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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랏빛 노을을 맞이하여
김 순 길
팔십 고개를 넘고 보니 세월이 뒤에서 붙잡을세라 쏜살같이 달아나는 듯하다.
2025년 5월 6일에 나는 ‘구순’을 맞이한다. 그간 하나님의 은혜로 무탈하게 건강한 모습으로 구순을 맞이하여 감사하다. 오늘 이 순간은 어제 간 이가 그토록 살기를 갈망했던 소중한 시간이다. 이 순간 살아 있음을 무엇으로 보답해야 할까?
5월 3일은 한국 국제 기드온 대전캠프 월례회 날이다. 남편을 따라 기드온에 입회한 지 어언 40년이 흘렀다. 회원들은 생일을 맞이하면 감사헌금을 하고 식사를 나누면서 그간 성경배부에 수고함을 서로 위로하고 격려한다. 나도 이번 구순을 맞아 소문난 한식당을 찾아 푸짐한 식사를 대접하면서 그간 못다 한 정을 나누었다. 더욱이 이웃에 사는 장로님과 사모님이 특별히 보내주신 케익에 구순의 축가가 중천에 울려 퍼져 기뻤다.
5월은 어린이날과 어버이날이 함께 있는 ‘가정의 달’이다. 전 교인 중에 재작년 102살 되신 어른이 돌아가신 후 내가 가장 연장자이다. 집안 어른으로서 교회 식구들에게 이제껏 아무것도 베풀지 못했는데, 이번 기회에 점심을 대접하고 싶었다. 전 교인 100명분을 뷔페로 주문했다. 이 사실을 부산에 있는 아들에게 알리고 예배에 참석하기를 권했다. 아들은 흔쾌히 식사비 전액을 자기가 부담하겠다고 한다. 참으로 고맙고 대견스럽다. 바쁜 중에도 자기 할 일을 챙기는 것이 마음이 뿌듯하고 동반자가 있음에 힘이 난다. 그런데 며칠 후 아들에게서 전화가 왔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자신의 생일이라고 왜 드러내놓고 밥을 사느냐는 것이다. 그것은 독재자들이 하는 짓이란다. 구순을 맞이하여 친구들에게 밥을 살 수는 있으나. 전 교인들에게 자신의 이름으로 식사를 접대하는 것이 잘못이라는 것이다. 구순을 빙자하여 자신을 내세우는 것으로 비칠 수가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자신보다 우선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머리가 핑 돌며 당황스러웠다. 생각이 뒤엉킨다. 아들도 나이가 65세가 되었으니 자기주장만 내세운다. 자아가 강하고 외고집 성격이다. 대학 교수로 봉직했던 아버지는 자기의 대를 잇는 아들에게 늘 흐믓해 했다. 많은 직종 중에 교수가 유난히 자기애가 강하고 고집이 세서 자기 생각이 오로지 법이고 진리라 우겨댄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 틈새에 끼어 오늘까지 견디어 온 나 자신이 측은하다.
많은 젊은이가 직장에서 쌓인 피로를 풀고자 주일 산과 들을 찾는가 하면 여행으로 피로를 푼다. 그중에 선택받은 몇몇 젊은이들은 진리를 찾아 교회에 나온다. 유흥과 오락을 멀리하고 담배와 술을 절제하면서 말씀에 순종하는 삶이 기특하고 고맙다. 조금이나마 격려하고 보듬어 주고 싶다. 어른들도 주일에 나와 성수하는 모습이 존경스럽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한다.
나는 순수한 마음으로, 이분들에게 식사를 대접하려는 생각이었다. 뒤엉킨 실타래를 푸는 방법을 목사님께 의뢰했다. 그리고 점심을 제공하는 사람의 이름을 밝히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 남모르게 대접하는 것이 나를 드러내는 교만을 다소나마 덮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들도 이 절충안에 동의했다. 주일을 이삼일 앞두고 교인들 식사비가 아들에게서 송금되었다. 어머니가 원하는 일이니, 자식의 도리는 다한다는 마음이 고마웠다.
독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행복의 조건으로 첫째는 건강한 몸이고, 둘째는 마음의 평화와 정신적 안정이라 했다. 자녀가 부모에게 하는 가장 큰 효도는 물질적으로 드리느냐가 아니고, 얼마만큼 부모님의 마음을 편하게 해드리느냐이다. 연세 많은 부모님은 신체적으로 거동도 불편할뿐더러 어린아이와 같아서 생각도 부족하고 판단력도 부족하다. 부모님의 차가운 가슴팍에서 자양분이 모자라 비실대는 꽃에 이해와 관용으로 풍성한 사람의 거름을 주어보자. 탐스러운 꽃을 피우리라 기대해보자.
보랏빛 노을이 지기 전에, 얼마 남지 않은 시간 속에서도 후회 없는 오늘을 살아가고자 한다.
* 대전여고 졸업, 수도여자사범대학 영문과 수료, 전)중등학교 교장, ≪상상의 힘≫ 수필부문 신인상(2012), 수필집 향원의 열매, kimsk3527@hanmail.net
내 삶의 반려 식물
손 중 하
‘묘목이나 꽃시장에는 이제 가지 말아야지!’
몇 번이나 다짐했지만, 오늘도 이원의 농원을 들른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마음을 흔드는 영혼을 춤추게 만드는 그 무엇인가의 꽃을 피워내고 열매를 맺는 화초나 묘목을 찾기 위해 비 오는 4월 평일 오후 애마(팰리세이드))를 타고 한 시간 남짓 달려 이원의 꽃시장을 찾았다. 오늘 같은 날은 사람들이 별로 없으리라는 생각으로 들린 곳은 이미 사람들로 북적였다. 주로 중년의 여자 손님들이었는데 무언가 꽃이나 과일 묘목을 고르는 모습을 보면서 그들의 마음속도 꽃처럼 예쁜 색상을 지닌 마음일 거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꽃시장이나 묘목 시장에 가지 말자고 다짐한 것은 꽃시장만 가면 무슨 꽃이든 사다가 그 좁은 정원에 심고, 마음에 안 들면 캐내고 또 심고, 이 짓을 반복했기 때문이다. 이제는 심을 장소도 만만치 않거니와 또 꽃나무를 사게 되면 또 다른 꽃나무는 캐내야 할 형편이라서 가끔은 꽃 파는 곳을 스치면 애써 외면해버리기를 몇 번이나 했다. 그런데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어서인지 아니면 계절 탓인지 결국 이원의 꽃시장 겸 묘목 시장을 찾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마음에 새겨둔 어떤 꽃을 심고 싶어서가 아니라 마음에 드는 꽃이나 과일나무를 찾고 싶어서이다. 마음에 드는 꽃을 만나게 되면 그 꽃에 내 모든 것을 내놓게 된다. 내 마음의 질서가 무너지고 만다.
내 마음을 흔들어 놓은 것이 어디 한두 가지랴. 오월 어느 날 잘 늙은 절 화암사(花巖寺)를 찾았는데 스님들이 거처하시는 뜰에 오밀조밀한 희색의 꽃이 내 마음을 끌어당겼다. 말발도리꽃이었다. 너무 사랑스러워 스님한테 부탁하여 포기 나눔을 부탁하니 미소와 함께 작은 뿌리 하나를 주셨다. 그 말발도리를 정원에 심고 꽃 이름을 화승화(화암사 스님이 준 꽃)라 명명하고 우리 집을 찾는 이에게 꽃 이름을 화승화라 알려주고 그 꽃에 욕심을 내는 이에게는 나도 스님처럼 미소와 함께 포기 나눔을 해 준다. 어느 지인은 그 꽃 이름을 중화(僧花)라고 했다고 해서 그 이유를 듣고 나서 폭소를 터트린 적이 있다. 그 이유인 즉, 애초에 스님이 나에게 주었고 나는 그에게 주었으니 스님이 중이시고 내 이름 첫 글자가 중 자이니 중화(僧花)라 지었다니 그 친구 익살스러운 구석이 맘에 와닿는다.
6년 전의 일이다. 우연하게도 포포나무를 접하게 되었다. 낙엽 교목으로 북미가 원산지이며 4월에 꽃이 피어 9∼10월에 익는 열매는 망고 모양이며 바나나, 파인애플, 망고를 합친 듯한 맛이 난다.
포포의 열매는 사람들의 기호에 따라 호불호를 달리하겠지만 그 꽃만은 아무래도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듯하다. 벌이나 나비조차도 그 꽃에 달려들지 않는 걸 보면 그 꽃의 향기조차도 벌 나비가 싫어하고 역겨운 냄새를 좋아하는 파리나 곤충들이 그 꽃을 찾아 수정을 돕는 걸 보면 꽃보다는 열매가 매력적이라서 포포나무를 심는듯하다. 그 포포나무를 일곱 그루나 심었다. 내게는 특이하게도 꽃도 매력적이지만 열매가 무척 마음에 들어서이다. 그런데 심은 지 5년이 되었는데도 꽃은 피는데 수정이 되지 않았는지 열매를 맺다가 떨어지기를 반복하였다. 포포의 키가 내 키보다 더 자라 텃밭에 그늘만 들어 캐낼까 하다가 좀 더 기다려 보기로 하고 이웃에서 포포나무의 접 순을 잘라다가 접을 붙여 수정을 돕기로 하고 기다리고 있는데 올해 봄에 드디어 꽃을 여러 송이 피워내고 열매를 달아 잘 자라고 있다. 6년을 기다려 열매를 보게 된 이 기쁨을 어떻게 표현하랴.
과일나무를 심고 꽃씨를 뿌리는 일은 기다림이다. 그 긴 기다림 끝에 얻는 기쁨은 낚시에서 대어를 낚아 올리는 기분이랄까. 이렇게 기다림 끝에 얻어지는 열매나 꽃은 내 삶의 반려 식물로 내 마음을 평온하게 해 준다.
미니의 12폭포에서 흘러내리는 물소리를 들으며 각종 꽃이 들러리를 서주는 그곳에서 식사하고 있을 때는 내 삶의 가치가 이렇게 펼쳐짐에 감사함이 솟구쳐 오른다. 이렇게 내 삶에 들러리를 서줄 수 있는 꽃을 찾는 일은 아무리 다짐한다 한들 멈출 수 있는 일이 아닌성싶다.
