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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풍류하회 원문보기 글쓴이: 이한방
유청량산일기
갑인년(1614년, 광해군 6년) 9월 나는 수산(壽山)에서 출발하여 오미동(五美洞)에 있는
효중(孝仲) 김영조(망와 金榮祖/ 학사 김응조 仲兄)를 방문하였다.
옛 사람들이 멀리 유람하던 즐거움을 언급하다가 서로 개연히 탄식하며 말하기를,
“우리 나라의 명산 중에서 묘향산(妙香山)과 풍악산(楓嶽山)은 모두 기이함과 웅장함으로 세상에 크게 이름을 떨치고 있다.
그러나 천리 밖 먼 곳에 있어 오랫동안 마음에 담아 두고 있을 뿐 가서 닿을 수 없었다.
그러나 청량산만은 우리 부(府)의 경계에 있고 그 맑고 수려함이 묘향산, 풍악산과 첫번 째를 다투고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선현들이 유람하던 장소인지라 산중의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가 모두 선현들의 체취가 지금껏 없어지지 않았다.
이런 점은 묘향산과 풍악산에는 없는 바니, 어찌 그곳에 가서 살펴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라고 하였다. 마침내 행장을 꾸리고 모두 모일(某日)로 약속을 정하였다.
가는 도중에 오천(烏川)에서 자준(子埈)과 이지(以志)를 불러 도산서원에서 만나기로 하고
종자從子(조카) 원지(元之/졸재 류원지公)가 우리를 따라 왔다.
12일. 그날 취한 채 마암(馬巖)을 넘어갔는데, 오천에 닿기 1리 전에 시내가의 돌 위에 앉아 자준에게 속히 오도록 하는
편지를 보냈고, 또 종에게 오늘밤 퇴계(退溪)에서 묵겠다고 단단히 이르고는 먹을 것을 운반하는 자를 먼저 출발시켰다.
얼마 후에 자준이 상사(上舍) 김평보(金平甫) 어른과 함께 이르러 말하기를,
“도착하는 날에 이지는 막내 여동생의 상(喪)이 있었고, 나도 아버지의 제사가 임박했다네.
도산(陶山)과 퇴계(退溪) 사이에서 잠시 머무르면서 내가 제사를 끝마치기를 기다렸다가 함께 명승지를 찾아 떠난다면
또한 즐겁지 않겠는가?” 라고 하였다. 내가 답하기를,
“가을 산이 꿈에 들어와 아름다운 경치가 사람을 들뜨게 하여 하루라도 멈출 수가 없네.” 라고 하였다. 마침내 한
백보 쯤 가다가 작은 고개에 올라 바라보니 구름 속에 산과 봉우리들이 동북 사이에 우뚝 솟아 있었으니,
바로 청량산의 여러 봉우리들이었다.
분천(汾川)을 지나 요서(堯瑞) 어른 [처의 외숙이다.]을 찾아 뵙고 간단하게 술을 한 잔 하였다.
분천의 동쪽에는 돌아가신 효절공(孝節公) 상국(相國) 이현보(李賢輔)의 옛 집이 있으니, 공은 바로 명종 때의 명신이다.
풍류와 절개 있는 행동으로 세상에서 추앙받았다. 농암(聾巖)의 아래에 애일당(愛日堂)을 지어 놓고 양친을 효성스럽게
봉양했는데, 모실 때의 안색과 봉양이 법도에 어긋남이 없었다. 분천에 거주하는 자들은 모두 그의 후손이다.
만력(萬曆) 을사년(1605년, 선조 38년)에 애일당이 수몰되었고, 농암 역시 무너져 올라갈 수 없게 되었다.
저녁에 도산에 이르렀다. 나는 약관 때부터 여러 차례 이 서원에서 노닐었는데, 오늘은 갈 길이 매우 급하고 게다가
고을의 유생들이 모임을 가진다는 말을 들어 더욱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말에서 내려 지나가면서 소혜(小奚)를 시켜
들어가 효중이 왔는지를 살펴보게 했더니 오지 않았고, 효중은 이미 산성(川城)에서 출발하여 도산에 이르러서는
산장(山長) 사문(斯文) 김택용(金澤龍) 자는 시보(施普). 1547∼1627 과 함께 술을 마신다고 하였다.
산장은 내가 지나간다는 말을 듣고 사람을 보내와 말하기를,
“원컨대 하룻밤 묵으면서 정자(正字) 효중과 함께 하시지요.”
라고 하였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원지(元之)와 함께 말을 돌려 그 집에서 가서 수십 여 잔의 술을 마셨다.
이날 밤은 달빛이 매우 밝았다. 효중이 산장에게 말하기를,
“젊어서부터 이 서원에 여러 차례 왕래하며 노닐었는데, 천연대(天淵臺)의 네 계절 경치는 대략 보았네만
유독 달밤의 경치는 아직 보지 못했으니 나가서 경치를 보세나.”
