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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왕폭하단을 단독등반하는 조금석 |
현 명 식
1985년, 우리 청악산우회는 토왕폭 등반을 목표로 하여 사전 준비를 철저히 하였다. 훈련대원을 선정하고 장비를 구비하고 겨울시즌 내내 시간 여유가 있는 3명의 회원을 12월 25일부터 구곡폭 밑에 민박을 얻어 합숙시켰다. 너무도 높게만 보이던 토왕폭이였기에 철저한 훈련만이 성공의 길이라 생각하고 장시간의 훈련에 돌입했다.
토왕폭 등반예정일은 2월 2일 일요일 이었다. 1월 26일까지 31일간 4명의 회원이 훈련에 참가하였고 주말과 휴일에는 모든 회원들이 등반과 지원에 열의를 다했다. 그동안 약 200회의 구곡폭을 등반하였고 처음 2시간 40분(2인 1조) 소요되던 등반시간이 훈련끝 무렵엔 하강까지 35분으로 줄었다. 결국 청악은 86년 2월 2일, 10일 두차례 토왕폭을 등반 하였다. 그 해(85-86시즌)에 우리는 그때까지 남들이 사용하지 않는 진보된 등반기술과 장비 System을 나름대로 터득하였고 체계화 하여 글로서 회지(맑은뫼13호)에 발표하였다.
남들이 아무리 좋다하여도 자신에게 꼭 좋을 수만은 없는 것이다. 스스로 자신에게 좋은 것을 찾는 방법은 스스로의 경험과 노력뿐일 것이다. 토왕폭 등반후 청악의 대화는 사시사철 빙벽등반 이야기 뿐이라 할 정도로 겨울에 집착되어 있었다. 그로 인하여 신입회원들은 선배들의 대화 속에서 빙벽등반에 대한 호기심과 친근함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우리 팀에는 경험이 풍부하고 겨울에 시간이 많이 나는 건축업에 종사하는 회원이 유난히도 많았기에 빙벽등반에 관한한은 인적자원이 풍부하였다. 새로운 회원이 입회하여 겨울을 맞으면 선배들이 의논하여 신입회원에게 맞는 장비를 선택 권유한다. 먼저 선배들이 같고 있는 장비를 주어 한번쯤 등반을 시켜보면 가장 적합한 장비를 선택 할 수 있다.
픽켈(바일, 아이스 햄머등)의 경우는 신입회원의 체격, 손의 크기, 손힘등을 감안하여 픽크의 각도, 해드부분의 무게, 샤프트의 길이와 굵기, 샤프트의 각도, 샤프트의 재질과 모양, 픽켈전체의 밸런스등을 살펴 적당한 장비를 선택하게 한다. 동계등산화는 프라스틱 이중화를 주로 선택하나 브랜드마다 장단점과 사용중에 인너 부츠의 변화, 발목의 길이, 발목의 꺽임, 발의 크기와 볼의 넓이를 감안하여 선택했다.
크램폰은 등반 스타일에 따라 선택한다. 빙벽등반, 베르글라 등반, 믹스 클라이밍등에 따라 사용되는 아이젠이 다르고 부츠에 탈착 장식이 편하고 견고한 것, 포론트 포인트의 넓이, 각도, 모양(가로포인트, 세로포인트)을 보고 필요한 것을 선택하게 하는 것이다. 장비 하나하나에도 선배들의 경험이 반영되어 자신에게 적합한 장비를 구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장비 사용 방법에서도 많은 경험에서 터득한 방법으로 보조용구를 제작 조립했다. 예를 들면 손목걸이는 몇미리 넓이의 테이프 슬링을 어느 정도 부드러운 것을 사용하여 샤프트 길이보다 몇센티 길게 만들며 손목 걸이에 바일의 무게 중심을 맞추어손에서 이탈시에도 샤프트가 손에서 멀어지지 않도록 한다든지 하는 방법을 설명해 주고 만들어 부착케 했다.