하루에도 몇 차례씩 포포 열매를 바라보며 나뭇가지를 바로 세워주기도 하고, 가끔 한약 찌꺼기를 발효시킨 한약 거름을 뿌려주기도 하며, 때로는 음악을 틀어주기도 한다. 시간이 흘러 포포의 열매가 수확기가 된다면 그 씨를 종자 삼아 지인들에게 나누어 줄 예정인데 그중 하나쯤은 익살스러운 친구가 있어서 그 포포나무의 이름을 멋지게 명명하여 1세대 품종으로 잘 가꾸어 주기를 소망해본다.
꽃과 나무를 가꾸다 보면 극복보다 순응을 배우게 된다. 삶을 극복으로 생각하면 숙제가 되고 삶에 순응하게 되면 축제가 된다는 것을 늦게 남아 깨닫게 해 준 반려 식물에 감사함을 잊을 수 없다. 늦게나마 숙제에서 벗어나 축제로 살아간다는 것은 내 영혼을 춤추게 한다. 오늘도 6년 만에 열매를 안겨준 포포에게 내 가슴 한자리를 내어주며 푸른 하늘에 미소 한 자락 펼쳐본다.
* 충남 금산 출생, 전)대문초등학교 교장, 월간 ≪한울문학≫(2005) 등단, 한국농촌문학상 수상, jhson1971@hanmail.net
동박새의 재롱
백 경 화
충북 진천의 어느 농가에 동박새 세트장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갔다. 세트장이라 해야 조그만 비닐하우스로 대여섯 사람이 촬영할 수 있는 비좁은 공간으로 10여 마리의 동박새가 있었다. 동박새들은 천정에 줄을 매어 놓은 곳에 나란히 앉았다가 사육사가 밥을 주면 우르르 잽싸게 날아와서 밥을 콕콕 찍어 먹으며 귀여운 모습으로 갖가지 연출을 해댔다.
사육사는 사진작가들에게 새가 나는 모습과 예쁜 동작을 보여주기 위해서 밥을 주는데 동박새가 꿀을 좋아하는 것을 이용해 새 먹이에다가 꿀을 발라 주면 우르르 와서 정신없이 쪼아 먹는다. 몇 번 쪼아 먹으면 주인은 밥통을 빼앗는다. 밥이 없으면 새는 날아가 줄에 앉고 또 밥을 주면 번개처럼 싹 날아와 먹는다. 사진작가들은 그런 모습을 순간 포착으로 사진 촬영한다. 밥을 주었다가 빼앗고 주었다가 빼앗기를 거듭하였다. 그렇게 하니 나중에는 밥을 주어도 본체만체한다. 맛있게 몇 번 찍어 먹으려 하면 밥그릇을 빼앗아가니 내가 보아도 너무 야속해 보였다. 단단히 약이 올랐던 모양이다. 이제 주어도 안 먹겠다고 단식투쟁에 들어간 듯, 아무리 꿀을 많이 발라 주어도 쳐다보지도 않고 줄에서 꼼짝달싹도 않는다. 그래서 사진 촬영이 중단되고 할 수 없이 오후에 다시 시작하기로 하고 나왔다.
오후에 다시 촬영을 시작했다. 사육사가 먹이에 꿀을 발라 그릇을 밀어 놓으니 동박새들은 우르르 순식간에 모여들어 꿀을 바른 먹이를 정신없이 먹는다. 마음이 풀어졌는지 아니면 안 먹으면 나만 손해라 생각했는지, 아니면 새대가리라는 말이 있듯 잊어버렸는지, 밥 주인이 유도하는 대로 잘 따라주었다. 그래서 날아다니는 장면과 밥 먹는 모습, 귀여운 동박새의 재롱을 마음껏 촬영했다.
동박새는 동백나무꽃의 꿀을 좋아한다고 한다. 그래서 동박새는 예로부터 동백나무와 얽혀진 전설이 있었다.
옛날 어느 나라에 포악한 왕이 살고 있었는데 이 왕에게는 자리를 몰려줄 후손이 없었으므로 자신이 죽으면 동생의 두 아들 가운데 하나가 왕위를 물려받게 되어 있었다. 욕심 많은 왕은 그것이 싫어 동생의 두 아들을 죽일 궁리를 하였고 동생은 이를 알고 자기의 아들을 멀리 보내고 대신 아들을 닮은 두 소년을 데려다가 놓았다. 그러나 이것마저 눈치를 챈 왕은 멀리 보낸 동생의 아들 둘을 잡아다가 왕자가 아니니 동생에게 직접 죽이라고 명령하였다. 차마 자기의 아들을 죽이지 못한 동생은 자결하여 붉은 피를 흘리며 죽어갔고, 두 아들은 새로 변하여 날아갔다고 한다.
동생은 죽어서 동백나무로 변했으며 이 나무가 크게 자라자 날아갔던 두 마리의 새가 다시 날아와 둥지를 틀고 살기 시작하였는데, 이 새가 바로 동박새였다는 전설의 새이다. 그래서 동박새는 동백나무꽃의 꿀을 좋아하나 보다.
* 충남 부여 출생, ≪문학세계≫(2001) 시 등단, 수필집 산의 향기를 찾아서, 시집 술래잡기, 울림으로 다가온 자연의 노래 등, 대전문인협회 회원, 대전국제펜문학 회원, 펜 문학상 수상, ≪꿈과 두레박≫ 회원, 한국사진작가협회 회원, bak0799@hanmail.net
망경(望京) 체류기
김 기 태
망경(望京)은 북경시 외곽의 3, 4 순환도로 사이 북동쪽에 자리하고 있으며 중국식 발음으로 ‘왕징’이라고 불리고 있었다. 그러니 북경의 도심지에서 약간 비켜선 외곽 지대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수원 정도가 아닐까 생각된다.
망경은 북경 공항에서 27km 떨어져 있어 우리나라에서 접근성이 좋고 신흥 도시로 계획된 도시여서 주거 환경이 좋아 시민들이 선호한다고 한다. 북경에서 올림픽이 열리기 전에는 북경 시내가 집값이 비싸 이곳으로 이사 오게 되었지만, 지금은 북경보다도 더 집값이 올랐다고 한다,
2011년 중국사회과학원에 발표에 의하면 총인구 15만 명 중 한민족이 3만 명이 살고 있어 자연스럽게 한인 타운이 형성되기도 하였다고 하니, 지금은 그보다 더 많은 한민족이 살고 있을 것 같다.
우리나라 기업이 중국에 많이 진출한 곳도 이곳이고, 한국인이 많이 들어오니 통역이 필요했을 것이고 이에 따라 영변에 있는 조선족도 유입되었을 것이다. 또한 북한 주민들도 이곳에 많이 거주하고 있어 자연적으로 한인 타운이 형성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대표적인 것이 ‘평양 옥류관’이 이곳에 있다는 사실이다.
망경은 중국에서 주목받았던 지역은 아닌 것 같다. 망경은 청나라 때 흙더미로 이루어진 산으로 건륭제가 산에 올라가 북경을 바라보니 동직문(東直門)의 성루가 보여 이 지역을 망경(望京)이라고 불렸다는 설이 전해오고 있다. 역사적 기록에 나타나는 것을 보면, 영·불 연합군이 북경으로 쳐들어온다는 소식에 서태후가 여름 별장인 이화원에 피신 중이었는데, 이때 불타는 왕궁을 왕징에서 바라보고 탄식했다는 기록이 전해질 뿐이다.
한국인들이 이 망경에 몰리게 된 이유는 1997년경 외환위기 시절 한국 기업들이 한국을 떠나 일본인이 경영하던 이곳 현지 공장을 인수하게 되고 북경에 거주하던 한국 유학생들이 집값이 비싸 생활비가 오르니 이곳으로 유입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후 한국의 경기도 좋아지고 망경 시내 환경도 올림픽에 편승하여 좋아지다 보니 유학생 그리고 상사 주재원 등이 찾아왔다. 여기에 한국인을 위한 상가까지 합세하여 한인 타운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고 한다.
내가 망경을 찾아오게 된 것은 패키지여행으로 온 것이 아니고 형제 중 막내가 이곳 현지 공장 책임자로 근무하고 있었기 때문에 임기가 끝나기 전에 한번 방문하자고 해서 시간이 허락하는 형제들이 이곳을 찾아온 것이다.
지금의 망경은 15년 전에 찾아온 중국의 북경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발전된 모습이었다. 그때는 처음으로 북경을 찾았는데 거리 풍경이 너무나 어색하여 우리나라 60년대를 보는 것 같아 실망했던 기억이 난다.
도로는 차도와 자전거 전용도로가 병행하여 운행하고 있었는데, 예전에 자전거 도로는 지금의 베트남 도로처럼 자전거 행렬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으며 차도를 달리는 시내버스는 에어컨이 안 들어와 여름인데도 창문을 열고 다니고 있었다. 북경은 세계 여러 나라 수도 중에서 살기가 제일 불편한 수도이기도 한데 말이다. 분지로 되어 있어 봄에는 황사와 매연이 뒤 덥혀 있고, 여름에는 무더우며, 겨울에는 추워서 고생을 많이 하는 곳이 북경이었다. 당시 북경의 특이한 모습은 버스를 몰고 있는 기사가 웃옷을 벗고 내복도 안 입은 체 나신으로 연신 담배를 물고 차를 운전하고 있던 기억이 떠오른다.
지금 망경의 자전거 도로에는 자전거는 보이지 않고 자전거 도로에 승용차들이 주차되어 있었다. 커버를 씌운 것을 보니 장기 주차도 하는가 보다. 이곳은 아파트를 분양할 때 지하 주차장을 만드는데 주차장도 별도 분양을 한다고 한다. 능력에 따라 두세 개도 분양이 가능하며, 그것은 지정석이 되어 다른 사람이 주차할 수 없다고 한다. 주차장을 확보하지 못한 사람은 결국 자전거 도로에 주정차를 한다고 하니 잘못된 정책인 것 같다. 주차장 확보 확인서가 있어야 자동차를 구입할 수 있는 일본의 조건과 대조되는 상황이었다.
