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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윤 은 숙
점 하나가
내게 왔습니다
그 점은 점점 커져
지구가 됐어요
나는 그 지구를 감당 못해
쓰러졌습니다
지구는 이내
우주를 불렀어요
우주는 쓰러진 나를 일으키더니
천국으로 초대했습니다
천국에는
기운이 없는 나를 안고 있는
당신이 있었습니다
희망
외출해 돌아와 코트를 벗는데 인생이라고 하는 소녀가 아는 체를 한다 코트를 옷걸이에 걸으며 자기를 알게 해 주고 싶다고 한다 렌즈를 씻으며 화장을 지우며 말을 잃은 나에게 노래를 불러달라 한다 방문을 열어 달을 보여 주고 달에 대해 얘기하자고 한다 고백할 게 있다고 한다 세수를 하고 발을 씻는 나는 그 소녀를 쳐다볼 여력이 없다는데 볼을 만지고 머리카락 귀에 꽂아주며 친하자고 한다 쓸쓸한 허리에 이불을 덮어주며 살포시 안아 잠들게 한다 꿈에서도 내 곁에 와 미처 하지 못한 말이 있다고
“항상 너를 사랑해”
직선
너에게 직선으로만
가고 싶었다
에둘러 가지 않고
곧장 가고 싶었다
너를 만나고
뒤를 돌아보면
내가 온 길은
늘 곡선이었다
그리움에 치이고
외로움에 밟히고
한 번도
곧은 적이 없었다
앞으로
너에게는
직선으로만 가고 싶다
모나지 않고
굽지 않게
너만 향해서
반듯이 가고 싶다
* 충남 부여 출생,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졸업, ≪시, 시조와 비평≫(1998) 시부문 신인상, 시집 ≪오래된 남편≫.
나의 기도문
김 기 태
대대로 이어오는 유전인자를 품고,
경주 김씨 태사공파 후손으로 살게 해주신 조상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건강하고 바르게 커 준 자식들도 고맙고
나를 알고 나를 키워 나답게 살아가도록 도와준 아내도 감사합니다
바라옵건데,
젊었을 때는 경쟁 사회에서 쳐지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며 살았고,
때로는 가장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 진흙탕에 발을 디디며 살기도 했지만,
이제는 내 삶에 내가 주인공이 되어 결 고운 삶으로 살게 해주소서
자식들이
"나도 나이 들면 아빠처럼 살고 싶어!" 라는 삶을 살게 해주소서.
서푼 어치도 안 되는 명예에 집착하지 않게 해주시고.
재산은 내가 살아가는데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고 살 정도에서 만족하게 해주시고,
작은 차에 작은 집에서 옛날 머슴들이 먹던 거친 음식으로 검소하게 살게 해주소서
내가 하고 싶은 일에 흘러가는 시간 붙잡고 씨름하며 살게 해주시고,
나는 아무 문제가 없는데 주변에서 나를 보고 문제가 있다고 말한다면,
나도 모르는 사이 그런 행동을 하였기에,
앞으로는 나의 편견으로 세상을 살지 않게 해주소서
매사 세상일에 간섭하며 꼰대로 살지 않게 해주시고,
그렇다고 참여해야 하는 일에 침묵하며 존재감 없이 살지 않도록 하게 해주소서
손자 손녀에게도 ‘할아버지가 자랑스럽다.’고 느끼게 해주시고,
내가 있어 세상이 즐겁게 살다 가게 해주소서
살아 있음에 항상 감사하며,
잠에서 깨어날 때 하는 일이 있어 설레는 마음으로 아침 해를 맞이하게 해주소서
이렇게 살다 때가 되면
조상님이 잠들어 계신 옆으로 조용히 돌아갈 수 있도록 두 손 모아 기도합니다.
기술자의 기도문
매일 아침
기대와 설렘을 안고
일을 시작하게 해 주시고,
항상 미소를 잃지 않고
나로 인해
남들이 마음 상하지 않게 해 주소서.
