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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절 한 절이 주옥과 같은 말씀들이기 때문에 쉽게 넘어갈 수 없어서 말씀 그대로를 파악하는 데 주력하였습니다. 그 중에서 특히 주의해서 읽어야 할 부분을 간추려 보았습니다. 헬라어를 푼 것이고, 분량이 많아 저의 코멘트는 최소화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이 성경의 대표적인 '믿음 장'인 것은 잘 아시지요?
11장 1절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실상’을 가리키는 ‘휘포스타시스 (ὑπόστασις)’는 ‘아래’를 의미하는 ‘휘포 (ὑπο)’와 ‘서다’를 의미하는 ‘히스테미 (ἱστημι)’가 결합된 단어입니다. 어느 것이든 믿을 만한 것 아래에(예를 들어 약속, 건물 등의 아래에) 서는 것을 말합니다. 믿음은 그처럼 ‘믿을 만한 것 아래에서 확고하게 서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증거’를 가리키는 ‘엘렝코스 (ἔλεγχος)’는 신약성경에서 여기에서만 사용된 단어로서 ‘어떤 것의 진실을 (규명하기) 위해 증거를 제시하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3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앞서 언급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을 믿음으로 이해하는데, 모든 세상(공간적인 개념으로서의 세상)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만들어졌고’에 이어, ‘따라서 보이는 것은 볼 수 있는 것들로부터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4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이 부분은 부연 설명을 하고 있는 부사절입니다. 즉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뛰어난/받으실 만한 제사를 하나님께 드렸다.) 하나님이 그의 예물에 관하여 증거하시는 것처럼, (그것을 통해/제사를 통해/믿음을 통해 그는 의롭다는 증거를 얻었다. 그리고 그가 비록 죽었을지라도 믿음을 통하여 여전히 말하고 있다)’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이슈의 핵심은 아벨이 드린 예물에 있습니다.
5절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결과를 말하고 있습니다. 즉 (믿음으로 에녹은 옮겨져) 죽음을 보지 않았다’가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그가 발견되지 않았다.’는 그가 사라지자 사람들이 한동안 그를 찾았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에녹의 믿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데 있었습니다.
6절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에녹의 믿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데 있었다는 것을 증명이나 하듯이 ‘유아레스테오 (εὐαρεστέω)’라는 단어가 다시 등장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있다는 것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같은 말이라고 강변하는 것 같습니다. ‘상 주시는 이’는 ‘보상’이라는 말과 ‘돌려주다, 되갚다’는 말이 결합된 단어입니다. 여기에서의 주체는 하나님이십니다. ‘상 주시는 이’를 ‘보답하는 자, 보상하는 자’(rewarder)로 바꿀 수 있습니다.
7절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경외함으로’는 ‘존경하다, 두려워하다’ 등을 의미합니다. 노아의 가족이 구원을 받은 것은 하나님의 경고를 경외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또한 실천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방주를 준비한 것이 그것입니다. 그의 믿음은 그를 의의 상속자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8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흥미로운 것은 이렇게 떠나기 전에 ‘먼저 순종했다고’ 말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아브라함의 신뢰의 정도를 말해줍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어디로 가야 할 지를 모르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그가 도착할 때까지 그러한 상황은 계속되었을 것입니다.
9절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이 부분을 직역하면, ‘마치 이방인처럼, 텐트/장막에 거하였으며’가 됩니다. 그들이 약속의 땅에 살게 됐지만, 그곳에 원래 살고 있던 사람들 입장에서는 그들(아브라함과 그 직계들)은 여전히 이방인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분명히 그곳을 약속의 땅으로 인식하고 살았습니다. 텐트가 이방인과 본토인을 결정짓지는 않는 것입니다.
11절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었으니
이 부분을 직역하면, ‘씨를 잉태할 능력을 얻었으니’가 됩니다. 이 내용보다 앞서 ‘비록 나이가 지나 임신할 수 없었으나’가 나옵니다. ‘충분한 시간보다 많아서’ 즉 ‘충분한 시간이 지나서’라는 말에서 왔습니다. 아브라함과 더불어 사라도 믿음의 사람인 것은 그가 하나님을 신뢰할 만한 분으로 생각했다는 점 때문입니다.
