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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의 기회비용
손 중 하*
참으로 멀리도 달려왔다. 아직도 갈 길은 먼데 다리도 아프고 눈도 침침하다. 가보고 싶은 그곳이 나를 부르는데 또 다른 멈춤이 나를 유혹한다.
짊을 챙긴다. 처음보다 짊의 양은 늘었지만, 동선의 길이는 자꾸만 짧아진다. 오늘을 준비하기 위하여 어제는 텃밭의 일들은 대충 정리했다. 화요일 강의도 끝냈고 홀가분한 수요일이다. 아내가 묻는다. 오늘은 어디로 떠나느냐고.
그곳이 정해져 있지 않으니 어디라고 말할 수 없어 망설이니 또 묻는다. 놀러 가는 것인가 아니면 쉬러 가는 것이냐고. 하지만 그 역시 대답할 수가 없어 또 망설인다. 왜냐하면, 놀기만 위해서 떠나는 것도 아니고, 쉬기 위해서만 떠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때로는 놀기도 하고 때로는 쉬기도 하는 떠남이기 때문이다. 그냥 도전하고 싶어 떠나는 여행이기에, 일일 수도 있고 쉼일 수도 있고 노는 것일 수도 있으므로 명확한 답을 내놓기가 모호하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삶의 재미를 얻고자 떠나는 것이다. 나이 들어 차 안에서 잠자며 노숙이나 다름없는 여행을 떠나는 것이 못내 걱정스런 아내는 오늘도 밉지 않은 핀잔을 한다. 시골에 살다보니 할 일도 많다. 일은 순위에서 밀려나고 집에서 머무는 시간보다 밖으로 나도는 시간이 더 많으니 핀잔을 한들 할 말이 없다. 돈 벌 나이도 지났고, 설령 돈 버는 일이라 할지라도 여행하는 동안 여행지에서 펼쳐지는 것들이 내게는 더 흥미로운지도 모른다. 순간이지만 길 위에서 길을 묻기도 하고, 교차로에서 잠시 만나는 인연들이 돈보다 소중한 일인지도 모른다. 어떤 때에는 교차로에서 멈춤 신호등으로 인하여 맺은 인연이 몇 년을 지속하기도 한다. 순간에 스쳐 가는 교차로는 사고의 다발 지역이기도 하지만 우리의 삶에 참으로 많은 교훈을 주기도 하는 장소다. 멈춤을 가르치기도 하고, 인내를 가르치기도 하고, 인연을 가르치기도 한다. 성서의 책 한 권이 그곳에 있다. 삶의 철학이 그곳에 있다. 참으로 많은 교훈을 주는 곳이 길이고 교차로이다. 인생에서 전진하는 것만을 갈구할 것이 아니다. 목적지만 바라보고 갈 일이 아니다. 길 위에서 나뭇잎을 보고 활력을 되찾고 들판을 보며 휴식을 취하는 일, 내겐 그것이 여행이다. 그러면서 늙어가는 일이 일상이 되고 그런 길 위에서 만난 인연을 화단에 꽃 가꾸듯 내 마음 한쪽에 심어두면 가끔은 잊을만하면 내게 반가운 손님으로 찾아온다. 그럴 땐 정원에 뿌려두었던 씨앗이 발아되어 꽃 한 송이로 내게 찾아온 느낌이다. 나이에 상관없이 50대와 80대가 때로는 20대와도 같이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 아닐 수 없다. 1분 남짓한 신호등이 있는 교차로에서 만난 인연, 길 위에서 길을 묻다가 맺은 인연들이 내겐 소중한 날실과 씨실이 되어 아름다운 삶의 천을 짜낸다는 것은 내 삶의 여행에서 얻는 보람일 수도 있다.
길 위에서 묻다가 여행의 목적지가 되기도 하고 교차로에서 묻다가 동행자가 되기도 한다.
흰 머리카락이라서 굳이 나이를 묻지 않고 남녀노소 누구나가 경계하지 않고 친구가 되어주는 사람들이 고맙다. 남자도 여자도 아닌 중성쯤에서 살아가는 삶도 그리 싫지는 않다. 어느 편에 서야 할지 어느 줄에 서야 할지 망설이지 않고, 어느 줄이든 마음 내키는 대로 서도 눈치 보이지 않는 삶이라서 좋다. 눈치 대신 품어주는 주변 사람들이 고맙고, 감사하다. 내가 좀 실수하더라도 실수로 보지 않고 애교로 봐주는 사람들, 그들이 있기에 내 삶은 기회비용 따위는 마음에 두지 않는다. 어느 삶을 선택하여 살든 그곳에 사랑이 깃들어 있으니 경제학으로 재단되지 않는 삶, 그 삶이 여유로움을 주어서 좋다. 10을 차지하고 100을 놓쳐도 미소를 지을 수 있는 삶이라서 좋다. 굳이 목표지점의 100을 놓쳐도 현재 있는 위치에서 10을 줍는 여유로움이 나를 지탱해주는 원천이다. 살다 보면 가끔은 선택의 갈림길에 서게 된다. 젊어서는 순간의 선택이 바로 삶의 질을 결정하기에 약속을 깨기도 하고 포기하게도 만들었다. 하지만 산수(傘壽)의 나이가 되고 보니 그 어떤 선택을 하든 기회비용에 신경 쓰지 않아서 좋다.
오늘도 그곳으로 간다. 목적지가 없는 그곳이다. 산사가 될지 삶의 고뇌가 배어 있는 뱃고동이, 또는 낭만의 뱃고동이 있는 포구가 될지, 아니면 섬이 될지, 그것도 아니면 들꽃이 만발한 어느 길가가 될지는 나도 모른다. 쉬었다 갈만한 곳이면, 도전해볼 만한 일이 있는 곳이면, 이야깃거리가 있는 곳이면 그저 그곳이 내가 찾는 곳이 되고 만다. 몇 시간 만에 떠나면 조금 재미있는 곳이고, 하룻밤 묶고 떠나면 조금 재미있는 곳이고, 며칠 묶게 되면 더 재미있는 곳이기에 가능하면 더 재미있는 곳을 찾게 된다.
여행은 내가 출발해서 출발했던 곳으로 되돌아오는 것이 여행이다. 무엇을 버리고 오는 것도 아니고 무엇을 가지고 오는 것도 아니다. 그저 잘 놀다 오든 잘 쉬었다 오든 잘 돌아오는 것 그것이 내 삶의 여행이다. 일찍 서둘러 돌아올 필요도 없고 굳이 있고 싶지 않은 곳에 오래 머물 필요도 없는 그곳으로의 여행, 오늘의 목적지도 좀 오래 머물다 올 수 있는 곳이었으면 좋겠다. 쉴 수 있는 곳보다 놀 수 있는 곳이면 더욱 좋겠고 어울릴 수 있는 사람들이 있었으면 좋겠다. 노점상이라도 좋고 들판에서 일하는 농부라도 좋다. 정장 차림의 예의 갖추려 애쓰는 사람보다 좀 털털하더라도 유머가 있으며 내가 목말라 보이면 반쯤 남은 먹다 말던 막걸릿잔 내밀어 주는 그런 사람을 만나면 더욱 좋겠다.
잘 있겠지? 그 사람.
어느 포구에서 내 서툰 낚시에 말없이 낚싯바늘에 미끼를 끼워주든 사람, 찌를 맞추어주고 잡은 고기를 손질하여 내게 건네주던 사람, 어느 곳에 가면 인심 좋은 사람들과 자기만이 알고 있는 낚시터를 캠핑카에 걸어 놓은 아직 며칠 더 남은 지나지 않은 달력 한 장을 찢어 내게 상세히 설명하며 그 장소를 그려주던 사람, 오늘은 그 사람도 만나고 싶은데 메모해둔 전화번호가 없다.
세계 최대의 거부인 빌 게이츠가 길을 가다 10만 원이 떨어져 있는 것을 보고 그냥 지나쳤다고 한다. 1초에 14만 원을 버는 그는 허리를 굽혀 10만 원을 줍는 시간의 기회비용이 줍는 돈보다 많기 때문이란다. 나는 오늘도 집에서 노동하여 1초에 15만 원을 번다해도, 오늘 떠나는 여행의 기회비용이 많이 든다 해도, 후회 없이 그곳에서 놀다가 오려 한다.
내 영혼이 춤추는 삶을 위하여……
※ 충남 금산 출생, 전)대문초등학교 교장, 월간 ≪한울문학≫(2005) 등단, ‘한국농촌문학상’(2006) 수상, jhson1971@hanmail.net
결혼하는 손녀 부부에게
김 순 길*
한 주간의 분주한 생활 끝에 모처럼 맞이한 휴일임에도 손녀사위 김용준 군과 손녀 김민지 양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하여 이렇게 참석해 주신 모든 분께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첫걸음을 내딛는 이들에게 몇 마디 권면의 말을 전하고자 합니다.
첫째, “love is more blessed to give than to receive”. 사랑은 받는 자 보다 주는 자가 더 많은 축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오래 참고 나를 희생하고 사랑을 베품으로 더 많은 축복을 받게 됩니다. 부부간에 더 많은 사랑을 주려고 노력합시다.
둘째, 일이 잘못되면 상대를 원망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돌아보고 자신에게 원인을 찾읍시다. 우리가 살다 보면 항상 좋은 일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꽃길을 걷는가 하면 가시밭길도 있고, 화창한 봄날이 있는가 하면 비 오고 먹구름 끼는 어두운 날도 있습니다. 잘못된 일에 먼저 자신을 돌아보고 자신에게서 원인을 찾아봅시다.
셋째, 작은 일에 감사합시다. 우리는 행복을 추구하고, 많은 사람이 행복하기 위하여 동분서주합니다. 그러나 행복은 먼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 내 마음속에 있습니다. 결과를 따지지 말고 현재 inspite of, 어떤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집시다. 작은 것에 감사하는 마음에서 행복을 누리고 살길 바랍니다.
넷째, 부모님께 효도하고 공경합시다. 오늘이 있기까지 나를 낳아 주시고, 길러주시고, 뒷바라지해 주신 부모님의 은혜를 잊지 맙시다. 부모님의 입장에서는 인연을 맺은 자녀가 끝까지 아무 탈 없이, 건강하게 잘 살면 가장 큰 효도라고 생각합니다. 부디 나중에 안 계실 때 후회하지 말고 최선을 다하여 효도하고 부모님을 공경합시다.
이것으로 권면의 말을 가름합니다.
※ 대전여고 졸업, 수도여자사범대학 영문과 수료, 전)중등학교 교장, ≪상상의 힘≫ 수필부문 신인상(2012),
수필집 향원의 열매, kimsk3527@hanmail.net
찌고이네르 바이젠
김 기 태*
스페인의 음악가 '사라사테'가 작곡한 <찌고이네르 바이젠>이라는 바이올린곡을 아시나요.
'찌고이 바이젠'이라는 제목을 우리말로 번역하면 <집시의 노래>입니다.
이는 <치고이너>는 '집시'이고 <바이젠>은 '선율'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찌고이네르 바이젠은 집도 나라도 없이 떠돌아다니는 집시의 애환을 표현한 제목의 의미처럼 슬프고 애잔한 곡입니다.
그런데 '폴 모리아((Paul Mauriat) 악단'이 연주한 '찌고이네르 바이젠'은 밝고 경쾌합니다.
'폴 모리아'의 편곡이 곡의 분위기를 정반대로 바꿔 놓은 것입니다.
폴모리아 악단은 프랑스의 작곡가 편곡자 지휘자 피아니스트 등으로 구성되어 이지 리스닝(Easy Listening)계 즉, 대중음악의 1 인자로 활동하였으며 주로 가요와 민요 등을 편곡하여 오케스트라악단과 함께 공연해 대중으로부터 많은 갈채를 받았습니다. 특징은 섬세하고 서정적인 음악으로 표현하여 연주한 악단이었습니다.
우리나라 가요 중에도 폴모리아 악단에서 연주한 곡은 ‘아리랑’과 ‘돌아와요 부산항’ 두 곡을 그들이 편곡하여 세상이 알려졌지요.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현재 삶이 힘이 드십니까?
연습하다 지쳤습니까?
그렇다면 낙심하지 마시고 다른 방법을 찾아봅시다.
생각하기에 따라 밝고 경쾌한, 그리고 희망적인 삶으로 바뀔 것입니다.
우리가 연주하는 곡들이 폴 모리아 악단과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기계음을 사용하지 않고 생음악으로 차별화하여 지휘자의 연주로 연주하자는 처음 만났을 때 그 의지로 여기까지 오지 않았습니까?
힘이 들 때 폴 모리아 악단이 연주하는 밝고 경쾌한 '찌고이네르 바이젠'을 함께 들어 봐요.
힘이 날 것입니다
‘모정’
‘베사메무초’
‘아름다운 강산’이 어렵습니까?
시간이 부족합니까?
세상에 해서 안 되는 일은 없습니다.
문제가 있으면 그 문제를 개선하면 되는 일입니다.
그리고 노력이 필요하겠지요.
지금까지 삶의 현장에서 우린 그리 살아왔잖아요?
파트 별로 모여 연습을 해봅시다.
한 곡 전체를 반복해서 연습하지 말고, 틀리는 부분을 집중적으로 연습을 해봐요.
합주는 내 소리만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남의 소리가 들려야 해요. 그리고 양보하는 것입니다. 연주를 잘한다는 것은 악상을 살려 작은 것까지 섬세하게 표현하는 일입니다.
화음 부분에서는 소리를 작게 내고, 멜로디를 부를 때는 크게 불러도 돼요. 모정에서 여섯 마디를 격정적으로 표현할 때 무호흡으로 불어야 할 곳도 있지만 긴 숨을 미리 들이마시고 들어가면 가능한 일입니다. 연습하면 제주도 해녀처럼 무호흡으로 불 수 있어요.
이제 2주 남았습니다.
서울의 잠실 학생체육관에서 1,000명의 관중을 모시고 연주해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우리 비록 음악을 전공하지 않고, 퇴직 후 취미로 시작한 색소폰 연주지만 여기까지 오리라고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처음 시작할 때는 노래 두 곡만 부르게 해 달라고 애원했는데 한 곡을 부르고 나서 앵콜이 들어오면 한 곡을 더 불러야 될 것 같아서 그리했는데, 지금은 연주복을 입고 지휘자 지휘봉을 바라보며 연주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일이지요. 또 트럼펫과 트롬본. 베이스 기타도 함께해서 빅밴드가 될 것 같습니다.
그 꿈이 다가옵니다.
7월 1일 서울 잠실에서 연주하고 나면 올가을에는 세계 청소년 장애인태권도 올림피아드대회에서 행사에 필요한 음악을 우리가 연주하게 됩니다.
한 단계 성숙하는 기회에 마음 단단히 먹고 어려움을 극복했으면 좋겠습니다.
힘을 내요. 보보스 회원 여러분!
지당에 비 뿌리고
지당에 비 뿌리고
양류에 내 끼인 제
사공은 어디 가고
빈 배만 매였는고
석양에 무심한 갈매기는
어라가락 하더라
중봉 조헌은 김포에서 태어나 옥천에서 10년을 살았는데, 이지당과 후율당에서 후학을 가르치고 문인들과 교류를 하였으며,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휘하에 문인들로 구성된 의병을 지휘하여 왜군과 맞섰다.
청주성에서 대승하여 수복하고, 금산전투에서 700여 명의 의병들과 함께 싸우다 모두 전사하였다.
중봉도 금산전투를 치르면서 마상에서 전사했는데, 말 스스로 중봉을 마상에 태우고 금산에서 옥천까지 와 죽어 중봉 무덤이 있는 맞은편 산 등에 안장하였다고 한다.
중봉 조헌은 당 초 문관으로 등용되어 혁혁한 문장력을 과시했는데, 그 실력을 인정받아 문묘에 종사 된 해동 18현 중 한 사람으로 시문학에 능했으며 이곳 이지당에서 많은 후학을 양성했는데 서당으로 사용한 이지당(二止堂)의 건축 양식도 독특한 면이 있어 건축학적 의미도 우리에게 보여준다,
서당 양쪽에 누각이 있고, 내실이 있는 건축 양식이 다른 곳에서는 볼 수가 없는 모습이다. 정면에는 송시열 선생 쓴 글씨 이지당(二止堂) 현판이 걸려 있고, 측면에는 각신리에 있다 해서 각신서당(覺新書堂)이 중 선생의 글로 써 현판을 걸었는데, 두 분의 우의가 돈독했음을 알 수가 있다.
위 시도 물이 흐르는 이 개울가 이지당에서 지은 시가 아닐까 생각을 해 본다.
임진왜란 때 의병을 모아 금산에서 일본군과 싸우다 700명 전원이 전사한 의병장 중봉 조헌 장군의 발자취를 보려 옥천 나들이를 나섰다. 중봉 선생의 장손이며 종중 회장직을 맡고 있는 예비역 육군 대령이시고 대전수필예술에서 함께 문학 활동을 하고 있는 조 종영 씨의 안내로 시작된 봄나들이다.
이지당, 후율정사, 표충사로 이어진 탐방 길에 옥천의 맛집에서 점심 식사까지 대접받으며 즐긴 하루였다.
중봉 선생은 명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을 시작했으나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격에 과격한 상소문으로 유명한데. 상소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직접 상소문을 들고 왕 앞에 나가 상소를 했는데 받아들이지 않으면 도끼로 참하여 달리는 요구에 임금도 힘들어했던 개혁파 실학자였다.
이율이 스승이었고 제자로는 토정 이지암이 있으며 후학 양성에도 열중했던 문인이었지만 일본과 친교를 반대하고 군대를 양성하여 침략을 대비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분이다.
송시열 선생이 존경했던 분으로 이지암에서 그의 필적도 만나 보게 된다.
마지막 보은에서 관직에 있다가 옥천에 10여 년을 살게 되었는데 전란을 만나 이때 의병의 모아 일본군과 싸우게 되었고 금산에서 세계 전쟁사에 유일한 전원 전사한 기록을 남겨 후일에 박정희 대통령에 의해 이순신 장군이 잠든 현충사와 같은 수준의 칠백의총을 만들어 그 넋을 기리고 있다. 그만큼 중봉의 생각과 행동에 동조하여 1,600명의 의병이 결집 되고 금산전투에 참가한 700명이 나라 위해 전원이 전사하게끔 이끈 중봉 조헌 의병장의 리더십에 경의를 표하고 싶었다.
후율당은 이율곡 선생의 제자여서 ‘서당 이름에 율(栗)자가 들어간 것이 아닌가’ 생각도 들지만, 시골이고 산골이어서 당시에도 인구가 많지 않았을 텐데 서당을 운영하면서, 훈장과 문인들의 인맥이 아무리 돈독하더라도 1,600명의 의병이 중봉 선생의 뜻에 동조하여 모였다는 것에 존경심을 표한다.
