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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의 범죄를 바라보는 불편한 진실
사무엘하 11:1-15
들어가는 이야기
요즘 들어 날씨가 장난이 아닙니다.
찜통더위, 가마솥더위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을 정도로 더위가 맹위를 떨치고 있습니다.
이런 때에는 자연히 옷을 가볍게 입을 수밖에 없고 자연히 신체가 많이 노출될 수밖에 없습니다.
예전에 우리 김00 권사님은 식사봉사를 하면서 나시옷을 입고 있다고 제가 들어가면 미안해하면서 어쩔 줄 몰라 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전혀 그런 기색이 없습니다.
제가 들어가도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당연하다는 듯이 열심히 나시만 입고 일을 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20년의 세월이 이렇게 많은 변화를 가져다주었습니다.
요즘 여자들의 신체노출이 과연 성범죄와 어떤 연관이 있는가? 가 한창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과다한 신체노출이 더 많은 성범죄를 가져온다고 주장하고 어떤 사람들은 그런 주장으로 여자들에게 책임을 넘기려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신체노출과 상관없이 성범죄는 범죄 한 사람의 책임이고 그들은 이미 마음속에 그런 생각을 갖고 있기에 노출과 상관없이 범죄를 한다는 것입니다.
각자의 주장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어째든 과다한 노출은 안하는 것이 좋을 줄 압니다.
본문 속으로
오늘 본문에는 과다한 노출이 아닌 완전 노출된 한 여인이 나옵니다.
다윗 왕이 저녁 무렵에 일어나서 왕궁 옥상을 거닐다 보니까 저 밑에 있는 집에서 한 여자가 완전 노출로 목욕을 하는 것입니다.
그 모습에 정욕이 발동한 다윗이 성범죄를 저질렀다는 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이 문제를 놓고도 많은 사람들이 논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밧세바에게 책임을 돌리면서 사람들이 볼 수 있는 시간에 그것도 훤히 잘 보이는 곳에서 목욕을 한 것은(옥상에서 한 것은 아님) 밧세바가 잘못이고 그래서 때로는 밧세바를 다윗을 유혹한 음모의 여인으로 보는 시각이 있습니다.
이런 것은 일반 사람들이 하는 일이고 우리는 오직 성경의 교훈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에서는 밧세바가 유혹했다는 말이 어디에도 없고 오직 다윗의 잘못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오늘 다윗의 범죄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요?
먼저는, 이 세상에 유혹이나 범죄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다윗에 대한 성경의 평가는 얼마나 좋습니까?
사무엘상 13장에서 사무엘은 사울왕의 범죄를 보고 그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고 하면서 여호와께서 그의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그를 백성의 지도자로 삼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다윗이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기 전에도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음을 보여주는 말입니다.
그 후에 다윗이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을 때도 다윗의 이런 모습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13장에서 바울은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다윗에 대한 평가는 한 마디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는 말이고 이 말처럼 다윗은 정말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모습으로 살았습니다.
특별히 사울 왕에게 쫓기는 그 괴롭고 고달픈 세월 속에서도 자기 맘대로 살지 않았고 자기 편한 대로 행동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 얼마든지 사울 왕을 해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그를 전혀 건드리지 않고 하나님의 섭리에 맡기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는 평가보다 더 귀한 평가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런 다윗이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는 십계명의 두 가지 계명을 범하여 하나님 앞에 큰 죄를 지었다고 하는 것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로마서 3장에서 바울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말씀하고 있고,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지적대로 우리는 모두가 죄인입니다.
다윗도 죄인이고 우리도 죄인이고 모두가 죄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도 범죄 할 수밖에 없고 범죄의 유혹에 넘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절대 교만해서는 안 되고 교만함 때문에 죄의 유혹에 빠지는 잘못을 범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렇다고 범죄를 당연시해서는 안 됩니다.
‘어쩔 수 없는 죄인이니까’ 하면서 범죄 속에 쉽게 빠져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범죄 할 수밖에 없는 우리 모습을 심각하게 인식하면서 죄를 범하지 않는 모습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범죄 할 수밖에 없는 죄인이지만 그러나 그 죄에 대한 대가는 또 우리가 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 모두에게는 구세주이신 주님이 필요합니다.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피를 흘려주신 구속의 주님을 통하여서만 우리는 죄의 문제를 해결 받을 수 있음을 믿고 항상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을 의지하는 삶을 살아가야 할 줄 믿습니다.
두 번째로, 그러기에 우리는 교만하지 않고 죄의 유혹으로부터 조심해야 합니다.