라고 하였다. 산장이 좋다고 하여 다시 술과 안주를 가지고 천연대에 나가 노니는데, 붉은 절벽은 우뚝하고
푸른 소나무는 울창하였다. 긴 강은 앞에서 굽이돌고 넓은 들판은 저 밖에서 구불구불 뻗어 나가니, 산수의 아름다움이
진실로 우리나라에서 크게 이름을 떨칠 만하니, 경치를 제대로 아는 사람을 만나지 않았다면 누구를 좇아 따라 나왔으리오?
하늘이 우리 퇴계 이황 선생을 낳으셔서 벼슬에 나아가 크게 뜻을 펼치지는 못하게 하였으나, 물러나 이 산 중에서
바른 학문을 닦아서 밝히도록 하셨다. 저 무성한 초목의 땅을 예의를 알게 하는 마을로 변화시켰으니,
바로 주자(朱子)가 강학했던 무이산(武夷山)의 운곡(雲谷)과 더불어 수백 년의 사이를 두고 오르내리며 화답하였다.
그러니 저 한 때의 세도(世道)의 불행이 어찌 이 산으로서는 큰 다행이 아니겠는가? 아아, 성대하도다.
한 퀴를 구경하고 돌아와 절우사(節友社)에 들어가 한참 앉아 있다가 입교당(立敎堂/입교당은 병산서원 강학처이고
도산서원은 전교당인데 착오인 듯) 서쪽의 협실(夾室)에서 잤다.
13일(임술). 아침에 일어나 사당에 배알하였다. 느즈막히 출발하여 퇴계(退溪)로 들어갔는데, 산등성이와 산봉우리를
쳐다보니 수려하였다. 선생의 묘소가 그 위에 있었으나 일정이 늦었고 갈 길이 바빠 참배하지는 못하고 다만 말에서
내려 경의만 표하고 지나갔다. 고개 하나를 넘고 또 돌아서 남쪽으로 1리쯤 가니, 붉은 절벽은 병풍처럼 펼쳐져 있고,
푸른 물은 깨끗한 거울 같은데 비단 같은 단풍과 흰 눈 같은 모래는 신선들이 사는 곳처럼 황홀하였다.
서로 바라보며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기뻐 말하기를,
“이곳은 단사협(丹砂峽)이 아닌가?”
라고 하였다. 벼를 베고 있는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모두들 그런 이름은 없다고 하였다. 단사라는 말은 선생께서 처음
사용하셨는데, 거주하는 백성들이 어리석어 다만 옛 지명만 전해오고 있기 때문에 모르는 것인가 보다.
이 때문에 예전의 일이 생각났다.
임술년(1562, 명종 17년) 겨울에 돌아가신 아버지 서애 유성룡(柳成龍, 1542∼1607) 께서
책 상자를 짊어지고 도산에 들어가 몇 개월간 머무시면서 ≪심경(心經)≫과 ≪근사록(近思錄)≫을 배우셨다.
하루는 선생께서 단사협으로 놀러 가자고 하셔서 말을 타고 동행하셨다.
이 때 백부 목사부군(牧使府君) 유운룡(柳雲龍, 1539~1601) 께서도 함께 말 한 필을 타고 가서
그윽한 경치를 다 구경하셨는데, 돌아오자 이미 한밤중이었다.
그러나 선생께서는 오히려 촛불을 밝히고 홀로 앉아 급히 들어오라고 하시면서 유람에서 얻은 시를 읊어보라고 하셨다고
한다. 선군자께서 만년에 나를 위해 이와 같이 말씀해주셨는데, 생각지도 않게 오늘 몸소 이곳에 와서 눈으로 그 경치를
바라보며 남아 있는 유적을 추억하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마침내 말에서 내려 단사협에 앉아 사방으로 눈을 돌려보니 절벽이 동북쪽에서부터 펼쳐져 휘감아 돌더니 남쪽으로
백 보쯤 가다가 다시 꺾여 서쪽으로 간다. 가장 서쪽의 형세는 더욱 기이하였는데 높은 물은 곧 낙동강의 상류로 태백산의
아래에서 발원하여 재산현(才山縣)을 지나 양춘(春陽)의 물과 만난다. 청량산에 이르러 빙 둘러 백 번 꺾여져 내려오는데
도산과 분촌(汾村) 및 우리 선영(先塋)은 모두 이 물가에 있다.
진실로 조그만 배 하나를 타고 물결을 따라 아래로 내려가면 며칠 걸리지 않아 옥연(玉淵)에 다다를 수 있다.
언덕의 북쪽은 지면이 평평하고 기름진 땅이 수백 이랑인데 농사를 지을 수도 있고 오두막을 지을 수 도 있어 은거하며
노닐 수 있는 곳이다. 그러나 예로부터 은자는 없고 평민 5, 6호만 고기 잡고 나무하며 생업을 유지하고 있다.
이곳의 이름을 물어보았는데 모른다고 하였으니 하물며 경치를 바라볼 줄 알겠는가?