12절 죽은 자와 같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한 사람으로부터, 그리고 (할 이야기가 많지만) 특별히 죽은 것 같은 이 사람으로부터’라는 의미입니다. 아브라함이 나이가 들어 생산능력이 없어졌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생육하다’라는 개역개정의 번역은 원래의 의미인 ‘자식을 보다’로 번역하는 것이 보다 적절하다고 보여집니다.
13절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증언하다’를 가리키는 ‘호몰로게산테스 (ὁμολογήσαντες)’는 부정과거 분사로서 이어지는 4개의 부정과거 분사 중 맨 마지막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모든 분사들이 믿음을 따라 죽은 사람들의 행적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낯설고 익숙하지 않은 지역에서 잠깐 동안 머무는’ 것과 관계되는 단어가 함께 사용되었습니다. 이렇게 임시로 머무는 땅을 마치 영원히 거할 곳처럼 집착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것은 서두에 언급한 믿음을 따라(Κατὰ πίστιν)와 배치되는 모습인 것입니다.
16절 그들이 이제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이것과 더불어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신다는 것은 사실(fact)입니다. 그것을 현재형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한 성을 예비하셨습니다. 그들의 열망과 하나님의 예비하심이 교차하지만, ‘예비하다’를 가리키는 ‘헤토이마센 (ἡτοίμασεν)’이 부정과거 능동태 동사임을 감안할 때, 하나님의 예비하심이 먼저입니다. 우리를 위한 구원 계획도 마찬가지입니다.
11장 17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이 부분은 앞부분을 되뇌는 듯한 서술입니다. 즉 이미 앞부분에서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다는 것을 말했기 때문입니다. 전체적으로 다시 보면,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이삭을 드렸다, 그리고 약속들을 받은 그가 독생자를 드리고 있었다’가 됩니다. 한 번 마음을 정하면 앞뒤 가리지 않는 믿음의 사람의 모습입니다.
19절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아브라함은 순종하는 마음으로 이삭을 바칠 때, 하나님이 ‘그를 죽음에서라도’ 살리실 줄로 생각했습니다. ‘그런 이유로/그 믿음 때문에 말하자면 그를 죽은 자 가운에서 돌려받은 것이다.’ 이렇게 읽혀집니다. 이처럼 믿음은 순종이 먼저이지 모든 것을 다 재 본 후에 믿을 만하면 믿는 것이 아닙니다.
22절 이스라엘 자손들이 떠날 것을 말하고
‘엑소도스 (ἔξοδος)’는 지리적으로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것을 말합니다. ‘떠남, 출발, (작은) 길’ 등의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 요셉이 그의 뼈를 위하여 명령한 것이 믿음입니다. 언제 이루어질지 모르는 일이었지만, 그날을 확고하게 믿은 것입니다.
25절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 더 좋아하고
왕의 명령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모세의 부모의 믿음이었다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선택한’ 것은 모세의 믿음이었습니다.
30절 믿음으로 성이 무너졌으며
믿음으로 여리고 성이 무너졌습니다. 주어는 여리고 성/벽입니다. 믿음으로 여리고 성을 무너뜨린 것이 아닙니다. 믿음을 가질 때 여리고 성이 스스로 무너졌습니다. 믿음이 무엇인가를 매우 강렬하게 표현하고 있는 대목입니다. 원어적으로 ‘목적지 주변을 완전히 감싸며 움직이다’라는 말에도 성/벽을 무너뜨리려는 것보다는 믿음을 가지고 도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31절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 순종하지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하지 아니하였도다
라합의 믿음은 스파이들/정탐군들을 평화롭게 맞이한 데 있었습니다. 그것으로 인해 여리고 성 안의 다른 사람들과 함께 멸망하지 않았습니다.
11장 33절 믿음으로
31절까지는 우리말로 똑 같은 ‘믿음으로’가 이어졌고, 어순도 항상 맨 앞에 위치하였으나 33절에서는 전치사 ‘디아 (διὰ)’와 더불어 소유격인 ‘피스테오스 (πίστεως)’로 바뀌었고, 어순도 맨 앞이 아닙니다. 차이라고 한다면, 31절까지는 각 개인에 대한 믿음을 다루었지만, 32절부터는 여러 사람을 한꺼번에 다루거나 믿음에 관한 일반론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의미는 이전과 큰 차이가 없지만, 이러한 변화로 인해 분위기는 사뭇 달라졌습니다.
