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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에게 도시의 벽이란 수많은 사람들이 마주하는 그것과는 조금 다르다. 전양준은 거기서 트랑고 타워를 꿈꿔왔다. |
도시는 온통 벽이다. 벽은 절망이다.
그것은 어느 누구의 발길이라도 가로 막고 더 이상의 전진을 멈추게 하니까.
도시의 벽 사이로는 길이 나있다.길은 벽 앞에 선 그들에게 우회전 또는 좌회전 은근히 지시하고 훈계한다.길을 거스르는 자 온전치 못하리니 너희는 돌아가야 하리라. 그래서 아침에 집을 나선 발걸음이 화살표를 따라 우회전 또는 좌회전을 수없이 반복하다 보면 어느새 서있는 곳은 그들이 나섰던 방 안이다.
도시 인생의 하루란. 해가 저물녘, 그 완고한 벽도 감출 수 없는 틈 사이로 석양이 새어든다. 우회전 또는 좌회전을 반복하던 피곤한 하루는 길게 늘어지는 벽의 그림자를 따라 스르르 눈이 감긴다.
이제 벽을 탐할 기회다.
그래, 가능성은 언제나 열려있어. 오른다. 매달린다. 가로 지른다. 아, 아득한 추락. 허우적허우적. 너무 미끄러웠나봐. 하지만 좋았어. 나는 수직을 본거야. 머리를 털고 일어난 이에게 잠시라도 벽은 절망을 넘어선 초월의 대상이 된다.
가자, 도시 알피니스트.
이제 다시 아침이니까.
트랑고를 꿈꾸다
전양준을 만나러 가는 저녁, 지하철 문이 열리자 하루 종일 참았던 갑갑한 숨을 토해내듯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사람의 파도를 넘자 수많은 벽이 나타났고 그 사이를 뛰어 돌자 횡단보도의 적색등이 가로막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나타난 계단은 한 걸음에 두세 개씩 쿵쾅거리며 내려가야 했다. 그곳에 미약한 형광등 그림자를 늘어뜨린 채 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 시계를 봤다. 그는 약속시간보다 정확히 15분을 더 기다렸다.
“전어 어때요? 가을인데.”
어쨌든 공통의 주제를 찾아 그것이 산이건 서울이건 전어건 초면의 어색함을 대체할 무언가가 필요했다. 하지만 지하철이 토해낸 사람들은 모두 이곳으로 몰려왔는지 저녁시간 전어집은 붐볐고 우리는 초면에 가끔 목소리를 높여야 했다.
그의 고향은 서울. 어릴 적 골목 사이를 누비며 뛰어놀던 곳도, 이제 두 아이의 아빠가 되어 삶의 보금자리를 꾸민 곳도 역시 서울이다. 서울은 도시다. 그도 아침마다 도시의 길 사이를 돌아 벽과 맞닥뜨릴 테다. 하지만 그에게 도시의 벽이란 수많은 사람들이 방향을 트는 그것과는 조금 다르다.
“일이 일찍 끝나기 때문에 저녁 시간은 많아요. 대신 아침에 출근이 일러서 요샌 좀 힘들더라고요.”전양준은 원정등반을 마치고 돌아온 바로 다음날 직장에 복귀했다.
건물 외벽청소를 하는 그에게 벽은 곧 일터로, 하루 종일 스스로 시계추가 되어 진자 운동을 하고서야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 트랑고 타워는 언뜻 “조금 긴 출장”이라고 여겨질지 모르지만 사실 그곳은 그에게 누구보다 남다른 곳이었다.
”어릴 적부터 트랑고 타워는 꼭 한번 가보고 싶은 곳이었습니다.
그 생긴 모양이나 이름, 하물며 등산장비 브랜드 ‘트랑고’까지 온통 선망의 대상이었죠. 하지만 돌아와 생각해 보니 첫 원정등반에서 정상에 선 것은 순전히 행운이었습니다."
그가 “트랑고 꿈”을 꾸게 된 건 하루 이틀 전의 일이 아니다.
◇ 첫 원정등반인 트랑고 타워 등반에서 그는 정상에 선 기쁨 보다 앞으로 배워나가야 할 것이 더 많다는 걸 느끼고 돌아왔다. |
1988년 봄 전양준이 오산전문대 산악부에 든 이유도 순전히 “벽을 오르고 싶기 때문”이었다.
”어릴 적부터 집에 등산장비가 많았어요. 형이 등산을 좋아해서 산 잡지며 장비를 이것저것 집에 들여놓았거든요. 그런데 산악부에 들어가니 첫 마디가 워킹 산행만 한다는 거예요. 물론 신입회원들에게 하는 의례적인 거짓말이었지만 심각하게 고민했었죠.”그는 인수봉 대슬랩에서 한 첫바위에서 전부터 신던 크레타슈즈를 가져갔다.