예나 지금이나 ‘문인’ 하면 신체적으로 약골이고 병기도 왜군과 상대가 되지 않았을 텐데, 무슨 용기로 눈에 힘을 두고 목숨도 아까워하지 않고 왜군과 맞섰는지 그 애국심에 고개를 숙이게 된다. 멀지 않은 곳에 표충사가 있다. 지방문화재로 등록되어 옥천군에서 관리하고 있는데 조금은 소홀히 관리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중봉이 사망 후에 영의정에 추대되어 묘소는 격에 맞게 자리하고 있었다. 아래에는 표충사가 있는데 그곳에는 김기창 화백이 그린 영정이 자리하고, 좌측에는 금산전투에서 참혹하게 살해 된 막내아들 영정도 함께 모시고 있었다. 묘역에 올라가서 살펴보면 명당의 조건을 고루 갖춘 곳이었다.
조선 시대까지 묘는 능선을 타고 내려오다 멈춘 곳. 이런 곳이 명당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
가야 고분에서도 그렇고, 청주 공군사관학교 인근에 모신 청주한씨 시조 대머리 할아버지 묘소와도 너무 닮은 모습이었다.
예전에는 표충사에서 백일장도 열어 중봉의 사상과 이념 등 애국정신을 그리며 후손들이 뜻깊게 보냈는데, 지금은 지자체 예산이 군민이 먹고 노는 데 사용하고 있어 나라의 스승을 홀대하는 아쉬움이 남는 부분이었다.
젊은 나이에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것이 얼마나 숭고한 일이지 느껴보는 탐방 길이었다.
요즘 정치인들이 이곳 표충사에서 합숙 훈련을 하며 국정을 논해 본다면 어떨까 생각을 해봤다.
※ 충남 서천 출생, 글지이. 부름새, 서각인, 밥로스. 초상화, 생활공예, 수필가, 전)계룡건설 토목 본부장, 현)온동마을 촌장,
저서『삶의 시방서』,『소똥 위에 홍시』, 『살아보니 어뗘』,『그려』,『하고집이』등
배부른산
배 수 자*
아침 일찍 수원을 떠나 원주시 봉화산 들머리인 원주시의회 주차장에 자동차를 주차하였다. 배부른산(419m), 이름이 너무나 재미있어서 등산하고 싶은 호기심이 생기기도 했다. 주차장에는 일렬로 세워진 자동차들이 6월의 작열하는 더위 속에서 열기를 견디고 있었다.
등산 안내판을 보았다. 원주 굽이길(1코스, 봉화산∼배부른산)을 선택했다. 두 개의 봉우리가 있는데 먼저 봉화산 둘레길을 반쯤 걷다가 배부른산으로 넘어가는 것이다.
배부른산을 가기 위해 거쳐 가는 봉화산 등산 초입에 들어섰다. 초록의 우거진 숲길을 걸을 때는 시원한 느낌을 받으며 들숨과 날숨을 여유롭게 반복하였다. 그러나 둘레길 사이로 군데군데 햇볕이 나올 때면 얼른 모자를 쓰고 더위를 피하고자 숲속을 향했다.
봉화산은 호저면 만종리에 있다. 봉화산 둘레길을 걷는데 눈에 띄는 자작나무가 보였다. 자작나무는 새하얀 껍질 하나로 사계절을 버틴다. 나무가 굵지는 않지만, 종이처럼 얇은 껍질이 겹겹이 쌓여 하얀 가루를 뿌리며 등산객들을 향하여 어서 오라는 듯한 손짓을 하고 있었다.
봉화산 둘레길을 반쯤 지나니 배부른산으로 가는 오솔길이 나왔다. 크고 작은 나무들이 원주시민의 소박한 체취가 묻어난 아름다운 길이었다. 자연의 푸른 숲과 인간과의 조화로 오솔길을 잘 다듬어 주고 있었다. 봉화산은 마을 동산처럼 친근하면서도 순한 사람 같았다.
코스 안내 표지판이 보였다. 여기서 가마바우로 가는 길은 0.9km이고 배부른산까지는 1.9km였다. 먼저 가마바우를 지나 배부른산으로 가기로 했다. 오래된 철탑을 지나면 가마바우인 감바우가 나왔다. 바우 모양이 가마처럼 생겼다고 해서 또는 예전에는 거북바위라고 불렸다고 한다. 가마, 감 등은 ‘크다’는 뜻을 가진 것으로 가마바우가 있어 산 이름이 감박산이 되었다고 한다. 감박산(312.7m)은 봉화산과 배부른산의 중간에 있는 산이다. 가마바우를 자세히 보니 정말 큰 가마솥 같기도 하였다. 나는 두 팔을 벌려 가마솥을 안으며 추억을 남겼다. 특이한 것은 가마바우에 우뚝 솟은 소나무 한 그루였다. 자연적으로 분재(盆栽)가 된 것이었다. 자연이 주는 목숨을 추운 겨울과 한여름의 더위를 이겨내는 생명력을 본받을 만하였다. 가마바우와 그 옆의 돌탑이 어우러져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군데군데 돌탑이 보였다. 등산객들이 지나가면서 한 가지 소원을 빌기 위해 돌을 쌓은 것 같았다. 돌탑을 지나면서 나도 모르게 마음이 정결해지더니 돌을 주어서 돌탑에 올리며 소원을 빌기도 했다.
배부른산을 오르기 위해서는 높고 낮은 능선을 몇 개나 지나야 했다. 낮은 능선을 따라 오르니 참나무길이 나왔다. 양편으로 참나무들이 즐비하게 줄을 서서 마치 환영하는 모습 같아서 길을 걸으면서 상쾌한 마음이 들면서 어깨가 으쓱해지는 것 같았다. 오솔길의 쉼터마다 원주 출신의 시인이자 국민 작사자인 박건호의 시들이 입간판처럼 세워져 있었다. 그중에서 ‘추억’이라는 시가 가슴에 와닿았다. 이 시를 읽으니, 옛날과 많이 달라진 내 고향의 추억이 그리워졌다. 동시에 ‘기회가 닿는 대로 원주 무실동의 박건호 공원을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였다.
작은 능선을 오르며 내려갈 때 소나무길이 나왔다. 굵고 가는 소나무 뿌리들이 동서남북으로 알몸을 드러내고 있었다. 아마도 소나무 뿌리는 이 산의 역사가 묻어난 것 같았다. 사람들의 발길에 반들반들하게 윤이 날 정도였다. 높은 능선이 나올 때면 배부른산의 정상인 줄 알고 마음이 기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기쁨도 잠시뿐이었다. 배부른산 정상은 정말로 임산부의 배처럼 높은 산인 것 같았다. 능선을 타고 가도 정상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배부른산은 원주시 흥업면 사제리에 있다. 나에게 이 등산은 짭짤하면서도 매운맛을 주는 산이었다. 좀 높은 능선을 오를 때 정상에서 하산하는 등산객을 붙잡으며 배부른산 정상이 다가가는지 물어보기도 하였다. 배부른산 정상을 오르는 마지막 길은 엄청나게 힘든 코스의 비탈이었다. 2m∼3m 평지가 나오고 바윗돌이 모여 있는 것을 보고 ‘정상에 다 왔구나.’ 하는 생각을 하였다.
바로 배부른산(419m) 표지석이 보였다. 표지석을 보았을 때 너무나 반가워 고향에 있는 어머니를 만난 기분이었다. 배부른산 정상에 오기까지 중간에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가려고 몇 번이나 생각하였다. ‘도전하자. 도전하자.’ 다짐한 보람이 있었다. 표지석 옆에는 높게 쌓은 돌탑과 그 옆에 등 굽은 소나무가 마치 용이 하늘로 승천하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정상에 서니 나도 배가 부른 느낌이 들었다.
배부른산은 두 가지 설이 있었다. 옛날 원주에 홍수가 나면 문막 쪽의 배를 이 산에서 불렀다는 유래와 산의 모양이 만삭의 임산부 배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졌다는 것이다.
정상에서 원주시를 바라보았다. 배부른산의 표지석 주변에는 풍광이 확 트이지는 않지만 크고 작은 아파트와 다양한 건물들이 원주시의 아름다움을 더해주었다. 배부른산은 원주시 흥업면 사제리에 있었다.
그리고 쉴 새 없이 앞으로만 달리는 고속도로가 보였다. 원주시 뒤로 치악산 정상 비로봉(1,288m)이 보였다. 지난달에 치악산 입석사와 입석대를 다녀왔는데 그 모습이 생동감 있는 사진처럼 떠올랐다.
몸을 뒤로 돌렸다. 푸른 들판의 벼들이 가을의 결실을 보기 위해 푸르름을 더욱 뽐내고 있었다. 가까이 또는 멀리 있는 백운산과 겹겹이 쌓인 산들이 보이기도 하였다. 배부른산에는 하얀 구름이 파란 하늘 사이로 큰 구름 덩어리들과 잘 어울려 하늘의 조화를 이루었다. 계속 노래를 부르는 매미들의 제창 소리를 들으면서 하산을 하니 마음은 상쾌해지면서 건강을 위한 등산의 가치가 느껴졌다.
※ 문학박사, 수원 곡반초 수석교사, 제4회 나혜석 문학상 대상 수상, 시집 : 마음의 향기, 얼음새 꽃 소리,
사색의 오솔길, 시들지 않는 꽃, 수필집 만남의 심미학 등
보석 같은 삶
노 복 래*
도심 한복판, 아파트에 불빛이 하나둘 사라지고 있다. 아마도 자정이 가까워진 듯하다. 나이가 들면 생각이 많아진다. 생각뿐만이 아니라, 말도 많아진다. 많아진다기보다 어쩌면 젊은 날 무심코 지나쳤던 사물이나 존재에 대해 더 생각하고, 더 이야기하고픈 욕구가 생기는 듯하다. 이젠, 그럴만한 마음의 여유를 가졌다고 보아야 한다. 오늘은 문득, 아내가 나한테 한 이야기를 곱씹어 본다.
“생각 좀 하고 말을 하세요!”
약간은 자존심 상하면서도 내 가슴에 비수를 꽂는 문장이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당연한 말이기는 한데, 왠지 기분이 썩 좋지는 않다.
사람이 여타의 동식물과 다른 점은 ‘생각하는 존재’라는 사실이다. 지각하지 않는 존재는 단순한 사물과도 같은 형체에 불과하다. 그러기에 프랑스의 철학자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하지 않았던가?
사람은 생각하며, 그 생각을 말로 표현하고 행동하며 살아가는 만물의 영장이다. 성경 말씀에도 ‘태초에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시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신 후 생육하고 번성하여 만물을 다스리라’는 축복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우주 만물보다 더 소중하고 귀한 것이 사람이다.
그런데 아내는 왜 나보고 생각하고 말을 하라는 것일까? 결론은 내가 성급하게 생각하고 행동하며 말을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럼 도대체 나는 어떤 생각과 말을 해야 아내한테 잔소리를 듣지 않을까? 아내에 대한 섭섭한 마음에 뒤끝 감정이 일며 여러 가지 생각으로 잠이 오지 않는다.
세상에는 귀하고 소중한 것이 많지만, 그중에서도 ‘보석’이 으뜸이라고 생각한다. 영원히 빛나고 변치 않는 보석같이 주위를 밝히며 살아가는 사람이 되면 얼마나 좋을까? 보석같이 빛나는 말은 상대방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는가 하면, 남을 비방하고 헐뜯는 말은 상처를 주게 된다.
한때 유행했던 말 “내 탓이요”는 상대방의 입장에서 보면, 나에게도 잘못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라는 뜻일 것이다. 보석 같은 삶을 살기 위해서는 보석 같은 말을 많이 하며 살아가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나 또한 그리할 것이다. 생각하는 것도 습관이요, 행동하는 것도 습관이 되는 만큼, 우리는 보석 같은 생각과 말을 많이 하며 살아가야 한다. 우리가 서로에게 칭찬하고 용기를 주는 보석 같은 말을 하며 살아갈 때, 우리의 삶은 보석같이 빛날 것이며 사회는 밝아지고 삶의 가치는 더욱 빛날 것이 아닌가. 마침내 내 마음에 보석이 알알이 찾아와 박히고 있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아진다.
꿈에서도 보석이 찾아올 듯하다. 그 보석을 아내에게 주어야겠다.
배움의 기쁨
사람들은 시인이 되고, 소설가가 되고 싶은 생각을 한다. 이러한 자기표현의 욕구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어쩌면, 우리는 삶을 경험하면서 이미 시인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언어로 삶을 노래하고, 이야기하며 자기감정을 표출한다. 다만, 전통 문학 장르의 규범에 적용되지 않을 뿐이다. 그래도 가끔은 작가라는 호칭이 부러워 펜과 종이를 준비해보지만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어떤 이는 ‘젊은 날 지나쳤던 문학 공부를 다시 한번 해볼까’하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나도 그런 사람이다.
퇴직 후, 젊은 시절에 접할 기회가 없었던 ‘논어’를 공부하고픈 생각이 들었다. 그러던 중, 인근 대학 평생교육원에 개설된 강좌를 보고 수강을 하게 되었다. 벌써, 논어 공부를 시작한 지도 6년의 세월이 흘렀다. 논어(論語)는 공자의 어록을 모은 일종의 ‘경전’이다. 단순히 한자로 전해지는 어록을 해독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논어에는 공자께서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그 말씀을 하셨는지에 대한 설명이 없다. 어록만 있고 상황이 없으니, 우리가 다양한 상황을 가정해 해석을 달리하면 그 또한 쏠쏠한 재미가 있다.
논어를 학습하던 중 아동문학 작가를 만난 것은 나에게 그동안 잠재되었던 문학에 대한 감각을 일깨우는 계기가 되었다. 코로나로 소규모 합평회 형태로 진행하던 문학모임을 정규강좌로 개설한다는 정보를 얻었다. 시를 쓰셨던 아버지의 DNA가 내 몸에서 꿈틀거림을 직감했다. 예당지 언덕에 조성된 조각공원 입구에는 아버지가 쓰신 시작품이 팻말로 서 있다. 그 시를 읽을 때마다 ‘그 옆에 내 작품도 나란히 세워놓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늘 해오던 터였다. 그래서 시작한 문학 공부가 한 학기를 마치고 오늘 종강을 하게 되었다.
이별은 늘 슬픈 눈을 보이게 한다. 그리 길지 않은 한 학기였지만, 한 강의실에서 교감하고 소통하며 우정을 쌓았기 때문일 것이다. 문학탐방과 창작품 합평회를 통해 각자의 생각을 이야기하고 토론하였기에 모두가 이심전심으로 정을 나눌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러기에 아쉬움을 달래려 모인 뒤풀이는 화기애애했다.
지난 한 학기를 되돌아보면, 각자의 개성과 특성은 다르지만, 인간적으로 서로를 이해하는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또한, 작품 활동을 할 수 있는 동기를 갖게 되어 자연스레 관심을 넓히고 책을 읽고 쓸 기회가 주어진 것에 감사한다. 박범신 문학관과 풀꽃 문학관 탐방 등을 통해 작가들의 작품세계 등을 이해하고 견문을 넓힌 것도 하나의 수확이었다. 무엇보다 몇 편의 내 시와 수필 작품을 썼다는 것이 그저 흐뭇하기만 하다.
다가오는 가을학기에는 문학에 관심이 있는 카페 회원들의 많은 참여로 상호 간 우정을 돈독하게 쌓으며, 삶에 대해 상호 소통할 수 있는 시간이 되기를 희망해 본다.
※ 충남 예산 출생, 한밭대학교 및 동대학원 졸업, 토목공학 석사, 논산시 수도사업소장, 한밭대 외래강사 역임,
현)(주)동양엔지니어링 부회장
산소 이장
전 월 득*
심심산천 그늘진 선산에 외롭게 쓸쓸히 계시던 아버지, 해 밝고 풍광 좋은 자리는 윗대 조상님들이 자리 잡고 계시고, 막내아들이란 미명하에 한발 치 잔디조차 생육하지 않는 그늘진 곳에 네모진 봉분을 이고 반백 년을 지내오셨다. 살아있는 자식들은 문명의 이기를 누리며 호의호식하면서도, 이미 고인이 되신 아버지의 거처를 신경 쓰는 일은 쉽지 않았다.
살아생전 어머니의 유언을 더 존중했던 것일까? 어느 풍수지리학자가 어머니께 들려준 이야기를 더 믿었던 것일까? 우리 형제들에게 풀리지 않는 숙제는 가끔씩 마음을 할퀴며 지나곤 했었다. 지난가을, 코로나 핑계로 2년여 만에 아버지 산소를 찾았다가 길을 잃고 황당함을 느낀 우리 네 자매는 더 이상 아버지께 불효자가 되지 말자는 결론을 내렸다. 막내 남동생이 해마다 벌초는 다녔지만, 태풍과 비바람에 쓸려 내린 산소 길이 낮설기만 했던 것이다.
이미 선산에 계시던 조상님들의 산소를 평평한 양지바른 곳으로 이장하고, 비석과 상석으로 치장해놓으신 우리 집안 장자인 사촌 오빠는 본인이 살아 있을 때 작은아버지 산소도 이장하자고 번번이 말했었다. 그때마다 우리는 시대에 역행하는 일이라며 거부했었는데, 이제는 오빠의 뜻에 수긍하기로 한 것이었다. 드디어 계묘년 윤 2월 초하루, 풍수설을 논하는 사람들이 주로 말하는 윤달에는 조상님 산소를 어디로 옮겨도 무탈하다는 말에 힘입어 과감하게 거사를 진행하기로 한 것이다. 아직 농촌에 거주하는 장조카와 남동생, 형부가 함께 이른 아침 아버지의 산소를 허물고 유골을 수습하여 흰 천으로 감싸 모셔왔다. 오십여 년 만에 다시 세상 밖으로 나오신 아버지, 깡마른 팔뚝을 부여잡고 때를 밀며 눈물 쏟았던 지난날을 생각하며 다시 통한의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등 너머 오갈 수 없는 산등성 사이에서 그리워하셨을 어머니 옆에 나란히 모시고, 그 앞에 표지석을 해드렸다. 한학자의 위상을 생각하고 셋째 딸의 소임을 다하며, 한문으로 어머니 아버지 비문을 내 정성으로 손수 쓰고 싶었지만, 시대의 변화는 나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모든 것을 컴퓨터가 알아서 하는 시대의 편리성 때문이다.
평평하고 양지바른 곳, 따듯한 햇살에 목욕하고 오랜만에 해후하신 어머니 아버지, 오손도손 정겨운 모습에 오 남매의 얼굴에 화색이 돈다. 즐겨 드시던 노란 참외와 딸기, 달달한 음료와 떡을 맛있게 잡수시라고 진수를 올렸지만 살아남은 자들의 위안일 뿐, 아버지께서는 바라만 보시며 너희들이나 많이 먹고 화목하게 지내거라 당부하신다.
