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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주차
동서양 시의 전통과 흐름
시는 아름다운 인생을 위해 인류가 발명한 아주 오래된 문화유산입니다. 1994년 봄, 홍콩 골동품 시장에서 발견된 전국시대 초기 죽간에서 공자는 『시경』을 논평하면서 “시는 뜻을 드러내는 것”(詩無各志)이라고 하였고, 『설해문자』에서는 “시는 뜻이다”(詩志也)라고 하였습니다. 중국 청나라의 시인 원매(袁枚, 1716~1797)는 “시서를 많이 읽으면 운명 역시 아름다워진다” (多讀詩書)라고 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한자를 분해하여 말(言)의 절(寺)이라고도 합니다. 그렇다고 시가 절(寺)과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니고, 표의부 ‘言’과 표음부 ‘寺’로 이루어진 형성자라고 합니다. 는 손을 나타내는 기호로 손을 움직여 일한다는, 만든다는, 창작한다는 뜻입니다.
말과 글(언어)은 “인류 최고의 발명품"(르 끌레지오)입니다. 그러니 시인은 언어를 잘 모시는 언어의 사제이며 언어로 집을 짓는 목수인 것입니다. 일반 사람들이 일상 언어를 사용하여 대상과 의사소통을 한다면, 특수한 언어 감각을 가진 시인은 시언어를 사용하여 대상과 소통하는 자일 것입니다.
미국 태생의 영국 시인 엘리엇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시에 대한 정의의 역사는 오류의 역사이다.”라고. 이는 시를 정의하는 순간 틀리는 것이며, 완벽하고 고정된 시의 정의는 없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누구나 정의를 내릴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보르헤스는 시를 ‘수수께끼’라고 하였습니다.
아무튼 시는 동서양에서 문학의 대표였고, 지금도 대표의 자리를 양보하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문학의 양식을 분류할 때 관습적으로 시, 소설, 희곡, 수필……등으로 시를 맨 앞에 두는 것은 그만큼 시의 권위가 아직도 상당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1. 동양의 시학
동양에서 시를 공부하려면 가장 먼저 봐야 할 책은 『논어』입니다. 이 책은 우리 선조들이 문장을 공부할 때 암송하였던 우주제일서이자 천하제일서로 불리었습니다.(공광규, ‘논어의 시학’을 준비하며, 《문학사상》, 2009, 10. 참조)
이처럼 동양시학은 그 연원과 뿌리가 깊습니다. 동양에서 시를 배우면서 가장 주목해야 할 책은 『시경』입니다. 공자가 편집한 현존 최고의 시가 선집인 이 책은 기원전 12세기에서 6세기까지 전래된 시를 뽑아 만든 것입니다.
물론 편집자인 공자가 제자들을 가르치기 위해 자기 나름대로 정치적·도덕적 관념을 기준으로 311편을 뽑아 편찬한 것입니다. 이 『시경』이라는 시선집은 『논어』와 『좌전』에도 자주 언급되듯이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양의 시학에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시경』 「대서」에서 “시는 마음이 흘러가는 것을 적은 것이다. 마음속에 있으면 지라하고, 말로 표현하면 시가 된다.”(詩者 志之所之也 在心爲志 發言爲詩)라고 하였습니다. 『서경(書經)』의 「순전」에서는 “시는 마음이 뜻하는 바를 말로 표현한 것이며, 노래는 말을 가락에 맞춘 것이다.”(詩言志歌)라고 하였습니다.
동양에서는 인격수양을 위한 시 공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논어』 「태백」편에서는 “시에서 일어나며, 예에서 서며, 음악에서 이루어진다.”고 하였고, 『예기』의 「경해」편에서는 “그 사람됨이 온유돈후한 것은 『시경』의 가르침 때문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시경』을 가르치면 인격이 온유돈후해진다는 말이니 인격수양에는 시가 좋다는 말입니다.
공자는 시를 공부하여 인격수양이 잘된 청년에게 형님의 딸을 시집 보내기도 했습니다. 『논어』 「선진」편에 “남용이 『시경』 「대아」편의 ‘백규’ 구절을 하루 세 번 반복하여 외우니 공자께서 그 형님의 딸로 처를 삼아 주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감옥살이는 했으나 죄가 없는 청년에게 자기의 딸을 시집보냈다고 합니다.