다윗이 범죄에 빠지는 과정을 보면 먼저는 그의 나태함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1절에서 성경은 ‘그 해가 돌아와 왕들이 출전할 때가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다윗은 요압과 그의 부하들을 전쟁터에 내 보내고 자기는 예루살렘에 그대로 머물렀습니다.
머무르는 것은 그렇다 치고 그 다음 2절에 보면, ‘저녁때에 다윗이 그의 침상에서 일어나 왕궁옥상에서 거닐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저녁때까지 침상에서 잠을 잤다고 하는 것은 그의 나태함이 삶속에 깊이 자리 잡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는 이 나태함이 우리를 죄의 유혹 속으로 빠지게 하는 주범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다윗이 부하들과 같이 전쟁터에 나갔더라면 이런 유혹의 덫에 걸리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삶의 실패와 범죄에 빠지지 않으려면 우리에게 찾아오는 나태함을 적극적으로 피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고 나태함을 피하기 위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합니다.
이것은 육신적인 모습이나 영적인 모습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맡겨준 직장과 직업에서의 일상적인 일에 나태하지 말아야 하고 기도와 말씀과 예배의 영적인 일에서도 방심하거나 나태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거듭난 삶의 목적과 목표를 매일 새롭게 각성하는 삶을 살아갈 때 유혹의 덫에 걸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또한 다윗의 범죄의 과정 속에는 안목의 유혹이 있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왕궁 옥상을 거닐고 있었을 때에 한 여인이 목욕하는 것이 보였습니다.
여기에서 보았다는 말은 관심을 갖고 꾸준하게 주목하여 보았다는 말입니다.
만약 다윗이 그 모습을 보았을 때 그 자리를 피하고 보지 않았다면 어땠을까요?
유혹을 피할 수도 있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구약에 나오는 요셉이 옷을 다 벗고 유혹하는 장군의 부인을 피해 도망하여 범죄 하지 않은 것이 이 사실을 증거 하지 않습니까?
유혹의 덫은 보는 것, 안목의 정욕을 통하여 우리에게 접근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목욕하는 여인을 보는 것을 통하여 유혹에 빠졌습니다.
하와가 선악과를 보았을 때 그것이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같이 보임으로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최근에 통영 초등생 살인사건의 범인은 컴퓨터에서 음란물을 많이 보았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가 유혹의 덫을 피하기위해서는 보는 것, 안목의 정욕을 조심해야 합니다.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지 않아야 하고 보이는 유혹의 장소를 가지 않도록 해야 하고 그런 장소를 가능하면 빨리 피해야 합니다.
나아가 다윗의 범죄의 과정 속에는 거짓의 유혹이 자리 잡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목욕하는 밧세바를 보았을 때 심히 아름다워 보였다고 했습니다.
유혹은 언제나 아름답게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름답게 보이는 것일 뿐 실제는 아름답지 못하고 오히려 추하고 더럽고 고통이 수반되는 것이 유혹의 실체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너무나 많은 거짓의 유혹에 빠져 그것이 실제인양 속으며 살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럴듯한 광고에 속아 물건을 사고 그런 후에 후회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티비에서 영화에서 책에서 잡지에서 유혹은 언제나 아름답게 미화하고 있지만 사실은 아름다운 것이 아니고 우리를 유혹하는 덫일 때가 많이 있음을 생각하면서 거짓된 유혹에 조심해야 합니다.
거짓된 유혹은 언제나 아름답게 보이지만 그러나 실상은 아름답지 못합니다.
세 번째로, 이런 유혹에 빠졌을 때 감추려고 하지 말고 회개하는 삶을 살아가야합니다.
다윗이 목욕하는 여인을 보고 음탕한 마음으로 그녀가 누구인지 알아보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갔다 온 신하의 말이 그는 엘리암의 딸이요 헷 사람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라고 보고를 합니다.
이 말속에는 이 여인을 절대 범하면 안 된다는 신하의 간곡한 부탁이 들어있는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무엘하 23장을 보면 엘리암과 우리야가 누구인가를 잘 보여주고 있는데, 그 둘은 다윗의 용사 37명에 속하여 있는 장군들이었습니다.
특히 엘리암의 아버지는 다윗의 모사였던 아히도벨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혹자는 아히도벨의 아들인 엘리암이 자기의 동료인 헷 사람 우리야을 보았을 때 너무 신실하고 믿음직해서 자기 딸을 우리야에게 주었다고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나중에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켰을 때 아히도벨이 다윗을 떠나 압살롬의 반역에 가담하는 이유가 자기 손녀딸인 밧세바를 간음하고 그의 남편을 죽인 것에 대하여 분노하였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얼마든지 일리가 있는 주장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이 밧세바가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자기와 늘 함께 하여 국정을 논하고 나라를 이끌어가는 오늘날로 말하면 비서실장과 같은 아히도벨의 손녀딸입니다.