이곳 아파트 단지는 무척이나 여유롭다. 단지 내에 호수도 있고 광장도 있어서 편리하다. 단지 내 운동시설도 있고 산책 코스도 있어 운동하기에는 적합한 단지였다. 중국 사람들도 4자를 싫어해서 4층, 14층, 24층을 표시하는 엘리베이터는 빠져있다. 우리보다 4자에 대한 거부감이 더 많은 것 같았다. 그러니까 30층 아파트라면 실제로는 27층인 것이다. 아파트가 담으로 둘러싸여 별도로 정문과 후문이 있고 그곳에 경비실이 있다. 아파트 동에는 센서가 부착되어 출입자를 관리하고 있었다. 집안 모습은 우리와 사뭇 달랐다, 출입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가면 출입구와 방과는 턱이 있고 왼쪽으로는 신발장이 있는 것이 우리 아파트의 내부 모습인데 이곳은 턱도 없고 신발장도 보이지 않았다. 바닥은 대리석으로 깔려 있는데 그들은 실내에서 신을 싣고 생활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호텔 방 같은 풍경이다.
집값은 어찌나 비싼지 평수는 모르겠지만 투룸인데, 더구나 아파트 34층 꼭대기인데 가격은 15억 정도에 월세가 200만 원이라고 한다. 이 아파트는 회사에서 임대하여 사택으로 사용하고 있지만, 개인이라면 엄청난 부담이 아닐 수 없다, 여기에 중국 젊은이들의 고민이 있을 것 같다. 뉴욕 맨해튼의 집 월세가 투룸인 경우 450만 원으로 일 년 중 10개월이 선불인 것에 비하면 약한 편이지만, 이곳 젊은이들은 직장을 다녀 집을 구한다는 것을 포기하고 살아야 할 것 같아서다. 여기에도 금수저가 발생하고 있었다.
중국이 인구 억제 정책으로 한 자녀 갖기 운동을 벌여 대부분 자식이 하나이고 보니, 양가 부모로부터 물려받는 집이 매력적이라고 한다. 공산주의 특징은 똑같이 일하고 소득을 평등 분배하는 것인데 그들은 노력 없이 월 4백만 원 수입이 생기면서 품위 있게 살 수 있는 방법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중국인들이 제일 좋아하고 인정받는 직업이 군인이라는데 37년 장교로 근무하다 퇴직한 사람의 연금액은 일반인의 4배나 된다. 그러니 군 퇴직자의 자녀들은 일은 안 하고 부모의 재산을 쫓아 결혼 상대자를 찾는 모습이 보이니 그들도 돈의 위력을 실감하며 부를 만끽하고 있는 것 같다. 여유가 생기니 입는 옷도 유행 따라 찾아 입게 되고 먹거리도 맛있는 것을 찾다 보니 길거리 음식도 다양해졌음을 느낄 수가 있었다.
동생 집 근처 10분 걸이에 ‘평양 옥류관’이 있어 찾아가 봤다. 간판도 화려했다. 10명이 앉을 수 있는 테이블이 20개 정도가 되니 큰 식당이 었다. 한쪽으로는 무대가 있고 무대 앞에 테이블이 놓여 있는데 식사를 하다 보니 공연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출연진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홀에서 서빙 하던 여자들이 의상을 갈아입고 무대에 오른다. 사회자 없이 순서가 진행되는데 북한식 창법의 노래와 악기 연주였다. 우리나라 60년대 말에 보는 공연 같았다. 그러나 그들의 노래 실력과 연주 능력은 좋았다는 생각이 든다.
음식 맛은 담백하고 훌륭했다. 조미료에 맛 들인 우리의 입맛을 유혹하는데 충분했다. 많은 재료가 첨가되지 않은 것 같은데 맛은 좋았다. 좋은 음식에 술을 빼놓을 수 없어 백두산 들쭉술을 찾으니 한국 돈으로 술 한 병에 5만 원을 받는다. 비싼 편이다. 마지막으로 평양 옥류관 냉면이 나왔다. 한국에서 먹어 본 냉면에 맛이 길들여져 그런지 특별한 평양냉면 맛을 느끼지 못했다.
전체적 식사 분위기는 좋았다. 12명이 먹었는데 15만 원이 나왔다. 한국 음식값으로는 착한 편이고 망경의 음식값으로는 비싼 편이라고 한다. 뒤에 북경 오리고기를 먹었을 때도 비슷한 가격이었다. 이곳에서는 오리 뼈를 좋아해서 집에 가서 먹을 수 있게 요리를 해주고 있었다. 저번, 일본 아오모리를 갔을 때 먹어 본 스시 값이 한국의 음식값과 별 차이가 없으니 우리나라의 음식값이 얼마나 비싼 편인지 실감을 하게 된다. 왠지 평양 옥류관에서 혼자 화장실에 가는 것이 두려웠다. "동무 이리 와 보라우!" 할 것 같아서다. 평양 옥류관 식당을 나오고 보니 팁을 한 테이블에 만 원을 주고 와야 한다는데 그냥 나와서 미안한 감이 들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는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속담도 있는데 중국에서 15년은 천지가 개벽하고 있었다. 그들의 생활 속에서 돈 냄새가 나고 사람들의 모습도 세련되었으며 좋은 집에서 우아하게 살고 있었다. 1년에 몇 번은 한국에 와서 남대문과 백화점을 돌며 의류와 화장품을 사고 돌아가는 것이 낙이었다. ‘그들이 한류에 빠져들고 옷과 화장품에 반해 언제까지 한국을 찾아올까?’ 하는 의문이 들지만 우리는 그들이 보내 주는 저가상품에 현혹되어 생활비를 잡는 데 활용하였다. 중국인의 삶의 질이 이미 우리를 앞서가고 있다는 것을 느낀 여행이었다. 물론 이번 망경 체류하는 동안 잠은 동생 집을 이용했지만 많은 곳을 관광하였다.
체류 기간 본 곳 중에 망경에서 3시간 올라가는 중국식 민속촌은 그들의 옛것을 보여주는 면이 있어 새로웠다. 그중에 특히 중국식 술 빚는 모습과 단조로운 우리나라 자연물감 채색과 다르게 다양한 무늬를 보여주는 그들의 자연색 입히기 기술도 경이로웠다.
만리장성을 뒷배경으로 야경의 불빛은 환상적이었다. 도로의 노면과 교통관리는 국력과 비례한다고 하는데 망경의 도로 노면 관리는 상위 수준이었다. 무섭게 변해가는 중국의 국력을 보는 것 같았다. 우린 정신 바짝 차려야 하는데 현실은 밝기만 하지 않으니 걱정이다.
지금은 동생이 진급하여 본사로 들어왔다. 항상 막내로 어리게만 보인 동생이 당당하게 자기 길을 걸어가는 모습을 보며 망경(望京)을 생각해보는 기회를 가졌다.
하루살이가 바라보는 노을
해 질 무렵, 고즈넉한 산사에 노을이 깃들면 절에서는 어떤 풍경이 펼쳐질까?
문득 그런 생각이 떠오른다. 저녁 예불을 준비하며 밥을 짓는 스님이 있을 테고, 어떤 법문으로 염불을 드릴지 고민하는 스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학승은 오늘 하루 무엇을 깨우쳤는지를 곱씹고 있을지도 모른다. 면벽 수행 중인 수도승은 아직도 번뇌 속에서 헤매며 자신을 채찍질하고, 절을 운영하는 주지 스님은 찾아오는 신도의 수, 시주금의 규모, 절의 성장 방향에 대한 고민으로 속세의 CEO 못지않은 번민에 시달릴지도 모르겠다. 붓글씨를 잘 쓰는 신도에게는 절에 있는 동안 글씨를 부탁하고, 문인화나 산수화에 재능 있는 이에게는 작품을 받아 멀어진 신도들에게 안부 인사 겸, 전하려는 그런 계획도 머릿속에 떠오를 것이다.
어떤 설법으로 신도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까? 수행 중인 후학들에게는 어떻게든 열심히 공부하도록 이끌고 싶고, 절의 행사나 홍보도 소홀히 할 수 없으니 정신세계와 물질세계 사이에서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 숙제가 참 무거워 보인다. 그중에서도 가장 깊은 번민에 잠긴 이는 노승일 것이다. 몸은 예전 같지 않고, 과거와 현재, 그리고 오지 않은 미래를 마주하며 스스로의 길을 돌아보는 그 마음은 얼마나 착잡할까. 젊어 절에 들어와 머리 깎으며 다짐했던 초심은 어디로 갔는가? 찾고자 했던 구도의 길은 아직도 멀게만 느껴지고, 깨달음은 아득하게만 다가온다. 부처님의 미소 앞에서 염화시중(拈華示衆)의 깊은 뜻조차 스스로에게는 무거운 짐처럼 느껴질지도 모른다. 환속하기에는 세상이 너무 낯설고, 절을 지키자니 체면과 역할이 발목을 잡는다. 자연스레 노후에 대한 걱정도 스민다. 그저, 서산 너머로 지는 노을을 바라보며 묵묵히 자신을 되돌아보는 그런 시간 속에 깊은 회한이 깃들지 않았을까?
세속의 그늘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살아온 나도 서산마루를 물들이는 저 노을 앞에서는 노승 못지않은 복잡한 마음이 밀려온다. 젊은 시절, 아침 햇살의 서광과 저녁노을의 빛깔이 왜 다른지 고민한 적이 있다.
노을은 공기 중의 먼지와 수분이 햇빛을 면 반사하며 만들어 내는 빛의 교향곡이다. 그렇게 성층권에 떠 있는 미세한 먼지조차 자연의 경이로움을 전해주는데, 정작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나 무엇을 남기려 애써 왔는가를 되묻게 된다. 남에게 잘 보이기보다 가슴속의 꿈을 이루기보다는 그저 내 한 몸 간수 하며, 가족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허우적거리며 살아온 건 아닌가. 삶의 무대에서 주연은커녕 무대 가장자리에 서서 조연의 삶만 살아온 듯한 이 허전함. 마음이 허접하고 스스로에게 갈등이 이는 이유다.
