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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주집 문집 제7권 / 비명(碑銘)
[참고내용]
이 글에서 김공이란? 김육(金堉,1580~1658) 선생을 말한다.
선생의 본관은 청풍(淸風0으로 자(字)는 백후(伯厚)이고, 호(號)는 잠곡(潛谷)이며, 회정당(晦靜堂)이라고도 한다. 호서선혜비(湖西宣惠碑)는 1659년(효종 10)에 김육이 충청감사(忠淸監司)로 있을 때, 삼남지방에 대동법(大同法)을 실시하였는데, 백성들에게 균역(均役)하게 한 공로를 잊지 않고,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삼남지방을 통하는 길목에 설치한 것이다.
1651년 영의정 김육이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충청도에도 대동법을 시행토록 상소하여 효종의 윤허를 얻어 실시함으로써 국가 재정을 정비하고, 민폐를 덜게 하였다. 비(碑)의 본래 이름은 김육대동균역 만세물망비(金堉大同均役萬世不忘碑) 또는 호서 선혜비(湖西 宣惠碑)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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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의정 김공 호서 선혜비명 병서(領議政金公湖西宣惠碑銘 幷序)
균전(均田)으로 세금을 내는 법은 삼대(三代)로부터 크게 갖추어졌으니, 9분의 1과 10분의 1의 세금은 실로 왕도정치의 큰 원칙이다. 세대가 내려오면서 도가 쇠하고 탐포(貪暴)한 자들이 나와, 백성들은 손발을 둘 곳이 없게 되었다.
진(秦)나라가 정전제(井田制)를 폐지하고 천맥법(阡陌法)을 시행하자, 겸병(兼幷)하는 폐단이 극에 달하였다. 그러니 백성을 아끼는 선왕(先王)의 도를 또한 어찌 말할 수 있겠는가. 우리나라는 산과 바다 사이에 끼어 있어 땅이 좁기 때문에 방리(方里)의 제도는 시행된 바 없으니, 부사(父師)의 성법(聖法)은 대개 서토(西土)의 일부에서 볼 수 있을 뿐이다.
도가 쇠퇴한 천 년 동안 백성들의 삶이 날로 더욱더 곤궁해지자, 처음 토지제도를 만든 자가 경작지의 소출에 따라 10속(束)을 1부(負), 100부를 1결(結)로 한 뒤에, 결수에 따라 쌀과 포(布)를 내서 공가(公家)의 부세에 응하게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거두는 것이 포악하지 않고 사용하는 것이 절도가 있었으니, 또한 조철(助徹)의 유의(遺意)에 어긋나지 않았다. 다만 그 토질에 맞는 생산품을 공물로 바치게 하던 것을 일체 쌀과 베로 받았으니, 조달에 필요한 모든 물건에서부터 문호(門戶)를 찾는 사람들을 대접할 경비에 이르기까지 두 배에서 다섯 배까지 세금을 거두어, 나라의 근본이 쇠락해졌다.
지난 만력(萬曆) 무신년(1608, 선조 41)에 완평(完平) 문충공(文忠公)이 처음으로 대동선혜(大同宣惠)의 정책을 만들어 경기도에 시행하였는데, 경기도 백성들이 그 덕에 소생하였다. 20년 후인 정묘년(1627, 인조 5)에 길천군(吉川君) 권반(權盼) 공이 호서 관찰사(湖西觀察使)가 되었는데, 당시 호서 백성들은 경기도보다 더욱 피폐하였다.
권공이 마침내 완평의 뜻을 취하여, 온 도내(道內) 전역(田役)의 출입을 공평하게 조정하여 공정한 법을 만들었는데, 일을 끝내 시행하지 못하고 문적(文籍)으로만 남겨 두었다. 12년이 지난 무인년(1638)에 고(故) 상국(相國) 김공(金公 김육(金堉))이 실로 이 도의 관찰사가 되어, 그 문적을 발견하고 감탄하기를 “백성을 살릴 방법은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생각에 잠겨 침식(寢食)도 잊은 채 계획하고 궁리하여 아주 작은 것까지도 세밀하게 정비하였다. 입조(入朝)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금상(今上 효종(孝宗))께서 즉위하셨다. 지위와 대우가 더욱 높아져 재상의 자리에 올랐는데, 은근하게 임금께 아뢸 틈이 생기자 가장 먼저 이 말씀을 올렸다.
성상께서 이해의 근원을 환히 보시고, 시행의 대체(大體)를 오직 상국의 말대로 따르셨다. 이에 그 국(局)을 대동청(大同廳)이라 하고, 대료(大僚)와 서리(庶吏)를 선발하여 참좌(參佐)와 지사(指使)를 갖추었다. 그 방법은 한 도(道)의 전안(田案)을 통틀어 계산하여 고을의 대소(大小)는 따지지 않고 오직 결수(結數)의 많고 적음을 비교하여 1결당 쌀 10두(斗)를 내게 하고, 배로 운반하여 경강(京江)으로 올려 보내게 하였다.
