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삶은 어떤 삶이어야 할까요?
디도서 2:11-14
바울사도는 그의 믿음의 아들이요, 제자인 디도가 그레데 섬이라는 곳에서 목회를 감당할 때, 무엇을 제일 중요하게 설교하고, 어떻게 교회를 치리해야 할 것인가를 디도에게 가르치기 위하여 이 편지를 쓰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이 편지를 통해서 기독교신앙은 하나님의 은혜에 기초한 것이며, 그리고 그 은혜란 “자격이 없는 사람들에게도 베풀어지는 일방적인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전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것을 이미 에베소교회를 향한 편지에서도 역설한바가 있었습니다.
엡2:8-9절에 보면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딛3:5에서도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된 것”이라고 반복하여 말합니다.
여기 긍휼이란 은혜의 또 다른 표현으로써, 저주받아 마땅한 사람들에게 오히려 하나님께서 사랑을 베푸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땅의 교회는 이 구원의 은혜를 체험한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그런데 왜 주님은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들을 각각 혼자로 남겨두지 아니하시고 공동체 안에서 살도록 하셨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들이 서로를 격려하며 살아야 할 이 땅의 삶들이 남아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은혜 받은 성도들이 이 땅에서 추구해야 할 삶은 어떤 삶이어야 할까요?
1.과거의 불법을 버리고 떠나야 합니다.
14절을 읽겠습니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 구속이란 “대가를 지불하고 다시 회복시킨다”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답게 회복되어 살아가는 삶을 위하여,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피흘리신 희생의 대가를 지불하신 것으로서 주님의 십자가는 우리의 불법의 대가였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불법”이란 단어는 죄에 대한 법률적인 용어입니다.
그리고 그 죄는 “하나님이 하라고 하신 것을 안하고, 하지 말라고 하신 것을 어기고 행한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못박혀 죽으신 그의 은혜로 말미암아 불법에서 사함받고 구원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구원받은 “우리가 다시 불법을 행하던 과거로 돌아가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의 서신들을 통하여 우리들에게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누구나 과거로 돌아가고픈 과거 회귀본능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땅의 종살이에서 구원을 받아 애굽을 떠났으면서도 그들은 자꾸 기회만 있으면 애굽을 그리워하고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말합니다.
그러나 돌아가면 끝장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들을 종살이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과거에 매인 사람들 중에 창조적인 미래를 만들어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우리는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우리가 처음 은혜를 받고 구원받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따라서 이제 우리가 과거로 후퇴하지 않고 성장하려면, 제일 중요한 것은 적절하게 양육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양육의 첫걸음은 과거의 죄나 불법으로 돌아가지 않도록 버릴 것을 버리고 떠날 것을 떠나야 하는 것입니다.
12절을 보면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라고 했고, 벧전2:1-2절을 보면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들을 버리고 갓난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성경의 일관성 있는 가르침입니다.
저는 오늘의 교회공동체가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능력의 공동체가 되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오늘의 성도들이 버릴 것을 버리도록 제대로 양육받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한국의 초대교회가 세상에 큰 영향을 끼칠 수 있었던 것은 성도들이 일단 예수를 믿으면 버릴 것을 분명하게 버렸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이 버릴 것은 무엇입니까?
다시 한번 우리에게 버릴 것을 버리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2.현재의 선한 일에 열심 할 줄 알아야 합니다.
물론 우리는 결코 선행으로 구원을 받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사람에게는 반드시 선행의 열매가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엡2:8-9절에서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 “구원은 우리의 행위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강조한 후 이어지는 엡2:10절에서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라”했고, 본문 14절에서는 “우리를 구속하시고 깨끗하게 하심이 우리로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선행가운데 살아간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친백성이 된 증거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의 선행은 “결코 우리가 마땅히 이런 선한 일을 해야 하겠다”는 도덕적인 당위의식으로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율법적인 선행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런 선행은 오래가지 못하며, 자신의 이름 석자 선전하는 수준의 선행으로 끝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그리스도인의 선행은 주님의 놀라운 은혜와 그 사랑을 체험한 가슴에서 솟아나는 자발적인 감격의 충동으로 평생동안 성령의 열매를 맺어가며 살아가는 모습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필립 얀씨는 명화 “포레스트 검프”에서 우리 그리스도인의 선행이 검프가 여주인공인 제니의 사랑에 대한 반응과 같은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명화 “포레스트 검프”에 보면, 검프는 “아이큐 75의 아무 것도 의미 있는 일을 하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 받은 우직한 저능아입니다. 그런데 검프는 어느날 한 여인의 사랑을 받고 앞을 향해 달리기 시작합니다. 길에서도, 운동장에서도, 전쟁터에서도 그는 계속해서 달립니다. 그는 영웅이 되고 싶은 충동도, 메달을 받고 싶은 충동도 없었습니다. 그는 오직 사랑하는 제니 때문에 달린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고현교회 공동체가 모일 때마다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의 감동이 우리를 지배할 때, 비로소 우리는 오직 주님만을 위한 선한 일을 위해 달려가는 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교회 공동체는 모일 때마다 조건없는 첫 사랑을 알게 해준 예수님의 음성, 그리고 그 예수님의 사랑을 경험한 성도들의 간증소리로 가득해야 하고, 또한 그들과 연합하여 교회 울 밖의 불신자들을 향해 복음을 전도하는 고현 공동체의 성도님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3.미래의 소망으로 기다리며 살아야 합니다.