1모작 인생이 끝나고 2모작을 향해 달려왔지만, 배우기 바빠 소맷자락이 나풀거릴 정도로 이곳저곳을 돌아다녔어도 ‘내가 누구인가’를 선명히 드러내지 못한 인생이 참 아쉽다. 색소폰도 배우고 있지만, 연습 시간이 1만 시간을 넘어섰는데도 여전히 미숙하다. 그나마 깨달은 것이 있다면 열심히 해도 프로연주자는 따라가지 못한다는 사실 하나뿐이다. 글도 써 보지만 나를 대표할 만한 글 하나 써내지 못하고, 수필과 일기 사이를 오가는 신변잡기만 늘어놓고 있다. 유화, 초상화, 생활 공예도 해봤지만 결국 아마추어의 울타리 안에서만 맴돈다. 그럴 때면 마음이 새 가슴처럼 조마조마하다. 오늘도 혼자 있는 시간을 무료하지 않기 위해 몸부림치듯 하루를 살아가는 내 모습이 안타깝다.
신문이나 방송을 보면 입술이 바싹 트고 눈물을 흘리는 이들이 많다. 높은 자리에서 혜택을 누려온 사람들인데도 시련 앞에서 쉽게 무너진다. 그들의 눈물은 세상을 향한 서러움이겠지만, 지켜보는 사람은 도무지 공감이 안 가는 눈물이다.
이처럼 모두가 자기중심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자기 뜻대로 되지 않으면 세상이 억울하고, 서럽게 느껴지는 것이다. 하지만 하늘 위에 떠 있는 작은 먼지도 우리를 반성하게 하고 위안을 건넨다. 사회에 크게 기여하지 못했더라도, 자연에 순응하며 조용히 살아가는 삶에도 충분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풀밭에 노니는 토끼를 보라. 먹고 자는 것만 해결되면 그 자체가 천국이다. 죽어서 극락을 꿈꾸는 인간보다 어쩌면 더 평화로운 삶이다.
‘우물쭈물하다가 이럴 줄 알았어.’라는 버나드 쇼의 비명에 새겨진 이 말은 인간을 너무 위대하게 본 오만함에 대한 반성일지도 모른다. 그렇다. 오늘 이 순간에 최선을 다해 살면 된다. 비록 내 뜻대로 세상이 움직이지 않는다고 해도 최소한 자연에 순응하며, 평범한 하루를 진심으로 살아내는 것, 그것이 바로 삶의 본질이 아닐까?
하루를 사는 하루살이든, 100세를 꿈꾸는 인간이든, 거북이 눈에 비친 우리는 결국 다 같은 하루살이일지도 모른다. 오늘따라 저녁노을이 참 아름답다.
* 충남 서천 판교 출생, 글지이, 부름새, 서각인, 전)계룡건설 토목본부장, 온동마을 촌장, 수필집 삶의 시방서, 소똥 위에 홍시, 살아보니 어뗘, 그려, 하고집이 등. blog.daum.net/ondong
비로소 나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이경숙
방바닥에 떨어진 반은 희고, 반은 물들여진 머리카락을 주워 들었다. 이고 있는 내 머리가 백발로 변해 가지만 막상 방바닥에서 주워들면 생경하게도 보인다. 내 것이 아닌 듯하다가도 내 것이구나 하는 자각을 그때마다 한다. 완전히 흰 머리카락은 눈에 잘 띄지도 않으니 떨어져도 모르고 청소기에나 의지하고 산다. 지난겨울부터 염색하지 않기로 한 나의 모발은 이제 반백의 상태를 지나 백발이 되어가는 중이다. 십여 년 이상 흰 머리를 감추려고 염색을 해오면서 늘 두피의 말썽을 겪으며 지냈다. 윤기 나는 모발에 대한 기대는 언감생심이고 조금만 스트레스를 받으면 두피에서 염증이 생겼다. 좋다는 고가의 샴푸를 써 봐도 소용이 없었다. 급기야 탈모까지 심하게 오면서 염색과 파마도 못 하게 되고 말았다. 약을 바르고 탈모 치료를 하면서 그동안 몰랐던 탈모로 고민하는 지인들의 고충도 이해하게 된다. 그러다 이제는 염색과 파마로 멋을 내는 수고로움에서 놓여나기로 했다.
하루하루 길어져 나오는 흰 머리카락을 보면서 가끔 염색에 대한 유혹을 느끼기도 했지만, 자연스러운 내 모습이 더 친근함으로 다가오는 것을 보면서 몰랐던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
언제부터인지 멋을 내는 일에도 시들해지고 치장을 위한 옷이나 화장품에도 관심이 없어진 채로 살고 있다. 예전에는 나이가 들어도 예쁘게 차려입고 곱게 늙어가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때부터인지 그런 생각들이 부질없어지고 스스로 나태해지기도 한다. 그 밑바닥에는 그렇게 노력해도 이제는 이뻐 보이지 않는다는 스스로 실망감이 큰 몫을 하게 되었지만, 노력이 의미 없는 일이라는 것이 큰 이유이기도 했다.
오랜만에 서울에서 모임이 있어 갔다가 내려오는 길에 대전역에서 버스를 탔다. 맨 뒷좌석에 앉아서 타고 내리는 만원 버스의 사람들을 관찰하는 일도 은근 재미있다. 어디쯤에선가 우리 아파트의 같은 동에 사시는 주민이 올라왔다. 그분은 나를 모르시지만, 가끔 승강기에서 마주치기도 하고 담배를 피우러 오르내리는 모습을 보기도 한 분이었다. 평소 인사를 하고 지내지는 않지만, 눈에 익은 얼굴이다. 버스의 앞쪽에 서서 오시던 분하고 아파트 정류소에서 같이 내렸다. 아파트 단지를 걸어와 같은 승강기 앞에 섰다. 그때 갑자기 그분은 “어머나 맞네요! 다른 분인 줄 알았어요” 하면서 나의 아래위를 훑어본다. 서로 인사도 없던 그분의 느닷없는 대화에 당황하여 나도 그저 눈인사만 하고 내렸다. 뜬금없는 그분의 말에 내려서 혼자 한참을 웃었다. 늘 화장도 안 하고 후줄근한 옷을 입은 채 쓰레기를 버리고 분리수거를 하던 여자의 외출복 차림이 어색하고 의아했던지 한마디 내뱉는다는 것이 그만 서로 어색한 웃음을 안겨 주었다. 돌아보면 그날 한껏 치장했던 내 모습이 어색했던 것은 나를 바라보는 타인의 시선뿐이 아니다. 서서히 나이가 들어가며 나 자신도 이제 내 모습이 아닌 듯할 때가 있다. 마음만 젊으면 청춘이라고 누가 그랬던가! 기운 빠지고 여기저기 아픈 데가 생겨나며 추억이 녹슬 듯 청춘은 회색으로 퇴색되어가는 것을.
요즘 오랜만에 나를 만나는 사람들은 첫 인사가 얼굴이 아니라 흰머리로 변한 나의 머리카락 이야기다. 흰머리가 잘 어울린다는 위로 섞인 인사이기도 하고 아직은 더 염색하라는 둥 조언해 준다. 구십 줄에 들어선 친정 부모님이 요즘도 검게 염색하시는 탓에, 자기는 흰 머리를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다고 하는 친구는 자연에 순응하기로 했다는 나에게 또 다른 애로 사항을 토로하기도 한다. 머리가 희니 자연히 나이가 들어 보인다. 동안 소리를 듣던 때도 있었는데 며칠 전 친구와 점심을 먹으러 간 음식점 사장이 자매지간이냐고 한다. 당연히 나보고 언니냐고 하는 물음일 것이다. 까맣게 염색하신 열 살이나 더 많으신 어르신들이 우스갯소리로 할매가 다 되었다고 놀리기도 한다.
예전 같으면 조금 나이가 들어 보인다는 말만 들어도 옷매무새를 돌아보던 때가 있었는데 이런저런 놀림이나 오해에도 전혀 서운하지 않다. 염색이나 화장으로 감출 수 있는 젊음이 없다는 것은 무엇보다 선명한 현실이지 않은가? 반대로 머리가 허여니 좋은 점도 있다. 전에는 노인석에 앉으려면 괜히 눈치가 보이곤 했는데 이제는 자연스레 앉고 본다. 며칠 전에는 도로 공사를 하는 길을 건너려고 서 있었다. 여러 사람이 수신호에 움직이느라 서 있었는데 한 인부가 내게 오더니 정중히 길을 안내해주는 것 아닌가! 조금 얼떨떨했지만, 짐짓 노인행세를 하며 당당히 그분의 호위를 받으며 길을 건너갔다. 평소에 받아보지 못한 배려에 조금 우습기는 했지만,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래, 몸이 늙어가는데 머리카락 색도 같이 늙어가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지’ 하고 받아들이게 된다.
우리는 태어날 때 큰 축복을 받는다. 싱그러운 젊음도 큰 축복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왜 늙어가는 것은 축복이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불혹(不惑)을 견디고 지천명(知天命)을 받아들이고 이순(耳順)에 이르는 동안 고단했지만, 열심히 살아낸 세월이 주는 훈장 같은 시간이 늙어가는 시간이다. 이제 비로소 나 자신에게 너그러운 축복을 스스로 베푸는 시간을 살고 싶다.
* 충북 보은 출생, 계간 ≪수필춘추≫ 등단, 한국문인협회 회원, 한밭문학회 작품상, 한국농촌문학상,
≪농축투데이≫ 문학상 수상, asysook@hanmail.net
원족과 수덕사 여승
인 설 현
초등학교 2학년 여름, 피비린내 나는 6.25 전쟁이 계속되고 있었다.
큰아버지 댁 사촌 형은 징집되어 동네를 돌며 어른들께 인사를 하고 떠났다. 그런 날은 “또 한 명의 젊은이가 죽는 길로 가고 있구나” 하며 온 동네가 초상집 분위기가 되었다. 전쟁은 꼬박 3년 한 달 만에 끝났고 5학년이던 나도 무척 기뻤다.