상사와 선배를 존경하고
동료와 후배를
사랑할 수 있게 해 주시고,
아부와 미움
교만과 비굴함을
멀리하게 해 주소서.
하루에 한 번쯤은
지구를 밟고 하늘을 쳐다보며
넓은 바다를 상상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주시고,
일주일에 몇 시간은
한 권의 책과
친구와 가족과 더불어 보낼 수 있는
오붓한 시간을 갖게 하여 주소서.
한 달에 하루쯤은
지나온 날들을 반성하고
미래와 인생을 설계할 수 있는
시인인 동시에
철학자가 되게 하여 주소서
작은 일에도
감동할 수 있는 순수함과
큰일에도 두려워하지 않는
대범함을 지니게 하시고,
적극적이고 치밀하면서도
다정다감한 사람이 되게 하여 주소서
자신의 실수를 솔직히
시인할 수 있는 용기와
남의 허물을 따뜻하게
감싸 줄 수 있는 포용력과
고난을 끈기 있게
참을 수 있는 인내를
더욱 길러 주소서
시련의 날들을
용기 있게
극복할 수 있도록 해 주시고
한발 앞서감이
영원히 앞서감이 아님을 인식하게 하시고,
또한 한 걸음 뒤처짐이
영원히 뒤처짐이 아님을
알게 해 주소서.
매사에 충실하여
무사 안일에 빠지지 않게 해 주시고,
매일 보람과 즐거움으로
하루를 마감할 수 있게 하여 주소서
그리하여
현장을 떠나는 날에
과거는 모두 아름다웠던 것처럼
내가 만나고 헤어지고
혹은 다투고 이야기 나눈
많은 사람의 가슴속에
인간성이 괜찮은 놈으로
기억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쁜 아침
사람을 좋아하고
만남을 즐겨하여
그저,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이 아침
장기를 두 번째 반납하며
어설프게 죽을 뻔했지만
어디서 끝날지 모르는 여정에
아껴주는 사람이 있어 좋고
함께 밥 먹을 친구가 있어 행복하다
익어가는 인생길
고마운 사람들과 함께 하는
음악처럼 흐르는 이 아침
오늘을 맞이할 수 있어 행복하고
살아 있기에
누릴 수 있는 것이 많아
더 예쁜 아침이다.
1,111원
오다가다
한눈에 반한 여인
은행 다니는 걸 알고
1,111원을 들고 찾아갔네
점심시간
창구에는 여행원만 있는데
눈길도 안 주고
1,111원을 입금시켰네
1,111원 들고 매일 찾는데
3일 후 들어가니
직원들이 1,111원 왔다고
수군거리네
돈에
부전지 붙여
오늘 저녁 7시
원두막 다방에서...
5일 후 원두막에
그녀가 나타났네
돈을 오른손으로 받으면 나오고
왼손으로 받으면 못 나오기로
믿거나 말거나 약속했네
첫사랑은 그렇게 시작되었네
1,111원의 힘이었네
* 충남 서천 판교 출생, 글지이, 부름새, 서각인, (전)계룡건설 토목본부장, 온동 마을 촌장, 수필집 삶의 시방서, 소똥 위에 홍시, 살아보니 어뗘, 그려, 하고집이 등. blog.daum.net/ondong
그리움 따라서
전 월 득
아카시아 꽃향기 그윽한 봄날
뻐꾹새 울던 시골길 따라
어머니 아버지 계신 곳으로