유년 시절, 아버지와 겸상하며 다정하게 떼어주시던 석쇠 구이 생선들이 어른거리고, 주머니에서 꺼내주시던 알밤 몇 톨의 끈끈한 기억이 진한 그리움으로 눈시울을 붉히게 한다. 고지식하고 엄하셨던 훈장님의 사랑은 지금의 나로 다듬어주신 버팀목이셨다. 다시 뵐 수 있다면 모두를 다 드리고 싶었지만, 아무것도 드릴 수 없는 나는 투명 인간이었다.
시리도록 맑은 햇살에 온갖 꽃들이 피어나고 매화향이 코를 간질이지만. 고요 속에 정적만이 흐르고 아버지의 따뜻한 칭찬도 들을 수 없는 처연함은 내 가슴을 찢는다.
폼나게 사는 삶
사람은 누구나 사랑하는 가족과 살아가고 있다. 주변에 좋은 친구들이 있다는 것은 더없이 행복한 일이다. 어릴 적엔 부모님의 사랑 속에 살면서도 날마다 좋아하는 친구를 만나, 네 집 내 집을 오가며 온종일 보냈던 기억이 새로워진다.
나이가 들면서 다시 어린 시절 친구들이 그리워지는 것은 아름다운 추억이 있기 때문이다. 각박한 세월을 거치며 유년의 추억에 잠겨 보는 것도 행복한 일이다. 요즘은 옛 친구들과 자주 만날 수도 없고, 영영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떠나간 친구가 있다는 생각에 왈칵 눈물이 돌 때도 있다. 나는 바쁜 현실에 적응하며 좋아하는 일도 여전히 하고, 취미생활에도 많은 시간을 할애하며 살고 있다. 더구나 늦깎이 학교생활을 하면서 밤 10시까지 같은 반 친구들과 학업에 열중하고 있으니 공허함이 없을 법도 한데, 때때로 허전한 것은 흘러가는 세월에 생로병사가 함께 한다는 증거일 것이다.
젊음이 부러운 것은 내가 늙어가고 있다는 사실이고, 젊은 날 다하지 못한 아쉬움이 내 안에 잠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꿈 많던 시절을 속절없이 보내고, 이제야 그 꿈을 향하여 정신없이 살다 보니 좋은 친구들과도 거리가 생기며, 하나둘 세상을 떠나는 것을 목격하게 되어 안타깝다.
‘외로움을 느끼는 것은 사람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정호승 시인님의 시 <수선화>를 통하여 인지하고 있었지만 내가 외로움을 느낄 줄은 몰랐었다. 현재는 활발하게 여기저기 뛰어다니고 있다는 사실이 조금은 위안이 되기도 한다.
더 늦기 전에 뜻이 맞는 친구들을 찾아서 남은 생을 돌아보며 즐기고 싶은 생각이 들 때가 있다. 한 번뿐인 삶이라면 이제는 폼나게 사는 법을 터득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나의 지론이다. 어미 품을 떠나 잘살고 있는 자식들에게 기대지 말고 위풍 당당히 나서서 윤택한 내 삶에 충실히 하는 것도 생의 전환점이 되리라는 생각이다. 사회에서 만난, 이런저런 친구들이 있다지만 진정한 친구를 만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가족은 그 구성원으로 상징적 의미와 더불어 끈끈한 애정의 관계 속에 살 수 있다지만, 친구라는 개념의 커다란 범주 안에서 어떤 친구를 어떻게 만나는 것이 현명한가는 깊이 생각하고 오래 성찰해야 할 일이다. 혼돈의 시대에 살며 동 연배의 친구들보다 한발 앞서 씩씩하게 살고 있다는 자신감도 가지고 싶다.
전보다 전화를 자주 하는 딸내미는 혹여 엄마가 외롭지 않을까 걱정하는 눈치다. 직장생활에 매인 몸이니 엄마와 함께 할 수 없는 시간의 부재가 불효한다는 압박으로 여겨지는 모양이다. 아직은 나도 청춘이라 여기며 마음 편히 자유롭게 살고 있지만 나이가 들어 독거하는 엄마의 일거수일투족에 마음 쓰이는 것은 자식의 도리라 해도, 내가 벌써 자식들이 우려하는 위치에 이르렀다는 생각에 유쾌하지는 않다.
학교에서 체육 선생님의 생동감 넘치는 강의를 들으면 마음이 달라진다. 인간 100세 시대를 뛰어넘는 희망적인 말씀에 의아함을 느끼기도 한다. 사회는 빠르게 발전하고 진화하며 약 5년 후면 획기적인 의학 개발과 첨단 과학기술로 우리 인간의 수명이 훨씬 길어질 수밖에 없으니 열심히 운동하여 좀 더 나은 세상을 경험하라는 말씀에 힘을 얻는다. 행복한 미래를 꿈꾸며 더 오래오래 세상에 머물고 싶은 것은 노욕일지라도 하나님이 뜻이 있다면 더 오래도록 행복한 삶을 유지하고 싶다.
드레스코드를 즐기던 날
일주일 전부터 영어 선생님의 공지가 있었다. 12월 23일에 수행평가 시험이 있고, 그날 드레스코드 시간을 가지며 크리스마스의 추억을 만들자는 말씀이었다. 누구나 빨간색 하나쯤 착용하고 뜻깊은 시간을 보내는 것도 좋을 거라는 말씀에 처음에는 귀를 의심했었다. 역시 미국 유학파 선생님의 생각은 다르셨다. 우리 반 친구들도 재밌겠다며 기대감에 부풀고, 나는 그런 놀이에 관심이 많아 친구들 모임이나 가족들과 모임에서도 솔선하여 이벤트 준비를 잘하는 편이라 더없이 즐거운 마음으로 기대하게 되었다. 선생님은 수행평가 시험문제도 가볍게 출제해주셨다. 긴 문장이었지만 평소에 영어에 관심이 있었으니 어려울 게 없었다. 여러 번 읽고 쓰기를 반복하고, 전날에는 빨간 재킷과 리본을 만들었다. 혹시 준비하지 못한 친구들에게 나눠주려고 여러 개를 만들어 다른 때보다 일찍 학교로 갔다.
이미 몇몇 친구들이 빨간 옷을 입고 교실에 서성이고. 누군가 교실 벽 군데군데 나폴 거리는 원형 트리를 부쳐놓고 교탁 앞에는 네온사인이 반짝이고 있었다. 내 바로 뒤에 앉는 언니도 빨간 산타 복장으로 모자와 마스크까지 완벽하게 착용하고 손을 흔들며 웃고 있었다. 어릴 때와 70대 노년의 크리스마스 기분이 다르지 않다며 모두 즐거운 표정들이었다. 나도 빨간 재킷에 하얀 왕구슬 목걸이, 모자까지 착용하였다. 공부를 잘하는 우리 반 반장은 빨간 보자기를 서너 개 준비하여 덩치가 큰 남친 어깨에 둘러주었다. 첫째 시간 과학, 총각 선생님이 들어오시자 깜짝 놀라시며 분위기에 취하셨다. 내 것은 없느냐는 물음에 뛰어나가 빨갛고 커다란 나비넥타이를 목에 걸어드렸다. 얼굴이 홍당무가 되면서도 이런 일이 처음이라고 셀카를 찍으며 기뻐하는 모습에 교실은 금세 웃음바다가 되었다.
요즘 수행평가 시험 기간이라 모두 공부에 열중하는데, 나는 엉뚱한 생각으로 놀이와 ‘이벤트 건’에만 집중하였으니 성적은 불 보듯 뻔할 것이라 생각하면서도, 여전히 학교생활은 만족스럽고 즐겁기만 하였다. 복도를 지나시던 국어 선생님께서도 빼꼼히 문을 여시더니 이 반의 분위기가 왜 이렇게 좋은 거냐며 이럴 때는 사진으로 남겨야 한다고 교실 중앙으로 모여 달라고 하셨다 어느새 교무실에서 담임 선생님도 뛰어오셨다. 누군가가 벌써 빨간 스카프를 목에 걸어 드렸고, 좀 전에 나비넥타이를 건네자 ‘미쳤나?’ 하며 어색해하던 앞자리 남친도 빨간 보자기를 어깨에 두르고 손 하트를 그리며 중앙에 서서 웃고 있었다. 잠시 잠깐의 일들이 영원한 추억으로 남아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 것이라는 생각은 분명하였다. 둘째 시간은 영어 수행평가 시간이었다. 원인을 제공하신 선생님께 감사드리며, 내가 준비한 산타 모자를 씌워 드렸다. 선생님도 기뻐하시며 다른 반은 까맣게 잊은 것을 우리 반은 즐기고 있으니 좋아 보인다고 말씀하셨다.
내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시험지를 받아들고 황당함을 느꼈다. 줄줄 외우고 확실히 쓸 수 있던 문장의 낱말들이 뒤엉키는 것을 바로잡느라 한참 만에 정리하여 정답을 쓰고 맨 마지막에 제출하는 해프닝으로 오늘 수업을 종료하였다. 이제는 자중하며 수업에 최선을 다하리라는 다짐을 하게 되었다.
요즘 강추위와 눈발이 자주 날려 수업은 2시간으로 단축되고 있다. 물론 수업도 중요하지만 즐기며 산다는 것은 더 중요한 일이다. 이 나이쯤 되면 학문을 어떻게 연구하고 열심히 하느냐보다 하루를 어떻게 사느냐가 더 중요 하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우리 몸에서만 생성되는 웃을 때 나오는 엔돌핀. 즐거울 때 나오는 다이돌핀으로 건강하고 행복하게 산다는 것에 치중하고 싶다. 오늘처럼 즐거운 날은 오래도록 가슴에 남아 우리가 졸업한 후에도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초대
이른 아침, 문학 강의를 듣기 위해 모처럼 버스를 타고 집을 나섰다. 여느 때 같으면 옆 동네에 거주하시는 우담 작가님께서 5분 일찍 집 앞으로 오셔서 같이 타고 가자고 기다려주셨는데, 오늘은 개인 사정상 못 오신다는 말씀에 출발을 서둘렀다. 다름 아닌, 합평회를 마치고 뚝섬 문우님 댁에서 바비큐 파티를 하기로 초대받은 날이었다.
오래전부터 우담 회장님께서는 넓은 잔디밭을 탐내며, 우리 회원들이 한자리에서 티타임을 갖는다면 낭만적일 거라는 말씀을 하셨던 터라, 순간 불온한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건강 문제가 아니라면 불참할 이유가 없을 거라는 마음이었기 때문이다. 건강 문제가 아니길 기도하면서 천천히 정류장에 도착하여 버스에 올랐다. 집 앞에서 타고 가는 노선버스에는 학생들이 가득 타고 있었다.
초여름의 강한 햇빛이 유리창에 비추고 같은 방향으로 가는 풋풋한 청춘들이 같은 버스에서 쏟아져나와 대학 교문을 통과하여 삼삼오오 담소를 나누며 각자의 강의실로 향하였다. 젊은 무리 틈에 섞여 나도 빠른 걸음으로 강의실로 들어갔다. 일주일간 심열을 기우려 쓴 작품 하나씩 합평을 마치고, 우리 회원 모두는 초대 장소로 향했다. 잘 가꾸어진 정원이 있는 2층 저택, 도심 한복판에 주변 공터와 더불어 아기자기한 나무들이 싱그럽게 잎을 너울거리며, 우리를 맞아 주었다. 마당 가 화단에는 작약이 봉우리를 맺고, 담장을 끼고 뽕잎이 피고, 오디가 열리고, 매실이 주렁주렁 달리고, 오이와 수박 넝쿨이 주인의 손길을 타고 하늘을 향해 쑥쑥 뻗어 오르고 있었다. 마당 한쪽, 기다란 인공연못에 미꾸라지와 금붕어가 꼬리를 흔들며 맴을 돌고, 연꽃이 피었다가 사그라진 흔적도 있었다. 이른 봄 곱게 피었을 수선화와 제비꽃의 앙상한 모습이 자연의 순환을 알려주고. 다시 피어나는 하얀 수국과 붉은 장미가 집안의 평안을 보여주는 듯 싱글벙글 웃고 있어 문득 지난날 내 유년의 고향 집을 떠오르게 하였다
울 밑에 가득 메운 꽃밭에서 백합꽃 향기에 취하고, 매화 꽃송이가 조롱조롱 피어날 때 노란 골담초꽃을 따며 친구와 소꿉놀이하던 고향 집이 그리워졌다.
푸르름이 무르익는 오월 중순의 날씨는 한여름을 방불케 하였다. 파란 잔디마당 한켠, 커다란 파라솔 아래 바비큐 그릴이 세워져 있고, 앞이 탁 트인 테라스에는 기다란 테이블이 손님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연세 지긋하신 뚝섬 문우님은 3대가 함께 한 집에서 거주하시는 독실한 신앙인으로 다복한 믿음의 가정이시다.
요즘 보기 드문, 착하고 현명하다고 칭찬 일색이던 며느님이 마침 학사일정을 미루고 주방에서 음식을 준비하느라 분주히 움직이는 것을 보니 과연 듣던 그대로였다. 고맙고 미안하며 감사하였다. 건강 문제로 문학 강의에 출석을 못 하시던 향원 전임 회장님은 딸기를 씻어서 정성껏 담아오시고, 교수님은 곧바로 고기를 굽는 담당이라고 나서시기에 내가 살짝 준비해간 앞치마를 입혀 드렸다. 마침 자주색 셔츠에 자주색 체크무늬 앞치마의 배색까지 잘 맞으며 멋진 셰프의 모습으로 변신하였다. 야외파티를 많이 해보신 듯, 조금 전 강단에서의 근엄한 모습은 간곳없이 휴안 총무님과 함께 숯불을 피우고 고기를 구우며 소시지를 뒤집는 모습이 조금도 어색하지 않으셨다. 불판 위에서 지글지글 쇠고기의 향이 코를 자극하고, 그 옆에 중국에서 온 우지강 대학원생이 잘 익은 소시지를 한입에 쏙 넣고 오물거리자 내 입에서도 군침이 돌며 어서 먹고 싶은 충동을 일으키고 있었다. 텃밭에서 손수 가꾼 상추와 고추 풋마늘에서 배어 나온 샐러드의 풍미가 그 어느 호텔식도 따라오지 못할 맛이었다. 담백한 시래기 된장국, 금방 구운 바비큐, 잘 섞인 잡곡밥에 오밀조밀한 반찬들이 한 상 가득, 함께한 문우님들께 행복한 순간을 제공하였다. 이쪽저쪽에서 개인 사정으로 함께 하지 못한 회원님들의 이름을 거론하며 아쉬움을 표했다. 나 역시 내심 우담 회장님 생각이 뇌리에 맴돌고, 뚝섬 형님께서도 여러 차례 회장님의 불참을 아쉬워하였다.
금상첨화가 따로 없는 푸짐한 식탁에 애주가들이 사랑하는 막걸리가 빠진 것은 이색적으로 다가왔다. 우리 문우님들의 정서에 파티에서 술이 빠지면 앙꼬 없는 찐빵같이 왠지 모르게 허전할 법도 한데, 그 누구도 내색하지 않고 현재에 만족하며 뚝섬 문우님의 독실한 기독교 정신을 존중해드렸다. 모두는 즐거웠고 행복해하면서 아무도 술을 찾지 않으셨다. 주인님의 철학과도 같은 소신을 지켜드리며 시인들의 감성이 어떻게 변하여 아름다운 글로 탄생하게 될는지 궁금하기도 하였다. 시원한 수박과 맛있는 커피와 처음 맛본 마시멜로의 달달하고 부드러운 맛도 즐겼다.
만나기 전 기대와 설렘이 있었다면 또 헤어져야 하는 아쉬움이 있다. 다섯 시까지 놀다 가라는 주인님의 말씀에도 일어서 헤어져야 했다. 이토록 좋은 자리를 마련해주신 문우님께 감사드리며. 바쁜 학사일정을 미루고 음식을 장만해주신 며느님께 무한 감사하는 마음을 전해드리고 싶다. 마무리는 흐드러진 장미꽃을 배경으로 행복했던 순간을 카메라에 담았다. 모두 환하고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우금티 전적지를 찾아서
문우님들과의 나들이는 언제나 단촐하면서도 즐겁다. 여느 때와 같이 아침 아홉 시 반에 대학으로 향하였다. 강의실에서 교수님과 회원님들이 만나서 공주 우금티 전적지와 풀꽃문학관을 견학하기로 하였다. 모두 여덟 명, 두 대의 승용차로 나눠 타고 한참을 달렸다.
오월의 푸르름이 온 산야를 꽉 메워 풍성하고 아름다운 대지의 향기가 차창을 두드리며 가슴속으로 스며들었다. 얼마 전까지 만 가지 꽃들이 자태를 뽐내며 수런거리더니, 어느새 쓸어간 듯 꽃들은 사라지고 짙푸른 녹음으로 새 옷을 갈아입었다. 자연에 순응하며 먼 산에 하얗게 피어나는 밤꽃이 조화를 이루고, 초여름날의 상쾌한 바람 맛을 느끼게 하였다.
삼십여 분만에 대전에서 가까운 공주 동학농민혁명의 전적비가 있는 곳에 도착하였다. 마침 한 달 전, 학교에서 사회시간에 충청도 지방에서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났다는 수업을 받은지라 더 생생하게 다가왔다. 막연하던 충청도 지방이 바로 공주 우금티라는 사실에 숙연해지며 자부심도 있어 주변을 꼼꼼히 돌아보고 해설사의 설명도 진지하게 경청하였다.
1894년 침략자 일본과 부패한 조선왕조에 항거한 반봉건 농민 운동, 신분 철폐와 사회개혁을 앞세운 근대화 운동, 일본 식민 지배, 침략에 맞선 항일 운동에 동학농민운동, 혁명의 공주 우금티 전투에는 전국에서 남접 농민과 북접 농민군, 일만여 명이 참여하여 500여 명만 남을 정도로 화승총과 신식 소총의 대결이었지만, 죽음을 무릅쓰고 덤벼들어 동학농민군이 관군과 일본군을 뼈가 떨리고 가슴을 서늘하게 만들었던 전투라고 하였다. 공주 창의소 의병대장 이유상과 공주 동학 접주 장준환과 함께 일본군 관군에 맞서 변변한 도구도 없이 오직 단결된 한마음으로 싸울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효포 전투. 대교 전투. 옥녀봉 전투. 이인 전투, 송장 매미 산자락 전투. 우금티 전투. 오실 마을 산자락 전투 등 치열했던 역사를 되새길 수 있어서 뜻깊은 문학기행에 감사함을 느꼈다.