이듬해 봄이 되자 우리는 그동안 가지 못했던 원족을 가게 되었다. 나는 소풍 간다는 기쁨에 잠을 설치고 일찍 일어났다. 그리고 어머니가 챙겨주신 쌀 석 되와 보리밥이 가득 담긴 도시락을 보자기에 싸서 어깨에 짊어졌다. 그리고 모임 장소인 동네 앞 느티나무로 향하는데 어머니는 누룽지를 별도로 챙겨주셨다.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았다. 우리 학교는 매년 6학년이 되면 졸업여행 형식으로 수덕사에 1박 2일 일정으로 원족을 가곤 했다. 쌀 석 되는 일종의 숙박비로 가져가는 것이었다. 그런데 막상 느티나무 아래에 모인 친구는 고작 4명뿐이었다. 우리 동네에 6학년은 20명이었다. 농촌의 가난한 가정에서 쌀 석 되는 적지 않은 양이었다. 더구나 춘궁기라 원족을 포기할 만도 했다.
우리 동네에서 수덕사까지는 30리 길이었다. 학교에서 출발하면 10리를 더 걸어야 했기에 선생님은 우리에게 동네에서 모여 수덕사로 직접 가라고 한 것이었다. 친구 4명이 논밭길을 걷기 시작했다. 20여 리 길을 걷다 보니 배가 고파 누룽지를 꺼내 먹었다. 고소하고 쫄깃한 맛이 미국 빵보다도 맛있었다. 초행길이라 모든 것이 새로웠고 즐거웠다. 덕산온천을 지날 때는 온천을 개발하게 된 이야기도 들었다. 철새인 두루미가 겨울이 되면 날아오는데 유독 한 논에만 많이 앉았다고 했다. 그래서 주민들이 그 논에 가서 따스한 물이 고여 있음을 발견하고 그곳을 온천으로 개발했다고 했다.
우리는 수덕사 방향으로 5리쯤 걸어가다 윤봉길 의사의 고택도 보았다. 생가는 초라한 모습으로 방치되어 있었다. 독립운동가라 부잣집일 줄 알았는데 우리 집과 흡사했다. 본체에 마루가 딸린 안방, 윗방, 그리고 부엌과 사랑채가 전부였다. 우리 아버지와 같은 해에 태어나셨고 독립운동을 하다 24세의 젊은 나이에 일본인에게 죽임을 당하신 것을 생각하니 어린 마음에도 가슴이 아팠다. 절로 두 주먹에 힘이 갔다.
수덕사가 위치한 덕숭산에 들어서니 울창하게 서 있는 소나무들이 싱그러운 공기로 우리를 맞이했다. 수덕사 마당에는 선생님들과 6학년 친구들이 모여 있었다. 당시 6학년 재학생은 4개 반에 240여 명이었는데 100명도 안 되는 인원이 와 있었다. 남학생은 큰방 두 곳, 여학생은 큰방 한 곳에 짐을 풀고 다시 마당에 모였다. 선생님은 유명한 여승이라며 김일엽 스님을 소개해주셨다. 여승은 천년 고찰인 수덕사와 반공 스님에 대해 설명했지만, 친구들의 눈과 귀는 자연에 쏠려 있었다. 여승은 환갑을 맞이했다고 자기를 소개했는데, 내게는 그가 30대처럼 보였다. 살결이 박꽃처럼 희고 주름살 하나 없는 얼굴에 몸매가 부잣집 맏며느리와 같이 복스러웠다.
우리는 병아리처럼 선생님을 졸졸 따라다니며 수덕사를 구경하고 대웅전의 벽화에 관한 설명도 들었다. 산길을 따라 만공탑을 거쳐 덕숭산 상봉에 올라 삽교천과 홍문평야도 내려 보았다. 그리고는 다시 절로 돌아와 저녁밥을 먹었다. 반찬은 온통 산나물 재료로 만든 것이었다.
저녁이 되어 잠자리에 들자 친구들은 금방 잠이 들었다. 먼 길을 걸어와 산 정상까지 다녀왔으니 피곤할 만도 했다. 나와 함께 담요를 덮은 친구는 나보다 네 살이나 많았다. 전쟁으로 휴학을 했다가 늦게 복학한 친구들이 많아 나이를 더 먹은 동급생이 꽤 있었다. 함께 잔 친구는 내게 아까 본 여승에 대해 말해주었다. 서울에서 학교에 다닐 때 이광수 소설가에게 실연을 당해 삭발하고 수덕사로 들어왔다고 했다. 어린 나는 ‘저렇게 아름다운 여인을 차버린 이광수란 놈은 얼마나 잘 생겼나?’ 싶었다.
그 후 7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나는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일선 교단에 서면서 여름방학을 맞이했다. 초등학교와 중학교 동기동창인 두 명의 죽마고우가 대학 방학을 이용하여 나를 찾아왔다. 우리는 초등학교 시절을 그리며 텐트를 준비하여 수덕사로 갔다. 평지가 있는 계곡에 텐트를 친 우리는 김일엽 스님을 만나고 싶었다. 스님은 우리로부터 40m 아래 암자에 있다고 했다. 우리는 김일엽 스님을 만나 인사를 드리고 예전 원족 이야기를 나누며 즐겼다. 그리고 불경에 대한 설법도 들었다. 대화가 마무리될 즈음, 궁금함을 참지 못하는 친구가 스님에게 이광수 시인과의 관계를 물었다. 그러자 스님은 웃으시며 아니라고만 말씀하신 기억이 난다.
수덕사는 어머니와 누룽지, 친구, 원족, 일엽 스님을 떠올리게 하는 추억의 장소이다. 이제 봄이 오면 삽교천 물도 청명한 소리를 내며 흐를 것이다. 그 옆으로 펼쳐진 홍문평야의 들녘에는 아지랑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내가 걷던 논길에는 풀들이 돋아날 것이다.
올봄에는 꼭 그 길을 다시 걸어보고 싶다. 친구들과 함께라면 더욱 좋을 것이다.
* 충남 예산 출생, 공주사범학교 졸업, 시집 <착하고 귀한 선물>, 저서 <재미나는 글짖기>, <슬기로운 엄마 교육, 즐거운 자녀 공부> 등
함께 피어나는 꽃, 함께 자라는 사람
오 석 진
“나는 수학은 잘하지 못하지만, 우리 반 지후가 잘해서 다행이야. 지후가 대신 설명해줘.”
초등학교 5학년인 민재가 조별 활동 시간, 수학 문제를 함께 풀던 중에 조용히 내뱉은 이 한마디는 그 자리에 있던 선생님의 가슴을 찡하게 만들었습니다. 정답을 맞히는 것만이 중요한 줄 알았던 교실에서, 누군가의 강점을 기꺼이 인정하고 자신의 역할을 겸손히 조율자에 두려는 마음은 낯설고도 반가운 풍경이었습니다.
우리는 너무 오래 ‘혼자 잘하는 사람’을 좋은 사람이라 믿으며 살아왔습니다. 누군가보다 먼저 손을 들고, 더 많은 것을 외우고, 더 빠르게 답을 맞히는 사람이 늘 칭찬을 받았지요. 그리고 그 모습은 곧 ‘성공’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어 아이들의 머릿속에 깊이 새겨졌습니다. 그러나 세상이 변하고 있습니다. 기술은 눈부시게 발전하고, 세상의 문제는 혼자의 힘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해졌습니다. 그 속에서 오늘의 교육은 다시 묻습니다. “정말, 혼자 잘하는 것이 전부일까?”
관계형 인재, 새로운 시대가 부르는 이름
세계적인 교육학자이자 OECD 교육국장인 안드레아스 슐라이허는 “미래의 인재는 더 이상 단독형(Soloist)이 아니라 관계형(Relationist)”이라고 말합니다. 즉, 지식을 많이 알고 있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서로 다른 사람들과 연결되고, 함께 일하며, 시너지를 만들어내는 힘’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세계가 주목하는 ‘관계형 인재’입니다.
관계형 인재는 단순히 협업을 잘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들은 상대방의 장점을 발견하고, 나와 다른 생각을 존중하며, 필요할 때는 한발 물러설 줄 알고, 때론 기꺼이 손을 내밀 줄 압니다. 그런 태도는 어린 시절부터 자라납니다. 민재처럼 친구의 강점을 인정하고 자신은 조율자로 나설 줄 아는 마음. 바로 거기서 시작되는 것이지요.
아이들은 모두 다른 꽃씨를 품고 태어난다.
모든 아이는 자신만의 재능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어떤 아이는 수를 보면 머릿속에 구조가 그려지고, 어떤 아이는 낱말을 조합해 감동적인 이야기를 짓습니다. 또 어떤 아이는 친구의 작은 변화도 금세 알아차릴 정도로 따뜻한 감수성을 지녔습니다. 이 다양한 재능들은 아이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무기가 되어줄 수 있습니다. 문제는, 현재의 교육이 여전히 국어, 영어, 수학이라는 좁은 잣대로 아이들을 판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 아이가 말하기는 정말 뛰어나지만, 계산력이 부족하다면, 그 아이의 재능은 수학 점수에 묻혀버리고 맙니다. 그림에 천재적인 감각을 가진 아이가 받아쓰기를 못 한다는 이유로 꾸중을 듣기도 합니다. 교육이 아이들의 가능성을 피워내지 못하는 순간, 그 가능성은 서서히 시들어버립니다.
공부, 다시 정의되어야 할 말
‘공부’라는 말은 어쩌면 우리에게 너무 좁은 의미로 남아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책상에 앉아 문제집을 푸는 것만이 공부가 아닙니다. 노래를 부르며 감정을 표현하는 것, 친구의 말을 듣고 공감하는 것, 자연을 보며 궁금증을 갖는 것, 몸을 움직이며 새로운 동작을 익히는 것. 이 모두가 우리 삶의 중요한 배움이자 성장의 토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여전히 ‘공부 잘하는 아이’라는 말을 ‘시험을 잘 보는 아이’라는 뜻으로만 받아들일까요? 공부는 사람답게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어야 합니다. 그 속에는 인내, 상상, 표현, 협동, 책임, 배려가 모두 포함되어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세 사람과 함께 걷는 길, 그리고 스승
옛 성현 공자는 “세 사람이 함께 길을 가면, 그 중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三人行 必有我師焉)”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내가 갖지 못한 재능은 옆에 있는 친구에게 있고, 내가 부족한 부분은 또 다른 누군가의 강점이 됩니다. 문제는, 그 다름을 나의 결핍으로만 느끼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배움의 기회로 받아들이는 태도입니다. 교육은 바로 이런 태도를 기르는 일이 되어야 합니다.
