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4장1-12절 다른 이로써는 260506 원주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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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 때에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도개인들이 이르러 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백성을 가르치고 전함을 싫어하여 그들을 잡으매 날이 이미 저물었으므로 이튿날까지 가두었으나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 이튿날 관리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는데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참여하여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묻되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이르되 백성의 관리들과 장로들아 만일 병자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한다면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아멘.
1. 복음 전파와 이적의 동행: 하나님은 여전히 살아계신다
할렐루야! 오늘 우리가 대면하는 사도행전의 현장은 초대교회의 폭발적인 부흥과 그 이면의 치열한 영적 전쟁을 동시에 보여줍니다. 특히 솔로몬 행각에서 일어난 역사는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신앙의 원리를 가르쳐 줍니다. 그것은 바로 "이적과 복음이 함께 흐를 때 영혼 구원의 역사가 일어난다"는 사실입니다.
나면서부터 못 걷게 된 사람이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난 이 충격적인 사건은 단순한 기적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가 누구신가'를 증명하는 강력한 표적이었습니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이성적인 잣대로만 성경을 판단하려 합니다. 과학의 시대에 무슨 기적이냐고 반문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어제의 하나님이 오늘의 하나님이시며, 내일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과거에 행하셨던 일을 오늘날 행하시지 못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인생의 절박한 끝에 서 본 적이 있습니까? 인간의 힘으로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벼랑 끝에 선 사람을 보십시오. 자기 인생이 무너질 때는 누구나 기적을 바랍니다. "하나님, 살려주십시오!"라고 울부짖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희한한 것은, 자기가 평안할 때는 남의 인생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역사를 "요즘 그런 게 어디 있느냐"며 비웃는다는 점입니다. 암 4기로 사형 선고를 받은 환자 앞에서, 혹은 사랑하는 자녀가 죽어가는 부모 앞에서 우리는 그런 냉소적인 말을 내뱉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믿음의 사람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주님은 기도를 통해 용한 의사를 만나게도 하시지만, 때로는 직접 손을 얹어 초자연적인 이적을 행하시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적의 가능성을 열어두어야 합니다. 다만, 이적은 '적절해야' 합니다. 기적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 현상만 쫓아다니는 '기적주의'는 위험합니다. 이적의 진정한 목적은 그 표적을 통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영혼이 회복되는 데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남자만 5,000명이 돌아온 대부흥의 역사 역시, 이적이 복음을 지시하는 손가락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기에 가능했습니다.
2. 패러다임의 전환: 성전 제사인가, 십자가 희생인가?
성령의 불길이 번지자 성전 안은 긴장감에 휩싸였습니다. 대대로 양을 잡아 제사를 드리던 종교 지도자들은 본질적인 질문에 부딪혔습니다. "누가 진짜인가? 우리가 드리는 제사가 진짜인가, 저들이 전하는 예수가 진짜인가?"
결론은 명확합니다. 예수가 진짜입니다. 그렇다면 구약의 제사는 가짜였습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귀한 신앙의 틀이었으나, '유통기한'이 정해진 예표였습니다. 양을 잡아 드리는 제사는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오실 때까지 모형으로 보여주신 그림자였습니다. 인류의 모든 죄를 짊어지신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단번에 자신을 드리심으로 모든 제사는 완성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짐승의 피가 아니라 예수의 보혈을 의지하여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진리의 패러다임이 바뀐 것입니다. 이 구원의 실제를 경험하는 방법은 오직 '회개'뿐입니다. 세상 사람들도 반성하는 일기를 쓰며 결단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의지에 불과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회개는 예수 안에서 이루어지는 결단입니다. 주님의 보혈에 죄를 씻고 성령의 능력으로 새사람이 되는 과정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른 것'과 '틀린 것'을 철저히 구분해야 합니다. 성도 간의 이해관계나 생각의 차이는 '다른 것'입니다. 이는 서로 조율하고 용납하며 "당신 말도 일리가 있다"고 인정해주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진리에서 벗어난 것, 하나님의 법을 어긴 것은 '틀린 것'입니다. 틀린 것은 조율의 대상이 아니라 회개의 대상입니다.
선진국일수록 조율의 미학이 중요합니다. 미국이나 한국이 겪는 수많은 갈등은 저마다 '내가 옳다'고 주장하며 조율하지 못하기 때문에 발생합니다. 그러나 죄 사함만큼은 인간의 조율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의 피만이 죄의 담을 허물 수 있습니다. 나면서부터 못 걷게 된 자가 일어난 사건을 보며 사람들은 "예수가 진리구나!"라고 깨달았습니다. 그 깨달음이 5,000명의 영혼을 주께로 돌려놓았습니다.
3. 담대한 베드로: 세속적 종교 권력을 향한 선포
복음의 확산은 기득권 세력에게 위기였습니다. 교인들이 다 떠나가면 그들의 종교적 지위와 경제적 기반이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사도들을 잡아들여 신문합니다. 안나스, 가야바, 요한, 알렉산더... 이들은 당시 사두개파의 거물들이었습니다. 흥미롭게도 '알렉산더' 같은 이름은 이방인의 이름입니다. 그들은 종교인의 탈을 썼으나 속은 로마의 권력에 아부하고 세속적 안위를 쫓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사도들에게 묻습니다.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이 질문 뒤에는 예수님을 죽였던 그들의 서슬 퍼런 칼날이 숨겨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현장의 베드로는 예전의 겁쟁이가 아니었습니다. 성령이 충만한 그는 권력자들의 폐부를 정확히 찌릅니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았으나 하나님이 다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었다!"
