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안(扶安)은 전북 남서부에 위치한 고장으로 백제 때에는 개화현(皆火縣)이었다가
통일신라 시대에는 부령현이라 하였으며, 서기 1414년(조선 태종)에 보안과 부령현을 합하여
지금의 부안현(扶安縣)으로 개칭되었다.
부안김씨(扶安金氏)는 신라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의 맏아들 김일(金鎰)을 시조로 하여
고려 시대에서부터 부안에 뿌리를 내렸다.
문헌에 의하면 태자 김 일(金鎰)은 신라의 천년사직이 기울어지자 망국의 한을 간직하고
어머니 죽방왕후와 부인 김씨를 데리고 개골산(금강산의 별칭)으로 들어가 삼베옷을 입고
초근목피로 일생을 마쳐 세상 사람들이 그를 마의태자(麻衣太子)라고 불렀다 한다.
그의 후손 경수(景修)가 고려 때 처음으로 세상에 나와 문과에 급제하고 이부 상서를 지낸 후
부령(부안의 옛지명)에서 정착하고, 그의 아들 춘(春)이 부령부원군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은 경수(景修)를 1세조로 삼고 관향을 부안으로 하게 되었다.
부안김씨를 빛낸 인물로는 1222년(고종) 열두살의 어린나이로 성균관 진사에 오른 구(坵)를
들수 있다. 그는 고종때 문과에 급제하여 정원부사록과 제주판관을 거쳐 원종때
예부시랑으로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원나라에 다녀와 [북정록]을 집필하고 40여년간 벼슬을
역임하며 정치·외교·학문에 훌륭한 업적을 남겼다.
구(坵)의 아들 4형제가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 가문을 빛냈는데,
그중 장남 여우(汝盂)는 충렬왕이 세자 때 원나라에 4년 간 볼모로 가 있을때 이를 호종한
공으로 형부상서에 올랐고, 차남 종우(宗盂)는 수창궁 녹사를 거쳐 전교시 부령을 지냈으며,
셋째 숙우(叔盂)는 서도판관, 막내 승인(承印)은 강릉 존무사와 대사성을 역임하였다.
여우(汝盂)의 두 아들 각(恪)과 식(軾)도 평장사와 이부 상서를 각각 역임하여 명문의 대를
이었으며,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계(棨)가 유명했다. 1552 식년문과에 급제한 그는 선조때
성절사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한어에도 능통했고 뒤에 이조 참판에 이르렀다.
특히 그는 문무를 겸비하여 이황,·김인후,·기대승,·이이 등과 함께 도의(道義)를 강론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부안 김씨(扶安金氏)는 남한에 총 11,263 가구,
47,696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3> 집성촌
전북 부안군 부안읍 모산리
전북 남원군 이백면 강기리
전북 부안군 주산면 돈계리, 소산리
전북 정읍군 소성면 만수리
전북 장수군 산서면 사상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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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안김씨 분포도에 의하면 마의태자 (일溢 )을 시조로 하고 그의 장자 지로 (2세) 지로에장자 희보(3세) 의장자 경수 (4세) 의 장자 춘(5세)
첫댓글 수정 : 마의태자 (일溢 )을 시조로 하고 -> 마의태자 (일鎰 )을 시조로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