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그리스도 (1495)
히에로니무스 보스
히에로니무스 보스(Hieronymus Bosch, 1450-1516)는 독창적인 작품을 그려
‘서양미술사의 섬’ 같은 존재가 되었다.
그는 얀 반 에이크와 피터 브뢰겔 사이에 위치하며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거의 같은 시기에 활동한 화가다.
그는 ‘고딕 부흥주의자’, ‘중세주의자’라고 비판받을 정도로
구시대적인 비판주의를 보여주고 있다.
그는 그림에 폭력과 죄악이 난무하는 세상을 표현했다.
그래서 그가 그린 사람들은 어리석고 악한 죄인들이 가득 넘친다.
<그리스도의 고난> 연작에는 예수님께서 <십자가 처형>을 받기 위해
골고타 언덕으로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특히 세 폭 제단화를 그릴 때,
가운데 패널에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그린 경우에는,
왼쪽 패널에는 <골고타 가는 길>이 주로 그려지고,
오른쪽 패널에는 <십자가에서 내려지시는 그리스도>나,
<그리스도의 매장> 장면이 주로 그려진다.
이 그림은 사실 보스의 작품 가운데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는 작품은 아니고,
세 폭 제단화 가운데 왼쪽 패널에 해당하는 작품이며,
이 세 폭 제단화가 언제 해체되었는지는 알 수 없고,
이 그림은 윗부분과 아랫부분이 일부 잘려 나갔을 것으로 추정된다.
예수님께서 골고타 언덕으로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장면은
네 복음서에 모두 나오는데, 복음서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다.
이 장면은 마태오복음 27장 31-33절, 마르코복음 15장 20-22절,
루카복음 23장 26-33절, 요한복음 19장 16-17절이 그 배경인데,
성경은 골고타로 가는 십자가의 길에 대한 장면을 생각보다 간결하게 기록했다.
루카복음을 제외하면 고작 2~3절밖에 안 된다.
그런데 공관복음에서는 십자가의 길에서 시몬이라는 키레네 사람을 보고
강제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게 하였지만,(마태 27,32; 마르 15,21; 루카 23,26)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몸소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 터’라는 곳으로 나가셨다.(요한 19,17)
히에로니무스 보스는 기본적으로 요한복음의 내용을 따랐고,
그리스도께서 직접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 언덕으로 가신다.
보스는 <십자가를 지고 가시신 그리스도>를 여러 번 그렸는데,
이 작품은 현재 비엔나 미술사박물관에 소장 되어 있고,
1490~1500년 사이에 그린 작품이다.
이 그림의 배경에는 예루살렘 풍경이 아닌
보스가 살던 당대의 네덜란드 풍경이 그려져 있다.
그림을 보는 사람이 좀 더 현실감을 느낄 수 있게 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그림은 크게는 두 부분, 위에는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과 주변의 인물들,
아래에는 예수님과 함께 처형된 두 도둑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예수님은 T자 모양으로 만들어진 십자가를 고통스럽게 짊어지고 가신다.
그의 머리에는 가시관이, 그의 발에는 가시가 박힌 신발이
그분을 더욱 고통스럽게 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허리에 줄이 묶여있는데, 앞의 터번을 쓰고 흰옷을 입은 사람이
줄을 당기면서 예수님을 인도하고 있는데,
그가 어깨에 메고 있는 방패에는 악을 상징하는 동물인 두꺼비가 그려졌다.
예수님 위에 붉은 옷을 입은 자는
밧줄의 나머지 부분으로 예수님께 채찍질하려 한다.
예수님을 제외하면 모두 23명의 인물이
예수님 주변에서 같은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는데,
이들 중 일부는 갑옷을, 다른 일부는 창과 칼과 사다리를 들고 있지만,
아무도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지 않다.
이들의 표정을 보았을 때, 이들은 모두 예수님에 대한 적대감을 표시하고 있고,
예수님이 누구인지 모르는 무지를 상징하고 있다.
아래 두 도둑 중 오른쪽에 있는 도둑은 회개한 착한 도둑이다.
그는 포박된 채 사형 집행인에게 이끌려
마른 나무 아래에서 프란치스코 수도복을 입은 사제에게 고해하고 있다.
반면 왼쪽에 있는 나쁜 도둑은 밧줄에 묶인 채
자기를 십자가에 매달 사형 집행인에게 자기는 죄가 없다며 항변하고 있다.
그가 매달릴 십자가는 땅바닥에 놓여있다.
재미있는 것은 이 그림에 나오는 등장인물이 훨씬 나중에 그려진
<가시관 쓰시는 그리스도>에 나오는 인물들과 겹치는 부분이 많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예수님의 바로 뒤에 흰 터번을 쓰고, 초록색 옷을 입은 사람은
오른손에 갑옷 장갑을 끼고 있다.
<가시관 쓰시는 그리스도>의 왼쪽 위에서
가시관을 씌우려는 군사와 같은 복장을 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초록 옷을 입은 사람 뒤에 붉은색 옷에 파란색 두건을 두른 사람은
역시 수염도 없고, 얼굴은 다르지만,
<가시관 쓰시는 그리스도>의 왼쪽 아래에 있는 사람과 같은 옷을 입고 있다.
이런 유사성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는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