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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장 니느웨의 죄와 그 피할 수 없는 운명
(3:1~19)
나훔서는 니느웨의 멸망을 지켜보고 기록한 역사서가 아니라 앗수르의 국력이 절정에 달했고 수도 니느웨가 모든 것으로 충만해 있을 때, 하나님께서 나훔 선지자에게 묵시를 주시어 니느웨가 왜, 어떻게 멸망할 수밖에 없는가를 경고하시는 말씀이다. 하나님께서는 제 1장에서 심판을 선고하시고, 나훔서 제 2장에서 그 심판 내용을 말씀하셨으며, 나훔서 제 3장에서 그 심판의 원인을 제시하셨다.
* 이 시간 우리가 상고할 3장은 다음과 같이 분류할 수 있다.
(1) 큰 범죄에 대한 큰 심판과 거기에 따른 무거운 형벌은 필연적이다. 앗수르는 수많은 사람을 간음하게 하고 피정복국에서 재물을 갈취하고 자신들의 우상숭배를 강조하였다. 이러한 사악함은 하나님의 대적이 되어 반드시 멸망을 당하게 된다(1~7).
(2) 하나님의 대적이 된 자들은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려 할 때 인간의 어떠한 수단과 방법으로도 이를 거부하거나 저지할 수 없다. 앗수르는 지금까지 믿어왔던 모든 것이 너무 쉽게 무너지자 다른 어떤 나라보다 더욱 비참하게 되었다(8~13).
(3) 니느웨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너무도 철저하였기에 결코 다시 소생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지구상에서 니느웨는 완전히 사라졌다. 그 소식을 들은 자가 손뼉을 치며 기뻐하였으니 그들의 악행의 영향을 받지 않은 자가 없었기 때문이다(14~19).
* 나훔 선지자의 이 예언은 주전 612년 신 바벨론 제국 나보 플라살에 의해 그대로 시행되었다. 이상과 같은 묵시의 말씀을 함께 상고하는 것이 이해하기 쉽고 더욱 은혜로운 것인데, 편의상 두 편(1~11, 12~19)으로 나누어 상고해 본다.
* 전반부 1~11절의 중심 사상
(1) 니느웨가 망할 수밖에 없는 대표적인 범죄는 폭력, 늑탈, 마술과 음행이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상황에 있어서도 폭력을 용납하지 않으신다. 니느웨에 가득 채워진 것들은 모두 전쟁에서 취한 전리품이다. 모든 것을 빼앗고 또한 음행으로 열국을 미혹하고 마술로 백성을 현혹시켰다. 공의로우시고 거룩하신 하나님께서는 이런 도시와 그 거민들을 반드시 심판하신다는 사실을 보여 주시는 말씀이다.
(2)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하나님께 “내가 네 대적이 되어”라고 평가를 받게 되는 것 이상 더 큰 불행이 없다. 왜 그들은 하나님의 적이 되었는가? 그들은 하나님을 멸시하고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모독하였다(왕하18:32~36). 하나님께서는 어느 사람이나 집단을 당신이 먼저 ‘너희는 내 대적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신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대적할 때야 비로소 하나님께서도 그들의 대적이 되셨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 대한 경솔한 언동은 삼갈 것을 가르치는 말씀임을 깨달아 하나님을 우군으로 삼는 복이 넘치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3) 애굽의 노아몬과 앗수르의 니느웨가 멸망하였다면 하나님의 징계하시는 손앞에 그 누가 ‘나는 안전하다’라고 호언장담하겠는가? 세상의 권력이나 자연의 재해 앞에 안절부절 못하는 인간들이 어찌 세상 것을 조금 더 갖기 위해, 혹은 갖고 있는 것을 유지하기 위해 하나님을 떠나거나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려 들것인가? 이것처럼 어리석은 행동은 없고 파멸의 지름길이 없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는 말씀이다.
1. 화 있는 피의 성(1~7)
네가 어찌 노아몬(애굽 18대 왕 이후 140년 넘도록 애굽의 수도였던 더베에 있는 애굽의 태양신과 아몬의 신전을 말한다)보다 났겠느냐?
* 본장에서 상고할 것은 큰 범죄에 대한 큰 심판과 거기에 따른 무거운 형벌은 필연적이라는 내용과 하나님의 대적이 된 자들은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려 할 때 인간의 어떠한 수단과 방법으로도 이를 거부하거나 저지할 수 없다는 것과 니느웨에 대한 심판이 철저해서 소생할 수 없게 되었음을 교훈한다.
* 니느웨가 망할 수밖에 없는 죄명은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었다. 멸시하고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모독하였다(왕하18:32~36). 그래서 하나님도 내가 네 대적이 된다고 하셨다. 그리고 폭력, 늑탈, 마술과 음행함이었던 것이다. 우상 숭배에 대해서는 애굽의 노아몬과 니느웨가 망했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징계에 벗어날 개인과 단체와 국가가 없다는 파멸의 경고이다.