선한 일을 시도하는 모든 사람들이나 공동체가 반드시 부딪치는 장애가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이 우리의 선행을 몰라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선한 일을 하다가 쉽게 상처를 받고 쉽게 좌절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우리의 선행을 보상받고 싶어할수록 더해집니다.
따라서 우리는 선행의 목표를 남들이 알아주는 것에 두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선행의 유일한 동기는 오직 은혜이며, 차선의 동기가 있어야 한다면 그것은 자신의 경건의 유익을 위해서 해야 하는 것입니다.
12절을 다시 한번 읽겠습니다.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우리가 버리면서 동시에 붙잡아야 할 것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서 살고”라고 가르칩니다.
이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한 인격의 표상이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예수님입니다.
따라서 이렇게 예수님의 인격을 닮아 가는 삶의 과정에서 나타나는 자연스런 삶의 결과가 우리들의 선행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경건을 단순히 죄를 피하고, 죄를 안짓는 등의 소극적인 모습으로만 그리지 않습니다.
약1:27절을 보면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환난 중에서 돌아보는”것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이런 적극적인 선행을 함께 수행하도록 이 선행의 사역을 주님께서는 교회 공동체에게 위임하신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선행을 하다가도 지칠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선행을 추구하면서도 여전히 욕심에서 해방되지 못하는 자신을 보면서 괴로워 할 때도 것입니다.
그때마다 성경은 우리들에게 “다시 오실 주님을 바라보아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13절의 교훈이 바로 그것입니다.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남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그렇습니다.
우리의 못다한 선행의 마지막 과제를 완성시켜 주시기 위하여, 그리고 우리의 못다자란 인격의 마지막 부분을 채워 예수님을 온전히 닮은 자로 하나님 앞에 우리를 세우기 위하여 예수님은 반드시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마지막에 우리에게 주실 은혜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의 경건이십니다. 우리의 행복이십니다. 우리의 소망이십니다. 예수님이 우리 공동체의 비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존재 이유를 바로 알아 은혜를 입은 우리는 열정적인 예배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려야 하고, 예수님의 종된 신분으로 한 영혼 한 영혼을 섬기며, 또한 우리는 세상으로 보냄을 받은 소명자로서 열심을 가지고 끊임없이 복음의 전달자가 되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복음의 증인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마더 테레사의 “어쨋거나”라는 시를 인용하여 드리면서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람들이 때로 비이성적이고 비논리적이고 자기 중심적으로 느껴진다 할지라도 어쨋거나 용서하십시오/당신의 친절에 사람들이 오히려 당신의 동기를 의심하고 당신을 이기적이라고 한다 할지라도 어쨋거나 친절하십시오/당신의 성공을 보고 주변에서 거짓된 친구들과 참된 친구들이 함께 모여온다 할지라도 어쨋거나 성공하십시오/당신의 솔직함과 단순함을 이용하여 사람들이 당신을 속인다 할지라도 어쨋거나 정직하십시오/당신이 여러 해에 걸쳐 성취해온 모든 것을 사람들이 하룻밤에 다 무너뜨리려 할지라도 어쨋거나 성취하십시오/당신이 찾아 낸 행복과 평화를 누군가가 질투한다 할지라도 어쨋거나 행복하십시오/당신이 오늘 베푼 선함을 사람들이 내일은 다 잊는다고 할지라도 어쨋거나 선을 베푸십시오/당신이 가진 최선을 이 세상에 다 내어 주어도 세상은 여전히 부족함 투성이라 해도 어쨋거나 당신의 최선을 내어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