옷을 벗어 안장에 걸어두고 강을 따라 걸었다. 북쪽으로 1리쯤 가서 말에 올라 또 몇 리쯤 가서 내를 건너니 산기슭에
기와집이 있었다. 백우촌(伯牛村)이라고 하는 동네로, 물가에 부서진 배가 있었으나 사용할 수가 없었다.
백 보가 안 되어 다시 내를 건너 동쪽으로 산허리를 따라 가는데 돌길은 험하여 길을 분별할 수가 없었다.
나는 평소 고산(孤山)의 돌아가신 성재(惺齋) 금난수(琴蘭秀, 1530∼1604)의 호 의 정사(精舍)에 천석(泉石)이 매우
아름답다는 말을 들었다. 말 위에서 여러 차례 얘기 했고 또한 길가는 사람에게 고산까지의 거리가 몇 리쯤이냐고 물었다.
효중이 말하기를,
“근처에 있는 단사협을 버리고 멀리 있는 고산을 취하여 살았으니, 옛사람의 의도를 모르겠네.
고산이 비록 좋으나 어찌 단사협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 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퇴계 선생의 품평을 들은 적이 있는데 또한 고산이 뛰어나다고 하였네. 아직 보지 않은 것이 이미 본 것만 못하리라
어찌 장담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얼마 후에 고개를 넘어 북쪽으로 고산에 이르렀다. 날아갈 듯한 작은 정자가 물가에 임하고 있었는데,
아마도 새로 지은 것 같았다. 효중이 말을 내달려 먼저 오르고 나는 뒤이어 올라갔다.
고산의 마루 오른쪽으로 푸른 물이 휘감아 돌고 왼쪽으로는 긴 강을 임하고 있었다. 흰 비단을 펼쳐 붉은 절벽을 대하고
있었는데, 마치 그림 병풍을 높게 펼쳐 놓은 것 같아 수려하고 아름다워 단사협에 비해 또한 기이하고 기이하였다.
주인 이사안(李士安)이 의복을 갖추고 나왔고 이어서 어린 계집종이 산포도 한 접시를 올려 씹어 보니 목으로 넘어갈 때에
마음과 몸 속이 모두 시원하였다. 금난수 공의 정사는 물가에 있었으나 배가 없어 건너가지 못했다.
다만 물 건너편을 바라보니 또한 그윽하고 깊어 좋아할만 하였다. 다만 한스러운 것은 석벽을 마주대하지 못한 것이었다.
귀한 호백구(狐白裘)를 뒤집어 입은 격으로 직접 가보지 못하고 밖에서만 보았으니 너무 미련하지 않은가?
고산을 경유하여 북쪽으로 몇 리를 가고 또 꺾어 동쪽으로 가니 신석리(申石里)가 나왔다. 그곳은 수석의 경치가 비록
단사협이나 고산보다는 못했지만 또한 즐길 만하였다.
다시 앞으로 수십 보를 가니 곧 청량산 입구였다. 위로 뭇 봉우리들을 쳐다보니 우뚝하고 가파라서 마치 충신(忠臣)과
의사(義士)가 난세를 만났으나 우뚝하게 서서 지조를 바꾸지 않는 것 같았다.
그래서 퇴계 선생께서 청량산을 백이(伯夷)와 비슷하다고 한 구절을 세 번이나 외고는 찬탄해 마지 않았다.
미진(迷津)을 건너고자 하여 건장한 종을 시켜 먼저 상류에서 얕은 개울을 찾게 하고는 신발을 벗고 말에 올라 입구를
건너니 옛 성터의 주춧돌이 어지러이 종횡으로 널려 있었으나 그 연대는 분갈할 수 없었다. 2리쯤 가니 산길이 험하고
가파라서 말에서 내려 걸어갔다. 이미 어둠이 내려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다.
한참 후에야 비로소 연대사(蓮臺寺)에 도착했다. 달은 경일봉(擎日峯) 위에서 솟아올라 맑은 달빛이 방안에 가득하고
신령스런 소리가 골짜기에서 생겨나니 신선들이 산다는 광한궁(廣寒宮)에 들어온 것 같았다.
동쪽 상실(上室)에서 묵었는데, 승려 일훈(一勳)이 자못 상세하게 산길의 곡절(曲折)에 대해 말하였다.
14일(계해). 다시 편지로 자준을 불러 절 뒤의 석대(石臺)에 올랐는데, 동서쪽으로 길고 남북쪽으로 좁아 줄지어
앉을 수는 있었으나 마주 볼 수는 없었다. 아래로 까마득한 계곡을 굽어보니 몇 천 길〔丈〕이나 되는지 알 수 없었고
뭇 봉우리들을 쳐다보니 또한 몇 천 길이나 되는지 알 수 없었다.