점심 식사는 회원들의 의견을 모아 돼지고기 김치찌개로 즐겼다. 뭐니 뭐니해도 여행지의 즐거움은 맛과 멋의 포만감이 동반한다. 뜻깊은 우리 문학반 회원들의 선심은 공평하게, 돌아가며 한 번씩 페이를 지불하여 그 누구의 눈치를 살피거나 염려하지 않도록 서로가 배려하며 존중한다.
식사 후에는 나태주 시인의 ‘풀꽃문학관’으로 갔다. 푸른 숲이 우거진 낮은 산 및 일본 주택은 가정집을 연상케 하였다. 일제강점기 일본 헌병이 살던 집이었는데 공주시에서 매입하여 풀꽃문학관으로 운영하고 있다고 하였다. 생각보다 아주 작은 소규모로 단정히 꾸며져 시인의 소박한 이미지를 대변하고 있었다. 유명한 <풀꽃 시>의 서각 작품이 걸려 있어 나태주 문학관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문학관 뜰에 핀 풀꽃들이 우리를 맞으며 말을 걸어왔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우리 일행은 문인들답게 풀꽃문학관을 배경으로 기념촬영을 빼놓지 않았다.
뜻깊은 하루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향하는 발길이 어느 때보다 산뜻하고 가벼웠다. 건강한 몸으로 문우님들과 함께한 하루는 기쁨이고 행복이라 여기며 오늘도 살아있음에 감사한다.
※ 충남 부여 출생, «상상의 힘»(2020) 수필부문 신인상, jwd5038@naver.com.
아버지의 유산
진 재 훈*
황금연못이라는 TV 프로에서 유산(遺産) 상속에 대해 열띤 토론을 하는 것을 본 적 있다. 출연자 대부분이 연세 드신 분들이지만 젊은 사람도 일부 참여를 해 흥미롭게 시청했다. 특히 유산 상속을 사전에 해줄 것인지, 아니면 마지막까지 간직할 것인지에 대한 주제가 가장 관심이 갔다. 참석자들 찬반투표 결과는 공교롭게도 8:8로 우열을 가릴 수 없었다.
유산 상속에 대한 우리 사회 인식은 아직도 어느 한 곳에 치우치지 않고 팽팽한 평행선을 그리는 것 같다. 생전에 증여하자는 쪽은 부모가 맑은 정신일 때 유산을 분배해 줘야 자식들과 유대를 강화할 수 있고, 자식들도 돈이 필요할 때 도움을 받을 수 있어 좋다는 취지의 의견이었다. 또한 사후 유산분쟁으로 인한 가족관계 파탄을 막을 수도 있다는 논리였다. 반대하는 쪽에서는 사전에 유산을 나눠주면 경험상 오히려 자식에게 버림받을 수도 있고, 부모 재산으로 자식의 근로의욕이 사라져 잘못된 길로 이끌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둘 다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TV를 보면서 5년 전 아버지 돌아가실 때 생각이 불현듯 떠올랐다. 아버지는 오랫동안 앓으시던 폐 질환이 악화하여 119구급차로 대학병원 응급실에 실려 가시게 되는 상황이 벌어졌는데 그때 유산 상속 문제가 거론됐다. 왜냐하면 생전 아버지께서는 집안 대소사 때마다 가족들 앞에서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재산분배를 하지 않겠노라’고 늘 말씀을 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상 일이 닥치니,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결국 돌아가시기 3일 전 맑은 정신으로 부랴부랴 유언장을 작성하시고 생전 약속대로 재산상속을 마치고 떠나셨다.
아버지께서는 무일푼에서 수많은 노력 끝에 농사로 자수성가하신 분이셨다. 연로하시게 되자 처제인 막내 이모가 형부인 아버지께 사전 재산상속을 집요하게 요구하며 당신의 주장을 강요하셨다. 이모는 오랫동안 한복집을 운영하시면서 번 재산을 일찌감치 자녀들에게 유산으로 분배해줬기 때문이다. 이모는 어머님과 합세해 가급적 빨리 유산을 배분해 자식들이 필요할 때 도움이 되게 하라고 계속 아버지를 채근하셨다. 그러나 아버지께서는 끝까지 당신 고집을 굽히지 않으셨다. 그때는 솔직히 아버지의 고집이 조금은 서운했다. 자식들 삼 남매 대학 등록금 및 중.고등학교 학원비에 생활비까지 가장의 어깨가 무거웠고, 외 벌이인 나로서는 힘든 시기였기 때문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늦게 유산을 나눠준 것이 오히려 더 나았다는 생각도 든다. 유산에 기대지 않고 힘들지만, 더 열심히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는 아버지의 선견지명이 옳지 않았나 싶다.
자녀들에게 무엇을 남겨줘야 하느냐는 질문에도 출연자들의 의견이 분분했다. 대체로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부분으로 나누어졌는데, 물질적인 것을 중시하는 쪽은 본인이 부모로부터 받은 도자기나 유품 등을 얘기했다. 정신적인 유산으로 나온 것은 끈기, 성실, 정직, 베푸는 마음 등이 있었다. 그중 젊은 출연자 중에 자녀를 많이 낳겠다는 의견과 SNS 계정을 유산용으로 물려주겠다는 말은 신세대적 발상인 듯해 참신했다.
아버지께서는 돌아가시기 몇 해 전 나에게 뜬금없이 50여 년을 빠짐없이 기록한 영농일지를 넘겨주셨다. 볼펜으로 삐뚤빼뚤 작성한 대학노트에는 매년 파종 시기 및 퇴비량, 그리고 농작물 판매대금 등 중요한 영농정보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나는 당시 직장생활을 하고 있던 터라 거의 관심이 없었지만, 아버님께서는 퇴직하면 시골에 들어와 농사라도 지었으면 하는 소망의 표시로 그걸 주시지 않았나 생각된다. 노트를 넘겨주시면서 “한 명의 자식이라도 농사를 가업으로 이어받는 사람이 있었다면 적어도 농사에 관한 박사로 만들 수 있었을 텐데…”라며 당신이 가졌던 농사에 대한 꿈과 지식이 사장되는 것을 못내 아쉬워하셨다. 지금도 그 말씀이 뇌리에 생생하다.
TV프로를 다 보고 나니 ‘아버지께서는 자식들에게 무엇을 전수하려 하셨을까’라는 궁금증과 ‘나는 자녀들에게 또 무엇을 남길 것인가’하는 고민 아닌 고민이 생겼다. 아버지께서는 첫째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라는 가족 간 우애를 강조하신 것 같다. 돌아가시기 직전 정신이 혼미하고 급박한 상황에서도 유산 배분을 유언으로 남겨 자식들 간 상속으로 인한 분쟁을 미연에 방지하려 필사적으로 노력하신 것 같다.
몇 해 전 우리 마을에서도 잘 아는 아저씨 한 분이 갑작스레 돌아가셨는데 부모 유산을 둘러싸고 자녀들 간 재산 다툼 문제로 장례조차 치르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졌었다 한다. 문상간 마을 어른들 모두 이런 자식들 모습을 보고 혀를 내두르며 옛말이 하나 틀린 것 없다며 한탄을 하며 장례식장을 나왔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두 번째는 ‘영농일지(營農日志)’를 통해서 무일푼으로 일군 농사라는 직업에 대한 자부심과 근면. 성실함을 자녀들에게 물려주려고 하셨던 것 같다. 그런 노력이면 어느 분야에서나 성공할 수 있다는 증표로 그것을 유품으로 물려주신 것 아닌가 생각된다.
그렇다면 나는 자식들에게 무엇을 물려줄까 한 번 생각해 보았다.
첫째, 아버지의 DNA를 이어받아 ‘가화만사성’이라는 가훈과 근면. 성실함은 꼭 물려주고 싶다. 형제간 우애 있고 혹시 어려운 사람이 있으면 서로 도와주며 부지런하고 바르게 살아가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중요한 덕목이지만 요즘 같은 핵가족 시대에 더욱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둘째, 가장 중요한 것은 그동안 학창 시절부터 버리지 않고 모아 뒀던 ‘책’이다. 모든 삶의 지혜는 책 속에 답이 있다고 생각한다. 책을 물려주면 손주들도 자연스레 할아버지 서재에 꽂힌 책들을 보며 항상 책을 가까이할 수 있고 독서 하는 습관도 기를 수 있어서다. 또한 할아버지를 회상할 수 있으니 일거양득 아니겠는가.
마지막으로 자식들에게 전해주고 싶은 것이 한 가지 더 있다.
“When life gives you Lemons, Make Lemonade.”
나는 이 말의 뜻이 너무 좋다. “삶이 너에게 레몬(시련)을 주면 그 레몬으로 레모네이드를 만들어라”라는 유명한 격언이다. 살다 보면 크고 작은 실패도 겪고 힘든 시련과 좌절에 빠질 때도 있다. 또 몸이 아파 끝이 보이지 않는 절망감에 사로잡힐 때도 있겠지만, 그런 것들을 하나하나 극복하면서 더 단단하고 의미 있는 삶을 살라는 교훈이 담긴 말이다.
나도 젊은 시절 큰 꿈을 품고 고시에 몰두하다 좌절하며 방황한 적이 있었다. 실패 끝에 시련을 딛고 다른 길을 모색한 결과 새로운 세상이 펼쳐졌다. 그 길 위에서 지금까지 무난하게 행복하게 살고 있으니 교훈대로 레몬을 레모네이드로 잘 바꿨다고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남긴 유산 두 가지에 더해 내가 전하고 싶은 교훈까지 내 자식과 손주들에게 잘 전달되었으면 좋겠다.
아버지의 유훈을 떠 올리니 아버님이 더 보고 싶고 그리워진다.
내가 바라는 노후의 삶
퇴직한 직장 동료들 모임에서 특별한 제안이 나왔다. 현역 시절 이름이나 직함을 부르지 말고 별칭이나 아호를 만들어 부르면 어떻겠냐는 의견이었다. 참석자 모두 크게 반겼다.
한 명은 백수 3년 차라며 호를 무위(無爲)라 했다. 앞으로의 삶은 더 이상 돈 벌겠다고 아등바등하지 않겠다는 각오로 생각한 것이라 한다. 또 한 명은 아호를 초봉(草峰)이라 했다. 하늘만 빼꼼히 보이는 촌구석에서 대도시로 나와 직장 잡고 결혼해 자식들 모두 출가시켰으니 그야말로 크게 성공한 것이라 여겨 풀 초(草)에 우뚝 선 봉우리 봉(峰) 자를 써서 초봉이라 지었다고 한다. 모임 중 제일 막내는 갑작스레 호를 지으라 하니 대전 외곽지역인 서구 기성동 흑석리가 고향이라 그냥 흑석(黑石)이라 짓겠다 하여 한바탕 좌중을 웃겼다. 너무 성의가 없는 작명 같다고 하여 그냥 고향 이름을 살려 오석(烏石)이라 하자고 했다. 내 차례가 되자 갑자기 머리가 하얘졌다. 무엇으로 나 자신을 드러낼까? 고민하는데, 예전 불교 모임에서 단체로 큰스님에게 수계를 받은 적이 있어 그때 법명이 순간 떠올라 “나는 적광(寂光)으로 하겠네”라고 하자 모두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아마도 의미가 전달되지 않아 그런 듯했다. 고요한 가운데 빛을 발한다는 의미라며 부연 설명을 하자, 그때서야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참석자 일부는 즉석에서 호를 정했고, 나머지는 다음 모임까지 만들어 보기로 하고 헤어졌다.
다음날 돌이켜 생각해 보니 내가 말한 ‘적광(寂光)’이란 호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얼떨결에 여러 사람 앞에 발표했지만, 속세를 떠난 출가 스님 법명 같아 내게는 어울리지 않는 옷처럼 낯설게 느껴졌다. 이참에 기왕이면 글 쓰는 작가로서 내 별칭을 하나 갖자는 욕심이 생겼다. 이리저리 생각을 해봤지만 나에게 딱 어울리는 이미지의 단어를 찾을 수가 없어 인터넷을 검색해 봤다.
호를 짓는 가장 흔한 방법은 자신의 고향 지명이나 산 이름을 가져오는 것이라 한다. 가령 퇴계 이황의 퇴계는 고향 지명 토계리(土溪里)의 계(溪)자를 따서 퇴계(退溪)라 하였고, 율곡(栗谷) 이이는 밤골 마을인 율곡리(栗谷里)에서 유래했다 한다. 그 다음으로는 본인이 좋아하는 것 또는 추구하는 것으로도 호를 짓는다 한다. 가령 우보(牛步)는 소처럼 느릿느릿한 삶을 추구한다는 뜻에서 그렇게 이름졌다는 것이다. 고향 지명과 내가 추구하는 것 두 가지를 조합해서 별칭을 지으면 되겠다 싶어 곰곰이 생각하니 청강(靑江)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내가 학창 절 좋아했던 당나라 때 시인 두보(杜甫)의 ‘강촌(江村)’이라는 칠언 율시에서 언급된 첫 구절 ‘청강일곡포촌류(淸江一曲抱村流), 장하강촌사사유(長夏江村事事幽)로다’가 갑자기 생각났다. 내가 태어나서 자란 곳은 금강지류인 조천(鳥川)으로 강과 관련이 있고 젊은 시절부터 강물처럼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살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또한 푸를 청(靑)은 내가 유난히 좋아하는 색깔이기도 하고 자연을 벗 삼아 안빈낙도하며 살자는 나의 이상을 나타내는 글자여서 그것 또한 마음에 들었다. 호를 지어 놓고 요즘 유행하는 챗(chat) 지피티(GPT)에게 청강(靑江)이라는 어감을 물어봤다. 최근 유행하는 문명의 이기를 빌려 검증을 해보기 위한 욕심 때문이었다.
“청강이라는 호는 푸른 강물이 흐르는 아름다운 곳을 상징하며, 자연 속에서 평온한 삶과 여유를 강조합니다. 이러한 느낌은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하는 시에서 주로 사용되며, 동시에 자연과 어우러진 인간의 정서를 상기시키기도 합니다”라며 내 마음에 쏙 드는 평가를 해줬다. 평소 좋아하는 ‘두보’의 시에서 힌트를 얻어 호를 새로 만들고 또 AI의 반응도 좋게 나오니 기분이 좋았다.
얼마 전 봄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날, 아내가 집에 들어오면서 막걸리 한 병을 사가지고 와서는 귀한 식재료인 산 두릅으로 전을 부쳐 술상을 봐준 적이 있다. 기분 좋게 술 한잔하고 호기롭게 아내에게 한마디 했다.
“두보는 기껏 부인이 바둑판 하나 그려준 것을 가지고 시(詩)로써 은근히 세상 사람들에게 자랑했는데, 나에게 비하면 크게 내 새울 바가 못돼. 지금 두보가 내 옆에 있었다면 나를 훨씬 더 부러워했을 걸”하며 껄껄 웃던 적이 있었다. 아내에게 호를 짓게 된 경위를 얘기하고 청강(靑江)이라는 별칭이 어떠냐 느낌을 물어봤더니 본인도 맘에 든다고 했다.
이제 내년이면 두 번째 직장도 퇴직하고 그야말로 완전 자유인이 된다. 때맞춰 새 이름 하나 짓고 그 뜻에 걸맞는 새로운 길을 걸어가는 것도 의미가 클 듯하다. 지금까지 살아온 나 자신을 되돌아보니 대부분의 삶은 남의 시선 신경을 쓰느라 나답지 않게 살아왔던 것 같다. 돈, 지위, 명예 등 남이 나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초점을 맞춰 늘 남의 눈치를 보며 말이다. ‘남들이 직장에서의 지위를 물어보면 부끄럽지 않을까’ 또는 ‘집안 대소사에 찾아오는 손님이 적으면 주변 사람들이 나를 별 볼 일 없게 보지 않을까’ 하며 전혀 쓸데없는 걱정을 많이 하고 살아왔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 보니 참으로 어리석었다. 다른 사람들은 전혀 생각지도 않는데 나 혼자만이 창살 없는 감옥에 나를 가두어 놓고 스스로를 옥죈 것이었다.
이제는 외부로 향했던 내 삶의 지향점을 내부로 돌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여생을 진정 나답게 살고 싶다. 제대로 챙기지 못한 내 마음을 살피고 위로해주며 후회 없고 아쉬움 없는 삶을 살려 한다. 그래서 마지막 순간을 맞이했을 때 정말 행복하게 잘 살다 ‘가노라’ 작별 인사하며 떠나고 싶다.
두보의 ‘강촌(江村)’이라는 시는 내가 앞으로의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잘 알려주는 이정표와 같다. 오래전부터 거실 벽에 그림과 시를 걸어 놓고 음미하며 그와 닮은 유유자적한 삶을 살려 노력했다.
청강일곡포촌류(淸江一曲抱村流), 장하강촌사사유(長夏江村事事幽)
맑은 강 한 굽이 마을을 안고 흐르는데, 긴 여름 강마을에는 만사가 한가롭다.
자거자래당상연(自去自來堂上燕), 상친상근수중구(相親相近水中鷗)
절로 갔다 절로 오는 것은 대들보 위의 제비요, 서로 친하고 서로 가까이하는 것은 물 위의 갈매기로다.
노처화지위기국(老妻畵紙爲碁局), 치자고침작조구(稚子敲針作釣鉤)
늙은 아내는 종이에 줄 그어 바둑판을 만들고, 어린 아들은 바늘 두들겨 낚싯바늘을 만든다.
다병소수유약물(多病所須唯藥物), 미구차외갱하구(微軀此外更何求)
병약한 몸에 필요한 것은 그저 약물뿐, 하찮은 이내 몸이 이 밖에 또 무엇을 바라겠는가.
사람은 누구나 행복을 추구한다. 어떠한 행복을 찾을 것인가는 각자의 몫이다.
시성 두보는 시의 마지막 구절에서 ‘몸에 병이 많으니 약 하나만 있으면 족하다’ 했는데, 나는 아내가 차려주는 술상에 지난 시절 추억을 되새기며 자연과 함께 조용히 늙어간다면 그것도 충분히 행복하다고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청강(靑江)이라는 별칭에 걸맞게 최소한의 멋과 소박한 여유를 간직한 채 흐르는 강물처럼 여여(如如)하게 그렇게 남은 인생을 살고 싶다.