나들이 나선 우리 자매들
초연히 살아 계신 듯
어버이날
국화꽃 한 다발 가슴에 안고
허공을 응시하며 선산으로 달렸다
청정지역 칠갑산 자락
햇나물에 청국장 비벼 먹으며
목이 메는 큰 언니와 둘째 언니
나와 동생이 모르는 설움이 있었나 보다
고고하신 아버지 주야장천 책장만 넘기고
엄마 혼자 짧은 해를 원망하던 농사일
흘러내리는 허리춤 추켜세우던 허기진 뒷모습
이제는 풍요로워 더 아린 그리움이다
숙제를 풀었네
친구 따라 강남 가듯
유구장에 들러 사 온
검정 고무신 한 켤레
내 집 신발장에
손님처럼 모셔 놓고
숙제 하나 만들었네
그 언제쯤 동행할까
어디를 가야 하나
기다리고 기다리다
꽃비 내리는 날
황톳길로 데려갔네
초입에 내려놓고
보들보들 황톳길을
맨발로 걸어 보네
조용히 눈도 감아 보네
고향의 잔디밭에
깨복쟁이 친구들이
맨발로 달려오고
개울가 송사리 떼
오밀조밀 몰려드네
섬진강 벚꽃
벌거벗은 몸
두꺼운 각질
얼얼한 바람에 눈 비비며
흐르는 섬진강 물 부여잡고
구례역사 지키네
허허로운 강둑
훑고 가는 바람 소리
온몸 비틀며
봉긋한 새 생명
잉태하는 너
4월이 오면
비누 거품처럼 피어나는
너를 그리며
물방개처럼 모여드는
시를 먹고 사는 사람들
오월
금학생태공원
은빛 호수
네트 벤치에 누워
파란 하늘 속에 빠졌다
산도 푸르고
물도 푸르고
내 마음도 푸르다
창공을 나는
들새들의 합창
저 하늘 끝까지
날아가고 싶다
고희가 무색한 순이
푸른 물결 넘실넘실
고동치는 오월의 하루
* 충남 부여 출생, «상상의 힘»(2020) 수필부문 신인상, 대전문학(2024) 시 부문 신인상, jwd5038@naver.com.
호국 전사자에게 보내는 편지
김 근 수
장미꽃 향기 싱그러운 유월을 바라보면
하늘을 채우는 새소리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집니다
그러나 이날은 다릅니다
한없이 슬픔이 가득한 하늘을 바라보며
그들이 흐르는 강물처럼 우리 마음에도 흐르는
그 빛을 따라가야 합니다.
잊히지 않는 그들의 희생과 나라를 위하여 흘린 피는
우리를 힘껏 지켜주고 감싸주는 친구이며
빛나는 별이 되어 우리를 비추고 있습니다.
그들의 조국을 향한 따뜻한 손길을 기억하며
그들의 빛나는 미소를 떠올려 봅니다.
어둠이 깊어지고 눈물이 흐르더라도
우리는 그들의 희생을 영원히 추모하며
그들의 이름을 불러주며 머물러 함께 있을 겁니다.
전사자들이여!
당신들의 희생은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 한국문인협회 회원, (사)국보문인협회 작가협회 회장, 제11회 대한민국 국회 문화예술 명인대전 시 부문 대상, 대전광역시 대전사랑 시장 표창, 대전 중구 청소년 문예 대상 수상, 국무총리 청소년보호위원회 유공자 표창, 문화체육관광부 ‘책읽기 캠페인’ 초청 작가, 한국농촌문학상 대상 수상, 농림수산식품부 장관상 수상, 한국문학신문 대전광역시 본부장. 기자, 세계 청소년동아리대회 백일장 심사위원, 서원대학교 통일부 주관 전국 시 낭송대회 심사위원장, 시집『유천동 블루스』,『오월의 연가』외