음산한 바람이 갑자기 불어와 온갖 구멍이 일제히 웅웅거렸다. 이 때 낙엽들이 어지러이 아래로 떨어져 내려 마치
뭇 새들이 숲으로 들어가는 것 같았다. 사방을 둘러보고는 다시 절에 가니 승려들이 나를 이끌고 선당(禪堂) 바깥
남쪽 벽에 있는 뿔이 세 개 달린 소 그림을 보여주었다. 내가 어떤 소냐고 물었더니, 승려가 그 이유에 대해 말하는 것이
매우 황당하여 믿을 수 없었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또한 요망한 동물이니 어찌 이것을 가지고 뒷사람들을 속일 수
있단 말인가? 뒷날 들으니 절 아래에 이른바 삼각묘(三角墓), 즉 뿔 셋 달린 소의 무덤이 있다고 하는데 가서 보지는 못했다.
절의 승려가 우리들이 믿지 않을까봐 알려 주지 않은가 보다. 가소롭다.
신발을 갈아 신고 절을 나섰다. 일훈이 앞장을 섰다. 세 마리 다람쥐가 나무 끝을 따라 달리기도 하고 엎드리기도 하며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원지가 돌을 집어 던지니 깜짝 놀라 계곡으로 날아갔는데, 박쥐같았다. 승려가 말하기를,
“이것은 날다람쥐입니다. 날개가 앞다리에 있는데 말면 걸어 다닐 수 있고, 펼치면 날아갈 수 있습니다.”
라고 하였다. 동쪽으로 몇 리쯤 가다가 지장전(地藏殿)에 들렀는데 지키던 승려가 산에 나가 아직 돌아오지 않아서
문이 닫혀 들어갈 수 없었다. 또 백 보쯤 가다가 고도암(古道庵)에 이르렀는데 황폐하여 인적이 없었다.
승려가 육행장로(六行長老)가 일찍이 이곳에 살면서 견성했다고 하였다.
보문암(普門庵)을 지나 동쪽을 오르다가 또 돌아 남쪽으로 나무를 잡고 올라갔는데 열 걸음을 올라가면서 아홉 번을 쉬었다.
반야대(般若臺)에 올랐는데, 반야대는 금탑봉(金塔峯)의 허리쯤에 위치하고 있었고 탁 트이고 상쾌하여 이 산의 빼어난
경치였다. 남쪽을 바라보니 축융봉(祝融峯)이 둥글면서도 뾰족하며 높고 험준하여 여러 봉우리 위에 우뚝 솟아 있었다.
위에는 옛 궁궐터와 해자(垓字)가 아직도 있다고 하였다.
서쪽에 있는 것이 향로봉(香爐峯)과 연화봉(蓮花峯)인데 높이는 백여 길이고 우뚝 솟아 있는 버팀기둥〔撐柱〕같은데
그 색이 푸르기도 하고 희기도 하였다. 푸른 등나무와 고목이 이내에 가려 있어 쳐다보기만 할 뿐 올라갈 수는 없었다.
임진 왜란 때 절의 승려들이 그 위로 왜병들을 피하려고 나무를 베어 사다리를 만들어 중간쯤까지는 올라갔으나
끝내 정상까지는 올라가지 못했다고 한다.
연화봉과 향로봉 사이에 또 돌 봉우리가 삐쭉하게 솟아 아름다웠는데 명칭이 없었다. 서쪽에서 북으로 벌여 있는 것이
연적봉(硯滴峯), 탁필봉(卓筆峯), 자소봉(紫霄峯), 자란봉(紫鸞峯)이다. 자란봉의 아래에 있는 것이 선학봉(仙鶴峯)인데
곧 연대사의 뒷 언덕이다. 선학봉 동쪽에 있는 것은 경일봉으로 금탑봉과 연결되어 있으면서 모두 기이하고 높이 솟아 있어
옥순(玉筍)이 어지러이 삐쭉 나와 그 당당한 자태를 공경할 만하였다.
내외(內外)의 장인봉(丈人峯)을 합쳐 모두 12봉우리인데 두 장인봉은 연화봉에 가려서 볼 수가 없었다.
[살펴보건대, 이 봉우리들의 명칭은 절의 승려들에게 들은 것이 이와 같다.
나중에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의 유산록을 보니 이것과 같지 않으므로 다시 살펴봐야 한다.]
또 십 보 쯤 가니 총명수(聰明水)가 있어 몇 잔 마셨다. 물은 암석 사이에 있었는데 깊이가 몇 자 되고 너비도 이와 같았는데,
맑고 찬 것이 좋았다. 세상에서는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이 이 물을 마시고 총명함을 길렀다고 하여 총명수란 이름이
여기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최 고운이 훌륭한 재주를 지니고 난세를 만나 중국에서 대우 받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우리 나라에서 용납되지 못해
물외(物外)에 은둔하는 것이 좋다고 여겨 몸을 숨기고 세상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를 봉황이나 지초(芝草)처럼 여겨 최치원이 노닌 곳은 비록 물 하나 돌 하나처럼
미미한 것들도 모두 보배로 여겨 이와 같이 끼워 맞추는 것이 지금까지도 쇠하지 않았으니, 위대하고 호걸스런 선비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들어갈 때는 털끝 하나 차이지만 그 어그러짐은 천리나 되는 법이니 이름은
유가(儒家)였지만 행동은 묵가(墨家)여서 부처에게 아부하는 부류를 면치 못했으니 한탄스럽구나.
