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장
1-9절에는 세 개의 이야기(‘바로 그때’ 나타난 사람들이 전해 준 이야기,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18명이 치어죽은 사건, 열매 맺지 않는 무화과나무이 비유)로 구성되어 있고, 동일한 주제를 반복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앞의 두 사건은 ‘회개’의 중요성을, 뒤의 비유는 회개의 긴급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당시 남다른 재앙을 당하는 것은 ‘그 자신의 죄 때문’이라는 생각이 보편적이었습니다. 그런 당시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해석은 혁명적 선언이라 할 수 있습니다(‘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 같이 해 받으므로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2-3절). 즉, 예수님이 이 사건을 다루고자 하신 궁극적인 문제는 죽은 그들의 죄가 아닌, 바로 ‘너희’ 곧 ‘이 사건을 듣는 이 사람들’입니다. 이를 더 확실히 하기 위해 이미 다 알고 있는 유명한 사고 하나를 덧붙입니다(4-5절의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열여덟 명이 죽은 사건). 앞에서와 똑같은 말로 결론 내리십니다(‘치어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들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같이 망하리라’).
일종의 반복 강조를 하십니다.
서쪽에서 일어나는 구름처럼, 남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처럼 이 사건들이 이 무리들에게 분명하게 선포하고 있는 징조는 그 사건을 당한 그 사람들이 아니라, 그 사건에 대해 듣고 있는 ‘너희들’을 향하고 있습니다. 즉, 이 사건을 듣고 있는 ‘너희’가 ‘회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3절, 5절,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같이 망하리라’).
회개를 촉구하신 예수님은 이어서 열매를 맺지 않는 무화과나무이 비유를 들어, 아직 기회가 주어져 있는 동안 회개가 시급히 이루어져야 함을 말씀하십니다(6-9절). 이 비유를 통해 심판은 반드시 있는데, 하나님은 회개하지 않는 죄인을 당장 심판해 버리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심판이 보류되고 있는 것은 멸망을 면할 회개의 기회를 주려는 하나님의 인자하심 때문입니다(벧후3:9).
10-17절은 안식일에 회당에서 18년 동안 ‘귀신이 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참혹한 모습의 여자를 고치신 내용입니다. 예수님이 여자를 고치자 회당장으로 대표되는 모든 반대자들이 무리에게 노를 발하면서 말합니다. ‘아무리 병이 심각하고 시급하다 할찌라도 안식일에는 안 된다. 안식일이 아니어도 날이 많으니 다른 날에 고침을 받으라!’ 이에 예수님이 ‘외식하는 너희들’이라고 지칭하시며 정면으로 대응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15-16절). 짐승들보다 비교할 수 없이 더 존귀한 존재인 사람이 18년 동안 사탄에 매여 있는 것을 풀어 주는 일에 대해서 전혀 융통성도 자비심도 없이 형식에만 얽매인 사람들! 우리 또한 이러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18-21절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두 비유를 얘기합니다.
겨자씨 한 알의 비유의 핵심은 씨의 작음과 그 씨 한 알이 자라서 만들어 낸 결과의 확연한 대조입니다. 시작은 눈에 잘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작은 것이었는데, 결국은 5미터 이상 되는 나무가 됩니다(How주석, 앵커바이블에서도 큰 나무로 얘기함). 또한, 이 비유는 과정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자라고야마는 결과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의 비천한 인간의 모습으로 오심으로 사람이 보기에는 미미하게 시작되었지만 반드시 놀랍게 확장될 것임을 비유를 통해 선언하고 있습니다.
겨자씨 비유가 하나님 나라의 외적인 성장을 비유한 것이라면, 누룩 비유는 하나님 나라의 강력한 영향력, 변화시키는 능력을 비유한 것입니다(20-21절).
22-30절은 구원 얻을 자에 대한 질문과 대답에 대한 내용입니다.
어떤 사람에 의해 ‘단지 소수만이 구원을 얻을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예수님은 직접적인 대답을 하지 않으시고, 장차 구원 얻을 사람이 ‘지금 여기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로 답하십니다. ‘지금 여기’의 기회가 지나버린 다음에는 모두가 너무 늦어버리게 됩니다(24-28절). 그러므로 기회로 주어진 ‘지금 여기서’ 해야 할 일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주님이 원하시는 방식대로 사는 삶!)를 힘쓰는 것’입니다(24절). 31-35절은 심판으로부터의 보호를 원치 않고 있는 예루살렘을 안타까워하시는 주님의 모습입니다.