자기에게 충성하는 최측근 장군의 딸이자 아내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지금 다윗의 명령으로 전쟁터에 나가 목숨을 내어놓고 싸우고 있는 중입니다.
혹시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런 밧세바를 어떻게 건드릴 수 있겠으며 그의 가정을 파괴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다윗이 얼마나 파렴치한 인간인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다윗이 범죄 하기 전후에 몇 차례 회개할 기회를 주고 있습니다.
먼저, 그녀가 엘리암의 딸이요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라는 말을 들었을 때였습니다.
또한 밧세바가 사람을 보내어 임신하였다는 말을 전했을 때입니다.
여러분, ‘아차 내가 실수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가면 그것을 감추려고 하지 말고 회개할 때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세 번째는 우리야가 전쟁에서 돌아와 집에 가지 않고 동료들과 함께 자면서 ‘이스라엘과 유다가 야영 중에 있고 내 주 요압과 내 왕의 부하들이 바깥들에 진치고 있거늘 내가 어찌 내 집으로 가서 먹고 마시고 내 처와 같이 자리이까?’ 하는 말을 했을 때였습니다.
이 우리야의 말은 우리야가 얼마나 충성스러운 장군인가를 잘 보여주는 진심에서 나온 말이기도 하지만 다윗의 입장에서는 잊고 있었던 부분을 잘 깨우치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전쟁을 하고 부하들이 죽어갈 수도 있는 상황에서 나는 지금 예루살렘에 머물면서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것인가?
이 전쟁 통에 내가 이렇게 살다니 참 잘못했구나 하는 그런 생각을 해야 되지 않았겠습니까?
이런 말들을 통하여 하나님은 다윗에게 경고를 하였지만 다윗은 하나님의 경고의 말을 듣지 못하고 결국 유혹의 덫에 걸려 넘어졌고 간음죄에 이어 살인죄까지 짓는 큰 잘못을 범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가 잘못할 때 회개할 수 있도록 말씀하시기도 하시고 매로 치시면서 경고하시기도 하십니다.
그럴 때 이럴까 저럴까 고민하지 말고 솔직하게 회개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결코 그 죄를 덮으려고 얄팍한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면 안 됩니다.
그러면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더 큰 유혹의 길로 빠지게 되고 헤어 나오기가 더 어렵고 더 큰 대가를 지불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윗이 여러 차례 경고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도 회개하지 못하였을 때 그는 간음죄에 이어 살인죄까지 짓게 되었고 그 이후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까?
공주가 배 다른 왕자에게 성폭력을 당하게 되고 아들이 아버지를 모반하여 반역을 일으키고 그 일로 인하여 예루살렘에서 도망해야 했고 아들이 죽는 모습과 더불어 수많은 고통과 아픔을 당해야만 했습니다.
할 수 있는 대로 빨리 회개했다면 이런 큰 고통은 당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너무 늦게 하나님의 경고의 말을 들었고 큰 아픔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가는 말
요즘 세상을 ‘들킨 사람’과 ‘들키지 않는 사람들’이 사는 세상이라는 비판의 목소리가 있습니다.
너나 할 것 없이 모두가 잘못하고 뇌물을 받아먹고 온갖 유혹에 빠져 살아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모두가 잘못을 하고 해먹었는데 들킨 사람만 억울하다는 자조 섞인 말입니다.
이런 시대에 잘못하면 ‘어떻게 들키지 않고 해 먹을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기가 쉬울 수 있습니다.
들키지 않고 해 먹는 사람이 장땡이요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생각을 할 수 있고 그런 쪽에 머리를 굴리는 모습을 보일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 앞에 노출되지 않고 들키지 않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다윗이 그렇게 감쪽같이 속이려고 했지만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아시고 계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세상은 그렇게 살아갈 수 있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지혜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그 하나님이 역사를 움직이고 생사화복을 주장하신다는 사실을 믿는 우리는 절대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될 줄 믿습니다.
나도 부족한 한 죄인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절대 교만해서는 안 됩니다.
방탕의 길로 빠지면 안 됩니다.
늘 경고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겸손히 죄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도록 죄를 멀리해야 합니다.
유혹의 덫에 걸렸을 때는 가능한 한 빨리 회개해야 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숨길수도 없고 들키지 않을 수도 없습니다.
회개만이 살 길이요 회개만이 하나님의 은혜를 회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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