산간벽지와 멀리 바닷가에 있는 주현(州縣)은 쌀에 준하여 베로 내게 하여 모두 서울로 실어 보내게 하였다. 그리하여 임금께 바치고, 종묘사직의 제사를 받들고, 빈객(賓客)을 접대하는 데 필요한 모든 물건으로부터 작게는 꼴과 볏짚, 땔나무 등에 이르기까지 모두 여기에서 마련하였다.
그러므로 관가에서는 기간을 변경하거나 세율을 조정하는 일이 없었고, 이서(吏胥)들은 늘려 받거나 줄여 받지도 못하며 착취하는 일이 없었으니, 경부(更賦)가 없어지고 상조(常調)만 있게 되었다. 그러니 백성들이 농사를 지어 생업이 안정되었고, 봄과 가을 두 번만 물품을 갖추어 정해진 기일에 내면 되었으므로, 틈이 나면 노인을 봉양하고 아이들을 기르니, 고향에서 즐겁게 살면서 성군(聖君)의 정치를 노래할 뿐이었다. 법을 시행한 지 9년 만에 백성들이 편리하게 여겼다.
문충공(文忠公 이원익(李元翼))의 은택은 두루 미치지 못하였고, 길천공(吉川公 권반(權盼))은 문적으로만 남겼을 뿐 시행하지는 못하였다. 오직 김 상국(金相國)만은 충성스럽고 근면하며 강인하고 과단성이 있었으므로 사업의 효용에만 전념하여, 남들이 헐뜯어도 아랑곳하지 않고 사람들이 저지해도 개의하지 않은 채 더욱 정밀하게 강구하고 더욱 굳건하게 지켜서, 백성들의 위급한 상황을 해결하고 한 지방이 항상 안정될 수 있는 방책을 세웠다.
조정에서 바야흐로 미루어 호서(湖西)에 시행하였는데, 그 이로운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으니, 상국(相國)이 백성들에게 끼친 은덕이 참으로 성대하도다. 아아, 상국은 백성을 사랑하는 정술(政術)을 잡았고 성상(聖上)께서는 널리 시행하는 도량을 갖추시어, 상하가 서로 도와 마침내 완성하는 데 이르렀으니, 상국이 성상을 만난 것은 천재일우(千載一遇)의 일이라 할 만하다.
옛날에 당양후(當陽侯) 두예(杜預)가 부평(富平)에 다리 건설을 요청하였을 때, 신하들은 대부분 의견을 달리 하였는데, 다리가 완성되자 무제(武帝)는 술잔을 들어 두예에게 권하였다. 두예가 말하기를 “만약 폐하의 명철함이 아니었다면, 신은 재주를 쓰지 못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후세에 두예의 공적은 칭찬하지 않고 오직 무제에게 표창을 돌렸다.
지금 대동법은 실로 백성들에게 크나큰 은혜이니, 어찌 단지 다리 하나로 나그네들을 건너게 한 일과 비교되겠는가. 비록 그러하나 임금은 하늘이다. 하늘은 그 큰 덕을 형용할 수 없으니, 대로변에 큰 비석을 세워 상국의 훌륭한 공덕을 칭찬하는 것도 호서 백성들의 뜻이다.
상국의 이름은 육(堉), 자는 백후(伯厚), 본관은 청풍(淸風)이다. 재상의 직무를 수행할 때, 오로지 나라를 걱정하고 나라를 위하는 것으로 급선무를 삼았다.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
부소의 옛 땅 / 扶蘇舊壤
옆으로 바닷물 흐르고 / 海流于旁
지역은 천 리나 되건만 / 環疆千里
흙이 건조하고 단단하네 / 厥土燥剛
농사지어도 수확 적으니 / 農功鮮效
나약하고 각박한 생활이라 / 呰窳薄生
한결같이 세공에 시달려 / 一困于歲
구렁에 구르며 편안하지 못하네 / 溝壑靡寧
애써 밭 갈고 힘들게 거두어도 / 勞耕苦穡
한 해 수입 끝내 남는 게 없는데 / 歲入卒殫
밭에도 세금 논에도 세금이니 / 畦征畝榷
백성들 먹고살 방법 없네 / 民食阻艱
하늘이 아래 백성을 살피셔서 / 天監在下
위대한 성군을 이에 세우시니 / 大聖爰作
성군 세우기를 어떻게 하는가 / 聖作伊何
이어서 훌륭한 신하를 주셨네 / 從以輔碩
그렇게 하여 우리 임금 높이고 / 以登我辟
우리 백성들에게 은택 베풀었네 / 以惠我人
모든 것을 개혁하매 / 更絃易轍
인을 기준으로 삼아 / 爲法于仁
적게 거두고 소략하게 거두니 / 廉收簡斂
양식 떨어지지 않아 저장할 수 있었네 / 毋罄而藏