강가에서
오 병 남
쇠기러기 잠든 강가
가로등 켜질 무렵
붉은 산자락 그림자
강물에 잠겨 있다
석양빛 강물에 잠겨
금빛 노래 부를 때
소풍 나왔던 왜가리도
간 곳이 없고
슬픔도 기쁨도
잠재우려는 듯
물길은 시간을 다독이며
자박자박 흘러가고 있다
세상 이곳저곳에서
만난 소중한 인연들
헤어지기 못내 아쉬워
소리라도 내며 가려는 것이다
폐지 줍는 할머니
아까운 것
좀 더 오래 살다 오지
기역 자 허리로 묶은
먼지 쌓인 폐지들을
백발 할머니가
두 바퀴 손수레로 밀고 갑니다
거품같은 세월 속에
네 바퀴 차를 타고
바람처럼 떠난 사람들
이젠,
남이 버리고 간 시간조차
헛헛한 바람으로 밀려오는 저녁
외로움조차 사치가 되었습니다
마지막 남은 햇살 아껴가며
할머니를 끌고 가는 늙은 수레
뒤뚱뒤뚱 아등바등 드르릉
노을 진 언덕을 오르고 있습니다
봄비
빗방울 하나에
꽃망울 하나
빗방울 하나에
그리움 둘
그대의 속삭임 듣고 있으면
조용히 움터오는
희망의 노래
그리운 얼굴들
아카시아꽃
선녀의 옷자락을 훔친
바람의 향기 속에
분칠한 엄마의 냄새가 난다
사람들의 이야기도 들린다
하이얀 꽃주머니 속에
주절이 주절이 담고 있는
마을 이야기
가시를 품고 있는 것은
부정을 막기 위함이다
버선발 속에는
빨빨대는 꿀벌들이
산 너머 순이네 밥상 이야기
강 건너 새신랑 사랑 이야기로
앵앵 수다를 떤다
오는 이
가는 이 없는
마을 뒷산에 서서
상엿소리 들은 지 언제던가
나도 아카시아 나무 되어
분칠한 엄마를 기다려본다
헛발질
시를 쓸 때마다
헛발질이다
축구선수가
헛발질을 자주 하면
퇴장이지만
헛발질로 시를 써도
하늘도 땅도
나무라지 않고
조용히 기다려 준다
빗나가게 쏘아 올린
욕망의 화살들
도대체, 시 다운 시들은
어디에 숨어 있을까?
시인이라고 착각하면서
걸어온 막막한 시간
시속에 들어가
온몸으로 기도한 적은
있었던 것일까?
* 충북 청주 출생, 청주교대 졸업, 한국미술협회 회원, 가톨릭 미술가회 회원, 대전사생회 회원,
시집 『당신은 나에게 선물이었어요』
고마나루 연가
이 석 구
정안천 저 버들은
물오르면 피어나서
버들버들, 봄만 되면 노래하고
연미산 저 소쩍새
달밤이면 날아와서
소쩍소쩍, 보고픈 임 불러대네
금빛 은빛 환복하며
만년 흐른 저 금강은
뭉실뭉실, 절경 앗아 가건마는
예쁜 고마나루
봄 갈의 옛 그리움
문뜩문뜩, 가슴강에 절절하네
감 씨
숟가락 하나
앙증맞게 움켜쥐고는
황톳빛 적막 속에 갇혀 있구나
훈훈한 살가움이 너를 부르고
촉촉한 사랑이 한, 일 년쯤 감싸 안은 뒤에야
너는
슬며시 마음 열겠다
세상이 모진 탓이냐
그리도 꼭꼭 움켜쥔 숟가락 하나
오, 안쓰러워라
그것은 정녕
어머니, 당신의 마음인가
큰개불알풀
음심이 앞서서인지
개불알도 아니고 큰개불알풀이란다
지상의 비단 한 폭
옅은 청자색 이리도 아름다운걸