”정상에서 자장면을 판다”는 선배들의 농담을 처음부터 믿지 않을 정도로 그에게 인수봉은 익숙한 곳이었다.
하지만 책을 통해 산을 접한 전양준에게 몸으로 부닥치는 벽은 만만치 않았다.
선배들이 “어째 저런 녀석이 산악부에 들어왔나?”하며 혀를 찰 정도였으니까요. 어디에서든 “힘 좋다”는 말을 빼놓지 않고 듣던 그가 나름대로 준비해간 “첫바위”였지만 처음부터 보기 좋게 미끄러졌다. 원인 분석 끝에 밝혀낸 이유는 닳고 닳은 크레타슈즈 때문이었다.
“새 신을 사고 나서 인수봉 아래서 한 달을 살았죠.” 그는 “너무 재미있어 미쳐버렸었다”고 당시의 상황을 설명했다. 학교 특성상 2학년 2학기에는 대부분 취업을 나가기 때문에 1학년 3개월만 배우고 나면 다음 해에 선등을 서서 후배를 가르쳐야 했다. 하지만 “미쳐버린” 그에게 그런 건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1994년 군 제대를 한 전양준은 집 근처 노량진클라이밍센터를 찾았다. 1990년대 초 문을 연 노량진 클라이밍센터는 당시 바람이 불기 시작한 자유등반의 메카와도 같은 곳이었다.
”박현규, 손정준, 이근택씨 등 선배들이 등반하는 모습을 보기만 해도 실력이 느는 것 같았어요.” 손정준, 김상일씨 등과 함께 외벽 청소일을 시작하게 된 것도 그때였다. 하지만 1995년 태국 프라낭 해벽에서 5.13a급 등반을 성공하고 돌아온 전양준의 마음속엔 트랑고가 있었다.
”박현규씨가 트랑고 타워를 자유등반으로 오르자는 제안을 하기도 해 설레었죠. 1988년 볼프강 귈리히와 쿠르트 알베르트가 자유등반으로 오른 기록을 보니 트랑고 타워 유고루트 최고난이도가 5.13a더라고요. 나도 해 볼만 하겠다고 생각했지만 순진했던 거죠.” 하지만 그에게 원정 등반 기회란 쉽게 오지 않았다. 대신 청악산우회라는 큰 울타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와 함께 프라낭 해벽을 등반했던 부근호씨가 그를 끌어들인 것이었다.
”스키를 배우고 싶어서 장비를 전부 사두었는데, 그해 겨울에 부근호에게 전화가 왔어요. 스키는 나이 들고 배워도 된다”며 꼬드겼죠. 사실 그때까지 빙벽등반은 한 번도 안 해봤습니다. "설악산 소승폭포 초등반 등 “빙벽등반 잘하는 산악회”로 알려진 청악산우회에 들었으니 분명 남다른 노하우나 등반기술 같은 것을 전수받았을지도 모른다.
1997년 토왕성폭에서 처음 열린 설악산 빙벽등반대회에서 그는 빙벽등반 2년 만에 2위에 올랐기 때문이다. 이후 지금까지 토왕성폭에서 열리는 빙벽대회에 항상 루트세터로 참가할 만큼 그의 등반 기량은 나무랄 데가 없지만 전양준은 산악회가 빙벽등반으로만 알려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
한사람의 열 걸음보다 열 사람의 한걸음
“선배들은 빙벽 뿐 아니라 대승폭포 좌우벽, 설악산 직선등반 등 당시에 앞선 등반을 해 왔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강조해 온건 바로 팀워크지요.”
1971년 창립해 34년을 이어온 청악산우회는 오랜 전통 못지않게 그에 따르는 고집도 있었을 터, 실내암장에서 운동하며 그에 익숙해 있던 전양준은 쉽게 팀 속에 자신을 녹이지 못할 무형의 벽도 있었을 것이다.
“설악산 동계등반 때 콕헬이 부족하다는 전화 한 통화에 퇴근하고 서울에서 속초까지 콕헬을 들고 내려오는 선배들을 보고 [등반이 전부가 아니구나]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때 등반을 잘 하는 것보다 지원하는 역할이 더 중요한 것이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시간이 걸려도 모두 함께 가는 것이 더 기쁜 일이죠.” 그는 누구건 교육받고 노력하면 등반을 잘 할 수 있다고 믿는다. 몸무게 80kg가 넘어 턱걸이 하나 조차 힘들어하던 그의 후배를 1년 만에 5.12급 코스를 선등할 만큼 바꾸어 놓았다. 천천히 함께 갔기 때문이다.