치원암에 들어가 보니 암자의 서쪽 벽에 퇴계 선생이 갑자년(1564년, 명종 19년) 여름에 이름을 적어 놓은 것이 있었는데
선생께서 몸소 쓰신 것이다. 암자가 텅 빈 것이 이미 오래되었고 거의 다 무너졌으나 귀신이 보호하였는지 오직 이 벽만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한강(寒岡) 정구(鄭逑) 선생이 우리 부(府)를 다스릴 때 우연히 와서 이것을 보고는 승려들을 모아
다시 보수하고 단청을 칠하고 또 그 글씨를 널판지에 새겨 사람들이 훼손하지 못하게 하셨다.
정구 선생이 어진 이를 높이고 덕을 숭상하는 뜻을 매우 존경할 만하다.
동쪽에서 북쪽으로 가서 돌사다리를 올라 극일암(克一庵)에 들어갔다. 극일암 뒤에는 풍혈(風穴)이 있는데 매우 험하고
가파랐다. 동굴 입구에 두 개의 널빤지가 있었는데 최 고운이 앉았던 판자가 동굴 입구에 있으면서 비를 피할 수 있었기
때문에 천 년 동안 썩지 않았다고 한다. 나와 효중이 판자에 앉아 살펴보니 나뭇결은 이미 이지러졌고 좀이 먹은 것도
이미 반이 넘었다. 일훈에게,“정말 이러한 일이 있었는가?”라고 하니, 일훈이,
“제가 어릴 때 와서 보았을 때는 판자가 새 것이었는데 육십 년 만에 이렇게 썩었으니 이 이치를 참으로 알 수 없군요.”
하고 답하였다. 내가,“네 전생 천 년 동안 썩지 않았던 물건이 어찌하여 네 후생 육십 년 만에 썩는단 말이냐?
내 생각에는 옛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썩으면 곧 교체하였을 것이다.
보는 사람이 살피지 않고 최치원 당시의 물건이라 여기니 이는 잘못이다.”라고 하였다.
내려오다가 안중사(安中寺)에 들렀다. 안중사 동쪽 작은 집에 노파 모양의 흙 인형이 있었다. 일훈이 말하기를,
“안중이라는 노파는 최치원을 따라 이 산에 살면서 밥 하고 불 때는 수고가 매우 많아 뒷날 사람들이 최치원의 일과 함께
상(像)을 만들었습니다. ‘그 사람을 좋아하면 그 집 지붕의 까마귀도 사랑한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라고 하였다.
나한당(羅漢堂)을 지나 벽 위에 이름을 썼는데, 원지가 먹을 갈고 효중이 붓을 잡았다.
나는 피곤하여 기둥 앞에 누워 위로 쳐다보면서 감탄하며 말하기를,
“이 벽의 단청이 매우 선명하여 백 년 전의 것도 쉽게 흐릿하게 되지 않구나. 모르겠도다, 뒷사람들 중에 와서 보는 자들이
간혹 글씨를 가리키며 칭찬할 것인가? 아니면 글씨가 조악하다고 비난할 것인가? 그렇지 않다면 글씨가 흐릿해져 없어져서
누구의 글씨인 줄을 모르게 될 것인가? 알 수 없도다. 어찌 힘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상청량(上淸凉寺)와 하청량사(下淸凉寺)에 이르니 길옆 단풍 숲의 수많은 붉은 잎들이 사람을 비추어 비단 가리개〔錦障〕
속을 지나가는 것 같아 매우 즐거웠다. 종 원생(元生)이 절벽의 바위틈에 몸을 숨기고서 풀피리를 불었는데 그 소리가
새들이 휘리릭 우는 것 같았으니 다른 때에는 들을 수 없는 것이었다. 이날은 맑고 깨끗하여 풀과 나무들이 살랑이는 것
또한 바위와 계곡의 운치를 더해 주었다.
지나온 절들은 모두 황폐하여 쉴 수가 없었고 날도 저물어 다시 반야대에 이르러 잠시 앉아 있었는데, 신재가 유람할 때
여러 봉우리들이 모두 불경(佛經)의 황당한 말들로 이름 지어진 것을 통렬하게 끊어서 바꾸었는데 유독 이 대의 이름만은
옛날의 비루한 이름을 고치지 않았으니 어떤 이유일까? 그 후에 참봉 임흘(任屹)이 ‘어풍(御風)’이라고 고치고는 대 앞에
있는 노송을 베어 판각하였다. 그러나 수십 년이 채 안되었건만 그 흔적을 찾을 수 없게 되었으니 이름이 사람을 기다려서
전해지는 것이 이와 같다. 치
원암 앞에 있는 요초대(瑤草臺)와 나한당 앞에 있는 ○○臺 또한 모두 임흘 공이 이름을 붙인 것이다.