실리콘밸리의 선택, 그리고 우리가 가야 할 길
오늘날 가장 혁신적인 기술과 문화를 만들어가는 실리콘밸리의 기업들은 이미 이런 관계형 역량의 중요성을 간파했습니다. 구글, 애플, 메타 같은 글로벌 기업들은 더 이상 학벌이나 성적만으로 사람을 뽑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팀 안에서 얼마나 잘 협업하고, 갈등을 어떻게 해결하며, 새로운 문제를 창의적으로 풀어갈 수 있는지를 더 중요하게 봅니다. 학교도 이 흐름을 따라야 합니다. 교실이 더 이상 혼자 문제 푸는 공간이 아니라, 서로의 다름을 알아가고 어우러지는 연습장이 되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꽃은 저마다 다른 색과 향기를 지닌다
독일의 교육학자 헬가 노박(Helga M. Novak)은 “교육은 가능성을 현실로 바꾸는 사회적 과정”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처럼 모든 아이는 가능성이라는 씨앗을 품고 있습니다. 단지 어떤 아이는 음악으로, 어떤 아이는 수학으로, 또 어떤 아이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따뜻한 리더십으로 피어날 뿐입니다. 그 다양한 씨앗들이 제각기 다른 꽃을 피우도록 돕는 것이 교육의 진짜 역할 아닐까요?
세상의 꽃이 하나같이 붉은 장미만이라면, 우리는 봄의 다채로운 아름다움을 느낄 수 없을 것입니다. 교육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양한 아이들이 제 빛깔대로 피어날 수 있을 때, 우리는 진정한 배움의 정원을 마주할 수 있습니다.
혼자보다 함께가 더 아름답다
우리는 지금 ‘관계형 인재’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더 이상 혼자 잘하는 천재가 전부가 아닙니다. 오히려 서로의 재능이 만나 시너지를 내는 팀이 더 강하고, 더 오래갑니다. 교육이 해야 할 일은 그 만남의 장을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아이들에게 경쟁보다 협력을, 정답보다 이해를, 혼자보다는 함께 가르칠 때, 비로소 우리는 새로운 미래를 준비할 수 있습니다. 나의 능력과 너의 능력이 만나 우리라는 존재가 되는 사회. 바로 그런 내일을 만드는 것이, 오늘 교육의 진정한 소명입니다.
교실 한편에서 수줍게 친구를 칭찬하고,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할 줄 아는 민재의 마음에서 우리는 이미 그 미래를 보았습니다. 그 조그만 마음 하나가 우리 교육의 방향이 되어줄 수 있다면, 아이들은 저마다의 꽃으로 활짝 피어날 것입니다.
* 충남 공주 출생, 공주고등학교, 공주대 영어교육과 졸업, 한국교원대 대학원 교육학 석․박사, 한남대 대학원 석사, 전)대전광역시교육청 장학사(관), 브라질 주상파울루 한국교육원장, 전)대전광역시교육청 교육국장, 행복교육이음공동체 대표, oshisty@hanmail.net
어깨의 반란
전 월 득
칠십 평생 무탈하던 어깨가 꾀부리며 반란을 일으켰다. 며칠 전 과제를 마무리하느라 컴퓨터 앞에서 두어 시간 같은 자세로 집중하여 작업한 것이 화근이 된듯하다. 이제는 내 팔도 내 맘대로 다루지 못하게 욱신욱신 쑤시고 쿡쿡 찌르는 듯 화를 내고 있다. 그동안 모질게도 부려 먹은 왼쪽 팔 어깨에 미안함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이 삼 일을 지켜보며 어르고 달래보았지만 한번 화가 난 성질머리는 수그러들지 않았다. 다른 때 같으면 아들딸에게 곧바로 알리고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을 텐데 이제는 나이 먹은 탓이라 여기며 나 혼자 병원을 찾아가기로 하였다.
늙으면 애가 되고 아프면 서럽다더니, 차마 혼자 병원 가기 싫었는지 나도 모르게 아들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아들은 여전히 분주하게 왔다 갔다 바쁘게 손님들과 상담 중이었다. 아들은 내 말을 듣자 깜짝 놀라며 엑스레이부터 찍어보고 완전히 치료될 때까지 걱정하지 말고 치료하라며 카드를 내밀었다. 카드는 나도 있으니 기꺼이 받지 않아도 될 일이었다. 1층은 아들이 운영 중인 음향 기기가 진열된 악기점이고 2층은 넓은 통증 재활의학과 병원이었다. 아무리 가까이 있어도 상황이 함께 갈 수 없는 처지이고 보니 그냥 혼자 올라가 치료를 받았다.
어깨 쪽 여기저기 엑스레이를 찍어본 결과 콩알만 한 석회가 끼었다며 사진을 보여주었다. 원장은 대수롭지 않은 듯 주사 치료 몇 번 하면 좋아질 거라고 말하며 주사 치료부터 하자는 것이었다. 여간해서 주사 맞는 것도 싫어하고 약 먹기도 싫어하는 나였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수긍하며 기다리는 중이었다. 병원엔 비슷한 환자들이 여기저기 웅성거리고 고통스럽게 앉아서 호명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대부분 나보다 더 젊은이들이 많았다. 그렇다면 나는 얼마나 축복된 삶을 살았단 말인가? 새삼스럽게 그동안 건강하게 살아온 것에 대한 감사를 다시 느껴보았다. 이 나이쯤 되면 누구나 한군데씩 불편한 건 당연하다는 말이 틀리지 않은 것 같다.
작년엔 무르팍 연골이 닳았다는 진단을 받고 치료받은 적도 있다. 지금은 많이 회복되었지만, 아직도 완전하지는 못하다. ‘이제는 한군데씩 고장 나고 반란을 일으키면 어쩔 수 없이 달래며 참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라는 생각을 하니 안타깝기 짝이 없다. 백세시대가 도달했다고, 잘하면 백이십 살도 가능하다며 희망에 부풀었던 포부도 설득력을 잃게 된 기분이었다. 누가 뭐래도 지금까지는 건강에 자신감 넘쳐서 승승장구하며 꿈도 희망도 많았었다.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것을 주저하지도 않았다.
그동안 남들이 갱년기에 시달리고 오십견이 왔다고, 우울증이 왔다고 하소연해도 나와는 관계없는 일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일에 열중할 수 있었고 하고 싶은 공부와 취미생활을 즐기고, 쓰고 싶은 글을 쓰며 남들이 즐기는 여행은 하기 싫어 안 했다. 그러나 이제는 마음을 다잡고 여행도 즐길 것이다. ‘나에게 주어진 세월이 길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몸이 따라 주지도 않을 것 같으니 더는 여유 부리지 말자’라는 생각이 든다. 문학반에서, 낭송 반에서, 가족과 친구와 함께 좋은 곳에 합류하며 여생을 즐길 것이다. 지금 팔이 좀 불편한 것으로도 마음이 위축되고 기분이 저하되는데 언제일지 모르지만. 몸에 몹쓸 병이라도 찾아온다면 어떻게 헤어날지 모를 일이다.
‘돈과 명예를 잃으면 한 부분이지만 건강을 잃으면 전부를 잃는다’라는 말에 공감하게 되었다. 오늘부터 열심히 운동하는 습관을 길러야겠다는 생각이다. 좋은 생각으로 좋은 친구들과 맛있는 것도 즐겨 먹고, 좋은 글을 쓰며 행복한 시간을 좀 더 가져야겠다.
어린 날의 추억
나는 1951년 육이오 격동기에 충남 부여 은산에서 오 남매 중 셋째딸로 태어났다. 주변은 온통 나지막한 푸른 산이 병풍처럼 둘러쳐진 작은 마을에 아름다운 새소리와 물소리 지나가는 소달구지의 워낭소리를 들으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버지께서는 동네에서 유일한 한학자로 주변 마을에서 찾아오는 청장년들을 가르치는 위엄있고 존경받는 훈장님이셨다. 오빠가 없는 우리 집 농사일은 어쩔 수 없이 엄마와 큰언니의 몫이었다. 내 어린 날의 추억은 또렷이 남아 유년 시절의 그리움을 주고 있다.
하얀 광목 치마저고리를 입은 엄마 뒤를 따라 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나의 사회생활은 시작되었다. 무슨 연유인지 또래 친구들 몇몇은 1학년을 거르고 2학년으로 월반하여 입학했다. 이미 아버지께서 국문을 가르쳐 주신 덕분에 학교 성적엔 아무 문제 없이 잘 따라가는 듯하였다. 그러나 처음 학교생활은 1년을 앞서간 친구들과 달리 시작 종소리를 구별하지 못했다. 시작종이 울리자 친구들이 꼭 붙잡고 타던 그네를 놓고 교실로 뛰어 들어가는 것을 보면서도 따라가지 않았다. 차례를 기다리다 한 번도 타보지 못한 그네가 여기저기 남겨져 횡재를 만난 듯 빈 그네를 잡고 나 혼자 신나게 타고 있었다. 잠시 후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부르시던 선생님 앞에 가서 손바닥이 벌겋게 부어오르도록 매를 맞았던 기억은 지금도 웃지 못하는 일이다. 집에서는 순하디순한 어린양처럼 말썽 한번 안 부리는 착한 딸이라고 부모님과 큰언니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살던 나였다. 학교라는 엄혹한 교육 현장에서 제대로 혼쭐났던 걸 생각하면 지금도 겸연쩍어 혼자 웃을 때가 있다. 그래도 학교생활은 즐겁고 행복했었다.