* 남의 피를 흘리는 자는 자기 피도 흘린다는 교훈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는 두려운 범죄들을 빠짐없이 저질렀다.
3장 1절 : “화 있을 진저 피 성이여 그 속에서는 궤휼과 강포가 가득하며 늑탈이 떠나지 아니하는 도다.”
=> 잔악한 살인 : 번영의 뒤쪽에 피로 물 들은 범죄가 있었다. 불의한 전쟁으로 잡아온 포로들을 잔인하게 부리고 죽인 역사의 기록이 고고학자들에 의해 발굴된 비문인 앗수바니팔 2세(882~860)는 반란을 일으킨 수두성의 두목과 거민들의 가죽을 벗겨서 기둥을 쌓았거나 혹은 성벽 위에 널었다는 것이다. 도성의 핏자국도 노예들의 피 이다(피로 읍을 건설. 합 2:12).
3장 2절 : “휙휙 하는 채찍 소리, 굉굉 하는 병거 바퀴소리, 뛰는 말 달리는 병거”의 ‘채찍 소리와 병거 소리’는 성실치 못한 상거래를 말한다. 이는 하나님께서 미워하신 행위로서 사회 질서를 어지럽게 한 것이다. 성실치 못한 상거래로 말미암아 궤휼(말과 행동이 거짓됨)과 강포(무엇을 갈기갈기 찢는 짓)가 성에 가득 찼다. 불안과 공포가 가득한 사회에 자기 백성을 맡길 수 없기에 심판하신다.
3장 3절 : “충돌하는 기병, 번쩍이는 칼, 번개 같은 창, 살육 당한 떼, 큰 바퀴, 큰 무더기 주검, 무수한 시체여 사람이 그 시체에 걸려 넘어지니”는 끊임없는 약탈로 하나님을 진노케 하는 행위이다. 모든 일에는 실증이 있는데, 이들의 약탈은 멈추지 않았다. 불의에 대한 실증도 없었으며 짐승의 마음으로 채워졌던 것이다. 채찍 소리가 멈추지 않고, 마병이 움직이는 소리와 무기가 번쩍이며 칼에 넘어지는 시체들(2,3)을 생각해 보라. 시체에 걸려 넘어진 사회를 상상해 보라. 하나님이 진노하실 수밖에 없다.
번개 같은 창이란 문자적으로는 번쩍이는 창의 광채(합3:11)를 가리키며, 이는 곧 보병들의 무기이다.
3장 4절 : “이는 마술의 주인 된 아리따운 기생이 음행을 많이 함을 인함이라 그가 그 음행으로 열국을 미혹하고 그 마술로 여러 족속을 미혹하느니라.”의 뜻은 군사적으로 잔인, 종교적으로 간교하여 우상 종교를 섬기도록 강압한 것이다. 이를 위해 아리따운 기생이 음행으로 마술을 부리고 있는 것이다. 기생을 동원해서 우상을 섬기게 하는 유혹을 하나님께서 경고하셨다(사7:20). 기생의 마술은 앗수르 왕을 위하여 여호와의 전에 우상 숭배를 위한 낭실을 세웠다(왕하 16:10~18). 모세의 율법에서는 마술을 엄격하게 금했으며 마술을 행하는 자는 처형을 당했던 것이다(출22:18 ; 레20:6, 27). 본문에서 마술의 주인이란 자신의 지배를 매력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해 은밀한 책략을 사용했던 니느웨를 비유함이다(계18:33)
* 음행 : 열국을 미혹하고 추악한 방법과 반윤리적으로 유혹하는 사기 행위를 의미한다.
* 마술 : 군사력과 위장된 외교술로 거짓된 종교, 타락한 예술 등을 이용하여 우상을 숭배하게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이 더딘 것 같으나 철저함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하나님의 불꽃같은 눈으로(계19:12) 감찰하심을 피할 수는 없다. 범죄를 삼갈 뿐 아니라 원수 갚는 것까지 삼가는 우리가 되자.
그리고 ‘내가 네 대적이 되어’란 선언을 우리와 상관없게 하자. 하나님의 판단은 공의로우시고 전능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잘못이 없다. 그리고 하나님의 진노는 치명적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 하나님께서 앗수르에 내린 경고를 상고해 보자.
3장 5절 :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네 대적이 되어서 네 치마를 걷어 쳐 네 얼굴에 이르게 하고 네 벌거벗은 것을 열국에 보이며, 네 부끄러운 곳을 열방에 보일 것이요”(사47:9,12) 여기 벌거벗음과 수치를 당한다는 것은 전쟁에 능하신 하나님께서 점령하신다는 것을 말씀하신다. 수치를 감추고 있는 긴 옷이나 어떤 장신구들을 제하여 심판으로 부끄러운 곳을 열방에 보인다는 것이다(렘13:22). 기생은 창녀처럼 대우를 받는 앗수르를 말한다.
