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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1:20~21(319)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 2024. 3. 10
건실한 모습으로 많은 이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는 탤런트 차인표 집사의 간증입니다. 차인표씨는 연예인들 중에 모범적인 모습으로 생활한다고 정평이 나있습니다. 그리고 신앙생활도 건실하게 잘 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 분입니다. 차인표집사가 건실한 신앙인으로 인정을 받는 계기가 2006년 봄에 있었다고 합니다.
아내 신애라 집사를 대신하여 인도의 컴패션 비전 트립을 가게 되었습니다. 컴패션은 세계의 가난한 아이들을 후원하는 국제 어린이 양육기구입니다. 가기 싫었는데 아내 신애라의 권유로 억지로 간 여행입니다. 그래서 ‘가난한 환경의 어린이들을 만나러 가면서 비행기 1등석을 타고 갈 정도로 교만함이 넘쳤고, 가기가 싫었다’고 회상합니다.
당시 차인표씨는 사실 무늬만 있는 크리스천이었습니다. 인도 캘커타에 도착하여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데, 버스 안은 더럽고 에어컨도 잘 나오지 않고 악취도 심하여서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상태입니다. 동행하던 컴패션 리더가 차인표에게 말합니다. “이곳의 아이들은 세상에서 가장 가난하고 불쌍한 아이들입니다. 아이들을 만나면 ‘예수님이 너를 사랑해’ 라고 말하며 안아주고 축복하면 됩니다.”
몇 시간 흐른 후,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 같이 다 쓰러져 가는 교회 건물 앞에 아이들 수 십명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것이 눈에 들어옵니다. 버스에서 내리자 7살쯤 된 아이가 다가와 차인표 집사에게 손을 내밉니다. 어떻게 행동해야 될지 난감합니다. 반갑게 안아 주려고 하니 아이 몸에서 냄새가 진동합니다. 그렇다고 밀쳐 내기도 난감한 상황입니다.
순간 차인표집사는 아이의 똘망똘망한 눈망울을 보는데, 거기서 충격을 받게 됩니다. 차인표집사는 그때 상황을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아이의 눈에서 예수님의 모습을 보았습니다.’그리고 내가 아이에게 말하려고 했던 말이 자신에게 들립니다. ‘인표야? 얼마나 지쳐있니? 얼마나 힘이 드니? 얼마나 외로웠니? 나는 너를 사랑해.’
불가촉천민으로 사회에서 쓰레기 취급을 받는 아이의 모습에서 예수님을 본 것입니다. 예수를 만난 그는 인생이 바뀝니다. ‘매달 3만원이면 가난한 아이의 인생이 바뀌는 데’ 생각하니 술 먹을 돈이 아까웠습니다. ‘돈이 없어 아이들은 종일 쓰레기를 줍고 있는데’라는 생각에 안타까운 마음이 생깁니다. 3만원만 사용하면 옷도 입고 밥도 먹고 학교도 갈 수 있습니다.
차인표 부부는 50여명의 아이들을 돕고 있으며 두 아이를 입양하여 키우고 있다고 합니다. 차인표는 ‘오직 주님을 위하여 살아가는 것이 자신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이라고 고백합니다. 지금도 컴패션 활동을 통해 아이들을 사랑하며 지원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이 무엇인가요? 제가 가진 간절한 기대와 소망은 교회가 든든히 서는 것입니다. 비워져 있는 자리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자리를 채워지고, 덕민 교회에 찾아 나오는 모든 성도들이 영육간에 어려움이 없이 강건하는 모습입니다. 시현이나 유현이 같은 어린아이들은 아프지 아니하고 건강하게 무럭무럭 자라는 것입니다. 연로하신 권사님과 집사님들이 잔병치레 없이 강건하고 무탈하게 하루 하루를 보내고 한주를 보내는 것입니다.
또한 저희 집 아이들 모두 신앙이 좋은 처자를 만나서 하나님의 뜻 가운데 아름다운 결혼을 하는 것입니다. 저나 사모나 아프지 않고 성도들을 잘 돌보와 주는 것이 기대와 소망입니다.