산 고개를 넘고 논둑, 밭둑길을 지나 돌다리가 놓인 크고 작은 시냇물 여러 개를 건너 한 시간쯤 걸어야 학교에 도착했다. 등하굣길에 동네 친구들과의 추억은 돈으로도 살 수 없는 아름다운 일들이 참으로 많았다. 우리 동네 남녀 친구 열두 명이 학교를 오갔던 길에는 재미있는 놀잇거리가 많았다. 잔디가 잘 자란 묘 마당에서 고무줄놀이하고 제기를 차고 놀다가 얄궂은 남학생이 고무줄을 끊고 달아나는 일도 빈번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뒤쫓아가 대항하는 오기도 부렸었다. 해가 저물 무렵 앞서가던 한 놈이 산속에 숨어 으스스한 괴물 소리를 내면 엄마를 부르며 울면서 책보자기 딸랑거리며 뛰었던 일도 있었다. 한겨울 온천지가 하얗게 눈이 내리면 방 안에 있던 고구마 퉁가리에서 생고구마 두어 개를 꺼내어 책보 속에 담아 가기도 했다. 눈 쌓인 산마루에 묻어놓고 푸른 솔가지를 꺾어 표시하며 눈밭에 앞모습 뒷모습을 꾹꾹 눌러 사진을 찍어 놓고 학교에 가서 하교 시간을 기다렸다. 햇빛 쨍쨍한 오후가 되면 아침에 쌓였던 눈밭은 간데없고 꼭꼭 숨겨둔 고구마가 벌겋게 알몸을 드러내며 군데군데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다른 친구들도 내가 숨긴 눈 속의 설탕 고구마 맛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증거였다. 가난한 시골에 간식거리가 없었으니 꽁꽁 언 밭의 생고구마는 요즘 흔하디흔한 바나나 맛을 능가하고도 남았던 것이다.
또 다른 추억은 3학년이 되면서 새 노트 표지에 학교와 이름을 한문으로 또박또박 써서 아버지께 보여드리고 이렇게 쓰면 맞는 거냐고 여쭤본 일이다. 그날 아버지께서 환하게 웃으시며 기뻐하시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가르쳐주지 않았는데 어찌 알고 획 하나 틀리지 않고 잘 맞게 썼다”라고 칭찬해주셨다. 그래 그렇게 자꾸 쓰고 또 다른 것도 연습해보라시며 아버지의 책장에서 작은 한문책 한 권을 내어주셨다. 근엄하신 아버지께서는 어깨 너머로 터득한 딸내미가 기특하셨던지 그날부터 아버지와 겸상하도록 엄마께 말씀하셨다. 아버지께서는 어릴 적부터 서울에서 공부하고 직장 생활하시던 중 6, 25 때문에 다시 시골에 내려왔기에 농촌 생활이 어색하기만 했던 것 같았다. 입맛도 까다로우셔서 아버지의 밥상에는 항상 바싹 구운 석쇠 구이 갈치가 있었다. 그리하여 마주 앉은 나에게 쌀밥 한술을 덜어주시며 두툼한 갈치 한 토막을 떼어주시는 것도 잊지 않으셨다. 그 사랑과 칭찬에 보답이라도 하듯 나는 4학년 때부터 졸업식 때까지 우등상을 받는 아버지의 자랑스러운 딸이 되었다. 아버지의 칭찬이 나를 춤추게 했고 은연중에 더 잘하고 싶은 생각을 키워주신 것 같다. 덩달아 엄마의 사랑도 듬뿍 받으며 봄이 되면 논두렁 밭두렁에서 피어나는 씀바귀와 어린 쑥을 캐어 엄마에게 드리면 몸에 좋은 보약 같은 나물이라고 조물조물 무침을 하는 것을 좋아하셨다.
농한기가 되면 엄마의 책 읽는 소리가 우리의 귓가에 떠나지 않았다. 엄마는 주로 ‘춘향전’을 한참 읽으신 후 “이 대목은 춘향이가 감옥에서 수절하며 이 도령을 기다리는 예기여!” 하셨다. 아버지께서는 더 구체적으로 하나하나 짚어가며 엄마와 우리가 더 잘 이해하도록 일러주시곤 하셨다. 가난했지만 행복했던 유년 시절, 문풍지 울던 겨울밤이 그립다. 한겨울 우리 집 안방에는 아버지의 자리틀이 윗목에 앉아있었다. 또드락또드락 고드래를 넘기며 왕골자리를 매시던 일도 눈에 선하다. 얼마나 꼼꼼히 하시는지 밤새도록 엮어봐도 한치가 못 넘어간다고 엄마는 성화였지만 그 솜씨와 속도는 변하지 않으셨다. 꼼꼼하신 아버지의 야무진 솜씨로 왕골자리며 수수 빗자루, 볏짚 메꾸리, 왕골 구럭 등 아버지의 손때를 거친 물건들은 누구라도 요리 보고 조리 보며 “전 선생님 작품은 명품 중의 명품이라 쓰기도 아깝다”라며 찬사가 대단하였다. 그러나 항상 바쁜 일에 쫓기는 엄마로서는 매사에 정확하고 느리신 아버지의 성격을 못 마땅해하셨다.
이른 봄 언 땅을 파서 호박구덩이를 만드는 것도 엄마의 몫이고, 산에서 땔감을 구하는 것도 엄마의 몫이었다. 어느 때는 헛간이 텅 비어 아궁이에 지필 나무가 없어 차디찬 겨울바람을 맞으며 생솔가지를 꺾으러 가시던 엄마를 따라간 적이 있었다. 마른 가지 하나라도 주워 와 엄마를 도와 드리고 싶었던 것이었다. 요즘에도 나는 우리 시골집 부엌이나 헛간에 땔감이 없어 걱정하는 엄마의 꿈을 꾸며 함께 걱정한다. 엄마를 따라다니며 솔잎을 긁어모아 엄마를 돕던 어린 시절, 남의 집 오빠들이 집채만 한 나뭇집을 지고 오는 것을 부러워했던 잠재의식의 잔재인듯하다. 아버지의 나뭇짐은 작고 엉성하여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은 불안함이 있었다. 그 와중에도 나뭇짐 속에 함께 묶여 있던 고운 진달래 꽃다발을 나에게 내려주실 때의 기쁨은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았다. 내 주먹보다 더 큰 꽃송아리가 당알당알 핀 것만 골라서 한 아름 만들어 오셨다. 옆집 숙이한테 뛰어가 자랑하며 같이 놀던 생각도 새록새록 떠오른다.
아버지께서는 집안 여기저기에 꽃을 심고 가꾸는 것도 즐겨 하셨다. 종종 중절모를 쓰고 천안에 있는 보소(譜所)에서 족보 일을 마치고 오실 때마다 새로운 꽃 묘목을 구하여 집 마당 역기 저기에 심으셨다. 이른 봄 양지바른 울 밑에서 송알송알 연분홍 매화가 피고 함박꽃, 백합, 옥잠화, 붓꽃, 참나리가 뾰족뾰족 싱그럽게 돋아나오면 어린 내 가슴을 설레게 하였다. 빨갛고 파란 새싹을 보면, 나는 아버지를 부르며 싹이 나왔다고 호들갑스럽게 뛰어갔다. 언제 벌써 여기저기 삭정이를 꽂아두시며 밟으면 안 되니 조심하라고 당부하셨다. 여름이 되면 백합꽃 향기가 윗마을까지 퍼져갈 것이라는 기다림을 주기도 하셨다. 오직 책장만 넘기며 서예만 집중하시던 아버지의 시골 생활에 꽃을 보며 가꾸는 것은 유일한 아버지의 소일거리였는지도 모른다.
어느 날 양지바른 앵두나무 밑에서 양딸기 한 그루가 자라며 딸기가 조잘조잘 열리기 시작하였다. 단단하며 토실한 딸기가 신기해서 익기도 전에 만져보고 들춰보며 아침마다 가서 살펴보고 들락거리다 동생이 먼저 따 가는 것을 막기 위해 가랑잎으로 살짝 덮어 숨겨 놓고 조바심하던 걸 생각하면 지금도 피식 웃음이 나온다. 한쪽이 빨갛게 익을라치면 얼른 따서 아버지께 먼저 드렸다. 한 입 베어 무시고 요리조리 돌려보시면서 다음엔 완전히 익으면 따야 제맛이 나는 거라고 일러주시곤 하셨다. 장독 옆 조그만 공터에 도라지도 심으셨다. 하얗고 파란 남보랏빛 도라지꽃이 올록볼록 봉우리 지면 손끝으로 꼭 눌러 톡톡 터트리는 것도 흥미롭고 즐거운 일이었다.
옆집 한 울타리 동갑내기 숙이와 각시놀이하던 일도 생각난다. 굴뚝 옆에 티밥 솥 엎지른 듯 쏟아져 내린 감꽃으로 목걸이를 만들고 목단 꽃잎 주워 족두리 쓰고, 채송화 꽃잎으로 연지곤지 찍어 각시놀이도 하였다. 시골집 고운 황토로 떡고물도 만들고 노란 골담초 꽃잎을 따 먹다가 벌에 쏘여 입술이 홍나발처럼 불어나 저녁밥도 굶고 울었었다. 고향 집 굴뚝에 저녁연기가 누구네 집에서 먼저 피어오를까를 헤며 윗마을을 바라보던 아득한 옛날, 초가지붕에 하얀 박꽃이 파도처럼 일렁거릴 때쯤이면 누구네 집이랄 것도 없이 집마다 초가지붕엔 빨간 고추들이 널려 있던 정겨운 마을, 그립고 아련한 추억 속의 풍경이다.
넋두리
강추위와 불규칙한 폭설로 사람들이 많은 걱정을 하고 있다. 좁은 대한민국 하늘 아래, 지역마다 기온과 강설량의 차가 많이 난다는 뉴스가 점점 늘고 있다. 서울에서는 푹푹 송이 눈이 쌓이는데 대전에는 맑은 하늘이니, 나같이 눈을 기다리는 사람에게는 답답함을 준 적도 있다. 드디어 긴 겨울이 끝나고 남녘의 부드러운 바람이 스며들었다. 계절은 어김없이 때를 찾아와 앙상한 가지마다 새 움이 트고, 발길 닿는 곳마다 파릇한 생명이 두꺼운 땅을 헤치며 세상 구경을 나온다.
문득 오래전 하늘로 떠난 남편의 안부가 궁금해졌다. 봄이 오는 길목에서 남편과 이야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하여 서슴없이 남편을 소환하였다.