3장 6절 : “내가 또 가증하고 더러운 것을 네 위에 던져 능욕하여 너로 구경거리가 되게 하리니”(욥9:7) 수치와 모욕을 당한다. 모든 방어수단과 영광이 사라지니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앗수르가 다른 사람들에게 구경거리가 되게 하신다는 것이다(겔28:17). 그런데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더라도 하나님께 인정을 받는다면 축복인 것인데, 그들은 하나님께도 전혀 소망이 없음이 들어났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세상을 의지하는 것이 얼마나 절망적인가에 대한 경각심을 갖게 한다.
3장 7절 : “그 때에 너를 보는 자가 다 네게서 도망하며 이르기를 니느웨가 황무하였도다. 누가 위하여 애곡하며 내가 어디서 너를 위로할 자를 구하리오하리라 하시 도다.” 7절의 뜻은 동정을 받지 못하고 버림을 받은 모습, 망해가는 모습을 보고 손뼉을 치거나 즐거워하는 자들에게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정중하게 인격적인 대접을 받는 모습은 하나님께 인정을 받을 때 오는 축복이다. 조공을 강제로 받아내던 자가 이제 빼앗기는 신세가 되었다. 이렇게 절망적인 처지를 위로하고 함께 울어줄 자가 없으니 황폐와 멸망과 기근과 칼만이 기다리며 친구가 된다.
니느웨의 멸망은 지극히 당연하다. 그 누구도 어떤 연합군도 막지 못함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심판이기 때문에 돕는 자도 없고 막아주려고 나서는 자도 없었고 슬퍼하는 자도 없었다. 우리와 우리 자손들에게 이런 일이 없도록 신앙으로 길러야 한다. 그리고 불신자들에게는 니느웨와 똑 같은 심판이 임했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고 그들을 사망에서 건져야 한다. 계시록 20장 15절에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 못에 던지 우리라.”고 하셨다. 주변의 불신자의 가족과 이웃을 위해 전도자의 사명을 다하자.
* 니느웨의 죄악은 심판의 원인이었다(1~7).
본 단락은 니느웨 멸망의 원인이 되는 그들의 죄악상에 관한 내용이다. 즉 니느웨의 죄악은 궤휼, 포악, 수탈, 살육 등으로 규정된다. 이 같은 죄악이 결과적으로 여호와의 형벌을 피하지 못하게 된 원인이었다. 결국 그들은 끔찍한 살육을 당하고(3, 4) 그들의 치부가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다(5, 6). 우리들은 본 단락을 통해 죄악은 여호와의 진노의 대상이므로 항상 육체와 영혼의 정결함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예수님이 주신 우리의 육체는 누구 앞에서도 부끄럽지 않을 만큼 정결한가? 또한 우리의 영혼도 날마다 성경을 더해가고 있는가? 경성해야 한다(약4:8).
3장 8절 : “네가 어찌 노아몬 보다 낫겠느냐 그는 강들 사이에 있으므로 물이 둘렀으며”의 배경은 니느웨 성이 천연 요새를 믿거나 자랑치 말고 예수님을 믿고 자랑해야 되는 것을 망각한 것이다. 니느웨는 300년 동안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위세를 떨치고 거기에 빠져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평안함을 인식치 못했다. 자기들의 연구의 결과이며 노력의 열매로 알고 있었다. 이렇게 인간의 힘으로 모든 것을 준비할 수 있고 행복을 설계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아무도 나훔의 예언을 믿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나훔의 예언대로 망하게 된다.
그런데 이렇게 말함은 심판 후에 니느웨가 자기들의 잘못으로 망했다고 생각할까봐 미리 예언을 하시고, 그 예언대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케 한 후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진행됨을 교훈하신다. 오늘 우리들도 기반이라는 것이 무슨 힘이 있어 우리를 지키고 자자손손을 지키겠는가? 오직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죽기까지 사랑하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만이 확실하게 지켜주시되 현세와 내세를 보장할 것이다. 누가 영원까지 지키겠는가? 각 나라와 군대의 접근은 차단할 수 있어도 하나님의 접근은 그 누구도 그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다.
* 노아몬은 애굽의 18대 왕 이후부터 140년이 넘도록 애굽의 수도이었던 더베에 있는 애굽의 태양신과 아몬의 신이 있었던 신전을 노아몬이라 말한다.