내려와 연대사 동쪽 상실(上室)에서 묵었다. 일훈, 계동(戒幢), 조일(祖一)이 각각 갈무리해 두었던 시를 꺼냈다.
퇴계 선생이 쓴 것이 둘, 정승 홍연(洪淵)이 쓴 것이 하나이고, 이어가며 화답한 것도 있었다.
신재 주세붕, 지산(芝山) 김팔월(金八遠), 백담(栢潭) 구봉령(具鳳齡),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여러 선생은
모두 명현(名賢)인데, 보배로운 말씀의 남은 향기가 사람이 마음을 감동시켰다. 조일이 가지고 있던 축(軸) 중에
아버님께서 신미년(1571년, 선조 4년)에 지으신 시가 있었는데, 생각하니 슬퍼서 눈물이 났다.
15일(갑자). 빨리 밥을 먹고 연적봉(硯滴峯)에 오르려 하였으나 일훈이 아파서 인행(印行)으로 하여금 대신하게 하였다.
진불암(眞佛庵)에 올라 하대승암(下大乘庵)과 상대승암(上大乘庵)을 지나 문수암(文殊庵)과 보현암(普賢庵)에 이르렀다.
모두 승려가 살지 않았다. 앞뒤에 지나 온 절들이 모두 10여 곳인데 승려가 살고 있는 절은 한 곳도 없었다.
다만 연대사에만 3, 4명, 지장전에 1명이 살고 있을 뿐이었다. 겹겹의 봉우리와 산이라 사람이 살지 않는데도 국가의 부역을
면하지 못해 절을 버리고 멀리 도망 가버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승려들도 이와 같은데 일반 백성들이야 오죽하겠는가?
아! 대승암에 있는 청풍대(淸風臺)를 임흘(任屹) 공이 ‘참란(驂鸞)’이라 바꾸어 불렀고 보현암에 있는 중대(中臺)를
‘환선대(喚仙臺)’라 바꾸어 불렀다. 모두 흰 소나무에 써 놓았으나 세월이 오래되어 지워지고 겨우 도끼로 찍은 흔적만
있을 뿐이었다. 보현암 서쪽 벽에 또 퇴계 선생이 이름을 적어 놓은 것이 있었으나 불행하게도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보수(補修)를 입지 못해 바람에 마모되고 햇빛에 그을려 마침내 민멸되어 찾을 수가 없으니, 애석하도다!
보현암에서 절벽을 돌아 몽상암(夢想庵)에 도착하였다. 절벽에 나 있는 길이 험하고 좁아서 아래를 보니 까마득했다.
무릎으로 기면서 위로 올라가노라니 모골이 송연하였다. 김효중이 나에게 말하기를,
“내 장차 이것을 기록하여 자손들에게 남겨 뒷날 자손들 중 이곳에 오는 자에게 절대로 몽상암을 보러 가거나
들어가지 말라고 하겠소.”라고 하였다. 또한 승려를 탓하면서 말하기를,
“절벽의 길이 매우 위험하여 명(命)을 아는 자가 이를 만한 곳이 아니다. 어찌 하여 일찍 나에게 알려 주지 않아
내가 위험을 무릅쓰고 이곳에 이르도록 하였느냐?”라고 하였다. 박장대소 하였다.
조금 쉬다가 이름을 써 놓고는 신석리로 돌아오는 잔도(棧道)로 원효암(元曉菴)에 오르는데 길은 더욱 험하여 더 이상
올라갈 수 없었다. 또 원효암에서 만월암(滿月菴)에 이르렀고 만월암에서 백운암(白雲菴)에 올랐는데, 수목이 울창하여
하늘이 보이지 않았고 암석들은 그윽하고 기이하였다.
인행을 시켜 물을 구해 오라고 하였으나 구하지 못해 산포도와 오미자를 따서 그것을 섞어서 먹으니 갈증이 해소되었다.
잠시 오르는 동안에도 여러 차례 쉬면서 자소봉 동대(東臺)에 올랐는데, 아래로 절벽이 수천 길이라 아찔하여 범접할 수
없었다. 김효중이 석각(石角)을 부여잡고 먼저 올라갔으나 나는 마음이 동요되어 올라갈 수가 없었다.
인행이 두 손으로 한참이나 나를 부축한 후에야 올라가서 김효중에게 말하기를,
“사람이 악을 행하는 것도 생각해 보면 이와 같습니다. 처음에 대 아래에 이르러서는 아찔하여 올라갈 수
없을 것 같았는데, 한참 동안 연습한 후에야 이곳에 이르렀습니다.”라고 하였다. 김효중이 웃으며 말하기를,
“선을 따르는 것이 산을 오르는 것과 같다는 말은 들어 보았지만, 악을 따르는 것이 산을 오르는 것과 같다는 말은
들어 보지 못했네.”라고 하였다.
