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송지희 기자의 보살의 길 / 지소태후
지극한 모성으로 불교 중흥 꾀한 신라 첫 섭정자
법흥왕 적통 이은 유일한 딸
어린 진흥왕 대신 11년 통치
신라 진흥왕 10년(550). 양나라로 유학을 떠났던 각덕 스님이 불사리를 품에 안고 돌아왔다.
사리의 안전한 이운을 위해 양무제가 직접 보낸 사신들이 동행했다.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처음으로 신라 땅에 전해진 역사적 사건이었다.
이와 관련 ‘삼국사기’는 왕이 백관으로 하여금 흥륜사 앞길에서 불사리를 맞아들이게 했다고 전한다.
신라 개국 이래 지위고하를 막론한 모든 관료들이
일제히 궐 밖으로 나서 사신을 맞이한 사례는 없었다.
왕명을 받든 관료들이 흥륜사 앞길에 일제히 정렬한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었으리라.
5년 전 중창불사를 마친 흥륜사도 더욱 눈부신 위용을 자랑했을 것이다.
풍악이 울리고 꽃비가 흩날리는 가운데 불사리는 진흥왕의 손에 전해졌다.
선대 법흥왕이 어려움을 무릅쓰고 불교를 공인한지 23년,
불국토를 염원하던 신라인들의 품에 드디어 전해진 이 부처님의 사리는
온 나라를 감동으로 물들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날 전해진 불사리는 신라불교를 한 단계 끌어올리는 계기가 됐다.
사리의 장엄은 불교의 신앙적 기반 확대로 이어졌으며,
양나라와 맺어진 교류가 지속되는 가운데 유학승들이 전해온 경전은
신라불교의 사상적 지평을 넓히는 토대가 됐다.
진흥왕의 정치적 위상도 한층 확고해졌다.
양나라 사신이 직접 불사리를 이운해 왔다는 것은
신라가 고구려나 백제를 통하지 않고 중국과 교류했다는 방증으로,
곧 신라의 국제적 위상이 높아졌음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특히 당시 양나라를 통치했던 양무제의 적극적인 불교장려책들은
진흥왕의 향후 행보에 적지않은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진흥왕. 그는 한반도 역사상 단연 두각을 드러낸 뛰어난 왕으로 손꼽힌다.
즉위 10년만에 불교중흥을 꾀하고
국사를 편찬해 사상적 기반을 확립군사력을 장악했을 뿐 아니라
이를 기반으로 왕권강화를 이끌었다. 또 백고좌법회와 팔관회 개최, 황룡사 등
사찰 불사, 화랑제도 도입 등을 통해 신라 특유의 문화·사상적 기반을 정비했으며,
한강유역과 대가야 정벌 등 영토확장을 통해 삼국통일의 토대를 닦는 등
역사에 길이 남을 업적을 남겼다.
주목할 만한 점은 진흥왕이 7세라는 어린 나이에 즉위했다는 사실이다.
역사적으로 어린나이에 즉위한 왕이 왕권을 강화하고 안정적인 정치를 펼치는 경우는 흔치 않다.
대부분 정권을 장악하려는 아귀다툼에 희생되거나,
중도 폐위 혹은 권력정치의 허수아비로 전락하고 만다.
신라 후대, 만월부인의 섭정을 받다 16년만에 시해된 혜공왕,
숙부에게 왕위를 빼앗긴 애장왕과 조선의 단종을 비롯해
을사사화 등으로 숱한 고난을 겪은 조선 명종이 대표적이다.
이 비극적 사례들은 나이 어린 국왕의 즉위가 왕권 약화의 결정적 계기가 될 수 있음을 뒷받침한다.
그럼에도 진흥왕은 이러한 역사적 흐름과 노선을 달리하며 역사에 유례없을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그 요인은 어디에 있을까.
단서는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4 진흥왕대의 기록이 시작되는 첫 줄에서 찾을 수 있다.
바로 “왕태후의 섭정”이다. 여기서 왕태후란 진흥왕의 어머니인 지소태후를 뜻한다.
그녀는 신라역사에서 최초로 등장한 섭정자인 동시에,
왕이 성장한 후 안정적으로 정권을 넘겨준 이례적 인물이다.
다수의 학자들은 진흥왕이 신라 연호를 ‘개국(開國)’으로 바꾼
12년(552)에 이르러서야, 섭정이 끝나고 왕의 친정이 시작됐을 것으로 본다.
진흥왕 즉위 후 11년간 기록의 주체는 사실상 진흥왕이 아닌 지소태후라는 것이다.