베드로는 증인을 옆에 세워두고 선포합니다. "너희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 그리고 인류 역사를 관통하는 가장 위대한 독선이자 절대 진리를 선포합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4. 오직 예수: 교회 밖의 도전 (종교 다원주의)
성도 여러분, "오직 예수"라는 진리는 지난 2,000년 동안 끊임없이 도전받아 왔습니다. 사람들은 묻습니다. "왜 기독교만 옳다고 하느냐? 불교, 유교, 도교도 다 착하게 살자는 것 아니냐?"
그러나 우리는 진리의 본질을 냉정하게 보아야 합니다.
유교는 구원의 종교라기보다 사회 통치 철학, 즉 인(仁)을 바탕으로 한 정치 경제학에 가깝습니다.
불교는 '윤회'를 말하지만, 그 윤회를 심판하고 주관할 주체가 모호합니다. 무신론적 성격이 강하면서도 내세의 보응을 말하는 논리적 모순이 있습니다. 동양의 전통 신관은 원래 단일 신관(Monotheism)이었습니다. 몽골의 '탱거리'나 중국의 '상제' 사상은 노아의 후손들이 간직했던 '하늘 하나님'에 대한 파편화된 기억입니다.
우리 민족의 '하나님' 고백도 마찬가지입니다. 가톨릭의 '하느님'과 개신교의 '하나님'은 어원의 차이가 있으나, 본질적으로는 평양 대부흥을 거치며 우리 민족의 언어로 정착된 유일신에 대한 표현입니다.
중요한 점은 어떤 이름을 부르느냐가 아니라 "그 안에 속죄의 은혜가 있느냐"입니다. 타 종교에는 인간의 죄를 대신 짊어지는 '대속'의 개념이 없습니다. 불교의 정화는 자기 수행을 통한 비움이지만, 인간은 결코 스스로를 비워 죄를 씻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기독교의 역사는 수직적입니다. 시작과 끝이 있고, 죽음 뒤에는 반드시 심판이 있습니다. 이 심판을 통과하는 유일한 길은 내 공로가 아니라, 나를 대신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것뿐입니다.
5. 오직 예수: 교회 안의 도전 (명목상의 신앙)
진리에 대한 더 무서운 도전은 사실 교회 안에서 일어납니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명목상의 신앙'에 머물러 있습니다. 유럽과 미국의 텅 빈 교회들을 보십시오. 유아 세례는 받았으나 성탄절에나 겨우 얼굴을 비추는 '무늬만 그리스도인'이 넘쳐납니다. 그들에게 복음은 종교적인 가면에 불과합니다. 영적으로 거듭나지 않았기에 그들은 절에 가는 것이나 교회에 가는 것을 비슷하게 여깁니다.
우리 자신을 돌아봅시다. 십자가의 피 묻은 복음을 정말 경험했습니까? 그 복음이 나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습니까? 요즘 젊은 세대는 무신론의 시대를 삽니다. 부모가 목사나 장로여도 교회에 나가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제 조상조차 믿지 않습니다. 오직 자신의 기술, 머리, 인맥, 즉 '나 자신'을 믿습니다. 과학과 자본이 신이 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일수록 우리는 더 강력하게 선포해야 합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 이 말씀은 박물관의 고전이 아니라, 오늘날 방황하는 모든 영혼에게 들려주어야 할 유일한 생명줄입니다. 지식으로 아는 것을 넘어 내 존재 전체가 이 진리 앞에 굴복해야 합니다. "주님, 오직 예수만이 나의 생명이요 구원입니다!"라는 고백이 터져 나올 때, 우리는 비로소 세상을 이길 능력을 얻게 됩니다.
6. 결론: 예수의 이름으로 승리하는 삶
말씀을 맺습니다. 사도 베드로가 서슬 퍼런 권력자들 앞에서 선포했던 그 권세가 오늘 우리에게도 필요합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를 유혹할 것입니다. "적당히 타협하라, 다른 길도 있다고 인정하라"고 속삭일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생명이 걸린 일에는 타협이 없습니다. 구원의 이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이 진리 위에서 흔들리지 마십시오. 이적을 행하시고, 죄를 사하시며, 사망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오늘 여러분의 삶에 실제적인 능력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병든 자를 일으키고 상한 마음을 위로하며, 영원한 천국 길을 제시하는 그 이름을 붙드십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며 날마다 구원의 감격을 누리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좋으신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오늘 주신 사도행전의 말씀을 통해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유일한 구원자이심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세상은 이성이 신앙을 압도하려 하고, 세속적인 가치가 복음의 능력을 가리려 합니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성령으로 충만케 하여 주옵소서. 베드로가 가졌던 그 담대함을 우리에게도 허락하셔서, 세상 어떤 위협 앞에서도 당당히 "오직 예수"를 외치게 하옵소서.
우리 삶의 현장에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아픔과 고통이 있습니까? 나면서부터 못 걷게 된 자를 일으키신 주님의 능력이 오늘 우리의 삶에도 나타나게 하옵소서. 그러나 눈에 보이는 이적보다 더 큰 기적인 '영혼의 구원'을 날마다 찬양하게 하시고, 주께로 돌아오는 영혼들을 보며 기뻐하는 저희가 되게 하옵소서.
날마다 주 예수 그리스도 그 이름의 영광을 보며 승리하기를 원합니다. 아버지의 뜻을 이루고 주님의 마음을 시원케 해드리는 은혜의 주인공들이 되게 인도하여 주옵소서. 모든 것을 주님께 의탁하며,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