두 청춘 고개 들어 한껏 자존심도 세웠거늘
개불알도 아니고 큰개불알풀이란다
살포시 햇살도 반해 앉아
요리 살짝 조리 살짝
꽃 무리, 고 귀요미에 폭 빠져버렸네
아, 그 꽃술
새의 눈을 닮았으니 새눈풀
그래, 차라리 새눈풀로라도 불러야겠다
호안끼엠
사람 오토바이 자동차, 그리고
서툰 이방의 호기심들이 뒤엉켜 어우러진 복판
호안끼엠의 거리에는 질서란 없어 보였다
달이 그렇고 해가 그렇고
무수하게 빛나는 밤하늘의 별이 그러하듯
운행하는 것들은 나름의 질서가 있는 것인데
대체 호안끼엠에 감추어진 그 질서는 무엇이란 말인가
인도에 널브러진 좌대
아무렇게나 앉아 본능에 충실한 사람과 빼곡히 누워 잠든 오토바이
천진한 삶에는 질서도 필요 없는 것인지
불안하게 내몰린 호기심들은 아슬한 벼랑에 가 걸리고
사람들은 그저 태연하기만 하였다
음양의 극단에서 시소 하며
시간의 길이가 닿는 데까지 촘촘하게 덧대어 온 약속이지만
어느 것 하나 완벽이란 없어 다시 돌아가는
시간은
휘어진 동그라민가
느림의 뒤안에서
얼굴 감춰 디미는 회전교차로
마음으로 읽는 무질서의 질서, 호안끼엠
종일 비 내리던 날의 상념
깃털 헝클어진 참새 한 마리
빗속에서 날아와
휴안옥 노대 난간에 앉았다
목을 삐죽빼죽
다리 또한 촐싹이며 창 안을 기웃거린다
무엇이 그리도 궁금했나
도굴꾼 눈에 든 웅진의 역사는 텅 비어버린 허무
그래도 무령, 당신 만은
껴묻거리 끌어 앉고 천오백 년 그 긴 비밀 지켰다는데
보잘것없는 서너 평 방
청춘의 멜로디 잃은 묵언의 기타
기다란 책상 타고 노는 컴퓨터와 티비
그리고, 옷가지 걸린 철제 가구에 침대 하나가 전부인 것을
한 치의 휘어짐도 없이 치닫는 비
빗줄기 속 나는 달콤하게 흘러내리는 한 폭의 수채화
넓지 않은 상념의 김이 모락모락
셀 수 없는 갈래로 피어오른다
주아는 지금
발차기하고 있을까 아니면 새근새근 잠들어 있을까
아직 엎치지는 못해도 곧잘 옹알거렸는데
말은 언제쯤에나 하려나
어떤 기표를 앞세워 신비의 성을 지어 가려나
깨물고픈 귀요미 버둥거림이
저 빗속에서도 맑은 채도로 아른거리니
조용한 기척에조차 놀랐는지
파르륵, 참새는 어디론가 날아가 버리고
아직도 비는 그칠 줄을 모르고
아,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한나절이나 빗속에서 노닐다간 장끼
어제 왔던 그 장끼나 또 왔으면
* 충남 논산 출생. 이학박사. 한국문인협회 회원. 시집 『초승달에 걸터앉아』, 『서두르지 않아도 돼요』, 『흐뭇한 삶』 등. seokkoo@hanmail.net
벚나무길
곽 경 상
며칠 전부터
꽃망울이 터지기 시작한다
심술 많은 미세먼지가 찾아와도
눈이 부시도록 꽃들은 피어나고 있다
온 땅에 꽃이 가득하다
여기저기 봄꽃 보며
누려보는 인생길
나를 잊은
누군가의 가슴에
꽃으로 피어나고 싶다
자랑하고 싶은 길
거실 안 작은 오솔길
씨앗을 보듬으면
꽃도 피는 길
아침마다
잘 잤어?
