가 하면 사도 요한이 밧모 섬에 유배되어 있을 때의 일인 요한계시록 1장 10절의“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내 뒤에서 나는 나팔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에서도‘주의 날’이 언급되고 있는데, 다분히 의도적인 묘사이다. 그는 요한계시록 1장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계시를 받고 있음을 그려내고 있다. 그는 밧모 섬에 유배됨으로 해서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죽음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날을 함께 가져나가고 있지는 못하지만 부활하신 주님을 뵙는 특별한 은혜를 주의 날에 받았다. 요한이 밧모 섬에 유배되어 가 있는 시점이 지금까지 그리스도인들이 매주일 첫날을 규칙적인 공중예배를 드려간 때 이 전이기에 그가‘주의 날’에 부활하신 주님을 뵙고 계시를 받은 그‘주의 날’은 단지 그가 한 주간의 어느 한 날을 주의 날로 삼고서 주님을 묵상하는 중에 있었다고 보기보다는‘매주일 첫날’에 대한 의식을 갖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런데 그‘매주일 첫날’이 예수님이 부활하신 안식 후 첫날이라는 데에는 그럴 수 있는 가능성과 함께 당시 로마 제국에서 지켜져 왔던‘주(황제)의 날’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믿음을 갖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섬기는‘주의 날’을 구별하여 지켰을 가능성에 무게를 둔다. 그래서 이방인들이 지키는‘주(황제)의 날’과의 차별을 갖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섬기는‘주의 날’을 갖는 것에서 가져나갔을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주(황제)의 날’과 구별되는‘주(主)의 날’을 주께서 부활하신‘안식 후 첫 날’, 곧‘주(週)의 처음 날’에 가져갔던 것이다. 그러다가 안식일이 폐지되고 주의 날을 그리스도인의 날로 지키게 된 것은 주후 2세기 초에서부터 보며, 오늘날에서 갖고 있는‘주(主)의 날’을 말하는 것으로서의‘주일(主日)’을 주(週)의 처음 날’에 갖게 된 것은, 즉 일요일을 주일로 갖게 된 것은 그보다 더 훨씬 후인 기독교가 로마에서 밀라노칙령에 의해 공인된 해인 주후 313년 때 이후부터라고 본다. 1년을 365일로 하고 4년마다 하루씩 윤일을 두었던 처음 태양력은 기원전 46년 카이사르의 명으로 제정되었으며 1582년까지 율리우스력이란 이름으로 쓰였다가 이것을 기초로 하여 수정된 태양력이 나왔는데, 그것이 현재 우리가 쓰고 있는 달력인 그레고리우스력이다. 이 달력은 1582년에 교황 그레고리우스 13세가 승인한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안식 후 첫 날을 매주일로 가져온 것은 사도 시대에는 이 태양력에 따른 것이 아니고 유대력에 따른 것이었다. 더욱이 유대력에서는‘하루’의 개념이 해질녘에 하루가 시작되어 다음날 해질녘에 마무리 되는 것으로 해뜰녘에 시작되어 해틀녘에 하루가 마감되는 것과는 다르므로‘안식 후 첫 날’을‘주의 날’로 가져온 것에서의 하루의 개념도 유대력에서의 하루에서 오늘날의 하루에로 전환되는 시점에 있어오는 과정에서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에 주일을 갖는 것과는 다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교회가 이방 지역에 세워지고 교회가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와 유대인 지역과 이방인 지역 모두의 보편적 교회의 특성을 띠면서 자연스럽게 태양력에서 사용하는 일요일에‘주의 날’을 가져갔을 것이며, 추후 콘스탄틴 황제에 의하여 기독교가 공인되면서 예배 모임의 자유에 따라 점차 일요일에‘주의 날’을 갖는 것이 공적화 되었을 것이다.
10) ‘성령에 감동하여’는‘in Spirit'로‘성령 안에서’이다. 요한은 성령 안에 있으면서 주님의 음성을 듣고 계시록을 쓴 것이다. 그에 따라서 요한은 성령의 예언적 사역을 하고 있는 것으로, 우리가 성령 안에 있으면 일차적으로 성령이 하시는 말씀을 듣게 된다. 이것이 성령의 사역이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에서‘성령 안에서’의 표현은 문장이 나누어지는 중요한 단어의 표현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래서‘성령에 감동하여’(성령 안에)가 사용되는 곳에서부터는 새로운 문장이 전개가 된다.
11) 이필찬,『요한계시록 어떻게 읽을 것인가』(서울: 성서유니온선교회, 2003), 43.
12) 위의 책.
13)“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도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나로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
14) M. 윌콕, 이종일 역,『B.S.T 강해 시리즈 요한계시록 역사의 저편 새하늘과 새땅』(서울: 기독지혜사, 1988), 42.
15) 한정건,『종말론 강해』(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92), 50.
16) 이순태,『요한계시록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2002), 96-97.
17) 앞의 책, 53.
18) 원문은 the gates of hell으로‘지옥의 문들’이라고 되어 있다.
19) 마 16:18.“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20) 존 스토트, 정규채 역,『그리스도가 보는 교회』(서울: 생명의 말씀사, 1980),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