안전벨트에 장비를 착용하는 방법은 실전에서 가장 사용하기 편한 방법을 알려주고 스스로 경험을 쌓아 가며 변경하도록 하고 있다. 실제 등반기술을 가르칠 때는 먼저 낮은 곳에서 장비를 착용하고 픽켈 스윙시나 프론트 포인팅시 불편한 점이 없는가를 살피고 빙벽의 각도, 강도, 습도, 빙질등을 감안하여 그때 그때에 필요한 스윙폼을 설명하고 완전한 스윙의 감각을 익히게 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스윙폼이다. 예를 들면 팔을 곧게 뻗어 얼음에 픽크가 박힐때까지의 과정을 어깨와 팔꿈치, 팔꿈치와 손목, 손목과 손가락등 구분 동작으로 정확한 폼을 가르친다. 어깨에서 팔꿈치부분을 스윙시 픽켈의 속도에 의한 힘을 전달하게 되고, 팔꿈치에서 손목부분은 정확한 지점에 가속을 시키며 손목은 픽켈이 얼음에 닿는 순간 픽크의 각도를 조정하여 정확히 꼽히도록 하기 때문이다.
프론트 포인트의 자세는 프론트와 발뒤꿈치의 각도. 빙질에 따른 발의 위치, 넓이 등을 실습시킨다. 이러한 기술은 누구나 알고 있는 것이며 등반책자에 수없이 설명되는 것이다. 진정 필요한 것은 본인 스스로 등반을 하게 하고 모든 등반기술과 방법을 스스로 터득하게 하는 것이다. 때로는 타인의 등반 자세를 보고 선, 후배가 토의한다던지 비디오 촬영후 모니터를 통해 토의하여 자세를 교정하는 방법등을 사용하면 효과를 볼 수 있다.
그러나 청악이 가장 많이 이용하여 효과를 본 방법은 일대일의 교육도 아니고 일대이 또는 일대삼의 교육이다. 신입회원 1명과 노련한 선배 1명이 후등자가 되어 나란히 오르며 순간 순간 변하는 얼음에 가장 필요한 동작을 설명하는 것이다. 바로 옆에서 가장 적합한 픽켈의 가격 지점이나 프론트 포인팅의 지점까지 집어주며 어느 각도로 스윙 또는 킥킹하라고 설명하는 것이다.
또한 확보물 설치나 회수도 얼음의 모양을 보고 가장 적합한 지점을 정해주고 확보물 설치 방법을 시범보인다. 예를 들면 설치 지점에 확보물 종류에 따라 어느만큼 컷팅을 하며 햄머의 픽을 카라비나홀에 어느 방향으로 넣어 돌려야 픽크가 부러지지 않고 힘을 받는지, 스나그의 경우 타격을 하다보면 나선의 방향으로 약 180도 정도 돌아가니 카라비나 홀을 미리 180도 돌려 놓고 타격을 한다든지 하는 등 등반 전반에 관한 것을 같이 경험하여 오르는 것이다.
이런 방법은 많은 인적자원이 필요하나 가장 효과적이다. 청악은 이 방법을 가장 많이 이용하고 있다. 확보 시스템도 같은 방법으로 실제로 보여주며 설명을 해준다. 쥬마를 이용한 방법이라든지 션트를 이용하여 손을 별로 사용하지 않고 안전벨트에 걸어 몸을 이용하는 방법이나 선등자나 후등자 확보시 손발의 체온 유지 방법, 등반시 손발이 얼어올 때 보온 발열 방법에서부터 등반전 보온 방법등을 선배등의 경험을 이야기 해주고 실전을 통하여 스스로 깨닿게 하는 것이다.
또한 신입회원들의 눈에 비친 선배들의 모습에서 자신감을 얻을 수 있다. 간혹 등산을 하다보면 앞을 가로막는 바윗길에 멈추기도 했다. 이때 앞서가는 사람이 자연스럽고 쉽게 오르면 뒤따라 가는 사람이 불안감을 느끼지 못하고 쉽게 통과 할 수 있으나 앞서가는 사람이 발을 딪지 못하고 벌벌 떨고 있다면 뒤에 오는 사람들의 마음은 공포로 가득차게 되며 쉽게 통과할 곳도 어렵게 가야했다.