14장
1-6절은 예수를 책잡기 위해 ‘엿보고’ 있는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이 옳으냐, 옳지 않으냐?’라는 율법의 해석에 관한 질문을 던짐으로써 ‘참교육’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율법 전문가들은 예수님의 질문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버림).
7-14절은 예수님이 초청받아 간 곳에서 높은 자리에 앉는 율법교사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비유’라는 적절한 수사법을 활용하여 이들을 ‘참교육’하는 모습입니다(11절,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그러면서 자신을 초대한 주인에게도 교훈하고 있습니다. 즉, 친한 사람이나 같은 부류의 사람들을 초청하지 말고, 사회적으로 신분이 낮고 어려운 사람들을 초청하라는 것입니다. 후자의 사람들은 되갚은 능력이 없기 때문에, 의인들이 부활한 후 그들이 초대에 대해 하나님 나라에서 보상을 받기 때문입니다(14절). 주목할 것은 후자의 사람들을 ‘의인’으로 암시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세상에서는 미천한 사람들일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눈에는 ‘의로운’ 사람들로 인정을 받습니다.
15-24절에서 예수님은 큰 잔치의 초대에 핑계를 대고 오지 않은 세 종류의 사람들을 열거하면서 어리석은 유대 지도자들을 교훈합니다.
25-35절에서 예수님은 제자가 되기 위해 갖추어야 할 조건들을 말씀하십니다(26절, 27절, 33절). 이는 만물과 생명의 주관자 되신 예수님을 절대 주권자로 인정하고 그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인 줄로 믿습니다.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설명해 주신 예수님!
오늘 예수를 믿는 우리도 그 나라의 영광을 누리게 될 줄로 믿습니다.
이를 위해, ‘지금 여기’에서 예수님을 더욱 사랑하는 자 되기를요...^^
첫댓글 하나님은 잔치에 오기로 되어있던 자들이 모두 거절해도 잔치를 취소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누가 보아도 잔치에 어울리지 않을만한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에게도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복이 돌아갑니다.(14:15-24)
예수님을 따르는데 드는 기회비용을 계산해보라 하십니다.(14:26-33) 잔치를 거절했던 사람들에게는 새로 산 밭과 소, 결혼이 훨씬 더 중요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나의 생각과 판단, 세상의 가치 등 모든 것위에 믿음으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욕심나는 많은 것을 포기하고 매일을 하나님의 공급하심에 만족하고 겸손한 자리를 자처하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르는데 대가가 드는 것처럼, 반대로 예수님을 외면하고 세상을 우선순위로 삼는 길에도 엄청나고 끔찍한 대가가 따른다는 것을 자주 잊는 것 같습니다. 영원의 관점에서 볼수록 더욱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이 요구하는 대가를 따져볼 때, 예수님을 따를 때 우리에게 주어지는 약속된 구원과 복이 어떠한 것인지를 항상 기억하는 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를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약속된 구원과 복을 '지금 여기'에서 누리는 은혜가 있으시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어떠한지를 아는 자 되기를 기도합니다
아멘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의 대접을 이 땅에서 미리 받고 누리는 은혜가 있으시기를 기도합니다.^^
오늘도 겸손함에 본을 보이신 예수님을 생각하며 감사하므로 되갚을 능력이 없는 다른 누군가를 위해 기도하며 베푸는 삶이 되기 원합니다.
아멘입니다. 마7:12절의 '황금률'말씀처럼, 다른 누군가를 먼저 대접할 때, 이로 인한 하나님의 놀라운 섬김과 대접을 받게 될 줄로 믿습니다.^^
외식하는 자에게는 안식일을 지킴으로 자신들의 권위를 돋보이게 하려고 하지만 예수님은 귀신들린 여인을 치유해주시고 해방시켜주심으로 안식일의 주인되심과 안식일의 의미를 일깨워 주셨네요.
예수님의 사랑의 참의미를 더욱 알게 되기를 원합니다.
네~ 아멘입니다. 날마다 예수님의 '참사랑'가운데 거하시며 승리하시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