3장 9~10절 : “구스와 애굽이 그 힘이 되어 한이 없었고 붓과 루빔이 그의 돕는 자가 되었으나(사20:5), 그가 포로가 되어 사로잡혀 갔고 그 어린아이들은 길모퉁이, 모퉁이에 메어침을 당하여 부숴 졌으며 그 존귀한 자들은 제비 뽑혀 나뉘었고 그 모든 대인은 사슬에 결박되었나니”라는 뜻은 동맹국을 신뢰하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런 힘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구스, 애굽, 붓(홍해 연변의 부족), 루빔(리비아)이 도왔으나(9절) 하나님의 명령을어기거나 나라를 유지하지 못했다(본문 9절 ; 렘 46:25 ; 시 33:16). 하나님께서 노아몬을 치실 때 주전 663년 앗수르 왕 앗술바니팔에 의하여 처참하게 망했으니 그 때 대다수의 국민들은 포로가 되었고 어린 아이들은 길모퉁이마다 버려졌고, 귀족들까지도 인권은 유린되어 서로 쓸만한 것을 고르듯 제비뽑아 나누어 가졌으며, 장수들은 거역할 수 없도록 결박되어 끌려갔다.
* 붓과 루빔
나일강 상류에 인접한 나라들로 애굽의 속국이었다(렘 46:9). 이 두 나라가 노아몬을 도와주었지만 결국은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 멸망당했다.
3장 11절 : “너도 취한 바 되어 숨으리라 너도 대적을 인하여 피난처를 찾아보리라”(렘25:17) 이는 역사적으로 노아몬이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망했던 그 전철을 니느웨도 받게 될 것이다. “너도 취한바 되어 숨으리라 너도 대적을 인하여 피난처를 찾아보리라.” 지금 생각할 때 내가 왜 망하며 내 자손들이 왜 정복을 당하겠느냐 하면서 거만하지만 노아몬이 당한 형벌을 조금 맛보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취하게 되며 확실하게 재현할 것이라는 말은 느끼는 형벌이 온 몸이 당하는 대단한 형벌이요, 피할 수 없이 당하는 형벌이요, 파멸로 끝나는 형벌이라는 것이다. 최근에야 고고학자들이 니느웨를 발굴하면서 찬란했던 권력과 잔혹했던 피를 보면서 죄의 보응의 이야기를 읽게 되었던 것이다.
두 도시의 멸망을 보면서 하나님 앞에 인간의 견고함이란 가치가 없는 것을 깨닫게 된다. 두 도시는 강성함에도 불구하고 망했다. 망할 때 회복의 기회를 박탈하였다. 어린 아이들이 무자비하게 살해당했고, 귀인들이 제비 뽑혀 노예로 끌려갔고, 대인(관리)들이 결박되어 끌려갔으므로 다시 회복할 수 있는 기반이 무너졌다. 이것이 하나님의 심판의 현상이다.
하나님 앞에 심판 받을 수밖에 없는 죄인들에 대한 필연적인 결과인 패망과 멸망은 너무도 당연하고 저항 할 수 없이 쉽게 그리고 놀랍고 철저하게 임한다는 사실을 보게 되었다. 하나님의 율법을 떠난 범죄로 쌓여진 기반은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외면하지 말자. 심판이란 천천히 온 것 같아도 빠르게 오며 임하지 않을 것 같아도 반드시 온다는 사실을 거듭 확인시켜 주고 있다. 역사적 사실을 보고, 역사적 안목을 가지고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경고를 받아드리는 우리가 되자.
2. 너도 노아몬(더베) 같이 되리라(8~11).
이 말씀은 오늘 우리들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입고 재림의 소망이 없다면 같이 망한다는 경고이다. 본서의 말씀들은 나훔이라는 선지자가 예언하였으나 동시대에는 믿을 수 없는 예언이었다. 누구도 견고한 성이 그렇게 되리라고 믿지 않았다. 설마가 사람을 잡는다는 말이 있듯이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가 망한다는 예언은 성취되어 확실하게 멸망 했다.
* 8~11절의 결론은 니느웨 심판을 피할 수 없는 대표적인 범죄는 폭력, 늑탈, 우상숭배였다. 이런 범죄는 하나님의 대적이 되게 한다. 하나님의 대적이 되고서야 어찌 온전할 수 있겠는가?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내가 네 대적이 되어” 라는 선언만은 듣지 않도록 늘 주의하자. 그 때의 심판은 너무도 필연적이며 철저하다. 불의로 세워진 것이라면 그 무엇이라도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역사적 교훈을 되새기며 진리 안에 바로 사는 생도들이 되자.
3. 영원한 멸망의 노래(12~19)
나훔서는 니느웨의 멸망을 지켜보고 기록한 역사서가 아니라 앗수르의 국력이 절정에 달했고 그 수도 니느웨가 모든 것으로 충만해 있을 때 하나님께서 나훔 선지자에게 묵시를 주시어 니느웨가 왜 어떻게 멸망할 수밖에 없는가를 경고하신 말씀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나훔서 1장 심판을 선고하시고 2장에서 그 심판 내용을 말씀하시고 3장에서 그 심판의 원인을 제시하셨다. 1~11절까지 보았지만 이 시간에는 복습하는 마음으로 분류해 보자.
3장 1~7절 : 큰 범죄에 대한 큰 심판과 거기에 따른 무거운 형벌은 필연적이라는 진리와 앗수르는 수많은 사람을 간음하게 하고 피정복국에서 재물을 갈취하였으며, 자신들의 우상숭배를 강요하였으며 이러한 사악함은 하나님의 대적이 되어 반드시 멸망하게 된다는 것이다.