※ 충북 청주 출생, 금강불교대 수료, ≪상상의 힘≫ 수필부문 신인상(2022), jhj43211@naver.com
먼 길을 돌아 처음으로
이 경 숙*
오늘 아침 뉴스를 읽다가 내 눈을 의심하는 기사를 보았다, 초등학교 입학하면 으레 하던 받아쓰기가 아이들의 정서적 학대라고 학부모들이 민원을 제기했다는 뉴스였다. 일기 쓰기도 같은 맥락으로 여긴다고 하니 시대가 아무리 변했다고 한들 이런 이해 할 수 없는 뉴스를 접하는 날이 온단 말인가. 요즘 아이들은 조기교육으로 한글 정도는 모르고 입학하는 아이들은 없을 테지만 그래도 교육이라는 것은 절차가 있는 법인데 한글을 제대로 배우지도 않고, 일기를 쓰며 배우는 문장력과 마음의 성장은 어디서 배우는 것인지 어이없는 기사에 할 말조차 잃게 했다. 어른이 되어도 내 가슴에 남아있는 첫 문장은 언제나 “영희야 안녕! 철수야 안녕”이었는데 말이다. 공부를 잘하든 못하든 상관없이 글씨를 똑바로 잘 써야 한다고 배운 우리 세대를 요즘 세대들은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한자씩 손으로 써 내려가는 글씨에 얼마나 많은 의미와 철학이 있는지 모르는 일부 학부모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내 마음을 스스로 위로했다. 지금도 원고지에다 육필로 글을 쓴다는 노 작가는 오늘 이 기사에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나 또한 편리하다는 이유로 컴퓨터로 글을 쓰지만 난 늘 마지막에 노트에다 내가 쓴 글을 필사해본다. 습작 시절 수없이 필사하던 명문장들을 생각하면서 내가 쓴 글들을 다시 써 보노라면 컴퓨터에서 놓친 단어나 문맥들이 새롭게 잠을 깨 일어난다. 그것은 아마도 내가 받은 아날로그식 교육 방법에서만이 깨달을 수 있는 또 다른 숨어있는 무의식중의 하나인지도 모를 일이다. 난 글씨를 잘 쓰는 사람은 다시 보인다. 우연히 만난 사람이라 해도 멋들어지게 쓴 시원한 글씨체를 보면 왠지 그 사람의 인품이 그러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요즘 나는 글씨를 새로 배운다. 캘리그라피이다. 글씨로만 표현하는 서예와는 달리 그림이나 도안으로 멋을 내어 내가 가진 생각들을 표현하는 방식이 마음에 들어 즐거운 취미가 되었다. 평생 바른 글씨만을 써오던 습관이 틀을 깨어 멋들어지게 글씨를 써야 하는 훈련을 언제나 방해하지만, 붓이 주는 부드러움과 먹의 번짐으로 글자 하나를 완성해 내는 시간은 모든 잡념을 잊게 해준다. 내용 또한 예쁘고 교훈적인 글귀들을 선정해서 쓰다 보니 더불어 마음수련도 된다. 같은 작품도 쓰는 사람에 따라 다른 느낌으로 변하는 글씨를 보면서 글씨는 그 사람의 마음과 성품을 닮는다고 했던 말이 실감이 난다. 60여 년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가 남긴 일기장을 보면 글씨체가 어딘가 나와 많이 닮았다.
캘리그라피를 공부하면서 필적 전문가가 쓴 책을 흥미롭게 읽은 적이 있는데 글씨는 뇌의 흔적이며 어릴 적의 성장 환경을 반영한다고 하는 대목이 있었다.
글씨 하나로 돈이 많은 사람이나 범죄자들을 분류할 수 있다고 한다. 글씨체를 바꾸면 운명도 바뀐다고 하는 말에는 공감하기 어려웠는데 요즘 글씨를 많이 쓰다 보니 조금씩 이해가 가기도 한다. 가만히 눈을 감고 하는 명상보다도 글자 하나에 온 정성을 쏟다 보면 자연스레 명상이 되고 잘 써진 글자를 보면 힐링이 되기도 한다. 가끔 뜻대로 되지 않을 때는 짜증도 나지만 그 과정 또한 수련의 시간이 된다. 나에게 애초에 한글을 가르쳐 준 분은 아마도 초등학교 1학년 선생님이셨을 것이다. 그분이 글씨체까지는 선택해 주시지 않았겠지만, 그분을 통해서 나는 자신을 표현하는 기술을 습득하고 성품도 자라고 일기를 쓰며 내면의 감성을 어루만져 표현하는 사람으로 성장했다. 중학교 일학년 담임이셨던 선생님으로 하여 난 외롭고 고독한 유학 생활을 이겨냈다. 일찍 부모님을 떠나 객지에서 공부하는 슬픔과 외로움을 노란색 일기장에 쏟아내면 검사라는 절차로 선생님은 늘 내게 위로와 격려의 글을 일기장 한편에 적어주시곤 했다. 그 한 문장 한 문장들은 그 후에 내가 만난 수많은 은사님의 그 어떤 격려보다도 평생 가슴에 남아 나를 따스하게 만드는 온기가 되었다. 요즘 나는 나만의 캘리그라피 글씨체를 찾는 것이 목표가 되었다. 평생 써 온 글씨체가 있어서 어려움을 주고 있지만 언젠가는 완성되리라는 기대를 하고 연습 중이다. 글씨는 뇌의 흔적이라고 했던 필적 연구가의 말대로라면 더 좋은 생각과 명상으로 내면을 가꾸어야만 얻을 수 있는 일이니, 노년에 이보다 더 좋은 수련도 없는 듯하다. 컴퓨터 자판기의 활자에 익숙하고 글씨를 쓸 일이 없는 사람도 성공하여 큰 사람이 되면 어딘가에 가서 방명록에 글귀를 남기는 의식을 치른다. 글자가 틀리지 않았다 하더라도 졸필을 보면 아쉽다. 반면 한글은 물론 한자나 영어 등 유려한 필체를 쓰면서 강의하는 사람을 보면 깊이가 있어 보이고 멋있어 보인다. 이것은 오로지 나의 개인적인 생각일 뿐이긴 하다. 유명한 톨스토이나 베토벤은 악필의 대명사로 꼽힌다. 천재는 악필이라고 글씨 못 쓰는 사람들이 위로하자고 만든 말인 듯하지만 사실 글씨보다는 천재의 영감에 열중하다 보면 글씨를 잘 쓸 시간이 없었으리라. 시대가 아무리 변해도 요즘 서점에 가보면 명문장들을 필사하게끔 나온 책들이 많다. 필사가 단지 글씨를 잘 쓰기 위해서 쓰는 것이 아니듯 손 글씨를 쓰면서 한 획 한 획에 담긴 의미를 깨달아간다는 것을 요즘 아이들을 키우는 젊은 부모들이 알았으면 좋겠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모바일 안부 한 줄도 좋으나 가끔은 누군가가 세월을 거슬러 마음 꾹꾹 눌러 담은 손편지 한 장 보낸다면 오래 가슴에 남을 것이다.
손가락 근육이 아파서 오래 쓸 수 없지만 필사하는 일이야말로 요즘 나의 가장 큰 명상이자 글씨 연습을 통한 내면 바라보기 시간이 되고 있다. 그 옛날 고사리손으로 연필에 침을 묻혀 가며 쓰던 그 시간으로 돌아가서 나를 만나는 시간이 좋다.
※ 충북 보은 출생, 계간 ≪수필춘추≫ 등단, 한국문인협회 회원, ≪상상의 힘≫ 작품상(2009), 한국농촌문학상(2014) 수상, asysook@hanmail.net
엠오이(EM OI)
오 월 석*
오늘은 아침에 평소와 다르게 늑장을 부렸다. 작은아들 밥을 챙겨 먹이고 매번 엘리베이터 앞까지 가서 아들을 배웅한다. 우리 집 현관문을 열면 왼쪽에 창문이 있는데, 가슴 높이의 창틀 가장자리에 테니스공 보관대가 있다. 테니스공 보관대는 나의 작은 발명품이다. 2ℓ 생수병 밑 부분을 높이 3cm 정도로 잘라 접시를 만들었다. 나사 두 개로 그 접시를 창틀에 박아 고정시켜 테니스공 보관대를 만들었다. 투명 플라스틱 그릇에 상대적으로 덩치 큰 연두색 테니스공 두 개가 놓여있다. 우리는 엘리베이터가 1층에서 19층까지 달려오는 순간까지 서로 공을 주고받는다. 그 짬 시간에 아들과의 캐치볼은 스릴이 넘친다. 우리의 캐치볼은 나름의 규칙이 있는데 한 손으로 던지고 한 손으로 받는 것이다. 처음에는 두 손으로 받던 작은아들도 이제는 한 손으로 제법 잘 받는다. 작은아들이 엘리베이터에 타면 나는 구령을 외친다. 차렷! 경례! 그러면 아들은 내게 거수경례하며 ‘태권’ 한다. 그럼 나도 거수경례로 답하며 ‘태권’이라고 복창한다. 우리들의 말을 알아들었는지 엘리베이터가 스르르 문을 닫는다. 고등학교 3학년인 큰아들과도 가끔 캐치볼을 하는데 덩치가 크고 힘이 좋아서 그런지 아들의 공을 받으면 묵직한 느낌이 든다.
오늘은 베트남으로 날아가야 한다. 어젯밤에 출장 갈 짐을 다 챙겨놓았고 공항버스는 오후 1시 정도에 출발할 예정이다. 베트남은 중국과 마찬가지로 6월 초에 수학능력시험을 보고 중순이 되면 방학이 시작되어 학교에 학생들이 없다. 그래서 우리는 출장 일정을 서둘러 5월 말로 잡은 것이다. 먼 길을 가야 하지만 출발 전에 여유가 생기다 보니 평소에는 보이지 않았던 큰아들의 게으름이 보였다. 오전 10시면 해가 중천인데 아들은 아직도 이불과 씨름을 하고 있다. 아들이 일반고가 아닌 특수고를 다녀서 공부에 관심이 없는 것을 알지만 내 눈앞에서 게으름을 피우는 모습을 보자 갑자기 화가 치밀어 올랐다. 나는 평소에 아들에게 쓰지 않던 거친 언어를 사용하고 말았다. 아들에게 거친 말을 뱉고 나니 후회되고, 미안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후련하기도 했다. 여러 가지 감정이 동시에 밀려왔다. 아이들을 건강하게만 키우면 된다는 생각으로 아들 둘을 10여 년간 자유로운 영혼으로 키웠다. 그러나 가끔씩 나의 양육방식에 회의(懷疑)를 느낀다. 공항버스 탈 시간에 맞춰 케리어를 끌고 집을 나서니 큰아들이 엘리베이터까지 나와서 나를 배웅해 주었다. 아버지한테 혼나 짜증 나기도 할 텐데, 스스로 나와서 배웅해 주는 아들이 고맙다. 만약 아들이 나를 배웅해 주지 않았더라면 4박 6일 출장 기간 내내 기분이 안 좋았을 것이다.
공항에 가는 길에 계속 나쁜 일들이 내 심기를 건드렸다. 집에서 공항버스 터미널까지 택시를 타고 가는데 연로하신 택시 기사에게 몇 마디 말을 건넸는데 신이 나신 아저씨는 나와 정치색이 달라서 더불어민주당은 더블로 패줘야 한다고 하시는 거다. 공항버스 기사는 버스를 자가용 몰 듯 고속도로를 휘젓고 다녔다. 의자를 비스듬히 뒤로 젖히고 앉았는데 불안해서 편히 쉴 수가 없었다. 난 불안한 마음에 안전띠가 잘 채워져 있는지 여러 번 체크 했다. 나는 눈을 감고 조용히 생각했다. 버스가 전복되거나 접촉사고가 나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상상했다.
몇 년 전에 뉴스를 시청한 기억이 떠올랐다. 브라질 아마존강에 댐을 짓기 위해 사전 조사를 가던 대기업의 우수한 댐 건설 전문가가 탄 공항버스가 인천의 한 대교 밑으로 떨어져 사망한 사건이 있었다. 다행히 공항버스는 무사히 인천공항 버스정류장에 도착했다. 평소 같았으면 버스에서 내리며 기사님에게 ‘감사합니다’라고 인사하는데 오늘은 그냥 지나쳤다. 오늘 있었던 일련의 사건들을 돌이켜 생각해 보니 사자성어 한 개가 생각났다. 설상가상(雪上加霜)이다.
인천공항에서 항공마일리지 점수가 높은 팀장님 덕분에 아시아나 라운지를 이용할 수 있었다. 인천공항에는 아시아나 라운지가 세 군데나 있다고 한다. 라운지에는 뷔페 음식과 과일 그리고 술까지 갖추어져 있고 모두 무료였다. 우리는 저녁 7시가 되어 비행기에 탑승할 때까지 여유를 부렸다. 해외 출장을 가면 피곤하기도 하지만 가장 큰 장점은 비행기 탑승을 기다리거나 비행기 좌석에서 여유 있게 독서를 즐길 수 있다는 것이다. 이번에 읽은 책은 “불편해야 건강하다”라는 책이었는데, 일본인 비뇨기과 의사인 ‘아오키 아키라’ 박사가 건강의 비결에 관해 쓴 것이었다. 몸을 불편하게 많이 움직이고 중력을 느끼며 살며 지구의 시간에 맞춰 해가 뜨면 일어나고 해가 지면 취침해야 한다는 너무도 상식적인 이야기이다. 물론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상식이지만 건강 관리하는 법을 자신의 경험을 통해 간단명료하게 정리해 놓아서 이해하기 쉬웠다. 서점에서 인기 있는 베스트셀러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자신의 이야기가 아닌 위대한 성인이나 학식 있는 박사들의 이론을 잘 정리해 놓은 책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한 책의 내용이 옳은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자신의 경험이 없기에 감동이 없다. 비행기가 하늘을 비행하는 동안 책을 읽고, 졸고, 먹고를 반복했다.
비행기는 어느덧 어두운 밤 10시경 베트남 하노이 노이바이 공항에 도착했다. 총 5시간의 비행이었다. 비행기가 착륙한 시각은 베트남시간으로 저녁 10시 10분이었다. 한국시간으로는 12시 10분이었다. 집에서 출발해서 총 13시간 만에 목적지에 도착한 것이다. 긴 여정 동안 피곤함이 온몸에 켜켜이 쌓였다. 내일 아침 6시에 다른 지역으로 이동해야 해서 서둘러 잤다. 잘 수 있는 시간은 겨우 5시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이번 베트남 출장 일정은 첫날부터 너무 빠듯했다.
5월 23일 새벽 6시에 짐을 챙겨 나가니 일행이 아무도 없었다. 황급히 팀장님 방을 두드려 깨웠는데 아직 약속 시간이 안 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당황스러운 나머지 로비로 내려가 프론트 데스크 직원에게 물으니 지금 시각이 새벽 4시라는 것이다. 어제 시간을 베트남시간으로 설정해 놓지 않은 것이 문제였다. 다시 종업원에게 카드키를 받아서 방에 들어가 자려고 했는데 잠이 오지 않았다. 그리고 방금, 나의 어리석은 행동 때문에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옛 속담에 “머리가 나쁘면 손발이 고생한다”는데 오늘 내 모습이 바로 그 모습이었다. 유트브를 시청하며 시간을 보내고, 핸드폰 시계를 베트남시간으로 맞춘 뒤 6시에 로비에 나가니 모두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국어교육원 김 대표님, 직원인 아영 씨, 황 팀장님 모두 로비에 계셨다. 프랑스 포드사에서 만든 10인승 리무진 차를 타니 온몸이 나른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운전기사와 조수석이 앞에 있고 2열에 2좌석, 3열에 2좌석, 4열에는 세 명이 나란히 앉을 수 있도록 자리가 배치되어 있었다. 차량이 높아서 초등학교 저학년은 서서 있어도 머리가 천장에 닿지 않을 것 같았다. 난 2열 오른쪽에 자리를 잡았다. 새벽부터 코미디 한 편을 찍고 나니 피곤했던 모양이다. 우리의 출발지는 베트남의 수도 하노이의 한인타운의 한 호텔이었다. 오늘 우리가 갈 곳은 응헤안성(NGHE AN)의 짠꾸엉(THANH CHUONG)현이었다. 베트남의 행정구역은 5개 직할시(하노이, 호치민, 하이퐁, 카트, 다낭)와 58개의 성(省)으로 이루어져 있다. 응헤안성(NGHE AN)은 인구가 350만 명 정도 된다. 베트남의 58개 성(省)에서 면적이 가장 넓은 곳이다. 응헤안성의 면적은 한국의 1/6 정도로 16,487㎢라고 한다. 수도 하노이에서 서남쪽으로 400km 이상을 달려가야 하는 거리에 있다. 시간은 대략 6시간 정도 소요된다고 한다. 아침 식사는 큰 길가에 넓은 홀이 마련된 생선쌀국수집에서 먹었다. 스테인리스 테이블과 등받이가 없는 의자가 100개는 있는 듯했다. 스테인리스 탁자는 100년을 사용해도 될 것처럼 튼튼해 보였다. 테이블의 가장자리에는 깔라만시, 소금, 핫소스 그리고 나무젓가락이 통에 꽂혀있었다.
깔라만시는 금귤과 만다린 오렌지의 교배종이라고 한다. 맛이 시콤해서 먹으면 인상을 찡그리지 않을 수 없다. 깔라만시는 베트남의 국민 과일로 쌀국수에 즙을 짜 넣어서 먹는다. 처음으로 생선쌀국수를 먹어보았는데 말린 물고기에서 나는 냄새가 마치 우리나라 굴비같이 구린내가 났다. 굴비보다 쩐내가 심해서 웬만한 사람은 비위가 상해서 먹기 어려울 것이다. 나는 배가 고파서 쌀국수를 다 먹고 국물까지 다 마셨다. 그런데 비위가 약한 김 대표님과 베트남 현지인인 아영 씨도 상당량의 쌀국수를 남겼다. 베트남 사람들은 외식하는 것을 선호한다고 한다. 그래서 이른 아침에 시골의 한적한 식당에 어른, 아이들, 젊은이들 할 것 없이 쌀국수를 먹는 사람이 많았다. 식당에서 종업원을 부를 때 ‘엠오이(EM OI)’라고 한다. 보통 자기보다 어린 남동생이나 여동생을 ‘엠오이’라고 부르는데, 본래 여동생은 엠가이(EM GAI), 남동생을 엠자이(EM TRAI)라고 부른다고 한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남녀를 구분하지 않고 나이가 어른 동생을 부르는 호칭이 ‘엠오이(EM OI)’라고 한다. 우리가 유학생 유치를 위해 응헤안성으로 가고 있는 포드차에도 통역을 담당하는 한국어교육원 직원인 엠오이가(아영 씨) 동행했다.
이번 출장 일정은 아영 씨의 인맥을 활용하여 그녀의 고향에 있는 고등학교를 방문하는 것이다. 아영 씨는 베트남 사람으로 키가 150cm로 비교적 작은 편이고 피부가 하얗다. 검은 머리는 40cm 정도 길렀는데 대부분 머리끈으로 묶고 다닌다. 하얀 피부가 햇볕에 그을릴까 항상 신경을 쓰는 아직 결혼하지 않은 아가씨다. 수년 전에 서울에서 2년간 어학연수를 해서 한국어 구사 능력이 좋다. 농담도 잘하고 성격이 활발하여 이야기를 많이 하는 편으로 지루한 여정에 꼭 필요한 사람이다. 베트남의 대표적인 친한파라고 생각될 정도로 한국에 대해 호감을 가지고 있다.