꽃마다 인사를 한다
목말라요
거름이 없어요
말도 잘하는 친구들
나는 오늘도
누군가에게 자랑하며
옛집 앞마당을 걷는다
* 충북 옥천 출생, 충북대 행정대학원 수료, 옥천군청 여성회관 관장, 충북 보육시설 연합회장
노부부
류 주 현
우리 동네엔 매일
손수레를 끌고 부부가 오신다
눈이 와도 비가 와도
온 동네 파지를 챙기는 부부
한낮 불볕더위로
지친 땀방울을 훔치는 그들에게
시원한 냉차를 건넨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뭉클한 미소
부부의 연륜만큼이나 낡은 손수레
얼마나 걸었는지 바퀴가 하얗다
짊어져야 가벼워지는 몸둥이
그들의 생을 싣고 또 싣는다
개태사(開泰寺)
해 질 녘 신종(神鍾)의
서른세 번 타종 소리
미물도 땅속으로 들어가라는
끝 종소리에 놀라
천연지를 건넌다
무탈한 하루를 보냈음에 감사하며
산새처럼 나래 접고 귀가하는
중생의 또 다른 행보
수통골 할머니
오늘도 할머니는
길 위에 좌판을 펼친다
갓 뜯은 냉이 시금치
작년에 주운 밤 말랭이
금수봉 도덕봉 빈계산 산행으로
들뜬 기분의 행인들
쏠쏠한 눈요기로 지갑을 연다
노파는 손주 용돈이 생겨
엉덩이가 절로 들썩댄다
덩달아 환히 웃는 사람들
계곡물도 걀걀걀 따라 웃는다
봄의 교향곡
산새들 노랫소리
연둣빛 잎에 내리는 빗소리
계곡의 물소리
봄으로 가는 모든 소리는
한 편의 교향악이다
홍매 백매 수선화
보랏빛 진달래
빼곡히 돋아난
곰취 머위 가족이 있다
동산의 문은 열리고
봄의 향취에 놀란
산새들의 지저귐은
더욱 높아지고
신선봉 넘나드는 바람은
몽우(濛雨)와 벗을 한다
내 가슴을 적시는
빗살무늬 같은 봄비
촉촉한 마음은 어느덧
고향의 들판으로 달려간다
밤꽃
희끗한 머리에 얹혀 오는
야릇한 밤꽃 비린내
주전자에 달빛 한 줌 풀고
산까치 소리 한 줌 넣어
탁배기를 기울인다
달빛 기우는 소리
별빛 흐르는 소리
목구멍 트이는 소리
다디단 소리가 날 때마다
하얀 밤꽃 소복이 피어난다
* 대전 정동 출생, 한밭대학교 문학창작과정 수료, <상상의 힘>으로 작품활동 시작
삶이란
심 현 지
언 땅을 뚫고 올라오는
파아란 숨소리
나는 기다리네
날 찾아올 누군가를
녹음이 하늘을 가릴 때쯤이면
나는 또 기다린다네
단풍이 물들고
시간이 익어가는 소리를
알곡 걷어낸 들판에
찬 바람 일고
추녀 밑에 장작이 쌓여갈 때
나는 또또 기다린다네
백설(白雪) 공주 또는 왕자를
두 손 호호 불며
제야의 종소리 들을 때
나는 또또또 기다리네
함께 웃을 누군가를
튤립
아름다운 눈동자,
이보다 더 그윽한 꽃말이
또
어디 있으리
왕자와 왕관
기사와 검
거상과 황금에
어떤 소녀인들 흔들리지 않으리
선택을 머뭇거린 것이
어디 흠이랴
플로라 여신도 그의 죽음이 가여워
환생시킨 사랑의 꽃
꽃송이에는 왕관을
잎에는 기사의 검을
뿌리에는 황금 덩이를 거느린
아름다운 여신이 되었네
* 대전 유성 거주, ≪중도문학≫ 신인상 수상(2022), hg42500@gmail.com
그리움
이동기
아득한
시간 속에 고여 있던
익숙한 그리움이
파도처럼 밀려옵니다
꽃향기
피어오르는 봄날
바람결에 들려오는
어머니의 목소리
세월은 가고
사람도 갔는데
옛 동산 무덤 위에는
어김없이 봄이 찾아왔습니다
물 먹은 별을 달래듯
마음을 다독이는 시간
고향의 언덕은 늘
따듯한 언어입니다
할머니
텔레비전 보시다
아기가 나오면
아이구 아이구 예뻐라
손뼉을 치신다
길을 가다 꽃 만나면
아유 아유 예뻐라
감탄사 연발이다
온 세상이 예뻐 보이는
우리 할머니
얼굴이 환한 게
피어나는 봄꽃 같다.
너랑 살고 싶다
싱그러운 아침
깊은 산골짜기
거미줄 친 외길
초가집
군불 때는 아궁이
방 한 칸
수다 떠는 새들
보들보들한 저녁
* 경기도 양주군 동두천 출생, 한국방송통신대 국문과 졸, <상상의 힘>으로 작품활동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