3장 8~13절 : 하나님이 된 자들은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려 할 때 인간의 어떠한 수단과 방법으로도 이를 거부하거나 지지할 수 없다. 앗수르는 지금까지 믿어 왔던 모든 것이 너무 쉽게 무너지자 다른 어떤 나라보다 더 비참해 졌다.
3장 14~19절 : 내용은 니느웨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너무도 철저하였기에 결코 다시 소생할 수 없다. 그러므로 지구상에서 니느웨는 완전히 사라졌다. 그 소식을 들은 자가 손뼉을 치며 기뻐하였으니 그들의 악행의 영향을 받지 않은 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 나훔 선지나의 이 예언은 주전 612년 신 바벨론 제국 나보 플라살에 의해 그대로 시행되었다. 이상과 같은 묵시의 말씀을 함께 상고해 보자.
* 하나님의 징계의 손아래 인가의 방어는 전혀 효과가 없다. 난공불락의 성으로 300년간 침략의 출발기지이었던 침략의 도착지가 되었던 적이 없는 니느웨 도성에 대한 하나님의 멸망의 선고가 떨어지자 그곳에 자체 균열이 발생함과 동시에 주변 국가들이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일정한 기간이 지나자 신 바벨론 제국의 나보플라살을 중심으로 하나의 연합군에 의해 침략을 당하였고, 그들이 전에 다른 나라와 도시를 점령할 때에 잔인하고 포악한 행위를 그대로 받고 멸망하였다. 나훔서는 그렇게 멸망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자세히 밝혀주었다(3:1~11). 이제부터 남은 말씀은 앗수르와 니느웨의 그 힘과 존재가 완전히 소멸될 것을 가르쳐 주고 있다. 이제 그들의 힘없이 무너짐부터 살펴보자.
3장 12절 : “너의 모든 산성은 무화과나무의 처음 익은 열매가 흔들리기만 하면 먹는 자의 입에 떨어짐과 같으니라.” 이 예언은 인간이 아무리 견고한 산성을 쌓아 자기와 이웃을 방어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심판은 견딜 수 없다. 니느웨 성이 역사적으로 난공불락의 성이었음은 사실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의 손이 닿기만 하면 무화과나무의 첫 열매와 같이 흔들기만 하여도 먹는 자의 입에 떨어짐 같다. 익은 과일이 떨어지는 것은 너무 자연스러운 현상이지만 하나님의 심판의 손에 인간들은 속수무책이다. 이것은 니느웨 성만이 아니다. 주님의 마지막 심판 때 ‘세상에 모든 강한 자들과 나라들이 무화과나무가 태풍에 흔들려 선 과실이 떨어지는 것 같이 땅에 떨어지리라’(계6:13)고 하였다. 즉 앗수르의 모든 산성이 무르익은 무화과가 쉽게 떨어지듯이 함락될 것임을 뜻한다(사28:4).
* 파멸과 같은 형벌이 너무 쉽게 가해지리니 “너희 장정들은 여인 같고 너의 땅의 성문들은 너의 대적 앞에 넓게 열리고 빗장들이 불에 타도다.”(13) 이 말씀은 예언적 과거형으로 기록된 것으로 대적이 쳐들어올 때 전과 같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하시는 말씀이다.
* 용사들의 낙담 : “너희 중 장정들은 여인 같고” 강한 성벽은 겁쟁이도 용감케 한다. 지금까지 천연 요새 안에서 어떤 위험도 겁내지 않았으나 그것이 무너지자 이제 용사들은 한결같이 무기력한 여자처럼 되었다. 하나님께서 그들로부터 용기를 거두어 가실 때 강한 자들도 낙담하게 되었다.
3장 13절 : “너의 중 장정들은 여인 같고 너의 땅의 성문들은 너의 대적 앞에 넓게 열리고 빗장들은 불에 타도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성의 모습이다.
모든 거리는 적들이 넘침 “너희 땅에 성문들은 너의 대적 앞에 넓게 열리고.” 적군이 침략해 올 때 장애물이 없었다. 앗수르 전 국토와 니느웨 도성은 적에게 열려졌다. “빗장들도 불에 타도다.” 성문을 지키던 빗장도 탔지만 수문장들도 모두 없어졌다. 이렇게 모든 요새들이 쉽게 무너지고 정예화 된 군인들도 아무런 힘이 되지 못했다. 결국 앗수르로 연결하는 많은 문들과 입구와 통행을 말한다(렘15:7 ; 미5:6).