아영 씨를 보면 애잔한 마음이 든다. 8년 전에 어머니께서 돌아가셨고, 지금까지 아버지께서는 홀로 살고 계신다고 한다. 건너건너 이야기를 들어보니 아영 씨의 아버지는 젊어서 경찰로 근무했는데 자식을 다섯 명(딸 셋, 아들, 딸) 낳았다고 한다. 공무원이 딸을 셋 낳고 네 번째로 아들을 낳는 바람에 직장에서 파면되었다고 한다. 중국과 마찬가지로 베트남도 산아제한을 했었다고 한다. 경찰에서 파면된 이후에 또 벌금을 내고 막내딸인 아영을 낳은 것이다. 5남매를 키웠을 두 부부의 고생이 눈에 선하게 보이는 듯하다. 막내딸이 하노이에서 유학생을 모집하여 교육시켜 한국으로 보내는 일을 하는데, 당신이 도움을 주고자 나선 것이다. 고향인 짠꾸엉(THANH CHUONG)현에서 성실히 사셔서 그런지 인맥 관계가 두텁고 넓은 것 같았다. 아영 씨의 아버지께서 발 벗고 나서서 3개 고등학교 학교장과 연락이 닿았다. 우리는 이틀에 걸쳐 순차적으로 3개의 학교를 찾아가 학교 홍보활동을 했다. 우리의 홍보를 학생들 모두 집중해서 들어주었다. 베트남에는 한국에 유학하고 싶어 하는 학생이 많지만, 경제적인 형편으로 유학을 포기하는 학생들이 많다.
오후 5시경 학교 방문을 모두 마치고 아영 씨 아버지께서 혼자 사시는 고향집에 들렀다. 집에 들어서니 거실 중앙 벽면에 탁자가 놓여있었고 탁자 위에는 커다란 황금색 향로가 놓여 있었다. 향로에는 향이 타고 남은 하얀 향재가 마치 여인의 긴 머리카락처럼 늘어져 있었다. 향로 뒤편 벽에는 조상님들의 영정사진이 걸려 있었다. 아영 씨의 할아버지, 할머니, 어머니 사진이 걸려 있었다. 아영 씨가 향에 불을 붙여 향로에 꽂고 목례하여, 우리도 따라서 목례로 예의를 갖추었다. 아영 씨네 식구들은 매일 고인들께 향을 피우며 예를 갖추는 모양이다. 우리보다 유교 문화가 더 잘 보존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버지가 사시는 고향 집 마당에는 바나나와 망고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호텔로 가는 도중에 같은 마을에 사는 고종사촌 오빠 집에 들리자고 하여 따라갔다. 고종사촌 오빠는 20년 전에 한국의 부산에서 6년간 건설노동자로 일하여 번 돈으로 베트남 고향에 돌아와 벼 담는 포대를(1톤, 700kg, 500kg) 만드는 공장을 짓고 잘 운영하여 최근에 3층짜리 근사한 전원주택을 지었다고 한다. 마당에는 외제 차 두 대에 값비싼 오토바이도 몇 대 주차되어 있었다. 아영 씨 오빠는 처음 보는 우리 한국 사람들과 일일이 악수하며 고맙다고 허리를 90도로 숙여 우리에게 공손하게 인사했다. 자기가 한국에서 일해서 번 돈으로 지금 이렇게 잘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우리에게 다음에 오시면 맛있는 저녁을 꼭 대접하고 싶다고 했다. 그에게서 진심이 느껴졌다.
시골 마을 길에 물소가 송아지를 데리고 돌아다니며 곳곳에 똥을 싸놓는 바람에 신경 써서 걸어야 했다. 코뚜레도 하지 않은 소가 자기들끼리 무리를 지어 다니는 모습이 내게는 생경하게 느껴졌다. 저녁 6시쯤 시골의 한복판에 호텔이 덩그러니 서 있었고, 호텔 근처는 모두 논과 밭이었다. 체크인을 하고 5층 호텔 방에 들어섰다. 시설이 호텔이라기보다는 여인숙에 가까웠다. 호텔 창문으로 펼쳐진 농촌의 풍경이 나의 눈을 시원하게 가슴은 뻥 뚫리게 했다. 왼쪽에는 끝도 없이 옥수수밭이 펼쳐져 있고, 오른쪽으로는 누런 벼가 익어가는 황금 들판이 보였다. 호텔의 부속시설인 테니스장에서는 윗통을 벗은 남자들이 열심히 테니스 레슨을 받고 있었다. 나도 테니스를 좋아하기는 하지만 37℃가 넘는 날씨에 테니스를 치고 싶지는 않았다.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서 응헤안성에서 가장 큰 빈(VINH)시로 이동했는데 차를 타고 40분을 달렸다. 빈시의 해물 식당은 음식 맛이 제법 훌륭했다. 식당에서 재밌었던 일 한 가지는 식당에서 일하는 20대 초반의 엠오이들이 한국 사람을 처음 보았다고 한다. 이곳은 외국인이 관광하는 도시가 아니었기에 볼 일이 없었던 모양이다. 엠오이 둘이서 우리를 힐끔힐끔 쳐다보고 서로 쳐다보고 웃기를 반복하는 동안 나는 동물원의 원숭이가 된 느낌이었다. 그들이 한국 사람을 좋게 봐주는 것 같아 기분은 좋았다.
셋째 날도 새벽 6시부터 일어나 강행군을 했다. 오전 8시에 고등학교 한 군데를 들러서 교장 선생님을 만나 면담했다. 대부분의 학교가 비슷하게 지어졌는데 아마도 같은 설계도를 쓴 것 같다. 건물 벽은 연한 노란색으로 칠해져 있는데 이 색깔도 모든 학교가 동일한 것 같았다. 공공기관을 비슷하게 짓는 것이 사회주의 국가들의 특징인가? 예전에 방문했던 중국의 고등학교에서도 비슷한 인상을 받았었다. 우리가 방문한 고등학교는 대부분 운동장은 따로 없었고 보도블록이 깔린 약 300평 정도 되는 광장을 건물 여러 개가 둘러싸고 있는 형태였다. 넓은 광장 곳곳에는 키가 크고 덩치가 큰 나무들이 주황색, 보라색 꽃을 피우며 우뚝 서 있었다. 나무는 모두 활엽수로 잎이 키고 넓어 더운 날씨에 아이들에게 그늘 쉼터를 만들어 주고 있었다. 교실마다 창문을 활짝 열어놓고 빽빽이 앉아서 공부하고 있는 학생들이 보였다. 베트남의 초·중·고등학교에서 쉬는 시간과 수업 시간을 알리는 방식이 재미있었다.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는 교과서에 “학교 종이 땡땡땡”이라는 글이 교과서에 실렸었다. 그리고 시골의 학교에서는 동(銅)으로 만든 종을 학교 아저씨가 쳤었다. 그런데 베트남은 학교에서 종 대신에 북을 친다. 베트남은 “학교 북이 둥둥둥”이라고 하면 맞을 것 같다. 학교 정문을 지키는 아저씨가 손목시계를 주시하며 수업 시작을 알릴 때는 여섯 번, 쉬는 시간을 알릴 때는 북을 세 번 친다. 내가 북소리를 듣고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유가 있는 것 같았다. 수업 시간에는 비교적 조용하니 세 번만 쳐도 쉽게 알아듣는데, 쉬는 시간에 아이들이 시끄럽게 떠들어 주위가 산만하니 여섯 번을 치는 것 같았다. 혹시 다른 의미가 있을 수도 있지만 내 생각이 맞을 것이라 확신한다. 오늘은 렌터카 기사님이 어제 보다 좀 서둘러 움직이려는 느낌을 받았다. 점심 식사 후 바로 고등학교 한 군데를 더 들리고 오늘의 목적지인 기선(KY SON)현으로 오후 3시경에 출발했다. 아영씨의 고향인 짠꾸엉(THANH CHUONG)현에서 기선(KY SON)현까지는 200km 떨어져 있는데 도로 상태가 좋지 않아 시간을 가늠하기 어려웠다. 우리가 있는 곳에서 북서쪽으로 6시간 이상을 가야 한다. 베트남에 여섯 차례 이상 왔지만, 이번 출장처럼 시골로 유학생 유치를 하러 간 경험은 없다. 조선시대 죄를 지은 선비가 유배 가는 느낌이 이런 것일까?
기선현으로 가면 갈수록 험한 산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었다. 오가는 길은 외길이었다. 길을 따라 동네가 왼쪽 오른쪽으로 죽 늘어서 있고 가장 높은 건물이 3층이었다. 기선현에는 아영 씨의 오빠가 직장생활을 하고 있다. 경찰인 아버지를 직장에서 짤리게 만든 그 귀한 아들이 아이러니하게도 기선현 국경에서 경찰로 근무하고 있었다. 나이가 30대 초반인 아영 씨의 오빠는 성적이 우수하여 경찰대학교를 졸업한 뒤 베트남과 라오스의 국경이 맞닿은 곳인 기선현 오지(奧地)에서 살고 있다. 아영 씨의 오빠가 오지에서 근무하는 이유가 진급을 하기 위함인지 ‘베트남 국경은 내가 지킨다’는 소신 때문인지는 식구들도 모른다고 한다. 혹시 아영 씨 오빠는 시골길 풍경을 감상하며 드라이브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은 아닐까? 내가 보기에 베트남의 시골 풍경은 정말 근사하다. 또 나의 어린 시절을 농촌을 뛰어다니며 놀던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베트남의 농촌에는 봄, 여름, 가을이 함께 존재하는 것 같다. 방금 못자리를 하는 논이 있고, 벼가 60cm 정도 키가 자란 논도 있고, 또 벼가 고개를 숙여 추수하는 논이 있다. 벼농사를 짓는데 1년 3모작이 가능한 선택받은 땅에서 사는 사람들이다. 들판에는 추수하는 농부들과 볏짚을 실어나르는 소달구지가 있고 코뚜레도 줄도 없는 누렁소, 가죽이 회색인 물소 떼가 유유히 걸어 다니며 풀을 뜯는다. 이앙기로 볏모를 심는 곳이 있고 손모를 심는 논이 있으며, 콤바인으로 수확하는 곳이 있고 낫으로 베는 곳도 있다. 베트남 농촌은 20세기와 21세기가 공존하는 곳이었다. 큰 소와 송아지들이 뛰어다니는 것을 볼 수 없었다. 이 소들은 천방지축 뛰어다니는 한국의 송아지와 종(種)이 다른 소인가 보다. 베트남에서는 추수하여 탈곡한 뒤 볏짚을 도로에 일부러 깔아서 말린다. 자동차가 볏짚을 갈리고 지나가면 볏짚 줄기가 터져 납작해지면 더 쉽게 건초로 만들 수 있는 것 같다. 농촌의 넓은 마당에 수확한 누런 벼 알곡을 말리는 것을 보면 지금이 가을이라 착각하게 된다. 기선현으로 가는 도로는 오로지 한 길이며 산의 중턱을 깎아서 도로를 만들었는데 그 길이 대부분 고불고불 굽어진 길이었다. 우리는 낮에 창밖에 시골 풍경을 감상하며 재밌었다. 계곡에 흐르는 엄청난 양의 물을 감상하며 그 아름다운 풍경에 감탄했다. 하지만 문제는 해가 떨어지고 날이 어두워지면서 발생했다. 오늘 오후에 렌터카 기사가 일찍 서두르려 했던 이유를 알았다. 워낙 시골이라서 가로등도 없는데 자동차의 하향등이 고장 난 것이다. 기사는 그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 우리에게 이야기하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이미 너무 많이 왔고 자동차 서비스센터도 없었다. 편도 1차로 도로는 산 중턱을 깎아 만들어 매우 좁았고, 구불구불했다. 오른쪽은 낭떠러지에 깊은 계곡물이 흐르고 있었다. 하향등이 켜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안 순간부터 몸은 피곤한데 도저히 잠을 잘 수 없었다. 반대 차선에서는 우리 쪽을 향해 달려오는 12톤 이상 되는 대형트럭이 자주 등장했다. 라오스에서 국경을 통과하여 농산물을 싣고 베트남으로 넘어오는 차량이었다. 우리 차량이 도로의 차선을 보려면 상향등을 켜야 하는데 상향등을 켜면 반대쪽 차량이 상향등을 깜빡깜빡 비추며 위협했다. 어떤 차들은 경적을 울리며 난리를 친다. 우리가 상향등을 켜면 상대편은 눈이 부셔서 앞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반대쪽에서 차량이 나타나면 우리 쪽 기사는 상향등을 끄고 어두운 도로에서 감각적으로 운전해야 했다. 만약에 대형트럭이 굽은 길에서 커브를 돌다가 적재함의 뒷부분으로 우리 차를 살짝만 부딪쳐도 우리는 낭떠러지로 곤두박질 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런 아찔한 상황이 칠흑같이 어두운 베트남 변방에서 여러 번 연출되었다. 베트남 출장을 오기 며칠 전에 아들들을 데리고 영화관에 가서 ‘루이스 리터리어’ 감독이 연출한《분노의 질주(라이드 오어 다이)》를 보았었는데 오늘 내가 베트남에서 후속편을 찍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우리 기사의 운전에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손에 땀을 쥐며 절벽 길을 2시간가량 이동하여 결국 목적지에 도착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니 온몸에 힘이 쭉 빠졌다. 아영 씨 오빠는 2시간 넘게 식당에서 친구들과 우리를 기다렸다고 한다. 밥과 토종닭을 대충 먹고서 숙소에 가서 체크 인을 했는데 시골 여관이었다. 우리는 무거운 캐리어를 경사도가 높은 계단으로 들고 올라가야 했고 객실 내 시설은 가관이었다. 침대 위 천장에는 중국영화에서나 본 듯한 하늘거리는 흰 모기장이 천장에서 침대까지 늘어져 있었다. 다행히 모기 때문에 잠을 깨지는 않을 것 같았다. 어디선가 개구리 소리 비슷한 울음소리가 났는데 알고 보니 베트남에 많이 산다는 도마뱀(하우스케도마뱀)이었다. 도마뱀이 방 안에 있다는 게 꽤 낯설기는 하지만, 내 피곤한 몸에 쏟아지는 잠을 막을 수 없었다. 내 몸은 이미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응헤안성 기선현 시골 여관에서 자고 난 다음 날도 새벽 6시부터 움직였다. 다행히 잠을 푹 자서 컨디션이 괜찮아졌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쌀국수로 아침을 해결했다. 시골의 쌀국수 가격은 한국 돈 2천 원 정도 한다. 베트남 사람들이 체격이 작아서 먹는 양이 적은 것 같다. 나는 쌀국수 한 그릇을 먹으면 포만감이 없어 항상 부족한 느낌이다.
아침 8시에 기선(KY SON)고등학교를 방문했다. 건물이 지어진 지 3년이 채 안 되어 깨끗했다. 하노이시의 한 대기업에서 건물을 지어 기증했다고 한다. 기선현은 라오스에서 불과 25km 떨어진 국경 지역이어서 군인과 경찰 가족이 많다고 한다. 고등학교 영재반 2개 학급에 들어가 설명회를 했는데 이곳에서 ‘유학생 유치’라는 말보다는 ‘봉사활동’이라는 말이 더 잘 어울릴 것 같았다. 아영 씨 오빠가 소개해준 두 군데 고등학교 모두 경제 형편으로 볼 때 한국으로 유학 가기는 힘들 것 같았다.
학교에서 일을 마치고 정문을 막 나서는데 북소리 ‘둥둥둥’ 울렸다. 오전 10시경 하노이를 향한 긴 여정을 시작했다. 렌트카 기사는 오늘도 상향등을 고칠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상가들이 많이 모여 있는 큰 현(縣) 소재지를 모두 지나쳤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들린 고등학교에서는 교정에서 선생님들 여덟 명이 배구를 하고 있었다. 38℃를 넘나드는 더위에 그것도 땡볕에서 배구를 하고 싶을까? 학교 광장의 큰 나무에서 떨어진 꽃가루를 모래 삼아 서너 살은 되어 보이는 두 남매가 소꿉장난을 하는 모습이 행복해 보였다. 어젯밤에 짠꾸엉현에서 기선현에 갈 때는 어두워서 보지 못했는데 오늘 ‘뿌맛국립공원’을 지나다 보니 기이한 모양의 나무가 빼곡히 서 있었다. 나무높이가 족히 50m는 되어 보였다. 도로에서 숲속으로 50m 안쪽을 쳐다보면 수풀이 서로 엉키고 우거져 컴컴하여 오싹한 느낌이 들었다. 정글 속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산악지대를 벗어나 시골 풍경 감상하다 보니 끝없이 펼쳐진 평원이 나타났고 우린 계속 동북쪽을 향해 달렸다. 시골길을 가는 중에 야자열매를 사서 음료수로 마시기도 하고 길거리에서 파는 참외도 사 먹었다. 고속도로 중간중간 쉬면서 여정을 계속했고 휘황찬란한 네온사인이 보였다. 어둑어둑한 저녁 8시쯤 하노이 숙소에 도착했다. 기선현에서 하노이까지 꼬박 10시간이 걸렸다. 라이트를 끝까지 고치지 않은 기사가 얄밉기도 했지만, 무사히 도착하여 고마웠다.
베트남은 한국과 악연이 있었다. 1965년에서 1973년까지 사이공에 본부를 둔 주월 한국사령부에 투입된 군인이 55,000명이나 된다. 내 작은외삼촌도 베트남전에 유탄발사기 병으로 참전하셨었는데 조카들에게 베트남에서의 전쟁 이야기를 단 한마디도 하지 않으셨다. 전쟁의 참상을 굳이 조카들에게 이야기하고 싶지 않으신 모양이었다. 외삼촌은 3년 전쯤 고엽제 후유증으로 생긴 폐암으로 운명하셨고 대전 현충원 국립묘지에서 영면하셨다.
베트남 전쟁이 끝나고 50년이 지난 현재에는 한국을 대표하는 대기업인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LG일렉트로닉스, 롯데그룹 등이 베트남에 진출하여 양국이 같이 발전하는 상생의 관계를 맺고 있다. 한국의 기업은 베트남의 젊고 싼 노동력을 활용하여 제품을 생산하고, 베트남의 젊은이에게는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일자리가 생긴 것이다. 현재 한국 인구의 평균나이가 45세, 베트남 인구의 평균나이는 28세라고 한다.