이렇듯이 선배들의 스스럼 없는 자신감 넘친 등반 모습에서 빙벽등반에 대한 공포감이 사라지고 얼음과의 첫 대면에서도 자신감 있는 스윙과 킥킹의 자세가 나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방법이 아무리 좋다 하여도 본인 스스로가 등반할 수 있는 시간을 많이 갖어야 하며, 그 시간을 효과적으로 이용하려면 어느정도 수준에 이를 때까지는 선배들이 신입회원을 위하여 많은 희생을 해야했다.계획에서 보고서까지를 등반이라 한다면 짧은 겨울 시즌에 실제등반 행위 시간은 더더욱 짧다. 이 짧은 시간에 신입회원들을 가장 많이 투입해야 하는 선배들의 따뜻한 보살핌이 필요하다. 결론은 등반 기술보다는 선배들의 따뜻한 정이 지금의 청악을 만들었고 이어 나가고 있는 원천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조 금 석
내가 친구의 소개로 청악에 입회한 것은 1987년 가을의 문턱이였고 회원들간의 대화는 온통 빙벽등반 이야기뿐이였다. 대화속에서 어렴풋이 다가오는 환상속에서 빙벽등반의 모습을 볼 수 있었고 가슴이 설레이기도 했다. 직장문제로 시간이 별로 없던 나에게는 그 가슴 설레임도 그림의 떡이었다. 딱 한번, 88년 설날연휴에 토왕폭 등반에 나선 선배들을 따라 (그때 크램폰과 픽켈을 처음 만져 보았고, 등반은 상상도 못하였다. 아마도 내가 바로 하산하지 않았다면 등반을 가르쳐 주었을 것이다.) 토왕폭에서 1박 2일 등반모습만 바라 보았다.
선배들은 벌써 한달이 넘도록 설악의 구석구석을 누비며 많은 등반을 하고 있었다. 그높은 빙폭을 스스럼 없이 오르내리는 선배들이 한없이 존경스럽고 그렇게 많은 시간을 내어 등반을 하는 선배들이 한없이 부러웠다. 나의 마음 속엔 이미 강열한 그 무엇이 나의 자아를 장악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봄부터 가을까지 선인봉과 설악산을 오가며 등반을 하는 회원들은 등반이 끝나 캠프에 둘러 앉기만 하면 썰렁한 겨울이야기와 동계등반 이야기로 밤을 지새우니 나는 대화에 끼어들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나는 이미 구곡폭과 토왕폭 등 수많은 빙폭들을 등반한 것과 같은 친근감을 느끼었고 머리속에 등반 상황을 훤히 그려 낼 수 있을 정도였다.
그해 겨울 직장을 옮겨서라도 선배들과 같이 한겨울을 보내리라 다짐하였고 목돈을 마련하여 형님들께 맡기로 필요한 동계 장비를 구입해 달라하였다. 89년 12월 31일 부터 시작되는 청악의 동계 계획은 90년 2월 28일에 끝나고 있었다. 청악의 신정 연휴의 공식 등반이 끝나자 몇몇 선배들은 바로 토왕으로 옮겨 동계 캠프가 시작되었다. 수없이 많이 들어본 빙벽등반이 나의 경험으로 쌓여 있었고 든든한 선배들의 등에 업혀 토왕폭을 올랐다.
자세한 등반기술이 없었던 나는 몇가지 실수도 범하긴 했지만 (토왕폭 등반 후 소나무에 확보하라고 운희가 준 긴 슬링도 잊은채 평평한 얼음에 스나그로 확보하고 구부정한 자세로 후등자 확보를 하였음) 단번에 토왕을 올랐고 약속대로 운희는 그해 겨울 나의 당번이 되었다. 토왕을 단번에 오른 것은 절대로 내가 천부적이거나 우연은 아니다. 청악은 일종의 세뇌 교육이라 할 수 있을 만큼 일년 내내 빙벽등반 이야기가 끊이지 않는다. 어떠한 사석에서도 회원둘만 모이면 겨울이야기 뿐이다.
또한 등반엔 선후배가 없다. 위계질서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등반을 할 땐 아무리 후배라도 등반에 최선을 다할 수 있도록 장비 구입에서부터 교통편, 식사 문제까지도 최고 선배라도 뒷바라지 했다. 내가 직장이 늦게 끝나 등반에 참가하기 어려울 땐 모두들 설악으로 떠났다 해도 어느한 선배라도 남아 밤새워 달려서라도 등반에 참여 할 수 있도록 해준다. 새벽에 선배들이 식사를 준비하고 후배들은 등반 준비를 한다. 바로 이런 것이 자연스러움으로 정착되었다. 등반을 위해선 모든 회원이 하나가 되는 것이다.