3장 14절 : “너는 물을 길어 에워싸일 것을 예비하며 너의 산성을 견고케 하며 진흙에 들어가서 흙을 밟아 벽돌 가마를 수리하라”(14)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고 선언하였으니 너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여보라는 풍자적인 말씀이다. 포위당할 것을 예상하여 물을 길어다 비축하고, 네 방어진지들을 강화하여 네 성벽이 파손될 것을 대비하여 미리 진흙을 밟아 벽돌을 만들어 비축해 두라는 것이다. 보편적으로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 순종하기보다는 무어라고 말씀하시든지 그것을 대항하여 자기 뜻대로 살려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해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은 소용이 없을 것이다.
3장 15절 : “거기서 불이 너를 삼키며 칼이 너를 배기를 늣의 먹는 것같이 하리라 네가 늣 같이 스스로 많게 할지어다. 네가 메뚜기같이 스스로 많게 할지어다.” 니느웨를 파멸시키는 것으로 불, 칼, 늣(메뚜기처럼 숫자가 많게 떼를 지어 다니며, 농작물을 크게 황폐하게 함)을 등장시킨다. 불이 태우고 칼로 상하고 늣이 전부 먹어치우면 마침내 허무해질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생존을 위하여 먹을 것을 준비하고 방어를 위하여 성벽을 쌓아보라 하신다. 이렇게 말씀하심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님의 계획을 좌절시키려는 인간의 어떠한 노력도 심판자의 권능에 비하면 너무 미미한 것이라는 말이다. 아무리 전쟁을 대비하여 양식을 비축하고 성벽을 쌓아도 그러한 모든 노력은 허무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둘째는 인간은 망하는 순간까지도 하나님의 말씀과 그의 뜻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육적인 수단을 의지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는 길은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길이다. 이는 풍자적인 표현으로 앗수르가 니느웨에 많은 군사를 동원해도 곡식에 늣이나 메뚜기가 먹음 같이 허무하게 멸망할 것을 예언함이다.
* 12~15절의 교훈은 하나님의 징계를 받게 될 때 인간이 저항이나 피하기 위해 준비하는 것은 모두 허무한 것이다. 본문은 인간들의 이런 저항심을 이용하여 빈정대듯이 하나님의 심판이 있으니 안전을 위하여 준비하라는 말이다. 이는 그들의 죄악에 대해 하나님이 진노와 동시에 심판하실 때, 인간은 그것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다. 우리는 심판 전에 회개하여 그 진노하심을 돌이키고 심판이 시작될 때는 그것을 정당하고 가벼운 징계로 알아 회개하고 돌아오는 선지생도들이 되자.
4. 앗수르의 자원의 풍부함도 필요 없게 된다(16~18).
선지자는 인간들의 상식을 초월한 심판을 선언한다. 사람들은 보편적으로 풍부한 물질, 잘 훈련된 군인과 훌륭한 장비를 갖춘 군사력, 지식과 덕망이 있는 지도자만 있으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고 나라와 백성은 안전하다고 믿고 있다. 이 부분에 대해 앗수르는 그 어느 국가보다 완벽하게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은 이것을 무용지물로 만들었던 것이다.
3장 16절 : 물질의 풍성함도 하나님의 심판을 막을 수 없다.
“네가 네 상고를 하늘의 별보다 많게 하였으나 황충이 날개를 펴서 날아감과 같고” 니느웨가 위치한 곳은 유럽과 동남아 국가의 연합인 아세아와 아프리카가 연결되는 티그리스 강변이다. 이 니느웨를 경유하여 군사 로와 무역 로가 합쳐져 모든 기능의 심장부였다. 그러므로 니느웨는 권력과 정치의 중심지일 뿐 아니라 경제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특히 앗수르산 니아드유 향수, 몰약, 유황 등은 너무 유명했고, 수제품으로 자주색과 검정색 외투, 비단과 자수품은 주 상품이었으며, 야금술은 지금까지도 인정할 만하다. 이러한 경제력도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아무런 가치가 없었다. 마치 황충이 날개를 펴고 날아감과 같다고 표현하신다. 세상 권력자들과 재벌들, 세계가 다 제 것 인줄 알고 있으나 하나님께서 하루 밤에 날려 보낼 수 있는 것들임을 깨닫고 살아야 한다.
3장 17절 : 막강한 군사력도 하나님의 심판을 막을 수 없다.
“너의 방백은 메뚜기 같고 너의 대장은 큰 메뚜기 떼가 추운 날에는 울타리에 깃들었다가 해가 뜨면 날아감과 같으니 그 있는 곳을 알 수 없도다.” 아무리 강한 군대를 가지고 천하를 호령하고 제패했고, 위세가 당당한 세력이라도 황폐가 극에 달하여 이제는 서리 맞은 메뚜기 같다는 뜻이다.