35절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아들이기도 하며
여기에서는 부활을 주제로 믿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죽은 자들이 살아난 경우는 주로 여자에게 일어났습니다(왕상 17:17-24, 왕하 4:17-37). 이처럼 이 부분은 ‘여자들은 부활에 의해 그들의 죽은 자들을 다시 돌려받았다’로 볼 수 있습니다. 여자들의 믿음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아는 ‘선지자들을 통해/선지자들의 믿음을 통해’ 그러한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미래적으로는 ‘더 나은 부활을 얻기 위하여 풀려나는 것을 거절하며 심한 고문을 받았습니다.’ 당장 무엇을 이룬 것은 아니지만 ‘믿음을 통해서’ 그러한 결정을 하고 좁은 길을 간 것입니다.
36절 또 어떤 이들은 …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여기에서의 ‘받다’는 당하는 것에 대한 대체 표현입니다. 따라서 ‘경험하다, 겪다, 당하다, 고통받다, 시달리다’ 등과 같은 다양한 표현으로 대체할 수 있습니다.
38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직역하면, ‘그들과 관련해서 볼 때(of them) 세상은 잘 어울리지 않았다’가 됩니다. 또한 ‘(그들이 너무 훌륭해서) 그들은 세상과 어울리는 사람들이 아니었다’로도 볼 수 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습니다. ‘유리하다’는 말이 수동태 현재분사인 것은 그들의 그러한 형편이 나아지지 못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39절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
믿음의 선진들이 (궁극적인) 약속을 받지 못한 것은 하나님의 섭리에 따른 것입니다. 그들 모두 믿음으로 말미암아 칭찬을 받았으나 약속을 받지 못한 것은 그들이 그리스도 이전의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40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더 좋은 어떤 것을 공급하셨기 때문에, 우리를 떠나서는 (옛 언약하에 있는) 믿음의 선진들이 온전해지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옛 언약 하에 있는 사람들에게 차별적인 믿음의 역사를 경험하게 하신 반면, 새 언약 하에 있는 사람에게는 차별적인 약속을 주신 것이 어떤 면에서 공평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12장 1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12장 1절과 2절에서의 중심 메시지는 ‘우리 앞에 놓인 경주를 하자’는 것입니다. 두 개의 큰 가지는 1절의 ‘벗어 버리고’와 2절의 (예수를) ‘바라보며’입니다. 나머지는 부대적인 설명입니다. ‘짐, 부담, 무게, 장애’ 또한 ‘쉽게 걸려들게/빠지게/위축되게 하는’ 것들을 벗어 버리고 (믿음의) 경주를 하자는 것입니다.
2절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이 부분은 (예수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믿음의 경주를 하자), 그 예수는 그의 앞에 놓인 즐거움을 위하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신 채 십자가를 ‘견디셨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는 의미입니다. ‘개의치 아니하시더니’는 ‘다른 것과 비교해 볼 때, 걱정해야 할 만큼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3절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생각하라’는 ‘숙의하며 따져보라’는 의미입니다. 신약성경에서 여기에만 나오는 희귀한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죄인들이 자기를 향해 적대감을 가지고 대항한 것을 참으신 이 사람/이 분을’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잘 따져 생각해 보면 앞으로 논의할 모든 질문/고민에 대한 답이 있을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의 ‘참다’는 단순히 ‘참다, 견디다’는 뜻도 가지고 있지만, ‘반대에 직면해서 믿는 바를 유지하다’는 의미도 가지고 있습니다.
7절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대우하다’는 여기에서 ‘만나다, 다루다’ 등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자식처럼 너희를 다루시나니’라고 하는 것이 보다 적절합니다. 또한 이 부분 바로 앞에 등장하는 ‘징계’는 ‘훈련’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며, 따라서 ‘훈련(discipline, training)을 위해 너희가 참는/견디는 것이다’라고 읽는 것이 좋습니다. 징계와 훈련은 차원이 다릅니다. 훈련이라고 생각하면 참는 것도 훨씬 쉬울 것입니다.
9절 또 우리 육신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공경하다’는 ‘누군가에게로 향하다’를 의미하며 존경을 표시하는 태도/행동을 말합니다. ‘게다가 우리는 우리의 육신의 아버지를 훈련자/훈육자로 가지고/모시고 있다. 그리고 존경한다’라는 말입니다. ‘가지다’와 ‘존경하다’는 둘 다 미완료과거 동사입니다. 일반적인 일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영의 아버지가 훈육하면 더더욱 복종/순종하며 살아야 함을 일깨우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서술을 통해 하나님의 훈육에 대해 오해가 없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고 있습니다.