모든 등반 기술을 배워 등반에 적용하는 것보다는 청악은 선배들의 언행하나하나에서 후배들의 가슴속에 청악의 정신으로 새겨지고 있으며 그것이 기술 등반에까지 승화되고 있는 것이다. 지금의 나 자신도 어는 후배의 등반을 위해서 한겨울 내내 라면을 끓일 각오는 항상 되어 있다. 선배로서 후배에게 등반기술을 가르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이 본인 스스로의 경험이니만큼 할수만 있다면 짧은 우리나라 겨울 기간동안 후배에게 조금이라도 많은 등반경험을 쌓게 해 주는 것이 선배로서의 역할일 것이다.
김 혜 영
청악에 입회한 겨울, 우연히 죽음의 계곡 100미폭을 오른 후로 빙폭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암벽등반도 해본적이 없는 본인에게 빙벽등반은 그야말로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 후로 빙벽밑에서 언제 한번 올려주지 않나 하며 빙벽만 쳐다보는 세월로 이어졌다. 등반에 있어서는 전혀 아는 것이 없었다. 물론 산에는 여기저기 다니기는 했어도 전문등반에 대한 경험은 전혀 아는 것이 없었다. 암벽등반하는 모습조차 본적이 없었다. 그런데 빙벽등반을 시작한 것이다.
가장 먼저 문제가 되었던 것은 장비 착용이었다. 무슨 장비가 그리도 많은지 정신이 없을 지경이었다. 또한 무슨 장비를 써야하는 줄도 몰랐다. 그래서 장비이름을 배우는 것부터 시작되었다. 장비착용과 함마 고정하는 방법도 선배님들이 자세히 가르쳐 주었다. 빙벽장비는 암벽장비에 비해서 많기 때문에 장비 착용을 잘 하지 않으면 등반시에 많은 불편이 따르게 된다. 청악은 나름대로 터득한 장비 착용법이 있었고 그 덕분에 쉽사리 장비사용에 숙달될 수 있었다.
그 다음은 훈련 방법이었다. 국내의 빙벽 등반 장소는 몇 개 안될 뿐더러 일요일에만 하기 때문에 충분히 등반할 여건이 되지 못하였다. 더우기 모두들 구곡폭으로 등반을 갔으므로 초보자가 쉽게 훈련할 만한 장소가 아니었다. 결국 구곡폭포 아래에 짧게 얼은 곳에서 프렌치 테크닉을 배웠다. 약 1미터되는 얼음을 오르락 내리락 하면서 연습했다. 한나절을 걷다 보니 다음은 픽켈 찍는 법을 하라는 지시였다. 빙벽등반에서 픽켈을 얼음에 찍는 것은 매우 중요한 부분이었다. 라켓 가지고 스윙연습하듯이 픽켈가지고 얼음에 찍는 방법을 배워나갔다.
이제는 실질등반을 해보고 싶었지만, 일요일에는 초보자가 등반할 여건이 안되었다. 다행히 구곡폭포 앞의 은미네 집에 베이스 캠프를 정해 놓고 선배들이 등반을 하였기에 평일에도 등반할 수가 있었다. 그래서 평일날 구곡폭을 찾아갔다. 구곡폭은 사람도 없고 한산하였기에 큰 부담없이 등반을 해 볼 수 있었다. 첫 구곡등반의 날이었다. 모두들 염려 되었던지 폭포위에는 두사람이 먼저 올라가 있고, 운회선배가 옆에서 함께 등반하며 지도해 주었다.
너무도 긴장한 탓이었는지 어떻게 올라갔는지 모르겠다. 여하튼 올라갔다. 그리고 이제는 구곡폭포 등반대원이 되었다. 빙폭등반에 있어서 팔힘은 커다란 문제였다. 얼음에 아이스햄머 박는 기술도 중요했지만 힘도 무시할 수 없는 요소이다. 팔힘을 키우기 위해 집에서 스윙연습을 하였다. 팔 전체를 이용한 스윙도 중요하지만 팔목을 이용한 스윙도 중요하다는 것도 배웠다. 하루에 최하 500번씩의 스윙연습을 하려고 매우 노력했었다.