또한 공자는 아들이 시를 공부하지 않자, 『논어』 「계씨」편에서 “시를 배우지 않으면 대화를 할 수 없다.“라고 하며 꾸짖었습니다. 또 아들에게 ”너는 『시경』의 주남과 소남을 배웠느냐? 사람이 주남과 소남을 배우지 않으면 담장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서 있는 것과 같다.”고 하며 성인이 시를 배워야 함을 강조하였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어느 사람과 담장을 마주 보고 서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은 적이 있을 겁니다. 서로 소통이 안 되기 때문이죠. 시 공부가 타인과의 소통을 위해서도 아주 중요하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현대 교육에서 주장하는 전인교육을 위해서도 『논어』는 이미 대안을 내놓고 있습니다. 『논어』 「양화」편에서는 “시는 감정을 일으키며, 사물을 볼 수 있게 하며, 여러 사람과 사귀게 하며, 위정자를 원망할 수 있게 하며, 가까이는 어버이를 섬기고, 멀리는 임금을 섬기며, 새와 짐승과 풀과 나무의 이름을 많이 알게도 한다.”(詩 可以興 可以觀可以群 可以怨 邇之事父 遠之事君 多識於鳥獸草木之名)고 하였습니다. 이는 시가 사회적으로 효용성이 있다는 말입니다. 정치는 물론 윤리적 목적과 지식을 늘리기 위한 전인적인 인간을 양성하기 위해서도 시 공부가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특히 새와 짐승과 나무와 풀의 이름을 많이 알게 한다는 것에 요즈음 사람들도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어떻게 시를 쓸 것인가? 창작방법에 대하여 『논어』에서 방향을 찾을 수 있습니다. 우선 사무사(思無邪)의 시학, 『논어』 「위정」편에서는 “시 3백 편을 한마디로 말하면 생각함에 거짓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시를 정의할 때 가장 많이 사용하는 말이며 『시경』 전체를 평가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쉽게 말해서 시는 거짓 없는 마음, 순정한 마음, 솔직한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시경』 작품에 담겨 있는 시편들이 거짓 없이 정직하다는 말도 되겠고, 시인은 거짓이 없는 진정한 마음으로 창작에 임해야 한다는 말도 됩니다. 그리고 작품을 읽는 사람도 거짓이 없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논어』 「학이」편에 “말을 교묘하게 꾸미고 얼굴빛을 꾸미는 사람 가운데 인자한 사람이 드물다.”(巧言令色鮮矣仁)라는 말과 연결됩니다. 우리는 내용도 없이 화려한 말만 예쁘게 나열한 시들을 볼 수 있는데, 이런 것들을 경계하는 말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 다음은 낙이불음 애이불상(樂而不淫 哀而不傷)의 시학, 『논어』 「팔일」 편에서는 "관저의 시는 즐겁되 지나치지 않고 슬프되 감상에 흐르지 아니했다.”고 하여 시의 내용에서 중용과 절제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시경』의 첫 시 「관저」는 사랑 이야기이나 음란하지 않습니다.
關關雎鳩(관관저구) 꾸우꾸우 물수리
在河之洲(재하지주) 모래 섬에 있네
淑女(요조숙녀) 정숙한 아가씨
君子好逑(군자호구) 군자의 좋은 짝이네
參差荇菜(참치행채) 물 위에 마름나물
左右流之(좌우류지) 이리저리 흐르듯
窈窕淑女(요조숙녀) 정숙한 아가씨
寤寐求之(오매구지) 자나깨나 찾았네
求之不得(구지불득) 찾아봐도 못 만나
寤寐思服(오매사복) 자나깨나 그렸네
悠哉悠哉(유재유재) 언제나 만날까
輾轉反側(전전반측) 잠 이루지 못했네
參差荇菜(참치행채) 물 위에 마름나물
左右采之(좌우채지) 이리저리 뜯었네
窈窕淑女(요조숙녀) 정숙한 아가씨
琴瑟友之(금슬우지) 금슬 타며 친했네
參差荇菜(참치행채) 물 위에 마름나물
左右芼之(좌우모지) 이리저리 삶았네
窈窕淑女(요조숙녀) 정숙한 아가씨
鐘鼓樂之(종고락지) 종고 울리며 즐겼네
- 「관저(關雎)」전문
또 절차탁마(切磋琢磨)의 시학입니다. 한마디로 시를 수없이 다듬고 고치라는 말입니다. 『논어』 「학이」편에 나오는 말인데, “자공이 말하길, 『시경』에 ‘절차탁마(자르고, 쓸고, 쪼고, 갈고)하다.’고 했으니 이것을 말한 것 같습니다.”라고 하니 공자는 “너와 더불어 시를 이야기할만하구나.”라고 하였습니다. 시를 쓸 때는 그릇을 만들듯이 언어를 자르고 쓸고 쪼고 가는 정성을 들여야 한다는 말입니다.
시를 쓰려면 기본기를 잘 갖추어 놓아야 하는데, 회사후소(繪事後素)의 시학입니다. 『논어』 「팔일」편에서 공자는 “그림을 그리는 일은 흰바탕이 마련된 뒤에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바탕을 잘 다져놓고 그림을 그리라는 말입니다. 그림을 그릴 때 먼저 바탕을 잘 만든 뒤에 채색을 해야 한다는 작가의 덕성과 작품과의 관계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작가의 사상적 품성과 수양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말이죠.