2월의 마지막 주일 낮 점심 식사 후에 김권사님과 장권사님이 덕민 교회에 나오게 된 것을 이야기 하시면서 ‘인생 참 빠르게 흘러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에 제가 듣고선 아주 무례한 말이 될 수도 있지만, 제가 두 분 권사님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앞으로 언젠가는 하나님이 권사님들을 부르시게 되면, 그때에 제가 두 분 권사님 장례를 집례 할 터이니 저와 같이 오래 함께 지내자’고 말씀드렸습니다. 이것 또한 제가 가진 기대와 소망 중에 하나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간절한 기대와 소망이 무엇인지요?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 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살아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 되고,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죽는다고 해도 하나님에게 기쁨이 되는 모습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제 내가 살아도’라는 복음성가가 있습니다. 가사가 오늘 본문 설교와 잘 적용이 되는 것이어서 함께 찬양했으면 좋겠습니다.“1)이제 내가 살아도 주 위해 살고 이제 내가 죽어도 주 위해 죽네. 하늘 영광 보여주며 날 오라 하네. 할렐루야 찬송하며 주께 갑니다. 그러므로 나는 사나 죽으나 주님의 것이요 사나 죽으나 사나 죽으나 날 위해 피 흘리신 내 주님의 것이요. 2)이제 내가 떠나도 저 천국 가고 이제 내가 있어도 주 위해 죽네 우리 예수 찬송하며 나는 가겠네 천군천사 나팔 불며 마중 나오네 그러므로 나는 사나 죽으나 주님의 것이요 사나 죽으나 사나 죽으나 날 위해 피 흘리신 내 주님의 것이요.”
본문 20절에 보면 바울은‘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라는 말을 합니다. 여기의 ‘간절한 기대(아포카라도키안)’인데 ‘목을 빼고 앞을 바라보다’라는 의미입니다. 이 말을 구어체로 표현하면‘간절히 기대하고 바라보다’라는 뜻입니다.
여러분은 ‘학수고대(鶴首苦待)’라는 사자성어를 아실 것입니다. 그 뜻은 ‘학의 목처럼 목을 길게 빼고 간절히 기다린다’는 내용입니다. 바울은 학수고대하면서 간절히 바라고 있던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자신의 믿음이 흔들리지 않고 온전하기를 바랐습니다.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죽겠다는 한결같은 믿음이 바로 바울이 간절히 바라던 소망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일평생 주를 따라가면서 가졌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은 어떤 모습일까요?
1. 믿음에 따라 부끄러워하지 아니한 모습입니다.
20절.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이 말을 이해하기 쉽게 표현하면‘나는 무슨 일이든지 결코 부끄러워하지 않기를 간절히 기대하고 바라고 있습니다.’라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어떤 일에 연관되어 있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서 부끄러운 일을 하지 않기를 소망하였습니다. 여기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라는 원어의 뜻은‘수치로 채우지 아니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수치스러움에 빠지거나 부끄러운 일로 인하여 얼굴을 들지 못하는 일에 처해지지 않도록 자신의 행동과 말에 조심하면서 늘 경건한 모습으로 살아가겠다는 자기 표현이기도 한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은 어떠한 일에도 부끄러움을 당할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수치스러운 일에 연관되어서 얼굴을 가리는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연예인들이나 얼굴이 알려져 있는 사람들이 불미스러운 일로 인해서 경찰에 출두하게 될 때, 출두하는 모든 사람들이 어떤 모습을 하고 경찰서나 검찰에 출두하게 하는 것일까요?
사진 한 장을 보세요. 모든 사람들이 다들 공통된 모습이 있습니다. 모두가 다 얼굴을 가리고 있다는 점입니다. 얼굴을 가린 사람들의 이름도 국민들은 알고 나이도 알지만, 자신이 저질렀던 추악하고 부끄러운 행동으로 인해 얼굴을 가리고 출두를 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하나님 앞에서와 세상 사람들 앞에서 얼굴을 가릴 정도의 부끄러운 행동을 해서 안 됩니다. 수치스러운 일로 인해서 얼굴을 들지 못하는 행동을 해서도 안 됩니다. 행여나 중상모략을 당해서 곤경에 처한다고 해도, 의롭게 행동한 사람은 지은 죄가 없기에 얼굴을 숨기지 않습니다. 죄를 지은 사람은 얼굴을 숨기지만, 의롭게 행동한 사람은 고개를 들 수 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앞에서 부끄럽지 않은 생활을 해야 합니다. 비록 바울이 로마의 법에 따라 재판을 받고 있는 죄수였지만,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한 것이 수치가 아니고 부끄러움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이런 바울의 모습을 본 받아야 합니다.