◇ 한때 5.13a급까지 자유등반에 능했던 전양준은 원정등반 중에도 틈틈이 주변 외국 등반대와 함께 볼더링을 했다. |
“양준이는 벽에서 줄 정리 정돈을 아주 잘해요. 덕분에 등반이 수월했죠.” 트랑고 타워에서 2달간 함께 등반했던 김형일씨는 전양준을 두고 그렇게 말했다. 10여년 넘게 꿈꿔왔던 벽 트랑고 타워로 떠나며 전양준은 사실 등정보다 “경험”을 염두에 두었었다. 그래서 스스로 지원조를 자청했었다.
“최승철이가 1997년 그레이트 트랑고를 다녀왔을 때 등반 중 가장 중요한 게 ‘줄 처리’라고 했어요. 그깟 줄 처리가 대수냐고 생각했었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그녀석이 정말 큰 노하우를 알려줬던 거죠.”
장마철과 겨울이면 일을 쉬는 탓에 전양준은 설악산에서 몇 달씩을 지낼 만큼 남들보다 시간 여유가 많았다. 소토왕골 암장을 개척해야겠다고 생각한 것도 그런 기회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가 설악산에서 느낀 건 달랐다.
”설악산에 오래 있다 보면 사고가 나는 사람들을 가끔 보게 되는데, 대부분 아주 사소한 실수로 그렇게 되는 것 같아요. 어려움을 추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안전이 더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전양준은 1999년 결혼한 이후 산행이 뜸했다. 물론 그것은 생활의 무게 때문이었다.
”작년 이맘때만 해도 원정등반이란 생각도 못했습니다.
하지만 등산학교 강사를 하며 저보다 나이든 분들이 암벽에 매달려 열정적으로 배우는 모습을 보니 제 생각이 모두 핑계에 지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노력하다 보니 기회가 생기더군요.” 작년부터 코오롱등산학교 강사로 활동을 시작한 전양준은 그곳에서 다시 한번 자신을 추스르고 운동을 시작했다.
그물이라는 벽을 만날지라도
”포터들은 한국등반대가 강하다고 말했지만 올 여름 트랑고 타워에 몰린 외국 등반대를 보며 아직 배울 게 많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슬로바키아에서 온 도도 코폴드 같은 이들은 침낭도 없이 7박 8일간이나 신루트를 개척하며 그레이트 트랑고를 등반 하더군요. 그들이 결코 무모하게 올라 운 좋게 성공한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그는 외벽청소를 할 때 확보지점이 되는 플라스틱 통을 예를 들며 설명했다.
”물을 채운 플라스틱 통을 확보지점으로 삼아 벽에 매달리는 것은 위험한 모험 같지만 사실 충분히 안전하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일이거든요. 그들이 트랑고 타워를 자유등반으로 오르거나 가벼운 배낭만을 지고 도전할 수 있었던 것도 모두 경험에서 나온 배짱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그의 목소리가 술잔이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만큼 굳고 무거웠다. 그러고 보니 전양준은 인터뷰 내내 한번도 잔을 ‘꺾어’마시지 않았다.
”원정등반 중 아이들 생각도 많이 났지만 아내가 더 보고 싶었어요. 가족의 소중함도 더 많이 느끼고 왔죠. 산에서는 날씨가 나쁘면 아무 것도 안하고 쉬었는데 돌아와서는 그렇게 할 수가 없어요. 그런데도 원정 후유증 같은 건지 요샌 게으름을 피우게 되네요. 점심시간이면 함께 일하는 분들과 내년에 요세미티를 등반하자고 이야기하곤 하지만 정작 그때 가봐야 알겠죠.” 1999년 청악산우회에서 도봉산 선인봉에 청악길을 개척했을 때 초등자는 전양준이었다.
도무지 풀리지 않는 한 스텝에서 닥터링(바위면을 깎아 홀드를 만드는 것) 한번이면 쉽게 올라설 수 있었지만 그것은 죽기보다도 싫은 일. 결국 수 없는 추락 끝에 해답을 얻은 그는 바위에 아무런 상처도 남기지 않고 올라설 수 있었다.
’깨가 서말’이라는 가을 전어는 이제 몇 점 남지 않았다.
도시의 한 귀퉁이에서 바다를 마시던 사람들도 하나 둘 우회전과 좌회전을 반복하며 집으로 돌아갈 터였다.
악수를 하고 허정허정 네온사인 사이를 걸어가는 전양준의 뒷모습에서 퍼덕이는 전어 한마리가 떠올랐다. 도시 알피니스트에게 삶이란 바다다. 그래서 그들의 삶에는 정해진 길이 없지만 봄이면 난류를 타고 북상하는 전어처럼 시선은 늘 일정한 방향으로 흐른다. 풍성함이 유혹하는 가을, 일상과 생활의 무게가 그물의 모습을 하고 그들 앞에 벽으로 설 지라도 또 다른 꿈을 놓지 않는 건 벽을 탐하는 그들의 본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