이날 산의 이내와 안개가 계곡에 잔뜩 끼어 시야가 수백 리 밖을 넘지 못하였다. 북쪽을 바라보니
문수산, 태백산, 소백산 만이 허공에 떠서 푸르름이 돋보였고 한 방향을 빙 둘러져 있었다.
서남쪽의 여러 산들은 모두 시야 아래에 잠겨 있었는데, 그 중에 봉우리가 빼어나 산의 면목을 방불케 하는 것은
천등산(天燈山), 학가산(鶴駕山)과 예천(醴泉)의 산성산(山城山), 상주(尙州)의 갑장산(甲長山),
대구(大丘)의 팔공산(八公山)이었다. 그 나머지 비탈지고 가파르며 높고 낮으며 굽은 것은 마치 개미둑 같고
소가 엎드려 있고 말이 가는 것 같고 뱀이 기어가고 호랑이가 웅크리고 있는 것 같았는데, 교묘한 역법(曆法)으로도
그 숫자를 헤아릴 수 없고, 공교한 그림일지라도 그 오묘함을 표현할 수 없었다.
대 위에는 몇 겹의 돌이 쌓여 있었는데 높이 한 길 정도 되었다. 김효중이 신발을 벗고 올라가서 말하기를,
“이 돌 위에 오르니 진짜로 장관일세.”라고 하였다. 인행이 그러지 말라고 만류하며 급히,
“돌이 흔들거립니다. 돌이 흔들거립니다.”라고 외쳤다. 김효중이 황급히 내려와 손으로 흔들어보니 움직이지 않았다.
크게 웃으며,“이 승려가 나를 속였구나.”라고 하였다.
마침내 대를 내려와 서쪽으로 탁필봉을 지나 연적봉에 올랐다. 도착하는 곳이 높을수록 더욱 멀리 볼 수 있었다.
처음에 연대사에서 바라볼 때에는 구름 사이에 있는 선학봉이 까마득하게 보이더니 이 봉우리에 올라 선학봉을 굽어보니
항아리 안에 있는 주먹만한 돌처럼 보였다. 비록 날아가는 새라 할지라도 내 위로 넘어갈 수 없었다.
그런 후에야 처신은 고상해야 하고 보는 것은 원대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맹자께서 말씀 하신 바, ‘바다를 본 자는 웬만한 것을 물로 보지 않는다’는 말을 어찌 믿지 않으리오?
산 위는 기운이 높고 차서 자라는 나무들은 모두 더부룩하고 굽었으며 바람이 없는데도 저절로 절벽과 계곡을
키로 까부는 듯하여 돌아와야만 했다.
백운암에 갔다가 만월암을 따라 내려왔는데 밥을 반 쯤 먹을 만한 시간에 이미 문수암 뒷 언덕에 도착하였다.
올라가기는 저와 같이 어려웠으나 내려오는 것은 이와 같이 쉬우니 어찌 선을 행하기는 어렵고 악을 행하기는 쉽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갈증이 매우 심해 소혜를 시켜 원숭이 복숭아〔猴桃〕를 후려치게 했더니 어지러이 땅에 떨어졌다.
다투어 그것을 집어 씹어보니 그 맛이 꿀처럼 달고 눈처럼 차가워 옥정연(玉井蓮) 고대 전설 중 화산(華山) 정상에 있는
옥정(玉井)에서 자라는 연(蓮) 에 뒤지지 않았다.
두 대승암을 나서 오른쪽 굽어보니 김생(金生窟)이 있었다. 김생굴은 큰 바위 아래에 있었는데, 바위와 절벽이
매우 기이하면서도 가파라서 굴을 보호해 주는 것이 하늘이 만들어 준 것 같았다. 사람들은 김생이 이 굴에 살면서
산봉우리의 삐쭉삐쭉하면서 우뚝 솟아 있는 모양을 보고 서법을 깨달았다고 한다. 지금의 초목과 구름들도 완연히 당시
김생이 운필(運筆)한 형세 같았다.
바위 위에서 폭포가 떨어지고 있어 대낮에도 빗방울이 날렸다. 때는 가을 한창 가물 때이지만 만약 비가 온 뒤 물이
불어날 때의 그 소리의 웅장함을 상상할 수 있었다. 물 옆에는 큰 구유〔槽〕가 두 개 있었는데 각각 십여 섬은
담을 수 있었으나 시퍼렇고 차가운 하늘 같으니 암자가 빈 것이 이미 1년이나 되었다. 창과 빗장은 여전히 남아 있어
청정하고 그윽한 것이 여러 절중에서 으뜸이어서 물 뿌리고 쓸어 내면 쉴 수 있을 듯 하였다. 생각해 보니 산에서는
해가 쉽사리 저물고 암벽의 길은 매우 위험해서 자준이 만약 오더라도 만날 수 없을 것 같아 인행을 시켜
나무를 베어 썩어서 위험한 잔도를 수리하게 하였다. 저녁에 연대사로 내려왔다.