『논어』 「옹야」편에서 공자는 “바탕이 꾸밈을 이기면 거칠고, 꾸밈이 바탕을 이기면 호화로우니 꾸밈과 바탕이 어우러진 다음에야 군자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내용 형식과 표현 형식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문질빈빈(文質彬彬)의 시학입니다. 사상이나 내용도 중시하지만 아름다운 문체도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공자는 시를 배워도 다른 일을 해내는 능력이 없다면 소용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실용주의적 입장입니다. 『논어』 「자로」편에서 “시 삼백 편을 외우더라도 정치를 맡겼을 때 제대로 해내지 못하고, 사방에 사신으로 나가서 혼자 대처하지 못하면 비록 많이 외운다고 한들 어디에 쓰는가?”라고 한 것입니다. 시를 배우고서도 정치·경제·행정 등 실무를 못하면 배우지 않은 것과 같다는 말입니다. 책상물림을 경계하는 말이며 문약을 경계하는 말입니다.
역사적으로 문인 가운데 정치가와 혁명가들이 많았습니다. 최근에 고려의 충신 정몽주의 장원 급제 답안지가 발견되었는데, 그 답안지에서 정몽주는 주나라 이전에는 문무가 일치했으며 문무를 함께 쓰는 것이 모든 왕들이 따라야 할 큰 법이었다면서, 문무를 겸비한 인재 등용을 주장하였습니다. 책상에서 시 쓰기를 경계하고 세상으로 나와야 한다는 것으로 이해하면 됩니다.
『논어』 이후에 많은 문헌들이 시에 대하여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시문에 관한 책인 『문심조룡』(499∼501)을 쓴 유협은 문학이 내용에 충실할 것을 강조하고 당시 기교에만 치우친 내용 없는 미문을 비판하였습니다.
종영은 중국 최초 평론집인 『시품』(512)에서 시는 “인민의 생활과 감정을 줄기로 하여 형식과 색깔을 물들여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소통(501~531)은 가장 오래된 작품집인 『문선』에서 문장이란 “깊은 생각 속에서 뜻이 되고 그것이 다시 아름다운 문장 속으로 들어와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두보(712~770) 역시 “시는 인민의 고통을 알리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중국의 조비(曹丕)는 『전론논문(典論論文)』에서 “문은 기를 위주로 하는 것인데, 기의 청탁은 그 바탕이 있어서 억지로 이를 수 없는 것이다.”(文以氣爲主 氣之淸濁有體 不可力强而致)라고하였습니다. 문학에서 기의 중요성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문기론(文氣論)의 계보는 맹자의 호연지기(浩然之氣)에서 영향 받아 왕충의 기질설(氣質說)에서 시작하여 조비에 의해 완성되고 유협에 의해 다져졌다고 합니다.¹⁾
당나라 때 교연(720?~793)은 『시식(詩式)』에서 좋은 시가 가진 일곱 가지 덕목을 들었습니다. △이치(事理 文理 佛理)를 아는 것 △고고(高古)한 것 △전아하고 아름다운 것 △풍류가 넘치는 것 △정신이 담기는 것 △질박하면서 줄기가 있는 것 △체재가 갖추어져 있는 것을 좋은 시가 갖추어야 할 조건으로 인식하였습니다.²⁾
고려시대 이규보는 『백운소설』에서 “무릇 시란 뜻을 위주로 하는데 (…중략…) 기의 우열에 말미암아 마침내 뜻의 깊고 옅음이 생긴다. 그러나 기는 원래 하늘에서 타고난 것이므로 배워서 얻을 수 없다.”(夫詩 以意爲主…由氣之優劣 乃有深淺耳 然氣本乎天 不可學得)고 하였습니다.
이 인로는 『파한집』에서 “대개 문장은 천성에서 얻어진다.”(盖文章得天性)고 하였으며, 최자는 『보한집』에서 “시는 기를 위주로 하는데, 기는 성에서 발하고 의는 기에 의거하며 말은 정에서 나오는데 정은 곧 의다.”(詩文以氣爲主 氣發於性 意憑於氣 言出於情 情卽意也)라고 하였습니다.
이규보나 정약용은 이러한 문기론의 시관을 지지하고 실천해왔습니다. 이규보는 문학에서 독창성과 자주성을 주장하고 사람을 놀라게 할 말과 천년이나 남을 수 있는 말을 찾아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유몽인은 『어유야담』에서 “시는 풍교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단지 사물이나 경색만을 읊어서 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시의 교육적 효용을 주장하였습니다.
정약용은 「노인일쾌사(老人一快事)에서 “나는 조선인이므로 즐겨 조선시를 쓰겠다.”(我是朝鮮人 甘作朝鮮詩)며, 스스로 실천을 하였습니다. 관리의 부정부패로 남자의 성기를 잘라야 하는 당시 조선의 엽기적 현실을 쓴 정약용의 시 애절양(陽)」을 보겠습니다.