후대 역사가들이 여성인 지소태후를 정치의 전면에 내세우기보다
진흥왕의 기록으로 남기는 방법을 택했기에, 그녀의 업적도 역사의 이면으로 감춰진 셈이다.
지소태후는 진흥왕의 어머니이자 선대 법흥왕의 딸이며,
당시 최고의 전략가 이사부를 애인으로 둔 권력의 정점이었다.
특히 정비였던 법흥왕비 보도부인의 유일한 자식으로 법흥왕의 적통을 잇는다는 사실은
그녀의 혈통적 우수성과 정치적 기반을 든든하게 뒷받침하는 배경이 됐다.
진흥왕이 선대왕의 친아들도 아니고
나이가 어려 역사상 최초로 섭정을 실시해야 한다는 큰 약점을 가지고도,
왕위를 계승할 수 있었던 데는 어머니 지소태후의 출신과
정치력이 작용했음을 쉽게 유추할 수 있다.
그러나 법흥왕의 아버지 지증왕 역시 내물왕 직계가 아닌 신분으로 왕위를 계승했기에,
이 같은 진흥왕의 약점은 당시 왕위를 노리는
다른 세력의 위협이나 반발 요인으로 작용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왕위계승자를 인정하지 않는 세력이 분명 존재할 수 있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혹여 왕위쟁탈전이라도 벌어진다면 힘없는 어린 태자의 목숨이 위태로울 것이 자명했다.
진흥왕이 즉위한 후에도 외부세력의 권력야욕은
시시각각 어린 왕의 안위를 위협하는 불안요소로 작용했다.
진흥왕 즉위 후 지소태후가 무엇보다 왕권의 안정을 위해 각별한 노력을 기울인 것도 이 때문이다.
그녀가 섭정을 시작하고 가장 먼저 행한 일은 죄인을 사면하고
문무관료들을 한 계급 승진시키는 일이었다.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진흥왕이 선정을 베푸는 왕임을 알리고
그 왕위 계승을 만백성과 관료들에게 납득시켜 인정받고자 했던 것이다.
이후에도 지소태후가 어린 진흥왕을 보호하기 위해 발휘한 정치력은 사뭇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아들의 안위를 걱정하는 애끓는 모성이
향후 신라가 안정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토대를 다졌다고 봐도 무방할 듯 싶다.
아들 지키려 왕권강화 주력
영흥사로 출가해 여생 보내
그 첫 번째가 바로 불교를 통한 사상적 기반 다지기다.
지소태후는 섭정 5년 만에 법흥왕 때부터 시작된 흥륜사 불사를 완공했다.
이미 흥륜사에는 법흥왕이 출가해 머물렀음을 감안할 때
아마도 지소태후는 흥륜사를 더욱 웅장한 모습으로 중창했을 것이다.
이는 곧 진흥왕이 골품제의 최상층인 성골(聖骨)임을 증명하는 동시에,
‘왕이 곧 부처’라는 왕즉불(王卽佛) 사상을 널리 알려
아무나 왕이 될 수 없음을 확인하기 위한 정치적 이해와 맞물려 있었다.
불사를 마무리한 직후에는 백성들이 출가해 스님이 될 수 있도록 허용했다.
출가의 허용은 곧 스님의 증가로 이어졌고, 불교가 신라 전역으로 확산되는 기반이 됐다.
불교가 뿌리깊이 자리 잡을수록 토착신앙에 기반한 귀족들의 세력이 약화된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나아가 신라 왕실의 성역화를 이끌어 왕즉불 사상이 토착신앙과 결합해
신라 깊숙이 자리하는 토대가 될 수 있었다.
지소태후는 불심 돈독했던 법흥왕 부부의 외동딸답게
불교의 사상적 우수성을 적극 활용해 왕의 권위를 한없이 높였고
결국 아들이 어린나이에도 왕이 될 수 있는 당위성 확보에 성공한 셈이다.
결국 진흥왕 10년 양나라로부터 불사리를 이운해 온 것 역시
불법을 통해 나라를 안정시키고 왕권을 확립하려는 지소태후의 노력으로 해석될 수 있다.
두 번째는 군사력의 장악이다.
어린왕과 섭정자 지소태후를 지켜주는 든든한 후원자가 있었으니 바로 이사부다.
한국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국민가요 ‘독도는 우리땅’에서 일본의 행태에 대해 “지하에서 웃는다”던 그 신라 장군이다.
지소태후는 진흥왕 즉위 2년째 되는 해
이사부를 지금의 국방부장관격인 병부령에 봉하고 군사를 총괄하게 했다.
이사부가 왕위를 위협하는 외부세력에게서 진흥왕을 지켜내는 울타리였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는 지증왕대부터 군사적으로 두각을 드러냈던 지혜로운 전략가였으며,
진흥왕대 그 기량을 마음껏 발휘해 신라영토 확장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인물이다.