속미와 포루 중에 / 粟米布縷
한 가지만 받으니 / 取一而贏
봄과 가을에 일하여 / 春秋供事
사회에 보내고 / 灌于司會
돌아와 집에서 편안히 살아가니 / 歸安其室
밤에 개가 짖지 않네 / 狗夜不吠
천천히 일어나 들판 바라보니 / 徐起視野
벼가 풍성하고 보리 이삭 트니 / 禾茂麥秀
조석으로 마을마다 / 朝夕鄕井
노인 봉양하고 어린이 기르게 되었네 / 老老幼幼
지금부터 시작되어 / 自今伊始
영원히 이어지리니 / 迄于永世
배부르고 편안함은 / 旣飽旣佚
상국의 덕택이지 / 相國是賴
상국의 덕택 아니라 / 匪相國是賴
성스러운 임금의 은덕이지 / 聖后之德
거리마다 노래하니 / 衢謠塗詠
어찌하면 보답할까 / 曷以報塞
아주 즐거운 호서 사람들 / 孔樂南土
큰 비석 세우기에 / 豐碑有揭
내가 이 글을 써서 새기게 하나 / 我鑱斯文
칭송하는 뜻을 다 담지 못했네 / 頌義罔竭
<끝>
ⓒ충남대학교 한자문화연구소 | 강원모 오승준 김문갑 정만호 (공역) |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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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領議政金公湖西宣惠碑銘 幷序
均田出賦。自三代大備。九一什一。實王政之大經。逮世下衰。貪暴作而民無所措手足。至秦廢井田開阡陌。而兼幷極矣。先王惠鮮之道。又何可言也。我國介處山海。地狹隘。方里之制。旣無所施用。則父師聖法。槪見於西土一區而止耳。陵遲千載。民日益以困。其始制地者。隨其田所出。爲束者十爲一負。爲負者百爲一結。計結出米及布以應公家之賦。由是而收之不暴。用之有節。則亦不悖於助徹之遺意也。惟其任土之貢。一切取米布。百物調度之須。以至蹄踵門戶之費。率倍蓰以征。而邦本悴矣。往萬曆戊申年間。完平文忠公始爲大同宣惠之政。用之於畿輔而畿輔蘇。後二十年丁卯。吉川君權公盼爲湖西觀察使。時則湖西民尤敝於畿輔。權公乃取完平之意。平停一道田役出入。劑爲絜法。事未卒行。籍以藏之。後十二年戊寅。故相國金公實按是道 。發視其籍。歎曰。活民之方。不是外矣。早夜以思。忘寢與食。擘晝籌度。纖悉畢擧。入朝未幾。爲今上初元。位遇益隆。晉登鼎席。殷勤啓沃之暇。首先以是說進。聖上灼見利害之源。凡所設施綱要。唯相國是聽。於是號其局大同廳。選大僚庶吏以備參佐指使。其爲法通算一路田案。邑無問大小。唯視結數多寡。結出米十斗。舟運上江。其山僻遠海州縣。準米出布。咸委輸于京師。自御供奉宗社祀享接賓客凡百需用。細至芻稈薪蒸之屬。皆於是取辦。官無所闊狹弛張。吏無所伸縮乾沒。無更賦有常調 。民得服田安業。以春秋二時具其物趨期會。暇則養老育幼。嬉娛田里。歌詠聖治而已。行之九年。民以爲便。夫文忠公爲惠未徧。吉川公徒籍莫施。唯金相國忠勤彊果。能竱意於事功。衆訾而不恤。群沮而不顧。講之彌精。守之彌堅。解萬姓倒懸之急。建一方常安之策。朝廷方推而行之湖南。其利不可以一二數。相國之爲德於民。吁其盛矣。嗚呼。相國操仁民之術。聖上恢敷施之量。上下相須。迄臻厥成。相國之遇聖上。可謂千載一時矣。昔當陽侯杜預請建富平河橋。群臣多異同者。橋成。武帝擧觴屬預。預曰。若非陛下之明。臣無所施其巧。後世不稱杜預之績。而唯歸表於武帝。今大同之法。實大造于民。豈特一河橋濟行旅而已。雖然。君。天也。天不可以形容大德。則樹豐碑于衢路。以稱揚相國之美。亦湖民之志也。相國名,堉。字伯厚。淸風人。其爲相。專以憂國奉公爲務。銘曰。
扶蘇舊壤。海流于旁。環疆千里。厥土燥剛。農功鮮效。呰窳薄生。一困于歲。溝壑靡寧。勞耕苦穡。歲入卒殫。畦征畝榷。民食阻艱。天監在下。大聖爰作。聖作伊何。從以輔碩。以登我辟。以惠我人。更絃易轍。爲法于仁。廉收簡斂。毋罄而藏。粟米布縷。取一而贏。春秋供事。灌于司會。歸安其室。狗夜不吠。徐起視野。禾茂麥秀。朝夕鄕井。老老幼幼。自今伊始。迄于永世。旣飽旣佚。相國是賴。匪相國是賴。聖后之德。衢謠塗詠。曷以報塞。孔樂南土。豐碑有揭。我鑱斯文。頌義罔竭。<끝>
東州先生文集卷之七 / 碑銘
첫댓글 김육(金堉) 선조님의 묘비명(墓碑銘) 잘 읽고 모셔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