갈밭에 젊은 아낙이 오랫동안 울더니
관문 앞 달려가 통곡하다 하늘 보고 울부짖는다
출정 나간 지아비 돌아오지 못하는 일은 있다 해도
사내가 제 자지 잘랐단 소리 들어본 적 없구나
시아버지 삼년상 벌써 지났고 갓난아인 배냇물도 안 말랐다
이 집 삼대 이름 군적에 모두 실렸다며
억울한 하소연 하려 해도 관가 문지기는 호랑이 같고
이정은 으르렁대며 외양간 소마저 끌고 간다
남편이 칼 들고 들어가더니 피가 방에 흥건하다
스스로 부르짖길 ‘아이 낳은 죄로구나!’
누에치던 방에서 불알 까는 형벌도 억울한데
이 땅의 자식 거세도 진실로 또한 슬픈 것이거늘
자식을 낳고 사는 이치는 하늘이 준 것이요
하늘의 도는 남자 되고 땅의 도는 여자 되는 것이라
거세한 말과 거세한 돼지도 오히려 슬프거늘
하물며 백성이 후손 이을 것을 생각함에 있어서랴!
부잣집들 일년 내내 풍악 울리고 흥청망청한다
이네들 쌀 한 톨 베 한 치 내바치는 일 없다
다 같은 백성인데 이다지 불공평하다니
객창에 우두커니 앉아 시구편을 거듭 읊노라³⁾
동양에서는 시를 인격수양이나 교화의 수단으로 보는 풍교론적 관점⁴⁾이 지배적이었으나, 정치권력에 대한 민중의 감정을 반영하거나 사회악을 고발하고 사회개혁 의지를 나타내는 수단으로도 보았습니다.
이러한 시학관은 민중의 고난과 남녀의 애정 문제, 정치사회적 현실을 시에 반영한 『시경』 등 고대의 시가에서 영향을 받아 우리나라1930년대와 1980년대 민중시에 충실히 반영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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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리나라의 문기론은 임춘이 한유(韓愈)의 영향으로 처음 제기하였으며 이규보, 진화, 최자로 이어진다. 문은 기를 위주(氣爲)로 한다는 것이며, 기는 개성이나 기백의 뜻이나 문학적 의미로는 기질(개성), 기상이고 문학의 내용 형식에서 기(氣) 등이다. 개성 있는 표현을 해야 하는 것이지 아름다움만 꾸미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나라의 문기론은 '胸中之氣 (가슴속에 있는 기운)를 토로하는 것을 으뜸으로 삼고 수식은 무시했다. 당송팔대가 등고문운동가들이 이문위시(以文爲詩)해서 시를 문처럼 길게 쓰려는 경향이 있었는데, 임춘은 이들을 그대로 본받아 시가 장형화 산문화 경향을 초래하였다. 임춘은 조충전각(雕蟲篆刻)이라 해서 문장을 꾸미는 일을 극력 배격하였고, 이러한 경향은 후배인 이규보에게도영향을 주어 조루단청(彫丹靑)을 비판케 하였다. 문기(文氣)는 작가의 문학적 기질 및 기운을 의미하며, 그것이 작품에 영향을 미친다는 입론이다. 문기론(文氣論)은 작가의 천부적 재질과 재능, 정신 기질은 작품을 쓰는 과정에 나타나고, 창작과정을 완성하며, 작품의 특징과 작용을 체현한다는 점을 논한 것이다.(한국문학평론가협회, 『문학비평용어사전 · 상』, 국학자료원, 2006, 651쪽 참조).
2) 임종욱, 『중국의 문예인식』, 이회, 2001, 195쪽 참조.
3) 이 시는 다산이 강진 유배 시에 직접 보고 들은 사실을 시로 쓴 것이라고 한다. 노전(蘆田)이라는 마을에 사는 백성이 아들을 낳은 지 사흘 만에 군적(軍籍)에 올라 이정(里正)이 소를 빼앗아 가자, 방에 뛰어 들어가 “내가 이것 때문에 곤액을 당한다.”며 칼을 뽑아 자기의 남근을 스스로 잘라 버렸다고 한다. 그 아내가 남근을 가지고 관가에 가니 피가 아직 뚝뚝 떨어지는데 아무리 하소연하려 해도 문지기가 들어가지 못하게 막아버렸다는 것이다.
4) 이는 서구의 효용론적 관점의 시관과 비슷하다. 효용론적 관점은 문학이 독자를 가르치기 위해서 쓰이는 교시적 기능, 독자에게 정서를 전달하여 즐거움을 주기 위해서 쓰이는 쾌락적 기능으로 나눈다.
2024. 2. 16
맹태영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