베트남 수도의 큰 도로를 꽉 채운 오토바이의 행렬을 보면 문득 두려운 마음이 든다. 대부분의 중·고등학교 학생들까지도 오토바이를 운전할 수 있다. 베트남 경제는 오토바이의 물결처럼 출렁이며 생동감 있게 움직이는 것 같다. 남자 오토바이 기사의 허리를 뒷자리에서 감싸 안고 타는 젊은 여성들의 대담한 모습이 놀랍다. 베트남은 유교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아 가족 간의 유대관계도 좋고 조상님들도 잘 모시면서도 남을 의식하지 않고 실용주의 노선을 걷고 있다는 생각을 여러 번 했다. 우리 학교에 유학을 온 학부 베트남 학생들은 모두 내가 ‘엠오이’라 할 수 있다. 나보다 나이 어린 동생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을 상담해 보면 99%의 학생이 공부하면서 묵묵히 아르바이트 하여 스스로 학비와 생활비를 감당한다. 그리고 항상 순수한 미소를 보여준다. 간혹 나와 웃으며 상담했던 학생 중에 학교를 이탈하여 불법체류를 하기도 한다. 나는 당황스러웠지만, 분명히 그들에게 피할 수 없는 사정이 있다고 생각한다. 원하든 원치 않든 임신하여 학업을 포기하기도 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며 학교에 다니는 학생도 있다. 내가 맡은 일은 유학생들을 잘 관리하여 전공 공부를 잘 배워 졸업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다. 나는 유학생들을 예비 불법체류자라 생각하여 삐딱한 시선으로 보지 않는다. 내가 할 수 있는 범위에서 최선을 다해 도와주고 싶다. 베트남 학생들은 자신의 환경을 탓하지 않고 열심히 사는 모습이 너무 기특하고 대견하기 때문이다. 나는 중국 베이징에 유학 가서 1999년 8월 23일부터 2000년 8월 17일까지 1주일 모자라는 1년 동안 모든 유학경비를 시골에서 농사지으시는 부모님에 의지했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부모님께 죄송하고 감사하다. 물론 인력이 넘쳐나는 중국에서 한국 유학생인 내가 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 장소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외국인 유학생에게 시간제 취업을 허가해 주지도 않았다.
1980년대 중국의 지도자 덩샤오핑(鄧小平)이 프랑스에서 유학할 때 누구도 150cm의 키 작은 유학생이 중국을 세계 G2 경제대국으로 만드는데 초석(楚石)을 다질 인물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또 다른 베트남 인물이 있다. 베트남의 응우옌꿍(NGUYEN SINH CUNG)은 베트남에서 초등학교 교사를 하다가 그만두고 프랑스와 아프리카의 여러 도시와 런던, 뉴욕을 돌아다니면서 선원, 기자, 노동자, 영업사원, 정원사, 웨이터, 댄서, 사진사 등을 수많은 직업에 종사하며 해외에서 8년간 지냈다. 그는 영어, 스페인어, 독일어, 중국어와 러시아어도 구사했다고 한다. 그는 1945년 8월 공식 석상에 나서기까지 160개의 가명(假名)을 썼다고 한다. 그가 바로 베트남의 민족 해방을 위해 온몸을 바친 ‘호치민’이다. 지금도 베트남의 공공기관과 학교에 국부(國父)인 호치민의 사진이 걸려 있다. 2023년 5월 1일에 베트남은 전 세계에 베트남 인구가 1억 명이 되었다고 공표하였다. 한 나라의 인구수는 국력과 상관관계가 있다. 세계의 많은 선진국이 베트남의 인적자원과 물적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우리 학교에 다니고 있는 베트남 유학생 중에 중국의 ‘덩샤오핑’과 베트남의 ‘호치민’ 같은 인물이 나올 수도 있다. 이번 4박 6일간의 출장을 다녀온 뒤 집에 들어가자마자 쓰러져 3시간 이상을 내리 잤다.
베트남 오지 출장에서 내 어린 시절 농촌 생활의 추억을 곱씹어 보았고, 아영 씨 가족들의 끈끈한 정(情)을 느낄 수 있는 따뜻한 시간이었다. 베트남은 세계 무대에서 눈부시게 발전하고 있으며, 반도체에 쓰이는 희토류, 지하 광물자원, 목재 등도 풍부하다. 베트남의 성장을 견인할 우리 학교 베트남 ‘엠오이’들의 활약을 기대해 본다. 나는 그들의 어깨를 토닥여주고 뒤에서 등을 밀어주고자 한다.
※ 충남 공주 출생, ≪상상의 힘≫(2012) 수필부문 신인상, 한국농촌문학상(2014) 수상, 수필집 형사 남궁(2017), moon5865@hanbat.ac.kr
가족의 의미
김 현 주*
여기저기 봄꽃이 꽃망울을 터뜨리며 주변이 화사해져 가는 어느 날, 남동생한테서 전화가 왔다.
“누나 시간 나면 사무실에 잠깐 들러 주세요”
오 남매의 맏이인 나였지만 동생들과는 일 년에 몇 번 집안의 대소사나 명절에 보는 게 고작이었다. 다들 각자 사는 일에 바쁘다 보니, 형제지간 남매 사이도 자랄 때와는 다르게 뜨악한 편이다. 무슨 일일까 궁금했지만, 일주일에 한 번씩 세종에 갈 일이 있어 그날 가면서 들르기로 했다.
평소 말수가 별로 없고 바로 아래 동생이지만 서로 어려워하는 편이어서 속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하거나 한 적은 없다. 부동산을 하면서 지내는 동생은 10여 년 전에, 이혼하고 혼자 살고 있다. 외롭고 힘들었겠지만, 누구에게 속 내를 들어내 고충을 얘기하거나 하지 않아 나 또한 모르는 체하며 지낸다.
얼마 전 사무실에 들렀는데 오랜만에 본 동생이 좀 수척해 보여, 어디 아프냐고 물었더니 아니라며 운동을 좀 심하게 해서 그런 것 같다고 했다. 그리고 며칠 후 전화가 온 것이다.
별생각 없이 동생 사무실에 들렀다. 나를 빤히 쳐다보던 동생이 무겁게 말을 꺼냈다.
누나가 예리하다며, 누나 말이 맞다는데 가슴이 덜컹한다.
무슨 일이야?
동생도 울컥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한다.
무슨 일인데??
머뭇거리던 동생은 건강 검진을 했고 결과가 나왔는데 ‘암’이란다.
뭐라구?
믿기지 않는다. 이게 무슨 날벼락 같은 소리란 말인가. 난 목이 메었고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 감정을 추스르고 마음을 가다듬은 동생이 침착하게 이야기한다.
신장암이고 수술하면 괜찮다니까 수술을 할 생각이란다. 보험도 들어 있고 콩팥은 둘이라서 하나 떼어내도 큰 지장 없다니까 감사한 일 아니냐고 애써 태연한 척한다.
며칠 동안 얼마나 심란하고 가슴 조였을까를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나도 복받치는 감정을 추스르고, 요즘 의술이 좋으니까 수술하면 괜찮을 거라고 그래도 미리 발견해 치료할 수 있으니 다행이라고 위로했다.
이 상황에 무슨 말로 위로가 되겠는가? 그저 공허한 울림일 뿐이겠지.
점심때가 되어 둘이 설렁탕 한 그릇을 먹고는 헤어졌다.
평소 별 정 없이 지내던 동생이었지만, 아프다니 가슴이 미어지는 듯했다. 더구나 가족이 함께 지내는 것도 아니고, 혼자 감당해야 할 고통과 외로움을 생각하니 동생이 더없이 안쓰럽고 측은했다.
‘내가 무얼 어떻게 해주어야 하나’를 생각해 보지만, 결국 혼자 감당해야 할 몫이다.
엄마에게는 알리지 않았으면 해서, 여동생에게만 이야기했다.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잘 먹고 수술할 때까지 체력관리를 하는 것이다. 먹을 만한 것들을 사다 주고 건장에 좋다는 걸 챙겨 보지만, 수술을 앞두고 초조할 동생을 생각하니 마음이 짠하고 애처롭다.
‘이래서 나이가 들수록 가족이 있어야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아내와 자식이 곁에 있다면 내가 이토록 마음이 쓰이진 않았을 것이다. 어쩌다 깨어진 가정이 되고 보니 그간 동생은 얼마나 마음 불편하고 부모나 형제들 대하기 힘들었을까 가여운 생각마저 든다. 지나온 10여 년 홀로 아픔을 삭이며 견디느라 병이 날 만도 했겠구나 싶다. 동생은 내게 이제 마음 편해지고 그 어느 때보다 안정된 요즘이었다고 했다.
살만하니까 신이 훼방을 놓는 걸까? 아닐 것이다. 위기는 기회를 내포하고 있다 했다. 그동안 모나고 외 골수로 살아온 시간을 돌아보고 새로 태어나는 기분으로 좀 더 밝고 환하게 사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큰 시련이나 위기를 겪고 나면 세상이 달라 보일 것이다. 이제 과거의 껍질에 갇혀 살지 말고 좋은 사람도 만나고 가족들과도 화기애애하게 지낼 수 있길 기대해 본다.
수술 날짜가 2개월 뒤로 잡혀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지다 보니 힘들 것 같다. 매도 빨리 맞는 게 낫듯이 이왕 수술할 거라면 빨리하는 게 좋은데 병원 사정에 맞추다 보니 기다리는 당사자는 초조하고 마음고생을 할 수밖에 없다.
길고 지루했겠지만 예약한 수술 날이 되어 수술을 받았고, 수술은 잘 되어 항암 치료는 안 해도 되고 잘 회복하기만 하면 된다고 하니 비로소 안심이 된다.
요즘은 다빈치 로봇 수술로 하다 보니, 수술 성공률도 높고 거의 완벽하다 한다.
가족이란 이렇게 힘들 때 서로 한 마음이 되어 염려하고 걱정해 주는 공동체임을 새삼 느낀다. 서로 곁에 있을 때 알뜰히 살피고 챙겨야 함을 일깨워주는 소중한 경험이었다.
동생의 빠른 쾌유를 진심으로 빈다.
N잡러를 아십니까?
어쩌다 보니 하루하루가 빈 날 없이 바쁘게 지나간다.
오는 일 마다하지 않고, 인연을 다해 떠나가는 일 잡지 않으며, 어떤 일이 주어지면 그 일에 충실하면서 사는 게 요즘 나의 일상이다. 직장의 출퇴근처럼 정해진 일을 반복적으로 하기보다는 한시적 일이거나 필요에 의해 단기적 투입을 요 하는 일이 대부분이다. 운전, 여행가이드, 인솔자 역할, 가끔의 강의 등 일단 큰 부담이 없고 내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의 일을 하다 보니 다양한 일을 통한 다채로운 경험과 참여가 삶의 활력이 되고 즐겁다.
‘100세 시대를 준비하는 여러 가지 중 하나가, 꾸준히 할 수 있는 일이 있어야 한다’는 게 평소 나의 지론이다. 먹고 살기 위해 억지로 하기 싫은 일도 해야 하는 생계형 노동이 아니라, 건강한 자신의 인생을 위해 좋아하고 잘하는 일을 계속하는 것이야말로 아름다운 노년을 위한 필수 조건이라 생각한다. 취미생활이나 봉사도 좋고 평소 해보고 싶었지만 하지 못했던 것들을 찾아 배우거나 직접 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생업으로서의 일이 아니라 삶의 일부로서 사회와의 유기적인 관계를 지속 할 수 있는 일은 필요하다.
롤러코스트를 타듯 스케줄이 꼬이지 않게 잘 조율해가며 나름 효율적인 시간 관리로 주어진 일들을 소화해 가는 나날이 내심 재밌고 뿌듯했다. 젊은 날보다 오히려 체력이 좋아져 하루 몇 개의 일을 하고도 전혀 힘들거나 피곤하지 않은 자신이 신기하고 대견하기까지 했다
잘 헤쳐나가던 중 계획이 꼬이는 일이 생겼다. 처음 계획대로 일이 진행되었다면 전혀 문제가 없었을 텐데, 행사에 참여하시는 교수님의 사정으로 행사 일정이 하루 미루어졌다.
아뿔사! 그날은 코로나로 한동안 한국에 나오지 못했던 아들네 가족이 5년 만에 일본에서 오는 날이다. 군산에 사는 딸네 가족과 온 식구가 함께 모여 시간을 보낼 계획을 세우고 미리 준비하고 호텔도 예약한 터였다. 다들 들뜨고 설레는 마음으로 만날 날을 기다리는데 나는 머릿속이 복잡했다. 막상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중간에 끼인 나로선 어찌해야 할지 난감하다. 항공이며 호텔이며 이미 예약한 것을 취소할 수도 없고, 나 하나 때문에 큰 행사를 미룰 순 더더욱 없는 일이었다. 결국 어느 상황도 변경할 수 없다 보니 그 안에서 시간을 조율해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드디어 5년 만의 온 가족 상봉!
두 돌이 지난 손녀딸은 나 말고는 모두 처음 대면이었다. 누구보다 아들만 셋인 딸이 처음 보는 조카를 보고는 너무 감격해했다. 시댁 식구들도 호텔로 와 귀국을 환영해 주었고 오랜만의 만남에 기뻐했다. 모처럼 다 함께 모여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화기애애한 밤을 보냈다.
이튿날 군산에서의 일정을 단축하고 아침 식사 후 행사장인 세종으로 출발했다.
내가 행사장에서 일을 보는 동안 아들네 가족과 남편은 시아버지 묘에 성묘를 다녀왔고, 그사이 행사장의 필요한 일을 처리한 후 뒷마무리를 부탁하고 대전으로 왔다. 오랜만에 한국에 온 아들이 몇 가지 일을 처리해야 했다.
그리고 다음 날은 세종 동생네 집에 들러 친정 식구들과 식사를 하고, 인천의 예식장으로 출발해 결혼식에 참석했다. 4박 5일의 짧은 일정으로 나온 아들 가족은 그렇게 바쁜 일정을 보내고 돌아갔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싶게 정신없는 며칠을 보내고 비가 몹시 내리는 날, 나는 정읍과 고창으로 정원 사전 답사를 다녀왔다. 그리고는 결국 몸살이 났다. 강철 체력이라며 큰소리쳤고, 정말 신기하리만큼 피곤한 줄 모르고 잘 버티던 내가 무너졌다. 다른 때 같으면 감기기가 있을 때 쌍화탕에 종합 감기약 한 알을 먹고 푹 자면 거뜬했는데 이번엔 그렇지 않았다. 긴장과 누적된 피로 때문이었는지 며칠을 헤맸다. 미끄러진 김에 쉬어 간다고 이참에 숨 고르기를 해야겠다 싶어 내가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은 내려놓았다.
‘N잡러’라는 말이 있다.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 유행하는 신조어이다.
두 개 이상의 복수를 뜻하는 N에 직업을 뜻하는 잡(Job), 사람을 뜻하는 러(-er)
가 합쳐진 합성어로 생계유지를 위한 본업 외에 자아실현을 위한 여러 개의 직업을 가진 사람을 의미한다. 또한, 100세 시대를 살아가기 위해 일자리가 최고의 복지라는 말이 생겨났다.
평생직장의 개념이 사라지고 평생 직업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의 변화를 예고하는 이 시대에, 한 가지 직업이 아닌 여러 가지 일을 하며 새로운 직업을 발굴해가는 N잡러는 인생을 즐기며 살아가는 최고의 수단일 수 있다.
나는 직장생활을 하며 반복적이고 루틴한 일에 대해 흥미를 잃었고 재미도 없었다. 창의적이고 변화가 있는 일을 하고 싶었지만, 직장의 한정된 업무로는 불가능했다. 그러다 보니 늘 직장을 그만둘 생각만 했다. ‘기회가 오면 그만두어야지’ 했는데 IMF가 내게 기회가 되어 주었다. 과감하게 사표를 던지고 나왔고, 처음 얼마간은 제도권 밖의 생활에 적응하느라 좌충우돌했고 시행착오도 겪었다.
세월이 많이 흐른 지금, 직장 밖의 다양한 경험들이 인생의 자산이 되었고 크게 이룬 성과는 없었지만, 무슨 일이든 두려움 없이 부딪히고 도전하는 용기가 생겼다. 그리고 N잡러가 되었다. 몇 가지의 일을 하며 직장생활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자유로움과 다양한 일을 통한 나름의 재미가 살맛을 더해준다. 나이가 들어 일을 줄인다기보다는 나이가 들수록 더 많은 일을 하며 활기차게 사는 게 내 인생의 목표이다.
나는 거꾸로 살려 한다. 젊은 날 욕심 없이 느긋하게 살았기에 남들이 쉬어 가는 노년을 바쁘게 나만의 시간으로 채워가며 N잡러로 당당하게 살 것이다.
※ 대전 출생, 수필가, 한밭문학회 사무국장, hl3evs@hanmir.com
꿈을 좇는 인생
우 지 강*
오랜만에 내리는 비다. 불규칙한 기상 이변으로 지역마다 폭우가 내리거나 우박이 쏟아졌다는 뉴스가 전해지긴 했어도, 이곳 대전에는 오래도록 비가 내리지 않았다. 푸석한 땅에 빗방울이 떨어지자 이상야릇한 냄새가 난다. 흙냄새다. 흙냄새는 중국이나 한국이나 별반 다를 게 없다. 마른 땅일수록 그 냄새는 더 강렬하다. 오래도록 햇볕에 달궈진 울분을 토해내는 땅의 몸부림이기에 그리 싫지만은 않다.
한국에 온 지도 어언 십여 년이 흐른다. 아내를 보기 위해 한국에 온 것이, 이리 긴 시간 동안 한국에서 살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학업을 마치고 아내가 중국으로 돌아가고 나도 뒤따라간다는 것이, 코로나가 발목을 잡아 대학원 박사과정 논문을 쓰는 단계까지 흘러왔다. ‘세월이 참 빨리 흐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초등학교를 다니던 딸도 이제 중학교에 재학 중이고, 나도 중년에 접어들었다. 이에 빗소리를 들으며 내가 추구하는, 또는 쫓는 꿈에 대해 생각해 본다.
세월은 쏜살같이 한번 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말을 많이 한다. 그리고 세월은 주자청(朱自清)이 말한 것처럼 ‘살금살금 걷는 것은 살금살금 오는 것’과 같다. 살금살금 다가와 쏜살같이 내빼는 것이 시간이다. 그러기에 인생을 헛되이 보내지 않기 위해서는 추구하는 꿈이 있어야 한다. 꿈을 좇으려면 마음으로 설계하고 그것을 실현해야 한다. 시인의 마음으로, 아름다운 꿈을 그린다. 강자의 마음으로 아름다운 꿈을 좇는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세상 사람들과 함께 꿈을 찾는 기쁨이 있어야 한다.