특히 근래에는 이사부가 불교공인을 이끈
이차돈의 삼촌이라는 새로운 해석이 나오고 있어 더욱 흥미롭다.
이사부는 법흥왕대 견제세력이었던 내물마립간계 수장이자,
불교를 반대했던 귀족세력의 구심점이었다.
그러나 법흥왕이 제정한 골품제로 그 힘을 잃어가다
조카 이차돈의 순교로 법흥왕과의 첨예한 대립이 무너지면서
세력의 중심에서 서서히 멀어졌다는 것이다.
이는 이사부가 지증왕대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며 동해안 영토 수복,
울릉도 정벌 등 숱한 공을 세웠음에도, 법흥왕대에는 중용되지 않았던 이유를 뒷받침한다.
진흥왕대 다시 권력의 중심에 등장한 이사부는
진흥왕 6년 국사편찬을 건의해 위상 정립을 이끌었을 뿐 아니라,
지소태후가 섭정에서 물러난 후에도 진흥왕을 가까이서 보필하며
한강지역과 대가야를 정벌하는 등 영토확장의 주역으로 삼국통일의 근간을 다졌다.
지소태후와 이사부가 실제 연인관계였는지 여부는 확신하기 힘들다.
두 사람을 연인관계로 묘사한 기록은 지금까지 진위논란이 지속되는 ‘화랑세기’가 유일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화랑세기’로 나타난
두 사람의 관계는 정치적 이해관계를 떠나 애틋하고 진실한 사랑 그 자체다.
둘 사이에는 넘어설 수 없는 신분의 벽이 있었기 때문에,
아들 하나(세종)와 딸 셋을 낳았어도 모계혈통에 따라
이사부는 자식의 아버지보다 신하의 위치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지소태후는 이사부를 ‘지아비’로 섬기며 존경의 태도를 잃지 않았고,
진흥왕 역시 이사부에 대해 아비의 예를 다하고 세종을 친동생과 같이 아꼈다고 한다.
법흥왕대 이사부가 불교에 대해 반대입장을 견지했더라도
지소태후를 도와 진흥왕을 보필하던 시기에는 불교신자가 되었으리라는 예측도 가능하다.
조카 이차돈의 죽음을 계기로, 또 불심 깊은 지소태후와의 깊은 감정적 교류를 통해
서서히 불교에 매료됐을 지도 모를 일이다.
어찌됐던 이사부와 지소태후의 관계는 법흥왕대부터 이어져온 견제세력을
척결하는 계기가 됐을 뿐 아니라 왕실과 귀족의 정치적 세력다툼이 끝나고
신라를 내부적으로 통합하는 토대가 됐을 것으로 보인다.
삼국통일을 이끄는 주요한 토대가 된 화랑제도
역시 지소태후 섭정 기간에 형성됐다는 견해도 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화랑제도가 진흥왕 37년 성립됐다고 기록돼 있지만
이미 14년 앞선 23년 무렵 ‘화랑이 사다함 무리를 이끌고
대가야 정벌에 나서 공을 세웠다’는 사실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지소태후가 여성단장 원화를 폐지하고 남성단장을 중심으로
화랑제도를 개편했다는 기록을 통해,
화랑도가 형성된 시기가 진흥왕대 초 지소태후의 섭정기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신라시대 화랑도는 토착신앙과 불교신앙을 아우르며 토착민들을 통합하고
왕실을 보위하는 중심 세력이었다. 그렇다면 지소태후는 뛰어난 지혜와 정치력으로
아들 진흥왕이 아무런 걸림이나 장애 없이 정치를 펼 수 있는 기반을 확실하게 조성해 놓은 셈이다.
섭정을 마치고 진흥왕이 정치의 전면에 나서는 과정에서도
별다른 잡음이 없었다는 사실은 지소태후의 정치력이
오롯이 아들로 향했음을 거듭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희대의 정치가이자 모성의 대명사 지소태후도 말년에는
어머니 보도부인이 출가했던 영흥사로 출가해 여생을 보냈다고 전해진다.
이미 진흥왕 11년 불교의 제반업무를 관장하는 부서와 승관제가 확립돼,
전국의 사찰과 승려를 국가 차원에서 관리하고 있었기에
지소태후는 출가 후에도 비구니의 리더로서 여성불교를 이끌었을 것으로 보인다.
결국 지소태후는 한평생 아들에 대한 극진한 사랑으로 왕실과 나라의 평안을 발원하며
신라 호국불교를 이끈 주역이었던 셈이다.
2012. 04. 17
법보 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