* 너희 방백은 메뚜기 같고 대장은 큰 메뚜기 같다. 여기 ‘방백’이란 말은 히브리 원문 ‘민네따라’인데 왕자, 귀족, 혹은 통치자라고 할 수 있으니 군인을 말함이요, 큰 메뚜기는 장교나 장군일 것이다. 이들이 얼마나 강했던지 “나의 방백은 다 왕이 아니냐?”(사10:8)고 하면서 자신의 부하 장수들은 다른 나라의 왕같이 강한 자라 하였다. 추운 초가을 메뚜기가 추워 숨어 있다가 해가 뜨면 어디론가 날아가 흔적을 찾아 볼 수 없는 것 같이 그토록 세계를 제패하고 정복한 그 군대도 이제 그 흔적이 없어졌다. 즉 하나님의 심판 앞에는 무장해제가 되어 있다.
* 우리나라에서도 그토록 명에를 긍지로 삼고 살아온 육군 사관학교 출신 소위가 하극상에 시달려 저항하고 탈영하여 그 명예가 땅에 떨어졌다. 앗수르 군대 백전불굴의 전통과 명예를 생명으로 알고 있었으나 이제 다음과 같은 행동들을 취하며 생명처럼 여기던 것들을 버렸다.
*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 자신만 햇빛을 향하여 도망쳤다.
* 살기 위해 도망갔다. 앗수르가 강할 때는 목숨을 걸고 싸우며 후퇴를 모르던 그 군인들, 하나님이 이제 그 가슴에서 용기를 빼앗아 가자 자신만 살기 위해 군대를 이탈했다.
* 위기에 처해 서로 도와야 할 때 도망하였다. 보편적으로 사람들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자신이 필요한 것을 얻으면서 살아간다. 그러나 다른 이가 곤경에 처했을 때 외면하는 경우가 있다. 앗수르 군대는 진정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싸울 용기도 상실하고 떠나버렸다. 이것은 군인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3장 18절 : 지혜로운 자들이 우둔해 진다.
“앗수르 왕이여 네 목자가 자고 네 귀족은 누워 쉬며 네 백성은 산들에 흩어지나 그들을 모을 사람이 없도다.” 이제 어둠의 그림자가 앗수르에 임하여 서서히 종말을 고하고 있다. 왕이여 들으라. 여기서 ‘네 목자’는 통치자나 지도자를 말한다. 그들이 잔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한다. 주변 참모들은 다 죽었다. ‘네 귀족’은 지휘관 혹은 수령을 말한다. 누워 쉰다는 말은 힘을 잃거나 태만하여 누워 일어나지 않고 있다는 뜻이다. 죽고 남은 백성들은 산들에 흩어져 이제 모을 자가 없으니 영원한 이산이요 또 완전한 멸망이다.
또 한편으로 다른 각도에서 보면 18절 말씀은 자격 없는 목자들이 의무를 태만히 하였거나, 저주 받은 목자들이 되어 힘쓰고 애써도 전혀 효과가 없다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이다. 여기 목자란 왕의 임명을 받는 지방의 총독 같은 직임 자를 뜻한다.
세상적인 그 무엇을 우월하게 하여 자기 힘으로 삼는 자에게는 확실한 멸망 이외 아무 것도 없다. 하늘에 계신 전능하신 분을 의지하는 자만이 참으로 안전하다. 그리하여 성경은 “방백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가 소멸하리라 야곱의 하나님으로 자기 도움을 삼으며 여호와가 자기 하나님에게 그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146:3~5)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그분을 의지함으로 참으로 승리하는 선지생도들이 되자.
3장 19절 : 악인들의 멸망은 감사에 찬 기쁨의 근원이 된다.
니느웨의 파멸은 너무 절망적이다. 요나 선지자를 통해 회개를 촉구할 때는 소망이 있었으나 나훔 선지자를 통해 멸망이 선포될 때는 완전한 멸망이요 소생의 기대를 할 수 없었다.
“너의 다친 것은 고칠 수 없고 네 상처는 중하도다. 네 소식을 듣는 자가 다 너를 인하여 손뼉을 치나니 이는 네 악행을 늘 받지 않은 자가 없음이 아니냐?” 이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세 가지로 살펴보면서 상고해 보자.
(1) 니느웨의 파멸은 결코 회복될 수 없는 완전한 파멸임을 분명히 하신다.
“너의 다친 것을 고칠 수 없고 네 상처는 중하도다.”는 회복이 불가능한 징계이다. 국제적인 우방도 없고 모든 다른 국가에게 무자비한 짓을 하였으니 도울 자도 없다. 죽음에 이르게 한 중병과 같다. 파괴는 전면적이고, 회복은 불가능하다. “학대하던 자가 어찌 그리 그쳤으며 강호한 성이 어찌 그리 폐하였는고. 여호와께서 악인의 몽둥이와 패권자의 홀을 꺾으셨도다.”(시14:4,5)함은 하나님의 징계 앞에서 힘없이 무너지는 니느웨 같은 심판을 말한다.
(2) 니느웨 멸망의 소식을 듣는 자가 다 기뻐 즐거워한다.