11절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
‘연단 받은’은 ‘훈육을 경험하다, 훈련하다’ 등을 의미합니다. ‘훈련/훈육을 받은 자들에게’ (의의 화평/평강의 열매를 맺는다)가 됩니다. ‘디카이오쉬네스 (δικαιοσύνης)’가 소유격이므로 의와 평강을 일대일로 분리시키는 것보다 ‘의의 평강’처럼 일체화시키는 것이 더 적절합니다.
12장 12절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일으켜 세우고’가 명령형 동사이므로 명령형으로 마무리하는 것이 좋습니다.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이 꼬부라진 여인을 고치실 때(눅 13:13) 사용한 단어이기도 합니다. ‘피곤한’ 그리고 ‘연약한’이라고 말할 때 모두 현재완료 수동태 분사이며, 따라서 ‘약해진’ 그리고 ‘장애가 된’으로 바꾸는 것이 좋습니다.
13절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이 문장의 동사는 명형형입니다. 따라서 (곧은 길을) ‘만들어라’로 마무리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개역개정은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로 마무리되고 있습니다. ‘토 콜론 (τὸ χωλὸν)’은 ‘이미 불구 상태, 절뚝거리는 상태’임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울퉁불퉁한 길에서 발이 접질리지 않고 오히려 치료되도록 곧은 길을 만들라는 것입니다. 둘 다 가정법 수동태 동사들입니다.
14절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명령형 동사에 목적어들이 ‘카이 (καί)’로 분리되어 있기 때문에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하고, 거룩함/성결함을 추구하라’와 같이 읽어야 합니다. ‘이것/그것’이라는 것도 단수이기 때문에 화평함과는 독립적으로 ‘거룩함, 성결함, 성화, 성별(聖別)’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거룩함/성결함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볼 수 없을 것이다’(미래형).
15절 너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하고
전체적인 틀은 ‘~에 대해서 주의를 기울이는 가운데(15, 16절) ~을 추구하라(14절)’가 됩니다. 이 부분 다음에는 ‘쓴 뿌리’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데, 그것이 ‘(사람들을) 괴롭게 하지 못하게 하고, 그것에 의해 많은 사람이 더럽혀지지 않게’ 주의를 기울이는 가운데 거룩함을 추구하라는 것입니다.
16절 음행하는 자와 … 망령된 자
‘포르노스 (πόρνος)’는 ‘성적으로 부도덕한’ 것을 가리키고, ‘베벨로스 (βέβηλος)’는 ‘신령한 것/하늘에 속한 것에 관심이 없고 세상적인’ 것을 가리킵니다. 여기에서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판 것을 후자와 직접 연결시킨 것은 이채롭습니다. 이처럼 에서의 행동은 ‘신성 모독적인, 불경한’ 것으로도 해석됩니다. 전체 내용을 부정하는 ‘메 (μή)‘가 맨 앞에 위치하고 있는 점에 유의하여 이 구절을 다시 보면, 성적으로 문란하고 세속에 물든 사람이 ‘없도록’ 주의를 기울이는 가운데,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하고 거룩함을 추구하라(14절로 마무리)는 것입니다.
17절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
이 부분을 직역하면, ‘회개할 기회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가 됩니다. 에서가 세속에 물든 사람이라고 불릴 만하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접속사 ‘가르 (γάρ)’를 사용하였는데, 이 부분에서 다시 그 ‘가르’가 사용되었습니다. 즉 ‘그(장자의 명분을 판) 후에 축복을 이어받고자 했으나 거절당했다. 비록 그가 눈물을 흘리며 그렇게 할 수 있는 길을 찾았음에도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가 됩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신성 모독이 갖는 위험성을 일깨워주는 말씀입니다. 이런 일이 무지함에서 비롯된 것 같으나 그 전에 하나님을 향해 형성돼 있던 에서의 tendency(경향)이 그러한 화를 불러온 것입니다.
12장 18-19절 너희는 … 이른 것이 아니라
‘이르다’가 18-19절 전체를 아우르고 있습니다. (시내)산이 생략되어 있습니다. 쉽게 연상할 수 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뒤로는 계속해서 여격의 분사 내지는 명사가 뒤따르고 있습니다. 즉 ‘너희는 만질 수 있는 산에 온 것이 아니고, (과거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경험했던) ~등이 있는 산에 온 것이 아니다’는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마지막 부분은 ‘말하는 소리’에 대한 부연 설명입니다.