다음은 등반지식에 대한 궁금증이 싹트기 시작했다. 그 당시는 등반서적도 거의 없었다. 선배로부터 손경식씨가 지은 등반백과사전을 하나 물려 받았다. 교과서는 읽지도 않았는데 그 두꺼운 책을 두달에 걸쳐 읽었었다. 마침 이때에 산악회에서는 등반지식을 높이기 위해 1년에 두번씩 등반지식에 대한 시험을 보았다. 집회에서 시험문제를 풀고 점수를 발표하고, 고득점자는 등반점수에 가산점을 주었고, 또한 시험이 끝난 뒤에는 시험문제에 대한 설명이 있어서 점수와 상관없이 몰랐던 등반지식을 많이 알수 있었다.
청악산우회는 모든 등반을 점수화해서 고득점자에게 총회때 상품을 준다. 등반지식과 등반능력과는 꼭 일치하지는 않았다. 등반 실력이 매우 뛰어난 이모선배는 시험점수는 거의 꼴찌에 가까왔다. 단순히 집회만 하는 것보다 시험보는 날은 훨씬 더 재미있었다. 겨울이 끝나고 봄, 여름, 가을은 암벽등반의 계절이다. 물론 주말은 선인봉으로 향했고, 때때로 설악산으로 향하기도 했다. 암벽등반 역시 새로이 시작하는 등반이었다.
그러나 빙벽등반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겨울등반을 위해서 가을부터 스윙연습을 시작할 것을 선배로부터 종용받았다. 그래서 가을이 되면서 아이스햄머를 꺼내서 휘두르기 시작했다. 이제 구곡폭도 몇번 올랐고, 실폭도 몇번 올랐었다. 그러나 언제나 등반이 마음에 드는것은 아니었다. 등반실력도 별로 향상되지 않는것 같았다. 이 때 청악의 토왕폭 5개조 동시등반계획이 발표 되었고, 이를 위한 훈련에 참가하게 되었다. 봄, 여름 가을은 체력훈련과 빙벽등반에 필요한 근육 훈련이 있었다. 달리기와 스트레칭이 기본이 되었고 특별체조로 하였다. 퇴근후 남산에 모여서 하기도 하고, 동국대대 운동장에 모여서도 하였다. 이 때 참여했던 것이 그 해 등반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겨울이 되면서 5개조 등반을 위한 실전 등반훈련이 시작되었다. 일단 시간이 나는대로 서울 근교에 있는 구곡폭포로 달려들 갔다. 시간이 많았던 나는 평일날 구곡폭포에서 등반을 할 수 있었다. 이 때 가장 많이 배운 것은 등반시의 장비다루는 법을 배웠다. 확보물을 설치하고 회수하는 법, 등반중 휴식하는 방법, 빙벽에 매달려 자일처리 하는 방법을 선배들로부터 자세히 배울 수 있었다. 다른 사람이 등반하는 모습을 선배님들과 같이 보면서 잘못된 부분이 있으면 나와 비교하며 나에게 잘못된 점을 가르쳐 주었다. 그래서 구곡폭을 선등하게 되었고, 당시 구곡을 선등할 수 있는 여성은 한 두명에 불과했다.
항상 충분한 실력이 갖추어진 뒤에 등반을 한다는 것이 청악의 정신이었다. 5개조 등반계획을 세웠을 때도 이 정신은 뚜렸했다. 만일 훈련을 게을리하는 대원은 5개조가 안될지라도 가차없이 등반대원에서 제외시킨다는 방침이었다.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선배님들의 후원이었다. 평일이든 주말이든 필요로 하는 곳에는 언제든지 달려와 주었다. 등반하는 대원이나 밑에서 지켜보는 대원이나 모두들 등반에 참여한다는 생각들이었다. 이러한 선배님들이 있었기에 나의 등반이 가능하였다.
사실 경험도 능력도 없는 내가 그 만한 등반을 하리라는 것은 한번도 기대해 본 적이 없었다. 다만 여러 선배님들이 이끄는 데로 따라가다 보니 어느덧 여러 등반을 해보게 된 것이다. 무리하지 않고 서두르지 않으면서 훈련시켜나가는 것이 본인에게도 팀에도 무리가 없었던 것이다. 등반을 못한지도 어느새 3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 새삼스럽게 생각나는 부분들도 많이 있다. 그동안 잊혀 지내던 생각들도 떠오른다. 선배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으면서도 후배들에게는 아무것도 해 준것이 없다는 것이 팀에 미안할 뿐이다.
카나디안 록키의 프로펫셔를 등반하는 김혜영