나도 꿈을 추구하는 기쁨을 종종 느낀다. 나는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중국에 돌아가 가족과 행복한 삶을 사는 꿈을 늘 꾼다. 그리고 사회와 국가에 어떻게 봉사하고 생활할 것인가를 늘 설계한다. 그러나 그 꿈은 어제 꾼 꿈과 내일 꾸는 꿈이 다르다. 꿈은 꿈이기 때문이다.
늘 꿈을 좇는 인생은 고독하다. 꿈을 좇는 길은 결코, 평탄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꿈이 실현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꿈을 좇는 삶은 고단하다. 주위 사람들이 따듯한 시선으로 나를 격려하고 위로해도 이국 생활이 그리 녹록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꿈을 좇는 인생은 행복하다. 내가 꿈과 악수하는 순간 성공의 기쁨, 세상의 축복은 꿈을 좇는 가장 훌륭한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케케묵은 사상의 속박을 버리고 과감하게 새로운 일을 추구하려 노력하고 있다. 그리고 인생을 쉼 없이 새로운 꿈으로 써나가려 한다. 인생의 본질은 바로 꿈을 좇고 이루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허상이나 망상이 아닌 알찬 인생을 써나가기 위해 꾸는 꿈은 아름답다. 그러기에 나는 오늘도 어제 계획했던 꿈을 다시, 그리고 반복해서 써나간다.
흙냄새를 맡으니 문득 고향 생각과 함께 내가 이곳에 존재하는 이유와 살아가야 할 의미를 깨닫게 한다. 단비를 맞는 초목도 비에 감사하겠지만, 오늘의 나를 성찰하게 한 단비에게 고마움을 표해야 할 것 같다.
※ 중국 산둥성(山东省) 지닝시(济宁市) 출생, 산둥경제학원(山东经济学园) 졸업, 한밭대 경제학과 박사과정, niuzhigang@naver.com
호반새
백 경 화*
“휘요~ 쩌러렁~ 쩌러렁~ ”
귀하신 몸 호반새가 대전 금성마을에 나타났다.
마을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낭랑하고 청량한 호반새의 울음소리가 금성마을 앞산에서 또는 뒷산에서 연신 울린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호반새는 마을 커브 도로가 반사경에 몸을 날리며 반사경을 못살게 군다. 탁! 탁! 거울에 비친 자기의 모습을 보고 힘껏 몸을 날려 반사경을 치는데 머리 터질까 걱정이 앞선다. 그런가 하면 강철로 만든 거울의 테두리를 부리로 잡아 물고 뜯는데 이빨이라도 다칠까 걱정이다. 만약에 저 호반새가 다치거나 무슨 불상사를 맞게 된다면 또다시 호반새를 볼 수 없으니 기대하는 희망도 깨질 터, 염려스럽지 않겠는가.
호반새는 3일간을 내내 혼자 와서 거울에 비친 자기와 싸움을 하는데 분에 못이긴 얼굴을 보면 눈빛이 무섭다. 승산이 없는 싸움에 더 약이 오르는지 오늘도 잔뜩 독이 오른 눈으로 거울 테를 물고 몸부림을 쳐댔다.
우는 놈도 속이 있어 운다는데 저놈도 무슨 사연이 있겠지. 몹시 다급한가 보다.
발정이라도 난 것일까? 아니면 거울에 비친 자기를 사랑의 방해꾼으로 알고 내 구역을 접근하지 못하게 쫓아내자는 것일까. 조선 시대에 거울 속에 비친 자기의 예쁜 모습을 보고 남편이 첩을 두고 산다며 질투했다는 얘기가 생각난다.
호반새는 국내에서 드물게 찾아오는 여름 철새로 열대지방에서 살다가 5월 초순에 우리나라에 들어와 9월 하순까지 살다 떠난다고 한다. 온몸이 붉다 하여 불새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부리도 붉은색에 크고 두꺼우며 외모와는 다르게 울음소리는 독특하고 청량하여 매우 아름답게 들린다. 주로 산간 계곡이나 호수 주변의 울창한 숲속에서 생활하며 곤충, 물고기, 가재, 개구리 뱀 등을 먹으며, 먹이는 바위나 나무에다 부딪쳐서 기절시키고 머리 부분부터 먹는다. 둥지는 계곡 주변 숲속의 오래된 나무에 생긴 구멍 또는 딱따구리의 빈 둥지를 찾아 보금자리를 튼다. 6월 중순부터 산란하여 알을 4~5개 낳아 19~20일간 포란 한다. 좀처럼 보기 어려운 여름 철새로 세계자연 보전 연맹(IUCN)이 정한 멸종위기 등급 관심 대상 동물이다.
이런 호반새는 새끼들이 어느 정도 커서 이소할 때쯤이 되면 큰 뱀을 잡아다가 새끼들에게 영양 보충을 시켜준다. 기다란 뱀을 물고 온 호반새는 집 앞 나뭇가지 위에 앉는다. 뱀은 온갖 힘을 다해서 호반새와 결투한다. 긴 몸으로 호반새를 돌돌 말아 꼼짝을 못 하게 하는가 하면 호반새는 용케도 온몸을 돌려 뱀을 풀어 놓는다. 독이 오른 호반새는 뱀을 나무에다 패대기를 친다. 호반새에게 패대기를 당한 뱀은 기절하기를 여러 번 끝에 축 늘어지고, 결국은 호반새들의 풍성한 먹이가 되고 만다. 사진가들은 호반새의 그런 광경을 보기 위해 소리 소문을 듣고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다.
대전은 오륙 년 전에 식장산에 나타나고 이번이 처음이다. 아직은 둥지를 보지 못했지만, 오늘 보여준 모습만으로도 너무 행복하다. 그러나 기대한다. 호반새가 무사히 둥지를 틀고 다복하고 가정을 이루는 날이 빨리 오기를.
원앙새
한 달 전인가 뿌리공원 호숫가를 걷고 있는데 건너편 호숫가에 무슨 물체가 희미하게 떠다니는 것을 보았다. 무엇일까? 요즘 처음 보는 물새들이 오던데 새일까? 갖고 다니는 300 미리 망원렌즈로 사진을 찍어 확대해 보았다. 이게 어찌 된 일일까? 울긋불긋 곱게 옷을 입은 예쁜 원앙새들이 물가에서 한가롭게 놀고 있는 그림 같은 풍경이 펼쳐있다. 깜짝 놀랐다. 대전에 그것도 내가 자주 걷는 산책길에 귀한 원앙새가 있다니, 언제부터 살았을까?
새로운 친구를 만나니 잔잔했던 가슴에 파동이 온다. 오늘은 망원렌즈가 없으니 촬영은 내일로 미루고 집에 오는데 기쁜 마음에 발걸음도 가볍다. 밤에는 잠도 쉽게 오지 않았다.
다음 날, 500 미리 망원렌즈와 삼각대를 챙겨 짊어지고 그곳에 갔다. 버스에서 내려 한 30여 분은 걸어야 어제 보았던 원앙새 있는 곳에 간다. 삼각대와 카메라 가방이 꽤 무거운데도 오늘은 전혀 무거움을 느끼지 못하고 발걸음도 가볍다. 도착해서 카메라를 세팅하고 급한 마음에 사진 한 장을 찍어서 확대해 본다. 어머나! 이렇게 많은 원앙새가 있다니. 자세히 보니 사진 속에 원앙새들의 생활이 고스란히 보인다. 촘촘히 언덕에 땅을 파고 두 마리씩 쏘옥 들어가 있는 놈들이 있는가 하면, 숲속에 들어가 얼굴만 내놓고 있는 놈, 나무나 바위에 올라가 있기도 하고 수영하는 놈들, 모두가 쌍쌍이 어울려 수백 마리는 되어 보였다.
저녁때는 모두 나와 공중묘기를 하는데 입이 딱 벌어지고 다물어지지 않았다. 똑딱똑딱 단 2초나 걸렸을까 모두 잽싸게 공중으로 떠오르더니 하늘을 난다. 질서정연하게 뿌리공원을 크게 다섯 바퀴 정도 돌고 나서 호수에 앉았다. 둥둥 떠다니며 장난도 치고 즐거운 시간을 갖는다. 아마 하루를 마감하는 행사로 한자리에 모이는 시간인가보다. 그런데 단체행동에서 그네들의 신호는 누가 어떻게 보내길래 이렇게 빨리 행동할까? 머리 나쁜 사람보고 새대가리라 하는데 누가 그런 말을 했는가.
공동생활을 하는 새들의 세계를 카메라로 흥미롭게 훔쳐보며 세 시간을 놀다 왔다.
그 후로도 원앙새가 보고 싶으면 카메라와 함께 갔다.
원앙새는 327호로 지정된 새로 부부의 사랑과 백년해로를 상징한다. 그래서 옛날에는 신혼부부들이 한 쌍의 원앙새 인형을 사서 화장대나 진열장에 놓기도 했다. 그런데 실제로는 알을 부화만 시키면 수놈은 집을 나가 다른 새를 만나는 바람둥이라 한다.
그런가 하면 원앙새의 슬픈 전설이 또 있다.
벼슬을 지내던 한빙의 아내는 절세가인이었는데, 임금이 한번 보고 혹하여 한빙에게 죄를 씌워 죽게 하고 아내를 빼앗았다. 아내는 왕궁 누각에 갇혀 잠자리에 불려가게 되자 유서를 써놓고 투신하여 남편을 뒤따랐다. 그녀의 유언에 따라 부부를 합장했는데, 왕이 이를 알고 대노하여 옆에 따로 무덤을 만들게 하였다.
얼마 후 두 무덤에서 자란 가래나무의 뿌리가 서로 엉켜 큰 나무가 되었는데, 어디선가 원앙새가 날아와 슬피 울자 이를 본 사람들이 부부의 혼백이 원앙새가 되었다고 했다. 원앙의 암컷은 미색을 버리고 촌부의 모습으로, 수컷은 화려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바뀌었다 한다.
원앙새는 귀가 얼마나 밝고 민감한지 사람의 말소리만 들어도 달아나고, 멀리서 카메라 셔터 소리만 내도 깜짝 놀라며 일제히 쳐다보았다. 이렇게 자주 찾아와 한나절 내내 원앙새들의 노는 모습을 멀리서 사진기에 담으면서 즐겁게 시간을 보내곤 했다. 그런데 얼마 지나서 원앙새는 다시 볼 수 없게 되었다. 지난번 지량리에 산불이 나서 소방차 2대가 이 호수에서 물을 퍼간 후로는 한 마리도 볼 수 없다.
그날도 원앙새를 보러 가는데 소방 헬기 두 대가 계속 물을 퍼 가는 장면을 보고 가슴이 덜컹했다. 저런, 원앙새 어쩌면 좋아, 원앙새 다 날아갔겠네, 정신없이 달린다. 말소리만 들려도 깜짝 놀라는 새들이 바로 집 앞에서 천지가 진동하는 헬기 소리와 태풍보다 더 센 바람이 덮치는데 그냥 남아 있을 리가 있겠는가.
잔잔하고 평화스럽기만 했던 산골의 호수는 순식간에 난장판이 되었다. 물을 퍼 갈 때마다 호수의 물은 뒤집혀 출렁거렸다. 원앙새들의 아늑한 보금자리는 폭격을 맞은 전쟁터로 변했다. 쓸쓸함과 애잔한 마음이 엄습해온다.
이제는 놀라서 다시는 오지 않을 것이다. 생각하니 무척 안타까웠다. 어디로 갔을까? 얼마나 놀랐을까? 알을 품고 부화하는 놈도 많았을 텐데 어찌 되었을까. 내년에 다시 오지 않을까?
갑자기 살던 집이 폭격당하고, 놀란 가슴으로 피난길에 오른 우크라이나 피난민들 행렬이 떠오른다.
※ 충남 부여 출생, ≪문학세계≫(2001) 시 등단, 수필집 산의 향기를 찾아서, 시집 술래잡기, 울림으로 다가온 자연의 노래 등, 대전문인협회 회원, 대전국제펜문학 회원, ≪꿈과 두레박≫ 회원, (사)한국사진작가협회 회원, bak0799@hanmail.net
❚考조영숙 님을 그리며
믿고, 감사하고
이 대 영
올해도 어김없이 여름이 찾아오고, 우리는 또 ‘상상의 힘’을 발간하였습니다. 지금 계신 그곳은 계절이 여기와 같은지, 그리고 잘 계신지, 무엇을 하며 계신지 무척 궁금합니다. 임께서 먼 길을 떠나신 지도 벌써 반년이란 세월이 흘렀습니다. 선한 미소와 해맑은 웃음으로 함께 한 지난날이 새록새록 되살아납니다.
우리가 만난 날이 언제였을까요? 지난겨울, 임께서 소천하신 후 우리가 같이 한 날을 돌아보았습니다. 카페를 한참 뒤진 끝에 사진첩 저 멀리에 앉아 계신 당신을 발견했습니다. 강의실의 벽에는 ‘문학창작교실 개강식’이라 쓴 현수막이 걸려 있었습니다. 대전시 시민평생교육 지원사업으로 개설된 무료강좌였지요. 그것이 2009년 2학기 개강이었으니, 아마도 9월 첫 주였을 겁니다. 사람의 인연이란 참 묘한 것이지요? 당신의 옆에는 현재, 한밭문학회 사무국장을 맡고 계신 김현주 님이 자리하고 계셨습니다. 앞에서 두 번째 줄이었지요. 당시, 40여 명의 수강생이 등록하였기에 사실, 임에 대한 첫 느낌을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2010년 12월 29일, 둔산동 ‘해피 엔터테인먼트’에서 진행한 <동행> 창간호 출판기념회 사진에서 원탁에 앉아 계신 당신을 발견했습니다. <동행>은 당시 수강생들의 창작품을 실은 문학지였습니다. 아마도 이때부터 잠시 주춤했던 님의 문학창작에 대한 열정이 되살아난 듯싶습니다. 그 이후로 2012년 8월 23일 둔산동 태원에서 개최한 ‘상상의 힘’ 제17호 출판기념회에 참석한 것을 시작으로, 2012년 제18호에 시 <가을>, <가로수>, <소쩍새>를, 제22호에 수필 <유산상속 발표를 듣고>를 게재하며 본격적인 문단 활동을 시작하셨지요. 당신의 작품 속에는 항상 ‘신앙’과 ‘가족’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성묘, 상춘 그리고 봄길>, <오 부자의 첫 나들이>, <아내와 함께한 민주지산> <제주도에서 한 달 살기> 등이 그러했지요. 당신은 사실, 시보다는 수필 작품이 더 좋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임에게 시보다는 수필을 더 쓰시라고 권했지요. 하지만 당신께서는 시인이기를 더 원하셨던 것 같습니다. 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음을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당신의 꼼꼼하신 성격이 시의 언어적 효율성에 덧칠하는 것 같아 그리했던 것이니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버스를 타고 여행을 하면서 많은 시간과 생각을 공유했습니다. 벌교의 태백산맥 문학관, 경주의 동리·목월 문학관, 전주의 최명희 문학관, 예산의 필경사, 보은의 오장환 문학관, 하동의 박경리 문학관, 남원의 광한루 등 당신과 함께한 시간이 사진 속에 고스란히 자리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교회에서도 늘 사랑과 봉사를 실천하는데 헌신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소식지 발행을 위한 편집을 맡고 다양한 문화프로그램도 운영하셨지요. 나는 당신의 초청으로 교회에 나가 문학 특강을 한 것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때의 강의 제목이 ‘문학을 알면 세상이 보인다!’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세상이 보이기야 하겠습니까? 그래도 우리는 제목이 그럴싸하다며 서로 머리를 끄덕였지요. 그리고 강의에 앞서 초대 강사를 소개하는 부분에서 임은 내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지 머뭇거리기에, 내가 자그마한 소리로 이름을 알려드린 적도 있습니다. 혹, 기억이 나시는지요?
당신과 함께 한 시간 중에 환하게 웃으시던 장면이 몇 가지 떠오릅니다. 대전시민대학에 개설한 ‘웰 다잉’ 강좌가 처음으로 개강 되었음을 우리에게 전할 때, 당신의 얼굴은 천진하면서도 순수함 그 자체였습니다. 그리고 병상에 들기 전, 합평회에서 아내와 함께한 제주도 한 달살이 이야기를 할 때 당신은 분명,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지난가을, 문학모임에 늘 참석하시던 당신의 발길이 멈추었습니다. 참석자 모두는 바빠서 못 오시는 것으로 이해했지요. 그때 당신은 자살 방지 상담센터에서 전화상담도 하시고, 일선 학교에 나가 특강도 하셨으니까요. 그러던 어느 날, 당신께서 몸이 무척 안 좋으시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물론, 전화 연락도 안 되는 상황이었지요. 그러다가 당신이 병원에서 퇴원하여 집에서 요양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미 암이 전이 되어 회복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혹시 기억하세요? 동인들이 임의 집에 찾아가 당신과 마지막으로 함께 했던 시간을. 나는 임이 누워계신 방을 나오면서 다시 한번 당신의 얼굴을 바라보았습니다. 나는 그때, 당신과 마지막으로 교환했던 눈길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것이 이승에서의 마지막 인사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당신이 섬기던 주님의 품에 안겼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많은 이들이 슬퍼했습니다. 이구동성으로 참으로 선한 분이 우리 곁을 떠났다고 아쉬워했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모질게 살아야 오래 사는가 보다’라며 당신의 죽음을 안타까워했습니다. 혹여 그러는 우리를 하늘에서 바라보며 ‘있을 때 잘하지, 죽은 뒤에 아쉬워하느냐’고 나무라지는 않으셨는지요?
오래전부터 나는 임이 죽음을 어떻게 맞이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당신은 시 <이렇게 살 수 있다면>에서 “질병에 걸려 힘들 때 낙심하지 아니하고/병을 회복하는 과정이 시작되었다고 즐거워하고”라고 말씀하셨지요. 그리고 “이 세상 떠날 때가 임박함을 알았을 때/조금 일찍 떠날 뿐이라고 태연하게 말하고/새로운 세계가 준비되었음을 믿고 감사하고”라고 표현하셨지요. 맞는 말씀입니다. 임은 우리보다 단지 조금 일찍 떠나 새로운 세계에서의 삶을 시작하신 것이니까요.
이제 우리는 또 ‘언젠가’라는 단어를 빌려 먼 훗날의 만남을 기약해야 합니다. 임이 계시는 곳에서도 혹여 문학을 할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문학기행도 갈 수 있는지요? 임이 계신 곳으로 가서 소중했던 인연을 이어가고 싶지만, 워낙 지은 죄가 많아 당신이 계신 곳으로 갈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부디 주님께 말씀 좀 잘해주십시오. 우리 동인님들도 함께 말입니다.
이제, 임과의 이별을 허락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당신과의 재회 시간을 기다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