초저녁에 자준이 술을 싣고 와서 서로 기뻐하며 몇 잔을 마시고 동쪽 상실에서 묵었다.
16일(기축). 느즈막히 밥을 먹고 앞에 있는 대로 나가 몽상암을 쳐다보았더니 아스라이 그림과 같았다.
내가 자준에게 몽상암을 본 적이 있냐고 물으니, 자준이 급히,
“몽상암은 깊은 산중에 있고 볼 만한 것이 없기에 가서 보지 못했네.”
라고 대답하길래, 우리 두 사람이,
“몽상암에 가 본 적도 없으면서 어찌 몽상암이 볼 만하지 않다고 하는가? 그대는 허물을 부끄러워하면서도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고 할만하네.”하고 놀렸다. 한바탕 크게 웃었다. 이윽고 자준이 또,
“그대는 자소대에 올라 영지(靈芝)를 보았는가?”하고 물었다. 우리가,“보지 못했네.”
하고 답하자, 자준이,“그대는 영지를 보지 못했으면서도 도리어 나에게 몽상암에 대해 자랑한단 말인가?”
하고 말하였다. 또 크게 웃었다. 이에 이르러 자소대에 세상 사람들이 영지라는 이상한 풀이 있다는 것을 들었으나
승려들이 말해 주지 않아 빠뜨리고 보지 못한 것이 한스러웠다.
오후에 자비암을 돌아보았는데, 암자는 연대사 서남쪽 수백 보 밖 연화봉 아래에 있었다.
황폐하여 볼 만한 것이 없었으나 오직 앞에 있는 대는 조금 널찍하여 앉을 만했다. 저녁에 또 동쪽 상실에서 묵었다.
17일(병인). 승당(僧堂) 동쪽 벽 바깥 모두 여섯 곳에 이름을 적었는데, 김효중이 셋, 자준이 하나, 내가 둘이었다.
말을 타고 산 입구를 나와 큰 내를 건넜다. 이사안(李士安)이 술을 차고 와서 나루터에서 기다리고 있어 몇 잔을 마시고
파했다. 온계동(溫溪洞)에 이르러 김효중은 천성(川城)으로 가고 나와 자준은 오천(烏川)으로 들어가
방잠재사(芳岑齋寺) 묵었다.
대체로 청량산은 천암만학(千巖萬壑)의 빼어난 경치가 있어 실로 맑은 기운이 모여 있고, 진선(眞仙)이 굴에 터잡아
사는 곳이었다. 그러나 무릇 저 산의 빼어남이 이와 같고 또한 영남 가운데 문헌의 고장에 있으면서 이름난 시인과
묵객들이 이곳을 감상한 자를 예로부터 어찌 한정할 수 있으리오마는 문창(文昌) 최치원과 김생 이후로는 모두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것이 괴이하였다. 이름이 있는데도 오히려 소문이 나지 않았으니 하물며 기술한 것이 많다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가정(嘉靖) 연간에 재상 신재(愼齋) 주세붕이 비로소 기성(箕城)에서 와서 이 산을 유람하였는데 그
유산록을 살펴보면 웅혼하고 고상하며, 굳건하고 곡진하며 기묘하니, 진실로 이 산이 지우(知遇)를 입은 것이다.
이른바 ‘인자(仁者)는 산을 좋아하고 지자(智者)는 물을 좋아한다’는 말에 이르러서도 역시 쉽게 말할 수 없는 점이
있는가 보다.
오호라! 산천의 맑고 고운 기운이 천만 년 쌓여 이 땅에서 대유(大儒)를 낳아 도학(道學)을 강론하게 한 나머지
이 산을 유람하고 이 산을 좋아하며 이 곳에서 읊조리게 하고 흘러가는 물을 굽어보고 공자처럼 ‘이와 같구나’ 라는
탄식을 일으키게 하며 정상에 올라 노(魯)나라를 작게 여기는 높은 식견을 추억하게 하였으니 산에 의지하여 더욱
높아지고 물에 의지하여 더욱 맑아졌다.
주자(朱子)의 무이(武夷)와 정이(程頤)의 이천(伊川)이 앞에서 그 아름다움을 독점할 수 없을 정도이니,
그 얼마나 아름다운가? 나는 초파리나 마찬가지여서 항아리 속을 지키며 산 지 30년 만에 다행스럽게도 한두
동지의 도움을 받아 산을 거닐면서 앞 시대 현인들이 밟았던 것을 밟았고 앞 시대 현인들이 보았던 것을 보았으니
평소의 바람이 어찌 이를 넘어서겠는가? 사람이 급히 돌아갈 생각에 얽매여 산에 오르면서도 그 요체를 터득하지 못하고
물을 보면서도 그 근원을 궁구하지 않는다면 한 때의 나무하는 사람의 식견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니, 이것이 부끄러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