간혹 가다가 예수 믿는 것이 부끄러워서 숨기는 분들이 있습니다. 신앙이 연약한 상태에서는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십 수년 교회생활을 하고도 본인의 신앙을 부끄러워하여 숨기고 있다면, 이것은 절대 올바른 모습이 아닌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저는 우리 덕민 교회 모든 성도님들의 믿음이 부끄럽지 않는 믿음이 되도록 항상 기도합니다. 여러분들 또한 내가 가진 믿음이 부끄러운 믿음이 되지 않도록 늘 노력하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일본의 작가 엔도 슈샤쿠(遠藤周作 1923-1966)가 1966년‘침묵(沈黙)’이라는 기독교 소설을 발표합니다. 이 소설은 5백년 전 일본에 기독교가 전해질 당시의 상황을 너무나 잘 표현하였기에 세간에 큰 관심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대 히트를 하여 영화까지 만들어지게 됩니다.
책에 나오는 여러 등장인물들 중 가장 눈에 띄는 인물은 <기치지로>라는 이름을 가진 일본인입니다. 한없이 교활하고, 자신에게 불리하다 싶으면 바로 기독교를 배신합니다. 배신하는 것을 넘어서 다른 종교를 신앙하는 배교행위까지 합니다.
그에게 ‘신뢰’란 단어는 없는 사람입니다. 기독교신자라고 잡혀가서 고문이 다가올라치면 두 번 생각 안 하고 예수님 얼굴이 그려진 성화를 밟고 배교한 후에 풀려납니다. 거머리처럼 징글징글한 모습을 보이고, 구더기처럼 더럽게 느껴지는 인물입니다.
하지만 마지막에 기치지로는 자신이 믿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지키고자 부끄럽지 않는 죽음을 택하게 됩니다. 연약한 인간이기에 배반도 하고, 목숨하나 부지하기 위하여 예수님의 얼굴이 그려진 성화를 발로 짓밟는 행동을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부끄럽지 않는 믿음을 선택하면서 순교의 길로 나아가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 모두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부끄럽지 않는 모습으로 살아 같으면 좋겠습니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말고 나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여김을 받을 수 있도록 믿음의 선한 행동을 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우리 덕민 교회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2. 오직 그리스도만 드러나는 것이 간절한 기대와 소망입니다.
21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하나님과 나 사이를 가로 막는 것이 무엇일까요? 무엇이 하나님과 나 사이를 가로 막아 내가 하나님을 온전히 따라가지 못하게 할까요? 이런 질문을 하면, 기독교인들은 ‘돈? 자존심? 세상의 즐거움? 게으름?’등과 같은 것을 말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것들의 바탕 속에 동일하게 깔려 있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내 인생의 주인이 나라고, 내 인생은 내가 사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목소리입니다. 이 목소리가 힘을 얻을수록 나와 하나님의 사이는 점점 더 멀어집니다. 사탄은 항상 우리에게 말하기를 ‘인생을 즐거운 것이기에 인생을 즐기며 살라고’고 말합니다. ‘인생을 즐기며 살라’고 말하면서 ‘하나님을 위해 인생을 쓰지 말고 자신을 위해 쓰라’고 말합니다.
이 말에 넘어가면 올바른 신앙생활을 절대 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2천년 전 일찌감치 이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여김을 받으려면, 반드시 주를 위해 죽는 것도 유익하다고 인정하며 신앙생활을 하라고 권면한 것입니다.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사림이 어떻게 하면 인생을 즐기며 살아갈까? 어떻게 하면 한번 뿐인 인생을 후회함 없이 살아갈까? 이 문제를 고민합니다. 그래서 악착같이 돈을 벌기도 하고, 유흥과 쾌락에 빠져 술이나 마약 같은 것에 중독되기도 합니다. 자신이 정한 인생의 법칙에 따라 다른 사람 눈치 보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이 질문의 기주닝 바로 21절의 말씀입니다. 내가 사나 죽으나 주를 위해 내가 살아야 하며, 내가 죽는 상황이 온다고 해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존귀히 여김을 받는다면, 나는 기꺼이 그 죽음과 고통을 받아 들여야 한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2024년 부활주일은 교회력에 의하면 3월 마지막 주일인 31일입니다. 고난주일이 23일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교회력에 따르면 사순절 기간입니다. 사순절(四旬節)은 부활절로부터 거슬러 40일 기간 동안 경건하게 살고 절제하는 생활을 통해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모습을 보이는 교회의 절기 중에 하나입니다.