“네 소식을 듣는 자가 다 너를 인하여 손뼉을 치나니” 멸망의 소식을 듣는 그들의 기쁨은 대단하다. 너무 기뻐 손뼉을 치고 즐거워한다. 기쁨은 보편적이다. 잔인함이 너무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쳤기에 그 세력의 종말을 슬퍼하는 자가 하나도 없다. 압박자의 몰락은 고난을 받는 자들에게 환호성을 일으키는 것이다.
(3) 선 악간에 모든 행위는 보상 된다.
“네 악행을 늘 받지 않는 자가 없음이 아니냐?” 성경에 질문으로 끝난 말씀은 요나서와 나훔서뿐이다. 그러므로 질문으로 마침은 니느웨 한 곳 밖에 없다. 요나서는 용서 않기를 바라는 요나의 불평이 있음에 용서하시겠다는 말씀이요, 나훔서는 이토록 냉혹한 심판이 있을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당연하다는 심판의 당위성을 가르치는 말씀이다.
* 혹독한 심판의 이유
이렇게 혹독한 심판이 있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들이 그토록 잔혹하였기에 그대로 되돌아간 것이다. 이를 통한 가르침을 살펴보자.
A. 행악자의 멸망은 얼마간의 고통의 소멸을 의미한다.
악한 자들의 소멸은 고통의 감소를 의미한다. 앗수르의 악행을 받지 않은 자가 없으니 이제 학정이 끝났다는 그 멸망의 소식을 듣는 모든 자들은 감사하였다.
B. 행악자의 멸망은 의의 승리를 의미한다.
진실한 마음을 가진 자들은 악이 만연하고, 허탄과 불성실, 배반과 악의, 시기와 질투, 비방과 모략, 학정과 압제가 가득한 것을 볼 때, 그런 죄악들이 일소되고 의가 승리하는 날이 도래되기를 간절히 열망한다. 이때 행악 자가 멸망하는 것을 보며 의의 승리임을 확인하고 기쁨을 느낀다. 이때 성도는 그 기쁨을 분석해 볼 때 의의 승리에 대한 감사와 악인에 대한 연민이 섞인 절제된 기쁨임을 확인 할 수 있다. 행악자의 멸망은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공의의 심판을 변증한다. 신실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명에는 매우 귀중하다. 불의가 처벌 받지 않고 넘어가는 모습을 볼 때 악한 자들은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조소를 보내게 된다. 이 때 하나님이 역사에 개입하시어 당신의 공의를 집행하심을 보며 그 종들은 죄악의 멸망에는 연민의 정을 주게 되며 하나님께는 감사와 찬양을 드리게 된다.
* 행악자의 필연적 결과인 패망은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새로운 용기를 주고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됨을 보고 기뻐하게 된다. 그러나 이 때 우리가 느끼는 것은 죄인에게 연민을 느끼는 절제된 기쁨이요 하나님의 이름이 찬양받게 된 기쁨이다. 모두 이러한 자세에서 악인의 멸망을 보았다면 더 이상 악에 머물지 않을 것이라는 확실한 교훈을 준다.
* 본장의 결론
하나님께서 요나 선지자에게 니느웨성의 멸망을 선포하라고 말씀하실 때(욘 1:1~2, 3:1~2)는 은혜의 때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회개하고 용서를 받았다. 그러나 나훔 선지자에게 니느웨성의 멸망을 선포하라고 말씀하실 때는 은혜의 시대가 마감하는 심판의 때가 되었던 것이다. 오늘이라 일컫는 기간을 말씀 하실 때 히브리서 3장 13절에서 밝히셨는데, 곧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라고 분명히 하셨다. 이 시대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은혜 시대이다. 그러나 내일은 심판의 날이다. 이 은혜의 때에는 세상 나라와 그리스도의 나라가 병행하지만 마침내 심판의 때가 오면 다시 기회가 없다. 개인에 따라 언제 은혜의 시기가 끝날는지 알 수 없다. 내일로 미루지 말자. 내일은 심판의 때일 수 있음을 느끼면서 살자.
니느웨의 멸망이 필연성이란 부유하고 강성하다 할지라도 그들의 죄악 때문에 노아몬과 멸망당할 수밖에 없음을 말하고 있다. 즉 과거 철의 요새지로 알려졌던 막강한 노아몬의 멸망을 예로 들어, 이 같은 과거의 사실에서 앗수르는 신실치 못한 자들의 운명이 어떤 것임을 깨닫고 회개했어야 했는데, 더욱 교만하여 죄악을 저질렀기 때문에 그들에게도 파멸의 심판은 당연한 결과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처럼 죄악은 분명히 피할 수 없는 형벌을 가져온다(렘11:11). 그 누구도 범죄하고서 온전할 수 없다. 결국 본서는 범죄 한 자들에게 대한 심판과 선민들의 구원이라는 메시지를 선포한 것인데, 이는 역사 속에서 그대로 성취되었으며 또한 앞으로 예수님의 재림으로 최종적인 성취를 바라보고 있다는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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