여보! 오늘은 나와 이야기 좀 할까요? 매섭게 몰아치던 강추위가 사라지고 따뜻한 봄이 오고 있어요. 계절은 어김없이 찾아와 온갖 식물이 저마다 서로 먼저 봄소식을 알려주며 방긋거려요. 살아있다는 증거를 입증하며 사람들에게도 희망을 주는 것이 경이로운 일이네요. 오직 사람만은 한 번 가면 영영 돌아오지 못하는 것이 참으로 안타깝고 슬픈 일이라는 걸 느끼게 해요.
당신은 이 세상이 궁금하지도 않으신가요? 그리도 급하던 성격을 어디에 매어두고, 수삼 년이 지나도록 묵묵부답 꼼짝하지 않고 있나요? 이제는 눈을 뜨고 일어나 세상도 보고 가족도 봐야지요, 그토록 아끼고 사랑하던 가족이 그립지도 않은가요? 나는 오늘 유난히 당신이 보고 싶어 넋두리 좀 할게요. 그곳이 그렇게 좋은 곳인가요?
이따금 꿈속에 보이는 당신 모습이 어찌 그리 고우신지요, 와상의 흔적 없이 건강하고 생기있는 모습에 내 마음이 한결 편하다가도 다시 눈 떠 보면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아쉬움만 더해지곤 한답니다. 그러나 잠시나마 꿈에서라도 좋은 모습 보여줘서 고마워요. 병상의 모습이 아니라 건강하고 박력 있는 모습에 내심, 저렇게 편안해질 수 있다는 것을 반기며 희열을 느낄 때도 있답니다. 하늘나라의 당신 삶이 내 꿈에서와같이 일치한다면 당신은 참 행복한 삶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나는 또 어찌 그리 당신에게 너그러운지 상상을 초월하는 나에게 스스로 놀라며 아침에 일어나 헛웃음을 짓고 자책하기도 합니다. 함께 있을 때 잘할 걸 후회도 하면서 펄펄 끓는 커피잔에 쓴 웃음 한잔 휘저어 마시는 내 모습이 점점 작아지는 것 같아 부질없는 생각으로 하루를 보낼 때가 있답니다.
젊은 시절 애틋했던 당신 덕분에 맘고생 모르고 한세상 잘 살게 해줘서 고맙다는 말 전하고 싶습니다. 오로지 가족만을 위해 헌신하다 편안한 여생을 누려보지 못하고 미리 가버린 당신 생각에 회한이 밀려올 때가 많습니다. 다정했던 당신과 함께 우리 삼 남매 잘 키워 분가시켜 손주들과 알콩달콩 예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며 나 혼자 누리는 것이 미안하고 죄스러울 뿐입니다. 당신이 그토록 사랑했던 딸내미의 딸, 우리의 첫 손녀가 올해 대학에 입학하고 자랑스럽게 장학금을 받았다네요, 모전여전, 우리 집안의 경사잖아요? 당신이 항상 우리 딸내미는 천재라고 좋아하면서 서울 명문여대에 합격한 딸내미를 여기저기 자랑하며 기뻐하던 모습이 눈에 어른거려 오늘은 내가 당신께 미주알고주알 고합니다. 나는 자녀들 덕분에 모든 걸 다 누리고 노후를 즐기며 잘살고 있는데 당신의 부재에 텅 빈 가슴으로 아려오는 아픔을 오늘은 당신과의 긴긴 이야기로 풀었나 봅니다. 여보 고맙습니다. 항상 그랬듯이 그동안처럼 아이들과 나를 변함없이 잘 지켜주시고, 다시 만날 때까지 하늘나라의 축복을 맘껏 누리시고 영면하세요. 사랑합니다.
보릿고개라는 말
해마다 늦은 봄이면 70세 이상 세대들에겐 뼈아픈 추억이 생각날 것이다. 나 역시 가난한 농촌의 실생활을 경험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으니 할 말도 많고 가슴 아린 사연도 많다. 나는 1951년 격동기에 태어났다. 중학교는 20여 리 밖에 있었고 중등학교에 진학하는 친구는 한 동네에 한둘뿐이었다. 그때의 검정 교복은 선망의 대상이었고 진학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한(恨)의 표상으로 기억되고 있다. 친척 집에 거주하며 학교에 다니다가 토요일에 교복을 입고 집에 오는 친구들을 보면 한없이 부럽고 위화감마저 들었었다.
70여 년 전 우리의 삶은 녹록지 않았다. 무엇보다 먹거리조차 부족해서 보릿고개란 말이 있었고, 공부하고 싶어도 상급학교에 진학하지 못하는 뼈아픈 현실이었다. 아랫마을 윗마을 합쳐봐도 70여 가구가 채 안 되는 작은 마을이었지만, 운 좋게도 또래 친구들이 열두 명이나 있어서 재미있는 일들이 많았다. 그리고 나이에 비해 억척스러운 친구도 있었다. 나는 셋째 딸로 태어나 위로 언니가 둘이나 있어서인지 어딘가 어엿하지 못했는데, 맏이로 태어난 한 친구는 무엇을 해도 엄마처럼 척척 잘했다. 열 살도 안 됐는데도 밥을 지어야 한다며 놀이를 하다 말고 가고, 동생을 업어줘야 한다며 하굣길에도 먼저 집으로 가곤 했다. 나머지 친구들은 같은 학년으로 산 고개를 넘어 하굣길에서 추억도 많이 만든 끼쟁이, 개구쟁이들이었다. 지금도 우리는 만날 때마다 그 옛날 어린 시절을 소환하며 웃곤 한다.
그 시절엔 남아선호사상이 심했으니 남자들은 우월감에 여자들을 만만히 보곤 했다. 그래서인지 고무줄놀이하는 줄을 빼앗아 잘라 도망을 치고, 제기차기를 하면 제기를 빼앗아 달아나는 등 못된 짓을 서슴지 않던 친구들이었다. 지금에 와서는 네가 좋아서 그랬다는 둥, 그게 바로 사랑이었다는 둥 변명하며 웃곤 한다. 그때도 나는 불의에는 적극적으로 대항하며 부잣집 막내아들에게 쫓아가 넘어뜨리고 울린 적도 있었다. 집에서는 느리고 순해서 동생하고 대결도 못 했지만, 밖에서는, 더구나 학교에서는 누구한테 뒤지는 걸 싫어했다. 놀이나 학업 성적도, 그림이나 서예도 열심히 해서 항상 복도 벽이나 교실 게시판에 내 작품이 걸려있었다. 칭찬받기를 좋아하고 칭찬받을 일을 찾아서 솔선수범했다. 집에서도 칭찬받을 일이 없으면 아버지께 관심을 받기 위해 한문으로 집 주소를 쓰고 노트 표지에 학교, 반, 번 이름까지 모두 한문으로 써서 맞느냐고 여쭤보면 잘 맞았다고 함박웃음을 지으며 칭찬 해주시곤 하셨다. 그날부터 3학년인 내가 아버지와 겸상하며 좋아하는 석쇠 구이 갈치를 끼니마다 맘껏 받아먹고 자랐다. 그 시절 내 또래 여자아이들이 아버지와 겸상하는 일은 전혀 없었고, 우리 형제 5남매 중에서도 나만 혼자 유일했다.
아버지께서는 동네에서 웬만한 사람과는 대화하시는 것을 보지 못했다. 업무적으로 필요한 ‘건’이 아니면 주고받을 예기가 없었는지 마실 한번 안 가시고 조용하고 엄하신 지체 높으신 양반으로 통하던 아버지셨다. 그러나 나에겐 진달래 꽃다발도 만들어 주시고 산에서 밤을 주워 주머니에 담아오셔서 화롯불에 구워주시곤 하셨다. 그 사랑에 힘입어 늘 자신감이 넘쳤고 학급회장을 맡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그러기에 자녀들 육아도 칭찬으로 격려하며 키워야 한다고 늘 생각했다. 그래서인지 우리 3남매를 키우면서 사춘기라는 걸 모르고 자연스럽게 잘 넘긴 것을 생각하면 아이들에게 고마운 마음이 든다. 더구나 막내아들은 고등학교 2학년 때 남편이 병환으로 눕는 바람에 혼자 버스 통학을 했다. 위로 누나와 형은 고등학교 3년 내내 남편이 승용차로 통학을 시켜줬는데 막내는 그러지 못한 것이 아쉽고 안쓰러웠다. 티 없이 잘 다녀 준 것도 고맙고 사춘기에 마주한 환경에 투정 한번 안 부리고 학사, 석사과정도 마치고 전공을 살려 취업도 했다. 결혼까지도 적절한 시기에 무난히 하고 알콩달콩 예쁘게 살아는 모습도 감사한 일이다.
내가 어릴 때 보릿고개 세월을 견디며 중학교에도 갈 수 없었지만, 나는 지금 가슴에 담아둔 멍울을 지우며 새로운 삶에 도전 중이다. 어릴 때 하고 싶던 공부를 하지 못한 안타까움을 가슴에 간직 한 채, 소녀 시절에는 부모님을 도우며 시골에서 살았다. 스무 살 무렵에서야 도시로 나가 직장 생활과 결혼으로 이어지며 학교와는 영영 멀어지는 듯했다. 하지만 내 나이 일흔 살에 다시 늦깎이 성인학교에 갈 기회를 잡으며 대전 시립 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지금은 건양 사이버 대학 심리상담 치료학과에 재학 중이다. ‘인생은 칠십부터’라고 하더니 바로 나를 두고 하는 말 같다. 나는 지금 하고 싶던 학교생활과 취미생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인생 2막의 화양연화를 누리는 중이다. 대학 4년 과정을 무난히 마치고 심리상담 치료사 1급 국가 자격증을 취득한다면 백세시대 노년들을 위한 상담사로 봉사활동을 하고 싶다. 노을 진 석양이 아름다움을 몸소 실천하며 생을 마무리하려는 야무진 꿈에 부풀어 있다.
* 충남 부여 출생, «상상의 힘»(2020) 수필 부문 신인상, «대전문학» 시 부문 신인상, jwd503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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