저는 사순절이라고 해서 특별하게 설교를 하거나 의미를 부여하여 강조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고난과 부활에 동참한다는 의미에서 경건하게 보내야 한다고 생각은 합니다. 사순절 모든 시간 동안 나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를 더 생각하면서 주를 위해 감사와 찬양을 돌려 드리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는 이 땅에서 주님이 주신 달란트를 가지고, 하나님 나라를 세우기 위해 쓰임 받는 사명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리고 주님 가신 길을 뒤따르는 제자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죄의 노예로 살지, 하나님의 자녀로 살지’는 우리 믿음의 결단에 따라 갈라집니다. 선택의 갈림길에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선택하면, 부활하신 주님 안에 내가 머물게 됩니다. 내가 죽음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나게 됩니다. 이런 신앙의 즐거움을 회복하시길 소망합니다.
주를 위해 죽음도 불사하는 믿음이 성숙한 신앙을 가진 성도의 동일한 모습입니다.
존 스토트(John Stott)는 ‘21세기 제자도’라는 책에서 그리스도인의 성숙에 대하여 말합니다. “장성한 것 같은데, 여전히 우리 안에 어린아이의 모습이 있다.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와 성숙한 관계를 맺어야 한다.” 그리고 존 스토트는 지적합니다. “우리는 난쟁이 그리스도인이다. 난쟁이 그리스도를 모셨기 때문이다. 슈퍼마켓에 가면 다양한 제품들이 진열되어 있다. 그중에 선호하는 제품이나 돈에 맞는 상품을 골라 사야 한다. 그런데 호주머니에 들어갈 만한 작은 예수, 주님과는 거리가 먼 예수를 사려고 한다. 어릿광대 예수, 인기스타 예수, 정치적인 메시아 예수, 혁명가 예수, 보수주의자 예수, 이런 시시한 난쟁이 예수를 사고 있으니, 우리는 난쟁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다.”
내 마음에 맞는 예수님만 모시고 믿는다는 말은 충격적인 경고의 말입니다. 주님이 원하는 믿음이나 교회생활이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믿음과 교회생활만을 주장하는 현대 기독교인들이 깨달아 살펴보아야 하는 내용입니다.
1900년대 초반 아직 복음의 문이 완전히 열려있지 않았던 조선 땅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발을 내디디는 푸른 눈의 젊은 선교사들이 많았습니다. 한국으로 바로 오지 못하고 영국에서, 미국에서 지구를 반바퀴 돌아서 배를 타고 육지를 이동하면서 몇 달의 오는 고단한 일입니다.
이 때에 조선 땅으로 가는 선교사가 기도합니다.“하나님, 한 벌의 옷이 헤어지면 무엇을 입을지 저는 알지 못합니다. 오늘 밤 어디서 자야 할지 모릅니다. 내일 아침 어디서 무엇을 먹을지도 모르지만 부르심에 순종함으로 떠납니다. 나의 일생을 책임져 주시고 사용해 주셔서 예수님의 이름을 존귀히 여기는 도구가 되기를 원합니다.”
죽음을 불사한 이런 선교사들의 노력과 희생, 뜨거운 열정이 바로 오늘의 대한민국 교회의 바탕이 되었습니다. 먹고 사는 것이 부족하지 않아서 오늘 우리에게는 간절한 기대와 소망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신앙생활의 뜨거운 열정도 없어져 버렸습니다. 3월의 모든 시간 속에서 바울이 가졌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의 믿음이 우리 모두에게 회복되어지기를 소망합니다. 이 간절한 소망으로 믿음 안에서 승리하는 3월의 모든 시간이 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