20절 명령을 그들이 견디지 못함이라
‘견디다’가 미완료과거 동사인 점은 사람들이 인내의 시간을 보냈음을 암시합니다. 이렇듯 시내산의 경계와 관련된 엄격한 제한은 사람들에게 공포감을 가져다줄 정도였습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람들 간에 존재했던 장벽이 그만큼 컸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명령’은 단순한 명사가 아닌 수동태 현재분사입니다. 따라서 보다 정확한 표현은 ‘명령된 것’이 됩니다.
22-24절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18-19절에서와는 반대로 믿는 자들이 실제로 이른 곳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현재완료는 이미 이르렀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는 19-20절에서 생략되어 있던 ‘산’을 ‘시온 산’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24절에 나오는 마지막 부분은 편지의 수신자들이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와 뿌려진 피’에 이르렀다는 것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가장 핵심적인 도착지입니다.
25절 너희는 삼가 말씀하신 이를 거역하지 말라
직역하면, ‘말씀하신 이를 거역하지 않도록 유의해라’가 됩니다. 우리의 경우 만일(εἰ) 거역한다면 하늘로부터 경고하신 이를 배반하는 것이 되므로 땅에서 경고하신 이를 거역한 경우와 비할 바가 아닐 것입니다.
27절 진동할 것들 곧 만드신 것들이 변동될 것을 나타내심이라
‘흔들리는 것들이 제거될 것’을 가리킵니다. 흔들리는 것은 창조된 것, 만들어진 것을 가리키며 그것들은 제거될 것인데, 그것은 흔들리지 않는 것/흔들릴 수 없는 것이 보존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28절 그러므로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받았은즉 ~받자’는 표현은 그 자체가 어색합니다. ‘은혜에 대한 감사를 표하자’로 번역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것에 의해서’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예배를 드리자’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말씀이 힘이 되는, 길이 되는, 소망이 되는 하루가 되시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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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믿음의 선조들의 목록을 보면 고개가 갸웃해집니다. 야곱은 믿음이 들쭉날쭉했고,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영접한 것 외에 칭송받을만한 것이 있나싶습니다. 삼손이 걸어간 삶의 길은 나실인으로서는 실격입니다. 다양한 믿음의 사람들을 한 덩어리로 설명해보자면, 그들의 믿음이 모두 ‘완벽’하거나 ‘특별’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믿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크기가 아니라 믿음의 유무가 하나님의 자녀인지 아닌지를 가르는 기준이라면 여기에 우리의 이름이 올라가도 어색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믿음이 있어도 아는대로 실천하지 못하는 나의 못남에 대한 자책이 이런 하나님의 은혜안에서 위로를 받습니다. 그러니 이 은혜안에서 우리의 시선은 자신도, 우리를 둘러싼 허다한 증인도, 무거운 짐과 얽매이기 쉬운 죄도 아닌, 우리를 온전케 하시는 예수에 고정하고 인내로 믿음을 끝까지 붙들어야겠습니다.
에서가 장자의 명분이 있었듯이 우리에게도 하나님께 바로 나아가고 교제할 수 있는 특권이 있습니다. 자신이 가진 것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 모르고 음식 한 그릇에 팔아버린 에서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로서 가진 특권을 세상의 값싼 유흥의 시간과 바꿔버리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맞습니다.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믿음을 근거로 귀하게 여겨 주시는 은혜를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의 증거니
두렵고 떨림으로 믿음을 지켜내는 자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러한 애터튜드(attitude)를 하나님이 귀하게 보실 것 같습니다.
믿음으로 순종하여 갈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간 아브라함의 여정이 떠오릅니다.
인생의 앞길을 알지 못하되 믿음과 순종의 길로 나아가는 것이 어리석은 인간의 생각으로 계산기를 두드리는 것보다 훨씬 값어치 있음을 알게 됩니다. 오늘도 주님의 은혜를 간구합니다.
계산하지 않는 믿음, 그것이 우리에게 요구된다 생각합니다. 또한 은혜에 의지하는 마음이 소중합니다.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14절)!
주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말씀이 생각나네요! 늘 애쓰시는 모습이 존경스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